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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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63

"그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우리가 언제나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새소리를 들으려면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걸."


작가의 초기작을 읽는다는 건 정말 흥미롭다. 지금과는 다른 초기작품만의 참신함, 풋풋함, 생동감, 미숙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과 음악은 또 다르다. 음악의 경우는 초기작이 명반인 경우가 종종 있지만, 문학은 초기작이 명작인 경우는 별로 못본것 같다. 아마 문학은 참신성 보다는 깊이를 더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갑자기 쓸데없는 이야기를 적은것 같다...


최근에 어려운 책(아우스터리츠...)을 읽어서 오늘은 좀 잘읽히고 재미있는 책을 읽고 싶었기에 선택한 책이 바로 김연수 작가님의 초기 단편집인 <스무살>이다. 나의 선택은 훌륭했다. 대만족 이었다.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는건가 싶었다. 김연수 작가님의 다른 명작들에 비해 완성도라든지 깊이가 떨어지는건 분명 있었지만 정말 참신했다. 그리고 책 제목처럼 작품마다에서 젊음이 느껴졌다. 나는 스무살 때 뭘 하고 있었을까?

[열심히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일도 하지 않든 스무 살은 곧 지나간다.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은 우리를 세월 속으로 밀어넣고 저희끼리만 저만치 등뒤에 남는 것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도 더 빨리 우리 기억 속에서 마르는 스무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P.9



<스무살>에는 총 9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인 <스무살>은 자전적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인데, 읽다보면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햇갈리기도 했다. 김연수 작가님의 스무살 에피소드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스무살에 그저 별뜻없이 들어간 대학 영문과, 그리고 그 시대에 일상이었던 데모, 사랑, 아르바이트까지 스무살의 추억이 가득한 작품이었다. 나의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그들은 지금 뭘 하고 살고 있을까?

[세상에서 단 한 번 가까위졌다가 멀어지는 별들처럼 스무 살, 제일 가까워졌을 때로부터 다들 지금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따금 먼 곳에 있는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다. 이 말 역시 우스운 말이지만, 부디 잘 살기를 바란다. 모두들.] P.44



<죽지 않는 인간>도 비슷한 느낌의 자전적인 작품이다. 뭔가 특별한 이야기는 없다. 다만 나를 스쳐지나간 소중한 사람들이 등장할 뿐이었다. 동료 작가이자 요절한 J, 레고드가게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이별할 수 밖에 없었던 서연, 만나본적은 없지만 나의 음성사서함에 자신의 고민을 털어놨던 승미,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작가님은 그들이 현실에서 사라졌다 하더라도, 다시 만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글을 통해 그들을 추억한다면, 소설속에서 되살린다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불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간 나는 이 세계가 너무나 두려웠어요. 언제나 혼자라는 느낌뿐이었는데, 일단 나 자신을 구할 능력이 없다는 건 분명했지요. 당신 역시 나를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나 외엔, 그 무엇으로부터도 단절되어 있는 아이였으니까. 고립. 뭐, 그런 단어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이죠.] P.225



특이한 소재의 작품들도 상당히 좋았다. 죽을정도로 완벽한 롤러코스터에 대한 이야기인 <마지막 롤러코스터>, 선풍기 수집가와 희귀본 수집가라는 특이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공야장 도서관 음모사건>, 한편의 느와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작품인 <사랑이여, 영원하라!>, 인화한 사진에 자신의 모습이 찍힌 걸 본 승민, 그리고 그런 승민의 도플갱어인 '나',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사람의 공허한 청춘을 흥미롭게 연결시킨 <뒈져버린 도플갱어>까지, 완벽함 보다는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었다.

[예컨대 선생 역시 불후의 소설을 쓰게 된다면. 그후에는 소설가로서 존재의의가 사라집니다. 불후의 소설을 이미 썼으니까요. 저라면 만약 불후의 소설을 쓰게 된다고 해도 그 소설을 발표하진 않을 겁니다. 자신의 존재의의를 스스로 없애버리는 우를 저지르고 싶진 않으니까요.] P.116



이제 김연수 작가님의 <7번국도>만 읽으면 소설은 다 읽게 된다. 시원섭섭하다. <7번국도>는 7월에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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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6-30 1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스무 살> 좋아해요. 뭔가 딱 몽글몽글한 그 젊을 때만 쓸 수 있는 감성이 살아 있지 않나요? 자전적 이야기라 해서 더더욱요. 드디어 대망의 김연수 작가 전작을 마치게 되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7번국도>도 진짜 좋았어요.김연수 작가가 새파랑님 서재에 오셔서 보시면 흡족해하실 것 같아요. ^^ 박상영 작가 에세이집에 등장한 김연수 작가 실제 모습도 딱 기대한 그 모습 그대로더라고요.

새파랑 2025-06-30 20:35   좋아요 0 | URL
작품에서 젊음이 막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얼마전에 동네책방에서 ‘디 에센셜 김연수‘를 구매햏는데 사장님께서 저랑 김연수작가님이랑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하시더라구요 ㅋ영광이었습니다~ 7번국도도 기대가 됩니다~!!!
 
부오니시모, 나폴리 위픽
정대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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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57

"자기 삶을 사랑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우리는 왜 남들의 인정을 받아야지만 겨우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구는 것인지."


맛있는 피자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피자를 맛있게 먹어본 적은 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멋진 관광지, 맛집, 맛있는 커피라도 그다지 특별할 건 없다. 특별함을 만드는 건 타이밍, 그리고 누구와 함께 였냐는 거다.


최근 <급류>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정대건 작가님의 위픽 시리즈인 <부오니시모, 나폴리>를 읽고나서 위와 같은 생각을 했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를 떠올려 봤다. 분명히 있을 것이다. 특별한 순간들, 그건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거다.


'나이 성별 무관 같이 피자 먹고 재밌게 노실 분.' 나폴리 여행 중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동행' 글을 보고 네명의 남여가 모인다. 그 무리중 한명은 주인공인 '선화'이고, 한명은 '한'이라는 남자였다. 왜 그들은 나폴리로 왔던 것일까?


한번도 경로를 이탈한적이 없는 삶을 살아왔던 '선화'였지만, 2년간 사귄 남자친구와 결혼을 준비하면서 사소한 문제로 다투다가 결국 파혼하게 되고, 한국의 삶이 싫어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던 중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님>의 배경인 나폴리로 무작정 오게 되었다.

[실은 내가 그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데도 결혼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남들처럼 해야해서. 대학 입학, 취업, 그다음은 결혼이라는
과업대로 살아온 내게.] P.26

[정해진 경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안 될 것 같은 게 꼭 내 몸에 갇힌 기분이었어요.] P.28


'한'은 좀 특이했다. 그는 여행자가 아니었고, 나폴리에서 피자를 배우고 있는 요리사였다. 20대 후반에 크게 교통사고를 당한 후 남은 은생을 행복하게 살기위해 무작적 나폴리로 왔고 이곳에서 요리를 배우기로 한 것이었다. '한'에게는 다른 고민도 있었다. 바로 자신의 성 정체성이었다. 연애에 있어서 수동적이고 소극적이었던 '한', 다가가기 보다는 다가오는 걸 원하는 좋아하는 '한'에게 사랑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한은 상대방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이 먼저 욕망하는 시늉을 해야 할 때마다, 초등학교 학예회 때 억지로 무대에 올라 자신에게 맞지 않는 역할을 연기하던 순간처럼 느껴지고 고통스러웠다.] P.50

[만지는 것보다 만져지는 걸 좋아해요. 세상이 정한 성 역할이 아니라 둘만의 사랑이 하고 싶어요.] P.55


낯선 타국에서 두 사람은 친하게 지낸다. 원래는 잠깐 머물다 떠날 예정이었던 '선화'는 나폴리에 더 머물게 되고, 두 사람은 나폴리를 여향하면서 피자도 함께 먹으면서 서로의 과거를 이야기 하면서 더욱 친밀해 지고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가족조차 하지못했던 이해.

[자기 삶을 사랑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우리는 왜 남들의 인정을 받아야지만 겨우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구는 것인지.] P.73


두 사람의 감정은 미묘하게 흐른다. 일반적으로 정해진 사랑(결혼)의 범주가 싫어 한국을 떠난 '선화'는 '한'에게 호감을 느끼고, '한'의 성 정체성을 아는 그녀는 먼저 다가갈지 말지 고민한다. 분명 내가 먼저 다가가면 우리의 관계는 더이상 타인이 아니게 될테지만, 과연 이게 맞는 걸까? 그와의 만남을 좋은 추억으로 남겨야 할지, 새로운 사랑의 시작으로 해야 할지 사이에서 두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까?

[한순간의 선택이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생각하면 지금도 종종 놀라곤 한다.] P.83


짧은 단편이었지만 상당히 재미있었고, 많은 걸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었다. 위픽시리즈가 작품별로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데, 이 작품은 극호였다. 정대건 작가님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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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6-28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사연 없이도 그냥 훌쩍 떠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나폴리로 떠나고 싶네요. 저는 맛있는 피자를 맛있게 먹어요 ㅎㅎ

새파랑 2025-06-29 11:44   좋아요 1 | URL
맛있는 피자는 어디가어 먹을수 있나요? ㅋ 저는 나폴리까지는 아니고 어디 조용한데 와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ㅋ즐거운 일요일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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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56

"그때 떠오른 것이 고향이었다. 십수 년 동안 돌아갈 생각을 품어보지 않았던 고향이었는데, 막상 하행선에 오르자 정환의 마음은 설레었다. 때는 봄이었다. 정환의 고항은 종착역이었으므로 다소 방심한 채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고향의 변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한강작가님 작품 읽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번에 읽은 작품은 첫 단편집인 <여수의 사랑> 이다. 첫 단편집인 데다가 제목 때문에 최근 작품들보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작가님은 첫 작품때부터 이미 본연의 색깔이 있었었다. 이 작품 역시 우울 그 자체였다.


한강작가님 단편의 특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 단편집 역시 단 한사람의 불행한 인생이 아닌, 서로 연관이 없는 여러사람의 불행을 그린다. 그런데 그 불행은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결국 이어진다. 우리의 인간관계처럼.


표제작 포함 총 여섯편의 작품 모두 좋았었는데, 특이하게도 이 작품집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고향과 가족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 고향과 가족이 우리 자신의 출발점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뭔가 암시하는 메세지가 있는 듯 하다.


여섯편의 단편중 특히 인상깊었던 두 작품을 소개해 보자면,


1. 여수의 사랑

두명의 상처입은 사람이 등장한다. 한명은 어린시절 아버지와 동생의 동반자살에서 살아남은 '나'이고, 한명은 친부모에게서 버려진 자흔이다. 자취방을 함께 쓸 사람을 구하던 '나'는 우연히 자흔을 만난다. 그리고 함께 살게 된다. 첫 만남 당시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알지 못했다.

[다만 신기한 것은 때때로 자흔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모든 것에 지쳤으나 결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은 것 같은 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이 순간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어둠을 지워내버리곤 했다. 그런 자흔을 보면서 나는 종종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희망 없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의아해지곤 했던 것이었다.] P.33


게다가 두 사람은 전혀 성향이 전혀 달랐다. 나는 심하게 결벽증이 있었고, 반대로 자흔은 무던했다. 아니 무던하기 보다는 어떤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함부러 다뤘다. 어느날 나의 고향이 여수라는걸 알게 되자 자흔은 반가움을 표시하면서 여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과거의 나쁜기억 때문에 여수를 싫어했고 자흔과 여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흔은 여수에 대한 사랑을 나에게 표현했다.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그러는 걸까?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죠. 여수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요.] P.44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된다. 자흔이 떠난 후 나는 자흔이 너무 사랑했던, 자흔이 고향이라 믿었던 여수행 기차를 타고 떠난다. 나에게는 불행 그 자체였던 여수지만, 이번 방문을 통해 나의 불행한 과거를 조금은 지워낼 수 있을까? 나도 여수를 사랑으로 떠올릴 수 있을까?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난 너무 기뻐서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있이요,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결 그때 난 처음 알았어요. 별게 아니있이요. 저 정다운 하들,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이요....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지요.] P.56




2. 야간열차

다시 돌아오지 않을, 어딘가로 떠날 곳을 정한 사람의 마음은 어떤걸까? 술에 취한 동걸은 청량리에서 동해로 떠나는 야간열차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동걸이 실제로 타본적은 없는 야간열차.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동걸과 함께 야간 열차를 타기로 한다. 하지만 약속한 당일에 동걸은 나타나지 않는다. 왜그랬던걸까?

[동결은 그 영동ㆍ태백선 통일호가 서는 역의 이름을 모두 꿰고 있었다. 태백선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추전역사를 지날 때 차창 밖에 일렁이는 어둠과, 묵호역과 옥계역을 잇는 광막한 해안선을 묘사할 때면 그의 눈은 이상스런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P.147


동걸은 홀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평소에는 열심히 생활해서 완벽해 보이는 동걸이지만 술을 마시기만 하면 어딘지 모르게 외로운 모습을 보인다. 술에 취할 때마다 야간 열차를 타고 떠나겠다고 말하는 동걸, 하지만 한번도 야간열차를 타본적이 없는 동걸, 어떤 사연이 있는걸까?

["나는 야간열차를 타고 떠나겠어"라고 말하는 동걸의 취한 얼굴에는 녀석답지 않게 무언가 사는 일을 귀찮아하는 듯한 그늘이 어려 있었다. 밤 열한 시에 기차에 오르면 그만인 것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다. 환청으로까지 열차 소리를 들으면서 왜 떠나지 못하는가] P.152


동걸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까? 동걸이 입에 달고 살던 야간열차를 이제는 내가 타고싶어 하게 되었다. 동걸과 달리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 삶에 대한 별다른 열정이 없던 나는 제대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히 동걸을 찾아가 함께 술을 마신다. 나는 동걸에게 야간열차를 기억하냐고 물었지만 동걸은 다 잊었다고 한다. 그날밤 나는 동걸의 집에서 자게 되고, 동걸에게 쌍둥이 남동생이 있다는걸 알게 된다. 친구에게도 숨긴 남동생의 존재,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 상태의 남동생 동주가 동걸의 아픔이었고, 동걸이 야간열차를 타고 떠나고 싶어했던 이유였던 것이다.

[떠나리라는 것 때문에 동걸은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강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탈출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켜줄 야간열차가 있으므로 그는 어떤 완성된 인생도 선망할 필요가 없었다. 살아가며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오욕들에게도 그는 무신경할 수 있었다.] P.175


그날 밤 나는 동걸 대신 동해행 야간열차를 탄다. 많은 불행을 짊어진 동걸과 다르게 아무것도 하는것 없이 그냥저냥 살아온 나. 동걸의 불행에 비할 수는 없지만 나 역시 불행했다. 삶의 목표가 없었기에, 인생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에 말이다. 야간열치를 타고 돌아오면 나의 불행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동걸도 야간열차를 타고 떠날 수 있을까?

[아버지를 비롯하여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미래를 걱정했다. 니는 남들이 하는 취직 공부나 학점 관리에 마음을 써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P.184




다른 작품도 다 인상적이었다. <어둠의 사육제>에서는 고향을 떠나와서 독립했지만 고향언니인 인숙언니에게 사기를 당해 독하게 살기로 한 나와, 교통사고로 인해 가족을 잃고나서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명환의 어둠을 평행하게 보여주고,

<질주>에서는 어릴적 동네아이들에게 맞아 죽은 동생 진규로 인해 그를 구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평생 살아온 인규와 잊으로고 했지만 언제나 마음속의 아픔으로 간직했던 어머니의 불행을 대비해서 보여준다.

<진달래 능선>에서는 가족을 버리고 고향에서 몰래 도망쳤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환과 심장병으로 죽은 딸아이를 그리워 하며 매일 딸이 좋아하는 나무를 태우는 황씨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붉은 닻>에서는 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로 인해 괴롭게 살아가는 동영 동식 형제와 어머니의 상실과 치유를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무게는 다르겠지만 아픔을 느끼는건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아픔을 벗어나기 힘들다. 하지만 서로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그 아픔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갈 이유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함께 살아가야 하나보다. 나의 아픔과 당신의 아픔은 결코 다르지 않고 결국 이어진다.

이렇게 우울한 내용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는 작가님의 질문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던것 같다. 한강작가님의 이 단편집 너무 좋다.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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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6-20 1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울한 내용 중에도 희망을 볼 수 있어 한강 작가의 글을 좋아해요.
세상을 워낙 깊게 들여다보는 작가라
내용이 우울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새파랑 2025-06-21 18:50   좋아요 1 | URL
제가 좀 우울한걸 좋아해서 ㅋ 한강작가님 작품 읽다보면 깊이가 느껴집니다~!! 아직도 안읽은 한강작가님 책이 많아서 너무 좋습니다!
 

테니스 너무 즐겁다.

날씨 핑계 대지 말 것 - P27

공을 끝까지 보세요 - P42

언제 어떻게든 공은 날아온다. 공이 라인 근처에 애매하게 떨어지고 있다면 일단 준비하자. 공을 칠까 말까 할 땐 치는게 차라리 낫다. 라인은 생각보다 두껍다. 그리고 라인 위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두꺼운 라인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는 코트 위에 선 자의 문이다. 그 선택이 인생에서 어떤 포인트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삶이라는 코트에서 조금씩 이기는 유일한 방법 같다. - P70

제3의 장소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공간의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중립적인 성격을 지니며, 대화가 중심이 된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개개인을 존중해 즐겁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 휴식과 재충전이 가능하다. 올든버그는 제3의 장소가 근본적으로 집과 다르지만, 심리적인 편안함과 지지받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집의 성격과 흡사하다고 덧붙였다. - P87

테니스를 같이 치는 건 상황에 따라 이루기 쉽기도, 어렵기도 하다. 우선 코트가 필요하다. 그리고 서로 시간을 맞춰야 한다. 여기에 실력이 비슷해야 원만한 게임이 가능하다. 누군가 테니스 동호회(이하 클럽)에 속해 있고 그 클럽이 손님을 받는다면 상대를 정기 모임에 초대할 수도 있다. 하나라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 한번 밥 먹어요"처럼 지나가는 말이 되어버린다. - P95

달리기나 수영 같은 건 자기 혼자 못하거나 천천히 해도 괜찮아. 테니스는 상대가 없으면 못 쳐. 본인이 못 치면 상대가 잘 안 해주려고 들어. 우선 랠리가 돼야 하니까. 공 한 번씩 넘기고 끝나면 재미없잖아. 세 번, 다섯 번 넘기고 또 열 번씩 넘기고 그래야 홍도 나고 재미가 있지. 그럴 때 희열을 느낀단 말이야.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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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커포티 선집 3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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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55

"내가 찾아낸 방법 중에 가장 효과적인 건 그저 택시를 잡아타고 티파니에 가는 거에요.


그런 사람이 있다,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 그들은 한곳에 머물수 없다. 잠시 붙잡아 두더라도 곧 떠난다. 그럼에도 슬퍼하거나 실망할 순 없다.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했던 거니까.


트루먼 커포티 전작읽기 세번째 작품으로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읽었다. 오드리 햅번 주연의 영화도 있다는데 보진 못했지만 나도 제목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건 안다. 책을 읽고 나서 영화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으로만 읽어도 매력적인데 영상으로 보는 오드리 햅번의 '홀리 골라이틀리'는 얼마나 매력적일까.

["난 절대 추태를 부리지 않을 거야. 게다가 맹세컨대, 홀리를 두고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네. 그런 생각 없이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 사랑하면서도 낯선 사이로 남을 수 있어. 친구이면서 낯선 사람."] P.18




이 책은 작가이자 화자인 '나'가 아프리카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십여년 전에 뉴욕을 떠난 '홀리 골라이틀리'를 떠올리면서 시작한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열아홉살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너무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히피와 비슷한 느낌?

[언뜻 보기에는 보통의 원시 목각과 닮았다. 하지만 원시 조각은 아니었다. 여기 있는 이 조각은 홀리 골라이틀리를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검은색 물체가 사람을 닮을 수 있는 한계에서는 최대로 닮았다.] P.14




매력적인 그녀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 대부분은 그녀에게 호감을 갖는다. 연애인 매니저, 재벌, 심지어 감옥에 갖혀있는 죄수까지도. 그녀는 배우로 성공할 수도 있었고 재벌집 부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안락한 생활 대신 술집과 사교계를 전전하며 그들에게 돈을 받고 생활한다. 여왕벌처럼 군림한다. 그리고 내가 사는 허름한 아파트 윗집에서 지낸다.

[난들 부자고 유명해지는 게 싫겠어요? 그것도 내 계획에 있답니다. 언젠가는 거기까지 이르도록 노력할 거고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난 내 자존심이 졸졸 따라왔으면 좋겠어요. 내가 어느 맑은 날 아침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는다고 해도 여전히 나이고 싶어요.] P.55




같이 사는 사람은 자주 바뀐다. 그리고 비좁은 그곳에서 매일 파티를 연다. 그녀를 추앙하는 많은 사람들이 매번 모인다. 그들 사이에서 질투가 날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정말 그들은 '홀리 골라이틀리'를 추앙한다. 도대체 어떤 매력때문에 아무 남자나 만나고 다니는 그녀에게 사람들은 끌리는걸까?




아마 어느 곳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며, 법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사람을 바라볼때 생기는 동경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심지어 그녀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고양이에게 이름도 붙이지 않는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지 않아서, 언제든 떠나야 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독립된 존재니까.




하지만 마음 한켠에 불안한 마음은 있다. 어느곳에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만 살았는데, 알고보니 그게 아니면 어쩌나 하는 것. 그녀는 마약사건에 연루되어 어쩔수 없이 뉴욕을 떠나게 되면서 이런 걱정을 잠시 한다. 과연 그녀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티파니에서 아침을' 볼 수 있을까?

["나 너무 두려워요. 친구. 그래, 드디어. 이런 식으로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으니까. 내던져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게 내 것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거야. 심술굿은 빨강,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P.154




그녀가 어디에 있든 언젠가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기를 바래본다. 그녀의 고양이가 결국 자신의 안식처를 찾은것처럼.

[그는 따뜻해 보이는 방안 창문에 앉아 있었다. 나는 고양이의 이름이 무얼까 궁금했다. 이제는 분명히
이름이 생겼을 테니까. 분명히 어딘가 자기가 속할 수 있는 자리에 다다랐을 테니까. 아프리카 오두막이든 어디든, 이젠 홀리도 그런 자리를 찾았기를 바랄 뿐.]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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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6-06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안 보셨다구요?
얼른 영화보시길요, ㅎㅎ
오드리 헵번도 멋지고
남자 주인공도 좋아요^^

새파랑 2025-06-09 08:53   좋아요 1 | URL
제가 약간 영화를 잘안봐서... 영화가 아주 좋나 보군요. 여름휴가때 봐야겠습니다~!!!

바람돌이 2025-06-07 2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영화를 안본분을 만나다니... 안본 눈 부럽습니다. ㅎㅎ 근데 책에서 보여지는 홀리와 영화속 홀리는 좀 다르네요. 영화를 본지 오래돼서 긔억이 가물가물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요. ^^

새파랑 2025-06-09 08:54   좋아요 1 | URL
제가 천만 넘은 영화도 안본게 많아요 ㅋㅋ영화랑 별로 안침함~~!!

해설 읽어보면 영화랑 책이랑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바람돌이님 기억력 완전 좋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