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비물, 침, 재채기, 타액.
현재 가장 두려워하는 단어가 아닌가 하다.


2015년 6월, 때 아닌 메르스로 일상의 혼란을 느끼며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안해졌다. 메르스는 이번에 한국으로 들어와서 그 힘을 키웠는데 바이러스 형태로 힘을 키운 것이 아니라 메르스가 전하는 어떤 관념이 사람들의 혼란을 더 야기했고 공황상태로 밀어 넣고 말았다.


영화 컨테이젼을 보는 착각이 들 정도다. 메르스를 다루는 언론은 초기대응이 미흡해서 구멍 뚫린 정부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받지 못해 추측성 보도를 전달함으로 사람들의 혼돈을 증폭시켰다. 일 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부는 병원을, 병원은 정부를 향해 독 번데기를 뱉어냈고 서로 상호작용을 하지 못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조직이 아닌 개개인이 되었다. 그에 따라 많은 곳에서 기능을 잃어버린 개개인의 고통이 생겨났고 전국으로 퍼져나간 메르스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바이러스는 왜 생기는가.
숙주를 찾아서 기생을 하는데 숙주가 죽기를 바라며 숙주가 죽으면 바이러스 역시 생명을 잃고 만다. 그럼에도 바이러스는 어딘가에서 인간의 몸으로 들어온다. 이 바이러스가 인간의 몸에 기생을 하면서 숙주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기생수처럼 자신이 살기 위해, 생명의 연장을 위해 어떤 몸부림이나 방어를 한다면 지금 보다 공포가 덜했을까.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인간을 공격해온다. 하지만 그건 인간이 보는 입장에서다.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대상을 정해놓고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바이러스는 숙주를 찾아서 이동경로를 따라 옮겨가며 숙주의 몸을 파고들어 죽이고는 자신도 죽는다. 바이러스는 사실 아주 연약하고 미미한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몸을 파고 들어온 기생수 같은 바이러스는 자신이 살기 위해 인간을 포식하는 생물체로 나온다. 그저 생존을 위해 인간을 먹는다. 그것에 집중을 할 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 살육을 하기에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기생하는 생물체가 괴물로 보이겠지만 기생체는 살기 위해서 인간의 고기를 먹는 것으로 나온다.


기생하는 생물의 임장에서 보면 인간이 가장 악랄하고 포악한 지구 상의 생물체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지니고 있지만 단백질의 공급원이라는 이유로 많은 가축을 무차별적으로 사육을 하여 고기를 얻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물들에게서는(몇 종을 제외하고) 볼 수 없는 동족 살육도 서슴지 않고 일삼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동족 포식을 하는 동물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족을 먹는 경우가 있지만 인간은 그 이외의 이유로 같은 인간을 죽인다. 이념이 달라서, 믿고 있는 종교가 서로 다르다는 이유를 갖다 붙여서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죽인다.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나와 다르면 따돌리고 괴롭혀서 죽인다.


이런 모습이 기생하는 바이러스 입장에서 보면 모순인 것이다. 비록 기생수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요컨대 ‘렛 미 인’에서도 잘 나타난다.


바이러스의 입장에서 보는 인간은 모순의 덩어리다. 그래서 그럴까 현재 한국은 바이러스의 공포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혼란을 겪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한국 전역이 바이러스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해서 한국으로 가는 모든 여행을 막았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뉴스를 통해서 정부 산하 관계부터, 보건당국에서는 말하고 있지만 어딘가 겉돌고 있다고 국민들은 인식하고 있다. 더불어 늘어가기만 하는 메르스 확진자의 소식에 점점 불안하기만 하다.


중국에서 인천항으로 들어온 크루저 승선 6,000명이나 되는 중국인들은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배 안에서 밖을 바라보기만 하고 돌아갔다. 사람들은 두렵기만 하다. 격리 요청에 거부하고 밖으로 돌아다닌다. 나만 걸릴 수 없다, 식의 행보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많은 곳에 전문가들이 나와서 코로나바이러스는 아주 힘이 없고 여린 존재하고 말하고 있다. 체내에 들어온 코로나의 껍질은 사람이 숨을 쉬면 그 막이 깨지며 바이러스는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지금 한국에 번진 메르스는 공기감염이 된다고 할 정도로 전파가 매일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따른 구멍 뚫린 모습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노래방은 물론이고 메르스가 발병한 곳에서 치료를 받던 환자들은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더 큰 불안감으로 생활을 해야 한다.


[중략]


현재 인간의 몸에 파고 들어온 바이러스는 무기경쟁을 하고 있다. 무기경쟁에서 인간은 소극적이고 바이러스는 적극적이 된다. 인간과 전혀 다른, 인간의 몸을 숙주로 여기고 파고 들어온 바이러스와의 공진화는 이루어지지 않을까. 언제까지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그것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까지의 글은 2015년 메르스가 왔을 때 적은 글이다. 5년이 지난 지금 바뀐 게 전혀 없다는 것이 신기하다. 2015년에 쓴 글에도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그때 쉽게 깨져 죽는다던 코로나는 이제 전 세계의 핵공포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균은 여름에 창궐하고 바이러스는 겨울에 창궐한다. 그리고 대체로 이런 균이나 바이러스는 섬에서 도시로 흘러들어온다. 도시에서 섬으로 간 유일한 균이 매독균이다. 하지만 작금의 시대에는 이런 규칙이 전부 깨져버렸다. 바이러스가 전혀 생존할 수 없는 이런 무더워 속에서도 무럭무럭 세력을 확장시키는 바이러스를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주말을 기점으로 다시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 공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 깊게 붙어 버린 폐병 같은 숙명이 되었다. 뉴스 채널에서는 속보라는 타이틀을 달고 ‘모임 등 사람 간 접촉 줄이고 외출 되도록 삼가야’라고 말하고 있다.


개학을 하고 학교를 가고 아이들과 함께 모여 점심을 먹고 마주 보고 앉아서 그 녀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건 이제 아주 먼 기억이 되었다. 여름의 해변에는 물놀이를 즐기고 밤마다 축제가 열리고 무대에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가수들이 까맣게 타들어간 얼굴로 여름밤을 노래하는 풍경은 볼 수 없어졌다. 맛있는 안주에 자신이 있는 주인들이 이름을 걸고 하는 술집으로 여름밤을 달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꺼져가는 여름을 한잔의 술과 함께 읊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어졌다. 흑요나 아이가 바이러스에 걸리게 되면 치료가 되고의 문제를 떠나 엄마 아빠와 떨어져 음압병실에 갇혀서 우주인 같은 복장을 입은 의료진들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내야 한다. 당사자인 아이도, 그걸 보는 부모도 그리고 시작부터 끝을 알 수 없는 지금까지 고생을 하는 의료진들 역시 할 짓이 못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격리 중에 탈출을 하여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이들이 늘어났다. 마치 자신은 신이 된 것 마냥 아프지 않은데 왜 나를 격리시키냐 라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고 있는 모습에서 이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것이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공포가 느껴진다.


무지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좀비가 그렇다. 오로지 하나의 신념으로만 움직인다. 무식하면 못 배워서 그렇다 치지만 무지는 자신의 아는 것이 전부이며 옳은 것이라 믿기에 신념을 장착하면 걷잡을 수 없이 폭주를 한다. 그것이 무섭다.


정말 언제까지 바이러스에 대해서 사력을 다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몇 년 살다가 죽고 나면 그만이지만 아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라고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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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7Qpy5OfacM8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버린 영화. 초현실은 비규정적인 세계이며 비규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자만이 규정이 지어진 현실에서 마땅히 살아갈 수 있다

욘더 속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마그리트의 초현실 주의 속 반복과 블루와 9와 그린이 주는 매력과 마력에 빠져서 쉽게 나올 수 없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세계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세계

그건 마치 우리 인간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한 번 들어오고 나면 다시는 빠져나가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 단절은 고립을 부르고 고립은 분열을 일으킨다

비바리움의 뜻은 동물사육장이라는 말로 테라리엄 속에 소동물을 함께 넣어 감상하는 원예 활동이라 한다. 규범 표기는 미확정이며 소동물로는 도마뱀, 개구리, 작은 거북이, 금붕어 따위를 이용한다고 한다고 나와 있다. 끔찍한 세계인 것이다

소음은 없지만 소리마저 없는 곳에서 들리는 적막. 이 적막 속에서 벗어나는 길은 비바리움 뿐. 톰과 젬마는 어떻게 빠져나올까

초현실주의를 좋아하면 좋아할 영화. 초현실은 대체로 우리 머릿속의 확정지어지지 않는 어떤 것들과 비슷하며 그것은 공포로 이어진다. 이 공포에서 벗어나 재미없고 그저 그런, 화나고 짜증나는 일뿐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북적이는 현실로 돌아가고픈 우리 내면을 그려낸 영화 비바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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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마치 양 떼를 보는 것 같은. 환 공포를 지닌 사람은 이런 사진은 보지 못하는 것 같다.

비가 걷히고 난 후의 하늘은 가스층이 없어서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여준다. 구름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다. 여름의 하늘치고 너무나 생생하여 작정하고 한참을 바라본다.


근래에는 조깅을 줄이고 중간중간에서 근력운동을 좀 한다. 그러다 보면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이 많아진다. 이렇게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으면 구름의 변하는 모습에 시선을 늘 빼앗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연은 이런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을 매일 보여주지는 않는다. 여자와 같다. 여자는 늘 미소 짓고만 있지 않는다.


매일 볼 수 없기에 가끔 보이는

이런 그림 같은 하늘이 아름다울까.

매일 보는 것에 대해서

매일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나에 비해서 분명 덜

불행한 사람이다.


윗몸일으키기를 좀 하다가 발을 쭉 뻗어 하늘을 본다. 하늘의 구름을 발로 죽 끌어 본다. 하늘의 정경의 매력이 있다. 땀을 흘리는 와중에 바람이 한 차례 불어오면 얇은 책장을 넘기듯 나뭇가지들이 숨을 쉰다. 하늘에 그림을 그려놓은 구름들이 초현실 화가의 마음처럼 물결친다. 그런 흐름을 눈으로, 촉감으로 느끼고 있으면 실감이라는 것에 조금 다가서는 기분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누워서 다리를 들어 발을 곧게 펴는 게 힘들다


자연을 알아가는 것도 어렵지만 한 사람을 알아간다는 건 인생에서 가장 미궁과도 같은 문제처럼 더 어렵다. 좀비로 유명한 조이스 캐럴 오츠는, 한 사람을 온전히 알고 싶다는 욕구는 일종의 소유욕이고 착취 욕이다. 반드시 버려야 하는 낯부끄러운 기대이다,라고 했다.


매일 지나치는 하늘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아채지 못하는 변화가 있고 그 속에는 계절이라는 얇은 옷이 하늘과 푸른 나무와 구름과 그 사이에 생존하는 동물들의 모습까지 조금씩 다르게 만든다. 컴퓨터 회로의 동작처럼 자연은 때가 되면 전등의 불빛을 갈아치우고 나는 자연 속에 하나의 존속으로 존재되고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여름은 참 아름다운 계절이다. 모든 생존하는 것들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사람들과 고양이들 모두가 추위에 떨었던 적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잘 익은 복숭아 같은 얼굴을 하거나 다리를 벌려 그늘을 찾아 몸을 눕힌다.


골목의 풍경

생각을 접고 조깅코스를 벗어나 오래된 동네에 접어든다. 골목길이 아직 존재하는 동네다. 일명 달동네. 오래된 골목에서 테이크아웃의 일회용 커피 컵을 본다. 세계는 오래된 것과 새것 사이에서 방황을 하기도 한다. 세계는 그러한 방황 속에서 또 영차영차 앞으로 나아간다.

이젠 누구도 살지 않는


오래된 집의 오래된 창문도 본다. 마치 신제품의 아이패드를 본 것처럼 신기해서 한참을 바라본다. 예전에는 이런 창문을 달고 사람들은 일상을 보냈다. 아마도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창문의 겉에는 철제로 이렇게 만들었다. 별을 좋아하던 여고생은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창문을 통해 하늘에 떠오른 달을 보며 소원을 빌고 사연을 적어서 라디오에 보냈을지도 모른다. 가족들의 건강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그 남학생에게 나의 마음이 닿기를 바라면서.

정겹다기보다 여름인데도 스산하다

골목의 바닥은 생명력이 태동한다. 분명 아스팔트 같은데 오래되어서 그런지 봄이 되면 잡초도 올라오고 이끼도 낀다. 양쪽의 벽면이 보색으로 대비를 보여준다. 이곳에 온 이유는 이 골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가난을 짊어진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어 다닥다닥 붙어서 군락을 이루었던 동네.


여름이 다가오는 저녁이면 마당에서 전부 생선을 화덕에 굽고 된장찌개를 끓이는 냄새가 골목을 덮었다. 골목을 뛰어다니며 놀다가도 그 냄새에 배가 꼬르륵. 많은 아이들이 무리를 만들어 이쪽저쪽 골목에 자리를 차지하고 놀았다. 꼭 우는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는 꼭 여자 아이인 경우에 남자아이 때문에 울었다. 땀을 흘려가며 뛰어놀고 마당의 큰 대야에서 엄마에게 등짝을 맞아가며 목욕을 했던 골목길.


꽃들이 많고 화분이 많은 골목길이 되었으면

사진이 파스텔로 칠해놓은 그림처럼 보인다. 벽도 촌스러운 페인트를 칠했고, 촌스러운 화분에, 화분 받침대로 촌스러운 대야를 사용했는데 그런 것들이 모여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왼쪽 상단에 내 손가락이

덩굴이 벽을 타고 기어오른다. 이쪽 눈으로 보면 그저 골목의 모습이지만 또 다른 눈으로 보면 그림이다.

하늘이 붉게 물드는 순간


근래에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집 근처의 카페에서 글을 한 시간 정도 쓴다. 카페는 작은 공간이지만 큰 편안함을 안겨준다. 그런 카페가 있다. 빨리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서 편안하게 글을 좀 쓰고 싶은 생각이 드는 카페가 있다.


무엇보다 카페라테가 맛있다. 그리고 사장님은 친절하다. 친절함이 말과 행동에 묻어난다. 술 취한 회사원들도 동네 말 많은 아주머니들도 모두에게 똑같이 친절하게 대한다.

나의 책도 놓아주시고정말 맛있는 스콘

카페의 스콘은 맛있다. 참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스콘은 처음 먹어 본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장님은 그저 웃으며 고맙다고 할 뿐이다. 사실 스콘을 몇 번 먹어보지는 못했지만. 스콘이라는 빵을 먹어 본 건 파리바게트의 스콘을 먹어본 것이 다인데 스콘이라는 게 이런 맛이구나, 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스콘을 먹어보고 그 맛에 반해버렸다. 사장님은 포크와 나이프를 줬지만 그저 손으로 들고 먹는다. 한 입 먹고 아이스라테를 먹는다. 아아 정말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음료를 팔고 예쁜 공간의 카페가 살고 있는 집 근처에 있었다니.


역시 행복이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쿠키를 들고 한 입

작은 공간인데 편안한 곳

보통 한 시간 정도 글을 쓰다가 집으로 들어간다. 운동을 하고 난 직후라 나의 모습은 대역죄인 같은 모습인데 이곳에 들어오면 모든 것에서 차단이 되고 편안함으로 무장이 된다. 시원한 라테를 한 잔 마시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한 시간 정도 열심히 적을 수 있다. 이 날은 쿠키를 얻어먹었다. 쿠키가 손바닥만 한 게 크고 두툼하고 역시 맛있다.


가까운 것에서 위로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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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UpfZCh3FcI


해수의 아이만큼 난해하지만 그래서 구체적인 영화 블루 아워는 아주 긴 ‘시‘ 같다. 예고편에서의 심은경의 명랑한 모습에 머릿속 써니를 소환해서 본다면 뭐지? 하게 되는 영화

영화는 버닝만큼 모호하고 구체적이고 그래서 난해하지만 오히려 더 쉬운, 달력의 뒤편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나 앞이 보이지 않아도 질주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점점 잠겨가는 영화

과거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은 추억을 잡고 싶어 하는 사람을 부러워 하지만 추억을 잡을 수 없는 사람은 과거에 머문 사람을 또 부러워한다. 영화를 활자로 표현하자면 이런 느낌이다

우리는 어느 날 보니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이 온다. 전력질주를 하다 보니 시공을 뛰어 넘었다. 그러다보니 어른이지만 어른일 수 없어 아직 아이로의 모습이 가끔 툭툭 나오기도 한다

카호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카호의 영화를 나는 꽤 많이 본 편인데 어릴 때 스타로 부상했다가 낙하의 쓴 맛을 보았고 그러다가 조금씩 외모를 벗어 던지고 연기하나로 지금을 유지하고 있는 배우다

블루 아워에서의 카호의 연기는 정말 빠져들게 만든다. 광고감독으로 나오는 카호는 스텝이 괜찮냐는 질문에 ‘안 괜찮아도 괜찮아’라는 대사를 정말 그렇게 말을 한다. 이 대사가 초반에 나오는데 그때부터 카호의 연기에 빠져든다

블루 아워란 현재와 과거의 끼인 시간, 블루는 파랗게 보이지만 불순물이 많이 낀, 까맣지도 않고 새파랗지도 않은 새벽의 불순물이 많이 낀 흐릿한 청록색에 가까운 블루다. 누구나 그 시간에 갇히게 되면 쉽게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기쁨보다 우울과 슬픔이 짙을수록 나 자신을 더 느끼게 되는 모순의 우리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지독한 초현실 영화 블루 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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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요 아이로 먹자, 라는 말은 일전에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3살 정도 된 아이에게 엄마가 조각 케이크를 고르며 한 말이다. 줄 서 있다가 뒤에서 듣고 놀랐지만 표는 내지 않았다.


오늘은 요 아이로 먹자.


의인화가 모든 분야에 적용된 요즘, 젊은 엄마들이 늘 하는 말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언뜻 들으면 섬뜩한 말이다. 게다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을 하다니. 오늘은 요 아이로 먹자. 뭔가 모골이 송연하다.


일상에 의인화가 파고든지는 오래됐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의인화를 일반화시켜서 생활한다. 요컨대 자신의 자동차를 그저 ‘이 차는'라고 하기보다 ‘이 녀석’라고 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카메라도 이 녀석이라고 칭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역시 어색하지 않게 사람들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홈쇼핑에서 물품에 ‘얘’라고 의인화시키면서 의인화의 바람이 돌풍처럼 인간생활 전반을 덮쳤다. 외국도 그러는지 궁금하다. 만약 그렇다면 외국은 어떻게 표기하는지 알고 싶다. 백화점에서 옷을 설명하는데도 얘는 이렇고 쟤는 저렇고, 가방도 요 아이는 이런 옷차림에 어울린다고 하고, 유튜브 속 유명인의 아내나 셀럽 엄마들이 아이가 유치원에서 오면 요 아이(음식 기기)로 간단하게 만들어서 먹이면 아이들이 좋아하네 마네 같은 말을 한다.


그러다가 결국 먹는 음식에까지 의인화를 하기 시작했다. '요 아이로 먹자', 무슨 식인종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영화 속에서 인간보다 월등히 지능이 높은 종족이 인간을 개처럼 끌고 다니며 얘를 오늘 먹고 쟤를 내일 먹자,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음식을 의인화로 말하는 것이 배우고 못 배우고의 문제는 아는 것 같다. 요 아이로 먹자고 말하는 아이의 엄마도 아이의 엄마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젊고 아름다웠다. 게다가 제대로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배움에 있어서는 남 못지않았을 것이다. 할머니 세대들, 7, 80대가 넘은 할머니들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음식에 의인화를 시켜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건 하나의 흐름이자 유행이라고 생각된다. 유행이다 보니 홈쇼핑, 예능, 유튜브에서 모두가 그렇게 사물의 의인화로 말을 한다. 그리고 먹는 음식을 의인화시켰다.

 

이런 의인화가 우리가 좋아하는 고독한 미식가에게 까지 퍼졌다. 먹뱉논란이 끊이지 않는 유튜브의 홍수 속에서도 고로 상은 롱테이크로 맛있게 음식을 끝까지 씹어서 꿀꺽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1분 이상 이어지는 롱테이크로 한 인물을 촬영하려면 그 인물이 연기력이 높아야 가능한 촬영이다. 레버넌트에서 디카프리오가 그렇다. 카메라는 디카프리오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롱테이크로 간다. 그렇게 하려면 얼굴에 드러난 표정과 피부에 그 감정을 드러내야 가능하다. 그렇기에 상까지 타지 않았나. 어떻든 고로 상은 그걸 해내고 있다.


우리의 고로 상도 이렇게 음식에 의인화를 시켰다. 단순히 번역가가 의인화로 자막을 그렇게 한 것이라 믿고 싶지만 대사에 ‘코이츠가 오이시이’ 같은 말을 하는 것으로 원본에서도 음식을 의인화시켰다고 본다. 이제 먹방에 쓰이는 대사와 자막은 음식의 의인화가 일상화되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알리기 위한 전문가 두 명의 방송에는 음식의 의인화가 없다. 한 명은 황교익으로 박찬일, 임지호와 함께 오래전부터 바른 먹거리를 사람들에게 먹이려는 운동을 하고 있다. 좋은 식재료, 즉 제철음식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것이 맛과 영양, 둘을 동시에 잡는 일이라 말하고 있다.


 

또 한 명은 백종원으로 1인 가족이 4인 가족을 넘어선 요즘 조금 건강에는 썩 좋을 리는 없지만 비싸지 않은 식재료를 가지고 간단하고 빠르게 만들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인 가족의 경우 퇴근 후에 파김치가 된 몰골로 제철 식재료를 구해와서 다듬고 손질해서 그걸 다시 요리를 해 먹기에는 너무 힘들고 지친다.

 

내 생각에 이 두 사람 다 끼니를 때운다기보다 한 끼를 제대로 먹이려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전문가들이다. 단지 방법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 사람의 방송에서는 음식의 의인화는 찾아볼 수 없다. 음식을 음식으로 대하지 이 녀석은, 이아이는, 요 아이는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무생물의 의인화가 나쁘지는 않다. 친숙하게 느껴지고 친구처럼 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음식의 의인화는 좀 그렇잖아. 자신의 애를 보며, 오늘은 요 아이로 먹자. 이 말은 정말 충격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런 올바른? 생각도 어쩌면 시효 되고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유행에, 흐름에 먹혀가고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인화를 시키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 바로 옆의 사람도 사물에 ‘얘가'같은 말을 한다. 그럴 때마다 그것을 지적하는 것도 이제 이상한 일이 되었다. 즉 이상한 놈이 되는 것이다. 평범한 생활에서 아무렇지 않은 일로 이상한 사람으로 내몰리는 것 또한 나 역시 싫다. 음식의 화려한 달변가인 고로 상마저 ‘이 녀석이 맛있군’라고 해버리니 이제는 참과 거짓, 악과 선이 정말 모호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어떤 녀석을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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