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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평점 :
N25069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한강작가님의 작품을 읽을때는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 절대 가볍게 읽을수 없기에, 읽고나서 한동안 우울감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왜 힘들걸 알면서도 읽느냐고 묻는다면, 한강 작가님의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강 작가님의 작품은 고통스럽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해준다.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이번에 내가 읽은 작품은 한강 작가님의 세번째 단편집인 <노랑무늬영원> 이다. 특징이라면 우울함은 여전하지만 더 짙어졌고, 기존의 단편집과 비교할때 서사가 복잡하며 좀더 인간 내면을 파고들었다는 점을 꼽고 싶다.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 모두 너무 좋았다. 완벽했다. 그중 몇 작품만 감성평을 적어보자면...
1. 회복하는 인간
주인공은 발목이 삐어서 한방 치료를 받다가 화상을 입는다. 그리고 화상에서 회복하는 과정에서 죽은 언니를 떠올린다.
통념속에서 살아갈수 없는 주인공과, 반대로 통념속에서 살아갔던 언니. 생각의 차이로 인해 주인공과 언니는 친해질수 없었고, 언니가 부탁해서 알게된 언니의 비밀 때문에 이후 언니와의 사이는 더 멀어진다. 그 간극은 언니가 투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가까워 지지 않았다. 언니의 사망은 그녀에게마음의 큰 상처로 남는다.
[난 정말 모르겠어,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갈 수있는지,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당신에게 등을 돌린 채 화장을 지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얼핏 어두워졌다. 거울을 통해 당신의 눈을 마주 보며 그녀는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 P.57
하지만 인간은 상처에서 치유된다. 마음이든, 몸이든 말이다. 발목의 상처가 나아지는것과 동시에 언니에 대한 마음의 상처도 점차 회복한다. 의지만 있다면 어떤 아픔도 언젠가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회복할 수 있다. 그게 인간의 강점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당신은 모른다. 목이 말라서 눈을 뜬 차가운 새벽, 기억할 수 없는 꿈 때문에 흠뻑 젖은 눈두덩을 세면대 위의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모른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당신의 손이 거푸 떨리리라는 것을 모른다. 한번도 입 밖으로 뱉어보지 않은 말들이 뜨거운 꼬챙이처럼 목구병을 찌르리라는 것을 모른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P.62
2. 에우로파
여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이해해주는 여자사람 친구 인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성 정체성이 있음에도 나는 인아에게 왠지 모를 감정을 느낀다. 그리움이려나.
[잊을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 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 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P.76
인아가 해준 여장을 한 나는 인아와 함께 밤거리를 걷는다.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인아가 나의 손을 잡고 걸어줬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님은 분명한데 어쩔수 없는 끌림. 어쩌면 여자인 인아에 대한 동경 인지도 모른다.
나와 인아의 관계는 영원하진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서로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이상한 관계를 포기하고 싶진 않다. 지금 두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간절히 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결코 이성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나직이 소리 내어 인아가 따라 웃는다.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존재하고 있는지 깨닫게 하는 웃음이다. 내가 얼마나 간절허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다.] P.93
3. 훈자
누구에게나 떠나고 싶은 이상향이 있을 것이다. 이 단편의 주인공에게는 '훈자'가 그곳이었다. 주인공은 만년설이 에워싸고 있고 살구꽃이 끝없이 피어 있다는 '훈자'라는 곳을 우연히 알게되고, 시간이 날때마다 그곳에 대한 정보를 찾아본다. 그리고 현실의 갑갑함을 느낄 때마다 '훈자'로의 탈출을 꿈꾼다, '훈자'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그여자는 훈자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수 없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 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P.117
하지만 직장과 가정과 육아라는 현실앞에서 주인공은 '훈자'를 생각하지 않게 된다. 대신 과거의 인상적이었던 순간들이나 잠시 떠올릴 뿐이었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 도망치고 싶은 '훈자'. 주인공이 느끼는 고통을 누가 이해줄까? 타인의 고통은 타인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무슨 말이든 해줘봐, 그 여자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계속 가야하는 건지, 당신이 대답해봐. 대답을 듣기 위해 눈을 감은 순간, 비틀어진 마른가지들을 통과한 주황색 햇빛이 그여자의 눈꺼풀을 찔렀다. 눈꺼풀이 홧홧 달아오르기 전에 그 여자는 눈을 부릅 떴다.] P.123
4. 파란돌
<바람이 분다 가라>가 연상되는 작품이었다. 아마 <바람이 분다 가라>의 뼈대가 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화자가 어린시절 사랑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은 친구의 외삼촌이였던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작품인데, 문장 하나하나에 그리움이 가득하다. 화자는 이제 그를 처음 만났을때 그의 나이인 서른 일곱살이 되었고 첫사랑이었던 그를 떠올린다.
[내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의 목소리는 언제나 낮고 부드러웠지요. 실은, 일부러 못 들은 척 해 두 번 부르게 한 적도 여러 번 이었습니다. 그 목소리에 처음 가슴이 두근거린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처음 당신을 사랑하기 된 것이 언제 인지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당신의 얼굴이 내 눈 앞 어딘가에 어렴풋한 그림자처럼 자리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이미 모든 사물 위로 아련히 어려있고, 놀라 눈을 감으면 어두운 눈꺼플 위로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그 느낌이 강한 슬픔과 닮아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P.145
결혼한적은 없고, 무언가에 부딪히지 않아도 피멍이 들곤했던 나약했던 그사람, 아파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지만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던 그사람, 하지만 나 때문에 살아야겠다고 은연중에 고백했던 그사람. 화자는 그사람과 어린시절 잠시 인연이었을 뿐이었다. 이제는 몇십년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 그 순간들과 그의 말들은 선명하다. 나는 지금의 현실이 고달퍼 죽고싶기도 하지만, 삶에 대한 그사람의 희망이 떠올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한다. 그사람은 그곳에서 잘 살고 있을까?
[거긴 지낼 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영원히 가져오지 못하게 된 감자 생각은 잊었나요. 오래전 꾸었다는 꿈속의 당신, 부풀어 오른 팔로 파란 돌을 건지고 있나요. 물의 감축이 느껴지나요. 햇빛이 느겨지나요.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P.154
그런 기억이 있다. 어떻게는 잊혀지지 않고, 어느순간 선명하게 떠오르며, 그때 그 순간 만으로도 나를 살아가게 하는 기억. 어떤 시간은 흐르지 않고 그시절에 멈춰 있기도 한다. 좋은 기억이든, 안좋은 기억이든 간에.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 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때문입니다.] P.154
5. 노랑무늬영원
노랑무늬영원을 아시나요? 표제작인 이 단편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작품이기도 했다. 회복하는 인간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화가인 나는 출근길에 차를 몰다가 길에서 개를 만나고, 개를 피하려다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한다. 왼손은 으스러지고 오른손도 못쓰는 상태가 된 나는, 병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누워서 지내만 하는 신세가 된다. 몸이 아프기 전에는 몰랐으나 아프고 나니 모든게 망가졌다. 다정했던 남편은 병수발에 지쳐나가고, 엄마는 더이상 엄마가 아니었다.
[나는 이제 그 말을 이해한다. 남편이 사랑스럽지 않아진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이 메말랐다. 내 사랑이 마르자 삶이 사막이 되었다. 내 사랑이 말라서, 나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P.290
이년이 지난 후 퇴원했지만 상태는 더 안좋아졌다. 남편의 지친 모습에서는 사랑이 없었고, 나의 전부였던 그림은 이제 더이상 그릴 수 없게 되었다. 더이상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밑바닥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그중 하나는 아주 예전에 잠시 스쳐간 인성이라는 남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사진관에 찍힌 나의 사진을 보고 소진이라는 친구가 연락을 줘서 떠올린 인성. 그는 내가 병원에서 재활하는 동안 낯선 타국에서 죽어갔지만, 그에 대한 연민때문인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전혀 모르는 남자의 이미지가, 십 년이 지난 지금 되살아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있다. 만일 내가 그 남자와 수작을 나눴다면 이렇게 밝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와 나눈 것은 침묵이었다. 비장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그저 침묵.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깊이 새겨진 몸의 따스함.] P.270
다른 하나는 친구인 소진의 집에서 본 도마뱀 노랑무늬영원. 앞발이 잘려나갔음에도 다시 새발이 자라서 살아가는 노랑무늬영원을 본 나는 삶의 의지를 다시한번 느낀다. 영원이란 단지 학명일 뿐이지만, 그 단어가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거, 이름 있니? 나는 묻는다. 영원이요. 영원? 네.노랑무늬영원.] P.274
다시 작업실에 간 나는 다시 한번 그림에 대한 의지를 다진다. 인간은 회복할수 있기 때문에 나약하지 않다. 의지만 있다면 영원할 수 있다. 인간은 강하다.
[어디까지 왔나, 하고 나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어디까지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미간을 모은다. 물감이 빳빳하게 굳은 두손을들어 올려 석양에 비추어본다. 뚜렷한 손가락뼈와 관절들 사이로 늦은여름의 플라타너스 잎들이 소리없이 몸을뒤집고 있다. 저것은 빛인가. 저것은 아름다움인가. 생명인가. 다만 그렇게 나는 서있다. 말없이.] P.295
매번 읽을때마다 바뀌는 거 같은데, 한강작가님 단편집 중 <노랑무늬영원>이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한강작가님 전작읽기 중 <그대의 차가운 손> 한작품만 남았다. 이런 위대한 작품들을 원어로 읽을 수 있다니 너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