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여름이면 햇빛에 속수무책으로 신나게 탄다. 이러다간,,, 까지 생각하다가 또 겨울이 되면 다시 탄 끼가 빠지게 된다. 조깅을 하다가 맞은편에서 나만큼 까만 사람이 훅훅하며 뛰어오면, 아아 당신도 올여름 꽤 태양과 맞섰군요, 열심히 달리십시오!라고 말하고 싶다.

조깅을 할 때를 제외하고 대체로 나는 컨버스를 신고 다닌다. 신고 벗고 하기가 불편한데 자주 신고 벗고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늘 컨버스를 신는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럴 수 있나 할 정도로 아직까지 구두를 한 번도 신어본 적이 없다. 

편견이지만 신발이라는 건 개성이라 컨버스가 나에게 가장 편하고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정장(역시 한 벌도 없지만) 같은 옷에도 어쩐지 어울려서 조깅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컨버스다. 그래서 또? 그 신발이야?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기호라는 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루키의 어떤 에세이에서 ‘나는 스니커를 대단히 좋아한다. 350일은 스니커를 신고 생활하고 있다. 스니커를 신고 거리를 걷다 보면, 나이를 먹는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라고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나는 계속 컨버스만 신게 되었다. 그걸 신고 걷는다고 해서 나이를 덜 먹는다거나, 먹는 게 두렵지 않다거나, 같은 생각 따위를 하지는 않는다. 

요즘은 신발의 종류가 면 요리만큼 많아서 컨버스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보통 길을 걷다가 같은 옷을 입은 모르는 사람을 보면 약간 창피하다. 마찬가지로 같은 신발을 신고 있는 사람과 마주쳐도 약간은 부끄럽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같은 컨버스를 신고 있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앞으로를 생각해보면 분명 컨버스를 신지 못하는 때가 올 것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살아있다면 80세에도 너 좋을 대로 컨버스를 신고 다녀라,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기 검열 같은 것이 존재한다. 어른인 것이다. 어른의 세계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이미 이 세계는 그렇게 되어 버렸고 나도 그런 풍파에 휩쓸려 버린다.  

그러나 아직은 술렁술렁 글로써 허구를 써대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도 도로시의 마법구두처럼 컨버스화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버린다. 기세 좋게 컨버스화를 신고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의 거짓말을 해 버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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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이 트는 계절 겨울을 그려본 그림]



겨울이 되면 여름 내내 촉촉하던 입술도 바짝 말라 버린다. 그래서 참 별로다. 찬바람이 소나기처럼 할퀴고 가면 입술도 말라서 주머니에 넣어뒀던 립글로스를 꺼내서 바르려고 하면 없다. 얼씨구 분명히 여기 주머니에 넣어뒀는데 주머니를 뒤지면 사라지고 없다. 

꼭 만년필 같다. 만년필은 자신이 구입하는 경우는 잘 없다. 선물로 받는 물품인데 사용하려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몇 번 사용하다가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둔다. 하지만 시간이 훌쩍 지나서 보면 가만두었던 서랍 속 만년필은 없어지고 만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누구도 건드린 적이 없다. 당연하지만 서랍 속에 넣어둔 걸 아는 사람은 나뿐이지만 만년필은 인사도 없이 멀리 가버리는 애인처럼 없어져 버린다.

생활 속에서 어김없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없어지는 물품이 항상 존재한다. 립글로스도 그렇다. 언제나 옆에서 잠시 동안 웃음을 머금고 곁에 꼭 있어 줄 것만 같지만 어느 순간 보면 사라져 버린다. 그저 쓱 말도 없이 떠나고 만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립글로스를 두, 세 개씩 구입하여 내가 손을 뻗을 수 있는 곳에 지뢰처럼 놓아둔다. 그래도 하나가 어느 날 보면 사라지고 없다. 

만약 립글로스가 자동차라면 나는 망했을 것이다. 어쩌면 립글로스를 만드는 공장에서 립글로스를 만들 때 오랫동안 사용할 수 없게 어떤 장치를 집어넣어서 한 달 정도 사용하다가 슬슬 주인에게서 도망가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서 생명이 다해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립글로스는 누군가 사용하던 것을 자신의 입술에 막 바르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는 겨울의 메마른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약국으로 발길을 돌려서 립글로스를 구입하게 하는 모종의 권모술수가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없어지든, 저렇게 없어지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립글로스는 구입한 주인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자리에서 이탈하고 만다. 마치 궤도에서 벗어난 별똥별처럼. 어떤 이에게는 우산이 그럴 것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손수건이 그럴 것이고 또 다른 이에게도 그런 물품은 있다. 

생각해보면 내 옆에서 늘 있어줄 것 같은 사람도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는 일이 있다. 다가왔던 애인이 그랬고, 늘 옆에서 나를 보살펴 줄 것만 같았던 부모님 역시 어느 날 떠나고 없다. 내 새끼 역시 내 품 안에만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내 부모를 떠났듯이 나를 떠나고 말 것이다. 물품이던 사람이던 손을 뻗을 수 있는 곳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진심을 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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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싫지만 겨울은 크리스마스가 있기 때문에 또 알 수 없는 기대를 하게 된다. 크리스마스는 나이(와) 같다. 모두가 행복한데 나만 그날 불행한 거 같아, 싫어!라고 해서 크리스마스가 오지 않는다든가, 나만 피해 가지 않는다. 매년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오고 거리의 곳곳에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캐럴이 흘러나오고 카페에서는 크리스마스에 관한 굿즈를 판매하고 커플을 위한 행사가 열리고 시즌 영화가 등장한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고 너무 좋아해도 하루 만에 칼로 두부를 싹둑 자르듯이 끝나버리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는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어떤 나라는 11월이 되면 트리를 설치하고 캐럴을 들으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일찍부터 즐긴다. 그렇게 즐기다 보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슬슬 지쳐서 크리스마스가 휙 지나가도 그렇게 아쉽다는 기분은 들지 않을 것 같다. 그 방법이 좋기 때문에 나도 일찍부터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준비라고 하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그저 혼자서 즐기는 것이다. 캐럴을 틀어 놓고 겨울만 되면 읽는 소설을 읽으며 철 지난겨울의 영화를 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직접 디자인해서 만들었기에 일찍부터 그런 작업들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되어 있고 올해도 잘 부탁해, 하며 서로 인사를 한다.


캐럴을 듣다 보면 어떤 캐럴에 따라서 그때의 기억이 난다.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들으면 어린 시절의 동네 모습이 떠오른다. 동네에 작은 트리를 설치하고 추워서 오들오들 떨지만 사람들이 행복해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동네의 어묵 파는 곳에서 후후 불며 어묵을 먹곤 했다. 참 맛있었다. 대학교 자취할 때에는 또 모두가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 송에 빠져 있어서 겨울의 자취방에 모여 앉아서 촛불 따위를 켜고 술을 마시며 하하하 웃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건축과와 의상과가 늘 친하게 붙어 지냈다. 여잔지 남잔지 구분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지처럼 지낼 때도 많았는데 크리스마스가 되면 집에 가지 않았던 아이들끼리 모여 앉아서 싸구려 케이크를 자르고 캐럴을 신나게 부르며 보내곤 했다.


웸의 라스트 크리스마스를 들으면 제대를 하고 다녔던 토건회사를 나와서 겨울 두 달 동안 고구마 장사를 했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고구마 장사가 잘 되어서 가스를 한 통 더 구입해서 두통으로 고구마를 구웠다. 장사가 잘 되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농산물 시장에 일찍 가서 좋은 고구마를 직접 구입했다. 좋은 고구마라는 건 구웠을 때 뭐랄까 입 안에서 퍼석이지 않고 잘 녹는 느낌의 군고구마가 되는 고구마를 말한다. 캐럴을 틀어 놓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손수 만들어서 7천 원 이상 고구마를 사가는 사람에게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선물로 줬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 근처라 아파트에 배달을 했다. 이런 것들이 먹혀 들어서 회사에서 퇴근하고 한 잔씩 하고 들어오시는 아버지들은 만원을 탁 꺼내 주며 5천 원어치 사면 시원하게 5천 원은 팁으로 주곤 했다. 그리고 몇 동 몇 호로 가져다 달라고 하면 우리는 굽는 족족 배달을 했다. 그런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때 신나는 캐럴을 주로 틀었는데 터보의 캐럴도 생각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맞이했고 고구마를 팔면서 보낸 그때가 웸의 라스트 크리스마스도 터보의 캐럴이 동네의 아파트 단지까지 울렸다. 누구 하나 시끄럽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하면 무엇이 가장 생각이 나고 어떤 크리스마스가 가장 행복했을까. 궁금하여 몇 명에게 크리스마스에 관한 질문을 해봤다.


어떤 크리스마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지,
또 어떤 크리스마스가  행복했는지,
크리스마스 하면 어떤 캐럴이 가장 떠오르는지,
그리고 보내고 싶은 크리스마스는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부산에 사는 30대 후반의 여성 k양은,

"가장 행복하게 보낸 크리스마스는 대략 3개 정도가 기억이 나요, 3년 전에 남자 친구와 홍콩에서 보낸 크리스마스가 기억이 나네요.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수십만 개의 불빛에 녹아들어 갈 뻔했어요. 즐거운 음악과 다국적 사람들의 소리가 혼재되어 있었어요. 원하는 크리스마스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아름다운 장소에서 평화롭고 즐겁게 와인을 한 잔 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이에요. 캐럴 하면 저는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에요." https://youtu.be/yXQViqx6GMY



울산에서 꽃집을 경영하는 크리스천 30대 여성 E양은,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는 교회에서 예수님 탄생을 기뻐하는 축제에 맘껏 뛰놀았던 무대예요. 즐거웠죠. 모두가 비슷한 마음이니까. 행복하게 보낸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집에서 이불 덮고 귤 까먹으며 영화를 보는 것이었어요. 캐럴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앞으로 보내고 싶은 크리스마스는 눈 오는 날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저녁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랍니다. 너무 단순한가요?(웃음)" https://youtu.be/w9QLn7gM-hY



서울의 20대 중반 여성 스즈키 안(예명)은,

"어릴 때 따뜻한 집에서 식탁에 촛불을 켜고 가족 식사를 했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행복했던 크리스마스는 애인과 시청 앞 광정에 스케이트를 타러 갔던 일이요. 꼭 영화 같았어요. 캐럴은 옛날의 노래 '징글벨 징글벨'이 가장 생각나요.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한 실내에서 음악 들으면서 잔잔하게 보내고 싶어요." https://youtu.be/xLJ28L7qK-0



울산 사는 항공 승무원 과에 다니는 20대 J양은,

“중학교 2학년, 그러니까 2014년 캄보디아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 생애 첫여름 크리스마스를 잊지 못해요. 크리스마슨데 수영복을 입고 바다에 뛰어들었어요. 행복한 크리스마스는 2019년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친구들과 첫 크리스마스 홈파티를 했어요. 정말 그림 같았어요. 크리스마스 하면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가장 떠올라요. 2012년 초등학교 6학년 때 반 친구들이랑 다 같이 학예회 나간다고 열심히 연습했거든요. 앞으로 오는 크리스마에는 연인과 함께 손 잡고 길거리 걸으면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요.” https://youtu.be/g7VKQMytX8M



울산 사는 10대 N양은,
“사실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가 없어요. 아무리 그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했더라도 이별은 악이었기에 기억에 남지 않아요. 하나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요. 그래도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생각한다면 작년 부산에서 보냈던 크리스마스예요. 어떻게 보냈는지 비밀이라 말할 순 없지만.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노래는 커피소년의 '크리스마스엔' 이에요. 이제는 크리스마의 로망이 없어요. 허울뿐이라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고 할까요.” https://youtu.be/didi_lJHxVs



미국 보스턴에서 오래 살다가 남양주에 정착한 30대 여성 둘리(예명) 양은,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는 어릴 때 스케치북에 갖고 싶은 거 써 놓고 잤는데 일어났을 때 아무것도 없었던 때와 유치원에서 산타 할아버지가 집으로 오셨는데 저녁까지 못 기다리고 낮부터 할머니한테 언제 오냐고 전화해보라고 백 번은 더 이야기했던 게 기억이 나요. 행복했던 크리스마스는 커서 보스턴에서 살 때 처음 경험하는 미국의 크리스마스 문화였어요. 행복하고 따뜻한 느낌 그것이었어요. 크리스마스 캐럴 하면 'Baby It's Cold Outside'입니다. 저는 아직도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https://youtu.be/6bbuBubZ1yE



마지막으로 울산 사는 귀여운 6세 M양은,

“음, 음, 아침에 일어났는데 엘사 인형을 받았어요. 정말 기분 좋았어요. '인투디 언 노오운'. (아주 조용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 두 개 줬으면 좋겠어요.” https://youtu.be/gIOyB9ZXn8s




모두 제각각의 크리스마스를 보냈고 기억하는 크리스마스의 한 부분 역시 다르지만 원하고 바라는 크리스마스의 모습은 비슷한 것 같다. 사랑하는 이와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박하지만 조용하고 행복하게 보내고 싶어 한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라는 가공의 모습은 찬란하고 거창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모두 불만 없이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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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아주 좋아합니다.라고 하면 안 그런 사람이 어딨냐고 할 테지만 엄밀히 말하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한다. 좀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극장을 좋아한다. 상영관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극장에 들어가는 걸 좋아했다. 그저 안과 밖을 구분 짓는 문일 텐데 극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상과는 단절된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 손을 뻗으면 닿지 않을 곳으로 한 발 내딛는 기분, 마치 헐리우드의 키드의 생애의 병석과 명길이 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극장의 밖에는 매표구가 있어서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작은 구멍으로 티켓 매수와 연령제한이 있다면 나이를 말해서 티켓팅을 했다. 어릴 때에는 제1 관문인 매표소를 통과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이었다. 안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는데 그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안 된다고 하면 극장에는 못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제1 관문을 통과하더라도 구입한 티켓을 반납하는, 극장의 대문 격인 그 문 앞에 있는 알프레도 아저씨 같은 문지기에게 걸리고 만다. 여지없다. 중학생이 된 이후로는 좀 더 자유롭게 극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주로 성룡과 장국영, 유덕화, 주윤발의 영화를 보러 들어갔다.

극장에 들어가서 어두운 곳에 앉아서 밝은 스크린을 응시하는 건 원초적인 본능인 관음을 일깨우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홈씨어터가 발전을 하고 넷플릭스나 OTT 같은 서비스가 나날이 솟아올라도 예전에 비해 더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이유도 관음의 본능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상영관의 불이 꺼지는 순간 앞뒤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되고 극장에 기어 들어온 모두가 침을 꼴깍 삼키며 밝은 스크린에 펼쳐지는 마법의 세계에 빠져들어 간다.

극장은 재미있는 요소가 가득한 공간이다. 메인은 상영관에 앉아서 영화에 몰입하는 것이지만 상영관에 들어가기 전 로비에서 음료나 오징어를 씹으며 기대를 한 껏 끌어올리는 재미가 있다. 근래에는 멀티플렉스로 대부분의 상영관 형태가 다 엇비슷하지만 예전의 극장은 로컬 카페처럼 개성이 철철 흘러넘쳤다. 어떤 극장의 로비에는 거대한 수족관이 있어서 상영 직전까지 꼬깔콘을 먹으며 붕어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고 어떤 극장의 로비에는 거대한 벽걸이 티브이가 정면에서 철 지난 영화를 계속 상영하는데 그걸 보는 재미도 있었다. 또 어떤 극장의 로비는 벤치가 3층 창가에 바로 붙어 있어서 창문을 통해 밖의 사람들이 피규어처럼 지나가는 걸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것이 의외로 재미있다. 무슨 옷을 입고 지나가는지, 걸음걸이는 어떤지, 손에는 뭘 들고 가는지, 혼자서 다니는지, 같은 것들을 일행과 이야기를 하며 보는 것이 꽤 재미있다.

타지방으로 여행을 가면 그 도시의 극장에 가는 것 또한 묘미다. 영화를 볼 땐 모르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 그래 맞아, 지금 여행 중이었지, 하며 여행이라는 걸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된다. 여행 중 여행이라는 걸 잊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춘천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아마도 그때 일행과 함께 춘천의 멀티플렉스에서 영화를 봤는데 그 날이 개관 첫날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거의 처음으로 티켓팅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반 상영관의 좌석을 예매했는데 로얄석이 있는 귀빈 상영관에서 관람을 하게 해 주었다. 첫 개관 기념이라고 극장 측에서 알려주었다. 그래서 거의 누워서 볼 정도로 편안하고 큰 좌석에서 봤다. 음료와 부식거리도 제공이 되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일행과 시시덕거리며 봐서 그런지 정작 무슨 영화를 봤지? 하게 되는데 아마도 핸콕을 봤던 것 같다.

그리고 여름휴가 중 하루를 온전히 극장에서 영화를 연달아 본 적도 있다. 일행과 함께 아침 일찍 극장에 들어가 늦은 밤이 되어서 나온 적도 있었다. 꽤 많이 볼 것 같지만 3편이나 4편 정도밖에 보지 못한다. 그 중간에는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신다. 극장의 또 다른 재미는 영화가 끝나고 우르르 엘리베이터를 타고 극장을 빠져나올 때 방금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블랙스완을 보고 나올 때 어떤 커플이, 여자가 남자에게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는데?”라고 하니 남자가 “가가 가한테 너무 가를 기댄기라”라고 깔끔하게 정리해주기도 했다.

요즘은 상영관에 먹을 것을 들고 들어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콜라를 담는 큰 컵에 맥주를, 팝콘 통에 생라면을 부셔서 넣어서 들고 가서 먹는 재미가 있다. 맥주가 금방 사라지기 때문에 소주를 좀 같이 넣어서 홀짝이며 생라면을 안주삼아 영화를 보는 재미가 아주 크다. 생라면은 씹어 먹으면 소리가 크기 때문에 입 안에서 살살 돌려가며 녹여 먹는 맛이 있다. 별미는 짜파게티다. 그냥 생라면에 스프를 뿌려 먹는 것도 맛있지만 짜파게티의 스프를 뿌려서 생라면으로 살살 녹여 먹는 맛은 아주 별미다.

그렇게 좋아하는 상영관을 요즘은 거의 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대비를 하고 있지만 코로나 때문에 어쩐지 기운이 많이 빠져 버렸다. 내가 있는 도시의 한 멀티플렉스의 로비에는 피규어 판매점이 있어서 상영관의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딛기 전에 피규어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해 참 아쉽다. 극장도 얼른 기운을 받아 벌떡 일어나는 날이 빨리 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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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갑자기 날이 어제와 달라졌다. 바람의 소리와 강도가 달랐고 냉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온도가 떨어졌다. 이제 온전히 여름에서 벗어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본격적으로 국밥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시기가 된 것이다. 국밥에 대해서 하나 더 이야기를 해보자.


국밥은 돼지국밥 같은 국밥이 있는가 하면 반대편에 딱 버티고 서서 팔짱을 끼는 국밥은 또 육개장 형태의 소고기 국밥이 아닌가 싶다. 소고기 국밥의 형태는 아마도 한국인에게는 가장 친숙한 국밥이다. 소고기 국밥은 경조사에는 빠지지 않고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었던 국밥이었다. 요즘도 많은 장례식 장에서는 소고기 국밥을 내주고 있다. 

대량으로 조리한 소고기 국밥에서 나의 그릇에 소고기가 많이 들어가 있으면 왜 그런지 해냈다, 같은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집에서도 명절이나 가족의 생일이거나 좋은 일이 있을 때 소고깃국을 끓이는 집이 많다. 소고기 국밥은 육개장에 가까워서 매콤하기도 하며 양껏 들어간 무 덕분에 달달한 맛도 가지고 있다. 

국밥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발견했는데 소설가 박완서의 일화다. 박완서 소설가의 친구 중에 아들 두 명을 잘 키운 친구가 있는데 아들들은 미국과 유럽으로 유학을 각각 보내서 박사로 성공을 시켰다. 그 아들 중에 하나가 결혼을 하게 되어서 박완서는 초정을 받아서 가게 되었다.

결혼식은 친구의 자택에서, 정원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왔다. 박완서는 집안이 좋은 사람들이라 가든에서 열리는 거대한 결혼식을 생각하고 갔지만 작은 마당에서 지인들이 오순도순 모여 결혼식을 올리고 결혼식 후 하객들을 위한 음식도 집 앞에 있는 옛날식 국밥집에서 국밥을 조달하여 하객들을 먹였다고 한다. 서로 빙 둘러앉아 육개장을 먹으며 정겹게 담소를 나누는 장면은 결혼식장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박완서 소설가가 그 결혼식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모습은 주례사였는데 주례 선생님은 신랑의 초등학교 담임이었다. 주례는 보통 신랑의 약력이나 업적을 먼저 말하고 주례사를 시작하는 것에 비해 담임이었던 주례는 신랑이 무슨 공부를 했는지, 어떤 분야에서 무엇이 되었는지 몰라서 그저 신랑의 초등학교 쩍 이야기를 했다.

신랑 아무개 군은 초등학교 때 무척 오줌싸개였습니다.
와하하.
그리고 개구쟁이였던 신랑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대부분 주례사를 했다. 주례사를 하면서 주례도 웃고 하객들도 웃음바다였다.
주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육개장을 앞에 놓고 후루룩 먹으며 결혼식장은 웃음꽃을 피웠다. 그곳에는 권위도 겉치레도 강압도 없었다.


박완서는 죽고 없지만 그녀가 남긴 여러 에세이를 읽고 있으면 입 꼬리가 이렇게 올라간다. 정겹고 무엇보다 소박하다. 소박한데 풍성하고 단순하면서 속은 알차다. 그래서 읽고 나면 기분이 좋다. 그런 그녀의 글에서 국밥에 관한 에피소드를 읽으니 웃음이 나온다. 아마도 글의 힘이 아닐까. 국밥은 왜 그런지 서민 음식이라는 색깔이 강하다. 처음 만나서 국밥을 먹으러 가는 경우는 잘 없다. 조신하게만 먹을 수 없는 국밥을 마주하고 같이 먹는 인간관계라면 두 사람은 아주 친숙한 사이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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