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10년도 더 된 ‘아이팟 클래식‘으로 음악을 듣고 다닌다. 특히 조깅을 할 땐 폰은 없어도 ‘아이팟 클래식‘은 있어야 한다. 음악을 들으며 저 먼 앞으로 달려가는 기분이 꼭 상쾌하고 좋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굳어진 하나의 체제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 가장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음악이 있으니 달리는 시간과 거리가 단조롭지는 않다. 나쁘지 않다는 말이다. 내가 손을 뻗을 수 있는 나의 문화권을 조금이라도 덜 불행한 쪽으로 주파수를 맞춰 놓는 것이다.


아이팟 클래식을 처음 구입했을 때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했다.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아이팟 클래식을 보면 역시 사람들은 신기하게 본다. 처음과 현재의 신기한 결과는 같지만 이유는 분명히 다르다. 이 작은 기기 안에 몇 천곡의 음악이 들어가다니, 하며 신기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요즘 이런 걸로 음악을 들어? 불편하지 않아? 그래도 아이팟 클래식이라니 신기하네, 하며 본다.

 

그 이전에 몇 개나 몹쓸 기기로 전락해버린 엠피쓰리가 있었다. 또 그 이전에는 카세트 플레이어가 있었다. 요즘도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고 있는데 아직 카세트테이프가 많이 있고 잘 돌아가기 때문이다. 요컨대 장국영이라든가 라디오헤드 초기작이나 임펠리테리 같은 음악은 카세트로 듣고 있다.

 

음반을 구입했던 시기를 떠올리면 좋아하는 음반이 나오면 돈을 모아 레코드점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볍고 즐거웠다. 음반을 구입하는 행위의 세계에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쉽게 빼기가 힘들어져 버린다. 구입하고자 하는 음반을 구입하여 손에 꼭 쥔 다음 다른 음반들을 둘러보고 새로운 음반을 헤드 셋으로 들어본다. 집이나 학교 또는 내가 활동하는 반경 내에서 벗어나야만 할 수 있는 행위의 세계이기에 쉽게 발을 빼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그 세계에서 발을 빼기가 싫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음반을 구입하러 가는 레코드점이 한 군데여서 주인은 음반을 구입하지 않고 그저 음악을 듣기만 하고 나와도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사막의 전갈처럼 생긴 주인장은 나의 취향을 알아서 포스터를 간혹 주기도 했다. 그렇게 되려면 그 한 레코드점을 시간을 들여 들락날락거려야 하고 의도치 않게 그랬다. 후에 대형 레코드점이 생겨나고 백화점에도 레코드점이 들어와서 사람들을 현혹했지만 한 번 가던 곳에 계속 가는 회귀성을 보인 나는 그곳의 전갈처럼 생긴 주인장에게 꽤 사랑받았던 모양이었다.

 

주인장은 내가 좋아하는 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클래식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었다. 밖으로 비어져 나온 스피커에서는 클래식이 늘 흘렀고 가끔 이런 클래식을 권해 주기도 해서 구입하기도 했다. 그때 구입한 음반이 모차르트 클라리넷 연주곡과 드뷔시의 음반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이팟 클래식 안에는 리스트와 드뷔시와 모짤트와 쇼팽의 몇 곡은 소장하고 있다.

 

유튜브가 발달한 요즘에 들고 다니며 유튜브로 음악을 접하고 듣고 볼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누가 아이팟 클래식으로 일일이 음악을 듣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아이팟 클래식에 마음을 처음 빼앗겨 버린 후로 그 마음 역시 쉽게 도망가지 않고 있다. 케이스를 벗겨내면 아직 새것 같다. 스크래치가 잘 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금 간 곳 하나 없이 아직도 구입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한 번도 떨어트린 적도 없다. 그러고 보면 대체로 기기나 카메라 같은 것은 아주 깨끗하게 사용을 하는 편이다. 아이패드는 보호필름도 부착하지 않고 사용하지만 구입했을 당시처럼 깨끗하다.

 

아이팟 클래식은 카세트테이프처럼 단종이 되어 더 이상 생산하지 않지만 손에 쥐고 있고 그것으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나름의 존재감을 뿜어낸다. 음악을 듣는 방식은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혼자 듣고 혼자 좋아하고 혼자 따라 부르곤 한다. 학창 시절에 음악을 남다르게 좋아했던 친구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나와는 다르게 형이나 누나의 영향을 받은 것에 비해 나는 어쩌다가 혼자서 음악을 듣게 되었고 찾아보게 되는 경우에 속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매개가 라디오였기 때문에 라디오를 듣는 것에 필사적이었던 학창 시절이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닥치는 대로 들었다. 특히 팝을 들려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주파수를 맞춰가며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라디오를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들도 별로 없었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는 헤드 셋과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선물해주었다. 그때가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아버지는 내가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세계로 들어갈 것이라는 걸 알았던 것 같았다. 요즘이야 초등학생들이 유튜브를 하고 영상을 편집하니 음악 듣는 것쯤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힘들지 몰라도 오래전에는 국민학생이 운동장 벤치에 앉아서 팝을 듣고 있으면 평범한 눈빛을 받지만은 않았다.


내 주위에는 적극적으로 팝을 듣는 사람이 없었기에 팝을 듣고 궁금한 것이 있어도 어딘가에 물어볼 만한 사람은 없었다. 요컨대 비틀스는 왜 4명인가, 어디에서 이런 노래를 만들었을까? 같은 궁금증은 그대로 가슴에 안은 채 혼자서 골똘히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 사진 부여서 암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낸 경우가 허다했다. 암실은 3학년 선배들의 것이었지만 일요일에는 차지할 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암실에서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는다는 행복 때문에 일요일에도 학교를 자주 찾았다. 장국영의 노래를 들었고 토토의 노래를 들었고 스타쉽의 노래를 들었다. 음질은 그다지 칭찬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 수 없는 곳에서 오롯이 홀로 음악에 빠져 있을 수 있다는 것과 좋아하는 사진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나를 이루는 찬란한 세계였다. 사진부였기에 사진에 대해서 조금은 설명할 수 있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축제가 되면 몇몇의 여학교에서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공부는 나 몰라라 하고 여학생들에게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존 세카다가 머라이어 캐리의 백 댄서에서 솔로 앨범을 냈는데 정말 좋은 것 같다,며 내가 다니는 레코드점과 음악 감상실에 데리고 갔던 기억이 있다. 여학생들 중에는 각 학교의 문예부나 음악부를 하고 있어서 그 뒤로 사진부와 교류를 했는데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아마도 지금은 학부형이 되어 잘 보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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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동안 생각은 그 이전에 비해서 조금 단순해졌다. 생각이 단순해진다는 건 생활에 있어서 덜 불행하며, 덜 불편하고, 덜 힘들다. 요 며칠은 잠이 들면 일어날 때까지 아주 깊은 우물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가 일어난다. 그렇게 깊은 잠이 들었다 일어나면 괜히 돈을 벌었다는 느낌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같은 폭력적인 잠이 몰려와 아! 하는 순간 잠의 세계로 끌려간다. 오 분 정도 잠든 것 같은데 벌써 아침이 되어 요란한 뉴스 소리가 들린다.


그런 요 며칠은 생각이 단순해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잠이 들지 못해 늦은 새벽까지 뒤척이다 잠들곤 했다. 잠이 들어야 하는데 잠 못 자고 뒤척이는 건 기이한 고통이다. 제시간에 잠들지 못하면 몸도 가려운 것 같고 머리도 지끈거려 책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티브이를 보는 것도 할 수 없다. 그저 허리에 무리를 주며 뒤척이는 것이 새벽에 할 수 있는 전부다. 하지만 푹 잠들어버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생각은 밝아진다. 


몸도 가볍다. 몸속의 묵직한 무엇인가가 깊은 잠에 의해서 빠져나가 버린 기분이다. 일상에서 생각이 밝아지는 건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 비슷한 시간이고 눈뜨면 바로 변기에 앉는 일이 수순이다. 만약 그 시간에 배설을 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면 알 수 없는 미묘한 불안이 뒤따른다. 매일 해야 하는 단순한 반복에서 벗어나면 불안한 생각이 생각 사이를 파고든다.


조깅을 하고 나면 자주는 아니지만 빵을 구입한다. 빵은 달콤하고 달달한 맛으로 고른다. 조깅을 한 후 샤워를 마치고 달콤하고 달달한 빵을 한 입 먹으면 그 순간은 조금은 행복하다. 달달한 맛이라는 건 삶에서 썩 없기 때문이다. 인간인 이상 사람들은 모두 불안하다. 취업이 안 돼서 불안하고 언제 퇴사할지 불안하다. 학교나 직장 내 따돌림당할지 몰라서 불안하고 인연이 깨어질까 봐 불안하다. 인간관계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빚을 떠안아야 한다. 인생에 있어서 달콤함이란 영화 속처럼 자주 있지는 않다. 미래는 언제나 불투명하고 눈을 감으면 보이는 세계가 펼쳐질 뿐이다.


달달하고 달콤한 빵은 그 틈을 벌리게 만든다. 잠까지 푹 들면 생각은 단순해져 오늘은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난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나오는 시나몬 빵은 희망이 없어져 버린 엔과 하워드에게 익숙해지는 것을 알려준다. 엔은 시나몬 롤빵을 세 개나 먹는다.


잠과 식사.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장례식장에서도 죽을 것처럼 힘들어서 잠도 오지 않고 밥도 넘어가지 않지만 구석에서 잠이 들고, 밥 한 숟가락 먹게 된다. 누군가 힘이 들어서 찾아온다면 밥은 먹었냐 물어보고 안 먹었다고 하면 밥부터 먹으라고 하고 싶다. 위로라는 건 어디에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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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지는 카프카의 ‘변신’ 초판의 표지다. 1914년인가 카프카가 표지를 만드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부탁해서 만들어진 책이다. ‘변신’이라는 소설은 안 읽어본 사람도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고전 명작이다. 소설이란 본디 답이 확실하게 있지 않아서 ‘대답’보다는 ‘질문’이 많아야 한다. 카프카의 ‘변신’은 어쩌면 확실한 답보다는 책을 덮고 난 후 던지는 질문이 더 많은 소설이다

이 ‘변신’이라는 소설을 읽은 사람 중에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는 변신을 다시 책으로 만들어내는 출판사도 그중 하나다. 문지혁 작가도 말했지만 특히 책 표지에 벌레나 해충을 그림으로 일러스트 해놓은 카프카의 ‘변신’은 제대로 그 소설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최초 카프카의 1914년 초판 표지를 만들 때 카프카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절대로 표지에 벌레를 그리면 안 된다고 했다. 벌레가 어디에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왜 그랬을까

백석의 시를 알려면 백석을 알면 시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 것처럼 카프카의 ‘변신’을 잘 읽으려면, 그러니까 제대로 읽으려면 카프카를 알고 나서 소설을 읽으면 좀 더 이 소설을 읽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카프카는 독일계 유태인으로 이 소설을 독일어로 썼는데 그레고르 잠자를 ‘운거지퍼’라고 표현을 했다. 해충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가리켜 운거지퍼라고 했다고 한다. 카프카는 잘 알겠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살아있는 동안 꽤 고심을 했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그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카프카의 정체성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마치 운거지퍼를 보듯이

카프카는 그로 인해 세 번이나 파혼을 하는 등 정신적으로 고초를 겪는다. 카프카의 변신이나 여타 소설을 읽어보면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쓴 소설이 아니다. 대부분의 작가 내지는 소설가는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다. 하지만 카프카는 오로지 소설을 쓰는 것은 하나의 유희로서, 자신이 쓴 소설을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즐기는 것으로 썼다. 그리하여 친구였던 막스 부르트에게 내가 죽으면 소설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했다. 카프카는 자신의 선택이 없이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일을 하고 생활을 했다

소설의 첫 문장은 뭐 이렇다.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참대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신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며 시작한다

학자들은 벌레나 동물이 되는 소설을 비커밍언에니멀이라고 하는데 이 동물로의 변신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자아가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자아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라는 정체성에서 벌레라는 정체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기능이 있다. 그것은 교육이나 환경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인격체의 한 부분인데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그 ‘기능’을 잃어버린 정체성을 말한다. 그 ‘기능’을 잃어버린 사람을 ‘호모 사케르’라고 한다

인간도 짐승도 아닌 정체성을 ‘호모 사케르’라고 하는데 소설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 잠자는 호모 사케르를 말한다. 영화로 친다면 봉준호의 영화에 이 호모 사케르가 잘 나온다. 생명은 가지고 있지만 기능을 잃어버려 사회적으로 유효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 같은 호모 사케르 같은 사람은 인간사회에 가득하다. 그리고 그들을 만드는 것 또한 사람들이다. 현대 사회는 엄청난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요컨대 치매환자, 노숙자, 장애를 가진 사람을 기능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치부하고 벌레 보듯 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변신이란, 변신이 이루어진 그것이 확실하게 어떤 무엇이라고 딱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아니다. 호모 사케르는 자신의 집과 자신의 사람들 또는 자신을 모르는 이들과 과거와 현재로부터 추방된 자이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의 정체성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집을 청소해주는 아주머니다. 그레고르를 보자마자 벌레라고 한다

우리는 호모 사케르를 보고 청소부 아주머니처럼 벌레 보듯 한다. 내가 사회에서 소외당하면서도 누군가를 호모 사케르 취급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는 아주 끔찍하다. 돈 잘 벌어오던 잠자가 죽고 난 후 가족은 아무 일 없는 듯이 소풍을 간다. 딸을 바라보며 다 컸구나, 이제 시집만 가면 되겠어. 라며 운거지퍼였던 그레고르 잠자가 없어진 자리에 또 다른 호모 사케르가 들어옴으로 사회는 유지가 된다. 카프카의 말처럼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붙은 바다에 던져지는 한 자루 도끼여야 한다고 했는데 변신은 참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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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더라 2016년인가 한 언론에서 하루키에 대한 기사를 썼다. 읽어보니 너무 이상한 문장이라서 지적을 했었다. 다음 날 지적한 대로 문장은 바뀌었고 나의 댓글은 삭제가 되었다. 거대 언론사로서 비판에 대한 수용의 태도가 별로였다. 이렇게 싹 지우고 원래 그랬던 것처럼 기사를 내보냈다고 읽는 이들에게 착각하게 할 까 봐 캡처를 해놨었다

.

하루키의 단편 중에 ‘침묵’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개인적으로 공포에 관한 이야기다. 하루키식 공포. 영화 비닝에서도, 아버지에 관한 에세이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공포를 말하고 있다.

.

주인공인 나에게 오자와라는 회사 동료가 자신의 고등학교 때의 일을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오자와)는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이고 책을 좋아했다. 아이가 집에만 있는 것이 걱정된 부모님이 친척이 운영하는 복싱장에 보내게 된다. 복싱을 배우게 된 오자와는 복싱이라는 운동은 상당히 고독하고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게 하는 운동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복싱을 배우는 사람들은 링 밖에서는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는 철직을 가지고 있었다

.

그런데 복싱을 배우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오자와가 다른 사람을 때리는 일이 발생한다. 바로 동급생인 아오키라는 친구를 때리게 된다. 아오키는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친해지기 전에도 오자와는 아오키에게 느껴지는 거부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건 아오키가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은 것이 딱 집어낼 수는 없지만 거짓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아오키는 진짜로 하지 않고 허울과 껍데기뿐인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

그러던 중 복싱을 하면서 학교의 어떤 시험이든 일등을 하면 무엇인가를 사주겠다는 부모님의 약속 때문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영어시험을 일등을 해버린다. 영어 시험은 아오키가 늘 일등을 하던 과목이었다. 일등을 빼앗긴 아오키는 그 뒤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오자와가 커닝을 한 것이라고 한다. 소문은 돌고 돌아 오자와의 귀에 들어온다. 화가 난 오자와는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아직 수련이 덜 된 오자와는 아오키와 말다툼을 하던 끝에 때리고 만다

.

그 뒤로 생활은 조용히 흘러간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떨어져 있다가 다시 같은 반이 된 두 사람. 어느 날 같은 반의 마쓰모토라는 친구가 지하철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게 된다. 학교의 분위기도 안 좋아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아오키는 오자와에게 맞았던 그 일을 잊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아오키는 몇 가지 ‘사실’만을 이야기한다

.

1. 마쓰모토는 왕따를 당했고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

2. 오자와는 오랫동안 복싱을 배워왔다.

3. 나(아오키)는 중학교 때 오자와에게 맞은 적이 있다.

이렇게 몇 가지 사실을 흘리게 된다. 그 뒤로는 사실이 진실에서 벗어나게 된다. 마치 복싱을 배운 오자와가 마쓰모토를 때리게 된 것이 아닐까. 하며 차가운 시선, 냉대, 집단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오자와가 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 어느 날 오자와는 아오키를 같은 지하철 속에서 만난다. 두 사람은 눈빛이 마주치게 된다. 어떻게 될까. 소설 속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

내가 정말 무섭다고 생각하는 건, 아오키 같은 인간이 내세우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믿어버리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입맛에 맞고 받아들이기 쉬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놀아나 집단으로 행동하는 무리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뭔가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무의미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고는 짐작도 못하는 무리들이지요.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건 그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

얼굴이 없는 불특정 다수가 무섭다는 것이다. 마치 지금 현재 한국을 강타는 사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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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빠르게 걸으면 등에 땀이 났다. 면 티셔츠에 두껍지 않은 저지를 입고 있었지만 계절은 그렇게 존재를 확인시켰다. 길거리 카페에서 ‘스탠 바이 유어 맨’이 나오고 있었다. 벌써 볕이 좋은 곳에 자리 잡은 벚나무에서는 팝콘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전초전을 예고했다.


바야흐로 봄이다. 봄이라는 애매한 기운이 나의 볼을 발갛게 물들였고 내가 달리는 코스를 앞질렀다. 내가 맞이하는 봄은 언제나 그렇다. 애매한 계절. 기이한 분위기의 여자가 매력을 잔뜩 뿜어내며 다가오는데 그 매력을 딱 정의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의 계절이 봄이다. 봄이 되면 달리다가 어떤 지점에 가만히 서서 그런 기운을 잠시 느끼곤 한다. 다른 계절에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마력 같은 흡입력.


겨울의 차가운 강이 풀리면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물가로 몰려오는 덕분에 물속으로 꼬꾸라지며 분주해진 오리들의 모습에도 봄은 잔뜩 묻어 있다. 지난 겨우내 바이러스와 먼지를 이겨낸 생명체들이 그림자를 밀어내고 땅 밖으로 올라온다. 많은 냄새와 향이 뒤섞여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 계절이다.


유난히 작고 껍질이 두꺼운 귤을 하나 까먹었다. 단 맛보다 신 맛이 더 났다. 그 맛이 기도를 축축하게 적시며 내려갈 때 꼭 위로 같아서 조금 놀랐다. 그리고 이유를 모르겠지만 눈물이 차올라 또 한 번 놀랐다. 바람이 불어와 고개를 드니 현실과 직면하게 되었다.


일하는 건물에 붙어 있는 코로나 대출에 관한 전단지와 신은 정말 존재하지 않은지 울부짖음과 죽음과 확진자의 공포로 난장판이 된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의 뉴스는 안타깝기만 하다. 유학생들은 마스크를 구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도 만만찮다.


지난 2015년 메르스가 왔을 때의 글을 읽어보니 그때에도 나는 공포에 관해 주저리주저리 적어놨었다. 그리고 몇 년 안에 메르스보다 더 강력하고 인간생활을 망가트리는 바이러스가 올 것이라고도 작심하고 적어놨다. 그게 현실이 되었다는 게 이상하고 겁이 난다.


미시적으로 봄이 왔지만 거시적인 봄은 너무 멀리 있다. 영세업자와 자영업, 중소기업 종사자들은 삶이 망가져 어렵기만 하다. 모두가 어렵다. 어렵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힘들어한다. 나도 2주 정도 일을 하지 않아서 어떤 부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불편은 감수할 수 있지만 따라다니는 불안은 떨어지지 않는다. 어쩌다가 불안하지 않으면 불안하지 않아서 불안하다.


그래도 지금 이 자리가 덜 불행하다.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미국에서처럼 사재기도 없다. 다이소에는 손소독제가 매대에 아직 진열되어 있다. 조깅하는 구간에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두고 건강하게 조깅을 하고 있다. 치킨을 사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어서 어제도 한 마리 포장해서 먹었다.


프랑스처럼 길거리에 군인들이 강압적인 모습으로 서 있지도 않으며 휴지를 싹쓸이 해가는 호주의 마트 같은 모습도 없다.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정치에만 눈이 어두운 일본 같지도 않으며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한다.


300만 구독자를 가진 한 유명 유튜브는 썸네일에 대구에 다녀왔다고만 했는데 영상을 보니 마스크를 대구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었고 생활수급자 할머니와 장애를 가진 20대는 경찰서에 마스크와 자신의 생활비를 대구에 보냈다.


약국은 또 얼마나 힘이 들까. 일일이 신분을 확인해가며 마스크를 나눠준다는 것이 생각 이상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기에 정말 힘들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것만큼 못 할 짓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이 고비가 지나가길 바라며 묵묵히 일을 하고 있다. 또 휴교가 길어져 집에서 육아에 전념하는 엄마들은 또 어떤가. 아이와 하루 종일 같이 놀아주고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은 엄마가 아니면 할 수 없기에 이 모두가 이 사태 중심에 서 있는 영웅들이다.


브런치에서 확진자의 글을 읽었다. 그들에게 의도치 않게 들어온 코로나는 멸시와 경멸의 눈초리를 받게 했다. 앞으로 생활 그 속에는 멸시를 견디는 노력이 또 하나 포함됐다. 공포와 경악과 안타까움과 환멸이 차디찬 유리파편처럼 반짝이며 무거운 비처럼 내리고 있다. 봄은 겉으로는 왔지만 어둡고 질겅거리는 기분 나쁜 절지류의 탄식과 흡사한 암울한 숨소릴 내고 있다.


하지만 암울한 숨소리는 따뜻한 빗소리로 바뀔 것이다. 그건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숨어 있는 수많은 영웅들과 각 개인이 가진 의식과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살면서 형성되어 온 인격 같은 것들이 루소가 말하는 울타리를 만들어 서로를 위해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전 세계가 한국을, 한국인을 본받으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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