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피츠제럴드란 생각이 들었다.


관계를 끊고자 하는 사람들 목록에는 지난 2년을 그들과 함께 보낸 사람의 4분의3이 포함되었다. 그렇게 한 것은 속물적인 태도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러다가 인간관계가 영원히 끊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약간의 두려움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 P43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인생에 끼어들었어." 넬슨이 말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저항할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끼어든 사람이 아무도 없던 첫해에 우린 정말 행복했었잖아." 니콜도 동의했다. "우리가 계속 단둘이 있을 수 있었다면ㅡ진실로 단둘이 있을 수 있었다면 우린 뭔가 우리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거야. 이젠 그렇게 해보자. 그럴 거지, 넬슨?" - P55

"그녀는 멋진 여자였어. 최고의 여자였지. 그녀에겐 인간성이 라는 게 있었어." 그는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초래했으며, 거기에는 어떤 보상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깨 달았다. 그는 또, 이렇게 혼자 떠남으로써 자신이 다시 그녀만큼이나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모든 것이 균형을 찾고 동등해진 것이다. - P108

마일스는 손을 대는 모든 것에 뭔가 마법을 걸었어. 조언은 생각했다. 심지어 저 근본 없는 여자에게도 생명을 불어넣어서 일종의 걸작으로 만들었잖아.
그러고 나서 생각했다.
‘그는 이 끔찍한 황야에 큰 구멍을 남겼다. 이미 헤아릴 수 없이 큰 구멍을!‘
그런 다음 어떤 씁쓸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아, 그래, 난 돌아올 거야. 돌아오고말고!‘ - P152

문득 자신이 얼마나 인생을 사랑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직 외출할 상태가 아닌데 너무 일찍 외출을 강행한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 P208

"그것은 우리가 싸울 수 있는 어떤 것과도 차원이 달라요.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이길 수 없는 것이에요. 그 사람은 제 손목을 심하게 비틀어서 접질리게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해도 저에겐 크게 문제되지 않을 거예요. 진짜 문제는 어떻게 해도 그런 사람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이고, 저로서는 그 사실이 몹 시 괴롭고 낙담스러워요.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거 말이에요"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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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12-25 0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이 책은 스콧 피츠제럴드보다 하루키가 더 생각나기도 하네요 읽지는 않았지만... 새파랑 님 성탄절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3-12-26 08:17   좋아요 1 | URL
희선님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ㅋ 이제 올해가 얼마 안남았습니다. 마무리 잘하세요~!!

페크pek0501 2023-12-26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같은 책이 있어 헷갈렸어요. ㅋㅋ 이건 재밌나 봅니다.

새파랑 2023-12-30 10:59   좋아요 0 | URL
피터 한트케의 작품명이랑 똑같더라구요 ㅋ 재미있게 읽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서 내용이 잘 기억이 안납니다.... ㅜㅜ
 
지극히 낮으신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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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87

"잉크로 쓰인 모든 길을 웃음으로 해방시킨 지슬렌 마리옹에게"


<지극히 낮으신>을 읽고나면 저연스럽게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를 검색할 수 밖에 없다. 1181년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태어난 그는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그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프란치스코처럼 헌신했던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 성인이다.(라고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린다고 하자. 그녀는 올 것이다. 그렇게 말했으니까. 약속했으니까. 이 길을 따라 올 것이다. 우리는 지평선에 눈을 고정하고 그 풍경을 바라본다. (그녀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이미 여기 와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풍경 속에는 다양한 규모의 대상들(숲, 집, 도로)이 있다. 마침내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그것들이 풍경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길 끝에 보이는 가느다란 실루엣이 대번 숲과 집들과 도로보다 더 커다랗게 보인다. 측량기사의 눈에는 먼 곳의 한 작은 점에 불과한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온 우주보다 더 큰 무엇이 된다. 우리는 바라는 것을 보기 마련이다. 우리의 희망에 상응하여 보기 마련이다. ] P.44



보뱅은 이 작품에서, 성경의 한 구절과 그의 삶을 바탕으로 하느님과 믿음과 사랑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성경의 한 구절은 바로 이것이다.

'아이는 천사와 함께 떠났고, 개가 그 뒤를 따라갔다.'

당신은 이 문장에서 무엇이 보입니까? 처음 읽을때는 그냥 그런 문장이었지만, 다시 읽었을때는 확실히 '개'가 눈에 들어온다. '개' 라고? 보뱅 처럼 나도 아이와 천사를 따라가는 '개'가 그려졌다. 때로는 앞으로 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옆에서 나란히 걷기도 하고, 뒤에서서 앞서가는 아이와 천사를 보며 멍멍 짓는 '개'의 모습. 아무 댓가없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따라가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자 순수한 마음이 아닐까?

[이 문장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에게 딱 들어맞는다. 우린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지만,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리니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고 믿으며 그 사람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의 참 모습을 놓치기 일쑤니까. ] P.12



'보뱅'이 그린 '프란체스코'의 모습은 마냥 성스롭지는 않다, 일반적인 남자의 모습이다, 단지 남들보다 더 자신에 대한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이 크고 남들보다 더 순수하고 연민을 느낄 뿐이다. 왜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잃어가는 걸까?

[그렇긴 해도 그에겐 할 말이 조금 더 남아 있다. 그가 말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너를 그렇게 조금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너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서, 사랑할 줄 몰라서 미안하다고, 빛에 다가갈수록 어둠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사랑을 할수록 자신이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사랑에선 진전도, 언젠가 도달할 수 있는 완벽의 지점도 없기 때문이다. 어른스럽고 성숙하며 이성적인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 앞에선 어른이 없으며 누구나 아이가 된다. 완전한 신뢰와 무사태평을 특징으로 하는 아이의 마음, 영혼의 방치가 있을 뿐. 나이는 합산을 하고, 경험은 축적을 하며, 이성은 무언가를 구축한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마음은 아무 계산도 하지 않고, 축적 하지도 구축하지도 않는다. ] P.139



이제 어느정도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삶은 힘들다. 그리고 아직도 모르겠다. 삶의 의미가 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책도 이렇게 계속 읽어야 하는건지...(눈이 나빠지면 어떻해 해야하지?) <지극히 낮으신>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한 답을 독자에게 준다. 완벽할 필요는 없다고, 사랑하라고, 실천하라고.

[당신들은 자신들의 사막 같은 영혼 속에서 완벽을 찾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들에게 완벽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둘은 결코 같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P.147

[사랑은 충만한 상태라기보다 우선 결핍이니까요. 사랑은 결핍의 충만함입니다. 맞아요,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하지만 이해 불가능한 일도 그 실천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P.148



보뱅의 글은 언제나 따뜻하다. 그래서 좋다. 그의 작품을 읽는 순간은 잠시 뿐이지만 그 순간만이라도 순수해질 수 있어서 좋다. 마음의 정화가 필요한 분들은 꼭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사랑을 하는 그는 공을 들고 벽 앞에 선 아이 같다. 그는 자신의 말을 던진다. 빛을 발하는 말의 공 '너를 사랑해'는 혼자서 둘둘 감긴다. 그는 그 공을 벽에 대고 던지지만, 남은 세월 내내 벽은 그에게서 날마다 멀어져 간다. 되돌아오기를 기대하며 수천 개의 공을 던지지만 돌아오는 공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미소 띤 얼굴이며,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는 놀이 자체가 보상이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보상이다.]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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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12-18 12:1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니 새파랑님 독서왕초보라고 소개글을 쓰셨네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ㅋㅋㅋㅋ

눈이 나빠지면 오디오북을 들어야겠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이책이 좋으니
그날이 최대한 늦게 오기를...이 책 저도 찜!

새파랑 2023-12-18 13:13   좋아요 3 | URL
독서왕초보 소개글이 아직도 있나요? ㅋ 그런데 초보는 맞습니다 ㅎㅎ

보뱅 완전 좋습니다 ㅜㅜ 미미님은 보뱅 취향이실거 같습니다~!!!

은하수 2023-12-18 18:52   좋아요 4 | URL
저도 오늘에서야 봤네요!
독서 왕초보시라니...
미미님 저와 같은 걸 보신~~~ 저도 눈이 나빠지면...
그 부분이 딱 들어왔지 뭐예요
전 눈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으면 싶네요 ㅎㅎ

그레이스 2023-12-19 13:40   좋아요 3 | URL
알라디너들만 알고 있지 보뱅 모르는 분들 많아요
더구나 아시시 프란체스코 재판을 보셨 는데 왕초보라뇨;;;

청아 2023-12-19 13:46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소개글 바꾸셔야겠어요ㅋㅋㅋㅋ

새파랑 2023-12-19 15:30   좋아요 1 | URL
앗 ㅋ 지금 바로 바꾸겠습니다 ㅋㅋ 요즘 연말이라 정신이 없네요 ㅜㅜ

얄라알라 2023-12-30 17:40   좋아요 2 | URL
맞아요 그레이스님,
저도 책 모임 가서 혼자 흥분해서 ‘보뱅보뱅‘했던 기억이^^;;; 알라딘에서는 많이 핫한데 말입니다. 하긴 저도 알라딘에서 보뱅을 알았고, 출판사도 알게 되었고 여기가 시발점이네요

새파랑 2024-01-01 11:03   좋아요 1 | URL
보뱅 저도 북플에서 알았습니다 ^^ 역시 알라딘 👍

서곡 2023-12-23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크리스마스 연휴 즐겁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새파랑 2023-12-23 14:40   좋아요 1 | URL
서곡님 감사합니다~!! 서곡님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연말 연시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독서괭 2023-12-26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말연시에 어울리는 따뜻한 글이네요^^ 새파랑님 연말연시 야근 덜하시길 빕니다..!

새파랑 2023-12-27 11:09   좋아요 2 | URL
연말이 없어서 너무 슬픕니다 ㅜㅜ ㅋ 독서괭님은 즐거운 연말 연시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2023-12-26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27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3-12-30 17: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보뱅 lover이신 새파랑님의 평에 동의합니다. ˝보뱅의 글은 언제나 따뜻하다. 그래서 좋다. 그의 작품을 읽는 순간은 잠시 뿐이지만 그 순간만이라도 순수해질 수 있어서 좋다. 마음의 정화가 필요한 분들은 꼭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가벼운 마음]에서처럼 뭔가 가볍고 몽골몽골한 느낌.

새파랑 2024-01-01 11:05   좋아요 1 | URL
저 아직 <가벼운 마음>은 안읽고 아껴두고 있습니다~! 엄청 좋나보네요~!!

알라님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역시 보뱅. 종교적인 글도 그가 쓰면 예술이 된다.






















잉크로 쓰인 모든 길을 웃음으로 해방시킨 지슬렌 마리옹에게

‘아이는 천사와 함께 떠났고, 개가 그 뒤를 따라갔다.‘

이 문장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에게 딱 들어맞는다. 우린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지만,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리니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고 믿으며 그 사람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의 참 모습을 놓치기 일쑤니까. - P12

아이와 천사는 아시시에서 멀어져 갔지만 아무도 그걸 눈치 채지 못한다. 개가 그들을 쫓고 있었다. 세 발자국 뒤에서. - P20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린다고 하자. 그녀는 올 것이다. 그렇게 말했으니까. 약속했으니까. 이 길을 따라 올 것이다. 우리는 지평선에 눈을 고정하고 그 풍경을 바라본다. (그녀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이미 여기 와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풍경 속에는 다양한 규모의 대상들(숲, 집, 도로)이 있다. 마침내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그것들이 풍경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길 끝에 보이는 가느다란 실루엣이 대번 숲과 집들과 도로보다 더 커다랗게 보인다. 측량기사의 눈에는 먼 곳의 한 작은 점에 불과한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온 우주보다 더 큰 무엇이 된다. 우리는 바라는 것을 보기 마련이다. 우리의 희망에 상응하여 보기 마련이다. - P44

우린 이런저런 도시에서 이런저런 직업을 갖고, 이런저런 가정에 산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곳은 사실은 어떤 장소가 아니다. 우리가 정말로 살고 있는 곳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곳이 아니라, 무얼 희망하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희망하는 그곳이며, 무엇이 노래하게 만드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노래하는 그곳이다. - P58

그는 가슴이 뜨겁고 두 뺨이 상기된 채 그곳을 나온다. 아니, 나오지 않는다. 더 이상 그곳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주인이 계시는 집을 찾았으니까. ‘지 극히 낮으신 분‘이 어디에 거하는지 이제 그는 알고 있 다. 세속의 빛이 가까스로 닿는 곳, 삶에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삶은 꾸밈없는 원시적 생명에 불과하며, 단순한 경이요 조촐한 기적이다. - P73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상대로 하느님을 이야기한 다. 그러느라 쉬어 버린 그들의 목소리엔 야수의 우울함이 감돈다. 반면 프란체스코는 하느님을 상대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마다 자신의 삶을 통해 - 오로지 자신의 삶을 시간 속에 지탱함으로써 풀어놓는 음, 그 순수한 음이 먼 하느님의 귀에 울려 퍼지도록 말이다. 가늘고 희미한 음이다. 이 음을 덮어 버리지 않으려면 가능한 한 낮은 소리로 이야기해야 한다. - P101

남자와 여자 간에 차이가 있다면 성이 아닌 자리의 차이이다. 남자는 남자의 자리를 지키는 자며, 무겁고 진지한 모습으로 두려움 속에 안전하게 자리 잡는 다. 여자는 어떤 자리에도, 심지어 그녀 자신의 자리에도 머무르지 않는 자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부르는 사랑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녀가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는 사랑 속으로 이 차이는 매순간 극복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절망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 P124

여자를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느끼며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일지언정 여자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멜랑콜리에 젖고, 무사태평으로 환히 빛나는 어떤 얼굴을 보며 주체할 수 없는 향수를 느낀다. 그 순간 그는 빛을 감지하기 시작하며 하느님의 일부를 엿 본다. 남자가 여자들의 진영과 하느님의 웃음에 가 닿는 건 언제나 가능하다. 한 번의 동작으로 족하다. 온 힘을 다해 몸을 내던지는 아이들처럼, 단 한 번의 동작이면 된다. 넘어지거나 죽는 것을 겁내지 않는 세상의 무게를 잊은 동작. 이렇게 남자는 과거가 가해 오는 진 지함의 부담을 등한시하면서 자기 자신과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이런 남자는 이제 제자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 P124

그리스도만큼 여자들을 향해 얼굴을 돌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뭇잎 하나를 보려고 얼굴을 돌리듯, 여정을 계속할 힘과 의욕을 얻기 위해 강물 위로 몸을 숙이듯 말이다. 성서 속엔 새들만큼이나 많은 여 자들이 등장한다.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여자들이 있 다. 여자들은 하느님을 낳아, 그가 자라고 뛰어놀고 죽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미친 듯한 사랑의 단순한 몸 짓으로 그를 부활시킨다. 산과 병동의 후텁지근한 방에서든 선사시대의 동굴 속에서든, 태초부터 취해 온 똑같은 몸짓이다. - P125

그가 그녀보다 먼저 죽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사랑은 처음 시작되는 순간, 첫 전율을 느끼는 순간 이미 시간에 대한 오래된 관념을 파괴하니까. 전과 후의 구별이 사라지고, 살아 있는 자들의 영원한 오늘이 지속될 뿐이다. 사랑으로 충만한 오늘뿐이다. - P129

누군가 프란체스코의 말들을 얇은 책 속에 모아 두었다. 진짜 가난한 사람의 말을 담은 책이다. 아름다울 것도 없는 편지들, 우아하지도 않은 기도 너무 자주 빨고 기운, 가난한 사람의 닳은 옷 같다. 성서에서 빌려와 짜 맞춘 것들. 여기에 시편 한 편, 저기에 또 한 편,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도하기, 허공이 우리의 말을 씻어 내도록 허공에 대고 말하기, 라는 의도한 바가 달성 된다. 너를 사랑해. 하느님을 향해 쏘아진 이 말은 불화 살처럼 어둠을 뚫고 들어가선 미처 과녁에 닿기 전에 꺼지고 만다. 너를 사랑해. 이것이 그가 하려는 말 전부이다. 거기서 어떤 독창적인 책, 작가의 책이 탄생할 수는 없다. 사랑은 전혀 독창적이지 않으니까. 사랑은 작가의 발명품이 아니니까 - P138

사랑을 하는 그는 공을 들고 벽 앞에 선 아이 같다. 그는 자신의 말을 던진다. 빛을 발하는 말의 공 ‘너를 사랑해‘는 혼자서 둘둘 감긴다. 그는 그 공을 벽에 대고 던지지만, 남은 세월 내내 벽은 그에게서 날마다 멀어져 간다. 되돌아오기를 기대하며 수천 개의 공을 던지지만 돌아오는 공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언제나 미소 띤 얼굴이며,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는 놀이 자체가 보상이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보상이다. - P139

그렇긴 해도 그에겐 할 말이 조금 더 남아 있다. 그가 말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너를 그렇게 조금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너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서, 사랑할 줄 몰라서 미안하다고, 빛에 다가갈수록 어둠으로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사랑을 할수록 자신이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사랑에선 진전도, 언젠가 도달할 수 있는 완벽의 지점도 없기 때문이다. 어른스럽고 성숙하며 이성적인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 앞에선 어른이 없으며 누구나 아이가 된다. 완전한 신뢰와 무사태평을 특징으로 하는 아이의 마음, 영혼의 방치가 있을 뿐. 나이는 합산을 하고, 경험은 축적을 하며, 이성은 무언가를 구축한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마음은 아무 계산도 하지 않고, 축적 하지도 구축하지도 않는다. - P139

어린아이의 마음은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태초에서 다시 출발해 사랑의 첫발을 떼어 놓는다. 이성적인 사람은 축적되고, 쌓이고, 구축된 사람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이런 합산의 결과물인 사람과는 반대된다. 그는 자신 에게서 벗어나 있으며, 만물의 탄생과 더불어 매번 다시 태어난다. 공을 갖고 노는 바보, 혹은 자신의 하느님 에게 이야기하는 성인이다. 동시에 둘 다거나. - P140

당신들은 자신들의 사막 같은 영혼 속에서 완벽을 찾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들에게 완벽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둘은 결코 같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 P147

사랑은 충만한 상태라기보다 우선 결핍이니까요. 사랑은 결핍의 충만함입니다. 맞아요,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하지만 이해 불가능한 일도 그 실천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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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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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86

˝‘사랑‘이라 썼다가, 그 다음은 쓰지 못했다.˝


(누가 물어보지는 않겠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최고의 작품을 꼽아달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사양>을 선택하겠다. 뭐 대부분이 좋긴하지만. <인간실격>은 너무 유명해서 좀 그렇다. <만년>은 좋긴 한데 단편집인데다 초기작이어서 좀 꺼려지고, <달려라 메로스>는 10퍼센트 아쉽다. <쓰가루>는 30퍼센트 아쉽다...



<사양>의 어떤 점이 좋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 책만큼 절망을 우아하고 생동감 있게 그린 작품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러질 지언정 꺾이지 않는, 절망속에서도 혁명과 사랑을 꿈꾸는 ‘다자이 오사무‘의 의지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제 삶이 그러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이젠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초조감. 이런게 바로 불안이라는 감정일까? 가슴에 고통스러운 파도가 몰아쳐 마치 소나기가 그친 하늘에 허둥지둥 흰 구름이 잇달아 질주해 나가듯 내 심장을 옥죄었다 풀었다 하고, 맥박과 호흡이 흔들리면서 눈앞이 가물가물 어두워졌다. 온몸의 힘이 손가락 끝에서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에, 더 이상 뜨개질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P.54



<사양>의 주인공은 누나인 ‘가즈코‘ 이고, 서브 주인공은 남동생 ‘나오지‘ 라고 할 수 있지만, 책을 다 읽고나면 두 사람은 개별적인 캐릭터가 아닌,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의 다른 자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에 이유는 없습니다. 다소 변명같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동생의 입버릇을 그대로 흉내 냈다는 느낌도 듭니다. 오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한 번 더 뵙고 싶습니다. 그뿐이에요. 기다림. 아아, 인간의 생활에는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건 인간 생활 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인 감정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리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기다리다, 텅 빈 공허감.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뭔가를 기다려요. 너무 비참해요. 태어나길 잘했다고, 아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기꺼워해 보고 싶습니다.] P.95



몰락한 귀족 집안을 홀로 이끈 어머니는 결국 가난한 삶속에서 결핵으로 죽지만 마지막까지 고고함을 잃지 않는다. 아들 ‘나오지‘는 사랑에 괴로워하고 약과 술에 의존하며, 결국 자살을 선택하지만 그의 자살은 단순한 자살이 아닌, 과거를 청산하려는 몸부림으로 다가온다. 혁명과 사랑을 완수하기 위한 희생자로 말이다.

[도대체 나는 그동안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혁명을 동경한 적도 없고 사랑조차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세상의 어른들은 혁명과 사랑, 이 두 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께름칙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우리는 그런줄로만 믿었으나, 패전 후 우리는 세상의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건 그들이 말하는 것과 반대쪽에 진정한 살 길이 있는 것 같았고, 혁명도 사랑도 실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고 달콤한 일이며, 너무 좋은 것이다 보니 심술궂은 어른들이 우리에게 포도가 시다며 거짓을 가르친 게 틀림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나는 확신하련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P.109



딸인 ‘가즈코‘는 사랑하는 두사람의 상실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더이상 과거에 머무르지 않으며, 혁명과 사랑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본다. 비록 지금은 ‘사양‘이지만 가즈코의 미래는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귀족, 결혼, 관습, 도덕 이런 것들은 ‘가즈코‘에겐 그저 ‘사양‘일 뿐이다.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게 머리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을 맞으며 전투, 개시. 사랑해, 좋아해, 그리워, 진짜 사랑해, 진짜 좋아해, 진짜 그리워. 보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어,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어, 그리우니까 어쩔 수 없어. 그 부인은 분명 보기 드물게 좋은 분. 딸도 예뻤어. 하지만 나는 신의 심판대에 세워진다 한들 조금도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아.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거야, 신이 벌 하실 리가 없어. 난 털끝만큼도 잘못한 게 없어. 진짜 좋아하니까 대놓고 당당하게, 그 사람을 한 번 만날 때까지 이틀 밤 이건 사흘 밤이건 들판에서 지새우더라도, 기필코.]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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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12-15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사양>이 최고라고 말하겠어요^^

새파랑 2023-12-15 19:26   좋아요 1 | URL
오 은하수님 역시 책을 잘 아시는분~!! 어제 밤에 갑자기 이 책이 생각나서 다시 읽었습니다 ~!!

페넬로페 2023-12-15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양‘의 분위기를 새파랑님께서 찰떡같이 적어 주셨어요.
절망을 우아하고 생동감 있게~~
이 책의 특이한 분위기도 좋았어요.
약간 이해가 안되기도 했지만요^^

새파랑 2023-12-16 09:02   좋아요 2 | URL
왠지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 재독했는데 다시 읽으니까 또 다르게 느껴지더라구요~! 갑자기 체호프의 <벚꽃 동산>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M.C ~!!

coolcat329 2023-12-16 07: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잘 지내셨죠?
저는 다자아 오사무 책을 한 권도 안 읽어봤어요. 만년은 새파랑님 글 읽고 구입해놨긴 했는데 <사양>을 베스트로 꼽으셨네요. 남매가 작가의 두 자아라니 궁금하네요. 무엇보다 소설이 우아하다니~
무엇에 대한 사양인지도 대충 알겠어요.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 주인공이 인상적입니다.

새파랑 2023-12-16 09:04   좋아요 2 | URL
이 좋은걸 아직 안 읽어보셨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인간실격도 그렇지만 사양 역시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소설 느낌이 강합니다 ㅋ 좀 우울해질수도 있습니다....

리뷰보면 <사양> 평이 많이 갈리던데 제발 좋으셨으면 합니다~!!

희선 2023-12-17 0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 소설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시는 게 《사양》이군요 다자이 오사무는 한권밖에 못 읽어봤네요 그거 다시 읽어보려고 했는데, 아직입니다

새파랑 님 남은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3-12-18 11:12   좋아요 0 | URL
인간실격 읽으셨겠군요? 사양도 좋습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희선님은 좋아하실거 같습니다 ^^
 

역시 다자이 오사무의 최고의 작품은 단연 <사양>이다.












‘사랑‘이라 썼다가, 그 다음은 쓰지 못했다. - P30

"어머니, 전 요즘 생각하는 게 있어요. 인간이 다른 동물과 전혀 다른 점이 뭘까. 언어도 지혜도 생각도 사회 질서도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동물도 모두 갖고 있잖아요? 신앙도 갖고 있을지 몰라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으스대지만, 다른 동물과 본질적인 차이가 하나도 없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 어머니, 딱 한 가지 있어요. 모르실테죠? 다른 생물들에게는 절대로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것. 그건 바로 비밀 이라는 거죠. 어때요?" - P52

아무래도 이젠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초조감. 이런게 바로 불안이라는 감정일까? 가슴에 고통스러운 파도가 몰아쳐 마치 소나기가 그친 하늘에 허둥지둥 흰 구름이 잇달아 질주해 나가듯 내 심장을 옥죄었다 풀었다 하고, 맥박과 호흡이 흔들리면서 눈앞이 가물가물 어두워졌다. 온몸의 힘이 손가락 끝에서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에, 더 이상 뜨개질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 P54

불량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라고 그 공책에 쓰여 있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도 불량, 삼촌도 불량, 어머니조차 불량하게 여겨진다. 불량하다는 건 상냥하다는 뜻이 아닐까 - P76

사랑에 이유는 없습니다. 다소 변명같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동생의 입버릇을 그대로 흉내 냈다는 느낌도 듭니다. 오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한 번 더 뵙고 싶습니다. 그뿐이에요. 기다림. 아아, 인간의 생활에는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건 인간 생활 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인 감정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리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기다리다, 텅 빈 공허감.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뭔가를 기다려요. 너무 비참해요. 태어나길 잘했다고, 아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기꺼워해 보고 싶습니다. - P95

도대체 나는 그동안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혁명을 동경한 적도 없고 사랑조차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세상의 어른들은 혁명과 사랑, 이 두 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께름칙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우리는 그런줄로만 믿었으나, 패전 후 우리는 세상의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건 그들이 말하는 것과 반대쪽에 진정한 살 길이 있는 것 같았고, 혁명도 사랑도 실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고 달콤한 일이며, 너무 좋은 것이다 보니 심술궂은 어른들이 우리에게 포도가 시다며 거짓을 가르친 게 틀림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나는 확신하련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 P109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게 머리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을 맞으며 전투, 개시. 사랑해, 좋아해, 그리워, 진짜 사랑해, 진짜 좋아해, 진짜 그리워. 보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어,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어, 그리우니까 어쩔 수 없어. 그 부인은 분명 보기 드물게 좋은 분. 딸도 예뻤어. 하지만 나는 신의 심판대에 세워진다 한들 조금도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아.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거야, 신이 벌 하실 리가 없어. 난 털끝만큼도 잘못한 게 없어. 진짜 좋아하니까 대놓고 당당하게, 그 사람을 한 번 만날 때까지 이틀 밤 이건 사흘 밤이건 들판에서 지새우더라도, 기필코. - P128

"죽을 작정으로 마시고 있어. 살아 있다는 게 슬퍼서 견딜 수 없어. 외롭다느니 쓸쓸하다느니 그런 한가로운 게 아니고 슬퍼. 음침한 탄식의 한숨이 사방 벽에서 들려올 때, 자신들만의 행복 따위 있을리가 없잖아? 자신의 행복도 영광도 살아 있는 동안엔 결코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노력. 그런 건 그저 굶주린 야수의 먹잇감이 될 뿐이지. 비참한 사람이 너무 많아 거슬리나?" - P143

나는 언젠가 부인과 손을 맞잡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부인도 오래전부터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꿈에서 깨 어나서도 내 손바닥에 부인의 손가락 온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그것만으로 만족했고, 단념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도덕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나는 그 반쪽 미치광이 아니 거의 미치광이나 다름없는 그 서양화가가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단념하자고 마음먹고 가슴의 불길을 딴 데로 돌리려고 닥치는 대로, 심지어 그 화가도 어느 날 밤 인상을 찌푸렸을 정도로 볼썽사납게 미친 듯이 여러 여자들과 놀아났습니다. 어떻게 해서 든 부인의 환상에서 벗어나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아니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실패. 나는 결국 한 여자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입니다.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부인 이외 의 다른 여자 친구를 한 번도 아름답다거나 안쓰럽게 느낀 적이 없습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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