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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
뚜 웨이밍 지음 / 통나무 / 1994년 7월
평점 :
품절
중국 출신 미국 동양철학자 뚜 웨이밍이 1976년에 쓴 왕수인의 학문적 전기를 1994년 번역 출간한 책이다. 왕양명, 왕수인(1472~1528)은 명나라 정치가, 교육자, 유학자로 주희의 주자학에 이은 양명학의 창시자이다. 왕수인의 생각은 "전습록"이라는 책 등으로 전한다.
명나라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아버지 왕 후아, 왕화에게서 왕수인은 태어났다. 십대에 만난 스승(러우 리앙,누량1422~1491)을 통해 격물格物에 관한 주희의 가르침에 입문해 성인이 되고자 하는 평생에 걸친 격렬한 노정을 시작한다. 그의 아버지 왕 후아는 그런 수인에게 "광狂"이란 말로 아들을 말렸을 정도로 수인은 과감하고 열정적인 수행을 펼치는 사람이였고, 또 시詩를 시작으로 다방면(병법, 도가, 불가, 역)에 직접 몸으로 부딛혀 체험을 통해 공부해 관직으로 승승장구하는 아버지와는 결이 다른 다재다능한 아들이였다.
20대에 수인은 주희의 방법론(격물궁리)에 헌신하여 1492년 22세 때 아버지 집무실 정원의 대나무 한 그루를 7일간 앞에 두고 맹렬히 리理를 궁구하는 모습 등 계속해서 주희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에 옮기려 전력했다._100.
삼수 끝에 한 과거급제 이후 관직생활에서 물러나 1497년 27세 때 수행 중 (선승도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지었다는) 양밍동의 체험을 통해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이 자기 실현의 참된 기초가 됨"을 깨닫게 되었다._115.
양밍동의 체험으로 "자신의 가치에 헌신할 수 있는 정도正道는, 확실히 외부의 도전에 직면하여 새로운 상황에 유연하게 기꺼이 대응하고자 하는 의지의 강도에 달려있다. 이런 맥락에서 결의와 이해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_118.
이후 여기서 말하는 결의는 "입지立志, 결단"으로, 다시 이해는 지知, 앎으로 변모하여 지의 선행先行을 주장하다 도학자의 길로 빠지기 쉬운 기존 주자학에 대해 결단(치양지)과 지행합일을 말하는 양명학으로 서서히 변모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관료생활과 수행을 겸하던 수인은 30대에 명나라 조정 환관(리우 진, 유근)과의 갈등으로 감옥에 수감되고 치욕적인 곤장을 맞은 후 편벽한 귀주 롱츠앙, 용장으로 좌천 당한다. 1518년 수인 37세 때이다.
그러나 왕양명은 "이와 같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성인에 도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를 계속 고민한다. 결국 그는 외부세계와의 의미있는 관계가 자기 내부의 근본적인 변화에 달려있다는 것(결단)을 믿게 되었다._185.
처음으로 양밍은 "나의 본성은 물론 성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나는 이제까지 외부의 사물에서 리理를 구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심즉리 心卽理)_186.
깨달음 이후 수인은 체험적 이해를 강조하며 (책 "오경억설"의 서문에서) "장자"에 나오는 유명한 고기와 그물의 비유를 빌어 경전의 말과 성인의 의도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경전의 말을 공부해서 성인의 의도를 체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그물을 가지고 고기를 잡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경전의 말을 성인의 의도와 동등하게 다루는 것은 그물과 고기를 동일시 하는 것이다. 본인이 직접 고기잡는 일에 관계치 않고서는 그물에서 고기를 구할 수 없듯, 경전의 말을 진정 체험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성인의 의도를 간취할 수 없다. 고기가 잡히면 그물은 버리는 것, 마찬가지로 성인의 의도가 경험적으로 이해되면 경전의 말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_205.
경전의 말이 성인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자동적으로 통하지 않듯, 경전에 대한 사적인 숙고가 경전의 참된 의미는 고사하고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조차 반드시 통하는 것은 아니라고 양밍은 주장했을 것이다. 사실,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문자가 아니라 표현되지 않은, 또는 표현할 수 없는 체험(경험적 이해)이다. ......
이로서 양밍은 지행합일을 정식화하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할 수 있기 전에 알아야만 한다고 믿었서 앎知과 함行을 구별하고 그것들을 따로따로 추구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먼저 아는 일에 대해 토론하고 배우며, 참으로 알게 되고 나서야 앎을 실천으로 옮긴다고 한다. 그 결과 일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며 또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먼저 알고 나중에 한다는 이 이치는 적은 병폐가 아니며 단지 어제 생겨난 일이 아니다. 내가 지금 앎과 함의 일치(지행일치)를 옹호하는 것은 바로 그 병폐를 치료하기 위한 약으로서이다."전습록 中 _219.
양밍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사상을 행동화하기 위해 외적 상황의 근본적 변화를 기다리기보다는 삶에서 공부의 의미를 구현하라고 가르쳤다. 양밍이 진정으로 옹호한 것은 성인의 가르침을 체험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자기실현에 이르는 것이엇다. 관직에 이르는 길은 그러한 정신적 수양의 과정과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었다._220.
양밍은 지식과 행동의 일치를 유가교육의 참된 정신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특징이며, 사실 학문의 진정한 의미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 양밍이 마음에 둔 것은 체험적 지식을 축적하는 것 뿐만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는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이었다._221.
도올선생의 앞부분 해제글은 양명학의 의미와 왕양명 개인의 한계(대나무 격물궁리와 현재적 과학의 비교)에 대한 간략하지만 명쾌한 개괄글이다. 저자 뚜 교수가 길고 넓게 훑는 편년체식 양명 전기에 비해 도올선생의 해제는 분량은 짧지만 머릿속이 상쾌해지는 통관이다. 저자 뚜 웨이밍 교수가 이 책에서 "모색-결단-대오"의 순서로 왕양명 생애를 길게 적고 마지막 "의미" 편으로 양명학을 꼼꼼히 성실하게 결론지었다면, 책머리 해제는 짧고 쉬운 현실의 이야기를 통해 양명학의 의미와 현대적 호소를 쾌도난마로 잘 드러내고 있다.
P.S.
뚜 교수의 이 책은 청년 왕수인이 체험을 통해 지행일치의 양명학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한 학파 안에서 좀더 발전한 형태인지 또는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또 하나의 학파를 새로 개창한 것인지를 견주고 알아보는 학자들 사이의 논란은 일반에게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지행합일을 통해 노력하면 누구나 유가적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대승적 인식전환에 조선 기득권 식자층은 그들의 안위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양명학은 배척당했다. 변함없이 문닫아건채 지知의 수행만을 강조했을뿐 함行을 뒤로 미루는 지체 상황은 계속되었던 것이였다.
논어 태백제8-4 논어집주에 대한 도올 선생의 해설中
윤언명이 말하였다. "내면에서 함양이 이루어지면 밖(외모)으로 곧 드러나는 것이다. 증자는 수신으로써 위정의 근본을 삼았으니 기용사물의 소소한 것들은 유사有司에게 맡기라고 말한 거이다.
이에 대한 도올 선생의 해설은 " 윤언명의 한마디가 송유들의 관심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증자야말로 위정의 근본을 수신으로 생각한 적통성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편협한 "수신修身" 관념에만 매달려 위정(爲正)에 대한 폭넓은 사고를 하지 못한 조선유학의 병폐를 보는 듯하다.
_도올 논어3 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