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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옆모습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북포레스트 / 2022년 11월
평점 :
N23044
한동안 사강의 작품을 안읽었다. 유명한 작품은 거의 다 읽기도 해서 그럴수도 있지만, 분명히 아직 안읽은 작품들이 있긴 했는데도 손이 안갔다. 돌이켜보니 소재가 좀 비슷해서 식상한 기분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막장 드라마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계속 보다보면 좀 물리는 느낌 같은거랄까?
그래도 사강은 사강이었다. 오랜만에 읽은 사강의 <잃어버린 옆모습>은 너무 좋았다. 사강의 캐틱터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조제'가 나오는 작품으로 <한달 후 일년 후>, <신기한 구름>과 함께 '조제 3부작' 이라고 한다. 조제가 나온다니 내용이야 대충 예상은 할 수 있었지만 읽어보니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좋았다.
'앨런'이라는 미국 남자와 결혼을 하고 나서 프랑스로 돌아온 '조제'는 남편의 집착 때문에 힘들어 하고 어느 누구와 편하게 이야기하지도 못할 지경에 이른다. 결국 남편에게 감금되기까지 한다. (이럴거면 도대체 왜 같이 사는 걸까?)
[둘째는 그를 피해 떠나는 것, 그에게서 달아나는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를 내가 사랑했던 모습으로 떠올렸고, 그리하여 합리적이고 유일한 것임을 알고 있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스스로를 잃게 되었다.] P.21
그런 그녀를 구원해주기 위해 돈많고 쿨해보이는 나이 많은 남자 '줄리우스'가 나타나고, 그는 그녀를 '앨런'으로부터 빼낸다. 그리고 그녀가 혼자서 자립할 수 있도록 안보이는(아주 중요!) 곳에서 돕는다. 그녀가 싼값에 집을 얻고, 괜찮은 직장을 얻고, 싼값에 옷을 빌릴(?) 수 있도록 한다. 주위사람들은 모두 '조제'가 '줄리우스'의 정부라 생각하고, 그래서 그가 그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걸로 아는데...
문제는 '조제'가 이걸 모른다는거다. 그녀는 그의 행동을 단순한 호의로 생각한다는 거였다. 분명히 '줄리우스'는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와 결혼하고 싶은게 확실한데, 그녀만 모른다. 아니, 모른체 하는거 같다. '조제'는 '줄리우스'에게 결코 사랑을 느끼진 않는다. 그러면서 그의 호의적인 지원은 다 받아들인다. 보고싶은 것만 보려하는 '조제'.
["당신 지루해요?" 줄리우스가 물었다.
"아뇨. 왜요? 이 나라는 무척 아름답고, 난 아무것도 하지않고 지내는게 참 좋아요."
"당신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줄곧 두려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에겐 끔찍한 일일거예요."
줄리우스가 말했다. "그게 왜요?" 내가 즐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더 이상 지루하지 않으니까요."] P.138
그러던 와중에 '조제'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루이'라는 '조제'의 친한 친구의 동생으로, 시골에서 수의사로 근무하는 남자였다. '줄리우스'는 이런 '조제'의 일탈을 모두 받아들인다. (이런일이 처음이 아니다..) 여전히 그냥 바라보면서 그녀에 대한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결국은 자기에게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나에게 하룻밤의 남자였다. 나는 햇빛 아래에서보다는 어둠 속에서 그의 모습을 훨씬 더 많이 보았고, 나에게 그는 불타는 육체, 누워 있는 옆모습, 새벽의 실루엣이었다. 나에게 그는 열기, 세 개의 시선, 한 개의 무게, 네 개의 문장이었다.] P.178
'조제'는 뒤늦게 자신의 성공과 안정적인 생활이 자신의 능력이나 운이 아닌, '줄리우스'가 모두 꾸민거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조제'는 자신이 그의 정면을 본적이 없음을, 언제나 그의 옆모습만을 봤었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예전에 전 남편에게 당했던 잔인한 아픔을 '줄리우스'에게 그대로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지독히도 평행이고 지독히도 낯선 서로의 인생 속을 지나갔다. 우리는 오직 옆모습으로만 서로를 보았고, 결코 서로 사랑 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소유하기만을 꿈꾸었고, 나는 그에게서 달아나기만을 꿈꾸었다. 그게 전부였다. ] P.233
일반적인 소설이었다면 이제부터라도 '조제'가 '줄리우스'의 사랑을 깨닫고 그와 함께 해피엔딩을 하겠지만 사강의 소설은 절대 그렇지 않다. '사강'은 '줄리우스'를 그냥 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사랑인 '루이'랑 함께 떠난다. 이기적인 '조제'가 나쁜 걸까, 순진하게 믿었던 '줄리우스'가 바보같은 걸까?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역시 사강은 사강이었다. 도덕적인 옳고 그름, 사람에 대한 믿음과 배신은 뒤로하더라도 참 재미있는 작품, 그리고 잔인한 작품었다. 오늘도 사람보다 잔인한게 있을까? 사랑보다 잔인한게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조제'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처음부터 '줄리우스'의 앞모습을 안보려고 했던게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관계에 있어서 무관심은 정말 최고의 으뜸패인가 보다.
[더 오래 그를 사랑하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느꼈고, 무관심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무관심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를 소름 끼치게 했다. 나는 무관심이 조커임을, 열애 관계에서 으뜸패임을 알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P.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