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뻗는 곳에 음악이 없으면 불안하던 시절이 있었다. 음악이 자산이라 여기던 시절이었고 그것을 허세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든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라는 생각이 강했다. 제대 후 복학하기 전 8개월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토건회사에서 4개월인가, 일을 했다. 후배의 친형이 그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잠깐 아르바이트로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토건회사에서 일하는 건 꽤 재미가 있었다. 현장에서 3개월 일을 했는데 재미있으니까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일을 하라고, 일종의 진급이 되었는데 사무실에서 한 달 더 다니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나는 아마 그 토건회사가 맞았다면 그대로 눌러앉아 복학이고 뭐고 그냥 그대로 회사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은 아마도 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신 회식과 스트레스로 뚱뚱해진 몸으로 땀을 닦으며 입찰 같은 것을 보러 전국을 다닐지도 모른다. 내 인생의 회사생활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토건회사에서 일을 하기 전 군대에서 내무반 완고(참)가 되었을 때 내가 60%의 돈을 내고 나머지 짝대기 4개들이 40%의 돈을 거둬서 내무반에 중고 오디오 스테레오를 넣었다. 음악을 빵빵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몇 개월 남짓 되는 완고 생활을 하는 기간에는 음악을 실컷 듣다가 제대를 했다. 7월에 제대했기에 저녁 점오가 끝이 나면 내무반 아이들을 전부 목욕을 시킨 다음 선풍기 밑에서 모두 누워 쮸쮸바를 빨며 모두가 음악을 들었다.


머라이어 캐리를 듣고 브라이언 아담스를 듣고 마이클 잭슨을 들었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내무반에 크게 틀어 놓고 싶은 노래는 바쏘리나 메가데쓰처럼 강한 음악이었지만 나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군생활이라는 게 모두가 힘들다. 점오가 끝나기 전과 후에는 일반병들은 늘 바쁘다. 야간근무자를 제외하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내가 제일 고참일 때는 점오 후에 휴가자의 군화를 반질하게 광을 낸다거나 하는 등의 쓸데없는 일은 하지 않도록 했다. 전혀 필요 없는 일이다. 그저 노동을 위한 일일 뿐이다. 그런 일들이 군대에는 잔뜩 있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는 명분 하에 묵시되는 쓸데없고, 쓸모없는 관습이 가득하다. 그런 것들을 군생활을 하면서 낱낱이 봐 두었다가 내가 최고참일 때 전부 없애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시간에는 내무반 모든 아이들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것이다. 편지를 쓰고 싶으면 쓰고, 책을 읽고 싶으면 책을 읽는다. 한 내무반에 보통 열 명이 넘기 때문에 점오 후에 마시는 커피는 짝대기 4개들이 돈을 내서 전부 산다. 커피라고 하는 게 별 다를 건 없는 자판기 커피를 말한다. 그런데 아이스커피는 그 안에 얼음이 두르르르르 하고 떨어져 열 몇 잔을 들고 오는 사이에는 좀 시원한 커피가 된다. 그게 아주 맛있다. 군대에서는 우습지만 아이스커피를 마실수 있는 서열도 짝대기 두 개를 달아야 마실 수 있었다.

 

보통 점오가 끝나면 분위기가 아주 무섭다. 점오 시간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작살나는 시간이다. 어떻든 그런 것들을 내가 있는 내무반에서는 싹 없앴다. 그것이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 후임들이 또 그런 '자유함'을 싫어해서 관습을 따라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밑의 후임이나 후임의 후임들은 대체로 꽤나 순둥순둥 하고 내무반의 '자유함'을 좋아했었다.

 

그렇게 내무반에는 티브이보다는 음악이 늘 흘렀고 여름에 시원하게 보내다가 나는 제대를 했다. 그리고 토건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현장일은 우오수 분리를 하는 작업이다. 그러니까 70년대 그 이전에 지어진 집들의 우수(빗물)와 오수(하수구)가 한 곳으로 흘러 도시 중심을 관통하는 강으로 흐른다. 관급공사로 각 구마다 선택된 토건회사들이 구역을 배정받아서 오래된 집들의 우수와 오수를 분리하는 작업을 한다. 빗물은 강으로 하수구의 물은 정화 처리장으로 흐르게 분리를 한다. 내가 맡은 일은 공사가 들어가기 전에 구역을 돌며 집집마다 공사를 알리고 전단지를 돌린다, 구청 치수계에서 나온 설계도면대로 공사가 진행되는지 체크를 하면 되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뚫을 것이며 그 안에 파이프는 몇 개, 재료는 뭐가 들어가는지 설계대로 사용하는지 체크를 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내가 현장에서 하루 종일 계속할 일은 없었다. 하청을 받아서 노동을 하는 분들의 간식을 챙겨주고(주로 빵과 막걸리) 설계도면에 현장에 들어간 작업을 보며 체크를 해서 회사에 건네고 나는 퇴근을 하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근처의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좀 읽기도 하고 한 곳에서 보통 4일 정도는 머무르니 동네 사람들과 좀 친해져서 이야기도 하면서 보냈다. 그러다가 어쩐 일인지 설계도면이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공사가 먼저 들어간 적이 있었다. 현장 대장(오야붕이라고 하죠)은 나이가 60줄로 이런 방면에는 배테랑이라 설계도면 없이도 거침없이 바로 공사를 했다. 그때부터 나는 공사 현장을 보며 설계도면을 그려서 사무실에 보냈다.


그 뒤로 '선공사 후 설계'가 이루어졌다. 완전 엉망진창인 것이다. 구청에서 감독관이 나오는 날이면 현장을 방문해서 5분 정도 있다가 바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그리고 사우나를 간다. 물론 회사에서 그렇게 접대를 한다. 그렇게 6개 업체를 감독관은 돈다. 한 번은 점심을 먹는데 대리가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밥도 정말 천천히 오래 먹더라. 그 뒤로는 현장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과(대부분 나이가 엄청 많은) 어울렸다. 일이 끝나면 고기도 구워 먹고 하면서. 그들은 모두 수더분하고 친절했다. 물론 언어에는 거침없었지만 상반된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가운데 그들의 보편성이라는 것이 이루어졌다. 냉엄한 현실 속에서 위트를 쏟아낼 수 있는 언어는 그들의 스타일인 것이다.


"야, 박 군아, 이거 먹어"라며 내 밥그릇에 고등어 살점을 턱 얹어준다. 

"어이, 박 군아, 오늘은 막걸리 4병 사 오고, 나는 크림빵으로."

"박 군아, 포클레인 함 몰아볼래." "박 군아, 고기 많이 먹으레이"라며 아버지처럼 대해준다. 물론 글로는 언어를 조금 순화했지만 저 사이사이에 들어간 그들의 언어가 위트를 말한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위트가 빠진다면 세계는 영혼적인 아포칼립스가 될 것이다.

 

공사현장을 보고 설계도면을 그린 것이 꽤나 칭찬을 받은 모양이었다. 회사에서는 사무실에서 제대로 일을 해보라고 해서 사무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는 분주하고 힘들고 바쁘고 재미있어서 몰랐지만 사무실에서는 모두가 삭막한 얼굴에 삭막한 분위기로 앉아서 일만 했다. 여직원(누나)도 있었지만 삭막함에 종속되어 있어서 모르는 것을 물어도 시큰둥했다.


내가 생각하는 사무실의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음악이 전혀 없었다. 현장에서 음악을 들으며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는 것과는 달라도 아주 달랐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 삭막함이 토건회사의 실적으로 이어지는 키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음악을 들어도 됩니까,라고 했더니 부장이 그래, 들어,라고 하기에 라디오를 들고 가서 하루 종일 틀었더니 퇴근 전에 대리에게 불려 가서 한 소리를 들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사무실에서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일을 그만두고 나왔다. 내 인생 최초의 회사생활이었다. 그 후로 아직까지 회사는 다녀본 적이 없다. 


바쁜 거 안 보여?라고 하지만 아직 그런 부분에 미성숙한 나에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이 바쁘게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바쁨'은 점심시간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서 전골집 사장님과 직원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게 음식을 나르고 닦고 계산을 하고 인사를 하는 모습이다. 또는 이른 아침에 두부를 사려고 두부집에 모여든 손님들에게 정성스럽게 손두부를 담아서 건네고 돈을 받아서 띠링하며 금고가 열리는 소리가 자주 들리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바쁨'이다.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일하는 곳은 없을까.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한다는 건 분명 행복이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내 좁은 활동반경 내에 손을 뻗으면 음악이 있어야 했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배부르다는 시절이었다. 밥을 먹지 않으면 몸이 말라가지만 음악을 듣지 않으면 마음이 메말라 죽는 건 매한가지라 여기던 어렸던 시절.

 

이제 음악만으로 좋은 시절은 분명 아니다. 오히여 음악이 소리가 아니라 소음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음악이 없으면 안 되는 또 다른 시절이기도 하다. 시에 음을 갖다 붙은 게 노래라서 그런지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으면 길 잃은 멜로디 때문에 가끔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나는 하나의 소실점이 되어서 점점 소거되는 기분이 든다. 나의 음악은 시절에 머물러 있다. 철 지난 음악을 촌스러운 음장 기기로 듣고 있으면 그때를 소환한다. 5년 전 지금은 어떤 음악을 들었을까. 10년 전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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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0-10-15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음악을 너무 좋아하는데 다행히 전 직장에서 음악 실컷 듣고 있습니다. 따로 집무실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교관 2020-10-16 12:11   좋아요 0 | URL
와 좋네요. 요즘은 음악을 들으며 업무를 보는 곳이 많아진 것 같아요. 별거아닌데 참 좋아보입니다.
 



오래전에는 닭은 귀한 음식이었다. 닭은 소나 돼지처럼 사료를 먹기 때문에 돈이 들어가는 가축인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집에서 닭을 함부로 막 잡아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수렵이 가능했던 시대에는 꿩이나 참새를 잡아먹었다. 물론 사료를 먹지 않아서 꿩이나 참새에게서 나오는 고기는 닭만큼 부드럽고 맛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끔 집에서 닭을 잡아먹을 때면 국물을 우려내서 한 마리만으로도 온 가족이 다 먹을 수 있게 요리를 해 먹었다. 그것이 닭백숙 내지는 닭곰탕 같은 음식이다. 가부장제였던 시대에 닭을 삶아서 나오는 딱 두 개뿐인 다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고기를 식구들이 나눠 먹었다. 

닭다리를 좋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영화 '관상'을 봐도 닭다리를 주지 않는 내경(송강호)에게 삐진 팽헌(조정석)의 모습이 나온다. 치킨이 세상에 나온 뒤부터 닭은 물에 빠진 것보다 기름에 빠진 닭이 더 맛있어졌다. 

닭곰탕은 물놀이 후에 먹으면 참 맛있다. 불영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삼근이라는 동네에 외가가 있는데 계곡은 죽 이어진다. 어린 시절의 내 외가는 물이 맑아서 가재도 솔찬히 볼 수 있고 1 급수에만 살고 있는 물고기들도 잡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물놀이를 하고 외가에 들어오면 솥에서 닭 삶는 냄새가 난다.

외가의 집 구조는 2층 집으로 개울가에 있어서 2층에 누워 있으면 개구리가 우는 소리가 굉장히 크게 들리고 1층에는 마당이 있는데 보통 2층으로 올라 1층의 옥상 내지는 2층의 입구에서 삶은 닭을 둘러앉아서 먹는다. 지대가 높아서 밤이면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반짝이는 모습이 보인다. 학창 시절의 여름이면 그곳으로 어김없이 가서 쏟아질 것 같은 별을 보면서 박정대의 시를 읽고, 최승자의 시를 읽었다.

어린 시절의 여름에는 늘 개울에 몸을 담갔다. 물놀이를 하고 나온 후라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앉아서 닭곰탕에 밥을 말아서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외숙모가 열심히 닭을 삶아서 이것저것 넣어서 다리를 푹푹 찢고 살을 발라서 많이 먹으라고 그릇에 넣어준다. 촌에서 닭을 삶아서 먹으면 그런 일종의 행위가 닭곰탕의 맛을 더 끌어올려준다.

시간이 지나 물놀이 같은 건 하지 않게 되었을 때, 외가에서 닭을 삶아 먹으면 술을 곁들였다. 개울가의 그늘에 앉아서 발을 물에 담그고 책을 읽으며 휴가를 보낸다. 사실 책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물이 흐르는 소리, 잠자리 같은 것들이 비행하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소리. 일련의 자연의 소리가 음악처럼 들린다. 그러다 보면 평소에 일을 하며 생활하면서 느껴보지 못한 나른한 졸음에 겨워 졸게 된다. 

가끔 낚시도 하는데 고기를 많이 잡고 싶은데 고기가 낚이지 말았으면 한다. 이상하게도 중고등학생 때에는 잡은 고기를 잘도 매운탕으로 끓여 먹었는데 이젠 살아있는 고기를 죽이는 것이 생각만큼 되지 않는다. 외숙모가 힘이 잔뜩 있었을 때에는 키우는 닭을 잡아서 백숙을 해 먹었다. 그러다 보면 제대로 뽑히지 않은 털이 씹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마트에서 생닭을 구입해서 닭을 삶아 먹는다. 개울에 나가기 전에 냄비에 닭을 넣고 나온다. 개울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졸고 있으면 저 멀리서 점처럼 보이는 외숙모가 “관아, 관아”라고 부른다. 닭이 다 삶겼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린 시절 외숙모가 했던 그 행위를 내가 하게 된다.

일행과 함께 2층에 자리를 펴고 삶은 닭을 죽죽 찢어서 외숙모의 그릇에 담아주는 일은 내가 하고 있다.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흘러서 배역이 바뀌게 되는 시점이 온다. 마치 물리학의 법칙을 몸으로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그런 연쇄에 우리는 놓이게 된다. 


이제는 닭곰탕을 먹으며 술을 같이 먹는다. 맥주도 좋고 소주도 좋고 막걸리도 좋다. 마시면서 이렇게 좋은 시간과 좋은 음식을 언제까지 먹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도달하게 되면 인간의 삶이라는 게 꼭 코미디 같다. 힘들고 슬픈 일들이 잔뜩인데 늘 웃는 얼굴로 다녀야 하는 코미디. 영화 ‘선물’에서 죽어가는 아내 때문에 미치도록 슬픈데 관객 앞에서는 웃겨야 하는 남자 이정재의 모습이 휙 스쳐간다. 인생은 코미디고 채플린의 말처럼 코미디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다. 

하지만 내가 자주 말하는 것이지만 모든 아름다움과 예술은 비극에서 시작된다. 그러니 이렇게 닭곰탕에 후추를 가득 뿌리고 계란지단으로 국수를 만들어 말아먹으면서도 아름다움은 시작된다. 그렇게 닭백숙도 아름답게 시작된다. 모든 음식은 고귀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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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공감을 하는 바, 고흐의 그림은 오랫동안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한참을 보다가 풍경에 질릴 때쯤이면 붓 터치에 매료되어서 또 한참을 쳐다보게 된다.


예전에는 폰으로 그림을 따라 그려보고 근간에는 마우스로 그림을 따라 그리는데, 고흐의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 멍하게 그저 마우스를 움직여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 점이 정말 좋다.


아메리칸 파이를 부른 돈 맥클린도 고흐의 그림이 너무 좋아 빈센트라는 노래를 불렀다. 스타리 스타리 나잇 하며 시작되는 노래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신승훈이 돈 맥클린보다 더 잘 불러서 예전에는 신승훈의 노래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고흐가 37살에 죽기 2주 전에 완성한 그림 ‘까마귀 나는 밀밭’에는 고흐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까마귀의 날갯짓과 바람의 방향, 색채의 대비, 좁아지는 밀밭길 등,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고흐는 자신과의 싸움 끝에 쓸쓸하고 자괴감에 빠진 고흐를 말하고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이란 참.


고흐는 죽기 전까지 테오에게 자그마치 600통이 넘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묶어서 책으로 나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고흐의 편지를 읽으며 그의 아픔에 조금 다가갔다. 그 편지 속에 고흐는 자신의 감정이 변해가는 심정과 고갱과의 마찰, 감자 깎는 농부들을 그리기 위해 두상 스케치를 무려 40번 가까이해가며 농민이나 서민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모습이 애달프다 못해 안타까움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동생 테오를 사랑했고 그에게 받은 돈으로 미술도구를 구입하는 것을 무척 미안하게 생각했다. 고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완전히 실패한 삶을 살았다. 인간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은 모두 포기했다. 그는 가정을 이루는 것도, 생계를 유지할 수단도, 심지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림을 그려서 자신을 현실과 타협을 맺게 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동생은 끊임없이 지원을 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이 바로 테오의 부인이 동의를 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시에도 생계의 기본적인 유지가 안 되는 사람에게 돈을 매달 보내주는 걸 허락할 여자는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남편의 형이기에 도와줘야 한다는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테오 역시 그렇게 형편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테오의 부인은 어떤 여자였을까.


테오의 부인은 어쩌면 미래를 예견하지 않았을까. 촉이 고흐의 그림을 알아본 것이다. 그렇기에 생활에 있어서 생산적인 활동을 전혀 할 수 없는 남편의 형, 고흐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테오의 부인은 고흐가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고 그것이 곧 죽음을 물고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래전에는 지금처럼 이런저런 치료방법이 다양하지 않았고, ‘병’은 ‘죽음’이라는 방식이 성립되었던 시기였다.


결국에는 테오도 죽고 고흐의 그림은 테오의 부인인 요안나가 모두 관리하게 되었다. 이건 어떤 면으로 굉장한 재테크일까. 가만 생각해보면 무섭기도 하고 참 현명하기도 한 테오의 부인이 더더욱 궁금해진다. 누가 요안나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실 분?


라고 쓰고 나서 며칠이 흘러가는 동안 요안나에 대해서 좀 알아봤습니다. 그녀는 테오와 보낸 시간들을 완벽한 행복한 날들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큰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빈센트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평생 고흐의 그림을 지켰다고 합니다.


요안나는 사람들에게 고흐의 그림을 활발하게 선보였고 고흐의 편지를 날짜별로 정리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테오와 주고받은 고흐의 편지를 자비를 들여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요안나 덕분에 고흐 그림의 진가를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었습니다.


요안나에 대해서 검색을 하고 찾아보니 흥미로운 일들이 꽤 있더군요.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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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0-10-12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관님 덕에 요안나 알게 됐네요. 감사^^

교관 2020-10-13 11:56   좋아요 0 | URL
저도 요안나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때 풀무원의 광고였다. 광고 속 콩 발효 식품인 낫토의 모습이다. 잘 알겠지만 낫토는 일본 식품으로 우리나라의 청국장과 비슷하다. 청국장 역시 콩 발효 식품인데, 공기 중의 바실러스균이 콩에 붙어서 자연발효가 일어나는 것이다. 전통 방법으로 볏짚 위에 둬서 발효했는데 볏짚에도 바실러스균이 많기 때문이다. 

풀무원에서 낫토를 판매하고 그것을 광고하니까 어쩌면 청국장보다 낫토? 또는 청국장과 낫토를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낫토와 청국장은 다르다.

청국장에 있는 바실러스균을 고초균이라 하는데 이 고초균에는 유산 발효균의 종류만 100가지가 넘는다. 이 수많은 균에서 한 종류의 균을 추출하여 발효한 것을 납두균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낫토다.

근본적으로 낫토는 청국장과 완전히 다르다. 이 납두균처럼 한 종류의 바실러스균만을 빼내서 발효시키면 청국장 같은 냄새는 전혀 없다. 더불어 청국장만큼의 영양도 썩 없다. 그러니 청국장 대안으로 낫토를 먹으며 청국장만큼의 효과나 영양을 생각하면 안 된다. 

하지만


한국의 청국장에 비해 일본은 낫토를 대중화하는 데 성공했다. 아마도 정부와 기업과 생산자의 적절한 거래를 통해서 이것을 실현했다고 본다. 납두균은 간편하기도 하고 발효기간이 청국장에 비해서 짧아서 만들기도 쉽다. 어디서든 판매를 하기에 손을 뻗어 구입하여 밥 위에 올려 슥슥 비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 

돈이 되고 성공확률 높다고 하되 풀무원 같은 대기업이 얼씨구 하며 납두균을 청국장 대신에 광고하는 것이 어쩐지 씁쓸하다. 낫토는 밥 위에, 심지어는 빵 사이에 넣어서도 먹고 있지만 청국장은 아직 그러기에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다. 청국장은 대중화보다는 마니아들의 전유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청국장에는 당연히 발효한 시큼한 향이 조금씩 나야 하며 신맛이 있어야 잡균이 들어서지 않고 청국장 고유의 맛과 바실러스가 전하는 영양도 듬뿍 섭취할 수 있는데 어쩌면 청국장은 세대가 거듭할수록 전문점에서나 간혹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는 게 아닐까.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청국장과 호박무침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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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아즈미와 아유키 그리고 후타바의 가장 즐거운 순간이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행복한 순간은 꿈처럼 아주 순식간에 지나간다. 휙 이렇게,  샤 브 샤 브가 익어가는 것처럼 지나간다. 후타바와 아즈미 그리고 아유키는 혈연으로 연결되어있지 않고, 상처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피보다 더 진한 거 같아서 영화를 보고 나면 후타바의 왼손으로 한방 먹은 것 같이 먹먹하다.

목욕탕 하면 아버지와의 추억이 나에게는 가장 많다. 주말 저녁이면 늘 아버지와 함께 대성탕으로 가서 목욕을 하고 아버지의 등을 밀었다. 아버지의 시원하네, 힘 좋네, 같은 말이 듣고 싶어서 그만, 할 때까지 악을 쓰고 밀었던 유년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그다지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가는 팔로 등을 미는 아들에게 어떤 한 마디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무뚝뚝하고 표현이 서툰 아버지도 목욕탕에서 홀가분해지면 아, 시원하네, 우리 아들, 잘 미네, 같은 말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아버지의 죽음의 순간을 나는 옆에서 지켜봤는데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병실에서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나는 그저 덤덤하게 옆을 지키고 있었다. 가끔 정신을 잃어갈 때에는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목욕을 하고 나오면 아버지는 나를 세워놓고 수건을 착 펼쳐서 머리를 탁탁탁 털어주고 몸을 닦아 준 다음 몸을 바짝 말리라 하며 우유를 하나 손에 쥐여주고는 아버지는 그제야 자신의 몸을 닦았다. 목욕을 나오면 아버지는 문방구에 들러 늘 프라모델을 사주었다. 그걸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만들곤 했다. 목욕을 끝낸 노곤한 피곤함을 느끼며 프라모델이 완성되었을 때 나는 잠이 들었다. 그렇게 주말 저녁을 기다렸다. 잠에서 깨어났을 땐 아버지는 먼지가 되었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아버지와 소원하게 된 순간이 아마도 같이 목욕탕에 가지 않았을 때가 아닌가 하다. 허벅지를 힘껏 꼬집으면 잃어가던 정신이 들어오는지 아프다며 나에게 욕을 했다. 왜 나를 싫어하느냐며 나에게 욕을 했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끝끝내 말을 하지 못했다. 뭐랄까 이렇게라도 아버지를 어딘가에서라도 언급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내 아버지가 조금은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후타바가 아즈미에게 도망치지 말고 용기 있게 맞서야 한다고 한 말이 비록 따돌림을 하는 그 아이들에게 맞서라는 건 아니다. 용기를 내서 맞서야 하는 것은 어쩌면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시간일지도 모르고 또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아닌 것 같지만 우울하다. 인스타그램에 반짝반짝 즐거운 사진만 올라오는 사람들도 상처 받고 우울하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순간의 사진으로 그것을 잊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목욕탕에 가면 모두가 발가벗고 엇 비슷하다. 옷을 입고 있지 않으니 누가 부자인지, 쌍스러운 말을 어느 정도 쓰는지 알 수 없다. 모두가 비슷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들 모두 하나씩의 고민과 상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것을 숨긴 채 가슴에 품고 하루를 으샤 으샤 열심히 보낸다. 모순에 모순을 거듭하는 게 인생이다. 평범한 가장이 금요일마다 식도락을 찾아 떠나는 일본 드라마 '제츠메시로드'에서도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읽기 전의 내가 읽은 후 달라져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후타바와 아즈미 그리고 못난이 아유키, 밉지 않은 오다기리 조가 한없이 뿜어내는 사랑스러운 연기를 보고 난 후 고요하게 요동치는 나 자신의 가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영화에서처럼 가장 슬픈 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행복한 슬픔이 이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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