2016년 보브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탔다. 하루키는 그때에도 노벨문학상에 거론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매년 노벨문학상에 거론되는 한국문인 중에 고은 시인이 있었다. 한국시는 외국의 언어로 표현이 되지 않아서 힘들다는 말을 한다. 노벨문학상은 노벨상 중에서 가장 보수주의가 강하다.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보브 딜런 이전에도 문학 이외의 주제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경우가 일곱 명이나 있었다. 그중에는 윈스턴 처칠도 있었는데 회고록으로 문학상을 받았다. 자신도 놀라고 어안이 벙벙했다고 전해진다. 또 대부분의 철학가들이 철학서적을 통해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을 거절하면서 그 뒤로는 묘하게도 아직 철학가들에게 상을 수여하지 않고 있다. 보수적인 한림원에서 흥! 하며 철학가들에게 벽을 쳐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한국의 시는 한국(만)의 정서를 가득 담고 있어서 외국의 언어로 표현이 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전문가들은 말한다. 윤동주의 서시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부분을 어떻게 영어로 표현을 할 것인가. 이것은 터무니없고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사람들은, 아니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때 맨부커상을 받은 '채식주의자'를 (상을 받기 전에)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것이 과연 영미문학으로 어떻게 표현이 될 것인가. 한강의 독특하고 돌을 삼키고 걸음을 걷는듯한 그 문체를 어떻게 영어로 가능한 것인가. 게다가 번역을 했던 데버라 스미스는 한국말은 거의 하지도 못 했다. 하지만 영어로 번역이 가능했다. 언어가 가지는 장점이자 단점을 번역가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영화 기생충의 짜파구리를 영어로 어떻게 번역을 할 것인가? 하지만 해냈다.  

하루키의 결락이 가득한 문체는 영어는 물론이고 러시아어로, 체코어로, 덴마크어로 번역이 되어 나가고 있다. 당연하지만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고 있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 하루키 문학이 한국으로는 늦게 들어왔다. 이미 전 세계는 자기네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하루키의 문학으로 머릿속에 맛있는 밥을 채우고 있었다. 

지금 세계는 의역의 시대다. 정서를 운운하지만 결국에는 상을 받을 시기가 되면 관계자들은 읍소와 약간의 강압으로 그들에게 어필하지만 문학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펜의 끝을 통해 사람을 그려내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는 몹시 고통스러운 흐름과 맹점이 있는데 그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야기, 상상을 통해 창작된 이야기의 성립과정을 잘 알고 있다면 벽을 허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시는 타국어로 번역이 안 돼, 불가능해, 표현이 아쉬워.라고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한국의 시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시인의 시집을 한 권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을 좀 더 다르게 풀이를 하면 자국민도 잘 알지 못하는 한국 시인의 시를 다른 나라에서 노벨문학상을 수여할 만큼 가치를 높여주는가에 접근해봐야 한다. 

한림원에서도 보수주의가 가장 강한 분야인 노벨문학상을 보브 딜런에게 수여를 했다. 이미 보브 딜런은 미국인들을 넘어 자유를 갈망하는 전 세계인들의 가슴에 들어와 있었다. 하루키 역시 자국민이 가장 사랑하고 있다. 물론 우파는 제외하고. 그가 책을 한 권 내면 기본적으로 10만 부가 금방 동나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2015년 한 해 시집은 총 2000권 정도가 나왔고 300권이 팔렸다고 한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 김영하의 소설도 4만 부가 팔리기 어려운 곳이 우리나라다. 각종 도서사이트에서 베스트셀러 10위 안을 채우는 건 대체로 자기 개발서다. 매년 노벨문학상 시기가 되면 우리는 후보자를 달달 볶는다. 그 시간에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적게 놔둬야 하는데 인터넷으로, 방송으로 후보자를 고기 볶듯 볶아댄다. 하루키도 마찬가지다. 이제 하루키의 장편을 몇 편이나 읽을 수 있을까. 

부끄럽지만 ‘성숙’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김남조 시인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동안 생각지 않았던 ‘성숙’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나는 노년이 되어서 얼마간 성숙해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시인의 언어가 너무 과장되고 엄살도 많고 색깔을 입힌 게 많아요. 사랑이라는 말도 눈부신 광채일 수는 없다는 걸 알아갑니다. 이번에 이걸(영인문학관 전시회) 준비하느라 오래된 인쇄 글자를 찾아보니 종이라 바스러지고 활자가 뭉개져 있더군요. 종이와 글씨도 늙는다는 것, 결국 소멸에 이른다는 것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생이 참 숙연해요. 안 죽어 봤기 때문에 죽음을 피상적으로 생각했는데, 종이의 종말을 보고 내 종말이 현실감으로 다가온 것이지요.”

사랑은 눈부신 광채 일 수만은 없다. 뱅크의 노래 '가질 수 없는 너'에서도 '사랑의 다른 이름은 아픔이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라는 가사처럼 사랑의 다른 말은 고통과 아픔이다. 우리는 살면서 그걸 경험하고 있다. 시인은 종이의 종말에서 아직 겪어보지 못한 죽음을 본 것이다. 정말 이런 심안은 시인 만이 가능한 것일까. 시인이 아닌 일반인인 나는 어째서 이런 시선을 가질 수 없을까. 900편의 시를 적는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는 언제 성숙해져 있을까. 

김남조 시인의 말을 들으며 성숙의 길이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이 나오려면 그러한, 최소한 우리나라의 시인이나 소설가를 좋아하고 그들의 글을 탐독해야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시인과 소설가들의 문학이 뒤처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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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을 보면 주인공 모모 녀석의 소망은 우리가 기피하는 포주가 되는 것이다. 모모는 고결한 생의 구멍을 쾌락의 결과물처럼 나오게 된 아이다. 그리고 버려져 루자 아줌마를 만났다. 모모는 루자 아줌마에게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고 사랑받고 싶었다. 라딘과 라몽에게 모모 녀석 자신의 이야기와 루자 아줌마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 낼 때 모모 녀석에게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마치 습자지에 물이 스며들 듯.

그렇게 모모 녀석에게 읽는 이의 감정이 이입된다. 모모는 생이라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 알아 버렸다. 집으로 들어와 똥오줌 냄새가 진동하는 로자 아줌마를 안아 줄 때 그 장면이, 그 모습이, 그 풍경이 초현실 그림을 보는 것처럼 꿈처럼 피어올랐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똥오줌을 싸긴 했지만 아줌만 아직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는 사람들만 똥오줌을 싸잖아요. 

수많은 소설의 미문 중에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모 녀석은 이별이 두려웠고 무서운 아이였다. 모모는 소외된 자들에 속해 있었다. 버티는 것이 무엇인지, 버티는 게 어떤 것인지 아직은 모를 때의 모모. 아마도 생이란 그렇게 버티는 것이라고 말하는 ‘자기 앞의 생’은 좋은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가지고 독서모임을 했었다. 올해 초부터는 코로나 때문에 독서모임이 멈추었지만 독서모임을 할 때에는 사람들이 아주 흥미로운 눈빛으로 이야기를 듣는다. 독서모임을 하게 되면 소설에 관한 부분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읽고 난 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소설 밖의 문화적인 이야기는 질문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세세하게 이야기하려 한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썼고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통해서 삶과 죽음을 고찰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로맹 가리는 문단과 기자들에게 에밀 아자르를 사촌 동생이라 말하기도 했고, 감독으로 활동하며 영화도 두 편이나 찍고 외무 관료 출신으로 총영사관 총영사도 5년인가 했고 죽기 직전까지도 굉장히 멋에 신경을 썼던 괴짜이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자신보다 24살이나 어린 진 세버그를 아내로 맞아했다. 진 세버그가 반할 정도니 로맹 가리는 괴짜이기는 하나 참 멋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진 세버그는 아름답고 당시에 있을 수 없는 여성상을 지니고 있는 배우였다. 당시 여배우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 머리를 자르고 아주 짧은 단발로 누벨바그 영화에 등장했다. 그리고 인기도 높았다.


진 세버그는 박애주의자였다. 그것도 심각하고 지독한 박애주의자. 로맹 가리와 결혼을 하고서도 집에 거지들을 가득 불러 같이 살았다. 맙소사였다. 로맹 가리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것 때문에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는 마찰이 심했던 걸로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나 진 세버그가 자살로 죽고 몇 해 뒤에 로맹 가리도 자살을 했다. 진 세버그는 50년 대 말, 60년 대 초 영화계를 누벨바그로 '해체'시켜 버린 예술가 중의 한 명이다.




영화 속에서 큰 '해체'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이 85년도에 나온 ‘아메리칸 지골로'다. 상류 사회의 부인을 남편 몰래 만나면서 돈을 거머쥐는, 남창?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내용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아주 젊었던, 신인 시절의 리처드 기어였다. 때마침 영화 의상을 맡고 있던 신입 디자이너였던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리처드 기어의 의상을 담당하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아르마니의 의상을 입은 리처드 기어는 옷을 입었는데도 섹시함이 흐르는 기이한 현상을 영화를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집에서 빵만 구워대던 주부들이 모두 일어나 극장으로 뛰어들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정장은 양복으로 불리며 고리 터분하고 권위주의적 남성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리처드 기어가 나타남으로 해서 수트(슈트)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고 영화 속 리처드 기어는 그야말로 모델의 일상을 훔쳐보는 착각이 들었다.



리처드 기어는, 아르마니의 슈트를 걸친 초년병 시절의 리처드 기어는 멋져도 너무 멋진 것이다. 그의 움직임, 그의 손짓, 그의 눈빛 그 하나하나가 전부 아르마니의 니트와 바지, 슈트가 물아일체가 된 느낌이었다. 여자들 뿐 아니라 남자들 역시 열광했다. 이후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남성의 상징처럼 되었다. 영화 속에는 지금도 볼 수 있는 브랜드가 많이 나오는데 지금 마시는 페리에의 병 모양도 전혀 변함없이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https://youtu.be/i4DI71X6PeM


프랑스에 진 세버그(미국 출생이지만)가 있었다면 미국에도 쇼트 컷으로 해체주의적인, 앤디 워홀의 뮤즈였던 에디 세즈윅이 있었다. 당시 여성들이 경멸했던 아주 짧은, 보이시한 쇼트커트에 굉장히 크고 무거운 귀걸이와 목걸이, 눈 주위를 가득 매운 눈 화장, 검은 망사 스타키의 에디 세즈윅은 엔디 워홀과 함께 팩토리에서 기존 예술을 뒤집는 작업을 많이 했다. 에디 세즈윅은 엔디 워홀과 헤어져 보브 딜런과 잠시 만나기도 했지만 역시 짧은 생을 살다 마감하고 만다. 에디 세즈윅의 일대기를 영화한 ‘팩토리 걸’이 있고 살아 있는 에디 세즈윅으로 착각할 만큼 연기를 한 시에나 밀러가 주연이었다.



에디 세즈윅의 스타일은 에디 세즈윅이 죽었다고 해서 끝나지 않았다. 에디를 그대로 벤치마킹한 쇼가 각종 무대에서 펼쳐졌다. 샤넬이나 여타 디자인 회사의 런 어웨이에서 에디 세즈윅의 스타일을 여러 해 선 보였다. 에디 세즈윅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 일본의 아무로 나미에였다. 노래도 잘 부르고 스타일은 정말 에디 세즈윅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로 나미에를 다시 벤치마킹해서 자기만의 스타일로 굳혔던 가수가 이효리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잘 기획했다. 별 얘기 아니지만 에디 세즈윅과 쌍벽을 이루었던 트위기도 있었는데 트위기는 아직 살아있다. 트위기의 스타일 역시 아예 ‘트위기 룩'으로 지금까지 각종 쇼와 무대, 그리고 모델들이 벤치마킹하고 있다.



에디 세즈윅의 연인인 앤디 워홀이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이 있는 인물이다. 팝아트의 창시자이며 영화배우, 사진작가, 음반 제작자로 니코의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그 앨범 표지, 바나나 하나로 넘어설 수 없는 앨범 표지를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물론 그 바나나는 앤디 워홀식으로 다양한 의미가 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루 리드 등 모두가 앤디 워홀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나는 유명해질 거야,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https://youtu.be/r_4wKYrky4k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를 들어보자. 엔디와 에드, 그리고 니코의 아름다운 조화. 부조리에 저항하고 모더니즘에 해체를 불러일으키고 세상을 예술로 아름답게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의 세계를 노래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환지통을 일으킬 만큼 손이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있는 그를 만날 것만 같다. 


그랬던 앤디 워홀의 친구가 백남준이었다. 백남준이 70년대 초 한국 땅에서 예술을, 그러니까 초현실적인 예술, 물질보다는 정신에 입각한 예술을 하려니 제약이 많았다. 마리가 길면 강제로 잘라버리고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를 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70년대 한국의 예술가들, 가수들은 이름을 영어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배철수가 있던 '런 어웨이'는 '활주로'로 바뀌어서 앨범을 냈고, '블랙테트라'는 '열대어'로 바뀌었고, '바니걸스'는 '토끼소녀'가 되었다. 참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남준은 제약과 간섭이 심한 한국에서 독일로 가버리고 만다. 독일에서 백남준은 플럭서스라는, 뭐랄까 문화적인 새마을운동 같은 것을 일으켜서 독일 예술계를 해체시켜 버린다. 발칵 뒤집어 놓은 거지. 플럭서스가 뭐냐? 나도 잘 모르지만 행위나 퍼포먼스로 금기나 기존의 틀에 충격을 주는 예술을 통틀어 말한다. 전위예술이라는 거 가끔 멍하게 보면 재미있고 좋다. 부수고 던지고 고함치고 소리 지르고, 우리도 일상에서 그럴 때가 있다. 다 때려 부수고 싶고 소리 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할 수 없으니 전위예술가들이 대신해준다. 대리만족을 예술을 통해 느낄 수 있다. 




나는 어쩌다 백남준의 아트 전에 빠지게 되어 몇 년을 많이도 가서 봤다. 70년대부터 백남준과 함께 플럭서스 활동한 예술가가 오노 요코였다. 존 레넌과 결혼한 오노 요코 덕분에 존 레넌과 예술적 친구가 된 백남준은 존과 친구였던 앤디 워홀과도 어울려 모두가 함께 예술적 경계를 허물었다. 





정말 멋진 일이다. 이렇게 세계적인 해체주의 작가들은 서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 끈으로 애당초 연결되어 있다가 후에 서로 친구가 된다. 이들이 서로 엮이게 되는 기초는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을 놓지 않고 있다면 뭐든 가능하다. 상상력이 떨어진 인간은 그저 나오는 대로 말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좀비와 다를 바 없다. 상상력은 그렇게 그들을 단단하게 연결시켜주었다.


백남준이 죽었을 때 뉴욕에서 장례식을 했는데 사회를 오노 요코가 봤다. 이 장례식장이 얼마나 멋지냐면 관속에 편안하게 누워있는 백남준의 배 위에, 장례식 장에 모인 전 세계 예술가들에게 매고 있는 넥타이를 가위로 갈라서 올려 달라고 오노 요코가 말을 하고 모두가 그렇게 했다. 잃은 사람을 슬퍼하기보다는 어딘가에서 새로운 시작을 함께 축하하는 기분이 들었다.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어 봐야지 한 것이 벌써 몇 년 전인데 언제 읽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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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이면 햇빛에 속수무책으로 신나게 탄다. 이러다간,,, 까지 생각하다가 또 겨울이 되면 다시 탄 끼가 빠지게 된다. 조깅을 하다가 맞은편에서 나만큼 까만 사람이 훅훅하며 뛰어오면, 아아 당신도 올여름 꽤 태양과 맞섰군요, 열심히 달리십시오!라고 말하고 싶다.

조깅을 할 때를 제외하고 대체로 나는 컨버스를 신고 다닌다. 신고 벗고 하기가 불편한데 자주 신고 벗고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늘 컨버스를 신는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럴 수 있나 할 정도로 아직까지 구두를 한 번도 신어본 적이 없다. 

편견이지만 신발이라는 건 개성이라 컨버스가 나에게 가장 편하고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정장(역시 한 벌도 없지만) 같은 옷에도 어쩐지 어울려서 조깅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컨버스다. 그래서 또? 그 신발이야?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기호라는 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루키의 어떤 에세이에서 ‘나는 스니커를 대단히 좋아한다. 350일은 스니커를 신고 생활하고 있다. 스니커를 신고 거리를 걷다 보면, 나이를 먹는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라고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나는 계속 컨버스만 신게 되었다. 그걸 신고 걷는다고 해서 나이를 덜 먹는다거나, 먹는 게 두렵지 않다거나, 같은 생각 따위를 하지는 않는다. 

요즘은 신발의 종류가 면 요리만큼 많아서 컨버스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보통 길을 걷다가 같은 옷을 입은 모르는 사람을 보면 약간 창피하다. 마찬가지로 같은 신발을 신고 있는 사람과 마주쳐도 약간은 부끄럽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같은 컨버스를 신고 있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앞으로를 생각해보면 분명 컨버스를 신지 못하는 때가 올 것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살아있다면 80세에도 너 좋을 대로 컨버스를 신고 다녀라,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기 검열 같은 것이 존재한다. 어른인 것이다. 어른의 세계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이미 이 세계는 그렇게 되어 버렸고 나도 그런 풍파에 휩쓸려 버린다.  

그러나 아직은 술렁술렁 글로써 허구를 써대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도 도로시의 마법구두처럼 컨버스화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버린다. 기세 좋게 컨버스화를 신고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의 거짓말을 해 버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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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이 트는 계절 겨울을 그려본 그림]



겨울이 되면 여름 내내 촉촉하던 입술도 바짝 말라 버린다. 그래서 참 별로다. 찬바람이 소나기처럼 할퀴고 가면 입술도 말라서 주머니에 넣어뒀던 립글로스를 꺼내서 바르려고 하면 없다. 얼씨구 분명히 여기 주머니에 넣어뒀는데 주머니를 뒤지면 사라지고 없다. 

꼭 만년필 같다. 만년필은 자신이 구입하는 경우는 잘 없다. 선물로 받는 물품인데 사용하려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몇 번 사용하다가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둔다. 하지만 시간이 훌쩍 지나서 보면 가만두었던 서랍 속 만년필은 없어지고 만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누구도 건드린 적이 없다. 당연하지만 서랍 속에 넣어둔 걸 아는 사람은 나뿐이지만 만년필은 인사도 없이 멀리 가버리는 애인처럼 없어져 버린다.

생활 속에서 어김없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없어지는 물품이 항상 존재한다. 립글로스도 그렇다. 언제나 옆에서 잠시 동안 웃음을 머금고 곁에 꼭 있어 줄 것만 같지만 어느 순간 보면 사라져 버린다. 그저 쓱 말도 없이 떠나고 만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립글로스를 두, 세 개씩 구입하여 내가 손을 뻗을 수 있는 곳에 지뢰처럼 놓아둔다. 그래도 하나가 어느 날 보면 사라지고 없다. 

만약 립글로스가 자동차라면 나는 망했을 것이다. 어쩌면 립글로스를 만드는 공장에서 립글로스를 만들 때 오랫동안 사용할 수 없게 어떤 장치를 집어넣어서 한 달 정도 사용하다가 슬슬 주인에게서 도망가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서 생명이 다해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립글로스는 누군가 사용하던 것을 자신의 입술에 막 바르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는 겨울의 메마른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약국으로 발길을 돌려서 립글로스를 구입하게 하는 모종의 권모술수가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없어지든, 저렇게 없어지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립글로스는 구입한 주인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자리에서 이탈하고 만다. 마치 궤도에서 벗어난 별똥별처럼. 어떤 이에게는 우산이 그럴 것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손수건이 그럴 것이고 또 다른 이에게도 그런 물품은 있다. 

생각해보면 내 옆에서 늘 있어줄 것 같은 사람도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는 일이 있다. 다가왔던 애인이 그랬고, 늘 옆에서 나를 보살펴 줄 것만 같았던 부모님 역시 어느 날 떠나고 없다. 내 새끼 역시 내 품 안에만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내 부모를 떠났듯이 나를 떠나고 말 것이다. 물품이던 사람이던 손을 뻗을 수 있는 곳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진심을 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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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싫지만 겨울은 크리스마스가 있기 때문에 또 알 수 없는 기대를 하게 된다. 크리스마스는 나이(와) 같다. 모두가 행복한데 나만 그날 불행한 거 같아, 싫어!라고 해서 크리스마스가 오지 않는다든가, 나만 피해 가지 않는다. 매년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오고 거리의 곳곳에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캐럴이 흘러나오고 카페에서는 크리스마스에 관한 굿즈를 판매하고 커플을 위한 행사가 열리고 시즌 영화가 등장한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고 너무 좋아해도 하루 만에 칼로 두부를 싹둑 자르듯이 끝나버리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는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어떤 나라는 11월이 되면 트리를 설치하고 캐럴을 들으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일찍부터 즐긴다. 그렇게 즐기다 보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슬슬 지쳐서 크리스마스가 휙 지나가도 그렇게 아쉽다는 기분은 들지 않을 것 같다. 그 방법이 좋기 때문에 나도 일찍부터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준비라고 하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그저 혼자서 즐기는 것이다. 캐럴을 틀어 놓고 겨울만 되면 읽는 소설을 읽으며 철 지난겨울의 영화를 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직접 디자인해서 만들었기에 일찍부터 그런 작업들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되어 있고 올해도 잘 부탁해, 하며 서로 인사를 한다.


캐럴을 듣다 보면 어떤 캐럴에 따라서 그때의 기억이 난다.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들으면 어린 시절의 동네 모습이 떠오른다. 동네에 작은 트리를 설치하고 추워서 오들오들 떨지만 사람들이 행복해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동네의 어묵 파는 곳에서 후후 불며 어묵을 먹곤 했다. 참 맛있었다. 대학교 자취할 때에는 또 모두가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 송에 빠져 있어서 겨울의 자취방에 모여 앉아서 촛불 따위를 켜고 술을 마시며 하하하 웃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건축과와 의상과가 늘 친하게 붙어 지냈다. 여잔지 남잔지 구분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지처럼 지낼 때도 많았는데 크리스마스가 되면 집에 가지 않았던 아이들끼리 모여 앉아서 싸구려 케이크를 자르고 캐럴을 신나게 부르며 보내곤 했다.


웸의 라스트 크리스마스를 들으면 제대를 하고 다녔던 토건회사를 나와서 겨울 두 달 동안 고구마 장사를 했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고구마 장사가 잘 되어서 가스를 한 통 더 구입해서 두통으로 고구마를 구웠다. 장사가 잘 되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농산물 시장에 일찍 가서 좋은 고구마를 직접 구입했다. 좋은 고구마라는 건 구웠을 때 뭐랄까 입 안에서 퍼석이지 않고 잘 녹는 느낌의 군고구마가 되는 고구마를 말한다. 캐럴을 틀어 놓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손수 만들어서 7천 원 이상 고구마를 사가는 사람에게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선물로 줬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 근처라 아파트에 배달을 했다. 이런 것들이 먹혀 들어서 회사에서 퇴근하고 한 잔씩 하고 들어오시는 아버지들은 만원을 탁 꺼내 주며 5천 원어치 사면 시원하게 5천 원은 팁으로 주곤 했다. 그리고 몇 동 몇 호로 가져다 달라고 하면 우리는 굽는 족족 배달을 했다. 그런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때 신나는 캐럴을 주로 틀었는데 터보의 캐럴도 생각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맞이했고 고구마를 팔면서 보낸 그때가 웸의 라스트 크리스마스도 터보의 캐럴이 동네의 아파트 단지까지 울렸다. 누구 하나 시끄럽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하면 무엇이 가장 생각이 나고 어떤 크리스마스가 가장 행복했을까. 궁금하여 몇 명에게 크리스마스에 관한 질문을 해봤다.


어떤 크리스마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지,
또 어떤 크리스마스가  행복했는지,
크리스마스 하면 어떤 캐럴이 가장 떠오르는지,
그리고 보내고 싶은 크리스마스는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부산에 사는 30대 후반의 여성 k양은,

"가장 행복하게 보낸 크리스마스는 대략 3개 정도가 기억이 나요, 3년 전에 남자 친구와 홍콩에서 보낸 크리스마스가 기억이 나네요.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수십만 개의 불빛에 녹아들어 갈 뻔했어요. 즐거운 음악과 다국적 사람들의 소리가 혼재되어 있었어요. 원하는 크리스마스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아름다운 장소에서 평화롭고 즐겁게 와인을 한 잔 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이에요. 캐럴 하면 저는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에요." https://youtu.be/yXQViqx6GMY



울산에서 꽃집을 경영하는 크리스천 30대 여성 E양은,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는 교회에서 예수님 탄생을 기뻐하는 축제에 맘껏 뛰놀았던 무대예요. 즐거웠죠. 모두가 비슷한 마음이니까. 행복하게 보낸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집에서 이불 덮고 귤 까먹으며 영화를 보는 것이었어요. 캐럴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앞으로 보내고 싶은 크리스마스는 눈 오는 날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저녁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랍니다. 너무 단순한가요?(웃음)" https://youtu.be/w9QLn7gM-hY



서울의 20대 중반 여성 스즈키 안(예명)은,

"어릴 때 따뜻한 집에서 식탁에 촛불을 켜고 가족 식사를 했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행복했던 크리스마스는 애인과 시청 앞 광정에 스케이트를 타러 갔던 일이요. 꼭 영화 같았어요. 캐럴은 옛날의 노래 '징글벨 징글벨'이 가장 생각나요.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한 실내에서 음악 들으면서 잔잔하게 보내고 싶어요." https://youtu.be/xLJ28L7qK-0



울산 사는 항공 승무원 과에 다니는 20대 J양은,

“중학교 2학년, 그러니까 2014년 캄보디아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 생애 첫여름 크리스마스를 잊지 못해요. 크리스마슨데 수영복을 입고 바다에 뛰어들었어요. 행복한 크리스마스는 2019년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친구들과 첫 크리스마스 홈파티를 했어요. 정말 그림 같았어요. 크리스마스 하면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가장 떠올라요. 2012년 초등학교 6학년 때 반 친구들이랑 다 같이 학예회 나간다고 열심히 연습했거든요. 앞으로 오는 크리스마에는 연인과 함께 손 잡고 길거리 걸으면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요.” https://youtu.be/g7VKQMytX8M



울산 사는 10대 N양은,
“사실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가 없어요. 아무리 그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했더라도 이별은 악이었기에 기억에 남지 않아요. 하나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요. 그래도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생각한다면 작년 부산에서 보냈던 크리스마스예요. 어떻게 보냈는지 비밀이라 말할 순 없지만.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노래는 커피소년의 '크리스마스엔' 이에요. 이제는 크리스마의 로망이 없어요. 허울뿐이라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고 할까요.” https://youtu.be/didi_lJHxVs



미국 보스턴에서 오래 살다가 남양주에 정착한 30대 여성 둘리(예명) 양은,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는 어릴 때 스케치북에 갖고 싶은 거 써 놓고 잤는데 일어났을 때 아무것도 없었던 때와 유치원에서 산타 할아버지가 집으로 오셨는데 저녁까지 못 기다리고 낮부터 할머니한테 언제 오냐고 전화해보라고 백 번은 더 이야기했던 게 기억이 나요. 행복했던 크리스마스는 커서 보스턴에서 살 때 처음 경험하는 미국의 크리스마스 문화였어요. 행복하고 따뜻한 느낌 그것이었어요. 크리스마스 캐럴 하면 'Baby It's Cold Outside'입니다. 저는 아직도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https://youtu.be/6bbuBubZ1yE



마지막으로 울산 사는 귀여운 6세 M양은,

“음, 음, 아침에 일어났는데 엘사 인형을 받았어요. 정말 기분 좋았어요. '인투디 언 노오운'. (아주 조용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 두 개 줬으면 좋겠어요.” https://youtu.be/gIOyB9ZXn8s




모두 제각각의 크리스마스를 보냈고 기억하는 크리스마스의 한 부분 역시 다르지만 원하고 바라는 크리스마스의 모습은 비슷한 것 같다. 사랑하는 이와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박하지만 조용하고 행복하게 보내고 싶어 한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라는 가공의 모습은 찬란하고 거창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모두 불만 없이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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