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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N23075
"사랑 밖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사랑 안에는 알 수 없는 것들뿐이다."
만약 내가 '보뱅'의 <그리움의 정원에서> 보다 이 책을 먼저 읽었다면 그렇게 감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움의 정원에서>를 통해서 저자인 '보뱅'의 '지슬렌'에 대한 마음을 알고나니, 이 책이 온통 '지슬렌'이라는 여인과 그녀 주변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움의 정원에서>보다는 덜 직접적이었지만, 애틋함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오랫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사랑의 본성이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이 사실 이야말로 사랑이 갖춘 위엄이자, 사랑의 놀라운 특성 이다. 소음과 부산함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온갖 발작으로부터도 훌쩍 떨어져,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가볍고 경쾌한 자각이자 더없이 겸허한 형상이며 각성한 얼굴인 시(詩)는, 심오한 기다림이고 달콤한 기다림이다. 부드럽고도 오묘하게 반짝이는 희망이다.] P.36
'보뱅'이 보는 주위의 모든 것은 다 그녀를 향해 있었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도,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도, '릴케'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도, 휴일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도,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도, 하느님의 이야기를 할때도 그 중심에는 한 여인이 있고, 그녀는 아마 '지슬렌'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내가 책을 읽는건, 보기 위해서예요. 삶의 반짝이는 고통을, 현실에서보다 더 잘 보기 위해서예요. 위안을 받자고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난 위로받을 길 없는 사람이니까.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에요. 이해해야 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책을 읽는 건 내 삶 속에서 괴로워하는 생명을 보기 위해섭니다. 그저 보려는 겁니다.] P.88
그리고 그녀에 대한 마음의 결정판이 이 책의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는 표제작인 <작은 파티 드레스>이다. 이 작품은 그냥 예술이었다. 몇번을 읽어도 아름다웠고, 몇번을 읽을때마다 새로운 것이 보였다. 그리고 산문이라기보다는 시라고 부르는게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우리 안엔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없다. 색깔도 형태도 없는 기다림이 있을 뿐.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 기다림은 공기와 공기가 섞이듯 우리 안에 존재한다.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지루함의 절정이라고나 할 수 있는 기다림. 이 기다림이 그곳에 항시 존재 했던 건 아니다. 우리가 항시 무였던 것도,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다. 유년기의 우리는 전부였고, 신은 우리 영역의 미미한 일부에 불과했었 다. 풀밭 속의 풀잎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P.119
[내 고독의 물방앗간에 당신은 새벽처럼 들어와 불길처럼 나아갔다. 당신은 내 영혼 속에 범람하는 강물처럼 들어왔고, 당신의 웃음이 내 영토를 흠뻑 적셨다. 내 안으로 돌아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암흑천지에 큰 태양 하나가 돌고 있었다. 만물이 죽은 땅에 옹달샘 하나가 춤추고 있었다. 그토록 가녀린 여자가 그렇게나 큰 자리를 차지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P.121
[그런 다음 당신은 떠나버렸다. 배신을 한 건 아니었다. 당신 안에 나 있는, 굴곡이 단순한 같은 길을 따라간 것일 뿐. 당신은 눈처럼 하얀 작은 드레스도 가지고 가버렸다. 이 드레스는 더 이상 내 삶에서 춤추지 않았고 내 꿈속에서 맴돌지도 않았다. 내가 잠을 청하며 눈을 감은 순간 눈꺼풀 밑에서 펄럭였을 뿐. 눈과 세상 사이, 바로 그곳에서. 세월의 바람을 맞으며 열에 들떠 펄럭였다. 비애의 뇌우가 그것을 가슴 위로 내리쳤다. 금 간 유리창 위로 내려지는 덧문처럼.] P.122
[당신이 내 고독의 원인은 아니다. 고독은 당신보다 훨씬 앞서 내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당신은, 그것을 깨어나게 한 당신은 그 고독을 가장 닮은 여자일 뿐.] P.124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리뷰 이기 때문에 아닐수도 있지만, '지슬렌'을 염두해 두고 이 작품을 썼다고 생각하고 다시 읽으니 이해하기가 더 쉬웠다. 어떻게 하면 저런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걸까? 마음의 정화가 필요한 분들에게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한다.
Ps. T가 읽으면 재미없을수도 있음. F에게는 강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