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 에프론’에 관한 이야기다. 노라 에프론? 그게 누구지?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녀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나 ‘유브 갓 메일’ 같은 유쾌한 로맨틱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그리고 영화사에 길이 남을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였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세 편의 영화의 공통점을 잡아냈을 것이다. 세 편 영화에 ‘맥 라이언’이 나온다. 노라 에프론은 2016년 6월에 71살의 나이로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었을 때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이 맥 라이언이었다.


할리우드의 잘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의 장을 열어놓은 감독, 여성 감독 ‘노라 에프론'의 삶이 재미있고 영화와 같다. 영화 요정 김혜리 기자에 따르면 세계의 영화사를 정리할 때 노라는 언급되지 않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미국인이나 우리들 개개인이 소장하고픈 영화를 꼽을 땐 그녀의 영화가 추억을 만들어줘서 가슴에 길이 남을 것이다.라고도 했다.


그녀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그녀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시나리오를 완성한 때가 47살이었다.



그녀의 집안 대부분은 작가 출신이다. 부모님 모두가 시나리오 작가다. 게다가 노라 에프론의 딸 넷이 전부 작가 내지는 소설가다. 노라는 저널리즘의 기자로 시작해서, 백악관 인터뷰도 하고, 우편물 정리도 하다가 마침내 뉴욕포스트 기자로 칼럼니스트 글을 쓰다가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다.


그런 노라의 남편이 누구냐 하면, 워터게이터 사건을 파헤쳐 정의로운 기자가 된 두 명중 한 명인 ‘칼 번스타인’이었다. 칼은 미국인들에게 투철한 기자로 추앙받으며 미국의 영웅이 되지만 노라에게는 불행이 닥쳐온다.


닉슨 대통령을 쓴 기자들.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칼은 노라 몰래 바람을 피운다. 노라에게는 들키지 않는데,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노라는 칼이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개인적으로는 죽이고픈 남편이지만 미국인들에게는 영웅의 기자였다. 미국 사회의 정의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한 칼의 개인사쯤은 묵살되기 마련이었다. 가정의 일탈이 기자의 투철한 사명의식을 깎아내릴 수는 없었다.


칼 번스타인을 연기한 더스틴 호프만의 영화도 있다. 그러다가 노라는 칼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을 겨냥한 소설을 써서 발표한다. 그 누가 봐도 소설 속의 추악한 주인공은 칼 번스타인이었고 칼은 노라를 고소하네 마네, 하기도 했다. 미국인들은 참 재미있고 다이내믹하다.


더스틴 호프만 주연.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노라가 처음으로 시나리오로 인정받은 영화가 ‘실크우드’였다. 메릴 스트립과 셰어가 나온다. 셰어는 당시에 지금처럼 의학의 힘을 너무 받지 않은 상태여서 그런지 훨씬 인간적으로 보인다. 실크우드는 핵발전소의 비밀을 폭로하는 영화로 상당히 좋은 영화였다.


메릴 스트립과 셰어 주연. 카렌 실크우드의 이야기 '실크 우드'


시나리오를 죽 써 오던 노라가 감독으로 전향한 이유는 부모님 때문이었다. 작가인 부모님은 둘 다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들은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로 삶을 순탄하게 헤쳐나가기가 힘들다고 늘 말했다.


노라가 ‘시애틀이 잠 못 이루는 밤’의 메가폰을 잡음으로써 인정받는다. 그때 그녀의 나이 51세.


정체기를 맞이한 로맨틱 코미디는 98년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을 다시 조합시켜 ‘유브 갓 메일’을 만든다. 참고로 한국의 ‘접속’이 97년에 나왔으니 비슷한 내용으로 한국판이 먼저 나온 셈이다. 지금은 너무 뻔한 내용이자만 당시에는 신선한 로맨틱 영화 내용이었다.


노라의 유작이 2009년 ‘줄리 앤 줄리아’다. 에이미 아담스와 메릴 스트립이 주인공이다. 현재의 줄리가 과거의 줄리아의 요리를 따라 해서 블로그에 올리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는 정말 캐릭터의 따뜻함이 묻어난다.



침체의 성장이 아니라 인생의 성장기를 느끼고 있다면 도움이 되는 영화가 ‘줄리엔 줄리아’다. 나이를 먹어가며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게 만든다.


노라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면서 여배우들에게 탐나는 캐릭터를 만들어준 감독이다. 여배우를 주인공의 모습을 떠나서 영화 속에서 진짜 여자로 만들어준 감독 노라 에프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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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07-1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주 좋아하는 감독입니다!!! 그녀의 책도 다 읽었어요!!! 알라딘에서 노라 에프론에 대한 글을 읽게 될 줄이야. 넘 반갑네요,,오랜만에!

교관 2020-07-17 11:45   좋아요 0 | URL
정말 노라 에프론의 찐팬이시군요, 저도 반갑습니다 ㅎㅎ. 며칠 전에 실크우드를 한 번 더 봤더랬죠. 좋은 영화였습니다.
 



영화 카운트다운은 죽음의 앱을 깔면 죽는 시간을 알려주고 그 시간이 되면 가차 없이 죽는 영화다. 보통 공포영화에서 여자들이 고함만 지르지 않아도 귀신이 찾지 못해서 덜 죽을 텐데 꺄아아악 하는 고함 때문에 더 죽는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여자의 고함이 비교적 적다

친구들끼리 장난으로 앱을 깔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중 한 명이 병원에 입원을 하고 주인공인 간호사 퀸도 앱을 까는데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알린다. 휴대폰을 새것으로 갈아도 앱은 저절로 깔린다. 해킹을 해서 수명을 늘리지만 소용이 없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최초 병원에 입원한 죽음의 앱이 깔린 남학생이 그 시각에 그대로 죽으면서 퀸은 앱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친다

원래 계획이 있는데 앱 때문에 계획을 바꾸면 앱이 업그레이드 되면서 죽음의 시간이 단축된다. 퀸은 자신과 비슷한 시간에 죽음이 예고된 맷을 만나면서 같이 벗어나려고 하는데. 호르몬이 충만해서 어떻게든 언니에게 반항하려는 동생인 조단 역시 죽음의 앱을 까는데 퀸의 죽음의 시간과 같게 나온다

퀸은 조단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데. 죽음의 시간보다 1초만 더 살아도, 죽음의 시간보다 앞당겨 죽으면 앱이 깨진다는 것까지 알아낸다. 어떻게 죽음의 앱에서 벗어날까. 영화는 데스터네이션 시리즈와 비슷하다. 마지막에서도 다음 편을 예고한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일본의 기묘한 이야기 편에 있었다. 3단계로 미운사람을 골려 주는 앱으로 마지막 단계로 죽여달라고 하면 죽여 버리고 만다. 운명에 관여한 공포영화를 좋아한다면 볼만하다

이런 앱이 있다면 요즘 말도 안 되게 죄를 짓는 사람들의 폰에 착 달라붙어 죽음이 얼마 남았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응급차를 세워서 죽으면 내가 책임질게 했던 택시기사의 폰에 붙어 인간이하의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수명을 단축시킨다. 아이를 감금하고 때린 부모의 폰에 달라붙어 너는 이제 몇 시간밖에 살지 못한다고 알려준다

그래서 원래 하려고 했던 계획이 있는데 죽음의 앱 때문에 이왕 죽을 꺼 다 죽여버리겠어, 하면 앱이 알아서 업그레이드가 되어 죽음의 시간을 30초 안으로 당겨 버리는 것이다

아무튼 뭐 그런 내용의 공포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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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끓이면 라면이 짜지 않겠어?


흥, 라면은 짜야 맛있다.

라면 맛도 모르면서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짜게 먹는 건 좋지 못하다는 건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나 역시 지구인이니까 모르지는 않다. 만약 라면을 매일 먹는다면 또 모를까, 어쩌다 먹는 라면인데 먹고 싶은 대로 끓여서 맛있게 먹는 것이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는 일이다.


사진의 라면은 거의 전골 수준으로 밑에는 목살이 깔려 있고 신김치도 들어 있으며 무생채가 많이 들어가 있다. 큰 만두도 2개 정도 들어 있고 땡초와 양파도 들어있다. 마지막에는 식초를 한 숟가락 풀었다. 뜨거운 국물에는 식초가 잘 어울린다. 뜨거운 라면을 후루룩 빨아 당긴 다음 쿰척쿰척 먹고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마신다. 이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렇게 먹기 위해 일을 마치고 오는 내내 다른 것에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라면 전골 하나를 생각하며 왔다.


먹는 녀석들에서도 김준현이 한 여름에 밤새 낚시를 하고 아침에 그 찝찝함을 가득 안은채 집으로 오면서 초밥 한 팩과 시원한 맥주를 사들고 와서 냉장고에 넣은 다음 샤워를 할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흐르는 땀을 꾹꾹 참고 있다가 샤워가 끝남과 동시에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초밥 하나를 입에 넣었을 때의 그 기쁨은 무엇과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때때로 건강과는 무관하게 행복에 다가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반드시 좋지 않다, 옳지 못 하다, 나쁘다,라고만 할 수는 없다. 건강학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순간이 가득한 것이 정신적으로 피폐해서 스트레스로 구멍이 숭숭 뚫리는 것보다 나은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근래의 우리는 간단하고 저렴하지만 배가 부르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의 백종원 레서피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의 요리방법에 대해서 말은 많아서 건강과는 좀 멀지 몰라도 매일 신선한 재료로 장을 봐서 깨끗하게 손질하여 매끼를 챙겨 먹을 수 없는 현실에서 그의 요리법은 비록 조금 건강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한 끼 마음 놓고 맛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김치는 밥상의 옵서버 역할이지만 김치 자체가 아주 맛있을 때가 언제냐면, 계란 프라이를 밥 위에 올려 노른자를 터트렸을 때 밥 위로 노른자가 햇살처럼 흘러내리는데, 그때 김치로 그 부분을 싸서 먹는 그 맛이 좋다. 게다가 갖추어진 식탁에서 느긋하게 먹는 것보다 개인적으로는 식탁에 서서 계란 프라이를 해서 밥 위에 올려 김치를 곁들여 빠르게 후루룩 입 안에 가득 넣어서 하얀 벽을 보며 우물거리며 먹는 맛을 좋아한다. 노른자의 맛과 김치의 깊은 맛이 한데 어우러져 그 순간은 행복하다. 누군가는 일어서서 먹는 것에 애처롭다, 딱하다, 또는 불쌍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저 재빠르고 맛있게 작은 밥공기의 밥을 먹어치우는 그 맛이 있다. 타인이 보기에는 형편없는 식사와 방식일지 몰라도 그 방식으로 행복하다면 건강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무엇일지도 모른다.


김치가 맛있으려면 배추가 맛있어야 한다. 배추는 일 년에 여러 번 재배할 수 있다. 그래서 토양이 좋으면 배추는 맛있다. 그게 일반적인 정설이고 맞는 말이고 다 아는 말이다. 하지만 배추는 정말 신기하게도 쓰레기 처리장, 또는 폐수처리장 같은 오물이 잔뜩 있고 더러운 곳에 배추씨앗을 심어놔도 배추는 무럭무럭 잘 큰다. 그럼 그 배추는 맛이 없고 더러운 배추인가?라고 하면 그렇지도 않다. 배추는 더러운 토양 속에서 자양분이 될 만한 것들만 빨아먹는다. 단지 더러운 토양에서 자란 배추는 더러울 것이라는 우리의 의식이 그 배추를 멀리하는 것뿐이다. 배추는 어디서나 씩씩하고 생생하다. 물론 토양이 좋고 공기가 좋으면 정말 좋겠지만 대륙이라 불리는 중국에서 난 배추가 꼭 그렇게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싱싱한 배추를 많이 먹는다면 인간도 배추의 유전자를 닮아서 언제나 씩씩하고 싱싱한 인간이 되지 않을까,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해본다.


라면을 짜게 먹고 편의점 음식을 많이 사 먹으면 사람들은 큰일 날 것처럼 이야기한다. 병 생기고 고통스럽게 보내다가 일찍 죽는다 식으로 끝맺음한다. 먹방 유튜버들을 보며 칭찬 반, 욕 반인 이유도 그 속에는 너처럼 그렇게 먹다가는, 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은 예전에 비해서 인스턴트를 그렇게 먹고 1인 가구가 4인 가구를 넘어선 지금, 편의점 음식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옛날의 사람보다 수명이 더 늘어났다. 게다가 체격도 체력도 더 커지고 늘어났으며 현재의 50세는 예전의 30세보다 더 젊어 보이기도 한다.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를 읽어보면 세상이 종말 한 후 폐허가 된 지구의 도심에서 살아남아 있는 건 코카콜라 캔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것을 따서 마시며 추억에 젖고 처음 보는 맛에 아들은 기뻐한다. 코카콜라는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도 않고 맛도 변하지 않은 채 절망 속에서 하나의 빛과 같은 존재였다.




우리가 매일 챙겨 먹는 영양제는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일까. 나는 영양제는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근래에 오메가 3을 먹으라고 줘서 한 알씩 먹고 있는데 주위를 보면 대체로 5, 6알씩 챙겨 먹는다. 아침은 먹지 않아도 영양제는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고 한다. 이거는 뭐에 좋고, 라면서. 효과를 보려면 얼마큼 먹어야 하는지, 또 효과는 언제 나타나는지 아는 사람은 사실 없다. 아침은 먹지 않으면서 이렇게 10알 가까이 매일 먹는다면 간이나 신장에 무리를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영양제는 꼭 플라세보 같다. 먹으면 그 하루는 정말 튼튼하다고 느껴져서 하루를 활기차게 보낼 수 있다면 그것대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하루에 몇 알씩 들어가는 비용이 개인적으로는 비싸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건강에 부쩍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영양제가 신경 쓰는 생활 사이를 파고들었다. 매일 챙겨 먹듯 매일 운동을 하라고 권해보지만 운동은 하기 싫어한다. 나는 조깅을 매일 하라고 하지만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기 때문에 싫다고 한다. 무식한 생각이지만 영양제를 챙겨 먹기보다는 운동을 매일 하고 골고루 식사를 하는 게 더 낫다고 보지만 사람은 제각각인 동물이니까.


그렇다면 운동을 많이 하는 것은 어떨까. 나 같은 경우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조깅을 하는데 주위에 운동중독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에 3시간 정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매일 한다. 몸이 캡아처럼 막 이렇다. 그래서 운동을 하고 나오면 힘없어하는데, 아 운동하느라, 운동하고 왔어, 운동했으니까.라는 말로 에너지를 운동하는데 다 쏟았다는 의미다. 운동은 생활의 활력을 가지려고 하는 건데 정작 운동할 때에는 활력 가득히 운동을 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힘이 빠져서 아 몰라, 같은 분위기면 운동 중독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운동을 많이 하면 건강한가?라는 질문에 다가가면 글쎄다. 왜냐하면 운동선수 출신들은 거의 20년 넘게, 운동을 하루에 8시간 이상을 해왔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투병으로 사망하는 기사를 우리는 그동안 봐왔다. 축구선수였던 최용수도 감독을 하고 나서는 배가 너무 나와 버렸다. 운동을 안 하던 사람들이 운동을 일주일 정도 하면 마치 20년 동안 운동을 해왔던 사람처럼 말을 한다. 하루에 몇 시간씩 운동을 하기보다 운동량을 죽 늘려서 15분을 하더라도 죽기 직전까지,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나 정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부분이지만 운동을 하지 않고 건강하고 정신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면 굳이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운동을 '많이' 하는 것과 건강과의 상관관계는 잘 모르겠다.


나는 주위에 조깅이 가장 좋은 운동이라 조깅을 권한다. 이유는 돈이 들지 않는다. 다른 운동처럼 거창하게 복장이나 스타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고 당연하지만 누군가에게, 또는 조깅을 하기 위해 필드를 사용하는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 운동화만 있으면 매일 어디던 조깅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이쪽으로 달리는 것이 지겨우면 저쪽으로 달리면 되고, 평지를 달리는 것이 심심하면 코스에 오르막길이나 공원의 계단을 집어넣어서 달리면 된다. 기분 좋은 고통을 느끼게 하며 기분을 확 끌어올려준다. 물론 나의 기준에서다. 하지만 조깅이 무릎에 무리를 주어 달리고 나면 걷지도 못할 정도로 다리가 아프다면 조깅은 하지 말아야 한다. 재미없는 운동이기에 재미있지 않으면 도저히 운동을 할 수 없는 사람도 달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매일매일 조깅을 하기 직전까지는 달리지 말아야 할 이유 100가지가 유혹을 한다. 오늘은 귀찮고 힘들기 때문에 달리기 싫은 이유는 늘 내 곁을 맴돈다. 하지만 달려야 하는 이유 한 가지가 한 시간 정도 조깅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달리고 나면 오늘도 심장에 건강한 무리를 줬다는 생각이 들면서 맥주 맛도 좋다. 매일 달리다 보면 매일 스치는 사람들이 있고 재미있는 모습을 마주할 때가 있는데 너무 길어지니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뭐니 뭐니 해도 아직은 기름 맛이 좋다. 삼겹살의 기름 맛이 좋고, 몸에 안 좋으니 해도 소고기 기름 맛이 좋다. 삼겹살을 먹는 나라는 공교롭게도 전 세계에서 딱 두 나라라고 한다. 한국과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작은 섬나라, 피지다. 그렇게 두 나라뿐이다. 그러니까 돼지고기에 기름이 붙어 있는 맛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 섬나라 사람들은 우리보다 기름을 더 많이 먹는데(요컨대 삼겹살에 붙은 기름을 물에 끓여서 같이 먹기도 하고) 기름의 고소한 맛에 국민 모두가 취해 있다. 그리하여 대체로 뚱뚱하며 성인병에 걸려 있어서 섬을 나와서 병원에 다녀야 하는데 문제는 기름 맛에 취해서 인지 생활에 필요한 생산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 어때? 다음에 하지 뭐. 같은 생각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삼겹살이 한국에서 많이 먹게 된 계기는 어쩌면 일본 때문이다. 일본은 돼지 사육을 거의 하지 않았다. 돼지 사육장 하나가 생기면 반경 몇 킬로미터는 대체로 엉망이 된다고 한다. 오물과 함께 땅이 더러워진다. 그리하여 섬나라 일본은 섬이 더러워진다는 이유로(제주도는 괜찮을까) 돼지를 수입해서 먹었다. 그들은 보통 앞다리살 같은 좋은 부위를 수입해서 돈가스를 해서 먹었는데 일본이 돼지고기를 수입하는 나라가 한국과 대만이었다. 그런데 70 몇 년도 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만에 돼지 파동이 일어난다. 그러면서 일본 사람이 먹는 70%에 달하는 돼지고기를 한국에서 가져갔다.


엄청난 양이 일본으로 가고 남은 고기가 삼겹살이었다. 이 삼겹살을 처분해야 하는데 방법을 모색하던 당시 정부는, 그때 한국인들이 광산으로 흘러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6일 동안 실컷 일하느라 평일에는 제대로 먹지 못하는 고기 소비를 주말에 하게 한다.  탄광일을 하느라 몸속에 낀 시커먼 먼지가 삼겹살을 먹으면 그것이 씻겨 내려간다는 음모론 같은 것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삼겹살은 대대적으로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음식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탄광의 먼지는 코를 통해 폐로 들어가고 삼겹살은 입을 통해 위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통로가 완전히 다름에도 사람들은 삼겹살이 몸을 깨끗하게 해 줄거라 믿으며 토요일 저녁이면 많은 아버지들은 불판에 삼겹살을 구웠다.


어쩌면 그때부터 한국의 욜로 문화는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바라는 욜로는 산으로 들로 캠핑을 가서 그곳을 즐기는 것이지만, 실상은 그곳에서 고기나 소시지 같은 먹거리를 거하게 차려서 먹는 것으로 욜로를 대신한다. 주 6일제였던 예전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을 하고 일요일에는 산이나 강으로 가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일주일의 시름을 잊었다. 그것이 한국식 욜로의 시초였을지도 모른다.


음모론은 다금바리와 비슷하다. 바다의 보석 다금바리. 다금바리는 하루에 많이 잡히면 3, 4마리 정도이며 오직 제주도의 바다에서만 잡힌다. 제주도에 가면 무엇이 가장 먹고 싶은지 물어보면 십중팔구 어른들의 대답은 다금바리다. 무리를 해서 몇 십만 원이나 하는 다금바리를 전투적으로 찾으러 다니기도 한다. 둘 중에 하나가 죽어도 모를 회 맛이라는 묘한 기류가 어른들에게는 확실하게 박혀있다. 이렇게 어르신들이 찾는 다금바리는 정말 환상의 맛일까. 우리가 먹는 광어나 우럭, 좀 많이 비싼 돔에 비해 월등히 맛이 좋은 걸까.


사실 다금바리를 먹어본 제주도 사람들의 인터뷰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가히 환상적인 맛이군, 이건 정말 주체할 수 없는 맛이야, 하며 엄지를 척 치켜들 만큼 맛있는지에 대해서 현지인들은 의문을 가진다. 보통 회보다 졸깃하다 정도라고 한다. 이 졸깃하다는 말은 맛이라기보다는 물리적인 표현으로 더 맞다. 다금바리는 아주 드문 물고기다. 하지만 제주도 다금바리 파는 곳에 가면 모두 다금바리가 있다고 한다. 모든 다금바리가 횟집에서 팔아치울 수 있는 횟감이 아님에도 다금바리를 육지 어르신들은 갈 때마다 먹고 온다.


어째서 그럴까. 그건 다금바리에 대해서 뇌는 기억을 조작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다금바리 집에서는 비슷한 횟감을 올리고 다금바리라 하지만 육지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르르 몰려 마케팅의 세계에 들어가 버리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어른들이 다단계에 잘 넘어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입소문은 끊임없이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마치 유전자처럼 돌고 돌며 대물림된다. 다금바리는 혀 감각의 문제임에도 뇌가 그 감각을 조작해버린다. 다금바리는 사람들의 환상이 만들어낸 맛일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자연산 회가 양식 회보다 비싼 이유가 싱싱하다는 이유 때문인데 자연산 회는 잡아서 바로 먹어야 맛있다. 자연을 보며 그 자리에 앉아서 활어회로 먹으면 정말 맛있다. 그런데 그 자연산 회 자리에 양식 회를 넣어놔도 똑같이 맛있다. 양식 회를 자연 속에서 먹어도 기가 막히게 맛이 좋다. 집에서 먹는 것보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면 더 맛이 좋은 이유도 식당을 감도는 분위기, 그 속에 흐르는 음악, 조명, 음식의 냄새, 테이블마다 떠들썩한 행복한 대화가 음식의 맛을 더 끌어올려준다. 그리하여 같은 음식이라도 포장을 해서 집으로 들고 오면 음식점에서 먹는 것만큼 맛이 나지 않는다.


횟집에서 파는 자연산 회보다 양식 회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자연산 회는 잡아서 횟집으로 오는 동안 수조에 갇혀 있기에 물고기가 스트레스를 받는다. 보통 갇힌 공간에서 3시간  정도가 지나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신이 똥을 싸고 그 똥을 다시 먹기를 반복한다. 죽지 말라고 수조에 약품처리를 한다. 그렇게 도시 속의 횟집으로 들어간다. 다시 그곳의 수족관으로 들어간다. 산소공급 때문에 원래는 수족관에 거품이 부글부글 일어야 하지만 미관상 보기 좋지 않아서 소포제(유해한 기포를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약품이다. 소포제로는 일반적으로 휘발성이 적고 확산력이 큰 기름상의 물질, 또는 수용성의 계면활성제가 이용된다)라는 약품을 또 넣는다. 그러면 거품이 일지 않는다. 자연산 회는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약품을 계속 먹게 된다. 그리고 손님에게 양식 회보다 비싸게 팔린다. 가끔 자연산 회를 먹고 바이러스나 세균에 감염됐다는 뉴스가 나온다. 나는 주위에 자연산 회에 목숨 걸지 말고 횟집 가서 양식 회를 사 먹으라고 한다. 가격 저렴하지 양식하면서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기 위해 적당한 항생제로 관리를 하는 양식 회가 훨씬 안전하고 맛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요즘 양식장은 크고 넓어서 광어의 운동량이 많아서 씹는 맛도 좋다.


다시 말하지만 자연산 회는 잡아서 그날 소비를 해야 그 맛이나 위생에 대해서 걱정이 덜 하다. 명절 같은 연휴에 바닷가 횟집에는 가족단위로 삼삼오오 몰려든다. 가족이 오랜만에 모였으니 아버지들은 모처럼 자연산으로 먹자고 한다. 비싸지만 그날 하루는 가족들을 위해 크게 쏠 수 있다. 하지만 명절 기간에는 어선이 출항하지 않는다. 아무리 못해서 횟집 수조 속 자연산 회는 며칠 동안은 그 속에서 스트레스를 실컷 받았다. 정답이 딱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사실 그동안 음모론에 적응이 완전하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안티에이징에 탁월한 화장품, 이 샴푸로 감으면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는다는 광고, 먹기만 하면 낫는다는 약, 근래에는 줄 서서 먹는 식당의 음식은 굉장한 맛을 낸다는 음모론을 그간 우리는 흡수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뉴스에서 보는 기사들이 전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멍이 뚫리거나, 그 구멍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 경우를 보면서 지내왔다. 어떤 모형으로도 뚫린 구멍과 맞지 않을 때 ‘음모론’을 그 구멍에 씌우면 딱 들어맞는 경우도 있다. 음모론이 도래하는 것은 의문이 들고 진실을 알고 싶은데 그 누구도 제대로 답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에서는 늘 모종의 음모론을 조장하는 계획이나 프로젝트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미드 ‘세이렌’에서처럼 국민을 바보로 알고 국민을 모르게 무엇인가를 꼭 하려고 한다.


이 사태는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같은 말을 국가는 늘 한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다. 콕 집어 어디의 누가 잘못한 것입니다,라든가,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같은 말은 국가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꼴베기 싫다고 산으로 기어 들어가 평생 글이나 쓰면서 보내는 일본의 마루야마 겐지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를 읽어보면 한 챕터에서 ‘국가는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조직이나 단체의 이익을 우선으로 따지지, 개개인을 위하는 국가는 사실 지구 상에 없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건강이 망가져 병원에 늘 다녀야 하지만 자기 좋을 대로 생활하고 기름 맛에 취해 이 한 세상 허허실실 보내는 섬나라 피지 사람들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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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7-28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책으로 내셔도 될 듯 합니다.
약효가 유일하게 입증된 약은 ‘플라시보’ 약이란 글이 생각나는 글입니다. ^^

교관 2020-07-29 11:45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긴 글인데 읽어주셔서
 


대만 영화 ‘몬 몬 몬 몬스터’는 공포영화다. 몬스터가 나오고 피 칠갑을 하고 무서운 영화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몬스터보다 사람들이, 학교에서 아이를 괴롭히는 일진 애들이 더 무섭다는 걸 알게 된다

주인공 린슈웨이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 아주 괴롭힘이 하루하루가 괴롭다. 미칠 것 같고 지긋지긋하다. 일진의 리더인 런하오는 일진들을 데리고 갖은 악행은 다 저지른다

독거노인도 스스럼없이 괴롭힌다. 할머니들의 가슴을 만지고 할아버지들을 때리고 발로 차고 마구 대한다. 일진 애들은 그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런하오는 잡아온 몬스터의 피를 자기를 혼낸 선생님 텀블러에 탄다

그걸 마신 선생님은 운동장에서 그대로 설사를 엄청나게 한 후 햇빛에 홀라당 타버리고 만다. 잡힌 몬스터의 언니 몬스터가 동생을 구하기 위해 와서 학생들이 탄 스쿨버스에 들어가 피떡칠로 전부 죽이고 만다. 하지만 런하오의 괴략에 넘어가 동생 몬스터와 함께 타 죽고 만다

그 많은 친구들이 죽었지만 일상은 별반 다르지 않게 흘러가고 린슈웨이의 끝없이 이어지는 왕따와 괴롭힘이 이어지는데 그 누구도 도움의 손을 내밀지 않는다. 학교에서 가장 못생기고 뚱뚱한 친구만이 린슈웨이에게 손을 내민다

실제로 한 반에 왕따와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있는데 반 전체가 모른 척하고 있다면 쓰레기 같은 인간은 괴롭히는 아이만이 아닐 것이다.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방관하고 모른척하는 아이들 역시 범죄자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하는 말에 파도 휩쓸리듯 쓸려 다니는 사람들, 누군가, 유명인이 잘못을 하면 손가락으로 그 사람의 직업이나 하는 일을 없애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들. 그런 인간들 모두가 범죄자다

영화 마지막에 린슈웨이는 모든 아이들의 도시락에 몬스터의 피를 탄다. 그리고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던 뚱뚱하고 못생긴 여학생의 도시락을 바닥에 버린다. 너만이라고 이 세상에서 밝음을 찾아라. 그리고 린슈웨이를 비롯한 모든 아이들이 불에 타서 죽어버리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괴롭힘으로 22살의 창창한 트라이애슬론 선수가 죽었다. 조직에서는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라는 말과 저는 무관합니다, 라는 말이 동시에 나온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라는 말처럼 책임이 없는 말은 없다. 그 말은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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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여름이 되면 하루키의 에세이가 떠오르고,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으면 연쇄적으로 대학교 1학년 여름이 생각난다. 기분 좋은 나날들이었다. 건축과였던 나는 의상과 아이들과 오고 가며 서로 부대끼고 못볼꼴도 서로 다 보며 대학생활을 했다. 그런 사소한 기억을 연소시키며 현재를 살아갈지도 모른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이런 사소한 것이 인간의 삶을 가까스로 유지시켜 준다고 하루키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름방학에는 싸구려 필름 카메라를 하나 들고 가방에 팬티 두 장과 메탈리카 반팔 티셔츠와 하루키 에세이 한 권을 넣고 동해를 타고 하루는 포항의 청하에서, 하루는 영덕에서, 하루는 울진에서, 하루는 강릉에서, 그렇게 며칠씩 걸려 태백으로 올라가서 사진을 찍다가 서울로 가서 백남준 아트전을 보고 새까맣게 되어서 내려왔다.

그때는 하루키에 대해서 지금보다 더 빠져 있었고 백남준의 아트를 보는 것이 나의 어떤 정신적 고갈을 막아주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집 떠나 자취를 하고 있었기에 어디 멀리 가도 집에서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버스를 타고 여기서 저기까지 가서 동네를 어슬렁 거리며 사진을 담고 지치면 그늘막에 앉아서 빵을 뜯어먹으며 맥주를 홀짝이고 하루키 에세이를 읽었다. 대역죄인 같은 거지꼴이었지만 별 걱정이 없던 순간의 연속이었다.

삼일째인가 사일째인가 강릉 어딘가에서 지치고 무더운 가운데 그늘에서 잠시 졸았는데 일어나 보니 하루키의 에세이 빼고는 전부 도둑을 맞았다. 다행히 주머니에 넣어둔 돈은 가져가지 못했기에 그 돈으로 태백까지 올라갔다. 돈이 없어서 아침에 사놓은 바게트가 고작 저녁이 되었는데 책상처럼 딱딱해서 놀랐고 그것을 잘 씹어서 먹으니 맛있어서 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위기의식 같은 것이 없었다. 그저 될 대로 돼라 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같잖은 것 같지만 그때는 그런 일종의 객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직도 좀 남아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사진 전시회도 지금까지 몇 번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지나서 생각해보면 호오 하며, 고생 고생하면서 전시회를 했었지.라고 되네이게 된다.

태백 어딘가에서, 태양 볕에 타서 새카맣고 고픈 배를 움켜잡고 마를 대로 말라서 어딘가에 앉아서 하루키를 읽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벽돌 옮겨 볼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심해에 사는 거대 해양생물 같은 풍채를 자랑하는 아저씨였다. 소규모 벽돌공장을 하는데 사람 한 명이 없어져서 나의 몰골을 보더니 척 알아봤다며 일을 해보라는 것이다.

그 공장에서 열심히 벽돌을 날랐다. 잠자리도 제공되었다. 노숙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몰골이었는데 빨래도 할 수 있었다. 이틀 일하고 저녁에 공장 사람들과 고기를 구워서 먹는데 먹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처지 때문이 아니라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났다.

그때는 지치지 않고 어딘가에서 하루키를 읽었다. 그때 하루키에게서 받은 느낌은, 그의 책을 읽기 위한 좋은 장소보다 어디서든 앉아서 읽으면 그 자리가 좋은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책을 가장 집중해서 많이 읽었던 때가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가고 그 대학병원 복도의 벤치에서였다.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큭큭 하며 웃기도 했다. 하루키도 책을 읽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1968년 4월 그 휑한 방에 있던 딱딱한 매트리스 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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