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만권당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 관련동영상
① 한국 상고사 대토론회 - 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에 관한 논의
일시 : 2015.11.16.월.오전10시
주최 :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
☞ https://youtu.be/NrALsUDAtUM
②제320회 국회정기회 제05차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
일시 : 2013.09.27.
☞ https://youtu.be/Bn9PfRHTweg
수년전 등산모임 뒷풀이 자리에서 벌어진 대화이다.
"지금 현재 시점이나 생각으로 과거 인물, 사건을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과거 당시 상황과 당시 시점으로 모든 걸 판단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자리를 물러나 혼자 생각할수록 수긍보다는 반론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대화였다.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을 결국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타임머신이 있는 것인가? 과거 당시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있는건가?
그래서 과거 당시로 돌아가 눈앞에서 직관으로 지켜봐야만 누구를 또 무엇을 평가할 자격이 생긴다는 말인가? 그가 대체 누구인가?
시간은 과거지만 여러 복합적 이유로 공간적으로 한 곳이 아닌 여러 장소, 여러 사람에게서 사건이라도 벌어진다면 몸은 하나인데 이는 또 어찌 한단 말인가?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슬립은 물론 전우치 도사의 분신술이라도 부릴 수 있어 과거의 여러 공간에 동시에 등장, 직관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설령 현재를 떠나 과거로 가본 도사道士나 누군가가 있다 하더라도 정말로 그가 주관적 입장 빼고, 개인적 견해나 편견 전부 털어내고, 혈연 학연 지연 등 모두 없애 깨끗하게 걷어놓거나 말끔히 덮어두고 잘 평가는 할 수가 있는 건가?
그는 대체 누구이고, 그렇게 나온 결과를 공정한 평가라고 다시 2차로 평가할 수 있는 이는 또 누구인가?
혹시 그 말의 이면으로 과거는 그대로 덮어두자는 숨은 뜻을 애둘러 말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평가에 대한 '사다리 걷어차기'를 은밀히 시도하며 지금까지 이미 있는 평가만 고스란히 그대로 밀고나가겠으니 잔말 말고 모두 따르거나 아니면 가만히 그 입 닫으라는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교과서에 기댄 입에 올리기 쉬운 해답을 뛰어넘어 작은 해결 실마리를 이 책 속에서 읽는다.
197p. 역사학은 관점의 문제와 그 관점을 뒷받침하는 사료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199p. 해방 후 식민사학자들의 이중성은 이른바 ‘순수사학’을 지향했던 데서도 드러난다. 사관(史觀)이 핵심인 역사학에서 ‘순수사학’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순수’라는 말로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은 그 자체로 집권 세력을 돕는 길이 되기 일쑤이다.
주관을 배제한 역사를 표방하면서 이를 ‘순수’ 또는 ‘객관’이라고 주장했지만 ‘주관의 배제’나 ‘순수’ 또는 ‘객관’은 모두 일제 식민사관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31p. 조선총독부는 시험을 통해 학생들의 머리를 통제했다.
머리를 통제하는 데 주입식 교육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교육 시스템과 고등문관 시험(현재의 고시)을 필두로 하는 각종 관료시험제도를 통해 식민지의 어린 학생들과 젊은이들의 머리를 통제했다. 머리 통제의 핵심이 역사였다. ...... 조선총독부의 주입식교육 핵심 과목은 역사였다. 그것도 고대사에 집중되었다. ......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북부에는 한사군이 있었고, 한반도의 남부에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입식으로 가르쳤다. 고대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식민지였고 한반도 남부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식민지가 되는 것은 한국사의 당연한 귀결이란 이야기였다. 결론은, 그러니 독립운동을 하지말라는 것이었다.
249p. 조선총독부 사관과 독립운동가 사관 사이의 최전선은 늘 한국 고대사였다.
51p. (메이지 일본의) 국사교정국은 1887년 도쿄제국대학에 사학과가 설치되면서 도쿄제대 부설 사료편찬소로 전환하는데, ...... 이때부터 도쿄제대 역사학과는 식민사학 생산 및 전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도쿄제대 역사학과 및 국사(일본사)학과는 차후 식민지 경성에 설치되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및 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와 함께 식민사학의 삼두마차로 맹활약을 펼친다.
62p. (도쿄제대를 졸업한)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03.01.~1942.03.30.)의 제자가 ‘한사군 한반도설’과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의 주장으로 유명한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1873.10.03.-1961.12.04.)로서 이병도의 스승이기도 한데, 이병도는 해방 후에도 쓰다 소키치가 자신을 사랑했다고 자랑스레 말하고 했다. ......
시라토리는 교토제국대학의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1866~1934)과 역사학의 쌍벽을 이뤄 “동쪽에는 시라토리, 서쪽에는 나이토 고난”이란 말을 만들어 냈고, 또한 “문헌학파의 시라토리, 실증학파의 나이토 고난”이란 말도 만들어냈다. ......
시라토리의 제자가 ‘한사군 한반도설’과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주장한 쓰다 소키치라면 나이토 고난의 제자는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이라고 주장했던 아나바 이와키치(稲葉 岩吉 1876~1940, 일본식민사학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 조선사편수회 수사관(修史官), 만주건국대학 교수)다.
130p.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식민사관의 핵심은 둘이었다.
①하나는 ‘한사군 한반도설’인데, 이는 ‘고조선 한반도설’과 같은 논리였다. 곧 고조선과 한사군은 모두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②또 하나는 임나일본부설로서, 구체적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이 두 이론을 만든 일본인 식민사학자는 쓰다 소키치와 이나바 이와키치였는데, 해방 후 이병도를 비롯해서 이 땅의 여러 식민학자들이 이 이론을 그대로 추종하든지 조금 변형(고조선 중심지 이동설 : 고조선 중심지는 요동,랴오둥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동했으며, 그 자리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가 거꾸로 요서,랴오시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시켜서 현재까지 식민사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가 쓴 <조선사편수회 식민사관 이론 비판>의 주요 내용이었다.
134p. 고고학(평양 출토 낙랑 목간)은 현재 문헌사료적 근거가 파탄난 식민사학계가 기대고 있는 마지막 보루이다.
140p. (외부교수들로 꾸려진) 평가단은 낙랑 목간을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증거로 단정 짓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데 이는 역사학의 기초인 사료 비판에도 어긋나는 자의적 확대 해석이다.
138p. (평양 출토) 낙랑 목간은 이런 과정에서 고구려가 습득한 전리품이거나 망명객들이 가져온 물건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139p. 낙랑 목간은 지역을 표시하는 지도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낙랑군 각 현의 호수가 얼마이고 인구가 얼마인지를 말해주는 행정문서에 불과하다.
미국 위싱턴에서 조선시대 한양 각 방의 호구 수와 인구 수가 적힌 문서가 나왔다고 500년 전의 한양이 워싱턴에 있는 것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294p. 우리나라 형사소송법 307조는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를 ‘증거재판주의’라고 한다. ...... 증거는 직접증거와 간접증거로 나뉘는데, ......
직접증거를 역사학 용어로 바꾸면 1차 사료다. 1차 사료란 당대에 쓰인 사료를 뜻한다. 한사군에 대한 1차 사료는 한사군이 설치되었을 당시 (지금으로부터 2천 1백 년 전인 서기전 108년)에 쓰인 사료이다.
298p. 한사군의 중심은 낙랑군이기 때문에 낙랑군의 위치만 밝혀내면 그 주변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 나머지 삼군의 위치는 자연히 밝혀지게 된다.
295p. (조선총독부의 사관은 한사군 중) 낙랑군의 중심지는 평양이나 대동강 연안에 있었고, 대방군은 지금의 황해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296p. (이병도의 한사군 관련 서술에 따르면) 이병도는 사관이 뚜렷하다. 이병도에게 한군현, 즉 한사군의 설치는 한민족에게 축복이었고, 일제의 식민통치 또한 한민족에게 축복이었다.
263p.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당시에 쓰인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진서> 등은 일관되게 한사군의 위치를 요동이라고 쓰고 있다.
307p. 중국의 고대 사서들은 낙랑군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이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낙랑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말하는 1차 사료는 단 하나도 없다.
306p.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최근까지 식민사관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황해도 수안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해왔다. 앞에서 잠시 설명했지만 이런 논리를 처음 개발한 인물은 조선사편수회의 이나바 이와키치였고, 이병도가 이를 계승하고, 그 제자들이 추종해서 최근까지 한국 고대사학계의 하나뿐인 정설로 만들었다. 이나바 이와키치는 「진 장성 동간 및 왕험성고」 즉 「진 장성 동쪽 끝 및 왕험성에 관한 논고」에서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을 지금의 황해도 수안(遂安)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논리를 보자.
“...... 사실은 『한서』 「지리지」에 의해서 의심할 바 없다.”
308p. (그래서) 필자는 『한서』 「지리지」 원문 전체를 통독해봤다.
『한서』 「지리지」에는 이나바 이와키치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단 한 글자도 없다. 오히려 이나바 이와키치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사실만 말해줄 뿐이었다. 『한서』 「지리지」에는 ‘황해도 수안’은 커녕 한반도 자체에 대해 설명한 구절이 단 한 글자도 없다.
319p. 『한서』 전체에 황해도라는 글자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늘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진서』 같은 중국 고대 사서를 주석까지 완역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242p.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는 2014년 5월 19일 동북아역사재단에 공문을 보내 한사군의 위치 문제를 놓고 공개 학술대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
동북아역사재단이 말한 것처럼 ‘한사군 한반도설’이 맞는지 필자 등처럼 ‘한사군 허베이성(하북성)설’이 맞는지 한번 공개적으로 논쟁해보자는 제의였다. 국민세금으로 ‘한사군 한반도설’을 주장했던 학자들과 자신의 쌈짓돈을 털어서 ‘한사군 허베이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한사군 위치 문제’를 가지고 공개적으로 논쟁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244p. (동북아역사재단 및 관련 학자들의 공개 논쟁 거절에 대해) 국민운동본부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한사군 한반도설’은 일체의 1차 사료적 근거가 없는, 조선총독부에서 날조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대학 강단에 있는 저들의 주장이 근거가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옛날처럼 식민사학자들이 모든 여론 매체를 독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250p. 필자처럼 역사를 전공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스스로 거부하는 학자들이 생겨났다. 필자가 있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도 이제 여러 명의 박사학위 소지자가 있으며 비록 박사학위는 없지만 식민사학자들보다 1차 사료를 줄줄 외는 실력자들이 수두룩하다. 이렇게 해방 후 70여 년 만에 최초로 식민사학에 맞서는 한 축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학자들이 이제 역사학의 방법론대로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고대 1차 사료를 바탕으로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자고 요구하자 식민사학계는 일제히 침묵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305p. 그러면서 (동북아역사재단 및 관련 학자들은) “‘한사군 한반도설’은 이미 정리가 끝난 문제”라고 말해왔다. 이들이 ‘학계’라고 말할 때 ‘(식민사)학계’라고 읽으면 맞다는 사실은 이미 말했다.
34p. (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대만의) 국립 대만대는 푸스녠(부사년傅斯年 1896.03.26.~ 1950.12.20.) 같은 학자가 정신적 지주가 되어 (대만 내부의) 식민사학을 청산했다면 국립 서울대는 한국의 학문 전통에 무지한 미군 대위(B. 엔스테드 Harry Bidwell Ansted)가 총장으로 있으면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역사학과(이병도)를 장악해서 식민 학문을 하나뿐인 정설로 유지시켰다.
49p. 역사 침략은 항상 영토 침략의 전초전의 성격을 갖는다. 영토 침략의 속셈이 없으면 역사 침략에 나설 이유가 없다.
81p. 자국사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노력을 악의적으로 ‘민족주의’라고 비난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더구나 한국 민족주의는 일본 민족주의처럼 침략적 극우 민족주의가 아니라 침략에 저항했던 민족주의다.
p.s.
1. 리뷰한 위 책은 옛판으로 이후 이야기까지 담긴 신판(아래책)이 따로 있다.
2. <우리 안의 식민사관> 이전까지 사연을 담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 먼저 있었다.
3. 이 책 속에서 언급한 다른 책으로 식민사관의 두가지 핵심 내용을 비판한 연구결과를 담은 즉, 한사군 한반도설을 비판한 <조선사편수회 식민사관비판1_한사군은 요동에 있었다> 및 한반도 남부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한 <조선사편수회 식민사관비판2_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에 있었다> 2권이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