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친은 70 평생 트로트를 듣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모친은 주로 패티 김을 자주 들었다. 중학교 시절 아침이면 듣기 싫어도 늘 들리는 패티 김의 노래들. 가시나무 새,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서울의 찬가, 이별 등 어린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듣지는 않았지만 잠결에 패티 김의 노래는 링겔한스섬을 통해 온 몸으로 흡수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패티 김의 노래는 거의 다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패티 김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관심이 가게 되었고 길옥윤과의 불같은 사랑, 둘 사이에서 정아라는 딸이, 이혼 후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카밀라를 낳았다. 카밀라는 후에 가수가 되어 성시경과 듀엣곡을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모친과 함께 패티 김의 공연을 본 후로 나 혼자서도 두 번인가 더 가서 보게 되었다. 내 또래는 없었고 내 주위의 어머니들보다 내가 패티 김의 노래를 더 잘 따라 부르는 것에 나도, 어머니들도 놀랐다. 패티 김의 공연을 가보면 카밀라가 늘 나와서 엄마의 공연을 빛내준다. 그리고 앙코르 소리가 작으면 패티 김은 커튼콜의 커튼에 몸을 베베 꼬으며 너무한다고 교태를 부리기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큰 소리로 앙코르 앙코르를 외치고 패티 김은 다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길쭉한 팔을 들어 올리며 이별을 불렀다.

적어도 내가 본 모친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트로트를 듣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어느 날 모친은 임영웅과 영탁(아버지의 이름과 같다. 그래서 자주 모친은 거론한다)과 더불어 미스터 트롯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미스터 트롯이 무엇이기에 70 평생 트로트를 듣지 않았던 모친마저 임영웅, 영탁, 임영웅, 영탁 하는지. 그 뒤로 폭주기관차처럼 모친은 대단했다.

임영웅의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도 꿰고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 어머니 밑에서 컸다느니, 돈도 많을 텐데 자취방은 아직 학생들 자취방 같다느니, 영탁은 노래를 저렇게 잘 부른다느니, 동원이는 민호는(보통 장민호는, 정동원은,라고 하지 친근하게 이름만 부르지 않는데 마치 옆집의 아들처럼 민호는 동원이는,라고 한다) 둘이 늘 붙어 다닌다느니. 노래 이외에 생활에 대해서도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건 오래전 모친이 좀 더 젊었을 때 패티 김의 손짓 하나에 관심을 보였던 것과 비슷했다. 티브이를 틀면 여기저기서 미스터 트롯이 봇물처럼 나온다. 보니까 모든 방송사에서, 모든 프로그램에서 미스터 트롯의 4인방 내지는 7인을 모시려고 안간힘을 쓴단다. 그들이 나오면 일단 사람들의 관심이 터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 임영웅이 패티 김의 이별을 불렀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로 시작하는 노래는 패티 김이 길옥윤을 생각하며 부른 노래다. 두 사람이 일본에서 처음 만나 불꽃처럼 피어올라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을 때는 월남전이 한창이었을 때라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위문공연으로 대신했다. 정글 속에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장병들에게 '타향살이'를 불렀을 때 군인들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그랬던 패티 김의 노래 '이별'을 시간이 지난 후 임영웅이 불렀다. 


https://youtu.be/L1A8Gh4fivw


아아 정말 잘 부르더라. 나의 모친은 마치, 오래전 하늘로 가버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듯한 눈빛을 띠며 임영웅의 노래를 들었다. 어떤 미사여구로 임영웅의 목소리를, 노래를 표현하기보다 누군가의 말처럼 임영웅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90세 할머니도 타임머신을 타고 뿅 소녀로 돌아간다. 영웅은 신기한 보물이다. 주위를 선하게 이끄는 마력이 있다, 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어쩌려고 티브이 이곳저곳에 먹는 녀석들보다 더 재방이 많이 되고 광고마다 나오고 예능에도 전부 미스터 트롯이야,라고 불만이 있었는데 모친이 이렇게도 좋아한다. 정말 옆에서 보면 소녀가 된 것 같다. 그러면 된 것이다.



패티 김은 젊었을 때의 목소리보다 60세 이후의 목소리가 참 듣기 편하고 좋다. 그건 아무래도 노래에 스토리가 묻어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여기 못 배우고 껄렁하고 고리대금업자의 뒷일을 하면서도 불쌍해서 돈도 제대로 못  받고 두목이 때려주라는 것도 잘 못하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농담이나 내뱉는 뒷골목의 쓸쓸함과 페치카의 따뜻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남자 록키 발보아가 있다. 록키는 감성적이다

록키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이탈리아에서 온 종마다. 돈을 걸어 내기를 하는 3류 복서장에서 몸을 혹사시킨다. 70년대 미국은 기회의 나라였다. 그런 나라의  필라델피아는 미국 독립의 성지이며 그 해가 독립 200년이 되는 해였다. 사람들이 열광할 수 있는 이벤트가 필요한 슈퍼스타 크리드는 화젯거리를 찾아서 록키 발보아를 지목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신과 인간의, 슈퍼 복서와 삼류 복서의 시합이 시작된다

록키는 삼류 복서로 내기를 위해 시합을 하기 때문에 여기저기 몸이 성할 날이 없다. 아직 나이도 젊은데 벌써 60전을 뛰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권투의 포즈도 없고 아무렇게나 주먹을 휘두르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복서다

록키의 말투는 배운 것 없고 배우기  싫고 나 몸으로 되는대로 먹고살아,라는 말투다. 그런데 그런 말투가 영화가 진행될수록 아주 친밀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눈두덩이 다 터져 에이드리안을 부르짖을 땐 그 말투가 사랑스러워진다

록키는 동물용품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애이드리안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우리는 록키에게 점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농담을 하기 위해 쓸쓸한 집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반기는 거북이와 금붕어에게 농담 연습을 한다

어둡기만 한 필라델피아 골목은 록키의 앞날과도 같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세계. 그것이 록키의 미래였다. 하지만 록키는 자신도 힘들고 앞이 캄캄하지만 친구의 여동생을 악의 소굴에서 데리고 집으로 바래다준다던가, 주위를 돌아보고 사람들을 챙긴다. 그리하여 시합을 위해 새벽마다 조깅을 할 때 먹고살기 힘든 시장 상인들이 록키에게 사과 같은 것을 던져준다

애이드리안과 처음으로 데이트를 할 때 그 둘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인다. 아이스링크를 두 사람이 타는 장면에서 낭만이라고는 1도 없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두 사람은 함께 있는 것이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은 정말 멋지다. 판정승을 한 크리드. 사람들은 록키에게 재시합을 할 거냐고 묻는다. 록키는 뭐라고 했을까. 록키의 얼굴이 찰흙을 벽에 던져 흘러내리는 것처럼 될 때 애이드리안의 마음은 깨진다. 애이드리안 얼굴을 비추는 그 장면이 압권이며 마지막 에이드리안만을 부르며 그녀가 달려와 안겼을 때는 박수가 절로 나오는 영화

몇 번을 봐도 좋은 영화다. 지치고 쓰러질 때 록키의 주제가를 들으면 어김없이 저 필라델피아 광장의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 양손을 높이 들고 싶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앞도 보이게 될 것만 같다

#영화 #이야기 #록키1 #발보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추석 때 조카 네가 왔다. 코로나 시기라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꼼짝 않고 집에만 있었다. 딱 이 자세로 서른 시간 정도를 먹고 마시다 졸면 한 편에서 좀 자다가 일어나서 또 마시고 먹고 이야기를 하다가 또 잠 오면 누워서 쿨쿨 자다가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접시 위에 음식이 떨어지면 다시 채워 놓고 술이 떨어지면 다른 술을 가져다가 먹고 마셨다. 중간에 나는 일어나서 먹은 것을 빼기 위해 집 근처 저수지를 한 시간 정도 또 신나게 달렸다. 하지만 무용지물.


조카를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키가 큰 지 아버지 때문에 초등학생이 벌써 160이 다 되어 간다. 그런데 지 친구들 중에서는 가장 키가 작다고 한다. 동생의 남편은 암튼 잘 먹는다. 많이 먹는다. 키가 커서 그런지 먹는 것이 살로 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보인다. 불평등의 세상이다. 늘 그렇듯이 결혼을 할 때에는 동생의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반대를 했던 모친이었는데, 역시 늘 그렇듯이 지금은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었다. 동생과 동생의 남편은 기자와 카메라맨으로 만났다.


동생은 여자치고 참으로 무뚝뚝하고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교복만 입은 모습만 봤는데 어느 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생활을 하러 떠나서 그곳에서 취직을 하고 남편을 만나 조카를 낳고 눌러앉아 버렸다. 대학교 졸업을 하기 전 모친이 동생이 살고 있는 집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한 번 올라가 보라고 해서 올라가서 며칠 지냈던 적이 있었다.


영화 기생충처럼 말로만 듣던,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단 한 채도 없는 반지하였다. 동생은 한양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가까운 뚝섬에서 자취를 했다. 동생은 일찍 취직이 되어서 쪼랩 기자라서 새벽부터 나가고 나는 계속 잠들어 있었다. 아침이라 눈을 떴는데 아직 컴컴해서 이제 한 8시 정도 되었나? 싶었는데 시계를 보니 오후 1시였다. 맙소사. 그런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당시 서울예전 사진 과에 친구가 다니고 있어서 그치들과 어울려 충무로, 명동 같은 곳을 휘저으며 돌아다니고 술을 마시느라 늦게 동생 집에 들어와서 잠들었다가 일어나면 그렇게 오후가 된 시간이었다. 반지하는 불을 켜지 않으면 컴컴했다. 창문을 열면 정말 땅바닥이 반 정도 보였다. 동생은 대학교 다닐 때 학교신문에 학생 운동에 관한 만화를 그려서 연재를 하다가 기관에서 잡으러 와서 잠깐 해외에 도망 다니기도 했다. 지금 아이의 엄마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동생 남편은 큰 ENG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동생이 꼭지 기사를 따는 곳에서 조를 형성해서 같이 붙어 다녔다. 동생 남편은 외주 회사 소속으로 방송국 일이 없을 때는 가수들의 공연을 따라다니며 공연을 촬영하기도 하는 일을 했다. 한 번은 그때도 명절이었는데, 동생이 집으로 오면서 꼭지를 하나 따서 가야 한다며 자신의 짐과 함께 큰 ENG 카메라까지 들고 왔다. 동생 남편은 당시에는 결혼하기 전이라 전라도의 집으로 가야 했다. 때문에 동생 남편이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하라는 것이다.

다음 날 오전 일찍 집에서 출발해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지정된 곳에서 인터뷰를 따고 하는데 카메라에 배터리가 다 됐다는 알림 등이 켜졌다. 아직 한참 남았는데, 동생이 그 전날 충전을 한다고 했는데 잘못한 것이었다. 관계처에서 우리에게 일단 점심으로 중국음식을 시켜 주었고 우리는 그걸 먹으면서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할 수 없이 집에서 명절 준비를 하고 있을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지금 네가 우리 집으로 가서 보조 배터리를 들고 여기, 부산 무슨무슨 동 무슨무슨 건물까지 와야겠다고 했다.


그렇게 몇 시간 뒤에 친구는 배터리를 들고 와서 다시 인터뷰를 따고 촬영을 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의 인터뷰는 관계된 사람들의 인터뷰라 미리 연락이 되어 있어서 인지 순조롭게 했지만 다음 인터뷰는 길거리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티브이를 볼 때는 모두가 인터뷰에 잘 따라주는 걸로만 생각했는데 전혀, 1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친구가 지나가는 행인처럼 해서 인터뷰를 땄다. 엉망진창이었다. 심한 사투리에 힐끔거리는 어정쩡한 모습이나 몇 줄 안 되는 것도 숙지하지 못해서 제멋대로 말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내가 호기롭게 했다. 친구가 카메를 들고.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둘이서 엔지를 얼마나 냈는지 모른다. 주작을 하는 것도 이렇게나 어려웠다. 시간 흐른 후에 동생이 회사에서 우리가 나온 영상만 따로 분리해서 보내줬는데 보자마자 바로 폐기 처분했다. 정말 보기 싫었다.


둘이 결혼하기 전 한 번은 동생 남편인 그 녀석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있는 도시에 공연이 있어서 이틀 동안 머무르다 이제 가게 되었다고 만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곳까지 가서 그 녀석을 만났다. 그 녀석은 국밥을 먹으면서 소주를 한 병이나 금방 비웠다. 그러더니 나에게 어머니에게 드릴 용돈을 봉투에 넣어서 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거절했다. 전달하려면 직접 하라고 했다. 우리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없다. 단지 그 녀석은 술을 마시고 나는 차가 있어서 밥만 먹었다. 그리고 집으로 오는데 차 뒷문으로 돈을 휙 던지고 가는 것이다.


동생에게 연락이 와서 이런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 둘이는 헤어졌다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그리고 7개월인가 8개월 정도 지나서 둘이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다시 만나고 싸우고 뭐 그런 일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모친은 그 녀석의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결혼을 반대한다고 했다. 하지만 동생이 같이 사는 건 모친이 아니라 그 녀석이다. 둘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왜냐하면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집에서 떨어져 나가 꽤 긴 시간 동안 홀로 어딘가에 부딪히면서 지냈기 때문에다- 그렇게 믿어주는 게 맞다.


동생은 영양실조로 한 번 병원에 실려 간 적이 있었는데 한창 바쁠 때에는 5시에 일어나서 일하러 가서 자정 전에는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밥도 끼니를 때우는 식으로 이동을 하면서 김밥이나 샌드위치 같은 것으로 먹다 보니 아마도 그렇게 쓰러졌다. 그때 옆에서 간호를 해 주었던 사람이 그 녀석이었다. 사랑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조금씩 이어 붙는다. 둘은 동갑이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거나 호칭을 빼고 말하거나 이렇게 둘러앉아서 하루 종일 술을 마실 때면 야, 니, 같은 호칭을 한다.


니가 그때 그랬잖아.
내가? 아니야 니가 그랬지.
서로 니가 했니 네가 했니 하다가 조카에게 바통이 넘어간다.
지인아 그때 엄마야? 아빠야?


결혼식은 명동에서 했다. 주례가 없었다. 결혼식은 한 10분? 아니다 한 20분? 만에 끝나고 식사시간이 아주 길었다. 한두 시간 정도 되었다. 식사시간이 기니까 아주 좋았다. 두 사람은 축의금 전부를 하객의 식사에 쏟아부었다. 그러고도 아마 두 사람의 돈이 더 들어갔다. 참 이상한 녀석들이다. 이 이상한 행동은 후에도 한 번 하게 된다. 결혼식에서 두 사람은 식탁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그때가 이미 임신 5개월 째라는 것도 나는 몰랐다. 모친은 나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고 했다. 이유는 내가 알면 큰일 날 줄 알았다고 한다. 소리 지르고 큰일 내는 건 전혀 나의 스타일이 아니고 모친도 나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텐데 참 이상했다. 나는 애가 딸린 남자와 결혼을 하던, 결혼을 하기 전에 애를 낳던 둘이 좋으면 나는 그만이다. 지금까지 두 사람에 대해서, 조카에 대해서, 조카 네가 사는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웨딩앨범을 나에게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그래 알겠어.라고 하고는 아직까지 못 만들어주고 있다. 하하하.


아기가 태어나니 자유로운 영혼, 잔다르크 같았던 동생은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 살고 있는 곳을 떠나 경기도로 이전을 했고 힘든 기자 생활을 버리고 좀 더 나은, 월급을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동시에 그 녀석도 카메라를 던져 버리고 꼬박꼬박 매달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갔다. 아이의 존재가 두 사람에 컸던지 조카가 태어나고 두 사람의 모든 방향이 조카에게로 쏟아졌다. 위에서 말 한 이상한 일을 한 번 더 한 것이 조카의 첫 돌잔치도 하지 않았다. 그간 주위 사람들의 경조사에 다니면서 뿌린 경조사비를 악착같이 받아야 해?라고 하더니 백일 사진은 우리 집, 거실에서 천을 배경 삼아 대충 찍어서 액자로 만들었고 돌잔치도 어딘가 뷔페에서 하지 않고 집에서 조촐하게 하고 그대로 넘어갔다.  돈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집착은 하지 않았다. 동생의 남편은 장사를 해보고 싶다며 또 편의점을 몇 년 운영하기도 했다. 참 재미있는 녀석들이다.


야이 놈들아 나를 죽여라 ㅋㅋ


대충 똑딱이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아이의 방을 따로 마련할 수 있는 집을 구하고 자동차를 바꾸고 그렇게 사는 꼴이 바뀌었다. 급진적인 면모나 어딘가에 대항을 하거나 마냥 나 좋아서 하는 일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에서 멀어졌다든가 불행하다든가 하는 모습은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기 전에 정기적으로 유기견보호센터를 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는데 곧 안락사를 당할 땅콩이와 눈이 마주쳐 그만 분양을 하고 말았다. 


우리 집에도 유기견 두 마리가 이미 살고 있었다.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둘 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그대로 가족이 되어 버린 녀석들이다. 그래서 조카가 태어나기 전에 땅콩이를 데리고 집에 오면 집이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조카는 불행하게도 개털 알레르기를 달고 태어났다. 같이 지낼 수 없었다. 그랬던 녀석들이 지금은 모두 별이 되었다. 모두 잘 화장해서 잘 묻어 주었다. 버림받았지만 우리와 지내는 동안 조금은 행복했으리라 생각한다.


집에는 이미 유기견 두 마리가 있었다
티박이와 곱슬이. 거기서 편안하게 잘 살고 있지? 모기소리에 놀라지 말고


그렇게 한 가족의 형태를 갖춘 조카 네는 경기도의 한 곳, 한 집에서 서로 옹기종기 모여 지내고 있었다. 조카가 걷기 시작하고 어린이 집에 다니게 되었다. 동생과 동생의 남편은 조카의 교육을 위해 학군이 좋은 곳으로 다시 이사를 하게 되어서 그곳의 어린이 집에 보내게 되었다. 소문이 좋은 어린이 집이었다. 들어가기도 힘든 어린이 집으로 경쟁률 또한 치열했다. 동생과 동생의 남편은 이왕 다닐 거 좋은 곳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가르치자고 생각했다. 거기에 다닌 지 일 년 정도가 지났을 때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조카는 집으로 오면 엄마와 한 시간 정도 집 근처를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동생은 당시에 교육을 위해 재택근무로 돌렸고 회사에서는 그렇게 해 주었다. 업무에 차질이 없다면 그렇게 해주는 회사와 동료들이 고마웠다. 내가 아니라 동생이 그런 마음이었다. 조카는 엄마의 손을 잡고 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모든 신기한 것들에 대해서 말을 쏟아낼 때였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서 울며불며 어린이 집으로 들어갈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 가까이 지났고 이불도 혼자 개고 먹을 때에도 가만 앉아서 먹는다. 모든 게 엄마의 입장에서는 신기하고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산책을 하는 조카가 자꾸 한쪽 다리를 저는 것이다.


다리가 아프다, 이쪽 다리가 아프다, 산책을 한지 시간이 지나면 절뚝거리는 정도가 조금 심해졌다. 동생은 조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더니 이건 맞아서 이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아니라 구타가 지속적으로 된 것이다. 의사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조카를 위해 소문 좋은 어린이 집에 보냈는데 다리를 절뚝거릴 정도가 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 마음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의사의 소견서, 경찰, 보건소, 등등의 사람들과 함께 어린이 집의 추궁에 들어갔다. 두 살 많은 남자아이가 조카의 다리를 지속적으로 걷어 찬 것이다. 그 남자아이에게 다리를 걷어 차인 아이가 조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남자아이는 그 어린이 집 원장의 막내아들로 끔찍이도 아끼는 자식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쉬쉬하게 된 것이다. 쉬쉬한 것이 먹힌 것은 그 어린이 집이 발도로프 교육으로 정평이 난 집이었다. 그 후 아이와 아이들, 그리고 부모들 모두가 상처를 떠안게 되었다.


티라미수를 처음 맛 본 날


뭐가 뭔지 아직 모를 때


할모니에게 귀마개 쓰는 방법을 알려주며 재미있는 한 때


그런 일들을 겪고 지금 우리는 한 밥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셨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이야기도 있었다. 옆에서는 다리가 붉은 노을의 꽁지처럼 긴 조카가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보통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행복은 저축을 하려고 한다. 행복이라는 게 먼 미래에 필요할 때 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재미있게 지내면 그만이다. 그 사실을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마치 대학교 시절 엠티를 온 것 같은, 어디 펜션에 놀러 와서 하루 종일 먹고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렇게 집구석에 꼼짝 안고 앉아서 보냈던 명절의 이야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ttps://youtu.be/GppVzuwaK-Y


무진은 그런 곳이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는 입김과 같았다.

영화 속에서는 여귀라는 말 대신 마녀라고 했다. 김승옥의 안개 이후 그 어떤 소설가도 안개를 이렇게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다.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 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그런 곳이 무진이었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 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 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어 하고 조용히 잠든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제약회사에서 이름뿐인 전무인 윤희중이 상상하는 약은 그런 것이다. 자신의 힘없음과 무지와 그것을 알려주는 문장이 이어진다. 윤은 사실 시골에서 상경하여 성공의 가도에 올라있는 모든 이들을 대변하고 있다. 그 말은 60년대의 윤은 작금의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은 것, 그건 상쾌한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윤희중이라는 이름 대신 윤기중으로 나온다.

골방 안에서의 공상과 불면을 쫓아 보려고 행했던 수음과 곧잘 편도선을 붓게 하던 독한 담배꽁초와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던 초조함 따위거나 그것들에 관련된 어떤 행위들이었었다.

윤은 무진에서의 처지가 그랬다. 무진은 그를 책임과 무책임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처지의 인간으로 만들었다. 어머니와 친구들이 죽어가는 전장의 사이에서 윤은 고뇌에 휩싸여 그저 할 수 있는 건 담배를 피우고 수음을 하는 것뿐. 이런 무진에서 빨리 벗어나고픈 윤이었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간다. 과거의 윤과 현재의 윤이 무진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보내고 있는지 보여준다.

오늘 이른 아침, 광주에서 기차를 내려서 역구내를 빠져나올 때 내가 본 한 미친 여자가 그 어두운 기억들을 홱 잡아 끌어당겨서 내 앞에 던져 주었다. 그 미친 여자는 나일론의 치마저고리를 맵시 있게 입고 있었고 팔에는 시절에 맞추어 고른 듯했다. 그 여자가 미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쉬임 없이 굴리고 있는 눈동자와 그 여자를 에워싸고 서서 선하품을 하며 그 여자를 놀려 대고 있는 구두닦이 아이들 때문이었다.

결혼하셨다구요. 자넨? 전 아직, 참 좋은 데로 장가드셨다고들 하더군요.
형님하고 형님 동기 중에서 조 형 하고요. 조라니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애 말인가?

소설 속 ‘조’가 영화에는 조한수로 나온다. 두 사람은 세무서장이 된 조의 집으로 간다. 거기서 하인숙을 만나게 된다.

하인숙, 얼굴은 노리 기리 했다. 병약한 느낌을 주고 있었지만 그러나 좀 높은 콧날과 두꺼운 입술이 병약하다는 인상을 버리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하인숙을 연기한 배우는 윤정희다. 아주 어린 모습의 윤정희로 당시로는 볼 수 없는 예쁜 얼굴의 배우였다. 무진기행은 3번 영화가 되었다. 67년도에, 76년도, 87년도에 한 번씩 만들어졌다. 윤정희는 두 번 하인숙으로 열연했다.

김승옥의 유머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하 선생의 좋은 점과 하 선생의 나쁜 점을 말하며 모두가 푸하하 하며 웃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노래 한 곡을 부르게 한다. 윤희중, 극 중 윤기중이 하 선생의 노래를 듣고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트로트도 아닌 가극도 아닌 것처럼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대사에서 잘 와 닿지 않는다면 영화를 보면 윤정희가 노래를 그렇게 소설의 문체를 그대로 연기를 하고 있다.

윤과 하 선생이 밤의 무진을 걸어가면서 대화를 하는 장면이다. 여기서도 김승옥의 유머가 나온다. 소설과 다른 점이 있는데 하 선생이 무진은 밤에 아름다운 곳이라고 할 때 윤은 다행이라고 한다. 왜 다행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고 하 선생이 말하니 윤은 왜 그런 것이냐고 묻는다.

사실은 멋이 없는 고장이니까요. 제 대답이 맞았나요?라고 하 선생이 말하니 소설에서는 윤이 거의라고 하지만 영화에서는 80점이라고 하고, 어머 100점이 아니구요?라고 하 선생이 말하니, 윤이 백 점짜리 대답은 이런 것입니다. 아이구 여기도 지구의 일부분입니까,라고 한다. 이런 부분은 김승옥의 위트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왜 김승옥이라고 하냐면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도 김승옥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인숙과 윤희중의 유명한 대사 개구리울음소리를 하늘에 뜬 수많은 별에 빗대어하는 대사들이 죽 이어진다. 대사지만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정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멋진 문체가 죽 이어진다.

내일 아침 걸레로 닦아 내면 될 방의 어느 곳에 털어 버리는 담뱃재는 마치 윤희중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소설은 3장 ‘바다로 뻗은 긴 죽방’으로 이어진다.

누구나 한 번쯤 필사를 해 본 무진기행, 무진기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반나절을 주절주절해도 모자랄 것 같다. 만약 김승옥이 절필을 하지 않고 김수용 감독이 계속 김승옥의 영화를 만들어 냈다면 어땠을까.

무진기행이 나오고 3년 뒤 영화로 나온 ‘안개’다. 김수용 감독은 문예 감독으로 김수용 감독 이전에는 대체로 일본 문학이나 일본 영화, 또는 프랑스 영화를 한국식으로 바꾼 영화들뿐이었다. 맨발의 청춘도 그랬다. 60년대는 한국의 영화 르네상스였기에 흑백영화지만 보면 대체로 재미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학창 시절 사진부를 하면서 한국 흑백영화를 많이 본 편이었다. 오발탄부터 최은희의 상록수, 이조 여인 잔혹사(이 영화에는 김지미, 윤정희, 남정임, 황정순이 다 나옴)까지, 그럴 때마다 나는 늘 특이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 영화들을 보면 그래픽이 없기에 구성이 탄탄하고 배우들이 귀신이 들린 듯 연기를 한다. 그래서 오래된 영화지만 재미있다.

김수용 감독은 문예영화의 거장으로 이광수의 소설 ‘유정’부터 김동리의 소설, 현진건의 소설까지, 많은 한국 문학의 문체를 영화적인 문채로 옮겨다 놓은 정말 멋진 감독이다. 문예영화다 보니까 소설을 헤치지 않고 소설의 대사가 거의 대부분 영화에 쓰이고 있다. 마치 빨강 머리 앤의 소설과 만화의 대사가 거의 똑같듯이.

이 영화의 재미있는 일화는 시나리오를 김승옥이 직접 썼는데 그때 김수용 감독이 김승옥에게 붙어서 제발 어렵게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김수용 감독 역시 20년대 생으로 2000년의 영화를 마지막으로 활동이 없다. 무진기행의 신성일도 삶이 끝났고 김수용 감독도 이제 지난날보다 남은 날이 짧을 것이다. 그리고 김승옥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

-김승옥이 등장했을 때 모국어의 폭발로 그야말로 문학계에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누나 작가들에게 끌려가서 엄청 귀여움을 받았다고 해요. 박경리 같은 선배 누나들은 김승옥이 그렇게 좋았나 봅니다. 막 목에 팔을 걸고(까지는 아니겠지만) 끌고 가서 술을 마시고. 하지만 남자 작가들에게는 벼락과 같은 일이었어요. 김훈,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 역시 경향신문 문화부 편집국장까지 했는데 1대 문인이지 않습니까. 그 당시 꼬꼬마 김훈에게 주전자에 술을 받아오라 시켜서 매일 밤마다 문인들을 모아 놓고 했던 이야기가 김승옥이라는 괴물의 글을 읽어 봤냐? 이제 우리의 밥줄은 다 끊겼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의 충격으로 절필을 선언했을 때 이어령 박사가 붙잡아서 호텔에 던져 놓고 글을 계속 쓰게 했는데 그때 쓴 소설이 ‘서울의 달빛’이었는데 그걸 죽, 끝까지 썼다면 서울의 달빛 0장에서 1장, 2장, 3장으로 이어졌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만 다 던져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서울의 달빛 0장만 탄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풍이 와서 몸이 좋지 않은데 그래도 가끔 인터넷을 보면 할아버지 김승옥을 보러 많은 젊은이들이 가기도 하고 잘 만나주기도 한다고 해요. 이만희 감독 영화는 여로도 본 것 같고, 만추도 보고 삼포 가는 길도 봤는데 기억은 가물가물해요 모두. 삼포 가는 길에 설원이 나오는 것 같은데 설원이 펼쳐지면 늘 젊은 날의 초상에서 영훈이 역을 했던 정보석이 배종옥이 있던 술집으로 가기 전의 설원을 덜덜 떨며 걷던 장면이 오버랩되네요- 나와 P의 대화 중


무진기행은 아름다운 문체의 시와 시가 이어진 문장이다.


현재의 아내는 과거의 엄마.

현재의 인숙은 과거의 자신.

현재의 무진과 과거의 무진.

동경하던 서울과 벗어나고픈 서울.

책임의 서울과 무책임의 무진.

치욕스럽던 과거와 치욕마저 잊고 지낸 현재.

쓸쓸함을 말할 수 있었던 과거와 부끄러움만 지닌 현재.

현재의 아내의 남편의 자리에 들어가는 윤.


개 두 마리의 교미는 사이렌 소리 속에 창부와 교미를 하는 상상하는 자신이 결국 인숙과 몸을 섞는 관계로 이어지고 현재의 윤은 과거의 자신과 몸을 섞음으로 그 치욕을 치욕으로 덮으려 한다.


과거의 윤에게 쓸쓸함이란 시간의 지루함, 느끼는 허전함,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다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생활을 쓸쓸하다,라고 느낄 수 있었다. 윤에게 사랑은 쓸쓸함과도 같다. 사랑을 하게 되면 쓸쓸해진다. 너무 흔한 말이라 할 수 없는 말 사랑, 하지만 간단히 말해버리고 마는 윤.


어머니의 묘를 찾은 윤은 비를 흠뻑 맞는다. 비가 나를 효자로 만들어 주었다. 자기 멸시가 가득한 문장이다. 바지까지 걷어 올리며 묘를 정리하고 있지만 자기 멸시에서 오는 부정. 비가 쏟아져 나는 울고 있음을 대신 떠넘긴다.


죽은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프긴 하지만 아끼지 않으면 안 될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체를 보며 정욕을 느낀 자신이 치욕스럽고 경멸스럽다.


인숙과 맞잡은 손. 우리가 잡고 있는 손바닥과 손바닥의 틈으로 희미한 바람이 새어 나가고 있었다. 바람은 두 사람의 사랑, 쓸쓸함, 부끄러움, 연민, 자기애 또는 자기모멸이었으리라. 두 사람은 바쁘게 서두를 것이고 상처가 났어도 아프지 않고 상처가 없는데 아플 것이다.


무진은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안으로 들어와서 봐야만 보이는 세계.

그곳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동시에 교접하는 무서운 세계.



짧게 쓰지 못하는 병에 걸렸는지,, 죄송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자야는 당시의 여성으로는 보기 드물게 인텔리 여성이었다. 과부인 어머니가 깨어난 여성이라 공부와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일본이 다른 모든 산업을 막고 광산업만 허락한 조선에서 광산의 붐은 많은 조선 사람들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자야의 집은 마당과 안채, 별채가 있는 좋은 집이었지만 사촌이 집문서를 훔쳐 광산 사업에 투자를 했다가 망하여 자야는 기생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그녀의 영험함을 알아본 조선어학회에서 그녀를 일본으로 유학을 보낸다.


기생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공부의 길을 열게 해 준 어학회 선생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본에서 공부를 한다. 그러던 중 어학회의 최순자(해방 후 재무부 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냄) 선생이 동경 청년회관에 볼일을 보러 왔다가 자야를 만나서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자야를 일본에서 하와이로 유학을 보내 조선의 여성 일꾼을 만들고자 논의 중이라는 귀한 소식을 듣고 준비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소식이 감감하여 알아보니 조선어학회의 몇몇이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의 형무소로 수감이 되었다.


자야는 자신의 은인인 선생이 옥중생활을 하고 있어서 먼 길을 가서 면회를 요청하지만 일본인 옥리는 그 앞에서 단 번에 거절을 한다. 자야는 조선어학회 민족지사들이 갇혀 있는 함경도 땅을 벗어나지 못하고 함흥에서 엉거주춤 머물게 되는데 그해가 1936년이었다.


자야는 다시 기생이 되어 큰 연회에 참석하여 함흥 법조계의 유력한 인사를 만나 면회를 허락받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훨씬 시간이 지나서 알았지만 민족주의자나 사상범은 일체 면회가 되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에 드디어 한국말 사용을 금했고 치욕의 경술국치 이후 조선 사회의 역사를 뒤엎어버리려는 일제의 흉포한 식민지 학정이 이루어지는 어려운 시기였다. 그 무렵, 자야는 함흥 영생 고보의 한 영어교사를 만난다.


그날 자야는 함흥 권번에 소속이 되어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 집안 함흥 관로 나갔던 첫날이었다. 자야는 옥중 해관 선생을 만나기 위해 타관 객지에 잠시 와서 머물고 있는 처지였고, 서울에서 바람 센 함흥 땅으로 부임해 와 있는 멋쟁이 영어교사, 시인 총각 백석이었다.


두 사람은 그 어려운 시기에 첫눈에 사로잡혀 사랑을 하게 된다. 백석은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고 용기를 얻어 자야의 손목을 잡는다. 꽉 잡힌 자야의 손목에 불꽃 튀는 사랑의 메시지가 뜨거운 전류처럼 화끈거리며 전달이 되었다.


백석은 그 자리에서 자야에게, 오늘부터 당신의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라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예상치도 못한 백석의 말에 자야의 귀는 놀랐고 의심했지만 부드럽고 다정스러운 백석의 말소리는 자야의 뇌리를 찔러서, 허전한 소녀의 텅 빈 가슴에 화살처럼 마구 내려 꽂혔다.


백석은 마누라의 아호를 자야라고 짓고 두 사람은 힘들고 아픈 사랑을 하게 된다. 그때 백석은 약관 26세로 동경의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를 졸업한 준재였고 이미 ‘사슴’이라는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었다.


19세였던 1930년 조선일보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와 아들’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으며 백석은 소설보다 고향의 정경과 토속적인 풍물을 노래한 시에 관심이 많았다.


1934년 이후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었고 그곳에서 발행하던 잡지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 일했다. 그리고 3년 동안 일해온 신문사를 그만두고 1936년 4월 서울을 떠나 함흥의 영생 고보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축구도 잘했고, 이국적인 곱슬머리에 미목이 수려하며 결벽에 가까운 깔끔함이 백석이었다. 당시 서양화가 정현웅은 ‘문장’에 친구인 백석의 프로필을 그리면서 삽화에 그에 대해서 말했다.


‘미스터 백석은 동상과 같이 아름답다. 미스터 백석은 서반아 사람도 같고 필리핀 사람도 같다. 미스터 백석에게 서반아 투우사의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석은 자야와 영화 같은 사랑을 하게 된다. 당신만 아는 이름 ‘자야’, 모던 보이와 북관의 여인들, 바다 같은 사람, 나와 나타샤 등 두 사람의 이야기는 소설을 넘어선다.


‘내 사랑 백석’은 백석이 지어준 아호 ‘자야’, 김자야 여사의 짧은 사랑, 긴 그리움으로 쓴 에세이다. 에세이라고 하지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보다 더 애틋하고 안타깝다. 일제강점기에 사랑을 하게 되어 그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살았던 김자야 여사, 자야의 사랑 이야기.


요즘처럼 ‘사랑해’라는 의미가 퇴색된 지금, 오직 사랑이라는 그 의미에 사무치게, 개츠비가 데이지를 향했던 것처럼 이루어질 수 없어서 더 아름다웠던 백석과 자야의 러브 스토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