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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 일기
김성칠 지음 / 창비 / 199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느끼기 힘든 현장 체험담을 본다.
격량하는 실제 우리 역사의 숨가쁜 전개 상황과 그 틈바구니에서 빚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행태와 대응들 그리고 인간 관계의 비정한 모습들을 여실히 본다.
'매천야록'을 남긴 구한말 매천 황현은 한일병탄의 소식을 듣고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자결 하였다. 그 시들 중 하나의 마지막 행 내용이 다음과 같다.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인간세상 지식인 노릇하기 참으로 어렵구나"
김성칠 선생의 '난작인간식자인' 할 수밖에 없었던 세월 동안의 고스란한 일기 기록이다.
47p. 1946.04.22.
신문기사의 허위보도라고 하면 반드시 어떠한 사실을 날조한 경우에만 한하지 않고 어떠한 사건의 연속 중에서 일부분을 고의로 묵살해버린다거나 그와 반대로 강조해서 표현하는 것은 독자의 판단을 어긋나게 함에 있어서 허위보도와 조곰도 다를 것 없을 것이다.
106p. 1950.07.15.
다른 목적으로 모였던 회합이 곧잘 궐기대회로 변하여 그 자리에서 의용군을 뽑아 보내게 되므로 백성들은 이제는 다 눈치를 알아채고 무슨 모임이든지 집회에는 노인이 아니면 여자로 판을 친다. 젊은 남자가 몇 명씩 끼긴 하지만 이는 다 충분히 신분이 보장되는 사회자나 및 그 프락치들이다.
...... 전에 북에서 나온 사람들이 “날마다 모임으로 세월을 보낸다” 하여 얼마쯤 과장한 표현이거니 하고 들었으나 겪어보니 바이 빈말이 아니다.
189p. 1950.09.01.
그도 외력(外力)의 침략을 받은 결과라면 울분을 던질 상대라도 있지만, 남의 장단에 놀아나서 동포끼리 서로 살육을 시작한 걸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어두워진다. 지금 세계의 어디에 좌우의 알력이 없으리요마는 하필 우리가 그 가장 혹심한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213p. 1950.09.16.
“이렇게 백성을 다 죽인 후에 독립은 해서 무얼 하며 통일을 한들 무얼 합니까” 하던 김의사 형의 말씀이 생각난다.
251p. 1950.10.16.
그리고 어리석고도 멍청한 많은 시민(서울시민의 99% 이상)은 정부의 말만 믿고 직장을 혹은 가정을 ‘사수’하다 갑자기 적군(赤軍)을 맞이하여 90일 동안 굶주리고 천대받고 밤낮없이 생명의 위협에 떨다가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눈물과 감격으로 국군과 UN군의 서울 입성을 맞이하니 뜻밖에 많은 ‘남하’한 애국자들의 호령이 추상같아서 ‘정부를 따라 남하한 우리들만이 애국자이고 함몰 지구에 그대로 남나 있는 너희들은 모두가 불순분자이다“ 하여 곤박(困迫)이 자심하니 고금천하(古今天下)에 이런 억울한 노릇이 또 있을 것인가.
268p. 1950.11.12.
“...... 그러나 그 정치가 허위의 선전만을 일삼고 인간을 인간으로 다루지 아니하는 그 무자비성(無慈悲性)에 있어서는 참으로 정이 떨어졌습니다.
하여튼 이때까지의 경향으로 보아 이북의 양심적인 분자들은 많이 대한민국을 그리워해서 남하하였고 이남의 이상주의자들은 인민공화국에 절대의 기대를 가지고 많이들 월북하였는데 이들이 다같이 커다란 실망을 품고 있지나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이미 다시 어디로 갈 곳은 없고 해서, 말하자면 정신적인 진퇴유곡(進退維谷)에 빠져 있지나 않을까요. 이들에게 무슨 열너줄 방책이라도 있다면 나는 목숨을 내어놓고서라도 일해보겠습니다마는 ......”
284p. 1950.11.21.
(동해) 바다의 고기들은 이 한난류의 교차란 사실을 이용하여 저들의 족속을 늘리고 있는데 어찌하여 뭍의 사람들은 미•소 세력의 교차를 좋도록 이용하지 못하고 이 때문에 도리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자아내고 있을까. 사람이 물고기보다도 영리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290p. 1950.11.29.
“나라가 망하려면 인사행정만이 두드러지게 보인다”는 말이 있더니, 이즈음 대한민국에선 부느니 감투바람뿐인 감이 있다.
292p. 1950.12.03.
오늘날 이 세상에선 ‘3만지’라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소린고 했더니, ① 밖에서 보아 있는지 만지 한 마을에 ② 집인지 만지 한 집을 지니고 ③ 사람인지 만지 할 정도로 처신하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자비한 좌우의 항쟁이 남긴 시골 사람에의 교훈이다.
293p. 1950.12.04.
중공군의 대량 참전이 전해지고 UN군의 평양 철수가 소문만에 그치지 아니한 어제오늘 원자탄을 쓰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가 항간의 이야기거리로 되어 있다. 서울신문은 하루빨리 원자탄을 써야만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고 있다.
무슨 소리를 한댔자 세계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런 말이라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남이 만들어놓은 원자탄을 우리 땅에 제발 써주십사 하는 태도는 그래도 명색이 일국의 대신문으로서 취할 바 태도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사세가 다급하기로서니, 이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버르집음(작은 일을 크게 부풀려 떠벌리다)과 그 마음씨에 있어서 다를 바 없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될 수만 있으면 원자탄 같은 건 다시는 살인의 무기로는 쓰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세계의 양식(良識)일 것이다. 그것을 하필 우리 땅에 던져서 동족상잔의 무기로 써줍소사 하는 마음보는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300p. 1950.12.15.
미 대통령 트루먼이 UN군은 여하한 사태에 당면하여도 절대로 한국에서 철퇴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하여 모두들 얼마쯤 안도의 빛을 보인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켜서 마침내 외세를 끌어들이고, 그 결과는 외국 군대가 언제까지나 있어주어야만 마음이 놓이지,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 없다는 이 나라의 몰골에 술이라도 억백으로 퍼마시고 얼음구멍에 목을 처박아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