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때 조카 네가 왔다. 코로나 시기라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꼼짝 않고 집에만 있었다. 딱 이 자세로 서른 시간 정도를 먹고 마시다 졸면 한 편에서 좀 자다가 일어나서 또 마시고 먹고 이야기를 하다가 또 잠 오면 누워서 쿨쿨 자다가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접시 위에 음식이 떨어지면 다시 채워 놓고 술이 떨어지면 다른 술을 가져다가 먹고 마셨다. 중간에 나는 일어나서 먹은 것을 빼기 위해 집 근처 저수지를 한 시간 정도 또 신나게 달렸다. 하지만 무용지물.


조카를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키가 큰 지 아버지 때문에 초등학생이 벌써 160이 다 되어 간다. 그런데 지 친구들 중에서는 가장 키가 작다고 한다. 동생의 남편은 암튼 잘 먹는다. 많이 먹는다. 키가 커서 그런지 먹는 것이 살로 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보인다. 불평등의 세상이다. 늘 그렇듯이 결혼을 할 때에는 동생의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반대를 했던 모친이었는데, 역시 늘 그렇듯이 지금은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었다. 동생과 동생의 남편은 기자와 카메라맨으로 만났다.


동생은 여자치고 참으로 무뚝뚝하고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교복만 입은 모습만 봤는데 어느 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생활을 하러 떠나서 그곳에서 취직을 하고 남편을 만나 조카를 낳고 눌러앉아 버렸다. 대학교 졸업을 하기 전 모친이 동생이 살고 있는 집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한 번 올라가 보라고 해서 올라가서 며칠 지냈던 적이 있었다.


영화 기생충처럼 말로만 듣던,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단 한 채도 없는 반지하였다. 동생은 한양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가까운 뚝섬에서 자취를 했다. 동생은 일찍 취직이 되어서 쪼랩 기자라서 새벽부터 나가고 나는 계속 잠들어 있었다. 아침이라 눈을 떴는데 아직 컴컴해서 이제 한 8시 정도 되었나? 싶었는데 시계를 보니 오후 1시였다. 맙소사. 그런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당시 서울예전 사진 과에 친구가 다니고 있어서 그치들과 어울려 충무로, 명동 같은 곳을 휘저으며 돌아다니고 술을 마시느라 늦게 동생 집에 들어와서 잠들었다가 일어나면 그렇게 오후가 된 시간이었다. 반지하는 불을 켜지 않으면 컴컴했다. 창문을 열면 정말 땅바닥이 반 정도 보였다. 동생은 대학교 다닐 때 학교신문에 학생 운동에 관한 만화를 그려서 연재를 하다가 기관에서 잡으러 와서 잠깐 해외에 도망 다니기도 했다. 지금 아이의 엄마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동생 남편은 큰 ENG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동생이 꼭지 기사를 따는 곳에서 조를 형성해서 같이 붙어 다녔다. 동생 남편은 외주 회사 소속으로 방송국 일이 없을 때는 가수들의 공연을 따라다니며 공연을 촬영하기도 하는 일을 했다. 한 번은 그때도 명절이었는데, 동생이 집으로 오면서 꼭지를 하나 따서 가야 한다며 자신의 짐과 함께 큰 ENG 카메라까지 들고 왔다. 동생 남편은 당시에는 결혼하기 전이라 전라도의 집으로 가야 했다. 때문에 동생 남편이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하라는 것이다.

다음 날 오전 일찍 집에서 출발해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지정된 곳에서 인터뷰를 따고 하는데 카메라에 배터리가 다 됐다는 알림 등이 켜졌다. 아직 한참 남았는데, 동생이 그 전날 충전을 한다고 했는데 잘못한 것이었다. 관계처에서 우리에게 일단 점심으로 중국음식을 시켜 주었고 우리는 그걸 먹으면서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할 수 없이 집에서 명절 준비를 하고 있을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지금 네가 우리 집으로 가서 보조 배터리를 들고 여기, 부산 무슨무슨 동 무슨무슨 건물까지 와야겠다고 했다.


그렇게 몇 시간 뒤에 친구는 배터리를 들고 와서 다시 인터뷰를 따고 촬영을 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의 인터뷰는 관계된 사람들의 인터뷰라 미리 연락이 되어 있어서 인지 순조롭게 했지만 다음 인터뷰는 길거리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티브이를 볼 때는 모두가 인터뷰에 잘 따라주는 걸로만 생각했는데 전혀, 1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친구가 지나가는 행인처럼 해서 인터뷰를 땄다. 엉망진창이었다. 심한 사투리에 힐끔거리는 어정쩡한 모습이나 몇 줄 안 되는 것도 숙지하지 못해서 제멋대로 말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내가 호기롭게 했다. 친구가 카메를 들고.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둘이서 엔지를 얼마나 냈는지 모른다. 주작을 하는 것도 이렇게나 어려웠다. 시간 흐른 후에 동생이 회사에서 우리가 나온 영상만 따로 분리해서 보내줬는데 보자마자 바로 폐기 처분했다. 정말 보기 싫었다.


둘이 결혼하기 전 한 번은 동생 남편인 그 녀석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있는 도시에 공연이 있어서 이틀 동안 머무르다 이제 가게 되었다고 만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곳까지 가서 그 녀석을 만났다. 그 녀석은 국밥을 먹으면서 소주를 한 병이나 금방 비웠다. 그러더니 나에게 어머니에게 드릴 용돈을 봉투에 넣어서 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거절했다. 전달하려면 직접 하라고 했다. 우리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없다. 단지 그 녀석은 술을 마시고 나는 차가 있어서 밥만 먹었다. 그리고 집으로 오는데 차 뒷문으로 돈을 휙 던지고 가는 것이다.


동생에게 연락이 와서 이런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 둘이는 헤어졌다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그리고 7개월인가 8개월 정도 지나서 둘이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다시 만나고 싸우고 뭐 그런 일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모친은 그 녀석의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결혼을 반대한다고 했다. 하지만 동생이 같이 사는 건 모친이 아니라 그 녀석이다. 둘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왜냐하면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집에서 떨어져 나가 꽤 긴 시간 동안 홀로 어딘가에 부딪히면서 지냈기 때문에다- 그렇게 믿어주는 게 맞다.


동생은 영양실조로 한 번 병원에 실려 간 적이 있었는데 한창 바쁠 때에는 5시에 일어나서 일하러 가서 자정 전에는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밥도 끼니를 때우는 식으로 이동을 하면서 김밥이나 샌드위치 같은 것으로 먹다 보니 아마도 그렇게 쓰러졌다. 그때 옆에서 간호를 해 주었던 사람이 그 녀석이었다. 사랑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조금씩 이어 붙는다. 둘은 동갑이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거나 호칭을 빼고 말하거나 이렇게 둘러앉아서 하루 종일 술을 마실 때면 야, 니, 같은 호칭을 한다.


니가 그때 그랬잖아.
내가? 아니야 니가 그랬지.
서로 니가 했니 네가 했니 하다가 조카에게 바통이 넘어간다.
지인아 그때 엄마야? 아빠야?


결혼식은 명동에서 했다. 주례가 없었다. 결혼식은 한 10분? 아니다 한 20분? 만에 끝나고 식사시간이 아주 길었다. 한두 시간 정도 되었다. 식사시간이 기니까 아주 좋았다. 두 사람은 축의금 전부를 하객의 식사에 쏟아부었다. 그러고도 아마 두 사람의 돈이 더 들어갔다. 참 이상한 녀석들이다. 이 이상한 행동은 후에도 한 번 하게 된다. 결혼식에서 두 사람은 식탁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그때가 이미 임신 5개월 째라는 것도 나는 몰랐다. 모친은 나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고 했다. 이유는 내가 알면 큰일 날 줄 알았다고 한다. 소리 지르고 큰일 내는 건 전혀 나의 스타일이 아니고 모친도 나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텐데 참 이상했다. 나는 애가 딸린 남자와 결혼을 하던, 결혼을 하기 전에 애를 낳던 둘이 좋으면 나는 그만이다. 지금까지 두 사람에 대해서, 조카에 대해서, 조카 네가 사는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웨딩앨범을 나에게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그래 알겠어.라고 하고는 아직까지 못 만들어주고 있다. 하하하.


아기가 태어나니 자유로운 영혼, 잔다르크 같았던 동생은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 살고 있는 곳을 떠나 경기도로 이전을 했고 힘든 기자 생활을 버리고 좀 더 나은, 월급을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동시에 그 녀석도 카메라를 던져 버리고 꼬박꼬박 매달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갔다. 아이의 존재가 두 사람에 컸던지 조카가 태어나고 두 사람의 모든 방향이 조카에게로 쏟아졌다. 위에서 말 한 이상한 일을 한 번 더 한 것이 조카의 첫 돌잔치도 하지 않았다. 그간 주위 사람들의 경조사에 다니면서 뿌린 경조사비를 악착같이 받아야 해?라고 하더니 백일 사진은 우리 집, 거실에서 천을 배경 삼아 대충 찍어서 액자로 만들었고 돌잔치도 어딘가 뷔페에서 하지 않고 집에서 조촐하게 하고 그대로 넘어갔다.  돈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집착은 하지 않았다. 동생의 남편은 장사를 해보고 싶다며 또 편의점을 몇 년 운영하기도 했다. 참 재미있는 녀석들이다.


야이 놈들아 나를 죽여라 ㅋㅋ


대충 똑딱이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아이의 방을 따로 마련할 수 있는 집을 구하고 자동차를 바꾸고 그렇게 사는 꼴이 바뀌었다. 급진적인 면모나 어딘가에 대항을 하거나 마냥 나 좋아서 하는 일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에서 멀어졌다든가 불행하다든가 하는 모습은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기 전에 정기적으로 유기견보호센터를 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는데 곧 안락사를 당할 땅콩이와 눈이 마주쳐 그만 분양을 하고 말았다. 


우리 집에도 유기견 두 마리가 이미 살고 있었다.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둘 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그대로 가족이 되어 버린 녀석들이다. 그래서 조카가 태어나기 전에 땅콩이를 데리고 집에 오면 집이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조카는 불행하게도 개털 알레르기를 달고 태어났다. 같이 지낼 수 없었다. 그랬던 녀석들이 지금은 모두 별이 되었다. 모두 잘 화장해서 잘 묻어 주었다. 버림받았지만 우리와 지내는 동안 조금은 행복했으리라 생각한다.


집에는 이미 유기견 두 마리가 있었다
티박이와 곱슬이. 거기서 편안하게 잘 살고 있지? 모기소리에 놀라지 말고


그렇게 한 가족의 형태를 갖춘 조카 네는 경기도의 한 곳, 한 집에서 서로 옹기종기 모여 지내고 있었다. 조카가 걷기 시작하고 어린이 집에 다니게 되었다. 동생과 동생의 남편은 조카의 교육을 위해 학군이 좋은 곳으로 다시 이사를 하게 되어서 그곳의 어린이 집에 보내게 되었다. 소문이 좋은 어린이 집이었다. 들어가기도 힘든 어린이 집으로 경쟁률 또한 치열했다. 동생과 동생의 남편은 이왕 다닐 거 좋은 곳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가르치자고 생각했다. 거기에 다닌 지 일 년 정도가 지났을 때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조카는 집으로 오면 엄마와 한 시간 정도 집 근처를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동생은 당시에 교육을 위해 재택근무로 돌렸고 회사에서는 그렇게 해 주었다. 업무에 차질이 없다면 그렇게 해주는 회사와 동료들이 고마웠다. 내가 아니라 동생이 그런 마음이었다. 조카는 엄마의 손을 잡고 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모든 신기한 것들에 대해서 말을 쏟아낼 때였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서 울며불며 어린이 집으로 들어갈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 가까이 지났고 이불도 혼자 개고 먹을 때에도 가만 앉아서 먹는다. 모든 게 엄마의 입장에서는 신기하고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산책을 하는 조카가 자꾸 한쪽 다리를 저는 것이다.


다리가 아프다, 이쪽 다리가 아프다, 산책을 한지 시간이 지나면 절뚝거리는 정도가 조금 심해졌다. 동생은 조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더니 이건 맞아서 이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아니라 구타가 지속적으로 된 것이다. 의사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조카를 위해 소문 좋은 어린이 집에 보냈는데 다리를 절뚝거릴 정도가 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 마음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의사의 소견서, 경찰, 보건소, 등등의 사람들과 함께 어린이 집의 추궁에 들어갔다. 두 살 많은 남자아이가 조카의 다리를 지속적으로 걷어 찬 것이다. 그 남자아이에게 다리를 걷어 차인 아이가 조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남자아이는 그 어린이 집 원장의 막내아들로 끔찍이도 아끼는 자식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쉬쉬하게 된 것이다. 쉬쉬한 것이 먹힌 것은 그 어린이 집이 발도로프 교육으로 정평이 난 집이었다. 그 후 아이와 아이들, 그리고 부모들 모두가 상처를 떠안게 되었다.


티라미수를 처음 맛 본 날


뭐가 뭔지 아직 모를 때


할모니에게 귀마개 쓰는 방법을 알려주며 재미있는 한 때


그런 일들을 겪고 지금 우리는 한 밥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셨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이야기도 있었다. 옆에서는 다리가 붉은 노을의 꽁지처럼 긴 조카가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보통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행복은 저축을 하려고 한다. 행복이라는 게 먼 미래에 필요할 때 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재미있게 지내면 그만이다. 그 사실을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마치 대학교 시절 엠티를 온 것 같은, 어디 펜션에 놀러 와서 하루 종일 먹고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렇게 집구석에 꼼짝 안고 앉아서 보냈던 명절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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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GppVzuwaK-Y


무진은 그런 곳이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는 입김과 같았다.

영화 속에서는 여귀라는 말 대신 마녀라고 했다. 김승옥의 안개 이후 그 어떤 소설가도 안개를 이렇게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다.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 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그런 곳이 무진이었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 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 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어 하고 조용히 잠든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제약회사에서 이름뿐인 전무인 윤희중이 상상하는 약은 그런 것이다. 자신의 힘없음과 무지와 그것을 알려주는 문장이 이어진다. 윤은 사실 시골에서 상경하여 성공의 가도에 올라있는 모든 이들을 대변하고 있다. 그 말은 60년대의 윤은 작금의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은 것, 그건 상쾌한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윤희중이라는 이름 대신 윤기중으로 나온다.

골방 안에서의 공상과 불면을 쫓아 보려고 행했던 수음과 곧잘 편도선을 붓게 하던 독한 담배꽁초와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던 초조함 따위거나 그것들에 관련된 어떤 행위들이었었다.

윤은 무진에서의 처지가 그랬다. 무진은 그를 책임과 무책임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처지의 인간으로 만들었다. 어머니와 친구들이 죽어가는 전장의 사이에서 윤은 고뇌에 휩싸여 그저 할 수 있는 건 담배를 피우고 수음을 하는 것뿐. 이런 무진에서 빨리 벗어나고픈 윤이었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간다. 과거의 윤과 현재의 윤이 무진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보내고 있는지 보여준다.

오늘 이른 아침, 광주에서 기차를 내려서 역구내를 빠져나올 때 내가 본 한 미친 여자가 그 어두운 기억들을 홱 잡아 끌어당겨서 내 앞에 던져 주었다. 그 미친 여자는 나일론의 치마저고리를 맵시 있게 입고 있었고 팔에는 시절에 맞추어 고른 듯했다. 그 여자가 미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쉬임 없이 굴리고 있는 눈동자와 그 여자를 에워싸고 서서 선하품을 하며 그 여자를 놀려 대고 있는 구두닦이 아이들 때문이었다.

결혼하셨다구요. 자넨? 전 아직, 참 좋은 데로 장가드셨다고들 하더군요.
형님하고 형님 동기 중에서 조 형 하고요. 조라니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애 말인가?

소설 속 ‘조’가 영화에는 조한수로 나온다. 두 사람은 세무서장이 된 조의 집으로 간다. 거기서 하인숙을 만나게 된다.

하인숙, 얼굴은 노리 기리 했다. 병약한 느낌을 주고 있었지만 그러나 좀 높은 콧날과 두꺼운 입술이 병약하다는 인상을 버리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하인숙을 연기한 배우는 윤정희다. 아주 어린 모습의 윤정희로 당시로는 볼 수 없는 예쁜 얼굴의 배우였다. 무진기행은 3번 영화가 되었다. 67년도에, 76년도, 87년도에 한 번씩 만들어졌다. 윤정희는 두 번 하인숙으로 열연했다.

김승옥의 유머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하 선생의 좋은 점과 하 선생의 나쁜 점을 말하며 모두가 푸하하 하며 웃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노래 한 곡을 부르게 한다. 윤희중, 극 중 윤기중이 하 선생의 노래를 듣고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트로트도 아닌 가극도 아닌 것처럼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대사에서 잘 와 닿지 않는다면 영화를 보면 윤정희가 노래를 그렇게 소설의 문체를 그대로 연기를 하고 있다.

윤과 하 선생이 밤의 무진을 걸어가면서 대화를 하는 장면이다. 여기서도 김승옥의 유머가 나온다. 소설과 다른 점이 있는데 하 선생이 무진은 밤에 아름다운 곳이라고 할 때 윤은 다행이라고 한다. 왜 다행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고 하 선생이 말하니 윤은 왜 그런 것이냐고 묻는다.

사실은 멋이 없는 고장이니까요. 제 대답이 맞았나요?라고 하 선생이 말하니 소설에서는 윤이 거의라고 하지만 영화에서는 80점이라고 하고, 어머 100점이 아니구요?라고 하 선생이 말하니, 윤이 백 점짜리 대답은 이런 것입니다. 아이구 여기도 지구의 일부분입니까,라고 한다. 이런 부분은 김승옥의 위트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왜 김승옥이라고 하냐면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도 김승옥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인숙과 윤희중의 유명한 대사 개구리울음소리를 하늘에 뜬 수많은 별에 빗대어하는 대사들이 죽 이어진다. 대사지만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정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멋진 문체가 죽 이어진다.

내일 아침 걸레로 닦아 내면 될 방의 어느 곳에 털어 버리는 담뱃재는 마치 윤희중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소설은 3장 ‘바다로 뻗은 긴 죽방’으로 이어진다.

누구나 한 번쯤 필사를 해 본 무진기행, 무진기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반나절을 주절주절해도 모자랄 것 같다. 만약 김승옥이 절필을 하지 않고 김수용 감독이 계속 김승옥의 영화를 만들어 냈다면 어땠을까.

무진기행이 나오고 3년 뒤 영화로 나온 ‘안개’다. 김수용 감독은 문예 감독으로 김수용 감독 이전에는 대체로 일본 문학이나 일본 영화, 또는 프랑스 영화를 한국식으로 바꾼 영화들뿐이었다. 맨발의 청춘도 그랬다. 60년대는 한국의 영화 르네상스였기에 흑백영화지만 보면 대체로 재미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학창 시절 사진부를 하면서 한국 흑백영화를 많이 본 편이었다. 오발탄부터 최은희의 상록수, 이조 여인 잔혹사(이 영화에는 김지미, 윤정희, 남정임, 황정순이 다 나옴)까지, 그럴 때마다 나는 늘 특이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 영화들을 보면 그래픽이 없기에 구성이 탄탄하고 배우들이 귀신이 들린 듯 연기를 한다. 그래서 오래된 영화지만 재미있다.

김수용 감독은 문예영화의 거장으로 이광수의 소설 ‘유정’부터 김동리의 소설, 현진건의 소설까지, 많은 한국 문학의 문체를 영화적인 문채로 옮겨다 놓은 정말 멋진 감독이다. 문예영화다 보니까 소설을 헤치지 않고 소설의 대사가 거의 대부분 영화에 쓰이고 있다. 마치 빨강 머리 앤의 소설과 만화의 대사가 거의 똑같듯이.

이 영화의 재미있는 일화는 시나리오를 김승옥이 직접 썼는데 그때 김수용 감독이 김승옥에게 붙어서 제발 어렵게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김수용 감독 역시 20년대 생으로 2000년의 영화를 마지막으로 활동이 없다. 무진기행의 신성일도 삶이 끝났고 김수용 감독도 이제 지난날보다 남은 날이 짧을 것이다. 그리고 김승옥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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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이 등장했을 때 모국어의 폭발로 그야말로 문학계에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누나 작가들에게 끌려가서 엄청 귀여움을 받았다고 해요. 박경리 같은 선배 누나들은 김승옥이 그렇게 좋았나 봅니다. 막 목에 팔을 걸고(까지는 아니겠지만) 끌고 가서 술을 마시고. 하지만 남자 작가들에게는 벼락과 같은 일이었어요. 김훈,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 역시 경향신문 문화부 편집국장까지 했는데 1대 문인이지 않습니까. 그 당시 꼬꼬마 김훈에게 주전자에 술을 받아오라 시켜서 매일 밤마다 문인들을 모아 놓고 했던 이야기가 김승옥이라는 괴물의 글을 읽어 봤냐? 이제 우리의 밥줄은 다 끊겼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의 충격으로 절필을 선언했을 때 이어령 박사가 붙잡아서 호텔에 던져 놓고 글을 계속 쓰게 했는데 그때 쓴 소설이 ‘서울의 달빛’이었는데 그걸 죽, 끝까지 썼다면 서울의 달빛 0장에서 1장, 2장, 3장으로 이어졌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만 다 던져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서울의 달빛 0장만 탄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풍이 와서 몸이 좋지 않은데 그래도 가끔 인터넷을 보면 할아버지 김승옥을 보러 많은 젊은이들이 가기도 하고 잘 만나주기도 한다고 해요. 이만희 감독 영화는 여로도 본 것 같고, 만추도 보고 삼포 가는 길도 봤는데 기억은 가물가물해요 모두. 삼포 가는 길에 설원이 나오는 것 같은데 설원이 펼쳐지면 늘 젊은 날의 초상에서 영훈이 역을 했던 정보석이 배종옥이 있던 술집으로 가기 전의 설원을 덜덜 떨며 걷던 장면이 오버랩되네요- 나와 P의 대화 중


무진기행은 아름다운 문체의 시와 시가 이어진 문장이다.


현재의 아내는 과거의 엄마.

현재의 인숙은 과거의 자신.

현재의 무진과 과거의 무진.

동경하던 서울과 벗어나고픈 서울.

책임의 서울과 무책임의 무진.

치욕스럽던 과거와 치욕마저 잊고 지낸 현재.

쓸쓸함을 말할 수 있었던 과거와 부끄러움만 지닌 현재.

현재의 아내의 남편의 자리에 들어가는 윤.


개 두 마리의 교미는 사이렌 소리 속에 창부와 교미를 하는 상상하는 자신이 결국 인숙과 몸을 섞는 관계로 이어지고 현재의 윤은 과거의 자신과 몸을 섞음으로 그 치욕을 치욕으로 덮으려 한다.


과거의 윤에게 쓸쓸함이란 시간의 지루함, 느끼는 허전함,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다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생활을 쓸쓸하다,라고 느낄 수 있었다. 윤에게 사랑은 쓸쓸함과도 같다. 사랑을 하게 되면 쓸쓸해진다. 너무 흔한 말이라 할 수 없는 말 사랑, 하지만 간단히 말해버리고 마는 윤.


어머니의 묘를 찾은 윤은 비를 흠뻑 맞는다. 비가 나를 효자로 만들어 주었다. 자기 멸시가 가득한 문장이다. 바지까지 걷어 올리며 묘를 정리하고 있지만 자기 멸시에서 오는 부정. 비가 쏟아져 나는 울고 있음을 대신 떠넘긴다.


죽은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프긴 하지만 아끼지 않으면 안 될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체를 보며 정욕을 느낀 자신이 치욕스럽고 경멸스럽다.


인숙과 맞잡은 손. 우리가 잡고 있는 손바닥과 손바닥의 틈으로 희미한 바람이 새어 나가고 있었다. 바람은 두 사람의 사랑, 쓸쓸함, 부끄러움, 연민, 자기애 또는 자기모멸이었으리라. 두 사람은 바쁘게 서두를 것이고 상처가 났어도 아프지 않고 상처가 없는데 아플 것이다.


무진은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안으로 들어와서 봐야만 보이는 세계.

그곳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동시에 교접하는 무서운 세계.



짧게 쓰지 못하는 병에 걸렸는지,,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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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는 당시의 여성으로는 보기 드물게 인텔리 여성이었다. 과부인 어머니가 깨어난 여성이라 공부와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일본이 다른 모든 산업을 막고 광산업만 허락한 조선에서 광산의 붐은 많은 조선 사람들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자야의 집은 마당과 안채, 별채가 있는 좋은 집이었지만 사촌이 집문서를 훔쳐 광산 사업에 투자를 했다가 망하여 자야는 기생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그녀의 영험함을 알아본 조선어학회에서 그녀를 일본으로 유학을 보낸다.


기생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공부의 길을 열게 해 준 어학회 선생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본에서 공부를 한다. 그러던 중 어학회의 최순자(해방 후 재무부 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냄) 선생이 동경 청년회관에 볼일을 보러 왔다가 자야를 만나서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자야를 일본에서 하와이로 유학을 보내 조선의 여성 일꾼을 만들고자 논의 중이라는 귀한 소식을 듣고 준비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소식이 감감하여 알아보니 조선어학회의 몇몇이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의 형무소로 수감이 되었다.


자야는 자신의 은인인 선생이 옥중생활을 하고 있어서 먼 길을 가서 면회를 요청하지만 일본인 옥리는 그 앞에서 단 번에 거절을 한다. 자야는 조선어학회 민족지사들이 갇혀 있는 함경도 땅을 벗어나지 못하고 함흥에서 엉거주춤 머물게 되는데 그해가 1936년이었다.


자야는 다시 기생이 되어 큰 연회에 참석하여 함흥 법조계의 유력한 인사를 만나 면회를 허락받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훨씬 시간이 지나서 알았지만 민족주의자나 사상범은 일체 면회가 되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에 드디어 한국말 사용을 금했고 치욕의 경술국치 이후 조선 사회의 역사를 뒤엎어버리려는 일제의 흉포한 식민지 학정이 이루어지는 어려운 시기였다. 그 무렵, 자야는 함흥 영생 고보의 한 영어교사를 만난다.


그날 자야는 함흥 권번에 소속이 되어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 집안 함흥 관로 나갔던 첫날이었다. 자야는 옥중 해관 선생을 만나기 위해 타관 객지에 잠시 와서 머물고 있는 처지였고, 서울에서 바람 센 함흥 땅으로 부임해 와 있는 멋쟁이 영어교사, 시인 총각 백석이었다.


두 사람은 그 어려운 시기에 첫눈에 사로잡혀 사랑을 하게 된다. 백석은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고 용기를 얻어 자야의 손목을 잡는다. 꽉 잡힌 자야의 손목에 불꽃 튀는 사랑의 메시지가 뜨거운 전류처럼 화끈거리며 전달이 되었다.


백석은 그 자리에서 자야에게, 오늘부터 당신의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라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예상치도 못한 백석의 말에 자야의 귀는 놀랐고 의심했지만 부드럽고 다정스러운 백석의 말소리는 자야의 뇌리를 찔러서, 허전한 소녀의 텅 빈 가슴에 화살처럼 마구 내려 꽂혔다.


백석은 마누라의 아호를 자야라고 짓고 두 사람은 힘들고 아픈 사랑을 하게 된다. 그때 백석은 약관 26세로 동경의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를 졸업한 준재였고 이미 ‘사슴’이라는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었다.


19세였던 1930년 조선일보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와 아들’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으며 백석은 소설보다 고향의 정경과 토속적인 풍물을 노래한 시에 관심이 많았다.


1934년 이후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었고 그곳에서 발행하던 잡지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 일했다. 그리고 3년 동안 일해온 신문사를 그만두고 1936년 4월 서울을 떠나 함흥의 영생 고보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축구도 잘했고, 이국적인 곱슬머리에 미목이 수려하며 결벽에 가까운 깔끔함이 백석이었다. 당시 서양화가 정현웅은 ‘문장’에 친구인 백석의 프로필을 그리면서 삽화에 그에 대해서 말했다.


‘미스터 백석은 동상과 같이 아름답다. 미스터 백석은 서반아 사람도 같고 필리핀 사람도 같다. 미스터 백석에게 서반아 투우사의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석은 자야와 영화 같은 사랑을 하게 된다. 당신만 아는 이름 ‘자야’, 모던 보이와 북관의 여인들, 바다 같은 사람, 나와 나타샤 등 두 사람의 이야기는 소설을 넘어선다.


‘내 사랑 백석’은 백석이 지어준 아호 ‘자야’, 김자야 여사의 짧은 사랑, 긴 그리움으로 쓴 에세이다. 에세이라고 하지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보다 더 애틋하고 안타깝다. 일제강점기에 사랑을 하게 되어 그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살았던 김자야 여사, 자야의 사랑 이야기.


요즘처럼 ‘사랑해’라는 의미가 퇴색된 지금, 오직 사랑이라는 그 의미에 사무치게, 개츠비가 데이지를 향했던 것처럼 이루어질 수 없어서 더 아름다웠던 백석과 자야의 러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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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가요 손이 가는 새우깡은 비 때문인지 요즘 더 인기가 좋은 것 같다. 새우깡을 자갈치와 같이 사 먹었는데 새우깡과 자갈치는 맛이 좀 변했다. 뭐랄까 약간 건강해진 맛? 그러니까 짠맛이 많이 없어졌다. 혹시나 싶어서 며칠 있다가 다른 곳에서 하나 더 사 먹었는데 역시 짠맛이 덜 했다. 새우깡과 자갈치가 변심하고 짠맛을 확 빼버렸다. 흥.


약간 짠맛을 제외한다면 새우깡은 아직도 그 맛 그대로였다. 게다가 매운 새우깡도 나왔다. 하지만 봉지의 뒤편으로 가서 보면 그냥 새우깡에 들어가는 첨가제와 매운 새우깡에 들어가는 첨가제는 많이 다르다. 단순히 봉지 뒤편에 가미된 첨가제만 본다면 그냥 새우깡을 사 먹기를 바란다. 그냥(이라는 말이 웃긴다) 새우깡은 비록 한국산과 미국산의 새우가 섞였지만 새우는 가득하다. 이보게 차를 여기 새우게.


새우깡은 동네 호프집에서 안주가 나오기 전 기본 안주로 나왔을 때가 있었다. 새우깡은 정말 이. 만. 큼. 큰 새우깡 봉지가 있어서 그걸 들고 있으면 뭔가 해낸 것 같은 뿌듯한 느낌마저 든다. 아무리 먹어도 새우깡이 줄지 않기에 기분도 좋다. 호프집에서 새우깡이 기본 안주로 나오면 역시 기분 좋다. 먹고 더 달라고 당당하게 말해도 된다. 사실 맥주에는 새우깡만 한 게 없다. 편의점 앞 벤치나 파라솔에 앉아서 맥주를 마실 때 가장 좋은 안주가 새우깡이다.


예전에 학창 시절에 새우깡을 정말 좋아하는 녀석이 있었다. 이 녀석 새우깡을 얼마나 좋아하냐 하면 매일 손에 새우깡 봉지가 들려 있는데 심지어는 화장실에 대변을 보러 가서도,,,,,,.


집들이할 때에도 새우깡을 놓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같은 걸 하게 된다. 포틀럭 파티를 할 때 새우깡 한 상자를 들고 간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한 봉지씩 뜯어먹는 게 아니라 봉지를 전부 다 뜯어서 상자에 다 쏟아서 먹은 적도 있었다. 그 집 파티에 온 사람들이 처음에는 전부 놀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고 나면 모두가 새우깡 상자에 손을 집어넣고 있다. 새우깡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친구를 챙기는 그런 사람처럼 배가 불러도, 술이 취해도 상자의 바닥을 보일 때까지 사람들의 분주함에 의해 마지막까지 함께 한다. 이 모든 게 추억으로 남는다.


반찬이 집에 없고 허기가 질 때 심지어는 새우깡을 밥 위에 올려 먹어도 맛있다. 정말 맛있다. 꼭 해보시길. 그러니까 식빵을 컵라면에 찍어 먹을 때만큼 맛있다. 식빵은 빨간 국물보다 하얀 국물의 컵라면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다. 물론 개인적인 편견이다.


컵라면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새우깡은 그냥 먹어도 맛있는데 만약 '새우맛이 아주 많이 나는' 새우탕면을 먹고 싶다면 새우깡을 같이 넣으면 된다. 요컨대 편의점에 왔다. 컵라면이 먹고 싶어서 새우탕을 집었다. 그런데 새우탕 만으로는 새우의 맛이 덜 난다? 편의점에도 펄펄 뛰는 새우를 판다면 사 넣겠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되니 새우깡을 한 봉지 구입한다. 그리고 새우깡을 왕창 붓는다. 새우깡은 많이 넣으면 넣을수록 라면에서 새우의 맛이 가득 난다.


집에서 먹는다면 고춧가루도 좀 뿌리고 계란 노른자도 하나 넣는다. 그리고 파도 좀 썰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몇 분 기다린다. 마음이 급한 사람이라면 전자레인지에 넣어서 돌리면 된다. 그러면 새우탕이 정말 새우 맛이 가득한 새우탕이 된다. 보통 다이어트 때문에 국물은 다 마시지 않게 되는 사람도 새우탕의 국물에 빠져 버린다. 그렇다면 꽃게 맛을 느끼고 싶다면 꽃게랑을 넣으면 되는가라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새우탕면이 다 익으면 계란이 풀어져 고소한 데다 고춧가루 때문에 매콤한 맛이 어우러질 때 국물에서는 새우의 풍미가 확 풍긴다. 국물을 버릴 수가 없다. 국물을 버리는 건 죄악이다. 밥이 있다면 말아먹으면 더 맛있다. 그리고 반 정도 남은 새우깡은 냠냠 거리며 아작아작 씹어 먹으면 된다.


#일상에세이 #새우깡 #음식이야기

1단계로 새우깡을 듬뿍 넣는다

고춧가루와 후추와 노른자도 넣는다

파를 썰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와아 새우 맛이 가득한 새우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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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에 삼대 천왕이라는 음식 프로그램이 유행이었을 때 전통시장 표 고로케를 먹은 EXID의 하니가 눈물을 흘려 사람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 대체로 보기 불편했다는 시선이었다. 그 장면에서 하니의 눈물은 연출이 아닌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먹었던 고로케가 추억이 되어 이불처럼 덮이면 충분히 그렇게 된다. 물론 나만의 생각일 테지만.


대부분 라면은 갓 끓여낸 꼬들꼬들한 면발을 좋아한다. 맛도 좋고, 식감도 좋다. 이상하지만 나는 불어 터진 라면도 좋아한다. 그게 맛이라는 것에서 분명 멀어졌을 텐데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불어 터져 죽처럼 되어버린 라면 맛이 좋다.


게다가 식어버린, 라면이 국물을 전부 빨아들여 국물이 하나도 없고 떡처럼 되어 버린 그런 라면, 젓가락보다는 숟가락을 써야 하는 그런 ‘불어 터지고 식어빠진 라면’이 좋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곧잘 해 먹지는 않는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옆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도 있고. 멍게를 정말 좋아하지만 멍게를 자주 먹지는 않는다. 가격도 비싸지 않고 집 앞이 바닷가인 나는 언제든 멍게를 먹을 수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정말 좋아하는 건 희한하게도 자주 볼 수 없다.


내가 어린 시절에 회사원이었던 아버지는 늘 새벽 5시면 일어나서 회사로 갔다. 그 시간에 어머니가 일어나서 아침밥을 차리고 반찬을 만들고 할 수 없기에 아버지는 라면을 끓여서 먹고 나갔다. 나가면서 나를 위해 라면 한 그릇을 떠 놓곤 했다. 내가 눈을 뜨면 이미 라면은 불어 터지고 식어버려서 계란과 면과 국물이 한 몸이 되어 푸딩화 되어 있었다.


어릴 때는 그것이 먹기 싫었다. 식었고 젓가락질로는 도저히 먹을 수 없고, 숟가락으로 이렇게 탁탁 갈라서 뜨면 떠지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라면은 먹기 싫었다. 중학생이 된 어느 날인가, 후루룩하는 소리가 들려 눈을 뜨니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아버지는 라면을 드시고 있었다. 이미 한 그릇을 나를 위해 떠 놓았다. 그때 이렇게 보니, 내 그릇에 담긴 라면이 뜨거우니까 아버지는 계속 젓가락으로 들었다 놨다 하면서 식히는 것이다.


나는 날 때부터 좋지 못한 위를 달고 태어나서 뜨겁거나, 급하게 먹거나, 많이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는다. 소화가 되지 않으면 속만 거북한 것이 아니라 머리도 아프고 이상해진다. 아버지는 그게 미안해서인지 그냥 놔두면 식어버릴 라면을 후후 불면서 식히고 있었다. 식어빠지고 불어 터진 라면에 마법이 걸렸는지 그 뒤로 그 라면이 맛있었다.


군대에서 라면 회식을 하면 금방 덜어낸 꼬들한 라면은 졸다구들 먼저 먹게 하고 시간이 지나 불어 터지고 식은 라면을 먹었다. 나는 그게 맛있었는데 다른 아이들 눈에는 고참이 희생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건 그것대로 가만히 있다 보니 좋은 소리까지 들었던 적이 있다.


제대 후 아버지는 이런저런 안부도 없이, 인사도 없이 먼지가 되었고 나는 순천으로 여행을 갔다가 오리 고기 집에 저녁 늦게 들어갔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었는데 카운터에서 나이 든 주인장이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여행객인데 같이 먹자고 하니 괜찮다시며 혼자서 카운터에서 식사를 하셨다. 이렇게 보니 냄비에는 식어 빠지고 불어 터진 라면이었다.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조금 달라고 했다. 주인장은 난처해했지만 한 그릇을 떠 주었다. 그것을 숟가락으로 한 입 퍼먹었는데 뭔가 손끝으로 코끝을 띵하게 때리는 기분이 들었다.


중학교 때 먹던 그 맛이었다. 아버지의 맛. 아버지가 일일이 식혀주던 맛.
그때 일행이 맵냐고 했는데(눈물이 핑 돌아서), 인간이란 참 알 수 없다. 리틀 포레스트 겨울 편에서 두 번째 음식에서도 이치코가 먹는 설탕 간장에 담긴 떡은 추억의 맛이다. 추억이 낫토 떡에 입혀진 것이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생존에 관여된 부분이 크지만 그 음식점에 너와 함께 가서 음악을 들으며 같이 먹었다는 추억, 그 추억이 고스란히 음식의 맛을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삼대 천왕에서 하니는 시장표 고로케를 한 입 먹는 순간 아주 작았던 하니가 힘든 시기에 고생하며 만든 엄마의 고로케를 먹었던 추억이 밀려왔을 것이다.


추억의 맛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자주 해 먹을 수는 없다. 추억에 기인한 음식이 있다. 그런 음식은 추억의 맛으로 먹게 된다. 추억의 맛에 빠지면 그 음식을 일부러 찾기도 한다. 추억으로만 먹게 되는 맛은 마치 달력의 뒤편처럼 늘 가까이 있지만 달력을 넘기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아름답지만 안타깝고 쓸쓸한 맛이기도 하다.



 

이치코의 추억의 맛


국물이 없어진 불은 라면만의 추억의 맛이 있다



이렇게 먹으려면 한 시간 정도 둬야 한다. 아버지의 맛을 느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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