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단편 중 '토니 타키타니'만큼 '코끼리의 소멸'도 좋아한다. 주인공은 코끼리가 있는 사육장에서 멀리 떨어진 산을 오르다가 비밀스러운 한 곳에서 코끼리 사육장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매일 거기서 코끼리를 본다

쳐다보지 않으려 해도 보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코끼리 사육장을 보려면 산을 올라야 하니 운동도 되고, 무엇보다 강렬하게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산으로 올라 비밀스러운 곳에서 코끼리를 봐야만 정당한 곳에서 정당하게 이야기를 하고 정당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하지 않으면 마치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조각이 나 버릴 것 같다

토니 타키타니의 에이코 역시 새로 나온 예쁜 옷을 보면 참을 수 없다. 마치 옷을 입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바람이 불어와 옷을 그녀에게 살짝 걸쳐 놓은 것 같다. 그녀는 옷을 사는 것 자체를 그만 둘 수 없다

사랑하는 토니 타키타니를 생각하면 중독처럼 명품을 사들이는 걸 관둬야 하지만 에이코는 옷을 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명품이 나올 때마다 옷을 구입해야만 '나'라는 인간의 형태가 유지되는 것 같다

하루키 소설 속에는 무엇을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 잔뜩 등장한다. 이 주인공들의 기저에 깔린 건 고독이다. 고독해서 고독으로 소멸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무엇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적극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많은 고독한 이유 중 하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할 마음 속 자리에 그 사람이 없어서 갈피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서 하지메는 시마모토와 재회 후 그녀를 다시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이 격렬하게 말한다. 그 선택이 가져올 올바르지 않은 결과, 즉 사랑하는 아내와 예쁜 딸들과 궤도에 오른 카페와 자신을 뒤 받침 해주는 탄탄한 재력가인 장인도 전부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만큼, 지금까지 쌓아온 금자탑이 와르르 무너진다고 해도 시마모토를 만나야만 한다

매일 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밤은 왜 오는지, 시간이 앞으로 갈수록 인간은 어째서 늙어 가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논하기에는 생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벅차서 일상을 철학적으로 생각할 여유가 없다. 인간은 물질에 욕심을 부리며 인간이 인간을 만나 관계를 망가트리고 상대방을 잘 모를 때는 그 사람을 좋아하다가 그 사람을 알면 알수록 싫어하는 모순을 이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애달파하고 힘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삶을 반복한다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들도 크게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데 참 다르다. 주인공들은 유전자처럼 날 때부터 고독을 안고 태어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고 태어난 고독이 마음의 공백을 차지한다. 그리고 그 공백을 누군가로 인해 채운다. 하지만 누군가가 공백에서 빠져나가고 나면 원래 공백보다 더 커져있다

토니 타키타니도 에이코와 함께 지내면서 처음으로 공백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에이코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다는 건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상상이 현실이 되었으니 토니는 정말 행복했다

하사코는 에이코가 남겨 놓은 방대한 옷들을 입어보다가 터지는 울음을 참지 못한다. 세상에는 그런 울음이 존재한다. 하사코는 질은 다르지만 비슷한 깊이의 고독을 에이코의 옷을 입어보면서 느꼈을지도 모른다. 무채색과도 같은 투명하고 아름다운 적멸을 에이코의 옷에서 히사코는 보았는지도 모른다. 고독해서 고독에서 벗어나고파서 고독해질 수밖에 없는 고독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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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펀치의 스릴러 정점이라 불리는 영화 '세븐'은 정말 무서워서 욕 나오는 좋은 영화였다. 캐빈 스페이시의 살인 장면은 끝내주었다. 이 무시무시하고 빠져들 것 같은 스릴러 속을 벌리고 멋진 모습의 브레드 피트와 예쁜 기네스 펠트로는 온통 공포뿐인 이 영화에서 잠시나마 행복을 느끼게 해주었다. 불행한 삶을 벌리면 희망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모건 프리먼이 두 사람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두 사람은 비록 가난하지만 행복하다. 기차가 지나가면 집에 흔들 거린다. 이 장면은 영락없이 하루키의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이라는 단편 소설이 떠오른다

 

하루키는 아내와 결혼을 하고 아주 싼 가격에 단독주택에 입주하게 되어서 기뻤다. 단독주택에 방도 몇 개나 있고 비록 작지만 마당도 있어서 고양이도 키울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단독주택의 집세가 이렇게 저렴한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치즈케이크처럼 생긴 주택 양옆으로 철길이 나 있고 하루에 수시로 지하철이 지나갔으며 시끄러워서 기차가 지날 때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양옆으로 동시에 기차가 지나갈 때면 식탁이며 집이 온통 덜덜거렸다. 그런데 기네스북에 나올 만큼 가난했던 치즈케이크를 닮은 그 집에 살 때가 행복했다고 한다

 

단편 소설이라고 하지만 하루키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곳이 어딘가 구글을 통해서 찾아보면 정말 그런 곳이 일본에 있다. 츄오센과 고쿠분지 사이의 삼각형 토지에 있는 집이었다. 소설 속에서 고풍스러운 집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러한 것 같다. 지금은 이렇게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하루키는 이부자리와 옷가지 식기 전기스탠드, 몇 권의 책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가 전 재산의 전부였다. 그만큼 가난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인생은 지극히 간단해진다

 

겨울에 해가 지면 하루키는 아내와 고양이를 안고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갔고 아침에 나오면 부엌의 싱크대가 얼어붙어 있었다. 그렇지만 가난이라는 불행 속에서도 봄이 오면 근사해져서 세 명(고양이포함)이 나른한 봄볕에 작정하며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하루키는 그 당시를, 우리는 젊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고, 햇볕은 공짜였다. 고 했다

 

그런 하루키의 소설이 우울하고 겁이 나는 긴 내용 속에 잠깐 등장하는 저 장면에서 영화 속 또 다른 영화처럼 떠오른다. 아주 짧지만 이 두 사람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것을. 비록 곧 이 행복이 깨질지라도 이 순간의 행복을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영화 세븐에서 마지막 장면에 지독하게 똑똑한 범인의 의도대로 되게 하는 것인가 아내인 기네스 펠트로가 죽어서 분노를 드러내야 하는 것인가 하며, 증오와 분노와 슬픔을 얼굴에 표현하는 브레드 피트의 연기는 가을의 전설을 뛰어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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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뿐이에요


귤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귤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된다.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늘 있어야 할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된다


마치 음식을 먹고 있는데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건 재능도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사실 그곳에도 존재하고 이곳에도 존재한다. 동시 존재한다. 동시공체일지도 모른다. 스팅이 그에 관한 철학적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 존재하지만 렌선을 타고 그곳에도 존재한다


구름 없던 하늘에 구름이 모락모락 그림을 그려 한참을 서서 바라보는데 꼭 저 대책 없는 구름의 모습이 나의 마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름 같은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참 어렵다.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양립된 마음이 동일선상에 놓여 있어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한쪽으로 기울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종의 습관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쩌면 일상의 반은 습관을 유지하려고 자신과 싸우고 또 일상의 반은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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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이 일단 소설을 적었다 하면 영락없이 영화나 시리즈물로 제작이 된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공포를 주제로 담는 이야기가 많으며 초자연적인 존재가 침범 내지는 침략을 하고 그에 대항하는 인간이 주를 이루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갈등을 겪는다. 미저리 같은 이야기는 초자연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떻든 공포를 가득 담고 있다

 

미국은 스티븐 킹을 좋아하며 초자연적인 이야기도 좋아한다. 올해 나온 우리나라 영화 '로드 킬'도 초자연적인 공포영화였고 내용도 괜찮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극장에서 순삭이었다. 극장 상영을 아예 하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우리나라는 초자연적인 이야기는 그렇게 썩 좋아하지 않는 걸로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면 더 재미있는 것 같다. 어쩐지 소설과 영화를 소비하기 위해 그런 분위기 내지는 기류가 미국 전반에 흐르고 있어서 스티븐 킹의 소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거의 소설과 같게 영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그쪽 문화와 산업의 종사들은 머리가 좋달까 그래서 대중에게 우리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면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단 말이야,라며 대중문화를 생산하는 것 같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미국인들은 스티븐 킹을 좋아하고 그의 소설이 나오기를 늘 바라고 있다

 

스티븐 킹은 하루키도 좋아하고 전 세계의 작가들이 좋아한다. 그리고 첫 문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늘 첫 문장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티븐 킹 소설의 첫 문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스티븐 킹의 소설이 하루키만큼 인기를 누리지는 못한다. 나도 스티븐 킹의 소설을 몇 편 읽었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이 이우혁의 소설처럼 순식간에 읽히지 않는다. 어떤 이는 번역의 문제이거나 우리 한국인들과는 다른 문화 때문이라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 ‘높은 풀 속에서’는 갈대 숲처럼 인간 키보다 높은 풀 숲이 생존을 위해 인간을 꼬드겨 인간의 에너지를 흡수한다는 내용이다. 풀밭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엉망이다. 저쪽에 있던 건물이 이쪽에 있고 태양이 서쪽으로 가야 하는데 동쪽으로 이동하고, 이틀 전에 떠난 사람과 이틀 후의 사람이 만나는 개판인 곳이다. 그런 곳에서 주인공들이 나오려고 하는데 어떻게 될까

 

이 영화의 특징은 방대한 풀밭이 등장하고 주인공들, 인물 6명과 개 한 마리가 등장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 원작을 읽고 보면 굉장하게 빠져든다. 그건 전작(바로 전에 나온 영화) ‘그것’이나 ‘애완동물 공동묘지’도 그렇다. 영화는 반응이 시큰둥했지만 상하로 번역된 한국판 소설을 읽고 본다면 꽤 몰입하게 된다. 그러니까 재미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 ‘높은 풀 속에서’도 스티븐 킹의 그간의 스타일을 따라가는데 긴장을 죽 끌고 간다

 

풀, 숲은 다른 생물체처럼 자의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럼에도 살아있고 지구에서 인간이 멸망하면 동물이 지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질소를 뿜어내는 녹색식물이 지구를 덮어 버린다. 요컨대 사람이 빠져나간 빈 건물이 몇 개월만 지나면 잡초와 풀로 덮여 버린다. 숲은 멀리서 보면 아름다우나 가까이서 보면 공포다

 

풀은 움직이지 못하니 인간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을 것 같은데 밤새 숲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나오거나 구출이 되면 어김없이 풀에 베이고 긁혀있거나 상처를 입는다. 인간 가까이서 인간의 손을 탄 녹색식물이나 안전하지 숲속에서 방대하게 자라는 풀은 더 이상 우호적이지 않다. 물론 인간에게만 그렇다. 그런 바탕을 깔고 본다면 꽤 볼 만한 영화 ‘높은 풀 속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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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치는 웃기기만 한 것이 아니다. 웃음과 슬픔이 잔인하게 녹아있고 그 속에는 늘 뼈 때리는 언어가 숨어있다. 우리가 주성치를 좋아하고 주성치의 영화를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5세 아이처럼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성치의 영화는 채플린을 관통한다. 웃긴데 참 슬프다. 여린데 악독하고, 호들갑스러운데 냉철하다. 이런 모순이 가득해서 키득키득하며 웃다 보면 어느새 이상하고 또 이상한 이물감 같은 기분에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겨울이 되면 당연하듯이 삐삐를 보는 것처럼 매년 어떤 시기가 되면 서유기 선리기연을 보게 된다. 선리기연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재미있다는 게 몹시, 정말 이상하다

 

주성치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지난 번에 리뷰를 한 '신희극지왕'이었다. 주성치와 장바이즈의 희극지왕, 리부트다. 주성치의 희극지왕을 보면 알겠지만 주성치는 힘들고 인정받지 못한 무명의 시절이 아주 길었다

 

같이 영화에 뛰어든 양조위, 장국영이나 유덕화나 주윤발이나 성룡은 이미 톱클래스에 올라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는데 주성치만 계속 무명이다. 그래서 배역을 얻으러 가면, 그 정도 해서 안 되면 그만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냐, 같은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그 대사는 신희극지왕의 여몽을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이 한다

 

여몽은 긴긴 시간 무명배우로 지내면서 괄시와 멸시를 사람들에게 받지만 절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활짝 웃으며 훌훌 털며 일어난다. 이 여몽 역를 한 악정문은 실제로 무명배우였다. 신희극지왕 이전 필모가 전혀 없었다

 

주성치는 자신의 사단이 있음에도 그는 서른 살이 다 된 무명배우 악정문에게 주인공 역을 준다. 실제 주성치가 긴 무명시절의 모습을 악정문에게서 본 것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악정문은 여몽의 배역을 정말 잘 소화해낸다. 웃기면서 처절하고 슬픈데 밉지 않고 독하게 매달리는데 잘 안되는, 그래서 신희극지왕을 보면 주성치가 주인공이었던 영화처럼 키득키득 거리다가 어어? 하면서 쿡 울게 된다

 

여몽만 무명이 아니다. 여몽의 돈을 등쳐먹었던 남자친구 역시 무명이었는데 배역을 주성치가 주었고, 갑부로 나와서 여몽과 함께 주성치의 희극지왕을 패러디했던 여몽의 친구인 이양역시 무명으로 신희극지왕 이전에 필모가 전혀 없다. 그리고 여몽의 부모님 역시 95년 이후 배역이 없었다가 신희극지왕에 캐스팅이 되었다

 

주성치는 주성치 사단이 있음에도 무명 배우들에게 주역을 맡겼다는 이유로 신희극지왕을 촬영할 당시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주성치가 무명배우에게 주인공을 맡겼다며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기도 했다

 

슬프면서 웃기고 황당하면서 이해되고 의자는 앉는 것이 아니라 던지라고 있는 것이며 비극인데 희망적인 주성치 영화를 앞으로 몇 편 볼 수 있을까. 마치 하루키가 유산을 기증한다고 하니 이제 하루키 장편 소설을 한 편 정도 더 보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에 조금은 슬픈 것 같은 감정이 든다

 

심사관에서 매염방은 정말 코믹하게 나오는데 매염방도 일찍 세상을 떴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요즘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어제 100분 토론이 훨씬 재미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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