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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
야마베 겐타로 지음, 최혜주 옮김 / 어문학사 / 2011년 2월
평점 :
야마베 겐타로(1905~1977)
평생을 두고 도서관에 박혀 일제의 한국 식민지배 자료를 뒤지고 책을 쓴 일본의 역사 연구자이다. 책은 몹시 간명하고 엄밀하게 추려 엮은 내용으로 특히 전체적인 흐름과 유기적 인과관계를 잘 보여준다. 제시된 근거와 자료는 전부 일본 내부의 자료와 서신, 공문서를 가지고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 가치있다.
19p. (한국합병의 의의) 천황의 「병합조서」가 나온 날에 「한국합병에 관한 조약」이 발표되었다.(1910.08.29.) 이 조약의 제1조는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페하에게 양여한다”로 되어 있다. 이 조문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곡해와 속설이 있어 온 조문이다. 요컨대 한국을 일본이 병합한 것은 침략에 의한 것이 아니고 통치권의 원만한 양여(讓與)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엄정한 국제법의 학설에 의하면 이와 같은 속설은 성립될 수가 없다. 병합 당시부터 국제법의 학설에 근거해서 이 문제를 취급했던 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
“소위 병합이란 것은 한국의 국제법상의 인격자로서의 존재를 없애고 본래 한국의 영토였던 토지를 일본 영토로 하고, 본래 한국의 국적을 소유했던 인민으로 하여금 일본 국적을 소유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이라는 국가를 소멸시키고, 한국 영토권의 목적물이었던 그 신민을 일본 통치권의 목적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법리를 바르게 말할 때에는 일본은 한국의 통치권을 양여 받는 것이 아니라 일본 고유의 통치권이 한국의 구 영토에 확대 행사되기에 이른 것이다.”
26p. (조선총독부의 개설)
(합병 다음해 1911년(메이지44년) 일본 의회에 제출해 가결됨으로써 법률 30호로 공포됨으로써) 조선총독은 이 제령(制令) 공포권을 가지고 조선의 사법, 행정, 입법의 3권을 한손에 장악하게 되었다. 이 점은 대만총독도 마찬가지로 대만에서는 총독을 토황제土皇帝라고 했는데, 조선에서도 총독은 토황제인 것이다.
(※ 토는 토착의 의미.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조약의 체결부터 1945년까지 대만을 통치했다. 대만총독은 내각총리대신, 내무대신, 척무대신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되었으며, 천황 직예(直隸천황 또는 중앙정부에 직접으로 소속하는 것)의 조선총독보다 지위가 낮았다.)
28p. (데라우치 총독의 언론 탄압) 데라우치 총독의 무단정치는 정평이 나 있었는데, 당시 조선에 잇었던 일본인 기자 샤쿠오 도호는 “각종 취체령(取締令 : 취체, 법률용어-법령, 명령 따위를 지키도록 통제함)을 남발해서 이를 극단으로 힘쓰게 하고 일반 인민의 자유를 구속해서 마치 군대에 잇는 것 같이 생각되게 함으로써 조선반도는 완전히 군영화 되었다”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대로였다.
35p. (헌병정치 / 헌병보조원) 1909년(메이지42년) 1월에는 헌병 1명에 세 사람 꼴로(헌병보조원 약6,000명) 증원했다. 현병보조원의 참가로 일본군은 지방의 사정을 상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헌병보조원 중에는 의병 속에 숨어들어 첩보활동을 해서 일본군을 도운 자도 있었다. ......
그리고 이 헌병보조원은 의병활동이 수그러짐에 따라 정비되고, 사이토 마코토(1858~1936) 총독의 이른바 ‘문화정치’에 의해 1919년(다이쇼8년) 헌병정치가 폐지됐을 때에 전원 순사로 채용되었다.
38p. (즉결처분/범죄즉결례) 즉결처분을 받는 자의 다수는 사실상 조선인으로 그들은 습관상 권리에 대한 관념이 부족하다. 따라서 범죄에 대해 사법 관아에서 재판을 받거나 행정관청에서 즉결되거나 그간에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물론 즉결처분에 불복하는 자는 내지인이건, 외국인이건 또는 조선인이건 불문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자유로이 정식 재판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이 있다. _조선총독부시정년보 메이지 43년판
요컨대 일본인은 정식 재판을 받을 수 있지만 조선인은 행정관에 의해 형벌을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도를 만든 것이 총독의 위임입법을 규정한 제령이다. 조선이나 대만은 일본의 영토지만 (일본의) 헌법이 시행되지 않고 총독이 사법, 행정, 입법의 삼권을 한손에 움켜쥐고 법률에 대신하는 총독의 명령을 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명령을 조선에서는 제령(制令), 대만에서는 율령(律令)이라고 했다.
...... 또 대만의 식민지 지배로 이익을 얻은 일본인의 사고방식이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헌법을 시행할 것인지의 여부는 전혀 논의될 일이 없었던 것이다.
...... (태형은) 이것도 조선인에게만 적용하는 형별이었다. 대체로 근대법 아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형벌이다.
45p. (2. 조선의 사회 상태 / 동양척식주식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성립은 병합 이전이지만 설립의 주도권은 일본정부가 가지고 있었다. 회사 설립안은 1907년(메이지 40년) 12월 가쓰라 타로(1848~1913)가 회두(모임 대표)로 있던 동양협회로부터 내각에 한국의 ‘척식신민(拓殖植民 땅을 개척하고 국민을 이주시키다)’을 위해 식민회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출되면서부터 만들어졌다.
47p. 또 한국척식이라고 하지 않고 ‘동양척식’이라고 한 것도 의회의 설명에서는 타국의 국명을 가지고 아국의 법률로 하는 것은 온당치 않기 때문에 ‘동양’이라고 했다는 주지의 셜명을 하고 있다.
50p. 농업이민을 식민지에 보내는 구상은 대만의 점령소유로부터 시작되었다. 대만에서 이 일을 담당했던 도고 미노루(1881~1959)가 이민의 목적은 식민지에서는 언젠가 민족적 자각이 생겨서 사회적 불안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에 식민지의 요소에는 모국의 이민을 넣어 둘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에 주의하고자 한다. 일본은 만주사면 이후에 만주에도 농업이민을 보냈다. 즉 대만에서 일을 조선에서 했고, 다시 그것을 만주에서도 했다.
54p. (회사령의 공포와 그 의의) 말할 것 없이 (회사령 제정은 식민지) 민족자본 억제를 위해 제정한 부령(府令)이다. ...... 데라우치 총독이 회사 기업을 억제했던 것은 주로 조선인 기업이었고, 일본인 기업은 자진해서 불러들였다.
57P. (토지조사) 조선에서는 토지의 근대적인 사법상의 권리로서 토지사유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이 토지소유권을 제도상으로도 확립하는 것은 토지를 손에 넣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거류민의 토지소유를 법률상으로 확정학시 위해 한국정부로 하여금 급히 부동산법규를 만들도록 했다, 본격적이고 전반적인 토지소유권을 법적으로 확정하기 위한 토지조사를 1910년 3월에 한국정부가 시작했고 9월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이를 인계했다.
98p. (3.1운동 발단과 배경)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이 제안한 14개조의 소위 윌슨강령 제11조는 ‘약소민족의 원조’를 천명하였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미 제국주의의 기만정책으로서 타국의 식민지를 가로채는 책략에 불과했다.
이것은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이나 푸에르토리코의 자결(自決)을 허락하지 않고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했던 사실로서도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민족해방운동의 힘도 약했고, 러시아혁명의 진상도 아직 확실히 몰랐으며, 민족적 자각이 충분하지 못했던 피억압 민족은 어디서든지 이 윌슨 강령을 기꺼이 맞이하였다. 이 당시 사회주의운동도 노동조합도 없었던 조선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132p. 미국의회에서 조선 독립이 의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조선인에게 환상을 갖게 했다. 미국정부의 후원으로 파리강화회의 또는 국제연맹에 의해 조선의 독립이 이뤄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조선인들에게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조선인들의 일부에 있었던 이 환상 위에 세워졌던 정부라고 해도 좋다.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임시정부에 종종 편지를 보내서 미국에서의 일이 잘 되어가고 잇는 것 같이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미국의회도 강화회의도 국제연맹도 조선독립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이승만 일파가 최후의 희망을 걸었던 1921년 11월 워싱턴 회의는 최후의 환상을 보기 좋게 깨뜨려 버렸다.
낡은 민족주의자들은 식민지 약탈이 본래의 사명인 제국주의에 기대어서 (조선)독립을 달성하려는 난센스를 진지하게 연출하고 있었다. ......
3.1운동의 한가운데 생긴 조선 민족혁명의 출발이 상하이 임시정부가 붕괴하는 날부터 시작된 것은 현재 조선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해체의 징조는 야심가들의 탈락과 조선총독부의 매수와 더불어 점점 심해졌다.
1921년 4월 19일 상하이에 있었던 독립신문사 사장으로 3.1운동의 중심인물의 한 사람이었던 이광수가 조선에 돌아왔다는 사실은 많은 조선인을 실망시켰다. 이광수는 조선총독부의 주선으로 동아일보사에 들어갔다.
172p.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 데라우치나 하세가와는 오로지 탄압 하나로 통치했기 때문에 무단통치였다. 사이토 총독은 탄압정책도 교묘하게 한 이외에 조선인 매수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문화통치라고 하는 것일까?
매수정책은 사이토의 옛 동료였던 사카다니 요시로(1863~1941)도 독립선언 서명자 “33명과 같은 자를 호출해서 의견을 청취하고 개혁을 행하면 같은 일을 해도 조선인은 크게 만족하고 자연히 조선 인심으로부터 귀복(歸服)하는 양상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그가 사이토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다. 이 일도 사카다니의 충고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사이토는 확실히 이를 실행하고 있다. 그리고 33명의 인사들은 저 3.1운동 선언서를 쓴 최남선을 비롯해서 거의 전부가 매수되고 말았다.
이런 일도 원인이 되어서 민족주의자는 민족해방운동의 지도권을 점차로 잃어버리고, 그 후 조선의 민족운동은 공산주의자가 점차로 지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사이토 총독이 조선인을 위해 다소라도 좋은 방향으로 통치를 했다고 하면 이 점뿐이었을 것이다. 나는 사이토 총독의 통치가 문화정치라면 하세가와, 데라우치의 통치는 요순의 통치라고 말하고 싶다.
199p. (노동자. 농민의 운동) 그러나 간토대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은 모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던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의 제휴를 망쳐버린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간토대진재의 혼란을 이용해서 가와이 요시토리(초대 공산청년동맹위원장으로 대진재 시 구호활동 중 경찰에 학살됨) 등을 죽이고 조선인 대학살을 감행한 지배자는 일본의 노동운동을 후퇴시키고 노동운동을 좌우로 분열시켰다.
271p. (만주사변, 대륙병참기지) 어쨌든 ‘산미증식’ ‘농촌진흥’의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중농정책에서 ‘농공병진’으로 바뀐 것은 만주사변 후의 진전과 일본의 대륙침공과 크게 관계가 있다.
283p. (한국을 병합한 다음해인 2911년 6월 야마가타 아리모토(1838~1922)가 정부에 제출한 의견서 ‘군사상의 요구에 근거를 둔 조선과 만주에서의 철도경영방책’ 의 ‘4. 결론’ 전문)
조선과 만주에서의 철도경영은 전적으로 러시아 극동정책에 대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장래 동서정국의 발전에 대해 조선을 방어하고 아울러서 이의 개발을 도모하며 또 만주에 부식한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교통기관의 완성을 기한다. 우선 조선 종관철도(부산-경성-신의주)와 안봉선(안동,단둥-봉천)을 지나 장춘(광동군사령부 소재지)에 이르는 철도를 전략 간선으로 한다. 이를 복선으로 개축함과 동시에 필요한 윤전재료를 풍부케 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병략 상 초미의 급무다. 또 이 간선의 기점인 마산 부근에 적당한 상륙설비를 하는 것도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요건이다. 요컨대 조선과 만주에 있는 철도의 경영는 오로지 군사상의 요구를 주안으로 하고 반드시 제국의 영원한 이익에 비추어 눈앞의 작은 이해를 타산해서 국가장래의 대 방침을 허술하게 하지 않고 착착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 이로써 유사시에 신속하고 기민하게 최대의 수송 유효거리를 나타내서. 항상 적을 능가하는 병력을 집중하기 위해 계산이 어긋남이 없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대륙에 부식한 우리 제국의 주권을 옹호하는 데 가장 긴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318p.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을 경계로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독립을 위한 태동은 일찍부터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합병과 이왕조(조선왕조)의 폐지에 반대해서 궐기했던 의병운동, 조선민족의 독립을 외친 3.1만세운동, 원산총동맹파업이나 광주학생운동, 항일빨치산투쟁 등 조선인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독립과 해방을 위한 투쟁이 8월 15일에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35년간이 일본제국의 조선 통치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