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보위처럼 되고 싶은 적이 있었지ㅋ

 

하지만 지구에 불시착해서 잠시 인간이 되어 살다 간 데이빗 보위처럼 되는 건 나 따위가 생각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진작업을 할 때 주위에서 한 소리 꽤나 들었다. 돌아이새끼.


오늘은 조깅을 하면서 스페이스 오디티를 들었다. 오늘 밤 7.5도. 포근하다. 마지막 조깅 코스에 오르막길이라 땀이 뻘뻘 났다.


그때 자기네 별로 돌아간 데이빗 보위가 먼저 가 있던 프레디 머큐리를 만나는 모습을 보았다.


이봐 프레디, 그동안 잘 지냈나.라고 보위가 말했다.

 

그렇다네 데이빗, 자넨 잠시 있겠다고 하더니 그렇게도 오래 있다가 왔군. 그곳 생활이 마음에 들었나 보네, 인간의 모습으로 잘 지내는 것 같았어.라고 프레디가 말했다.


프레디, 인간들은 꽤 재미있게 지내고 있어, 금방 변질될 결혼생활에 책임감이라는 방부제를 뿌려 쉽게 변색되지 않게 하기도 해, 하지만 인간들은 말이야 사랑이라는 묘한 감정으로 서로에게 어떤 힘 같은 것을 불어넣어주더군, 그 힘이라는 게 위로 같은 거야.라고 보위가 말했다.


데이빗, 인간들이란 바보스럽긴 해도 사랑스러운 생명체라네.라고 프레디가 말했다.


그들은 내가 만든 노래를 좋아해 주었어, 프레디 자네의 노래처럼 말이야, 내가 지구인이 아니란 걸 모르는 것 같았어.라고 말하며 보위가 웃었다.


데이빗, 아마도 그들 모두는 알고 있었을 거야, 그들은 자네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인 거지, 저길 보라구 ‘당신을 통해 우리는 고양되는 존재’ 자네가 지구인이 아니지만 저들은 아직도 자네를 지구인과 똑같이 추모를 하고 있어.라고 프레디가 말했다.



David Bowie - Space Oddity https://youtu.be/L-7EROynApU?si=jeSgiq85aba4JX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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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를 다시 봤다. 패왕별희는 다시 보기가 참 힘들다. 보다 보면 도즈의 감정에 휩쓸려가기 때문이고, 도즈의 모습이 장국영의 모습 같아서 보기가 참 힘이 든다.

나는 장국영의 영화보다 노래를 먼저 들었다. 그래서 앨범이 몇 장 있다. 요즘도 장국영의 노래를 들으며 출퇴근을 한다. 내 차에는 아직 카세트 플레이어가 붙어 있고 수동기어라서 장국영의 노래와 잘 어울린다.

학창 시절에도 장국영의 노래를 헤드셋으로 들으며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 집으로 왔다. 그 앨범을 지금도 듣고 있다. 장국영의 가유희사를 보며 언제나 장국영은 이런 모습으로 죽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한국을 꽤 찾았던 장국영은 손바닥에 한글을 적어 이선희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이소라의 프러포즈에도 나와서 나왔다. 그때 같이 찍은 사진을 이소라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재키림과 티키타카하는 재미를 보여주었고, 투유를 불러 우리에게 초콜릿을 좋아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 패왕별희를 보면 너무나 아프다.

인간의 체온이 따뜻하다고, 사람의 온도가 온화하다는 걸 시토에게서 도즈는 느낀다. 데이와 우희의 삶을 갈라놓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도즈는 결국 꿈과 현실의 경계를 없애려 한다.

경극 분장이 짙어질수록 도즈의 삶은 가려지고 우희의 삶으로 환생하는 도즈. 이는 영화와 아티스트 속으로 들어갈수록 비애의 장국영보다 팬들이 기다리는 예술가로 환생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우희로의 삶은 패왕의 온도를 느끼는 일생이라 영원히 우희로서 살아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던 도즈는 그야말로 장국영의 모습처럼 아프게만 보였다.

변혁과 전통의 경계도 사라지면서 두려운 병처럼 퍼지는 집단적 사고의 사람들. 그러나 정작 무서운 건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

나라를 침략한 자들이 아니라 침략당한 자들 속에 껴 있던 선동하는 자들에 좌지우지되는 무지의 인간들이 바로 괴물의 모습이었다.

도즈는 우희로 살기 위해 미쳐가고 그런 도즈를 보는 우리는 도즈의 감정에 휩쓸려 가는 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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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이었다. 여기 울산은 박사모의 힘이 막강한 곳이다. TK PK 못지않는, 아니 어쩌면 그 보다 더 한 보수세력이 판을 치는 지역이다.


매주 나가서 받은 새누리당 해체, 박근혜 퇴진 팜플랫을 일하는 곳의 문에 매주 하나씩 붙였다.


문을 가득 채웠을 때 매일 다른 박사모 할머니들이 와서 쌍욕을 박고 갔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는데 주위에서 너무 무서워했다.


문에 붙여 놓은 새누리당 해체, 박근혜 퇴진 팜플랫을 떼어 낼 때 자존심이 상해서 짜증이 났다. 그러나 결국 박근혜는 탄핵이 되었다.

그때 울산 롯데백화점 광장에서 대학생들은 돈을 모아 구입한 크림빵을 어린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촛농이 종이컵 밑으로 흘러내리면 옆의 모르는 사람이 물티슈를 건네주었다.


자유발언대에 오른 고등학생은 국정화 교과서에 대해서 울분을 토했고,


자신을 할배라고 소개한 나이가 많은 분은 소녀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그 감정을 시로 적어 읊었다. 그리고 조피디가 와서 노래를 불렀다.

2016년에 들었던 촛불이 2024년에는 응원봉으로 바뀌었다.


내란쿠데타로 국민들에게 총구를 겨누게 한 정신이상자의 사태를 시민들이 막아섰고, 그걸 방조하고 탄핵부결 시키는 놈들이 집권 여당이라는 세계 최초의 일이 펼쳐졌다.


또다시 국민이 영웅이 되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어제 너무 멋졌다 승환옹! 가오가 육체를 두 번이나 지배하다니! 슈퍼히어로 https://youtu.be/IYrixlIGBH8?si=tIl21o71MswNN4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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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는 도쿄를 외로운 도시라고 했다.

봉 감독은 도쿄에 대한 인상은 외롭다는 것이었다. 인구 밀도는 높은데 반해 오히려 가장 외롭다는 느낌. 사람은 많지만 결국 아무도 없는 듯한 막연한 인상을 받았다.

그런 봉 감독이 말하는 도쿄를 세 명의 배우를 데리고 멋지게 표현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빠져들었던 영화는 레오 까락스 감독이 자신의 분신같은 드니 라방을 데리고 찍었던 ‘광인’였다. 광인이 도쿄 지하도에서 똥처럼 지내는 이야기.

그러나 인파 속 외로움을 영화로 만든 봉 감독의 히키코모리의 이야기 ‘흔들리는 도쿄’는 대단히 멋졌다. 이런 단편 초현실 적인 이야기가 이토록 여운을 남기다니.

도쿄에서 홀로 사는 주인공은 배달부와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빛이 싫어서 집밖에 나가지 않는 지가 십 년이 넘었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게 싫고 빛도 싫다. 그러다가 피자 배달부의 옷차림을 본 후 얼굴을 보게 된다.

주인공 마음의 흔들림을 일본 지진으로 표현을 한다.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러다가 그 피자 배달부를 사랑하게 되고, 집으로 배달오지 않는 배달부를 찾아 10년만에 집 밖으로 나온 주인공이 보는 도쿄는 완전히 변해 있었고

관계라는 것이 전혀 형성 될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에서 주인공은 사랑의 버튼을 누른다. 그때 카메라는 아오이 유우와 카가와 테루유키의 얼굴을 천천히 보여준다.

이 옴니버스 영화들에 조연들도 출중하다. 고독한 미식가 씨부터 너무나 예쁜 얼굴을 지닌 이토 아유미와 개성 넘치는 배우 아라카와 요시요시(욧시는 좋아! 라는 말로 알고 있는데 요시요시는 좋아좋아 인가?ㅋ)등이 나온다.

도쿄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 건 근래에 본, 이명세를 필두로 한 킬러스를 봤는데 끌리지 않는 거였다. 이상하다? 분명 내가 흥미를 가질만한 단편들로 묶인 영화들인텐데 그렇지 않았다.

이명세 전작 단편 영화, 유인영과 김성진을 데리고 찍은 ‘그대 없이는 못 살아’를 아주 재미있게 봤는데, 그럴거라고 봤는데 끌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생각난김에 다시 오래전 옴니버스 단편들의 ‘도쿄’를 보게 되었다.

인간이 나무가 되고, 땅속에 광인이 살고, 모두가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이야기는 또 봐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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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같은 일이다. 국내는 내란 쿠데타 문제로 하루도 편하지 않은데, 그 같은 일을 소설로 엮어낸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왕족의 에스코트에 극진 예우를 받았다. 한강은 수상소감에서 “어두운 밤에도 우릴 잇는 건 언어”라고 했다.


한국 사람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했지만 2016년인가? 기준으로 한국은 세계 출판 7위였다. 아무튼 무지하게 책을 읽고 있다.


단지 읽는 사람이 계속이 읽는 것이다. 그 힘은 SNS에 있었다. 2, 30대 직장 여성들이 월급을 타면 책을 구입해서 읽고 그걸 SNS에 올리면서 문학이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단한 힘을 가진다. 이번 집회에서도 20대가 압도적으로 나왔고, 그들의 외침은 평온하면서도 강했다는 것을, 세계 언론에서 보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문예지나 계간지, 신문을 통해서 작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고 연재했다. 전쟁 중에도 책은 발간되었다.


티브이나 극장이 귀한 시절에는 사람들이 활자에 목을 맸다. 신문에 다음 회를 투고하던 소설가 황석영은 한 때 그 압박이 무서워 도망을 간 적도 있었다.


신문사가 발칵 뒤집어졌다. 황석영은 어딘가 다른 지역으로 가도 우편으로 다음 회를 신문사로 보내곤 했는데 어느 날은 그냥 사라진 것이다.


그 소설이 장길산이었는데 74년 7월부터 84년 7월까지 2,000회가 넘는 동안 매일 연재해야 했으니 황석영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때 신문사의 황석영 전담 기자가, 제가 잡아 오겠습니다. 라며 황석영 소설가를 찾아 나선 사람이 지금의 대작가인 김훈이었다.

현재 아직도 손으로 모든 소설을 쓰는 작가는 김훈과 조정래 정도다. 황석영은 아직도 손으로 소설을 쓴다며 김훈 자씩 하며 너스레를 떨곤 했다.


어떻든 한국의 대작가들도 지면을 통해서 신작을 발표하고 연재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2019년인가 2020년인가 50돌이 되는 문예지 ‘샘터’가 사라졌을 것이다.


올해 7월에는 월간지 문학사상이 신인문학상을 중단했다. 나도 단편 소설이 계간 풍자문학에 실리면서 2년 동안 소설을 연재했다. 근데 코로나시기에 그 오래된 계간지가 폐간되었다.

이런 안타까운 현상이 계속 이어지는 건 비판이 가득한 문학을 정부 차원에서 지원을 끊어 버려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한강의 소식은 드라마 같은 일이다.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일은 필연적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일”라고 했다.


그리하여 오늘도, 이런 힘든 시기에 구석진 곳에서 등을 구부리고 홀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사람들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들임을 잊지 말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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