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엔 텅 빈 공동(空洞)이 아주 크게 나 있다. 네 살 된 딸이 죽으면서 생겨버린 공동은 아내로 인해 채워질 줄 알았지만 아내와 사랑을 나눌 때마다 조금씩 깊어지고 더 커져서 이제는 그 무엇으로도 공동을 채울 수가 없어졌다. 아내는 나를 사랑하지만 나는 아내의 사랑에 대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아내에게 필요한 건 나의 가슴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슴이었고, 나의 품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품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잠을 잔다는 걸 알지만 그걸 아내에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아내가 나를 떠나가게 될까 봐, 그러면 내 속의 텅 빈 공동이 모든 공간을 차지하고 잡아먹어 어둠만이 내 속을 채우게 될까 봐 두렵다. 그러나 아내는 내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잠을 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걸 애써 꺼내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내가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둘 다 상처를 받았지만 제대로 상처를 받는 법을 알지 못했다. 제대로 상처를 받았다면 아물어 흉터가 생기더라도 상처는 치료가 되지만 제대로 받지 않은 상처는 점점 곪고 곯아서 깊어지기만 한다. 어쩔 수 없다. 살아가는 수밖에. 가끔 우리끼리 안아주고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내는 길밖에 없다.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야금야금 먹어가며, 없는 맛도 참고 견디며, 평화 따위 없더라도 살아가는 것이다. 제대로 상처를 받는 방법은 아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아내를,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아내를, 거짓 없는 아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제대로 내가 상처를 받는 일이다. 그걸 아내가 죽고 난 후에 알게 되었다.


하루키 팬들은 이 영화 정말 좋았지? 팬이 아니라도 이 영화는 정말 좋다고 할 거야. 하마구치 류스케의 모든 영화가 정말 좋잖아. '우연과 상상'을 보고 이 별 거 아닌 이야기에 너무 빠져 버렸지 ㅋㅋ


이 영화는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단편 ‘드라이브 마이카’가 영화가 되었잖아. 만년 소년 같은 얼굴의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가후쿠로 나오고. 이 소설은 이제 운전을 하지 못하게 된 나이 든 가후쿠라는 남자가 여성 운전자 미사키를 전속 드라이버로 소개받으면서 가후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잔잔한 단편 소설이잖아


그런데 영화는 거의 3시간 가까이 되잖아. 다른 단편들의 이야기도 녹아 있어. 이 영화는 원래 부산 로케로 죽 달리면서 영화를 담을 예정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일본에서 촬영을 했고. 드라이브 마이카를 영화로 만든 하마구치 감독이 한국과 인연이 좀 있잖아. 봉 감독의 기생충에 머리를 한 방 맞은 것 같은 영감을 받았고, 자신의 두 번째 영화 ‘심도’가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지원으로 만들어졌지. 또 감독은 ‘아사코’를 만들었고, 또또 우익이라고만 알려졌던 아오이 유우가 전혀 그렇지 않게 나오는 ‘스파이의 아내’의 각본을 썼어


하루키의 소설은 영화가 되기 힘들다고 하는데 하루키의 소설이 다른 그 어느 소설가보다 더 많이 영화가 만들어진 것 같아. 아무튼 너무 재미있게 몇 번이나 봤었던 드라이브 마이 카  


이 음악 어쩔거여 https://youtu.be/ez-Wkp2gj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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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페이드의 폐급 초인 능력을 보이는 엄마와 쌍 모지리 같은 아빠가 비스트에게 대항하며 생명을 건 아이들 지키기 고군분투기다.

딸냄과 먼 나라에 여행을 간 엄마와 아빠는 사실 겉으로는 행복하지만 엄마는 아빠의 소심함(특히 몸의 대화가 너무 없어서) 때문에 외도를 하고 그 남자의 소중이 사진도 편에 간직하고 있다가 남편에게 들켜 상담사에 남편에게 잘못을 빌고 화해모드로 그냥저냥 지내다가 여행을 오게 되었다.

아빠는 이래도 저래도 설렁설렁하는 그 성격 탓에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이들에게 거절 한 번 하지 못한다. 저래도 오우 이래도 오우 정말 마음이 너무 펴어어어언해도 너무 한 것처럼 보인다. 거절하지 못하는 병 때문에 몹쓸 것들의 집까지 초대되었다고 간다.

이 딸냄은 그 몸의 토끼 인형이 없으면 난리 난리 개난리를 피운다. 애착 인형이라 없어지면 큰일 나는데 소에는 또 들고 다니지 않는다. 잠들 때 껴안고 자야 하는데 없으면 안 된단다. 그러다 몹쓸 것들의 집에서 도망치는데 역시나 딸냄이 토끼 인형이 없다며 운전하는 아빠에게 발길질하고 난리 난리 개난리다. 그리하여 다시 그 집으로 가게 된다.

중반을 넘어 갈수록 으이그 하며 속 터져 죽을 것만 같다. 아내는 술자리에서 남편 소중이 한 달에 한 번 본다고 빈정거리지 남편은 용서한 아내의 외도를 또 걸고넘어지지, 딸냄은 지 때문에 몹쓸 것들의 집으로 간 것도 모르고 헤헤 달걀에 색칠놀이나 하고 있지.

하지만 점점 찝찝하고 이상한 비스트 집 사람들. 그러다가 그 집의 혀가 없는 아들이 딸냄과 같이 있을 때 모든 비밀을 말해준다. 그러면서 이야기가 공포에서 스릴러로 마지막에는 액션이 된다.

길쭉길쭉 맥캔지 엄마는 다크페이드로 흑화 해서 불도 지르고 총도 쏘고 후반부에 길쭉한 팔로 도끼를 들어 빌런의 뚜껑에 사정없이 내리꽂아 버린다. 와우.라고 하지만 어쩌면 영화에서 가장 폐급에 속하는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답답한 남편과 대화를 하면서 점점 남편의 안 좋은 점을 부각시켜서 자신의 잘못이 없는 것처럼 몰아간다. 낯선 이들에게 호의적으로 얼굴에 웃음을 보이지만 실은 자신보다 의식 수준이나 생활 수준이 낮다고 생각이 되면 돌아서서 한없이 까내린다. 꼰대와 비슷하다. 대답을 정해 놓고 질문을 하고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상대방을 비난한다. 채식주의자라고 하지만 생선을 먹는 것에 대해서 한없이 관대한 아주 이상한 캐릭터가 엄마다.

가장 고구마였던 아빠 역시 아이들을 위해서 뭔가를 하지만 역시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하는 아빠의 모습은 그야말로 답답함 그 자체다. 마지막 비스트에 잡힌 딸냄의 동물마취제 활약으로 가족 액션 활극으로 끝난다. 붙잡혀서 혀가 잘린 아들이 돌멩이로 얼굴 박살 내는 장면 없었으면 욕할 뻔. 블룸 하우스 제작에 리메이크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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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도 없고, 그래픽도 뭐 그렇게 막 정교하지도 않고 내용도 크게 없는데 보다 보니 울컥하네. 별거 없는데, 고양이 한 마리의 움직임으로 모든 생각과 의미가 드러나는 게 신기할 정도다.

플로우는 저거지? 뜻은 흐르는 것지만, 저거 뭐더라 바다에 노랗게 떠 있는 그거. 해수욕장에서 바다에 그 이상 나가지 말라고 띄워 놓은 노란 그거. 아님 말고.

세상에 대 홍수가 나서 작은 배에 고양이와 함께 여러 동물이 타서 그냥 끝없이 항해를 하는 이야기다. 고양이는 물을 싫어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고양이는 물속에 들어가야 하고 받아들인 다음 물속에서 물고기도 직접 잡아 온다.

의인화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배의 돛을 조종한다던가, 밧줄로 카피바라를 구하려 한하는 모습은 의인화가 되었다. 수줍은 물수제비 같은 고양이에 비해 마냥 어린이 같은 댕댕이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있다.

위태로운 조각배 위에는 고양이를 위해 무리에서 싸우면서 맞서던 새, 댕댕이, 안경원숭이, 카피바라 이렇게 생판 보고 듣도 못하던 동물들이 모여서 항해를 하면서 서로에게 적응을 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리네.

고양이는 온 세상이 홍수로 물바다가 되어서 움직일 수 있는 곳은 고작 조각배 위인데 물속에서 고래가 마음껏 자유롭게 다니고 있는 모습을 본다.

영화는 몹시 신비로운 음악이 고양이가 움직일 때마다 흐른다. 그리고 몹시 신비로운 빛의 향연이 이어진다. 시간이 갈수록 고양이가 너무 기특하게 느껴진다. 하찮은 것에 대해서 동화가 된다.

고양이가 따르던 새가 빛으로 가버리고 난 후 이 세상에 혼자만 남은 듯한 고양이가 저 멀리 가버린 배와 친해진 동물들을 애타게 부르지만 배는 더 멀어진다. 고양이는 플로우에 올라타 배를 향해 가는데, 느닷없이 홍수가 난 것처럼 느닷없이 물이 다 빠지며 아름다운 지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우여곡절 끝에 동물 친구들을 만나는 장면도 아름답고, 마지막 이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졌는데 고래가 땅 위에서 숨을 할떡 거리며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 장면은 이렇게 아름다운 곳 자체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세상은 항상 아름다운 세계인 동시에 폭력의 세계다. 그 속에서 견디며 버티는 고양이가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뭐야!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할 영화, 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너무 빠져들 영화 ‘플로우’였다. 뭐 그렇다고 내가 아이의 마음이 있다는 건 아니지만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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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팬들아 하루키 단편 소설 ‘코끼리의 소멸’ 좋아해? ㅋㅋ 나는 이 소설이 이상하게 그렇게 좋더라. 하루키 식의 초자연, 초현실을 아주 잘 그리고 있다고 생각해

소설이 짧아서 더욱 강하고 깊게 잔상을 남겨. 코끼리의 소멸을 보게 된 주인공은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껴. 코끼리의 소멸을 보게 된 후 적극성이 몸에서 빠져나가 버려. 우선순위가 사라지는 거야. 회사에서 사장이 시킨 중요한 일보다 눈앞에 보이는 쓰레기통을 치우는 일을 먼저 해 버리는 것처럼 말이야

어느 날 도시의 한 동물원에서 코끼리와 사육사가 사라지는 거야. 신문과 뉴스에 보도가 되는 거지. 코끼리가 문을 통해 빠져나간 흔적도 없고 사육사가 끌고 나간 흔적도 없는데 깜쪽 같이 사라진 거야

동물원의 배경과 코끼리가 어떻게 이 동물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도 소설에 나와.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이 코끼리와 사육사가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돼. 사육사는 코끼리와 아주 친밀한 관계처럼 보였지. 동물을 오랫동안 돌보다 보면 그런 관계가 되잖아. 마치 가족처럼 말이야

주인공은 어느 날 작은 구멍으로 보이는 동물원의 모습 속 코끼리와 사육사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봐. 원거리에 있어서 작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와 사육사의 물리적인 크기가 작아져서 없어지는 모습을 보는 거야. 주인공은 그 이후 옳은 일이라고 선택을 하는 것도 힘겨워지고 상실의 깊고 깊은 터널 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코끼리의 소멸을 본 주인공이 가지는 상실의 공백은 몹시 폭력적이야. 이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전혀 모르는 사실을 주인공 혼자 알고 있다는 진실이 주인공을 폭력의 세계로 서서히 밀어 넣어. 그로 인해 주인공은 조금씩 자신도 코끼리와 같이 실오라기처럼 소멸해 간다는 걸 느끼게 돼

주인공은 결국 파티에서 만난 여성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놔. 우리는 가끔 자신이 떠안고 있는 사실이 힘겨워할 때가 있잖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육사의 이름이 와타나베 노보루야. 하루키 팬들은 다 알지? 단편 패밀리 어페어에 등장하는 여동생 애인의 이름도 와타나베 노보루, 태엽 감는 새에 나오는 아내의 오빠는 와타야 노보루, 또 어느 에세이인가? 고양이 이름이 와타나베 노보루

와타나베 노보루라는 이름은 하루키의 단짝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본명이야. 다 알지? 하루키는 아무래도 미즈마루 씨를 만나고 나서 소설을 쓰면서 그의 이름이 내내 맴돌았지 않았을까. 어디 한 번! 같은 마음으로 ㅋㅋ

안자이 미즈마루 씨는 항상 젊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분위긴데 여자들에게는 하루키를 소개해줄게,라고 하지만 한 번도 하루키에게 젊은 여성들을 소개해준 적이 없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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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스트들아 이상과 하루키가 만나는 이야기를 한 번 써봤어. 지난번에 한 번 올렸는데 바뀐 내용도 있어서 한 번 올려봐 ㅋㅋ  

카페에는 라디오 헤드의 Let down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김해경 선생을 

라바짜 커피 전문점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커피가 맛있습니다.라는 말에 

김해경 선생은 알았다며 핼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프레소에 

레몬을 띄우시는 거 맞으시죠?라고 나는 김해경 선생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김해경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물이 탄 커피를 마시고 김해경 선생은 레몬이 들어간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한잔 마셨다. 라디오 헤드의 노래를 가만히 듣던 김해경 선생은 

고개를 미세하게 살짝 움직였다. 이 음악은? 같은 표정에 나는 라디오 

헤드의 노래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했다. 김해경 선생은 미세하지만 흥미 

있다는 표정으로 나의 설명을 들었다.


김해경 선생은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역시 커피에 대해서 학식이 

높다고 생각이 들 때 우리가 앉은자리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왔다.


내가 먼저 하루키를 알아보고 이쪽으로 안내했다. 모던보이라 불리는 

이상은 멜빵을 하고 체크무늬의 넥타이를 하고 한껏 멋을 냈지만 핼쑥했다. 

그런 김해경 선생에게 하루키는 손을 내밀었다. 전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합니다. 하루키가 잡은 김해경 선생의 손이 유약했고 아주 작았다. 


김해경이라 하오. 모두들 나를 ‘이상’이라 부르오. 

하루키는 자신의 가방에서 두부를 꺼내서 이상에게 권했다. 

커피와 잘 어울릴 겁니다. 우레시노의 두부라서 꽤 부드럽고 입안에서 

골고루 퍼집니다. 간장을 찍어 먹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상은 고개를 끄덕하며 두부를 한 젓가락 떠먹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하루키 씨가 나를 보자고 했소?라고 

쉰 목소리의 이상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어렵게 부탁을 했습니다, 저는 

소설을 씁니다, 이제 얼마나 더 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만, 그래서 김해경 

선생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혹시 지금 나오는 이 노래를 하루키 씨도 아시오?라고 김해경 선생이 

물었다. 저는 라디오 헤드의 음악을 좋아해서 그들의 앨범 KID A를 제 

소설에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삶과 죽음, 폭력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음악입니다. 


이상은 자세를 좀 더 하루키 쪽으로 당겼다. 부탁이라는 건?라고 이상이 

읊조리듯 물었다. 김해경 선생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제 소설에 좀 

쓰고 싶습니다. 음, 하는 쇳소리가 이상의 다문 입에서 새어 나왔다. 


전 또스또에쁘스끼를 좋아하오. 그 사람의 글을 아주 많이 읽었다오.라고 

이상이 말했다. 저도 악령 정도는 아주 좋아합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사회주의자여서 사형선고까지 받고 시베리아 유형 동안 그 자신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악령의 근본은 니힐리즘에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라고 하루키가 천천히 말했다.


자멸적 궤변과 괴변이 니꼴라이 쁘레볼로또비치 스따브로낀에 있었는데 

말이오. 리자, 리자는?라고 이상이 말했다. 리자가 말했습니다. 있었던 일이 

있었지 뭐, 그건 가혹하다, 너무도 가혹하다.라고 하루키가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질척이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그 사이를 라디오 헤드의 

‘Let down’이 흘렀다. 하루키 씨? 나는 이미 죽었소,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시오?라고 이상이 물었다. 하루키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한 번 만진 다음 이상에게 겸손하게 대답했다.


모든 격렬한 싸움은 상상력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싸움터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이기고, 거기서 패배합니다. 물론 우리는 

누구나 유한한 존재고 결국은 패배합니다. 하지만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간파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이기는 방식보다 

어떻게 지느냐 하는 패배하는 방식에 따라 최종적인 가치가 정해집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 못지않게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결정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은 하루키의 말을 듣고 마른 몸을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고 자신 앞에 

앉아있는 일본의 한 소설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앞으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Let down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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