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을 잘 못 자고 악몽을 자주 꾼다. 누우면 바로 잠이 드는데 긴 시간 잠을 이루지는 못한다. 참 별로다. 잠은 길이보다 깊이의 문제라는데 악몽 때문에 깊게 잠들지도 못한다.
잠은 빨리 드는데 중간에 꼭 두 번 정도는 깨고 만다. 악몽 때문이기도 하다. 악몽의 질을 따지자면 그리 대단한 건 아니다. 간혹 하늘을 날다가도 떨어지면 악몽이니까.
하늘을 나는 꿈도 나이가 들수록 꾸지 않게 된다. 그리고 공중 부유 정도도 점점 낮아져서 나중에는 그런 공상과학적인 꿈은 아예 꾸지 않는다.
나 같은 경우의 악몽이라면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다가 일어난다.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지만 꿈속에서는 비슷한 행위를 또 하고 있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꿈속의 그 집은 구조가 조금씩 늘 변경되기에 또 들어가서 꿈속의 이벤트에 놀라서 일어나게 된다.
어느 날은 악몽이라 불릴만한 제대로 된 악몽을 꾸었다. 담배를 피우는 꿈인데(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담배연기가 빠져나가지 않고 눈에 차오른다. 눈동자에 서서히 들어차는 것이다. 온 세상이 담배연기로 피어오르는 모습처럼 보인다.
담배연기는 그 압도적인 냄새와 함께 눈에 들어차 빠져나가지 않는다. 모든 세상이 담배연기로 가득 차 보여서 겁이 난다. 너무 무서운데 숨을 쉬는 것도 힘들다. 담배연기는 눈동자 그 위로 올라가 차곡차곡 쌓여 내 눈동자의 모든 부분을 연기로 덮어 버릴 때 잠에서 깼다.
정말 무서운 꿈이었다. 이 정도의 강한 악몽을 꾸면 바로 잠들지 않고 꿈의 내용을 메모를 해 둔다. 그날 저녁에 좋아하는 멍게를 왕창 먹었는데 배탈이 나고 말았다. 설사를 며칠씩 했다. 처음이었다. 이런 경우 하루 정도 하다 끝나는데 약을 먹고도 며칠을 쏟아냈다. 악몽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악몽이 계속되는 기분이다. 악몽이 꿈속에서 성이 차지 않아 꿈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담배를 피우는 꿈을 꾸는 것은 아무래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내가 흡연에 대한 열망이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일부러 피우지 않는 것보다는 담배를 피우면 먹은 것들을 전부 토하고 만다. 담배가 전혀 몸에 받지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학창 시절과 대학교 때 몇 번 피워봤지만 결국 구토를 유발하고 전부 토해내고 말았다. 순한 담배부터 독한 담배까지 다 피워봤지만 담배는 다 거기서 거기였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만 해도 담배가 보급품으로 나왔는데 옆 사람에게 다 주고 말았다. 아까웠다. 그 뒤로도 술을 마시고 몇 번 피워봤지만 술을 마시며 먹은 것들을 기분 나쁘게도 다 토해내고 말았다. 이후에는 아예 피우지 않게 되었다.
담배연기가 딱히 기분 나쁘거나 냄새가 그렇게 싫은 것도 아니다. 흡연에 대한 강한 열망이 나에게는 있다. 겨울의 밤 골목, 가로등 밑에서 가죽재킷을 입은 남자가 기대어서 담배를 피울 때 여귀의 입김처럼 화악 퍼져 나가는 담배연기를 나는 좋아한다.
친구 중에는 담배를 피우면 유독 담배연기가 실처럼 나오는 놈이 있는가 하면, 한 친구는 담배를 피우고 머리를 한 번 쓱 쓸어 올리며 연기를 뱉어내는데 화악 컴퓨터 그래픽처럼 입에서 나올 때 멋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양쪽 코에서 연기가 가스처럼 밑으로 빠져나올 때는 멋짐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멋지게 보이는 건 딱 시기가 있는 것 같다.
일단 늘씬해서 가죽재킷이 잘 어울려야 했고, 앞머리가 찰랑거려야 하고 제임스 딘처럼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가 마치 손가락과 혼연일체가 되는 착각이 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20대의 건강한 녀석이라야 한다. 아무래도 웃고 떠들며 담배를 피우는 것보다 고독하고 냉소적인 얼굴을 한 채 겨울의 한 모퉁이에서 담배를 철학적으로 피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열망이 악몽으로 피어 날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꿈에서 담배가 등장하면 어김없는 악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놀라서 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꿈이라는 것에 안도와 함께 담배가 등장하는 악몽이라는 것에 대한 찝찝함을 느낀다.
악몽이라는 건 왜 꾸는 걸까. 에 접근하면 여러 가지 설과 진단이 있다. 악몽이니까 당연하지만 꿈에서는 웃을 일이 없다. 그러고 보면 꿈속에서 웃어 본 적이 없다. 꿈이라고 해서 즐거운 꿈이 없을까. 하지만 악몽은 꾸지만 즐몽? 은 꿔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 꿈속에서 웃었다. 제기차기를 하는 꿈이었다. 나는 꽤 제기를 잘 찼다. 양발로 차면 100개는 거뜬히 찰 수 있었다. 군대에서 소대별로 제기차기 대회를 했는데 내가 가장 오래, 많이 차서 그것으로 휴가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전에 제기차기를 한 번 해봤는데 서른 개 정도밖에 차지지 않았다.
여러 번 시도를 했는데 서른 개, 많이 차면 50개 정도에서 끝이 났다. 만약 제기차기를 해보지 않았다면 제기를 하나 구입해서 한 번 차 보면 평소에 쓰지 않던 다리 근육을 써야 한다. 제기를 차려면 다리를 이렇게 올려야 하는데 평소에 이런 식의 다리 근육을 쓰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제기차기를 하고 나면 엄청 힘들 것이다. 아무튼 꿈에서 제기차기를 하는 꿈이었는데, 상대방과 대결을 하게 되었다.
상대방은 나에게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을 쏟아낸 다음 제기를 찼는데 두 개를 찼다.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는데 그 웃음을 실제로도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에 내가 놀라서 깼다. 만약 누군가 옆에서 봤다면 얼마나 미친놈으로 봤을까.
문득 오규원 시인의 ‘죽고 난 후의 팬티‘가 생각난다. 시를 소개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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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이 시를 읽으면 근간에 죽음을 보았던 나는 나의 죽음 그 직후에 대해서도 생각을 한다. 혹시나 악몽을 꾸었을 때처럼 얼굴을 찡그리고나 있지 않은지, 실실 웃는 얼굴로 미친놈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은지. 오규원 시인처럼 속옷은 깨끗하게 갈아입고 있는지. 때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목욕은 잘했는지.
악몽보다 더한 현실 속에서 악몽이 오히려 편안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본 영화 ‘멋진 악몽’처럼 악몽이 멋질 수 있는 이유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