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스트들에게 기쁜 소식(라고 하지만 2019년 10월에 나온 소식)을 하나 말하자면 하루키는 무라카미 라디오를 통해 90세까지는 열렬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까 와세다 대학에 유산을 기증한다고 해서 하루키가 이제 다음 세대 작가에게 물려주는구나,라고 하루키스트들은 기운 빠질 필요가 없다. 앞으로의 일을 미리 알 수는 없으나 하루키의 지난 생활을 돌아보면 앞으로 20년을 봤을 때 나이와 환경과 사회적인 반발 등을 감안하더라도 걱정할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장편도 두 편 정도는, 단편은 꽤 많은 편이, 에세이도 여러 편이 나올 것이라는 말이다.


하루키는 자신의 글이 영화가 된 것에 대해서 크게 언급하지 않는다. 그건 최근 스티븐 킹의 샤이닝 후속편인 닥터 슬립이 나왔는데 예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샤이닝에 비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쇼생크 탈출을 적었을 때 판권을 단돈 500만 원에 감독에게 팔아버리고 감독은 소설을 다시 시나리오로 재배열하고 구성해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소설과 영화는 다르기 때문에 원작자라 해도 영화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꽤나 신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하루키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고무적인 일이다. 하루키는 자신이 역량을 다 하는 한 가장 공포에 가까운 이야기를 쓰려고 한 작품이 ‘헛간을 태우다’였다. 영화 버닝에 대한 리뷰를 나도 세 번에 걸쳐서 다른 시각에서 적어 올린 적이 있다.


인간은 이미 정해져 있는 유전자의 무서움을 하루키는 참 잘 적었고 그걸 영화적인 문채로 이창동 감독이 정말 잘 풀어냈다. 특히 종수의 촬영 분은 자연광만으로 촬영을 해서 스산한 분위기를 영화 내내 끌고 간다. 대단하다 정말. 영화 한 편은 진짜 기적 같은 것이다.


하루키는 어릴 때(라고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 시절) 남미 문화에 아주 매료되었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특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글을 아주 좋아했다고 했다. 일본인들도 마르케스의 글을 참 좋아한다고 했다.


내 개인적인 일화? 가 있는데 2014년 2월인가 3월 ‘작가란 무엇인가’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문학 문외한이지만 1편 격인 그 책에는 다행히 읽었던 작가들만 있었다. 하얀성의 오르한 파묵, 만화가? 이자 철학가이자 수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를 비롯해 레이먼드 카버, 그리고 하루키가 있었다. 그 책에는 아직 마르케스가 살아 있어서 1927.3.6. ~ , 이렇게 사후가 비어 있었는데 읽은 도중에 마르케스가 죽어 버려서 볼펜으로 이렇게 기입을 한 것이 기억난다.



열심히 읽었는데, 특히 하루키를 중점적으로 읽었는데 기억나는 건 라디오헤드가 KID A 앨범에서 자신을 언급해서 기분 좋다는 게 기억난다. 그건 아마도 하루키가 ‘해변의 카프카’에서 다무라 녀석이 오시마 상의 안내로 숲에서 라디오 헤드의 키드 에이 앨범을 듣는다. 중학생이 듣기에 꽤나 집중해야 하는 앨범인데 다무라 녀석은 그걸 줄곧 듣는다. 아마도 톰 요크가 해변의 카프카를 읽었는 것 같다.



또 키가 2미터에 가까운 레이먼드 카버가 좁은 자동차 구겨지듯 앉아서 열심히 글을 적었다는 것이 기억난다. 18살에 결혼해서 먹여 살려야 하는 가정과 장모에게 구박을 받아가면서도 글이 쓰고 싶어 집구석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자동차 안에서 구겨져서 글을 열심히 적었다. 자신의 글이 팔려서 그 돈으로 BMW를 구입해서 엄청 기뻤다는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파인딩 하루키에서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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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이 나오기 전에 아시아 쪽의 좀비영화 중에서는 단연 아이엠히어로가 있었다. 좀비의 능력?을 놓고 보자면 부산행의 좀비보다 더 낫다는 평도 있다. 굉장한 하드코어다

주인공인 히데오는 만화를 그리며 살아가는 찌질한 인생이다. 애인과 함께 생활비를 아끼려고 동거를 하고 있지만 생활의 모든 면에서 찌질함의 연속이다. 그러던 중 열도를 뒤덮은 ‘좀‘이라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해 카타스트로프가 오게 되고 환란 속에서 히데오는 반인반좀비인 히로미와 함께 좀비가 없는 곳으로 간다

감염자들을 피해서 들어간 한 쇼핑센터에서는 아직 감염되지 않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었고 거기에서도 서열을 정하고 우당탕당하게 되는데 히데오는 히로미와 함께 온 세상이 좀비로 변한 일본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까

이 영화의 재미는 찌질한 인생의 한 남자가 사태를 계기로 해서 제목처럼 히어로가 되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멋지게 히어로가 되는 것은 아니고 찌질하게 차근차근, 그렇게 반쯤 좀비가 된 예쁜 히로미를 데리고 다니며 그녀의 히어로가 된다

살던 애인이 좀비로 변해서 덤빈다던가 같이 일하는 만화가들이 좀비로 변하면서 세상의 좀비들이 인간을 물어뜯는 장면은 다른 좀비영화처럼 강렬하다

이 영화의 가장 특이하고 재미있는 점은 영화의 90%이상이 한국에서 촬영을 했다는 점이다. 특히 아울렛의 장면은 한국의 경기도에 있는 한 곳에서 촬영을 했다. 그리고 좀비들 대부분이 한국엑스트라이다

좀비 중에 가장 무서웠고 강력했던 좀비, 공중으로 붕 떠올라 아울렛 옥상에 철퍼덕 떨어져서 꾸덕꾸덕 일어나서 그 속의 인간들을 물어뜯던 그 좀비도 한국 체대생이라고 한다. 아무튼 보는 재미가 있다

부산행에서처럼 환란 속에서도 한 집단에서 권력을 잡으려는 인간은 있고 정의를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 영화의 대사는 아니지만 좀비가 되면 그것대로 괜찮을지 모른다. 정작 종교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들은 편안하고 평안하다. 고민과 걱정이 없다. 그 사람을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만 애가 탈 뿐이다. 그냥 좀비에게 물려 좀비가 되면 오히려 세상을 편하게 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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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눈을 떴는데 뭔가 이상하다. 아주 이상한 곳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왼쪽 다리는 접혀있고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몸을 조금만 움직이려 하면 몸은 밑으로 떨어지려 한다

겨우 밑을 보니 밑은 캄캄하고 보이지도 않는 천 길 낭떠러지고 주위는 아주 위험한 장소라는 것을 감지한다. 가파르게 경사가 져 있고 발밑으로는 칠흙 같은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들리는 아주 소름 돋는 정체불명의 소리. 여자는 공포를 느낀다. 여자는 이 장소를 벗어나려고 생각했지만 기이하게 깎아지른 경사면의 미끈거리는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이 곳에서 자세를 바꾸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손을 조금만 움직여서 몸을 살짝 들기만 해도 밑으로 쓸려 내려갔다

여자는 자신의 오른손에 심한 고통을 느끼고 오른손을 보니 살점이 떨어져 나가있고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여자는 고통을 참아내며 피가 흐르는 점막의 오른손바닥으로 미끈거리며 까칠까칠한 벽을 짚고 천천히 일어나려고 한다

몸에 있는 힘을 주고 그 힘을 전부 오른손과 구겨진 왼쪽 다리에 나누어 몸을 아주 조금 위로 밀어본다. 마지막까지 힘을 쥐어 짜내 겨우 몸을 조금 위로 올린다. 그리고 오른손은 더 살점이 찢겨져 나가고 아픈 고통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여자는 조금 몸을 올리면 밑으로 다시 쓱 미끄러지고 그럴 때마다 손바닥은 고통스럽고, 그리고 여자가 계속 몸을 위로 밀어올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계속 추락하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기괴한 구조물의 벽에는 손바닥의 피 묻은 자국이 보인다

여자는 정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전부 쥐어짠다. 그래야 몸을 아주 조금, 아주 조금 위로 밀어 올릴 수 있다. 기괴하고 기묘한 구조물에 몸을 기댄 채 비를 맞으며 생각에 잠긴다. 여자는 어떻게 될까

이 영화는 11분짜리 단편 영화 ‘커브’다. 대사가 없다. 하지만 영화는 몰입도가 굉장하다. 아마도 한 번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본 사람이라면 이 절망을 넘어 멸망에 가까운 짧은 영상에 깊게 빠져들 것이다. 근래에 본 단편영화 중에서는 가장 강렬하고 충격적이었다. 결말은 보는 이들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열린 결말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친구를 보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친구는 감독에게 ‘내 발밑에 지구가 입을 벌리고 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어. 하루 종일 추락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야하는 긴장의 연속이었어.’라는 이야기를 듣고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밑으로 떨어지는 건 쉽다. 아주 칠흙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건 너무나 쉽지만 그곳을 나오기 위해 너무나 어렵게 발버둥을 쳐야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자신이 이입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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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일하러 나오는 길목에 거쳐야 할 신호등이 몇 개 있다. 반드시 꼭 서너 개의 신호등 앞에서는 멈춰야 한다. 마치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호등은 내 앞에서 붉은빛을 발한다. 어쩌다 하나의 신호등만 남겨두고 모두 지나치면, '오늘은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이제 저 앞의 신호등 하나만 지나치면 오늘은 모든 신호등을 전부 지나치는 기적이 일어나는 날이다.' 하지만 마지막 신호등은 계시처럼 내 앞에서, 딱 내 앞에서 붉은빛으로 물들고 만다.


매일 지나치는 신호등을 매일 지나치다 보면 취향에 맞는 신호등이 있고 그렇지 않은 신호등이 있다. 그걸 어떤 식으로 구분하지?라고 묻는다면 자신은 없다. 그건 그저 심층적 편견이 가득한 신호등이 있고 표층적으로 느껴지는 신호등이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취향에 맞는 신호등이 아직 푸른 불이면 어쩐지 조금 천천히 운전을 하여 붉은 불로 바뀌면 그 앞에 서서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곤 한다.


취향이 맞는 신호등도 마치 나를 알아보고는 그렇게 바삐 갈 필요 없잖아? 조금 쉬었다 가지 그래?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취향에 맞는 신호등은 여백이 많은 음악처럼 느껴진다. 내게 여백의 음악은 몇 종류가 있지만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것처럼 이맘때면 자연스럽게 레슬리 청의 노래를 집중적으로 듣는다.


레슬리 청의 노래는 여백이 많고 공간이 많아서 듣고 있으면 그 여백을 통해 내가 진정으로 음악을 듣고 있구나, 하는 기쁨을 준다. 레슬리 청의 음반은 대부분 카세트테이프로 가지고 있어서 겨울 끝에 봄이 다가오는 것처럼, 취향에 맞는 신호등 앞에 멈춰서 레슬리 청의 노래를 듣는 것은 일종의 일상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그런 균형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느껴진다. 아직 듣고 싶은 음악을 집중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음악만 듣는 것은 변해가는 이 시대에 뒤떨어는 행위지만 조금 뒤떨어졌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마 신호등이 없다면 쌩쌩 신나게 달려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신호등은 그 중간에서 균형을 잡아준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은 어느 시대나 어느 곳이나 늘 있다. 균형이란 몸과 마음에 몽땅 필요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그렇게 느껴진다. 근래에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내부에 작은 무엇인가가 깨져버렸다. 인생이라는 게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렇게 발버둥을 쳤는데 두부를 칼로 싹둑 자르듯 죽음은 친구의 생명을 끊어 버렸다. 잘 지켜오던 균형이 며칠간 깨져 버렸다.


삶을 살면서 무슨 큰일을 하고픈 게 아니다. 대단한 글을 쓰고 싶은 것도 아니고 엄청난 사진을 찍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런 글을 쓰고, 그저 그런 사진을 찍으며 하루를 보내면, 아니 견디면 그것으로 족하다. 단지 필요한 건 균형이다. 그저 그렇게 지낼 수 있게 하는 균형. 그것이 깨지면 그저 그렇게만은 지낼 수 없다.


요즘처럼 공포가 인간생활 전반에 침투해 있으면 균형 잡기가 더 어렵다. 시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일상의 균형을 신호등과 레슬리 청의 노래로 잡아갈 수 있다면 그것대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 전복으로 비빔밥을 해 먹는다. ‘가끔’이 일상의 틈을 벌리고 들어오면 그것 역시 그것대로 균형이다. 조화라고 불러도 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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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다고 다 가질 수는 없다. 그렇다고 가질 수 없다고 원하지 않는 것도 죄악이다. 한성과 유주는 속에 있는 말을 시원하게 배설을 한다. 사랑한다면 그래야 하니까. 그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 넘겨 짚고 재보고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성과 유주는 보는 이들에게 말한다

나의 유튜브만 그런 것인지 여름이 되니 알고리즘이 알아서 커피프린스를 검색해준다. 자꾸 보라고 한다.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은 이런 유치한 걸,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랑은 유치한 거다. 아이보다 어른이 유치하고, 못 배운 사람보다 배운 놈들이 더 유치하다

유치한 어른이 하는 사랑은 당연하지만 유치하다. 불량이고 나쁘고 더괴롭고 죽을 것처럼 행복한데 미칠것처럼 불안해야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유치하니까. 그때 우리모두는 최한성과 한유주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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