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크래프트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달려들 영화다. 지우고 없지만 러브 크래프트 원작의 영화도 몇 편을 리뷰했었다. 이벤트 호라이즌도 근간에 다시 리메이크해서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벤트 호라이즌은 대체로 장면이 다 잘렸다. 너무 심하다는 이유로 해서 으악 소리 나는 장면은 다 잘려버렸다


러브 크래프트는 공포문학으로는 상위에 있다. 인간이 가지는 공포의 주체가 되는 크리처, 고스트, 이종의 모습들인 거의 대부분 러브 크래프트의 영향을 아니 받았다 할 수 없다


러브 크래프트가 지닌 어마어마한 공포의 세계관, 상상도 못할 암울하고 음울한 분위기와 기괴하고 괴랄한 표현과 독특한 묘사는 현재 영화에 막대하게 영향을 끼쳤다. 러브 크래프트는 흔히 말하는 ‘크툴루 신화’의 밑거름을 닦은 사람이다. 판타지 문학에서 빛으로는 반지의 제왕의 톨킨을 말한다면, 어둠에 관해서는 단연 러브 크래프트다


그는 인간이 지니는 순수한 공포, 저 밑바닥의 근원적인 공포는 미지에서 오는 공포라 확신하고 소설을 썼다. 그래서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에서 지정할 수 없고 특정할 수 없는, 사람의 생각으로 파악이 전혀 되지 않는 음산한 존재가 늘 소설의 주위에 숨어있다


러브 크래프트는 자신의 소설 중에서 단편 소설 ‘우주에서 온 색채’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그 소설이 작금의 시대에 영화 ‘컬러 아웃 오브 스페이스’로 만들어졌다. 시골에서 생활하던 캐서방네 가족은 하늘에서 떨어진, 지정할 수 없는 빛을 보고 점점 미치거나 돌아버려서 한 가족이 몰살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전의 크래프트 표 영화보다 발전한 그래픽으로 촉수와 그로테스트적인 자이고트 장면은 볼만하다. 대신 자이고트가 된 괴물체 빌런이 애로티시즘을 보여주는 장면은 이번 영화에서는 소거됐다. 더불어 축축한 피부와 촉수의 점액질도 줄어들어서 팬들은 아쉬울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러브 크래프트의 영화가 계속 나올테니 이정도로는 어림없고 이벤트 호라이즌의 대폭적인 리메이크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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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에세이는 하루키가 언급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2019년 6월 일본 문예춘추에 특집으로 실린 

하루키의 글이다. 이 문예지는 코로나가 덮치기 전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일본으로 달려가서 이 

책 한 권 달랑 사들고 왔다. 비록 읽을 수는 없지만 손에 가지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제목은 ‘고양이를 버리다- 부재: 아버지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며 아직 한국어로는 나

와 있지 않지만 인터넷에는 많은 번역본이 있다. 여러 번역본을 읽어 본 결과 개인적으로 심야 북카

페에서 번역해서 낭독하는 것이 가장 좋아서 입을 다물고 그걸 그대로 받아 적었다. 그간 하루키는 

2008년 아버지가 죽기 전부터, 또 죽어서도 아버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2009

년 예루살렘 문학상 시상식에서 아버지에 대해서 길게 언급을 했다)고 아버지 역시 살아생전 자신의 

아들 하루키의 소설을 거의 읽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루키는 어느 날 문득(이라고 해야 할지) 아

버지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하루키가 고양이를 좋아하게 된 환경부터, 

그리고 해변의 카프카에서 다무라 녀석과 아버지와의 관계, 토니 타키타니의 아버지가 오버랩되며 

태엽 감는 새에서 러시아 군인을 처형하는 장면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하나레이 베이에서 사치의 

모습도 나타난다. 그리고 하루키가 자신이 가장 무섭게 쓰려고 했다는 ‘헛간을 태우다’가 어째서 그

렇게 쓰였는지에 대해서도 간파가 된다. 일본 우파에 비난을 받을 걸 알면서도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난징사건에 대해서 쓴 계기를 떠올리게 되며, 그것을 생각하면 살아있는 현존 작가에 대한 무한 경의

를 표하게 된다. 앞으로 몇 편 볼 수 없는 장편소설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도 깊게 든다. 하루키를 

좋아한다면 읽어보고 머리를 끄덕거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어느 날 나에게 시나가와 원숭이가 다가와서 이봐 무라카미 내가 작가 우대 차원에서 네 이름이랑 

성 둘 중 하난 남겨둘 수 있는 선택권을 주겠어. 무라카미 그리고 하루키 둘 중 무얼 선택하겠나.라고 

한다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잠시 망설여 본다.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는다. 무라카미, 

나는 무라카미를 택하겠어. 하곤 그 녀석에게 하루키를 넘겨주겠지. 시나가와 원숭이 손에 들어간 하

루키란 이름은 내 소설 속에서처럼 흔적이 없이 사라지곤 잊힐 것이다. 무라카미라는 성은 흔하니까 

이름을 남겨놔야 되는 거 아닌가요?라고 되묻겠지만 글쎄, 내게 있어서 무라카미는 하루키보다 더 

내밀한 무엇이다. 무라카미라는 성에는 그간 내가 침묵해왔던 나의 가족사와 그에 대한 나만의 문장

부호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대게는 물음표였지만 언젠가부턴 길고 긴 말줄임표가 되어버린 나

의 무라카미. 이제 나는 작가 생활 40년간 점 3개로 일관해왔던 무라카미 얘기를 시작하려 한다. 모

두가 잊었고 나조차 잊을 뻔한 나의 아버지 무라카미 이야기를.




 초등학교 시절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 오후 아버지와 나는 집에서 키우던 암고양이를 버리려 해

안가에 갔다. 당시 우리 집엔 출신 불명의 고양이 몇 마리가 자유롭게 오갔는데 그중 한 녀석 배가 불

러오기 시작한 건지 어쩐 건지 지금은 생각조차 나지 않는 모호한 이유로 그 암고양이는 퇴출 대상이 

되었다. 반려동물에 대한 동질의식이 지금과 같지 않던 때라 당시 그런 식의 상식선에서 용인될 법한 

흔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몰고 나는 뒤에 올라타 고양이가 든 상자를 안았다. 슈크가와를 

따라 고로엔의 해변까지 가서 고양이가 들어있는 상자를 방풍림 안에 두고는 ‘사요나라‘ 이 한 마디

만 남긴 채 뒤도 보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자전거에 삐걱되는 소리가 우리 부자의 긴 

침묵을 채우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불쌍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는 기분으로 드르륵 현관문을 여는데 아 세상

에 아까 버리고 온 고양이가 야옹, 애교를 부리며 우릴 맞아주는 게 아닌가. 어떻게 우릴 앞질러서 집

으로 돌아왔는지 그때도 지금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고양이보다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건 그 순간 아버지의 표정이었다. 얼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이 이내 흥미롭다는 얼굴로 변

했고 마침내는 안도감마저 돌고 있다는 것을 나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그 고양이를 

계속 기르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집에 돌아왔으니 뭐 기르는 수밖에. 단념하는 심정으로.




 나의 할아버지, 무라카미 벤시키는 교토에 있는 제법 큰 절에 지주였다. 그 시절에는 아이가 많은 

경우 입을 줄이기 위해 장남 이외의 아이들을 양자로 보내거나 어느 절에 견습생으로 맡기는 일이 흔

했다. 그런 무언의 관습에 따라 둘 째였던 나의 아버지는 나라 현 어느 절에 맡겨졌다. 언젠가 여름 

아버지와 내가 해변가로 고양이를 데려갔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는 얼

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의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물론 우리 집 고양이처럼 할아버지보다 앞질러 도

착해 있었던 건 아니다. 추위 때문에 건강을 해쳤다는 것이 귀가 조치의 표면적 이유였지만 새로운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게 컸던 듯하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평범한 일상생활을 했다

곤 하지만 아니 분명 아니다. 자신의 손을 놓아버렸던 부모에 대한 기억은 유년시절 아버지에 대한 

상처로 어느 정도 깊게 자리 잡았던 걸로 보인다. 출가에 실패한 무라카미 가의 일원은 다양한 선택

지를 가질 수 없었다. 절 집 아들이 진학한다면 그건 당연히 불교 관련의 학교 일터, 아버지는 교토 

산중의 어느 학교에서 승려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어두운 새벽 참선을 마치고 마당을 쓸며 

공양을 바친 후 경종 공부를 했으리라. 끝도 없는 불교 경전 속에서 생과 사 희로애락과 카르마를 아

버지는 무척 모범적인 태도로 탐구했을 것이다. 당시 그가 운명에 대한 공부까지 마쳤는진 알 수 없

지만 1938년 시월의 사건은 불교 경전보다 더 혹독하게 운명론을 가르쳐 주었다. 그해 스무 살이 된 

아버지는 예기치 못한 사무적 실수로 중일전쟁에 징병되었다.




 처참한 난징 대학살 이후 10개월이 지난 상황이었음에도 엄격한 신병 교육이 있었고 38식 보병 총

이 쥐어졌으며 수송선에 실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중국 전선으로 투입됐다. 아버지가 속한 부대

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중국군과 게릴라를 상대로 쉴 새 없는 전투를 반복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교

토 산속의 절과는 모든 것이 정 반대인 세계. 거긴 틀림없이 커다란 정신적 혼란과 동요가 있었을 것

이고 영혼에는 격렬한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혹시 아버지가 이 부대의 일원으로 난

징 공략전에 참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종군 기록을 구체

적으로 조사해보려는 용기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직접 전쟁 얘기를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묻지도 듣지도 못한 채 2008년 8월 아버지는 온몸 구석구석 전이된 암과 

심각한 당뇨병으로 교토 니시진 병원에서 90세 일기를 마감했다.




 딱 한 번 아버지의 소속 부대에서 중국인 포로 병사가 처형됐었다. 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떤 심

정으로 그렇게 갑작스러운 고백을 하게 됐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나는 여전히 초등학교 저

학년이었고 고양이 사건 때처럼 모든 상황의 전후관계는 불완전하게 남아있다. 고립된 그 기억 속의 

아버지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담담하게 처형 광경을 설명하고 있었다. 중국인 병사는 자

신이 어떻게 죽게 될지 알면서도 소란을 피우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은 채 침착하게 참수를 맞이했다

고 한다. 그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어,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목이 잘려 죽은 그 중국인 병

사에 대한 경의를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같은 부대의 동료 병사가 처

형을 집행하는 것을 옆에서 보기만 했던 건지 아니면 좀 더 깊이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

다. 내 기억이 혼탁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처음부터 애매하게 말 한 건지 이제는 확인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어느 쪽이더라도 그 사건이 용사이기 전에 승려였던 무라카미의 영혼에 커다란 응어리

로 남았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그 후로 아버지는 전장에서의 체험에 대해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스스로 한 일이든 목격한 장면이

든 그 어떤 정황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만은 피를 나눈 아들인 내게 

어떤 형태로든 남겨두지 않으면 안 됐다(고) 느꼈던 게 아닐까. 그것이 설령 서로의 마음에 상처로 남

게 될 지라도 말이다. 아버지의 회상 즉 사람의 목이 군도로 잘려나가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것도 없

이 어린 나의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다시 말해 하나의 유사체험으로 말이다. 

바꿔 말하면 아버지 마음속을 오랫동안 짓누르고 있던 트라우마를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물려받았

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연결된다는 게 그런 것이기도 하고 역사라는 것 또한 그런 류

이다. 그 본질은 이어받는다는 행위 내지는 이어져 내려오는 의식 속에 존재한다. 너무나 불쾌해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내용이더라도 인간은 스스로 그것의 일부로써 이어받지 않으면 안 된다. 만

약 그렇지 않으면 역사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 숭고한 의

미의 역사는 한 개인 또는 한 가족이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버거운 존재였다.




 아무런 준비 없이 전이된 아버지의 트라우마는 알게 모르게 아버지와 나 사이 긴 침묵을 불러왔고 

해가 갈수록 그 골은 깊어져 내가 도쿄로 대학 진학을 하고 역 재즈 카페를 운영하다 작가가 될 무렵

에는 무라카미라는 성 말고는 부자지간 그 어떤 연결고리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나와 아버지는 자

란 시대도 환경도 달랐고 사고방식과 세계관도 달랐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랬다. 인생에 어떤 시점에

서 그런 점을 새삼 관계의 재편성 같은 걸로 인식했다면 여기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런 새로운 접점을 시간과 공을 들여 추구하기보다 일단 내가 하고 싶은 일에 힘과 의식을 

집중하고 싶었다. 그때 나는 아직 젊었고 눈앞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많았으며 스스로 추구

해야 할 목표를 너무나도 명확히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얽힌 혈연과 사용보단 그 

편이 내겐 훨씬 중요한 안건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무렵 나에게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나

만의 작은 가정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전쟁 중 약혼자를 잃은, 훗날 나의 어머니가 된 한 여인을 만나 

평범한 남편으로서 그 작은 울타리를 지키려 했었던 그 시절 나의 아버지 무라카미처럼.




 집으로 돌아온 고양이 사건 이후 우리 집엔 더 많은 고양이가 터를 잡았다. 새끼를 밴 고양이나 태

어난 새끼 고양이에게도 너그러워졌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문득 그때의 일 하나가 더 생각난다. 그날

도 나는 할 일 없이 마루에 누워 새끼 고양이들을 보고 있었는데 그중 한 놈이 마당에 있던 큰 소나무

를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새끼 고양이는 나무 밑동을 기어 올라가다 말고 한 번씩 고개를 돌

려 나를 쳐다봤다. 마치 내 앞에서 자기의 용맹과 기민함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나는 그 

녀석의 도도한 눈빛이 꽤나 흥미로워 그래, 어디까지 올라가나 두고 보자 하는 심상으로 지켜보고 있

었다. 그러다 고양이는 줄기와 잎들이 무성해 눈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

곤 이내 소나무 위쪽에서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올라갈 수도 내려올 수도 없게 되어버

린 것이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아버지께 구조요청을 했지만 사실 아버지 당신께도 별다

른 수가 없었다.




 아카사카 시나몬(‘하루키의 언어'에도 나오죠)처럼 상공으로 올라가 버린 새끼 고양이는 구출되지 

못한 채 하룻밤을 꼬박 울어대더니 어느 순간 종적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밤사이 어찌어찌 아

래로 내려와 깊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집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끝내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하

고 소나무 가지 어딘가에서 탈진한 채 서서히 죽어갔을지도 모른다. 울음소리가 멈추고 한참이 지나

도록 나는 그 소나무를 올려볼 때마다 녀석의 모습을 떠올렸다. 작은 발톱을 세워 필사적으로 가지를 

움켜쥔 채 바짝 말라죽은 작고 하얀 새끼 고양이의 모습을. 처음 그 나무 기둥을 올라설 때 그런 기구

한 운명이 닥쳐오리라는 걸 고양이는 짐작이나 했을까. 우연히 몰고 온 운명의 소용돌이는 그렇게 새

끼 고양이에게도 나의 아버지에게도 도무지 피할 수 없는 가혹한 결말을 안겨주고 말았다.




 이런 나만의 개인사가 과연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안겨줄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나는 

손을 움직여 실제로 문장을 쓰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사물을 생각할 수 없는 유형의 인간인지라 이렇

게 기억을 더듬어 과거를 조망하고 그걸 눈에 보이는 언어로, 소리 낼 수 있는 문장으로 치환할 필요

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문장을 쓰면 쓸수록 그것을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나 자신이 점점 투명해

지는 것 같은 불가사의한 감각에 휩싸이게 된다. 허공에 손을 들어 올려 가만히 바라보면 손바닥 반

대편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은 기묘한 착각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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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6-23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일본어를 모르는 제가 하루키의 에세이를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교관 2020-06-24 11:48   좋아요 0 | URL
긴 글인데 읽으셨군요. 감사합니다.
 

유미코는 죽으러 간다는 할머니를 붙잡지 못한다. 그 사실이 내내 유미코 마음 한 편을 어둡게 한다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신혼 생활을 하던 유미코에게 찾아온, 느닷없는 남편 이쿠오의 자살은 생활의 결락을 가져온다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황경신의 말처럼 이쿠오의 부재가 존재를 증명하는 시간을 매일 가진다. 이 알 수 없는 결락을 치유해 주는 건 보잘것없는 일상이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을 챙기고, 다 같이 앉아서 수박을 먹으며 결락을 조금씩 버텨나간다

우리가 그토록 벗어나고픈 보잘것없는 일상은 일탈에서 받은 상처의 치유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은 그 결락을 화면으로 표현을 한다. 마치 그림 한 장 한 장이 이어지는 기분이 든다. 자연광으로만 촬영을 한 필름은 내내 어둡고 탁하기만 하다. 유미코의 마음과 같다. 하지만 유미코는 일상을 통해 결락을 버텨간다

영화에서 유미코의 아이들이 동굴을 빠져나가는 장면이 있다. 눈부시고 아름답다. 마치 유진 스미스의 ‘천국으로 가는 길’을 오마주 한 것 같다. 정말 아름다워서 몇 번이나 그 장면을 돌려봤었는데 며칠 전 다시 몇 번을 돌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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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괴수 용가리는 67년 작으로 괴수 재난 영화다. 67년도 필름인데 그 이후의 영화보다 세련됐고 무엇보다 70년대 흑백영화에 비해 이미 컬러영화다. 그 당시 기술력이 용가리를 촬영할 능력이 되지 않아서 일본의 고지라 팀이 도와줬다

주인공 중에는 아주 젊은 이순재가 나온다. 박사다. 이순재는 무려 신혼 첫 날밤에 국가의 부름을 받는다. 이미 그때부터 재난 영화가 아닌가 싶다. 우리에게는 야동 순재나 꽃할배로 알려졌지만 32살의 이순재를 보라

용가리가 마을이나 교각을 부수는 장면은 정말 레어다. 지금이야 보면 흥 할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의 공상 과학류의 세계영화를 봤을 때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렇게 잘 만든 용가리를 보면서 왜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나라의 이런 유의 영화에 비해 뒤졌을까 고민하게 된다

내가 고민한다고 뭔가가 풀리는 건 아니지만 아쉬운 건 아쉽다. 그건 아마도 그간 한국에서는 모든 영역에서 과학 분야는 별로야! 그만! 이런 분위기가 영화 속에도 스며 들어서였을까. 아무튼 근다고요

유튜브 절찬리 상영중이니까 보고 싶으면 보면 된다. 보면 알겠지만 지프를 타고 가다가 용가리에서 아가리 빔을 맞고 반으로 갈라져 처박히는 장면도 잘 만들었고, 군대를 동원하는 장면이나 외국인 배우들도 많이 나온다

영화계는 일본과 한국이 이때에도 손을 잡고 서로 왕래가 좋았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 물어뜯지 않는다. 이때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이 모든 것을 망가트리고 있다

고지라는 끊임없이 제작되었고 계속 나오고 있어서 그것이 제일 부럽다. 고지라가 우리나라에서만 고질라로 불리게 되었는데, 고지라가 할리우드로 넘어가면서 영어로 갓질라로 되었는데 번역가 이미도가 고지라, 갓질라, 이 두 단어를 합쳐버렸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는 고지라가 줄곧 고질라로 번역이 되어서 나오고 있다

이 용가리만큼 재미있는 영화가 북으로 잡혀간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불가사리’다. 이 영화에도 고지라 팀이 영화를 도왔다. 불가사리는 쇠를 먹는 한국산 전설의 괴수로 성장판이 열려 거대 괴수가 되어서 국민들과 함께 조정에 대항하여 싸운다. 불가사리가 아직 강아지만할 때 주인공들은 집에서 ‘귀염둥이야’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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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의 게임 이후 많은 미드와 영드를 봤지만 왕좌의 게임의 갈증을 해갈할 수 없었는데, 미드 ‘세이렌’이 그걸 해갈해주었다. 미드 세이렌은 디즈니 산하 프로덕션에서 만들었는데 기존의 디즈니 분위기에서 벗어났다. 요컨대 현대자동차 산하의 제네시스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지구인은 어쩌면 가장 많이 세이렌과 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타벅스의 마스코트가 세이렌이니까 컵을 쥘 때마다 세이렌과 마주한다. 나에게는 시애틀 1호점에서 구입한 텀블러가 있어서 세이렌의 초기모습이 프린트되어 있다

세이렌의 특징은 노래를 불러 인간을 꼬드긴다. 그런데 그 노래가 기존의 영화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다. 마치 돌고래가 음파를 쏘아내듯 공명으로 노래를 사람에게 전달해서 뇌의 어떤 부분을 건드린다. 그래서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은 무기력하고 공상에 젖어있고 잠이 들면 머메이드의 공명이 계속 맴돌며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 시름시름 앓게 된다. 기묘하지만 시즌1을 보는 동안 그 묘한 음악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세이렌은 물 밖으로 나오게 되면 탈피를 한다. 변태를 하고 껍질을 버리고 육지로 올라오게 되는데 처음보다 두 번, 세 번 물 밖으로 나올수록 육지에 적응이 더 잘 된다. 보기에는 40킬로그램 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실제는 80킬로그램이 나가고 심장박동이 굉장히 빠르다

힘이 엄청나고 민물이나 수돗물에 빠져도 머메이드로 변신을 하지 않는다. 바닷물이어야만 변신을 한다. 그리고 바닷물에 닿아서 세이렌으로 변신할 때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무엇보다 육지화 되어 있을 때는 인간처럼 생각을 하지만 머메이드가 되면 포식자의 본능만 가진다. 그래서 머메이드보다 상위 포식자, 즉 상어 같은 절대 포식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바다 속 생명체를 공격한다. 그러니까 날 때부터 그들은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여기까지 대충 세이렌의 특징을 알고, 어느 날 알래스카의 어선에 고기들이 잡혔는데 그 속에 어떤 공격성이 강한 큰 물고기 지느러미를 발견하게 되고 어부들은 그것을 잡으려 하다가 한 사람이 공격을 당하고 선장은 무선으로 환자가 있으니 구조선을 보내달라고 하는데 난데없이 네이비 씰 같은 해군이 와서 다친 어부와 가둬 놓은 머메이드를 데리고 가버린다

군대는 이미 머메이드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실험을 통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잡혀간 세이렌의 동생이 언니를 찾기 위해 육지로 올라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들이 해안가로 온 이유는 사람들이 그들의 먹이가 되는 물고기를 죄다 어획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세이렌은 기존의 미드에서 보여주는 답답함이 덜하다. 시즌1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미국 영화의 특징인,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마주하고, 우리가 어릴 때 그랬지, 너는 내게 모든 걸 털어 놓기로 했지, 같은 대화를 세이렌을 사이에 두고, 급박하게 흘러가야 하는 가운데 답답하게 보내지 않는다. 받아들이고 주인공들을 믿어주고 같이 해결하려는 모습들이 잘 나타난다. 무엇보다 바다 속 세이렌의 변신모습과 탈피하는 모습이나 공격성 등이 이전의 머메이드 영화보다 표현의 질감이 대단하다

인간 주인공들의 도움으로 인어 주인공 린은 언니를 찾아서 바다로 같이 간다. 여기까지가 시즌1, 3회에서 한 번의 매듭을 짓는다. 그리고 4회에서 한 달 후에 정부에서 모든 어선들을 동원해서 인간이 먹지 못하는 물고기까지 전부 어획하게 하고 돈을 주면서 식량 고갈이 된 세이렌은 다시 육지로 오면서 걷잡을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심각하지는 않지만 뽀뽀응응 장면이 많다. 왜 굳이?라고 할 만큼 주인공들은 열심히 사랑을 나눈다. 그런 모습을 인어 주인공 린이 유심히 보고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하는 행동을 여자 주인공이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한다. 헤어질 때 입맞춤을 하고 사랑해,라고 말을 한다던가

미드 세이렌은 시즌3까지 나왔지만 나는 시즌1까지만 봤다. 환상적인 잔혹 판타지를 좋아한다면 좋아할 영화, 미드 세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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