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다. 너바나는 정말 기존의 음악을 박살 내 버렸다. 너바나가 등장 함으로 10년 가까이 굳건하게 지키고 있던 마이클 잭슨의 아성이 무너졌다. 엄청난 무대가 팬과 스타의 경계를 확실히 했고 스타의 의상은 일반인들이 우러러 봐야만 했던, 굉장한 군무와 고출력 음장기기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음악, 그러니까 기성세대 기득층의 음악을 그대로 해체시켜 버린 밴드가 너바나가 아닐까 싶다.

 

커트 코베인은 정말 불운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그것도 짧게, 고뇌와 통증을 극심하게 앓다가 살다 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커트의 어린 시절은 아주 암담했다. 검색하면 많이 나오니 궁금하면 찾아보기 바람. 엄마가 19살에 커트를 낳게 된다. 커트 코베인은 9살에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이혼을 한다. 9살짜리 커트는 그때부터 친척 집을 돌아다니며 생활하게 된다. 커트의 곁을 지켜 줬던 건 기타뿐이었다.

 

87년 머리가 긴 커트 코베인과 베이스의 크리스 노보셀릭이 우리도 이제 밴드를, 하면서 너바나가 만들어졌는데 커트 코베인은 밴드 이름을 당시 약이나, 본드, 권총, 박살 같은 저속하고 강한 닉 네임 말고 무정부주의적인 아름답고 세속적이지 않는 닉 네임으로 하고 싶어서 ‘열반’이라는 의미가 있는 너바나로 하게 된다. 열반은 번뇌와 고뇌가 소멸한 상태를 말한다.

 

88년 서브팝이라는 음반회사에서 첫 싱글을 발매하게 된다. 브리치라는 노래가 예상외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그러면서 언더에서 너바나는 확고한 자신들의 자리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실력에 비해서 서브팝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낀 커트와 크리스는 소닉유스(역시 대단한 밴드죠)의 권유로 개팬레코드사와 정식 계약을 맺게 된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음악은 예술이라도 음반은 산업이기에 음반사를 잘 만나야 했다. 비치 보이스도 비틀스도 본 조비도 다 그렇게 개고생을 해서 음반사를 제대로 찾았기에 그들의 음악이 세계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음반사를 잘못 만나면 그대로 쫑 나기 십상이다. 요컨대 슈가맨의 로드리게스가 그렇다.

 

부치 빅이라는 대단한 프로듀서와 작업을 하면서 내놓은 앨범이 바로 ‘네버마인드’였다.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이 들어있는 악마의 앨범. 개팬레코드사는 소닉유스가 내는 앨범의 25만 장 정도의 수준으로 너바나의 네버마인드 앨범도 그 정도 팔릴 것이라 예측했다. 처음에는 개팬의 예상대로 빌보드 144위 정도로 출발했는데 처음 찍어낸 5만 장이 순삭해버리고 이 악마의 노래,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이 엠티비에서 매일매일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너바나의 그 흐느적 강한 미친 악마의 노래가 계속 남으면서 인기가 폭발적이 된다. 그러다가 92년도에 500만 장이 팔려 나가게 된다.

 

그해 커트는 코트니 러브와 결혼을 하게 된다. 코트니 러브가 누구인가. 홀의 리드 보컬이다. 홀은 ‘셀러브리티 스킨’으로 대단한 인가를 누린다. 일단 한 번 듣고 오자. 자 듣고 왔다. 코트니 러브는 홀에서 기타를 울러매고 헝클어진 머리와 붉은 립스틱, 모호한 눈으로 떠돌이 같은 이미지였다. 제니스 조플린처럼 말이다. 거의 짧은 치마의 원피스를 입고 기타를 울러매고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며 노래를 불렀는데 팬티가 보이든 말든 이었다.

 

커트는 그런 코트니와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아서 깊은 행복감에 젖는 듯 보인다. 그리고 코트는 93년에 인 유트로 앨범을 발매하는데 또 정상에 오른다. 커트는 네버마인드로 너무 유명해져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된다. 우울증과 정서적인 불안으로 약을 하고 또 약을 하고 술을 마시고 약을 했다. 유 인트로 앨범은 그런 커트의 망가진 정신세계를 그대로 드러낸 앨범이었다.

 

이후 미국 투어를 다니며 엠티비에 자주 나오게 되었다. 엠티비는 미국에서 톱클래스, 주류 음악을 하는 음악인들이 나오는 것인데 커트는 자신이 그 속에 있다는 것에 대한 모멸감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약을 하다 헤로인에 빠져들게 되고 세계 투어 중 로마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고 만다. 이후 헤로인을 치료하는 재활병원에서 치료를 거부하고 탈출해 시애틀의 집으로 와서 94년 4월 8일 자신의 집에서 권총 자살로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아직까지 커트의 죽음을 두고 미스터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권총에는 지문이 없고 유서의 필체가 커트의 것과 다르고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의문이 사람들에게 돌기 시작했고 그 배후에는 아내인 코트니 러브가 있다는 설이 있다.

 

커트 코베인은 왜 주류에 들어가기를 극심하게 싫어했을까. 60년대부터 불던 부모 세대에게서 저항을 느낀 이들이 일명 부모 세대, 전쟁세대에게 도움을 받기를 거절하면서 창고 같은 데서 지내면서 자기들의 생활은 자기들이 알아서 책임지겠다며 나오는 세대가 생겼다. 그것이 뉴 제너레이션 세대인데 그 중에는 스티브 잡스도 그랬다.

 

커트 코베인 역시 친척 집을 떠돌면서 물질만을 쫓는 부모 세대들에게서 미래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창고 같은 곳에서 자기 마음대로, 그러니까 이전 세대를 비판하는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은 번뇌와 고뇌가 소멸한 상태로 가는 것이다.

 

부모 세대처럼 살면 안 된다 이전 세대, 물질을 찬양하고 쫓는 세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자신의 음악을 부모 세대가 열광하는 것에 괴리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한다.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정신적으로 받은 손상은 쉽게 치유되지 못한다. 경멸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찬양하는 것에서 오는 모멸감은 대단했다. 오로지 헤로인 만이 그를 ‘무’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정말 커트 코베인은 긴 불행의 시간 속에서 아주 잠시 잠시 행복을 맛보았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른 김에 뜨거운 밥을 싸 먹고 그 뜨거움을 갓 끓여낸 된장찌개 한 숟가락으로 후후 불어, 같이 식혀 먹었던 것을 하루키 식으로 말하면 소확행이다. 그리고 부른 배를 잡고 방바닥의 요만큼 볕이 드는 공간에 공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이승환 2집을 헤드셋으로 들었던 기억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이승환 2집을 들으면 영화 필름 테이크가 뒤로 돌아가 버린다. 겨울에 썩 따뜻하지 않은 집에서 두터운 골덴바지를 입고 방바닥에 늘어진 귤 몇 개와 곧 싸락눈이 내릴 것 같은 잿빛 하늘이 고흐의 그림처럼 정경을 이룬다.

 

영화음악이 영화에서 얼마나 소중한 요소인지 알 수 있다. 감독, 배우, 스토리마저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영화음악이 스치면 그 장면이었어!라고 떠오르게 된다.

 

당시에는 가사가 전부 왜 이럴까. 이런 생각이 있었다. 내가 나에게 안녕을 고하고, 마음이 텅 비어 있고, 인생은 나그네 길이고 벌거숭이고, 그렇게 소리 없이 흘러만 가고. 지나고 나서 보니 가사가 참 시적이었다. 앨범 표지도 노래의 가사들과 잘 어울렸다.

 

앨범 하나를 만들어 내면서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신경을 써야 하는구나. 이승환은 이후에 점점 하고 싶었던 록으로 변모해갔는데 어쩐지는 나는 록을 좋아하지만 이승환의 변심에 흥! 해버렸는데, 3년 전에 여기 어촌에 와서 공연을 할 때 2시간을 방방 뛰며 같이 무대를 즐기면서 저 사람은 정말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경탄하게 되었다.

 

 

2집에는 슬픔에 관하여,라는 노래가 있다. 가사를 잘 보면 -미처 내가 깨닫지 못했던 또 하나의 널

내 안에 감추며 내 안에 채우며 어찌 살아갈런지

하지만 이해해줘 이미 난 다른 슬픔에 길들여져

널 잊을지도 모르니

 

 

지난 사랑을 잊는 것은 새로운 사랑의 행복함이기보다는 어쩌면 새로운 슬픔이 아닐런지. 그런 생각이 늘 팽배해 있었는데 ‘슬픔에 관하여’라는 노래는 그것에 대해서 도돌이표처럼 생각을 계속하게 한다. 그랬던 이승환 2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메탈리카의 메탈리카 이 앨범이 가장 사람들이 좋아하고, 가장 시끄럽고 강렬해서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고, 헤비메탈 중에서는 가장 대중적이면서 가장 마니아적인 앨범이 아닌가 싶다. 메탈리카의 메탈리카 앨범을 구입했을 때가 중학생 때인데 이 터질듯한 강력한 음악에 빠져서 교실 구석에서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가 없었던 중학생 시절. 선생님 몰래, 반장 몰래 창가 끝에 간들간들하게 붙어 세포가 분열되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후에는 메탈리카의 더 시끄러운 저스틱 포 올 그 앨범을 가장 많이 들었었다. 그 앨범은 레코드판으로 가지고 있는데 군대 갈 때 누군가에게 전부 맡겼는데 제대하고 나니 연락이 안 되었다. 그래서 100장 가까이 되는 레코드판은 물 건너 가버렸다.

 

메탈리카는 작년에 한국, 아니지 2017년에 내한 공연을 했다. 그때 오프닝 무대를 베비메탈이 했다. 그때 메탈리카의 인기를 더 눌렀다고 하면 거짓말 같지만 그랬다. 메탈의 신들은, 이 강렬하고 극강에 이르는 헤비메탈이 메이저에서 내려가지 않는 이유를 베비메탈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이제 메탈삼촌들이 되어 버린 록계의 신들은 베비메탈을 정말 아낀다. 메탈리카와 함께 한 사진은 한국 공연 때지 싶다.

 

메탈리카와 함께 한 사진만 있는 것이 아니다. 74년에 데뷔한 넘볼 수 없는 메탈계의 끝판왕인 키스 형님들도 베비메탈 앞에서는 한없이 삼촌스러워진다. 몰룬 주다수 프리스티의 롭 헬포트 형님도 그렇다.

 

영국 밴드인데 터질 듯 강한 메탈을 하는 밴드 브링 미 더 호라이즌과도 함께 했다. 브링 머 더 호라이즌은 인기가 정말 좋은데 이들이 하는 메탈을 두고 이모코어라고 부르는 이도 있고 포스트하드코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이런 ‘코어’가 붙는 펑크록은 어떻든 서태지가 거의 초기에 시작한 것 같다. 그때 림프 비즈킷이 하던 그런 강한 록 음악들.

 

그리고 곧 한국 상륙을 앞둔 건스 엔 로지스의 슬래쉬와도 함께 했다. 메탈리카의 원 멤버였다가 제임스와의 불화로 뛰쳐나가 메탈리카와 쌍벽을 이뤘던 메가데스의 머스테인과도 함께 했다.

 

전 세계에 아이다스 열풍을 일으켰던 콘의 조나단과도 함께 했다. 조나단은 하늘을 찌를 인기를 구사할 때 늘 아디다스 체육복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노래도 A.D.I.D.A.S가 있다. 체육복 아디다스와는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이 당시가 재미있었던 것은 아디다스 회장이 푸마 회장과 형제인데 둘의 사이가 정말 안 좋았다. 씹어먹을 정도로 서로를 경멸했는데 아디다스가 콘의 조나단 덕분에 매출이 세계적으로 뛰어올랐던 것이다. 한때 나이키를 넘볼 수준이 되었다. 푸마의 회장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느닷없이 패리스 힐튼이 깔 분홍 푸마의 체육복을 입고 온 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푸마가 아디다스를 앞지르기도 하고 그런 재미있는 시기가 있었다.

 

암튼 전 세계의 메탈 삼촌들이 베비메탈을 아끼고 있는데 87년에 결성된 메탈계의 거물, 화이트 좀비의 보컬 롭 좀비는 베비메탈에게 악플을 다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욕을 하고 다닌다. 야이 니 같은 그레이색이야 나이를 어쩌구 하면서. 이 정도면 메탈삼촌들이 베비메탈을 정말 아끼고 있는 것이다. 그랬던 베비메탈이 3인 체재에서 한 명이 탈퇴를 해서 메탈삼촌들의 마음이 심히 안타까울 것 같다.

 

메탈리카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정말 메탈리카가 아니었다면 메탈이 이렇게나 유행이 될 수 있었을까. 이 앨범에는 강렬하고 빠른 곡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언포기븐은 정말 처절하다. 처절의 끝을 보는 것 같다. 후에 더 언포기븐 2가 나왔을 때 팬들은 걱정이 많았는데 1만큼 좋았던 기억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떤 책에 따르면, 스파이더맨, 에릭 사티, 하루키, 존 레넌, 커트 코베인, 에밀리 디킨슨, 라이너 마이너 릴케, 헤르만 헤세, 카프카, 서태지의 공톰점은 다 외톨이라는 것이다. 서태지는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 어딘가에 틀어막혀 외톨이로 음악을 만들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이 나왔을 때 우리는 열광했었다
.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정말 최고였다. 가슴을 때리는 스피드 메탈이 백그라운드에 흘렀고 ‘매번 내 혼을 팔아버렸어’라는 가사는 마치 다자이 오사무의 글의 늪처럼 우리를 빨아들였다. 기존 대중가요에서는 전혀 들을 수 없었던 스피드한 헤비메탈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

우리가 왜 열광했냐 하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시나위 4집을 좋아했다. 머틀리 크루가 미국에 있다면 한국에는 시나위가 있었다. 기타에 신대철, 보컬에 김종서, 베이스에 정현철이었다. 정현철이 서태지였고 록 앤 롤, 헤비메탈, 펑키, 블루스 록에 미쳐 있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3집에서 잘하는 음악을 찾았고 잘하는 음악의 옷을 입은 것 같았다
.

앨범 첫 인트로가 심장을 두드렸다. 강렬하고 강하게 드럼을 두드리고 기타를 치며 앨범의 서막을 연다. 헤비메탈의 반주에 서태지와 아이들은 춤을 춘다. 이런 강한 록에 춤을 추며 대단한 인기를 얻는 밴드가 일본의 베비메탈이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서태지는 하여가 때 꽹과리 등 민속 악기와 함께 협연을 하여 대중가요를 만들었다. 한국적인 음악이 아닌 록에 한국 적인 음악의 옷을 입혀서 대중화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베비메탈의 ‘메기츠네’를 들어보면 무척 강하고 빠른 스피드 메탈인데 들으면 일본?이라는 느낌이 아주 강하다. 그런데 대중화를 시켰다
.

베비메탈의 2018년 노래 ‘스타라잇’에는 한 명이 탈퇴를 하고 이인 체재로 부르는 베비메탈의 노래인데 더 깊어진 메탈의 진수를 보여준다. 베비메탈이 음악을 발표하면 웃긴 현상은 전 세계의 언더에서 활동하는 메탈밴드들이 커버를 하여 전부 유튜브에 올린다는 것이다.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전 세계 팬들이 따라 부르는 영상을 올리는 것과는 좀 다른 점이라면 대체로 베비메탈의 음악을 커버치는 사람들은 활동하는 밴드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현상이 2013년부터 죽 있었다. 그건 서태지가 ‘아침의 눈’을 발표했을 때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밴드들이 서태지의 아침의 눈을 커버 쳐서 유튜브에 올린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왓 에버 유 고의 더 콜링도 서태지의 아침의 눈을 커버 쳐서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더 콜링 녀석들 음악 꽤 좋았는데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

3집에 본격적으로 안흥찬이 투입이 되어 서태지와 같이 메탈의 대중화를 알리기 시작한다. ‘널 지우려 해’의 후렴부에서는 본격적으로 목을 긁어서 그로울링으로 샤우팅을 한다. 아마 이때부터 몇 년 후의 울트라맨이야,의 앨범을 생각하거나 제작하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3집에서 서태지는 미성과 목을 긁는 창법을 오고가고 백 보컬에는 안흥찬의 악마의 소리가 약한 부분을 뒷 받침 해준다. 베비메탈을 심오하게 들어본 사람이라면 역시 아? 서태지가 했었던?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나만 그런가
.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를 하고 테이크 시리즈가 있는 서태지 1집을 내고 후에 서태지 2집을 발표했는데 정말 대중적과는 거리가 먼 고출력에 강하고 시끄러운 음악이었지만 대중은 서태지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가졌다. 정말 터져버릴 것 같은 사운드는 몸을 아코디언처럼 접었다 폈다 하기에 충분했다. 헤프라는 드러머의 박살 날 것 같은 드럼 연주와 중저음의 깊이가 큰 기타의 소리가 서태지의 목소리와 어울리는 것이 신기했다. 이 앨범을 내기 위해 얼마나 외톨이로 고독하게 연습을 했을까
.

특히 ‘탱크’는 세계를 잡고 있던 강한 록 그룹의 음악보다 더 강하고 쇼킹했다. 서태지는 korn의 조난단과 친분이 있었는데 조나단이 태지가 하는 거라면 나는 무조건 오케이야,라고 했다. 콘의 조나단이 누군가. 지구에서 가장 강한 록을 하던 음악을 씹어 먹을 듯했던 보컬이 아닌가. 탱크의 가사는 상당히 철학적이다. 바로 듣고 아하, 할 수는 없다, 동격화, 정신적 학대, 같은 단어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

이 강렬한 탱크라는 곡을 듣고 있으면, 그러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게도 히데의 ‘다우트’가 생각난다. 히데는 일본에서의 활동은 제약이 있다며 외국인 멤버 두 명과 함께 지르츠를 만들어 다우트를 불렀는데 그 속의 다우트는 생 날 것, 바로 피가 드러날 것만 같은 노래지만 스튜디오 버전은 또 다르다. 도대체 이런 음악을 90년대 초에 만들었다니. 정말 빠져들 수밖에 없다
.

일본은 음악이 강국이다. 70년대 초에 카펜터즈부터 풜 뭬콱틔뉘는 5번이나 공연을 했고 90년대 초에 지구에서 잘 나가는 메탈 밴드는 전부 일본에서 공연을 했다. 스키드 로우는 몇 번이나 공연을 했다. 록의 탄생지에서 록의 불모지 같은 일본으로 간 록스타들은 처음에는 우습게 봤겠지만 일본에 가서 보니 작은 사람인데 엄청난 록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곡을 직접 쓰고 편곡을 하고 기타를 들고 무대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노래까지 지치지 않고 한다. 무엇보다 무대를 씹어 삼킬 것 같은 압도적인 분위기에 외국 록 스타들이 놀라고 말았다. 어쩐지 히데 덕분인지 록 스타들도 일본을 우습게 보지 않게 되었다고 할까
.

이런 음악과 이런 퍼포먼스와 이런 스타일과 이런 스튜디오 작업이 90년대 초에 이루어졌다니 이게 믿어지는 일이냐고.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서태지가 등장하면 히데가 떠오른다. 이 글 첫 줄에 어떤 책에 따르면,라고 되어 있는데 거기에 히데도 들어가야 한다
.

누구보다 외톨이고 고독하고 고독해서 음악 밖에 할 수 없었던 히데는 그렇게 가버렸지만 이렇게 대중들의 가슴에는 깊게 파고 들어 있다. 서태지가 공연할 때 그런 말을 종종 했다. 대중문화를 사랑하는 여러분이 예술가라고. 톨스토이의 글은 당연하지만 좋다, 위대하고 높고 거창하고. 그렇지만 우리가 톨스토이의 글보다 도스토옙스키의 글을 더 좋아하는 것에 이유는 분명하게 있다
.

읽기 쉽고, 듣기 편하고, 기분 좋게 그린 그림이 바로 외톨이로 고독을 깎아서 만들어낸 창조물이라는 것을 대중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대중은 이미 그것을 흡수할 스펀지가 되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썼고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통해서 삶과 죽음을 고찰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를 사촌 동생이라 하기도 하며 감독으로 영화도 두 편이나 찍고 죽기 전까지도 굉장히 멋에 신경을 썼다.

 

그 덕분인지 24살인지 23살인지 어린 진 세버그를 아내로 맞이했다. 진 세버그가 반할 정도니 로맹 가리도 괴짜에 참 멋있는 사람이었다. 진 세버그는 아름답고 당시에 있을 수 없는 여성상을 지니고 있는 배우였는데 진 세버그는 박애주의자였다. 그것도 심각하고 지독한 박애주의가 진세버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로맹 가리와 결혼을 하고서도 집에 거지들을 가득 불러 같이 살았다. 로맹 가리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진 세버그가 자살로 죽고 몇 해 뒤에 로맹가리도 자살을 했다. 진 세버그는 50년대 말, 60년대 초 영화계를 누벨바그로 해체시켜 버린 장본인 중에 한 명이었다.

 

영화 속에서 또 하나의 해체가 있었는데 그것이 85년도 아메리칸 지골로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리치드 기어로 신인 시절이었다. 때마침 영화 의상을 맡고 있던 신입 디자이너였던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리차드 기어의 영화 의상을 담당하면서 영화를 보기 위해 집에서 빵만 구워대던 미국의 여자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의상을 입은 리차드 기어는 옷을 입었는데 섹시함이 줄줄 흐르는 기현상이 영화 속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정장은 양복으로 불리며 고리터분하고 권위주의적 남성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리치드 기어가 나타남으로 해서 수트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고 영화 속 리차드 기어는 그야말로 모델의 일상을 훔쳐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프랑스에 진 세버그(미국 출생이지만)가 있었다면 미국에도 머리가 숏 컷으로 해체주의적인, 앤디 워홀의 뮤즈었던 에디 세즈윅이 있었다. 당시 여성들이 경멸했던 아주 짧은 숏컷에 굉장히 크고 무거운 귀걸이와 눈 주위를 가득 매운 눈 화장, 검은 망사 스타킹의 에디 세즈윅은 엔디 워홀과 함께 펙토리에서 기존 예술을 뒤집는 작업을 많이 했다. 에디 세즈윅은 보브 딜런과 잠시 만나기도 했지만 역시 짧은 생을 살다 마감하고 만다. 에디 세즈윅을 연기한 시에나 밀러 주연의 팩토리 걸이 있으니 보면 재미있다.

 

에디 세즈윅의 이 스타일은 에디 세즈윅이 죽었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에디를 그대로 벤치마킹한 사람이 일본의 나무로 아미에였다. 아미에 나무론가? 아미에 나무로는 노래도 잘 불러 에디 세즈윅이 정말 다시 되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그간 들게 했다. 그리고 바로 이효리가 에디와 아무로를 벤치마킹해서 그들의 스타일을 이효리 만의 독자적인 모습으로 잘 기획했었다. 그럼 트위기는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트위기는 아직 살아있고 궁금하면 검색해보자.

 

에디 세즈윅은 샤넬이나 각종 런 어웨이에서 아직도 스타일을 살려서 무대를 장식하고 있다. 에디의 연인 앤디 워홀이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잘 아는 팝아트의 창시자이자 영화배우, 사진작가, 음반 제작자 등 니코의 벨벗 언더그라운드의 그 앨범 표지, 바나나 하나로 넘어설 수 없는 앨범표지를 만들어버린 사람이었다. 물론 그 바나나는 앤디 워홀식으로 여러 다양한 의미가 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 루 리드 등 모두가 앤디 워홀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앤디 워홀의 친구가 누구냐면 백남준이다. 백남준이 70년대 초 한국 땅에서 예술, 초현실 예술을 하려고 하니 머리 길면 잘라버리지,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를 하지, 열받아서 독일로 가버린다. 독일에서 백남준은 플록서스라는, 그러니까 뭐랄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문화새마을운동 같은 것을 일으켜서 독일 예술계를 해체시켜 버린다. 발칵 뒤집어놓은 거지. 플록서스가 뭐냐? 나도 잘 모르지만 행위나 퍼포먼스로 금기나 기존의 틀에 충격을 주는 예술을 통틀어 말한다. 전위예술 가끔 멍하게 보면 재미있고 괜찮다. 부수고 던지고 고함치고 소리 지르고, 가끔 우리도 일상에서 그럴 때가 있지 않나.

 

나는 어쩌다 백남준의 아트전에 빠지게 되어 몇 년을 많이도 가서 봤었다. 70년대 백남준과 독일에서 같이 플럭서스를 활동한 예술가가 오노 요코였다. 당연히 존 레넌과 결혼한 오노 요코 덕분에 존 레넌과 예술적 친구가 된 백남준은 존과 친구인 앤디 워홀과도 함께 모두가 예술적 경계를 허물어트리며 친구가 된다.

 

정말 멋진 일이다. 이렇게 세계적인 해체주의 작가들은 서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 끈으로 애당초 연결되어있다가 후에 서로 친구가 된다. 백남준이 죽었을 때 뉴욕에서 장례식을 했는데 사회를 오노 오코가 봤다. 이 장례식이 얼마나 멋지냐면 관속에 편안하게 누워있는 백남준의 배 위에 장례식 장에 모인 전 세계 예술가들에게 매고 있는 넥타이를 가위로 잘라서 올려 달라고 오노 요코가 말을 하고 모두가 그렇게 한다.

 

존 레넌이 아직 비틀스 시절 오노 요코 덕분에 일본에 멤버들과 온 참 재미있는 긴 일화가 있는데 로맹 가리의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버렸다. 발렌시아가의 이야기도 있는데.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어봐야 하는데. 내년에는 읽으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