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일찍 나와 버려 카페가 문을 열기 전에 바닷가에 앉아서 책을 좀 읽었다. '19세기의 정치가 21세기의 우주과학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인문학 책을 읽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소설을 좀 읽었다

.

 

카페가 문을 열기 전 발코니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으니 눈물이 나올 만큼 날이 따뜻하고 좋아서 그만 조부렀다. 조불다는 졸다의 방언이다. 조부렀다는 졸았다의 방언이 되겠다. 책을 땅에 떨어트려가며 고개를 병든 닭처럼 까닥거리며 잘도 조부렀다. 마치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

 

드뷔시의 음악은 뭔가 밑으로 푸욱 꺼져 내려가는 기분을 들게 한다. 물의 반영도 그렇고 아라베스크도 그렇고, 멍하게 듣고 있으면 천공의 성 라퓨타로 가는 느낌. 릴리슈슈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음악도 아라베스크였고, 내내 깊고 깊은 곳으로 한없이 꺼져가는 느낌

.

 

미 비포 유에서 루가 윌이 데리고 간 연주회에서 접하지 못했던 선율에 마음과 영혼을 몽땅 빼앗겨 버리는 장면에서도 클래식의 선율이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멸망케하고 부활시키곤 한다

.

 

나에게는 대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친구가 있는데, 그녀가 퀼른 음대 시절 간간이 한국에 오면 그녀의 연주를 들었다. 그것은 대단히 경이로운 것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들어보면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울보로 새벽이면 전화가 와서 독일에서의 언어장벽과 생존을 위해 공부와 생활을 해야 하는 것과 피아노를 손톱이 빠져라 두드리는 것과 무엇보다 외로움에 대해서 수화기 너머로 늘어놓곤 했다. 생각해보면 졸음 때문에 제대로 들어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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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편력이 심한 드뷔시는 몇 년을 같이 산 여자 몰래 바람을 피우다 들켜 여자가 권총으로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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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졸고 있으니 마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이 떠올랐다. 말라메르의 ‘목신의 오후’에서 영감을 받아서 만든 곡이다. 목신이라는 것은 기예르모 델토르 감독의 ‘판[포느]의 미로’에 나오는 판이 목신이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목신은 얼굴과 몸통은 사람의 형상인데 밑으로는 다르게 생겨먹은 것이 목신, 판이다. 드뷔시의 오후에의 전주곡의 내용은 이렇다

.

 

포느는 여름의 나른한 오후에 시칠리아 섬 해변의 숲속 그늘에서 졸고 있었다. 

그때 포느는 졸음이 쏟아지는 눈으로 목욕을 하는 요정을 발견한다. 

포느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도 할 수 없고 현실과 이계의 임계점에서 가물거리는 눈으로 요정에게 손을 뻗어 본다.

달콤한과 나른함.

고통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요정의 이 감촉.

포느는 모호하고 뿌옇게 보이는 요정을 껴안는다.

요정은 비너스요, 관능의 상징이다.

포느의 입은 벌어지고 황홀경에 접어들려는 찰나.

요정은 없어지고 포느는 짊어지고 있던 권태가 엄습해 온다.

포느는 다시 여름날의 오후에 고요함 속으로 빠지려 풀밭에서 잠이 든다

.

 

드뷔시는 포느가 풀밭에 졸다 깨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광경이 떠오르게 작곡했다. 전주곡에서 들리는 플루트의 소리는 목신의 움직임을 잘 나타낸다

.

 

요정을 끌어안았을 때 느껴지는 관능의 기분 좋음이 피어오르다가 그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힘겨운 졸음으로 이어지는 연주가 펼쳐진다. 눈을 떠 보니 직원이 늘 마시던 걸로,라며 텀블러를 들고 가 커피를 담아줬다. 나른한 11일월의 오전. 정신을 차려보니 말도 잘 못하던 울보 그녀는 외로움을 극복하고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수십 명의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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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김승옥의 무진기행. 김수용 감독의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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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진은 그런 곳이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는 입김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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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는 여귀라는 말 대신 마녀라고 했다. 김승옥의 안개 이후 그 어떤 소설가도 안개를 이렇게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다
.

2.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 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그런 곳이 무진이었다
.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 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 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어 하고 조용히 잠든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

제약회사에서 이름뿐인 전무인 윤희중이 상상하는 약은 그런 것이다. 자신의 힘없음과 무지와 그것을 알려주는 문장이 이어진다. 윤은 사실 시골에서 상경하여 성공의 가도에 올라있는 모든 이들을 대변하고 있다. 그 말은 60년대의 윤은 작금의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은 것, 그건 상쾌한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윤희중이라는 이름 대신 윤기중으로 나온다
.

3. 골방 안에서의 공상과 불면을 쫓아 보려고 행했던 수음과 곧잘 편도선을 붓게 하던 독한 담배꽁초와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던 초조함 따위거나 그것들에 관련된 어떤 행위들이었었다
.

윤은 무진에서의 처지가 그랬다. 무진은 그를 책임과 무책임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처지의 인간으로 만들었다. 어머니와 친구들이 죽어가는 전장의 사이에서 윤은 고뇌에 휩싸여 그저 할 수 있는 건 담배를 피고 수음을 하는 것뿐. 이런 무진에서 빨리 벗어나고픈 윤이었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간다. 과거의 윤과 현재의 윤이 무진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보내고 있는지 보여준다
.

4. 오늘 이른 아침, 광주에서 기차를 내려서 역구내를 빠져나올 때 내가 본 한 미친 여자가 그 어두운 기억들을 홱 잡아 끌어당겨서 내 앞에 던져 주었다. 그 미친 여자는 나일론의 치마저고리를 맵시 있게 입고 있었고 팔에는 시절에 맞추어 고른 듯했다. 그 여자가 미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쉬임없이 굴리고 있는 눈동자와 그 여자를 에워싸고 서서 선하품을 하며 그 여자를 놀려 대고 있는 구두닦이 아이들 때문이었다
.

5. 6. 결혼하셨다구요. 자넨? 전 아직, 참 좋은 데로 장가드셨다고들 하더군요.
형님하고 형님 동기 중에서 조 형하고요. 조라니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애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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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조’가 영화에는 조한수로 나온다. 두 사람은 세무서장이 된 조의 집으로 간다. 거기서 하인숙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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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하인숙, 얼굴은 노리기리했다. 병약한 느낌을 주고 있었지만 그러나 좀 높은 콧날과 두꺼운 입술이 병약하다는 인상을 버리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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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하인숙을 연기한 배우는 윤정희다. 아주 어린 모습의 윤정희로 당시로는 볼 수 없는 예쁜 얼굴의 배우였다. 무진기행은 3번 영화가 되었다. 67년도에, 76년도, 87년도에 한 번씩 만들어졌다. 윤정희는 두 번 하인숙으로 열연했다
.

8. 김승옥의 유머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하 선생의 좋은 점과 하 선생의 나쁜 점을 말하며 모두가 푸하하하며 웃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노래 한 곡을 부르게 한다. 윤희중, 극중 윤기중이 하 선생의 노래를 듣고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트로트도 아닌 가극도 아닌 것처럼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대사에서 잘 와닿지 않는다면 영화를 보면 윤정희가 노래를 그렇게 소설의 문체를 그대로 연기를 하고 있다
.

9. 윤과 하 선생이 밤의 무진을 걸어가면서 대화를 하는 장면이다. 여기서도 김승옥의 유머가 나온다. 소설과 다른 점이 있는데 하 선생이 무진은 밤에 아름다운 곳이라고 할 때
윤은 다행이라고 한다. 왜 다행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고 하 선생이 말하니 윤은 왜 그런 것이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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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멋이 없는 고장이니까요. 제 대답이 맞았나요?라고 하 선생이 말하니 소설에서는 윤이 거의라고 하지만 영화에서는 80점이라고 하고, 어머 100점이 아니구요?라고 하 선생이 말하니, 윤이 백 점짜리 대답은 이런 것입니다. 아이구 여기도 지구의 일부분입니까,라고 한다. 이런 부분은 김승옥의 위트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왜 김승옥이라고 하냐면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도 김승옥이 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허인숙과 윤희중의 유명한 대사 개구리울음소리를 하늘에 뜬 수많은 별에 빗대어 하는 대사들이 죽 이어진다. 대사지만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정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멋진 문체가 죽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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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 걸레로 닦아 내면 될 방의 어느 곳에 털어 버리는 담뱃재는 마치 윤희중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소설은 3장 ‘바다로 뻗은 긴 죽방’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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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 필사를 해 본 무진기행, 무진기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반나절을 주절주절해도 모자랄 것 같다. 만약 김승옥이 절필을 하지 않고 김수용 감독이 계속 김승옥의 영화를 만들어 냈다면 어땠을까
.

무진기행이 나오고 3년 뒤 영화로 나온 ‘안개’다. 김수용 감독은 문예 감독으로 김수용 감독 이전에는 대체로 일본 문학이나 일본 영화, 또는 프랑스 영화를 한국식으로 바꾼 영화들뿐이었다. 맨발의 청춘도 그랬다. 60년대는 한국의 영화 르네상스였기에 흑백영화지만 보면 대체로 재미있다
.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학창시절 사진부를 하면서 한국 흑백영화를 많이 본 편이었다. 오발탄부터 최은희의 상록수, 이조 여인 잔혹사(이 영화에는 김지미, 윤정희, 남정임, 황정순이 다 나옴)까지, 그럴 때마다 나는 늘 특이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따지고 보면 그래픽이 없기에 구성이 탄탄하고 배우들이 귀신이 들린 듯 연기를 한다. 그래서 오래된 영화지만 재미있다
.

김수용 감독은 문예영화의 거장으로 이광수의 소설 ‘유정’부터 김동리의 소설, 현진건의 소설까지, 많은 한국 문학의 문체를 영화적인 문채로 옮겨다 놓은 정말 멋진 감독이다. 문예영화다 보니까 소설을 헤치지 않고 소설의 대사가 거의 대부분 영화에 쓰이고 있다. 마치 빨강 머리 앤의 소설과 만화의 대사가 거의 똑같듯이
.

이 영화의 재미있는 일화는 시나리오를 김승옥이 직접 썼는데 그때 김수용 감독이 김승옥에게 붙어서 제발 어렵게 쓰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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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용 감독 역시 20년대 생으로 2000년의 영화를 마지막으로 활동이 없다. 무진기행의 신성일도 어제 삶이 끝났고 김수용 감독도 이제 지난날보다 남은 날이 짧을 것이다. 그리고 김승옥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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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이 등장했을 때 모국어의 폭발로 그야말로 문학계에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누나 작가들에게 끌려가서 엄청 귀여움을 받았다고 해요. 박경리 같은 선배 누나들은 김승옥이 그렇게 좋았나 봅니다. 막 목에 팔을 걸고(까지는 아니겠지만) 끌고 가서 술을 마시고. 하지만 남자 작가들에게는 벼락과 같은 일이었어요. 김훈,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 역시 경향신문 문화부 편집국장까지 했는데 1대 문인이지 않습니까. 그 당시 꼬꼬마 김훈에게 주전자에 술을 받아오라 시켜서 매일 밤마다 문인들을 모아 놓고 했던 이야기가 김승옥이라는 괴물의 글을 읽어 봤냐? 이제 우리의 밥줄은 다 끊겼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광주민주화항쟁의 충격으로 절필을 선언했을 때 이어령 박사가 붙잡아서 호텔에 던져 놓고 글을 계속 쓰게 했는데 그때 쓴 소설이 ‘서울의 달빛’이었는데 그걸 죽, 끝까지 썼다면 서울의 달빛0장에서 1장, 2장, 3장으로 이어졌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만 다 던져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서울의 달빛0장만 탄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풍이 와서 몸이 좋지 않은데 그래도 가끔 인터넷을 보면 할아버지 김승옥을 보러 많은 젊은이들이 가기도 하고 잘 만나주기도 한다고 해요. 이만희 감독 영화는 여로도 본 것 같고, 만추도 보고 삼포가는길도 봤는데 기억은 가물가물해요 모두. 삼포가는 길에 설원이 나오는 것 같은데 설원이 펼쳐지면 늘 젊은날의 초상에서 영훈이 역을 했던 정보석이 배종옥이 있던 술집으로 가기 전의 설원을 덜덜 떨며 걷던 장면이 오버랩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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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비포 유, 영화도 있고 책도 있는데 저는 아직 영화는 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앞으로 가까운 미래까지는 안 보려고 해요. 책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한 번 읽어 보세요. 마치 마음 속에 아직 아이로 남아있으려고 하는 부분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미 비포유를 읽으며 며칠 동안 매일 자정이 넘으면 내가 주인공 루가 되어서 윌을 만나는 기분이 들었어요.


말미에 루가 스쿠버다이빙을 바다에서 하면서 원색에 곱절은 더 다양한 아득한 풍경을 보듯, 미지의 생물들이 햇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먼 곳의 형체들을 보듯 미 비 포유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겁이 날 만큼 슬프게 글을 적은 작가도 멋지지만, 이 글을 읽기 쉽게 번역한 김선형 번역가에게 박수를 치고 싶어요.

어쩌면 작가와 번역가는 머리를 맞대고 작정하고, 우리 한 번 사람들 가슴 속에 있는 눈물을 한 번 다 뽑아내보자,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으며 예전처럼 눈물을 쏟아내지 않는 거 같아, 어때? 좋아 그럼 해보자. 라는 식으로 아주 마음먹고 책을 출판해 버린 것 같습니다.

특히 한국적인 단어를 많이 집어넣어서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한국 사람들이 루의 감정에 더 다가가서 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괴한 외모에 아니꼬움을 그대로 입 밖으로 뱉어내며 루의 성질과 인내의 한계와 자존심을 건드리는 윌에게서 어느 날 루는 세상과 몇 걸음 떨어져 살아가는 공허한 표정을 읽어냅니다.


우리는 글을 읽으며 덤벙대고 감정에 충실하고 모든 일들이 비밀 없이 마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모든 것을 트리나와 함께 공유하는 루에 이입됩니다.


트리나와 '방' 때문에 다툼을 벌이지만 결국 루는 동생 트리나의 어깨에 기대고 어깨를 내밀어 줄 수 있는 단 한사람이 트리나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트리나는 '병신'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어린 토마스를 낳았을 때 이미 어른이 되었습니다.

꼭 깔때기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기분이야. (트리나가) 새로 태어난 생명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온 세상이 쪼그라들어서 나와 저 아이만 남은 것 같아. 라고 말한 트리나는 동생이지만, 루가 어려움을 토해낼 수 있는 어른으로의 동생이 이미 되었어요.

 

루는 네이선(사지마비인 윌을 돌봐주는)과 함께 윌을 데리고 경마장을 갔다가 식겁을 하는데요.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 이 땅이 너무나 미웠고 마치 외계인을 쳐다보듯 하는 사람들의 경멸 섞인 눈빛에 분노마저 느낍니다.

왜? 그게 루의 모습이니까.

우리는 서서히 루의 감정에 이입이 되기 시작해요.

진흙에 빠진 윌의 휠체어를 들어 올리다가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어 버리고 결국 술이 취한(루에게 저질 추파를 던지는) 일행에게 가서 거짓말을 술술 하며 휠체어를 건져내 자동차까지 운반하게 하며, 절차 때문에 윌이 들어가지 못하는 레스토랑의 입구에서 대역죄인 같은 머리와 몰골로 직원에게 분노하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서 우리는 점점 루가 되어 갑니다.

처음은 윌에게서 벗어나 집으로 빨리 가고 싶었지만 서서히 윌에게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우리는 그런 루의 모습에 응원을 하게 됩니다.

루는 윌의 직선적이고 딱딱한 말투와 농담에 비슷하게 받아치면서 어떻든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됩니다.

 

주어진 시간 6개월. 윌의 마음을 돌려 놓기 위한 빠듯한 시간.

어느 날은 윌의 고통이 하늘의 별처럼 점철 되었습니다.

윌의 턱에 노끈 같은 근육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고, 고통으로 잠 못 이룬 숱한 밤을 말해주는 자줏빛 그늘을 윌의 얼굴에서 보았고 소리 없는 통증을 증언하는 미간의 주름을 보았어요.

 

그리고 루는 윌의 맨살에서 나는 따뜻하고 달콤한 향기를 맡습니다.

오직 윌에게서만 나는 독특한 그 무엇, 차분하면서도 값비싼 향기. 

 

윌과 함께 난생처음으로 세상의 잘난 사람들이 가는 연주회를 가게 됩니다.

루는 자신과 동떨어지게만 생각했던 연주회에서 들리는 음악의 여운이 감동을 넘어선다는 것을 느꼈고 돌아와서도 그게 희미해질까 아쉬웠습니다.

윌은 루에게 잠시 옆에 있어달라고 해요.

그저…….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데리고 콘서트에 다녀온 남자로 있고 싶다면서.

그리고 온갖 방법을 이용해 윌의 컴퓨터에 윌이 이메일을 쓸 수 있게 했는데 윌에게서 이메일이 들어옵니다.

 

친애하는 클라크.

이건 내가 구제불능으로 이기적인 머저리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거요. 그리고 당신의 노고를 높이 평가는 바요. 고마워요. 윌. 

 

루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오는 느껴요.

그리고 루는 윌과 함께 여러 가지를 나누고 대화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웃습니다.

드디어 루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 윌과 함께 친구의 결혼식에서 춤을 추게 됩니다.

그 장면은 눈에 선하게 그려지며 입가가 올라가요.

아름다운 장면이었거든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던 윌이 루에게, 가끔은 말이에요, 클라크. 이 세상에서 나로 하여금 아침에 눈을 뜨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건 오로지 당신밖에 없다는 거. 

 

루는 자신의 세상과 동떨어진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나오면서 닥치는 대로 챙겨온 공짜 샴푸, 컨디셔너, 미니 바느질 키트와 샤워 캡 등등이 끝도 없이 나오는 장면에서 루는 정말 사랑스러운 모습입니다.

단지 본인이 너무 모르고 있었어요.

 

루는 자신의 역량을 넘긴 일들을 해가면서 윌과의 여행을 준비했고 결국 목적지로 갑니다.

거기 정말 우리가 와 있었다. 내가 해냈다. 라는 대사에서 나까지 뿌듯했습니다.

윌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자신이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는 착한 아가씨 루.

윌의 피부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간 태양의 냄새를 맡았던 루.

마지막 루와 윌은 어떻게 될까. 

 

책을 읽으며 두 사람의 감정에 이입되기도 했지만 장애인에 대해서 특히 사지마비환자에 대해서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어요.

선진국이라고 하는 영국과 프랑스역시 휠체어는 아직 대중의 관심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무엇보다 스위스에 있는 디그니타스병원(합법적으로 죽기를 도와주는-근래에 우리나라에도 생존연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죠)에 대해서 알아 볼 수 있었고 60개국의 나라에 5500명의 회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삶의 끝에 대해서 매일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지니는 괴리감과 고통에 대해서 잘 서술해 놓아서 더 마음이 덤덤했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 윌을 바라보는 루의 장면에서는 올리비아의 노래 winter sleep이 너무 어울렸어요. 파리하게 잠들어 있는 윌을 촉촉한 눈으로 바라보는 루의 얼굴에 윈터 슬립이 내려 앉습니다. 한 번 들어 보세요.

며칠동안 자정이 되면 완전히 아이로 돌아가 있었어요. 영화는 아직 못 봤지만 영화도 보시고 책으로 먼저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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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깅을 하는데 달리는 코스에 사람들이 부쩍 줄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에고고 하며 추위에 나올 엄두를 못 내는 것 같다. 아직 시월인데. 작년 이맘때와 다른 점은 작년에 늘 보이던 길고양이 양추 녀석의 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고, 비슷한 점은 추워진 정경의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휘잉 몰아치면 책장을 넘기듯 강변의 물결이 숨을 쉬고 그 위에 떠 있는 오리들이 오선지의 음표처럼 물결치는 모습은 작년 이맘때와 흡사하다. 역시 그 흐름을 눈으로, 촉감으로 느끼고 있으면 실감이라는 것에 부쩍 다가선다

.

 

조깅을 하고 맥주를 사들고 야심하게 안주해서 먹으려고 도시락을 싸왔다. 멍게만큼 좋아하는 게 고추 된장무침인데(참 저렴한 입맛이다, 나는 남들이 사랑하는 고기는 잘 먹지 않는 것 같다) 고추 된장무침이 맛있으려면 된장이 맛있으면 된다. 된장은 불영계곡에 있는 외가에서 공수해온 것인데 이제 먹던 게 떨어지면 끝이다. 고추는 썩 맛이 없어도 된다

.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가 된다. 치즈를 이렇게 잘라서 같이 먹으면 위장에 불을 지르는 고추의 힘을 치즈가 오냐오냐하며 덮어준다. 걸어온 길이 다른 두 가지의 맛이 음,,, 조화를 이룬다. 이자나이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오물오물 씹고 있으면 괜찮지 않은가. 히히호호 고추의 이 매운맛과 마음을 평정시키는 된장의 맛이 치즈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이 활력. 이때 맥주를 한 모금. 오오 히레히레호호

.

 

나의 직감을 넘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맛이,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미묘한 맛이, 멍게에 뒤지지 않는 맛이 나를 미지의 세계로 이끄는구나. 이때 계란 프라이를 한 입. 이것이 오늘의 MVP구나. 우호.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이야 맛있게 먹어 버렸다-고로가 되었던 시간

.

 

겨울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모든 것을 차갑게 만들고 시리게 하는 마력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몸을 웅크리고 추위를 피해 몸을 말고 있는 모습은 겨울이 아닌 계절에는 볼 수 없기에 겨울에는 더 따뜻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곧 겨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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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슈슈의 모든 것

.

 

아름답게만 보이는 오키나와. 푸른 산호와 활짝 핀 꽃들과 거대한 수풀과 멋진 모양의 나무들이 장관을 이룬 오키나와. 하지만 그건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오키나와일 뿐이다

.

 

산호는 자기가 살기 위해 촉수를 뻗어 옆의 산호를 죽인다. 잘 알겠지만 트러플 역시 주위를 다 죽여가며 양분을 빨아들인다. 오키나와의 어떤 나무는 다른 나무를 휘감아 죽이고 그 자리에 자신이 살아간다. 식물의 잎이 화려할수록, 컬러가 알록달록할수록 그들은 극한으로 몰려 자기방어의 최후 수단인 형형색색으로 표현한다. 꽃이 예뻐 보이는 건 인간의 눈에나 그렇지 그 속에 살고 있는 것들은 실은 지옥인 것이다

.

. “우리에겐 낙원처럼 보여도 자연 속 생물들에겐 지옥일지도 몰라, 자연이란 그런 거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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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보이는 일상이지만 그 속에서 지옥 같은 매일을 보내는 아이들의 이야기, 하루를 견디기 위해 하루를 죽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빛과 같은 하나의 희망은 오직 릴리슈슈의 음악뿐이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 이 영화는 잔인함에 입각한 잔인하고도 잔인한, 더없이 잔인한 영화다

단짝이었던 친구를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자위행위를 시키는 잔인함. 같은 여자아이의 발가벗긴 사진을 미끼로 원조교제를 시키는 잔인함. 원조교제를 하면서 어른의 지갑을 훔치는 잔인함. 하늘을 날고 싶어 그대로 자살을 해버리는 잔인함. 자식을 버리는 잔인함. 같은 반 친구를 강간하는 잔인함. 자신의 머리를 밀어버리는 잔인함. 오키나와에서 교통사고를 내고도 잘못을 돌리는 잔인함. 살아가는 이유인 릴리슈슈의 음악 앞에서 친구를 찌르는 잔인함.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잔인함으로 덮여있다. 그 잔인함이 무척 견고하고 단단하여 영화를 보다 보면 그 잔인함이 인간 만이 낼 수 있는 것이라 무섭고 서늘하기만 하다

잔인함이란 인간만이 낼 수 있고, 그 잔인함은 호기심에서 발현했을 수 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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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근래 우리나라 영화 ‘박화영’처럼 아이들이 나오는 아이들 영화인데 아이들이 볼 수 없는 영화다. 영화 속 아이들은 절망과 희망을 손바닥과 손등처럼 같이 지니고 다닌다.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희망의 희미한 줄기의 릴리슈슈의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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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호흡. 우주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존재해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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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가 되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소설을 적고 싶다,라고 하면 평범한 삶을 택해라, 평범하게 살아라, 그게 너에게 도움이 된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평범하게 사는 건 쉬운가. 평범하게 살면 지옥에서 벗어날까. 평범하다는 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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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이 되고, 대기업에 들어가서 진급하면서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 속도 실은 지옥일 텐데. 뉴스를 장식하는 사건 사고의 대부분은 평범하게 보였던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인데. 평범이라는 것이 깨져 버리면 이어 붙이는 건 어렵다.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마도 죽을힘을 다해 그 평범함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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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이라는 방어막을 앞세워 어른이 뭔데 아이들의 꿈을 다 막으려 할까. 치유를 받고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돈과 굴종시키는 것과 무사유여야만 한다는 생각. 평범하게 사는 것, 안전한 직장을 얻는 것, 무난한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을 강요한다면 그것이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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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아이들.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에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는 도망칠 수 없다’ 그건 소설 속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도망 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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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매일 조금씩 읽고 음악을 듣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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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영화는 잔인하게 흘러 잔인하게 끝난다. 잔인한 음악만을 남겨둔 채 스스로에게 잔인하기만 했던 아이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잔상에 남는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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