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나라의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다음 이야기로 상상으로 똘똘 뭉친 이야기다. 루이스 캐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피터 팬을 만들어낸 제임스 배리의 이야기인 ‘네버랜드를 찾아서’를 보면 이런 상상력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잘 나온다.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안 그럴 것 같았는데 감동이었다.


어쩐지 하루키도 그렇고 창작물인 작품보다는 그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에 관심이 더 간다. 위대한 개츠비보다 피츠 제럴드도, 헤밍웨이도, 백석이나 조지아 오키프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훨씬 재미가 있다.


거울나라의 앨리스는 시간, 시계에 관한 이야기다. 하루키의 에세이 ‘시계의 조촐한 죽음’을 읽어보면 단순한 시계 이야기에 빠져들게 써놓았다. 좋아하지만 얄미운 무라카미 하루키 씨.


자신의 삶 속에 들어온 시계.

요즘의 똑똑한 디지털시계가 아닌 태엽을 감아주어야(만) 하는 시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시계의 죽음.

덜 똑똑한 것보다 더 똑똑한 것이 낫겠지만 똑똑함이 생활의 전부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하루키는 그것을 시계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전달해준다.


태엽을 감아주면 하루 동안은 꼬박 영차영차 하며 시간을 알려주니까 다음 날 그 시간이 되면 태엽을 감아준다. 그건 아침에 일어나서 배변을 보고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린 시절 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외할머니와 무척이나 친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가난했던 집안의 사정 때문에 4, 5세 정도를 어머니와 떨어져 외가댁에서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외가댁이 있는 촌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맞고 들어와서 울고 있으면 외할머니는 캡틴 마블이 되어서 동네 아이들과 아이들의 부모까지 혼을 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어서 집으로 와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멀리 떨어져 있는 외할머니를 자주 볼 수 없었지만 외할머니는 내가 보고 싶으면 먼길을 달려 집으로 오곤 했다. 외할머니가 오면 외할머니 손목에 차던 손목시계에 관심을 가지곤 했다. 요즘 아이들처럼 똑똑하지 못해서 저학년 때에는 초침 시계를 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외할머니의 손목시계가 다른 전자시계보다 좋아 보였다.


외할머니는 매일 비슷한 시간이 되면 시계태엽을 감아 주었다.

시계의 밥을 주는 거란다.

사람이 밥을 먹는 건 이상하지 않은데 시계가 밥을 매일 먹는 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외할머니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나에게 차 주었다. 가볍지 않고 묵직한 무게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반짝이는 금색이 빛을 받아서 빛났다. 나는 시간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그걸 차고 학교로 갔다. 시계가 손목 밖으로 드러나기를 바라면서.


매일 밥을 줘야 하기에 편리하진 않지만 그 불편함이 시계와 좀 더 친밀하게 하는 관계를 형성시켜 주었다. 매일 밥을 챙겨 먹어야 하는 불편함이 또 하루를 버티게 하는 동력이 된다. 태엽을 감는 것은 귀찮지만 뿌듯한 행위라고 한 하루키의 말이 떠오른다. 드르륵드르륵 태엽을 감다 보면 느슨하게 풀려있던 것이 팽팽해지면서 딱 고정되는 그 의식 속에서 나와 시계를 인지한다.


그리고 시계는 또 하루를 성실히 움직인다.


요즘처럼 몇 년에 한 번 전지를 갈아주면 되는 시계는 분명 편리하지만 시간이 뚝 끊기면 그것대로 시계가 죽어버린 느낌이 든다. 요즘도 손목시계를 오른쪽에 차고 다니는 건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한 외할머니가 그렇게 차고 다녀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희미하게 생각해본다.



8년 전에 선물 받은 한국산 시계는 고장이 나지 않고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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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라는 이름이 좋아서 아이를(여자건 남자건) 낳으면 건우라고 지어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아이가 없다. 결혼도 하지 않아서 언젠가 소설 속에라도 건우라는 이름을 등장시키고 싶다.


건우라는 이름이 좋은 이유는 백건우 때문이고, 백건우의 음악을 듣게 된 건 순전히 친구 때문이었다. 그녀는 현재 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쾰른 음대에서 유학시절 걸핏하면 전화가 와서 힘들다고 징징거렸다.


그녀가 레슨을 마치고 접시를 닦고 이것저것 하고 전화를 하면 나는 대체로 쿨쿨 잠들어 있던 새벽이었다. 으, 하는 좀비 소리로 전화를 받으면 슈만이 어쩌고 독일 사람들이 어쩌고 오늘 식사를 대접받은 독일 아줌마는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


폴더폰을 귀에 걸쳐 놓고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오늘 연주하다 손톱이 빠졌어. 진지하게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녀였지만 이쪽에서는 몽롱한 새벽이니 그녀의 진지한 모든 이야기를 정색하며 진중하게 들을 수만은 없었다. 전화비 많이 나오지 않아?라고 하면 또 다른 이야기를 주렁주렁 늘어놓았다.


아마 그녀는 내가 잠결에 대충 흘려듣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족에게는 힘든 이야기를 못하는 성격상 누군가에게는 한국말로 전부 토하듯 뱉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 후에 그것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해본 적은 없다.


쾰른 음대는 학비가 없다. 대신에 졸업을 하려면 혹독하다. 마녀의 젖꼭지처럼 혹독한 12월을 표현한 셀린저의 문장보다 혹독하다. 혹독하고 혹독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생활비까지 책임져야 했던 그녀는 절박했고 필사적으로 건반을 두드렸다.


그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가 백건우였다. 덩달아 클래식에 대한 무식쟁이 나 역시 백건우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 백건우가 연주하는 걸 들어보면 나이가 많음에도 청년 같은 힘과 아이 같은 유약함과 느긋한 어른의 면모가 다 느껴지는 게 못내 신기했다. 그래서 연주를 보고 있으면 참 못 생겼네, 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정말 멋있구나, 하게 된다.


다행인지 아파트 바로 옆, 1분 거리에 예술 회관이 있어서 백건우가 매년 연주회를 가졌다. 게다가 가격도 엄청나지 않아서 야호 하며 왕왕 보러 다녔다. 그게 몇 년 전이었다. 어쩐 일인지 이후 매년(까지는 아니지만) 열리는 백건우의 연주회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얼핏 윤정희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게 오래된 일이었다.


김수용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서 여러 편 찾아봤다. 그중에서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영화적 작법으로 옮겨 놓은 ‘안개’ 속에 10대의 윤정희가 인숙으로 나온다. 문예영화를 고집하던 김수용의 ‘안개’를 보면 술 집에서 윤정희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소설 속 인숙이 그대로 튀어나왔을 정도로 해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본 윤정희의 영화가 이창동 감독의 ‘시’였다. 거기서 윤정희는 치매가 걸린 노인으로 나왔다. 그래서 그런지 백건우의 이 인터뷰가 애착이 간다.


인간의 삶은 필멸하게 되어있다. 살아봤자 몇 년이나 살지 모른다. 백건우의 말대로 언제까지나 자신을 몰아세우며 자신과 싸워가며 스트레스받을 필요가 없다.


내일을 위해서?라는 말보다 오늘을 버티는 것이다. 하루키도 근간의 인터뷰에서 죽음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사후에 자신의 원고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게 싫어서 와세다 대학에 기증을 한다고 했다. 자기 자신과 싸우지 말고 자신 자신을 사랑하면서 그냥 오늘을 열심히 버티자. 언젠가 건우라는 이름을 소설 속에 등장시키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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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여름이다. 나에게 있어 여름을 대표하는 단어는 집 앞의 ‘바닷가’와 ‘모기향’이다. 바다 자체보다는 바다를 끼고 있는 해변을 좋아한다. 해변의 느낌, 발에 닿는 백사장의 기분과 뜨거운 태양 밑에서'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며 칼스버그를 홀짝이는 편안함을 매년 가질 수 있는 바닷가가 좋다.


그리고 또 하나 ‘모기향’이 좋다. 정확하게는 모기향 냄새를 좋아한다. 일본 드라마 ‘나기의 휴식'에서 모기향을 피우는데 나기는 모기향 냄새를 좋아한다. 드라마의 그 장면이 참 마음에 든다. 나도 모기향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좋아한다. 모기향 냄새는 모두가 좋아할 거라는 나의 생각이 빗나간 건지, 어느 여름부터 모기향은 서서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어릴 때 모기 향내가 좋아서 빨리 여름이 왔으면 하던 때가 있었다. 모기향이 타들어가는 냄새는 나를 사로잡았다. 서서히 타들어가는 모습과 다 끝나버린 뒤의 모기향 모습은 원형을 유지한 채 재로 변해있는 모습까지 완벽에 가까웠다. 생과 사의 모습을 잠들기 전과 후에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모기향을 피우면 방에 모기장을 쳤다. 모기장을 치는 순간 마치 캠핑을 온 것처럼 흥분이 되었다. 티브이 주사선 속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미묘한 기분. 그 속에 앉아서 조안나 골드를 먹고 있으면 완성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바다는 5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50년 전이나 비슷하고, 바닷가 역시 크게 달라진 것 없이 매년 여름이면 백사장을 뜨겁게 해서 나를 즐겁게 해 준다. 하지만 모기향 냄새는 이제 맡을 수 없게 되었다. 전통시장의 생선코너에서 모기향을 피우는 정도다.


이제 어쩌면 모기향 냄새가 그때처럼 좋을지도 알 수 없다. 추억이라는 건 기억이라는 필터를 거치면 제멋대로기 때문이다. 여름에 모기향을 피우며 그 냄새를 듬뿍 맡으며 맥주를 마시는 그런 일탈적인 평온함을 어른이 되어서 얼마나 더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수단이 좋지 않음에도 지치지도 않고 헐렁헐렁 삶을 보내고 있다.


한 브런치 작가의 글을 봤다. 살아남기에 관한 글이었다. 시월드에서 살아남기, 흙수저로 살아남기, 까칠한 상사 밑에서 살아남기,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살아남기, 계약직으로 살아남기, 갑질에서 살아남기, 정년까지 살아남기, 오만가지 다이어트에서 살아남기, 쇼핑 유혹에서 살아남기, 대출에서 살아남기, 열등감에서 살아남기, 비난에서 살아남기 등등등이라는 제목으로 100권짜리 전집을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코로나 사태를 기점으로 해서 더욱 심해진 건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노동이 자기실현의 과정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건 생존의 수단이 되어 버렸다. 사는 게 전쟁이 되었다. 생존투쟁을 하고 있는 현재가 되었다.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게 목표가 되어 버렸다.


어쩐지 나처럼 돈도 제대로 벌어 들이지 못하면서 모기향 냄새나 쫓고, 여름이면 바닷가에서 책이나 읽으며 맥주나 홀짝이는 삶을 사는 사람은 살아남지 못하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 같은 인간은 이런 세계에서 일찌감치 퇴화되어서 사라져야 하는 것이 마땅한 현실이다. 나는 분명 생산성이 낮게 일을 한다. 무엇보다 일을 하는 시간이 짧다. 그 때문에 당연하지만 자본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삶의 만족도는 나쁘지 않다.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하는 시대에 맨발로 다니는 삶은 어딘가 모르게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이재명 지사의 다스뵈이다 출연 방송을 보니 -노동이 생존의 수단이 되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가 없다. 그래서 먹고살 수 있는 만큼의 돈을 벌어야 한다. 최하 한 달에 200백만 원은 벌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까 박터지는 것이다. 기업에 막 투자한다고 일자리가 생기나? 안 생긴다. 그러면 어떤 일자리가 생기나? 누가 나한테 한 달에 백만 원만 주면 매일 꽃구경이나 하고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일주일에 세 번만 길거리 공연을 하면서, 생산성은 낮지만 삶의 만족도가 높은 일자리가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안 된다. 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먹고살 수가 없다. 그래서 새로운 문화예술적 일자리,  '삶의 만족도가 높은, 생산성은 낮은 일자리가 생겨나게 되면' 굳이 노동시장에 가서 머리 깨지고 하면서 일자리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자리가 과연 가.까.운. 시.일.에 사람들에게 와라락 하며 다가올 것인가. 돈이 많다면 삶의 만족도가 그렇지 못한 이들에 비해서 높을 것인가. 삶의 만족도라는 건 어쩌면 개개인이 가지는 유전적인 요인처럼 날 때부터 요만큼 내지는 이만큼 가지고 태어난 성질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잭 케루악의 ‘론섬 트라베라’는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오두막에서 고립되어 외톨이로 3개월 동안 산불 감시원으로 지내는 이야기다. [사람은 그 인생에서 한 번쯤은 황야로 들어가 건강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지루하기까지 한 고독과 절망을 경험해야 한다. 자기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에 자기 자신의 진실, 숨겨져 있는 능력을 깨달아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도 스미레가 그런 생활을 동경한다. “매일 산꼭대기에 서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어느 산에서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거야. 하루 종일 해야 하는 일이 그것뿐이야.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 소설을 쓰는 거야. 밤이 되면 털투성이의 커다란 곰이 오두막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배회하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추구하고 있는 인생이야. 거기에 비하면 대학 문예과 따위는 오이꼭지 같아.”


나는 어쩌면 잭 케루악의 소설 속 산불 감시원처럼 죽 생활을 해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산성이 낮은 일을 하면서도 삶의 만족에 대해서 그렇게 불만 없이 지내왔을 것이다. 넌 현실에 있어서 다른 이들만큼 신경 쓸 일이 없어서 그래, 같은 말을 많이 들었다.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아직까지 대출이 없고 빚이 없다. 그럼에도 나의 이름으로 된 조그마한 스튜디오가 있고 거기서 오랫동안 일을 하고 있다. 물론 머물러 있는 시간은 몇 시간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요즘에는 그러지 않지만 불과 3, 4년 전만 해도 '오늘은 하루 종일 사진을 찍고 싶군'라는 생각이 들면 그대로 작은 카메라를 들고 티 지방으로 훌쩍 가버리고 말았다.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지 않아서라고 주위에서는 그럴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대체로 늘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부모는 가난했기에 나에게 무엇인가를 물려줄만한 자산이라는 것이 없었다. 가난은 어렸던 나를 부모에게서 떼어서 외가에서 2년 동안 지내게 했다.


요즘은 미니 픽션, 마이크로 픽션이나 플래시 스토리라는 용어를 가지고 있는 손바닥 소설이 새로운 베스트셀러의 영역이 돌입했다고 한다. 이 흐름은 간결성, 다양성, 파편성, 신속성, 가상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소설 쓰기 방식은 21세기의 흐름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가독성에 있다.


나는 분명하게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재미도 없고 원고지 5,000매 정도의 가독성이 떨어지는 긴 글을 적어서 매일 올리고 있는 형편이다. 여름이면 또 영국에서 오는 죠의 가족과 바닷가에서 훌러덩 벗고 맥주를 마시며 허허실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삶이 파괴되지 않는 건 아마도 나의 만족도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지금까지 지내왔다.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을 어느 정도 타협시킨 다음 해보는 것이다. 그러다 막히면 그때 가서 아, 안 되는군, 어떻게든 해보지 뭐. 같은 생각이다.


확실히 나는 다른 이들에 비해 예민하고, 많이 불안하고, 좀 더 조급함을 가지고 있지만 안 되면 할 수 없고, 가 나를 이대로 끌고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좀 못 벌면 적게 쓰면 되지, 같은 생각으로.


올여름에도 바닷가에 드러누워 모기향을 피우고 냄새를 맡으며 맥주를 홀짝일 수 있을까. 그것이 역행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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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털이는 누덕도사 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누덕도사 발톱따주고 등긁어주느라 늘 투덜투덜이다. 이 영감쟁이 도술은 안 가르쳐주고 맨날 일만 시키고 부려먹고, 그러다가 누덕도사와 티격태격 하다가 짜증이 나면 머리털을 세운다


그러면 어허 이놈, 하며 지팡이로 맞고 꾸중을 듣는다. 하루는 밥을 하다 태워 먹었다. 처음에는 안 태운 밥은 스승님 밥그릇에 담고 자신의 밥그릇에는 탄 밥을 담았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그래서 삼룡이 빙구 같은 머털이가 머리를 짜내 탄밥을 밑에 깔고 위에 흰밥을 덮은 건 누덕도사꺼, 흰밥을 깔고 위에 탄밥을 얹은 건 지꺼. 이렇게 해서 밥상위에 올렸다가 어떻게 되었을까


머털이는 매일 혼나지만 누덕도사와 티격태격하며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어느 날 잘생긴 해변의 아이, 꺽꿀이가 누덕도사를 찾아왔다가 쓸모없는 것만 시키고 도술은 가르쳐주지 않아서 하산을 한다. 그때 머털이는 지도 데려가 달라고 한다. 이런 곳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나도 데려가 달라고 한다. 해변의 아이 꺽꿀이는 왕질악 도사 밑으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배운 실력으로 머털이와 겨루는 날 사건은 터지고 만다


해변의 아이 꺽꿀이는 도술 하나로 천하를 가지려고 하고 묘선이와 핫바지 빙구 같은 머털이는 나중에 그런 꺽꿀이를 제압하게 된다. 누덕도사는 살아있고 그렇게 묘선이와 머털이는 다 같이 지내면서 끝난다. 시즌1이 끝나고 시즌2 ‘머털이와 108요괴’에서는 삼룡이 빙구 머털이가 열지 말라는 동굴을 열면서 108요괴가 뛰쳐나온다. 그래서 묘선이와 함께 전국을 돌며 탐정처럼 요괴를 잡으러 다닌다


머털이의 재미는 역시 대사에 있다. 머털이와 누덕도사가 티격태격 하는 대화는 둘리와 고길동을 보는 것처럼 재미있다. 머털이는 게임으로도 나왔고 개정판으로 EBS에서도 방영되었고 극장판으로도 나왔다. 머털이의 차별화는 해학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잘 몰랐는데 요 며칠 다시 보면서 든 생각은 결말이 대단하다는 것이고 빙구 같은 머털이가 빙구 같은 추리로 해변의 아이 같은 요괴들을 교묘하게 잡아들인다는 것이고 묘선이는 왕질악의 딸이어서 그런지 무서움을 뒤로하고 아주 용감하다


해변의 아이, 선 오브 비치가 많이 나오는데 아주 못됐다. 선과 악의 구조가 확실하면서 빙구 같은 요괴보다 하대하는 악질 주인인 인간들이 더 나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아이들이 본다면 요즘의 초인기절정인 신비 아파트보다 더 나을 텐데 같은 생각을 한 번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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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veQlKahhjUU



영화 ‘캣 런’은 2011년에 나온 영화로 B급 영화라 하기에는 정말 화려하고 야하고 통쾌하고 적나라한 액션이 과감없이 나온다. 주인공 외 여자 킬러인 자넷 맥티어는 모두들 설거지 해버린다. 화끈하다. 설거지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요즘은 책보다 브런치의 글을 더 많이 읽게 되는데 브런치에는 독자보다 작가가 많고 발에 밟히는 사람이 출간작가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서로 지기 싫어서인지 글이 전부 좋다. 나처럼 술렁술렁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근래에 가장 많이 검색해서 보는 글들이 ‘설거지’에 관한 글이다. 설거지는 달리기만큼 각자의 방식에 따라 철학이 깊고 다르다. 설거지의 방식과 방법과 노하우와 자기만의 도구가 다 있다

설거지의 미학은 청량감이다. 순식간에 더러운 그릇이 깨끗해지는 쾌감이 있다. 나 같은 경우 음식을 먹자마자 바로 설거지를 해버린다. 밥을 먹고 아아 좀 쉬었다가,라는 게 거의 없다. 그릇이 비워졌다 싶으면, 밥을 다 먹었다 싶으면 바로 싱크대에 가서 설거지를 해 버린다

설거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물기제거다. 설거지를 다 한 다음 물기제거용 스펀지로 싱크대와 그릇에 있는 물기를 바짝 다 닦아 내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나는 생각한다. 기름기가 많이 묻은 그릇을 세제로 씻었다면 설거지를 한 다음 물에 아침까지 담가놓는다. 그래야 그릇에 붙은 세제가 물에 빠져나갈 것 같기 때문이다

기름기가 정말 많이 묻은 음식을 먹었다면 싸구려 치약으로 기름기를 닦아내면 세제보다 잘 닦이며 심적으로 안정이 된다. 치약으로도 설거지가 아주 깨끗하게 된다

설거지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즐겨야 한다. 그런 의미의 행위가 가득한 것이 설거지다. 그건 생존과 관계가 깊다. 설거지는 어떻든 음식을 먹고 난 후 음식을 담은 그릇을 깨끗하게 씻는 행위다. 음식은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한다. 음식의 종류는 선택이 가능하나 음식 자체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게 된다. 음식을 먹고 난 후의 설거지 역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한다면 즐기는 쪽으로 몸과 마음이 기운다면 설거지에서 오는 쾌감에 빠져들 수 있다

설거지는 기묘해서 좀 모아놨다가 해야지,라고 하는 순간 쾌감에서는 점점 멀어진다. 말 그대로 재미에서 노동이 되는 순간 그것은 힘들고 하기 싫은 그 무엇이 된다. 매일 싱크대에 가족들이 먹고 난 후의 그릇이 가득 들어차 있으면 생활에서 느끼는 기쁨은 사라지고 삶의 회환까지 든다

설거지는 손등과 손바닥 같은 것이다. 같은 행위인데 쾌감을 느끼게 하느냐 노동으로 치부되어서 꼴배기 싫은 것이 되느냐, 그건 종이 한 장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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