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풀무원의 광고였다. 광고 속 콩 발효 식품인 낫토의 모습이다. 잘 알겠지만 낫토는 일본 식품으로 우리나라의 청국장과 비슷하다. 청국장 역시 콩 발효 식품인데, 공기 중의 바실러스균이 콩에 붙어서 자연발효가 일어나는 것이다. 전통 방법으로 볏짚 위에 둬서 발효했는데 볏짚에도 바실러스균이 많기 때문이다. 

풀무원에서 낫토를 판매하고 그것을 광고하니까 어쩌면 청국장보다 낫토? 또는 청국장과 낫토를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낫토와 청국장은 다르다.

청국장에 있는 바실러스균을 고초균이라 하는데 이 고초균에는 유산 발효균의 종류만 100가지가 넘는다. 이 수많은 균에서 한 종류의 균을 추출하여 발효한 것을 납두균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낫토다.

근본적으로 낫토는 청국장과 완전히 다르다. 이 납두균처럼 한 종류의 바실러스균만을 빼내서 발효시키면 청국장 같은 냄새는 전혀 없다. 더불어 청국장만큼의 영양도 썩 없다. 그러니 청국장 대안으로 낫토를 먹으며 청국장만큼의 효과나 영양을 생각하면 안 된다. 

하지만


한국의 청국장에 비해 일본은 낫토를 대중화하는 데 성공했다. 아마도 정부와 기업과 생산자의 적절한 거래를 통해서 이것을 실현했다고 본다. 납두균은 간편하기도 하고 발효기간이 청국장에 비해서 짧아서 만들기도 쉽다. 어디서든 판매를 하기에 손을 뻗어 구입하여 밥 위에 올려 슥슥 비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 

돈이 되고 성공확률 높다고 하되 풀무원 같은 대기업이 얼씨구 하며 납두균을 청국장 대신에 광고하는 것이 어쩐지 씁쓸하다. 낫토는 밥 위에, 심지어는 빵 사이에 넣어서도 먹고 있지만 청국장은 아직 그러기에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다. 청국장은 대중화보다는 마니아들의 전유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청국장에는 당연히 발효한 시큼한 향이 조금씩 나야 하며 신맛이 있어야 잡균이 들어서지 않고 청국장 고유의 맛과 바실러스가 전하는 영양도 듬뿍 섭취할 수 있는데 어쩌면 청국장은 세대가 거듭할수록 전문점에서나 간혹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는 게 아닐까.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청국장과 호박무침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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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아즈미와 아유키 그리고 후타바의 가장 즐거운 순간이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행복한 순간은 꿈처럼 아주 순식간에 지나간다. 휙 이렇게,  샤 브 샤 브가 익어가는 것처럼 지나간다. 후타바와 아즈미 그리고 아유키는 혈연으로 연결되어있지 않고, 상처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피보다 더 진한 거 같아서 영화를 보고 나면 후타바의 왼손으로 한방 먹은 것 같이 먹먹하다.

목욕탕 하면 아버지와의 추억이 나에게는 가장 많다. 주말 저녁이면 늘 아버지와 함께 대성탕으로 가서 목욕을 하고 아버지의 등을 밀었다. 아버지의 시원하네, 힘 좋네, 같은 말이 듣고 싶어서 그만, 할 때까지 악을 쓰고 밀었던 유년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그다지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가는 팔로 등을 미는 아들에게 어떤 한 마디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무뚝뚝하고 표현이 서툰 아버지도 목욕탕에서 홀가분해지면 아, 시원하네, 우리 아들, 잘 미네, 같은 말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아버지의 죽음의 순간을 나는 옆에서 지켜봤는데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병실에서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나는 그저 덤덤하게 옆을 지키고 있었다. 가끔 정신을 잃어갈 때에는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목욕을 하고 나오면 아버지는 나를 세워놓고 수건을 착 펼쳐서 머리를 탁탁탁 털어주고 몸을 닦아 준 다음 몸을 바짝 말리라 하며 우유를 하나 손에 쥐여주고는 아버지는 그제야 자신의 몸을 닦았다. 목욕을 나오면 아버지는 문방구에 들러 늘 프라모델을 사주었다. 그걸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만들곤 했다. 목욕을 끝낸 노곤한 피곤함을 느끼며 프라모델이 완성되었을 때 나는 잠이 들었다. 그렇게 주말 저녁을 기다렸다. 잠에서 깨어났을 땐 아버지는 먼지가 되었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아버지와 소원하게 된 순간이 아마도 같이 목욕탕에 가지 않았을 때가 아닌가 하다. 허벅지를 힘껏 꼬집으면 잃어가던 정신이 들어오는지 아프다며 나에게 욕을 했다. 왜 나를 싫어하느냐며 나에게 욕을 했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끝끝내 말을 하지 못했다. 뭐랄까 이렇게라도 아버지를 어딘가에서라도 언급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내 아버지가 조금은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후타바가 아즈미에게 도망치지 말고 용기 있게 맞서야 한다고 한 말이 비록 따돌림을 하는 그 아이들에게 맞서라는 건 아니다. 용기를 내서 맞서야 하는 것은 어쩌면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시간일지도 모르고 또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아닌 것 같지만 우울하다. 인스타그램에 반짝반짝 즐거운 사진만 올라오는 사람들도 상처 받고 우울하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순간의 사진으로 그것을 잊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목욕탕에 가면 모두가 발가벗고 엇 비슷하다. 옷을 입고 있지 않으니 누가 부자인지, 쌍스러운 말을 어느 정도 쓰는지 알 수 없다. 모두가 비슷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들 모두 하나씩의 고민과 상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것을 숨긴 채 가슴에 품고 하루를 으샤 으샤 열심히 보낸다. 모순에 모순을 거듭하는 게 인생이다. 평범한 가장이 금요일마다 식도락을 찾아 떠나는 일본 드라마 '제츠메시로드'에서도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읽기 전의 내가 읽은 후 달라져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후타바와 아즈미 그리고 못난이 아유키, 밉지 않은 오다기리 조가 한없이 뿜어내는 사랑스러운 연기를 보고 난 후 고요하게 요동치는 나 자신의 가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영화에서처럼 가장 슬픈 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행복한 슬픔이 이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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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W1fomunVUk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일상에서 늘 볼 수 있는 사람들인데 일상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흔히 지나치며, 또는 생활하면서 사람을 만나 하는 이야기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을 만나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입을 통해 구어로 말하지만 그건 실은 속에서만 되뇌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어디까지가 실재하는 현실인지 그리고 내가 인식하는 현실은 어디까지인지 구분의 경계가 모호하게 된다.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는 긴 산문시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남자 주인공은 세상에서 가장 찌질한 표본을 보여준다. 세상 잘나가는 감독, 작가 내지는 시인이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데 그들의 속은 너무나 세속적이며 어떻게 하면 같은 술자리에 앉아 있는 예쁜 여자를 찌질한 말빨로 꼬셔서 침대로 데리고 갈까만 생각한다

있어 보이는 멘트지만 남자 주인공의 그런 멘트는 어떤 루틴을 타고 있다. 어디서든 그런 말을 배설해놓고 누군가가 그런 사실을 지적하면 어물쩍 넘어가려 하고 그러다 안 되면 자리를 피하는 개찌질한 모습을 보인다. 어쩌면 보통 대부분 남자들의 속마음일지도 모른다. 멋있는 척하지만 실은 찌질할 수 없을 정도로 찌질해서 자기 여자가 있어도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찝쩍거리는 그런

홍상수 영화는 해외에서 인기가 더 많은 것 같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영화 속을 까뒤집으면 일상인데 전혀 일상 같지 않고 일탈이 도처에 있는,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하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내 마음의 터부를 구어를 통해서 배설해 버린다. 해외에서는 도대체 홍상수 영화에는 술 마시는 장면이 늘 나오는데 저 녹색병이 뭐야? 도대체 저 녹색병을 뭐기에 주인공들이 저걸 죽으라 마시고 정신줄을 놓는 거야,라고 해서 소주가 인기였다고 한다

홍상수 영화는 한 번 빠지면 좀체 벗어날 수 없는 기이한 힘이 있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는 마블 영화만큼 재미있다. 만고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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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이 시인이라 불렸던 한하운 시인의 ‘소록도 가는 길’이라는 시가 있다. 한하운은 인텔리였고 소위 잘 사는, 잘 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9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1920년에 태어났다고 나와 있는 정보도 있다. 

‘소록도 가는 길'을 읊고 있으면 답답하기도 하고, 슬프고 괴롭다. 시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그건 한하운 시인의 걸어온 길을 알고 있으면 누구나 그런 생각에, 그러한 감정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소외받고 있다고 평소에 생각이 드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이 시는 1949년 월간 종합잡지 ‘신천지’를 통해서 발표되어서 세상에 알려졌다. 한하운은 소록도 나병환자 요양원으로 가는 길의 아픔과 고통을 시에 담았다. 거기까지 걸어가면서 몸이 고통스러운 것보다 사람들의 멸시와 차단, 무서울 만큼 잔인한 시선 그리고 내뱉는 인간 이하의 욕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고통이 한하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하운은 엘리트였고 태어날 때는 아주 멀쩡했다. 당시에 일본에 유학도 갔다 왔을 정도로 집안은 부유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얻은 나병은 모든 생활을 뒤흔들어 놓았다. 집에서조차 가족으로 받아주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가족에게마저 버림받은 한하운은 그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잠이 들고 던지는 돌에 맞아 머리가 터지면 일어나 또 다른 곳으로 갔다. 여인숙과 여관을 돌며 시를 팔아먹었지만 도저히 생활이 안 되었던 한하운은 소록도로 가기로 했다.

소록도, 풀이를 하면 작은 사슴의 섬.
작은 사슴처럼 슬픈 눈망울의 아름다운 섬이 소록도다. 한하운은 거기에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나병환자들이 있는 요양병원에 가기로 마음먹고 기차를 탄다. 하지만 기차에 오르자마자 차장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기차에서도 내쫓기고 만다. 당시 문둥이는 기차를 타서도 안 되고, 식당에 와서도 안 되고, 사람과 말고 섞으면 안 되는 존재 바로 괴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작금의 시대에는 어떨까. 문둥이라고 불리는 나병 환자가 일반인처럼 기차를 탈 수 있을까. 식당에 갈 수 있을까. 식당에서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서 먹고 있다면 나는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을까. 문둥이의 문드러진 손과 얼굴로 먹은 숟가락과 접시와 밥그릇을 나는 어떻게 생각할까. 

시간이 흘러 어떤 부분은 나아졌다고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돌은 던지지 않겠지만 오히려 냉대하고 차가운 시선은 더 할 것이다. 한하운은 돌을 던지면 왜 던지냐고 반박하지 않았고 고개를 숙이고 맞아야 했다. 한하운은 소록도까지 천리 길을 걸어서 간다. 그 길이 한하운에게는 너무나 힘들고 죽을 것만 같다. 삼복더위에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이 이렇게도 힘겹다니. 토송처럼 붉은 황토가 태양의 열기를 받아서 가마솥 같다. 그곳을 절뚝거리며 걷다가 발가락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 그렇게 발가락은 다 떨어져 나가고 두 개만 남는다. 쓰러져 죽더라도 소록도에서 죽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가면서 쓴 시가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이다. 한하운은 후에 투병 중에서도 성혜원과 신명 보육원을 설립하고 운영했다. 53년에는 대한 한센 연맹 위원장으로 취임하여 나병 환자들을 위해서 구제사업을 하기도 했다. 한하운의 시는 12편 정도가 고작이다. 한하운의 시는 겉멋이 잔뜩 들고, 순고하고 고귀한 글을 쓴 예술가들보다 절실해서, 벼랑 끝에 매달려서 쓴 글이라 더 마음에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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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에 두부를 넣어서 끓여 먹는 것을 ‘연포탕’이라 한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대체로 뭐야? 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지만 확실하게 두부를 넣은 탕이 연포탕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난중일기에 ‘아침에 초계 군수가 연포탕을 마련하여 와서 권하지만...’라는 부분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먹었다는 연포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연포탕이 아니라 두부를 넣은 탕이다.


조선시대 가정생활서 ‘산림경제’에서 연포탕은 두부를 잘게 썰어 한 꼬치에 서너 개 꽂아 흰 새우젓국과 꿀을 타서 그릇에 끓이되, 배를 그 위에 덮어 소금물이 스며 나오게 한다’라고 되어 있다.


‘연포탕’이란 오래전에는 두붓국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먹었다는 연포탕 역시 두부탕에 가깝다. 낙지가 아닌 쇠고기가 들어가고 주재료가 여러 갈래로 썬 두부이다. 해서 감칠맛은 배제되어 있고 두부의 향과 맛이 풍부했다고 전해진다.


어렵게 찾을 필요 없이 네이버에 ‘연포탕’을 쳐 보면 지식백과에 자세하게 표기되어 있다. 정의는 두부를 지져 닭고기, 표고, 석이, 다시마 같은 재료들과 함께 끓여 여기에 가루즙을 풀어 넣어서 부드럽게 만든 두붓국의 하나라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두부를 먹기 시작한 지가 놀랍게도 고려 시대로 올라간다. 고려 시대 문헌인 ‘목인집’을 보면 ‘오랫동안 맛없는 채소 국만 먹다 보니 두부가 마치도 금방 썰어낸 비계 같군. 성긴 이도 먹기에는 두부가 그저 그만. 늙은 몸을 장으로 보양할 수 있겠도다’라고 쓰여 있다.


후에 ‘세종실록’에는 명나라 황제가 ‘칙서가 이르거든 특히 두부 만드는 솜씨를 익히 보내주기 바라오’까지 되어있다. 우리나라의 두부는 이렇게 역사가 깊고 맛도 깊었다. 연포탕이라는 이름은 원래 두부가 들어간 국을 칭하는 것이다.


낙지를 넣어서 끓인 연포탕은 그 앞에 낙지라고 넣어줘야 한다. 낙지 연포탕이 정확한 표기라고 할 수 있다. 어떻든 두부를 넣어서 끓인 두붓국은 속을 든든하게 해 준다. 나처럼 위가 튼튼하지 못해도 먹기 좋은 음식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촌의 전통시장에 손두부를 만들어 파는 곳이 있었다. 운이 좋으면 출근하면서 들러 한 모를 구입하여 소중하게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저녁에 데워서 뜨겁게 한모 먹을 수 있었다. 맛이 정말 좋다. 간장도 뭣도 필요 없이 두부의 담백하고 고소한 맛으로만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없어져서 그런 두부의 맛을 보기는 힘들다.



두부 하면 하루키를 빼놓을 수 없다. 하루키는 에세이에서 두부를 늘 찬양했다. 한 에세이에서 ‘최근에는 맛있는 두부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자동차 수출도 좋지만 맛있는 두부를 없애는 국가구조는 본질적으로 왜곡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했다. 이 에세이가 지금으로부터 25, 6년 전의 칼럼이다.


그렇다면 지금 일본의 두부는 최악일까. 아니다. 현재 한국의 두부를 먹다가 일본으로 가서 먹어보면 그동안 내가 먹은 두부가 정녕 두부였는지 알게 된다.


하루키는 두부를 맛있게 먹는 법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우선 제대로 된 두부 가게에서 사야 한다. 슈퍼는 안 된다.
둘째, 사 가지고 오면 곧바로 그릇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
셋째, 그날 안에 먹어야 한다. 간장이나 양념 같은 것은 일체 치지 않고 그냥 새하얀, 매끈매끈한 걸 꿀꺽하고 먹어치우는 것이다.


두부는 새벽에 오는 음식으로 절대 비싼 음식이 아니다. 손두부 전문점에서 두부를 코스식으로 만들어서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음식을 팔고 있다. 이건 정말 반칙이다. 두부는 기껏해야 두부일 터인데. 두부는 그저 두부다.


두부의 본연의 자세는 두발로 딱 버티고 서서 맛으로 맞서는 맛.
그것이 두부 본연의 자세라고 하루키는 말하고 있다.


두부를, 맛있는 두부를 밥상에서 만나면 즐겁기 그지없다.


요즘은 두부에 두부 맛 이외의 맛이 들어왔다

또 이렇게 요즘의 또 다른 두부는 맛으로만 보자면 더 맛있어졌다. 두부만 가지는 담백한 맛에서 벗어나 좀 더 맛이 가미되어서 누구나 두부만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확실히 맛은 더 나아졌지만 단단하게 두부의 담백한 맛 만을 가지고 있던 두부가 그립기도 하다.


두부는 만두와 함께 라면에 넣어서 먹어도 맛있다. 두부는 다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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