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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자리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주현 옮김 / 1984Books / 2025년 2월
평점 :
N25027
˝당신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들은 당신에게 그 가치를 되돌려 준다. 그것은 오직 당신만의 것이고, 그렇기에 곧 당신 자신이 된다.˝
내가 보뱅을 좋아하는걸 플친들은 대부분 아실거다. 왜 보뱅이 좋냐고 하면 주변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 한사람을 향한 순정,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가벼운 마음, 그 무엇도 계산하지 않는 순수함이 글에서 그대로 느껴져서 이다. 요즘 시대에 이런 글을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비슷한 느낌의 국내작가로 김연수 작가님이 떠오른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른 이의 시선과 생각이라는,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으리라 절망했던 푸르른 섬들에 다다르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녀처럼 사랑하는 것은 더욱 감미로운 일이다. 부재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랑,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사랑.] P.51
하지만 이전에 출판된 보뱅의 <마지막 욕망>을 읽고 좀 당황했었다. 내가 생각하던 보뱅의 글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우울하고 너무 흑화되어서 읽는게 힘들었다. 보뱅도 이렇게 우울함을 느끼는구나, 보뱅이 쓰는 문장과 다르게 그도 속마음으로는 힘들구나 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앞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좋지도 않았다... 기존에 국내에 출판되었던 작품들의 개정판이 나오는걸 보고 이제 국내에 출판할만한 보뱅의 다른 좋은 작품은 없겠구나 라고도 생각 했다. 이제 마지막이라니.....
그래서 <빈 자리>가 출판되었을 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좋은 작품이었으면 아마 진작에 출판되었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예전 같았으면 발매되자마자 바로 구매했겠지만, <빈 자리>는 몇주 지나서 구매했다.(그래봤자 한달 안에 구매함 ㅋ) 그런데 다 읽고 나서... 늦게 구매한 나의 어리석음을 반성할 수 밖에 없었다. 보뱅은 보뱅이었다. 보뱅이 보뱅했다. 이건 너무 좋아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시간은 흐르고 마음은 지친다. 그래도 ‘그것‘ 그 초목의 잎, 그 빛, 그 이름이 있다. 때때로 당신은 그것을 마땅히 그래야 하듯, 그것이 요구하는 대로 따로 떨어져 고요 속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이 낡지 않고 변치 않았음을 보게 된다. 당신이 선택했던 처음 그날처럼 빛나고 있음을.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그것이 당신을 선택했고, 당신을 비추며, 당신을 그 자리에 머무르도록 붙잡고 있음을.] P.70
누군가의 ‘빈 자리‘를 이렇게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누군가의 부재를 슬퍼하기 보다는 그것 하나 만으로도 추억이라고,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보뱅 이고 이 책 <빈 자리>가 바로 그 증거다.
[그것 외에는 쓸 것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인생에서 노래할 것은 삶 속에서 사라진 사랑뿐이니까 그 사랑을 붙잡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죽어가는 꽃의 향기를 모으듯 글을 쓴다. 치유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꽃잎 위의 갈색 반점, 곧 사라질 젖니에 깨물린 흔적 같은 자국, 지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기다림 외에 당신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82
<빈 자리>는 소설이 아닌 에세이다. 하지만 한편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이 책을 소설식으로 리뷰하자면 이런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느날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알게 되고 그 여자를 마음에 품는다. 하지만 그 여자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단지 옆에서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남자는 곁에 있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좋았다. 어느날 그녀는 죽는다. 존재하던 빈자리에서, 부재하는 빈자리가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글을 쓰면서 그녀를 추억하고, 그림속에서 책속에서 일상속에서 그녀를 떠올린다. 그녀의 빈자리는 슬픔이 아닌 짧은 내 인생의 축복이었다.‘
보뱅을 의심한 내 자신을 다시한번 반성하며, 봄이라는 계절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힘든 시기를 견뎌낸 봄과, 지고지순한 사랑과, 보뱅의 아름다운 문장은 많이 닮아보인다. 그 안에 숨어 있는 슬픔 까지도 말이다.
[당신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늦장 부리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술도 한 잔 마신다. 그러고는 말하지 않은 한 가지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삶에서 시간이 얼마나 적은지, 일 년은 한번 짓는 미소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십 년은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당신에게 남겨지는 것은 단 하나의 행운, 단 하나의 축복뿐임을 생각한다.] P.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