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트루먼 커포티의 작품.

풀잎 하프 이아기를 처음 들은 건 언제였을까? 오래전, 우리가 그 멀구슬나무에 살았던 가을, 초가을이었다. 그때는, 물론 그 이야기를 내게 해준 사람은 돌리였다. 그걸 그렇게 부른다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달리 없었으니까. 풀잎 하프라고. - P9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야. 이파리 하나, 씨앗 한 품, 이런 것들부터 시작해서 사랑이 뭔지 조금 배우는 거지. 먼저, 이파리 한 장, 떨어지는 비, 그런 다음엔 이파리가 네게 가르쳐준 것과 비 온 후에 익어간 것을 받아줄 사람이 오는 법이다. 쉬운 과정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두렴. 일생이 걸릴 수도 있어. 이러다 내 인생을 다 보냈지만 아직도 나는 다 익히지 못했구나. 오직 그게 얼마나 진실한지만 알지. 사랑은 사랑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사슬이라는 것을. 자연이 생명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사슬이듯." - P80

사람들은 자기 속마음을 좀더 비밀로 할 줄 알아야 해. 당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부분이 바로 좋은 부분이야. 자기 사적인 애기들을 밀하고 다니면 인간에게 뭐가 남겠어 - P83

일단 변하면 제자리로 도로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다. 세상은 우리를 알았다. 우리는 절대로 다시 따뜻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추운 나무를 향해 오는 겨울을 생각하며 자제심을 잃고 울음을 터뜨렸다. - P111

나도 인정할 거요. 이건 꿈이라고 생각하오. 베레나. 하지만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과 같지. 많은 독소를 자기 안에 가뒤두고 있는 거요. - P159

우리 둘 다 어디로 항하는지 일지 못하는 듯했다. 말없이, 경탄하며 우리는 묘지 언덕의 풍경을 살폈다. 그런 후에는 팔짱을 끼고, 여름으로 타오르고 9월로 반들반들 윤이 나는 들판으로 내려왔다. 마른 소리를 튀기는 이파리 사이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빛깔이 흘렀다. 그때 나는 돌리가 내게 해준 말을 판사에게 해주고 싶었다. 저렇게 한데 모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풀잎하프라고, 이야기를 기억하는 목소리들의 하프라고. 우리는 귀를 기울였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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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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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28 죽음과 절망이 가득한 곳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게 인간이다. 그게 동물과의 차이다. 인간이길 포기한 사람들의 폭력속에서, 침묵속에서, 비참이 가득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이야기.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로 남기면 안되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고의적인 방관은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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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3-31 09: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확실히 처음에 알라딘 하시면서 글 쓰실 때마다 점점 더 글 실력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새파랑 2025-03-31 09:54   좋아요 0 | URL
제가요? ㅋㅋ 저 이과 출신이어서... 작가님의 1퍼센트만 따라가고 싶습니다~!!!
 
빈 자리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주현 옮김 / 1984Books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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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27

˝당신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들은 당신에게 그 가치를 되돌려 준다. 그것은 오직 당신만의 것이고, 그렇기에 곧 당신 자신이 된다.˝


내가 보뱅을 좋아하는걸 플친들은 대부분 아실거다. 왜 보뱅이 좋냐고 하면 주변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 한사람을 향한 순정,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가벼운 마음, 그 무엇도 계산하지 않는 순수함이 글에서 그대로 느껴져서 이다. 요즘 시대에 이런 글을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비슷한 느낌의 국내작가로 김연수 작가님이 떠오른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른 이의 시선과 생각이라는,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으리라 절망했던 푸르른 섬들에 다다르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녀처럼 사랑하는 것은 더욱 감미로운 일이다. 부재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랑,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사랑.] P.51



하지만 이전에 출판된 보뱅의 <마지막 욕망>을 읽고 좀 당황했었다. 내가 생각하던 보뱅의 글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우울하고 너무 흑화되어서 읽는게 힘들었다. 보뱅도 이렇게 우울함을 느끼는구나, 보뱅이 쓰는 문장과 다르게 그도 속마음으로는 힘들구나 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앞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좋지도 않았다... 기존에 국내에 출판되었던 작품들의 개정판이 나오는걸 보고 이제 국내에 출판할만한 보뱅의 다른 좋은 작품은 없겠구나 라고도 생각 했다. 이제 마지막이라니.....



그래서 <빈 자리>가 출판되었을 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좋은 작품이었으면 아마 진작에 출판되었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예전 같았으면 발매되자마자 바로 구매했겠지만, <빈 자리>는 몇주 지나서 구매했다.(그래봤자 한달 안에 구매함 ㅋ) 그런데 다 읽고 나서... 늦게 구매한 나의 어리석음을 반성할 수 밖에 없었다. 보뱅은 보뱅이었다. 보뱅이 보뱅했다. 이건 너무 좋아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시간은 흐르고 마음은 지친다. 그래도 ‘그것‘ 그 초목의 잎, 그 빛, 그 이름이 있다. 때때로 당신은 그것을 마땅히 그래야 하듯, 그것이 요구하는 대로 따로 떨어져 고요 속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이 낡지 않고 변치 않았음을 보게 된다. 당신이 선택했던 처음 그날처럼 빛나고 있음을.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그것이 당신을 선택했고, 당신을 비추며, 당신을 그 자리에 머무르도록 붙잡고 있음을.] P.70



누군가의 ‘빈 자리‘를 이렇게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누군가의 부재를 슬퍼하기 보다는 그것 하나 만으로도 추억이라고,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보뱅 이고 이 책 <빈 자리>가 바로 그 증거다.

[그것 외에는 쓸 것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인생에서 노래할 것은 삶 속에서 사라진 사랑뿐이니까 그 사랑을 붙잡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죽어가는 꽃의 향기를 모으듯 글을 쓴다. 치유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꽃잎 위의 갈색 반점, 곧 사라질 젖니에 깨물린 흔적 같은 자국, 지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기다림 외에 당신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82



<빈 자리>는 소설이 아닌 에세이다. 하지만 한편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이 책을 소설식으로 리뷰하자면 이런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느날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알게 되고 그 여자를 마음에 품는다. 하지만 그 여자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단지 옆에서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남자는 곁에 있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좋았다. 어느날 그녀는 죽는다. 존재하던 빈자리에서, 부재하는 빈자리가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글을 쓰면서 그녀를 추억하고, 그림속에서 책속에서 일상속에서 그녀를 떠올린다. 그녀의 빈자리는 슬픔이 아닌 짧은 내 인생의 축복이었다.‘



보뱅을 의심한 내 자신을 다시한번 반성하며, 봄이라는 계절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힘든 시기를 견뎌낸 봄과, 지고지순한 사랑과, 보뱅의 아름다운 문장은 많이 닮아보인다. 그 안에 숨어 있는 슬픔 까지도 말이다.

[당신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늦장 부리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술도 한 잔 마신다. 그러고는 말하지 않은 한 가지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삶에서 시간이 얼마나 적은지, 일 년은 한번 짓는 미소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십 년은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당신에게 남겨지는 것은 단 하나의 행운, 단 하나의 축복뿐임을 생각한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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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03-30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리뷰 참 따뜻하네요.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더 확실해 졌어요.

새파랑 2025-03-30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뱅 정말 좋습니다~! 곰돌이님 후회하지 않으실거에요 ㅋ 조만간 보뱅 책탑 리뷰를 한번 써보겠습니다~!!

페넬로페 2025-03-30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뱅은 읽어야 할 숙제 같은 작가인데 아직 입니다. 빈 자리도 기대되네요^^

새파랑 2025-03-30 18:33   좋아요 1 | URL
보뱅은 페넬로페님 취향이실거라 확신합니다~!! 가끔 매운 작품 읽다가 순한 작품 생각나실때 읽으시면 좋을거 같아요~!!
 

몇년전에 사두고 안읽다가 이제서야 읽었는데...
뭐야 너무 좋잖아... 나머지 한강작가님 책들 다 구매해야 겠다.










아내의 몸에서 피멍을 처음 본 것은 늦은 오월의 일이었다. 관리실 옆 화단의 모란은 잘린 혀 같은 꽃이파리들을 뚝뚝 밸어대고, 노인정 어귀의 보도블록에는 분드러진 흰 라일락꽃들이 행인들의 구두 밑창에 엉기던 봄날이었다. (내 여자의 열매) - P9

어머니,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이 거리를 늙고 망가진 얼굴로 떠돌게 될 줄을 그때는 몰랐어요. 고향에서도 불행했고 고향 아닌 곳에서도 불행했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했을까요. (내 여자의 열매) - P34

해질녁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해질녁에 아이는, 여관방 창 너머로 아스라이 사위는 바다를 향해 걸어가고 싶어진다. 흙펄을 핧는 파도의 거품이 흰빛인지 황금빛인지 가까이서 보고 싶어진다. (해질녁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 P43

다음날 아이가 잠에서 깨있을 때 엄마는 없었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엄마가 떠났다는 것에 대한 실감이 없었고, 그렇다고 아주 떠난 게 아니라 곧 돌아올 것이라고도 희망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아이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저 생겨난 일대로 숨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견디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해질녁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 P91

바닷바람이 아이의 옷 속으로 파고든다. 오그라드는 가슴을 퍼려 애쓰며 아이는 계속해서 걸어간다. 무허가 주택들의 들쭉날쭉한 담벼락들이 흐린 시야 속에서 겹처진다. 해질녁의 개들이 어떤 기분일지 아이는 궁금하지 않다. 너무 아팠기 때문에, 오래 외로웠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이 순간 두려운 것이 없다.(해질녁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 P99

눈물로 세상을 버티려고 하지 마라

눈물 따위로 버틸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마

(아기 부처) - P119

나는 그의 흉터와 용기를 함께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바로 그 흉터가 나에게 안겨준 충격 때문에, 평생 숨기고 싶었을 알몸을 보여줄 만큼 나를 신뢰해준 데 대한 고마움 떼문에 그를 받아들였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기 부처) - P127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의 흉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이제 그 흉터 때문에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의 흉터가 다만 한 겹 얇은 살갖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다는 것이 내 마음의 얇은 한겹까지 벗겨내주지는 못했다. (아기 부처) - P134

삶이 얼마나 긴 것인지 몰랐던 죄, 몸이 시키는 대로 가지 않았던 죄, 분에 넘치는 정신을 꿈꿨던 죄, 분에 넘치는 사랑을 꿈꿨던 죄, 자신의 한계에 무지했던 죄, 그리고도 그를 증오했던 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가학했던 죄. (아기 부처) - P135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사는 것은 시간 낭비잖아요" - P137

나는 얼마나 어리석였나. 그 어리석음으로 서로를 망쳐면서도 그것을 몰랐나. 그것을 인내라고, 혹은 연민이라고 부르며 믿었으나, 과연 누구를 위한 인내였나. (아기 부처) - P159

어느 날 그는 빗방울이 전선에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한꺼번에 바꾸었다. 그러니 정말 흥미 있는 이야기는 그 뒤에 비로소 시작되지만, 일단 이 이야기는 그가 전선의 빗방울을 보기 전까지이다. (어느 날 그는) - P177

사랑이 뭔데?
그가 할 말을 잃고 있자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사랑이라는 게 만약 존재하는 거라면, 그 순간순간의 진실일 거야. 순간의 진실에 대해서 물은 거라면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영원을 믿어? 있지도 않은 영원이라는 걸 당신 힘으로 버텨내려고? 버터내볼 생각이야?
(어느 날 그는) - P208

사람도 그렇잖아.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좋아지지만, 그 순간에는 그것만이 가장 크고 중요한 진실이지만... 상황이 바뀌거나, 시간이 지나거나 하면 모든 것이 함께 바뀌어 버리잖아. (어느 날 그는) - P210

결국 영원한 건 없는 거야, 그렇지? ...영원한 건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살기가 훨씬 쉬위질지도 몰라. (어느 날 그는) - P210

집착하지 않는 성벽이었으므로, 사랑이란 대체로 집착을 통해 지속되는 것이므로, 그녀의 사랑은 쉽게 식었다. 민화는 자신의 사랑이 식었다는 것을 굳이 그에게 숨기지도 않았다. 숨길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 P211

그랬다. 그는 민화의 애정이 식어가는 과정을 보았다. 그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 과정을 똑똑히 목격하면서도 그것을 저지할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이었다. 그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무엇을 그렇게까지 잘못했단 말인가? 얼마나 큰 잘못에 대한 벌로 그녀는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어느 날 그는) - P231

그는 눈을 감았다. 델 것 같은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입술과 턱을 적신 그 눈물은 억센 힘줄이 드러난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 러닝셔츠로 번졌다. 바로 그 순간으로 인하여 그의 삶이 바뀌었으나, 그는 아직까지 그 변화를 실감하지 못한 채 무수한 그림자들의 춤추는 곡선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어느 날 그는) - P239

그때 그는 자신이 언젠가 일 년에 하루뿐인 초파일을 아쉬워했던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일 년에 하루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만큼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을까. (붉은 꽃 속에서) - P260

옛날에, 중국의 한 스님이 멀리 있는 다른 스님을 찾아갔어.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이 저물었지.
저쪽 방에 가서 주무시지요.
객스님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가, 도로 문을 열고 들어왔어. 이 객스님 하는 말이, 밖이 어둡습니다, 스님. 한데 이, 방에 있던 스님이 촛불을 켜서 건네주었다가, 객스님이 받자마자 후욱, 불어 꺼버렸어. 바로 그때, 초를 들고 섰던 객스님의 눈에서, 깨달음의 눈물이 흘러내린 거라. (붉은 꽃 속에서) - P261

나무들이 바라보는 쪽은 언제나 햇빛이 드는 쪽이다. 운동장의 저 나무는 밝은 곳에서 자란 덕분에 둥글고 의젓한 모양새로 가지를 뻗었지만, 그늘에 선 나무들의 가지는 예외 없이 간절하게 휘어 있다. 어떤 나무는 빛 속에서 태어나고 어떤 나무는 그늘에서 태어나나,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의 잎사귀는 똑같이 푸르다. 그들의 잎사귀는 햇빛을 향해 고스란히 펼쳐진다.
(붉은 꽃 속에서) - P266

밤새 그의 설익은 꿈은 작은 소리에 놀라 조각나곤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서 있는 그의 등을 누군가 떠밀었다. (붉은 꽃 속에서) - P269

신기한 것은, 순서 없이 떠오르는 그 기억들 속에서 어떤 감정이 솟아났을 때 그것을 잠자코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래서 그 감각과 생김새를 찬찬히 헤아리고 나면 어느 사이 그것이 사라져 있곤 한다는 것이었다. 사라지고 난 밝고 빈 마음속에서 그는 잠시 쉬었다. 다시 기억이나 감정이 솟으면 그것을 들여다보았고, 사라지고 나면 다시 쉬었다. 선방에서 나와 잠시 경내를 걸을 때면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폭우에 씻긴 듯 또렷해져 있곤 했다. (붉은 꽃 속에서) - P284

용담이 그 지등의 불을 불어 껐을 때, 서울 큰스님의 법문과 달리 덕산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기뻐하며 큰절을 했다. 그 불꽃이 꺼진 순간 그의 마음에 어떤 불이 켜졌을까. 어두우나 밝으나 오롯이 거기 있었던, 늘 거기 있었던 마음 한자리를 알았을까.
(붉은 꽃 속에서) - P287

불빛은 제가 불빛인 줄을 알았을까. 붉은 꽃 속에 제가 밝혀져 있었던 것을 알았을까. (붉은 꽃 속에서) - P287

서른 살이 되던 겨울, 어느 저녁 그여자는 세면대에서 발을 씻다 말고 갑자기 손을 멈춘다. 상처는 진작 아물어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가시덩굴이 날카롭게 그녀의 발을 찔러올 때 입술을 악물었던 그날의 햇빛, 눈이 아리도록 바다와 논배미와 비포장도로의 모래 먼지 위로 차올랐던 햇빛이 그녀의 차가운 발등 깊숙이 박힌다. (아홉 개의 이야기) - P294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를 걸을 때였지.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우리 상반신이 바싹 가까워졌지. 기억나?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뒷친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 소리를 낸 순간.
(아홉 개의 이야기) - P300

사람이 죽을 때 가장 마지막까지 님아 있는 감각은 청각이라고 남자는 들었다. 볼 수도 냄새 맡을 수도 고통을 느길 수도 없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승의 소리들은 귓전에 머물 것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태중에서 소리부터 들게 되는 것과 같이.
(아홉 개의 이야기) - P303

아주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만져지고 안 들리면, 꿈속같이 고요해지면, 그 캄캄한 곳에서, 그때 무서워하거나 쓸쓸해하지 말아.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아홉 개의 이야기) - P308

새의 시체가 썩어갈 때까지 나는 그것을 가지고 다녔어. 새의 온기가 사라지고 나자 이번에는 내 손의 온기가 그 싸늘한 새에게 옮겨졌고, 마침내 내 손이 새인지 새가 내 손인지 알수 없어졌지. 더 이상 가지고 다닐 수 없을 만큼 시체가 부패했을 때에야 그것을 철길 끝의 흙 둔덕에 묻었어. (철길을 흐르는 강) - P355

만일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으면 내 몸을 태워보아줘. 사리가 나올지도 몰라. 늑골과 늑골 사이에, 명치가 있던 자리를 잘 찾아봐. 거기 얹혀 있던 외로움이 뭉처서 독한 돌이 되어 있을 거야. 당신이 그랬지.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한번 외로운 사람은 영원히 외로운 사람이라고.
(철길을 흐르는 강) - P359

다만 꼭 한 장면만은 넣고 싶어. 그곳이 무슨 강이라고, 물에 뛰어드는 사람처럼 철길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벗어둔 어머니의 흰 구두. 아버지가 직접 만든 새 구두였지. (철길을 흐르는 강) - P370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세포들은 끊임없이 죽고 새로 만들어지는 일을 되풀이한다. 그렇게 체세포가 모두 바뀌는 데 칠 년의 주기가 걸린다고 들었다. 칠 년 동안, 내 세포들이 새것이 되었다. 내 눈과 귀와 코와 입술, 내장과 살갖과 근육 들이 소리 없이 몸을 바꾸었다. - P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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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보뱅. 너무 좋다. <환희의 인간>과 비슷한 느낌의 작품.


그에게 글쓰기는 빈 자리를 메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거기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부재와 함께 머물고 기다리며 존재를 감각하는 과정이다. - P127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 속 정원의 광채에 눈이 부신, 빛무리에 둘러싸인 동정녀처럼, 그녀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홀로 있다. 고독한 사람들은 시선을 끌어당겨서 그들을 외면하기란 불가능하다. 커다란 유흑을 젊어진 그들은 선명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당신 앞에 있지만 동시에 부재하는 사람에게로 향하는 관심을. - P11

그러나, 거기서 당신은 다른 것을 발견했다. 책을 만난 것이다. 책과 함께라면 당신은 더 이상 선택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독서는 대립 없는 삶이며, 선택의 강요로부터 면제된 삶이다. - P24

당신은 순서도 이유도 없이 읽는다. 독서는 강요될 수 없다. 누구도 당신을 대신해 그것을 결정할 수 없다. 독서는 사랑이나 맑은 날씨와 같아서 아무도, 심지어 당신조차도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읽으며, 당신이 읽는 것은 곧 당신 자신이다. 독서란 피의 유치원에서 스스로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오직 자신만이 발견해 낸, 결코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우는 일이다. - P25

우리는 아이에게 수없이 말한다. 어서 크라고 제촉하면서 나이가 주는 단조로움 속으로 아이를 밀어 넣는다.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말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는 욕망과 더는 자신을 돌보지 않으려는 은밀한 바람을 알아본다. 하지만 그런 빈말은 아이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 말은 아이의 공상 위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다. - P37

삶의 아주 초기에, 이미 모든 것은 너무 늦은 것이다. 삶의 아주 초기에, 이미 끝이 찾아온 것이다. 모든 삶은 그 기원부터, 그 여명부터 소멸을 항해 나아가도록 정해져 있다. - P37

사랑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른 이의 시선과 생각이라는,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으리라 절망했던 푸르른 섬들에 다다르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녀처럼 사랑하는 것은 더욱 감미로운 일이다. 부재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랑,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사랑. - P51

시간은 흐르고 마음은 지친다. 그래도 ‘그것‘ 그 초목의 잎, 그 빛. 그 이름이 있다. 때때로 당신은 그것을 마땅히 그래야 하듯, 그것이 요구하는 대로 따로 떨어져 고요 속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이 낡지 않고 변치 않았음을 보게 된다. 당신이 선택했던 처음 그날처럼 빛나고 있음을.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그것이 당신을 선택했고, 당신을 비추며, 당신을 그 자리에 머무르도록 붙잡고 있음을. - P70

당신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들은 당신에게 그 가치를 되돌려 준다. 그것은 오직 당신만의 것이고, 그렇기에 곧 당신 자신이 된다. - P71

그것 외에는 쓸 것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인생에서 노래할 것은 삶 속에서 사라진 사랑뿐이니까 그 사랑을 붙잡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죽어가는 꽃의 향기를 모으듯 글을 쓴다. 치유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꽃잎 위의 갈색 반점, 곧 사라질 젖니에 깨물린 흔적 같은 자국, 지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기다림 외에 당신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P82

사랑이란 단순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단순한 것은 신비롭다. 복잡한 것은 결코 신비롭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목소리만큼 단순한 것은 없다. 목소리만큼 신비로운 것은 없다. - P90

그녀가 자신의 삶에 대헤 이야기한다. 당신은 몇 시간이고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오직 성스러운 말, 시간의 겹에서 끌어낸 말만을 들을 것이다. 들리는 것은 오직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말뿐이다. 세상을 위해 쓰이는 다른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비인간적이고 병든 말이다. - P97

당신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늦장 부리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술도 한 잔 마신다. 그러고는 말하지 않은 한 가지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삶에서 시간이 얼마나 적은지, 일 년은 한번 짓는 미소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십 년은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당신에게 남겨지는 것은 단 하나의 행운, 단 하나의 축복뿐임을 생각한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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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3-26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간이 나왔는데,,, 모르고 있었네요.
보뱅 읽으면서 가끔 생각한건데 불어로 읽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했습니다.

새파랑 2025-03-26 21:10   좋아요 1 | URL
불어를 배웠어야 하는데 ㅜㅜ 보뱅은 진짜 감수성 천재 입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예술입니다~! 이번 작품도 좋아요~!!

페크pek0501 2025-03-27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우 중 보뱅이 너무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읽어 말어, 하고 있는데 그의 작품 중 하나만 읽는다면 무엇을 읽는 게 좋을까요?

새파랑 2025-03-27 16:22   좋아요 1 | URL
저는 <그리움의 정원에서>가 좋았는데 페크님에게는 <가벼운 마음> 이나 <환희의 인간>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