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여름이 되면 하루키의 에세이가 떠오르고,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으면 연쇄적으로 대학교 1학년 여름이 생각난다. 기분 좋은 나날들이었다. 건축과였던 나는 의상과 아이들과 오고 가며 서로 부대끼고 못볼꼴도 서로 다 보며 대학생활을 했다. 그런 사소한 기억을 연소시키며 현재를 살아갈지도 모른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이런 사소한 것이 인간의 삶을 가까스로 유지시켜 준다고 하루키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름방학에는 싸구려 필름 카메라를 하나 들고 가방에 팬티 두 장과 메탈리카 반팔 티셔츠와 하루키 에세이 한 권을 넣고 동해를 타고 하루는 포항의 청하에서, 하루는 영덕에서, 하루는 울진에서, 하루는 강릉에서, 그렇게 며칠씩 걸려 태백으로 올라가서 사진을 찍다가 서울로 가서 백남준 아트전을 보고 새까맣게 되어서 내려왔다.

그때는 하루키에 대해서 지금보다 더 빠져 있었고 백남준의 아트를 보는 것이 나의 어떤 정신적 고갈을 막아주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집 떠나 자취를 하고 있었기에 어디 멀리 가도 집에서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버스를 타고 여기서 저기까지 가서 동네를 어슬렁 거리며 사진을 담고 지치면 그늘막에 앉아서 빵을 뜯어먹으며 맥주를 홀짝이고 하루키 에세이를 읽었다. 대역죄인 같은 거지꼴이었지만 별 걱정이 없던 순간의 연속이었다.

삼일째인가 사일째인가 강릉 어딘가에서 지치고 무더운 가운데 그늘에서 잠시 졸았는데 일어나 보니 하루키의 에세이 빼고는 전부 도둑을 맞았다. 다행히 주머니에 넣어둔 돈은 가져가지 못했기에 그 돈으로 태백까지 올라갔다. 돈이 없어서 아침에 사놓은 바게트가 고작 저녁이 되었는데 책상처럼 딱딱해서 놀랐고 그것을 잘 씹어서 먹으니 맛있어서 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위기의식 같은 것이 없었다. 그저 될 대로 돼라 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같잖은 것 같지만 그때는 그런 일종의 객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직도 좀 남아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사진 전시회도 지금까지 몇 번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지나서 생각해보면 호오 하며, 고생 고생하면서 전시회를 했었지.라고 되네이게 된다.

태백 어딘가에서, 태양 볕에 타서 새카맣고 고픈 배를 움켜잡고 마를 대로 말라서 어딘가에 앉아서 하루키를 읽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벽돌 옮겨 볼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심해에 사는 거대 해양생물 같은 풍채를 자랑하는 아저씨였다. 소규모 벽돌공장을 하는데 사람 한 명이 없어져서 나의 몰골을 보더니 척 알아봤다며 일을 해보라는 것이다.

그 공장에서 열심히 벽돌을 날랐다. 잠자리도 제공되었다. 노숙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몰골이었는데 빨래도 할 수 있었다. 이틀 일하고 저녁에 공장 사람들과 고기를 구워서 먹는데 먹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처지 때문이 아니라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났다.

그때는 지치지 않고 어딘가에서 하루키를 읽었다. 그때 하루키에게서 받은 느낌은, 그의 책을 읽기 위한 좋은 장소보다 어디서든 앉아서 읽으면 그 자리가 좋은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책을 가장 집중해서 많이 읽었던 때가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가고 그 대학병원 복도의 벤치에서였다.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큭큭 하며 웃기도 했다. 하루키도 책을 읽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1968년 4월 그 휑한 방에 있던 딱딱한 매트리스 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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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와 시기는 어떻게 다를까. 질투는 내가 가진 것에 대해서 나오는 욕심이고 시기는 내가 가지지 못하는 것에서 나오는 욕심이다. 내 여자가 다른 남자와 친하게 지내면 질투가 난다. 반면에, 나는 여자를 만날 처지도 못 되고 좋은 차도 가지지 못하는데 저 남자는 좋은 차에 여자도 만나고 늘 행복하다, 저 행복을 깨고 싶은 것이 시기다

그렇다면 시기와 질투 중에 무엇이 더 무서울까

이 영화는 그런 시기와 질투로 인해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이야기다. 젊은 제자와 바람이 난 멋진 여성인 의대교수 할리는 남편 몰래 주말마다 에버렛과 만나 불타는 밤을 보낸다. 할리는 남편인 러셀몰래 호텔로 가면서 에버렛과 메조킥한 밤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 흥분을 감출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남편인 러셀이 다 알고 있었다. 에버렛을 잡아서 아내인 할리를 절대 방에서 내보내지 말라고 한다. 내보낸다면 너의 아내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그리고 아내인 할리에게는 에버렛이 나쁜 놈이라며 이런저런 말을 하여 그 방에서 나와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방에서 나오려는 할리와 방에서 할리를 내보내지 않으려는 에버렛은 서로의 술에 수면제를 타서 서로에게 서로 몰래 먹이고 두 사람은 그대로 쓰러진다. 눈을 뜨니 할리는 어딘가에 묶여 있고 그 앞에 남편인 러셀이 묶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남편인 러셀이 죽으며 기묘하게 흘러간다.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까

이 영화는 저 예산 영화로 등장인물이 정말 몇 없다. 장소도 호텔 방에서 전부 촬영을 했다. 그래서 영화가 별로인가 하면 저예산이지만 스릴러영화의 법칙을 잘 따른다. 꽤 다음 장면이 궁금하며 흥미진진하게 흐른다

클레어 폴라니는 브래드 피트의 조블랙의 사랑을 봤다면 아 그 미소가 오만상큼했던 여자라고 단 번에 알 수 있다. 나이는 들었어도 여전한 미인이다. 클레어 폴라니는 조블랙의 사랑으로 단박에 스타덤에 오르며 2003년에 성룡과 함께 메달리온에서도 주연으로 나온다. 메달리온은 에스에프판타지판타지성룡액션무비였다

하지만 그후로 조연만 계속하다가 이 영화 An Affair to Die For 한국제목으로는 참으로 이상한 상간녀의 살인에서 주연을 한다. 클레어 폴라니는 드라마에서도 환상특급 같은 비급무비같은 드라마에도 왕왕 출연을 했다. 조연이라도 꾸준하게 나오는 게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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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구름 가득한 하루가 지속되더니 이내 회색 비를 쏟아냈다. 권태와 단조로움을 등에 짊어지고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어떤 이가 그런 풍경에 반항이라도 하듯 고집스럽게 담배연기를 뿜어 잿빛 공간에 틈새를 만들어내지만 이내 말랑말랑한 젤리처럼 틈새는 메꿔졌다. 오전 라디오에서 이소라, 이문세의 ‘슬픈 사랑의 노래’가 흘렀다.


슬픈 사랑의 노래

이영훈은 이렇게 시리고 아픈 노래를 만들었다. 이영훈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곡이고, 내 생애에 다시 작곡하기 힘든 곡이라고 말했다.


노래는 어째서 이렇게도 애달플까. 노래를 듣고 있으면 두 시간짜리 영화 필름이 테이크되듯 흘러간다.


새하얀 저 거리에서 쌓이던 첫눈 같은 사랑
너를 안고 숨을 쉬면 세상에 너밖에 없는데


가사가 전달하는 슬픔이 크게 다가와 심장을 쿵 찍고 가는 것 같다. 이 노래는 86년에 작곡하기 시작해서 6년 만에 멜로디를 완성했다. 그리고 96년에 가사를 완성했다. 10년에 걸쳐 노래 한곡이 완성되었다. 그 곡을 이문세가 부른다. 이문세의 목소리로, 이문세의 톤으로, 이문세의 감정으로 노래를 불러 완성에 이르는 곡이 되었다.


인간승리를 이문세도 해낸다. 이문세의 한계 극복은 내게는 큰 울림을 준다. 가끔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같은 타이틀로 티브이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곳을 도전하고 정복하는 모습들. 얼굴이 톰 요크처럼 일그러질 정도로 힘듦을 참아가며 이겨내는 모습을 그동안 왕왕 봐왔다. 그들의 인간승리, 인간의 한계를 넘는 모습은 감격적이지만 정말 그런 일들만이 인간의 한계를 넘는 것일까.


오래전에 글을 쓰기 위해 갑상선을 제거한 30대 초중반 남녀 네 명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인터뷰라고 하지만 나는 인터뷰어로서는 재능이 없기에 그저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어떠한 이유로 갑상선의 수술을 받았고 그 후의 생활을 듣는 것이 목적이었다. 있던 갑상선이 없어지면 하루에 8시간씩 잠을 충분히 자고 일어나서 활동을 해도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오후 5시 정도가 되면 몹시 피곤하다. 그 피곤이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될 정도라고 한다. 등에 쌀가마니 몇 개를 둘러 맨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거기에 눈이 몹시 탁해진다. 슬픈 일인 것이다.


무엇보다 주변성과 정체성에 고민을 하게 된다. 나는 주변에 스며들고 싶지만 설명할 수 없는 피곤이 덮치면, 그게 갑상선이 붙어 있을 때처럼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되고 ‘나는 왜 젊은 나이에 이럴까’ 같은 자기 비하를 하게 되며 결국 자기 멸시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무너진 정신은 모래성 같아서 다시 쌓아 올리기 참 힘들다. 대체로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비록 나는 갑상선을 제거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에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해준 덕분에 나는 그들의 힘듦에 아주 조금은 다가갈 수 있었다.


근래의 이문세를 보면서 이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초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초능력, 슈퍼맨이나 내는 그런 초능력. 이문세는 갑상선을 두 번이나 수술했다. 그 말은 노래를 부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노래 한 곡을 부르고 나면 체력이 바닥이 난다. 내가 조깅을 세 시간 한 것처럼, 보통의 사람들이 24시간 꼬박 걸어 다닌 것처럼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에너지가 완전히 소거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문세는 공연을 해서 한 시간 이상 노래 몇 곡을 예전처럼 부른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이 사람은 노래가 얼마나 하고 싶었으면, 그리고 그 노래를 자신을 좋아해 주는 팬들에게 얼마나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도저히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의 한계를 그대로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이문세의 팬이라면 아마도 이문세가 노래하는 그 앞에서 그만 오열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문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어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노래를 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로 초능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근래의 이문세를 보면 보고 있으면 경외심이 든다. 산을 타고 식단 조절을 하고 맑은 공기를 찾아다니고 무엇보다 절벽 밑으로 떨어졌던 정신을 끌어올린 것은 정말 인간의 한계를 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초능력을 지닌, 나와는 다른 어떤 능력의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문세가 노래를 부르면 세상이 행복해진다. 그건 노래를 부르는 이문세가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매일매일 행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일어난다. 꿀 좋아하는 노란  곰돌이가 한 말에 제대로 동감이다.


https://youtu.be/Lx61vBPj_i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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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데드 팬들은 다 모여라. 이블데드 이후 30년이 지난 다음 애쉬가 다시 지옥의 문을 열어 버리고 만다. 샘 레이미와 브루스 캠벨이 다시 뭉친 미드 ‘애쉬 대 이블데드’ 시리즈다

애쉬 대 이블데드는 80년대 감성을 잔뜩 느낄 수 있게 만들어졌다. 도대체 80년대 감성이 뭐지? 그게 도대체 뭐여? 가오갤에서도, 범블비에서도 80년대 감성이 물씬,라고 하는데 그게 뭐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적으로 80년대 감성은 그래픽이 후달리니까 배우들이 그렇게 보이게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후라이트 나이트라는 공포영화가 있었는데 주인공 여자 친구가 아가리(도저히 입이라고 불리기 어려웠다)를 벌리고 있는 포스터가 동네 여기저기 붙어있어서 밤중에 그 앞을 지나다니지도 못했다

배우들이 오버를 할 수밖에 없다. 그래픽 보다는 배우들이 분장을 하고 오버스럽게 연기를 했다.

이블데드 영화 시리즈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호러물인데 오버스럽고 코믹하다. 그 감성을 그대로 드라마로 옮겨왔다. 그렇다고 해서 고어물이 장난 같으냐 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악마들에 빙의된 빌런들을 자르고 날리고 터지고 피 쏟고 하는 장면은 엄청나다

술렁술렁할 것 같다고 해서 아이들과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사건의 원흉은 말 그대로 애쉬다. 나이가 든 애쉬는 잊고 지내던 지옥의 문을, 술 마시고 돈 주고 부른 여자와 함께 술에 취해 놀다가 그만 악마들을 소환한다

애쉬의 대사와 행동은 코믹하다. 80년대의 그것이다. 악마들은 진지하고 공포스럽다. 그것들이 대조가 되면서 조화를 잘 이룬다. 비급호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취향의 저격이다. 애쉬를 제외하고 주인공이 두 명 더 나온다. 30년 전 젊은 애쉬를 둘로 쪼개놓은 듯한 모습이다

샘 레이미가 이 악 물고 만들었는지 코믹하면서 무서운데 이렇게 재미있기까지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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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스트들에게 기쁜 소식(라고 하지만 2019년 10월에 나온 소식)을 하나 말하자면 하루키는 무라카미 라디오를 통해 90세까지는 열렬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까 와세다 대학에 유산을 기증한다고 해서 하루키가 이제 다음 세대 작가에게 물려주는구나,라고 하루키스트들은 기운 빠질 필요가 없다. 앞으로의 일을 미리 알 수는 없으나 하루키의 지난 생활을 돌아보면 앞으로 20년을 봤을 때 나이와 환경과 사회적인 반발 등을 감안하더라도 걱정할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장편도 두 편 정도는, 단편은 꽤 많은 편이, 에세이도 여러 편이 나올 것이라는 말이다.


하루키는 자신의 글이 영화가 된 것에 대해서 크게 언급하지 않는다. 그건 최근 스티븐 킹의 샤이닝 후속편인 닥터 슬립이 나왔는데 예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샤이닝에 비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쇼생크 탈출을 적었을 때 판권을 단돈 500만 원에 감독에게 팔아버리고 감독은 소설을 다시 시나리오로 재배열하고 구성해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소설과 영화는 다르기 때문에 원작자라 해도 영화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꽤나 신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하루키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고무적인 일이다. 하루키는 자신이 역량을 다 하는 한 가장 공포에 가까운 이야기를 쓰려고 한 작품이 ‘헛간을 태우다’였다. 영화 버닝에 대한 리뷰를 나도 세 번에 걸쳐서 다른 시각에서 적어 올린 적이 있다.


인간은 이미 정해져 있는 유전자의 무서움을 하루키는 참 잘 적었고 그걸 영화적인 문채로 이창동 감독이 정말 잘 풀어냈다. 특히 종수의 촬영 분은 자연광만으로 촬영을 해서 스산한 분위기를 영화 내내 끌고 간다. 대단하다 정말. 영화 한 편은 진짜 기적 같은 것이다.


하루키는 어릴 때(라고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 시절) 남미 문화에 아주 매료되었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특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글을 아주 좋아했다고 했다. 일본인들도 마르케스의 글을 참 좋아한다고 했다.


내 개인적인 일화? 가 있는데 2014년 2월인가 3월 ‘작가란 무엇인가’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문학 문외한이지만 1편 격인 그 책에는 다행히 읽었던 작가들만 있었다. 하얀성의 오르한 파묵, 만화가? 이자 철학가이자 수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를 비롯해 레이먼드 카버, 그리고 하루키가 있었다. 그 책에는 아직 마르케스가 살아 있어서 1927.3.6. ~ , 이렇게 사후가 비어 있었는데 읽은 도중에 마르케스가 죽어 버려서 볼펜으로 이렇게 기입을 한 것이 기억난다.



열심히 읽었는데, 특히 하루키를 중점적으로 읽었는데 기억나는 건 라디오헤드가 KID A 앨범에서 자신을 언급해서 기분 좋다는 게 기억난다. 그건 아마도 하루키가 ‘해변의 카프카’에서 다무라 녀석이 오시마 상의 안내로 숲에서 라디오 헤드의 키드 에이 앨범을 듣는다. 중학생이 듣기에 꽤나 집중해야 하는 앨범인데 다무라 녀석은 그걸 줄곧 듣는다. 아마도 톰 요크가 해변의 카프카를 읽었는 것 같다.



또 키가 2미터에 가까운 레이먼드 카버가 좁은 자동차 구겨지듯 앉아서 열심히 글을 적었다는 것이 기억난다. 18살에 결혼해서 먹여 살려야 하는 가정과 장모에게 구박을 받아가면서도 글이 쓰고 싶어 집구석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자동차 안에서 구겨져서 글을 열심히 적었다. 자신의 글이 팔려서 그 돈으로 BMW를 구입해서 엄청 기뻤다는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파인딩 하루키에서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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