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인 <남아 있는 나날> 과 <나를 보내지마>를 재독했다. 민음사 모던클래식으로 나왔었던 작품들인데, 리커버판으로 다시 나와서 일단 구매를 해놓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다시 읽었다. 재독한 감상은 ˝역시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감탄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1인칭 시점으로 쓰여있는데, 1인칭 주인공 시점의 가장 큰 특징은 가장 주관적인 서술이라고 본다.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을 나의 주관으로 쓰기 때문에, 옆에서 관찰하고 쓰는 3인칭 시점이나, 모든 걸 다알고 쓰는 전지적 시점 보다는 객관적일 수 없지만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진실함이 잘 전달된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주인공의 시점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고 실제 감정을 추측하는 재미도 있다. 간단히 리뷰를 해보자면...
N25024 <남아 있는 나날>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디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예전에 읽었을 때는 너무 무미건조해서 조금 답답하게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와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 직업의식이란 이런거다 라고 말해주는 작품이었다.
과거 영국인 ‘달링턴‘경을 모셨지만 이제는 미국인 ‘패러데이‘를 모시게 된 집사 ‘스티븐슨‘은, 과거 ‘달링턴 홀‘에서 28명의 직원을 거느린 최고의 집사였지만 지금은 4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구시대의 집사이다.
그는 새주인 ‘패러데이‘의 배려로 그동안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6일간의 휴가를 얻게 된다. 그리고 품위 때문에, 책임감 때문에, 마음은 있었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과거의 부하직원인 ‘켄턴‘양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여정을 떠나면서 지난날의 영광과 아쉬움을 회상한다.
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평화를 위해 물밑에서 일한 정치가 ‘달링턴‘경을 모시는 집사였던 그는, 주인의 업적을 위해 보고도 못본척, 듣고도 못들은척 하며 ‘달링턴홀‘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달링턴홀‘이 최고의 저택이라는 명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인생 내내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바친다.
그러면서 그는 제대로 된 휴가나 여행도 못가고,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도 전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걸 묵묵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집사라는 책임감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그는 사적인 모든 걸 내려놓았다.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에게는 ‘달링턴홀‘의 명성과 ‘달링턴‘경의 성공이 전부였다.
하지만 독일 나치에 대한 ‘달링턴‘경의 정치적 선택은 결국 잘못된 것이었고, 이 선택으로 인해 ‘달링턴‘경은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되며 ‘달링턴홀‘의 명성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스티븐슨‘은 다른사람들로부터 왜 ‘달링턴‘경‘의 정치적 선택을 말리지 못했는지 추궁당하기도 하고, 집사로서의 입지도 줄어들게 된다. 이후 ‘달링턴홀‘의 주인은 미국인 ‘패러데이‘로 바뀌지만 ‘스티븐슨‘은 ‘달링턴홀‘의 집사로 남게 된다.
나치와 협조한 ‘달링턴‘경의 정치적 선택은 분명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 ‘스티븐슨‘은 ‘달링턴‘경의 정치적 선택은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독자에게 호소하며 주인의 몰락을 대단히 안타까워 한다. 그리고 집사인 자신이 설사 주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되더라도 주인의 선택을 막을수는 없었다고 변명하며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사적인 것을 포기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그는 무려 20년만에 ‘켄턴‘양을 만난다. ‘스티븐슨‘은 그녀에게 과거에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전할수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품위 때문에 망설일까? ‘스티븐슨‘은 더이상 위대한 집사도 아니고 이제는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섰지만, 지금부터라도 남아 있는 나날을 온전히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을까?
[어쨌거나 때늦은 깨달음에 의지해 과거를 뒤져 보노라면 그러한 ‘전환점‘들이 도처에서 눈에 띄게 마련이다. 우리의 저녁 모임을 중단하기로 한 나의 결정뿐 아니라 그전에 내 집무실에서 있었던 일도 그런 시각으로 보자면 얼마든지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그녀가 꽃병을 들고 들어왔던 그날 저녁에 만약 내가 약간 달리 반응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P.268
이 책의 초반부는 무미건조하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스티븐슨‘이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조금씩 드러내면서 이야기의 몰입감은 점점 켜져가고, 결말부분에서는 감탄을 자아낸다.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살아온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회한과 포기해야 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란 이런거구나 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어느 누가 위대한 집사 ‘스티븐슨‘의 삶을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게 인생이다, 그리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나만은 인정해 줘야 하는게 인생이다.
(추가로 이 책 뒤에 있는 역자 해설은 공감하기 힘들었다. 나는 역자와는 반대로 ‘스티븐슨‘의 고백에 설득당했고 공감했다. 나 역시 ‘스티븐슨‘ 처럼 직업이 인생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월급쟁이 이기 때문에...)
N25025 <나를 보내지마>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나는 흐느끼지도, 자제력을 잃지도 않았다. 다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차로 돌아가 가야 할 곳을 향해 출발했을 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을 다른 생명과 구별짓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작품의 배경은 인간복제와 장기이식이 가능한 미래의 영국이다. 어떻게 보면 SF 소설이라고도 할수도 있지만 SF 느낌이 나진 않는다. 단지 소재만 SF적인 요쇼를 가져왔을뿐 이야기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런데 인간적이란게 과연 무엇일까?
이 책은 주인공인 ‘캐시‘가 ˝간병사˝로 일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헤일셤‘이라는 기숙학교에서 보낸 시절과 성인이 된 이후의 상황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대적 배경 자체는 완전히 다르지만 이야기의 구성 자체는 <남아 있는 나날>과 대단히 비슷하다. 초반만 잘 지나가면 중반부터 몰입부는 엄청나며, 작가가 조금씩 흘리는 힌트속에서 비밀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이 책의 주요 등장인물은 세명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캐시‘, 그리고 그녀의 친구인 ‘루스‘, 마지막으로 ‘루스‘의 연인었다가 마지막에는 ‘캐시‘의 연인이 되는 ‘토미‘가 바로 그들이다. 세명은 모두 ˝클론˝, 즉 복제인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체인 ˝근원자˝가 누군지도 모른채 ˝헤일셤˝이라는 곳에서 자란다. 그들은 가족과 집만 없을 뿐이지 일반 청소년처럼 ˝헤일셤˝이라는 학교에서 지내면서 정상적으로 학습하고 친구들과 서로 교감하면서 성장한다. 일반 인간과 크게 다를바 없이.
그러나 ˝헤일셤˝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그들의 기원이 누구인지,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일을 하게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확실한건 없었다. 자신들의 존재의 목적을 궁금해 하는 것 자체가 금기인것처럼 서로서로 조심하면서 말을 아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왠지 모를 낙관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헤일셤˝을 졸업하고 자신들의 직업을 학습하는 곳으로 보이는 ˝코티지˝라는 곳으로 옮겨간다. 그곳에서는 개인이 희망하면 외출을 하기도 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왜 그들은 그곳에서 도망가지 않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추측컨데 아마 그들은 어디로든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세뇌받은게 아닐까 싶다. 자신들의 존재 목적을 위해 자의든지 타의든지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평범한 사람의 인생도 이와 다를바 없다.
그들은 ˝코티지˝에서 자신들의 모체인 ˝근원자˝에 대해서도 궁금해한다. 일반적인 사람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사랑하고 걱정하고 찾듯이, 그들 역시 부모와 같은 ˝근원자˝를 궁금해하며, 찾아나서기 까지 한다. 그들은 자신의 ˝근원자˝가 근사한 사람이길 기대하지만, 그들은 안다, 자신의 근원자는 사회의 하층민이었다는 것을, 대부분의 ˝근원자˝는 장기기증을 위해 자신을 내어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후 ˝클론˝인 그들의 존재 목적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들은 ˝회복센터˝라는 곳에서 ˝클론(기증자)˝을 돌보는 ˝간병인˝으로 일하다가,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장기를 떼어주는 ˝기증자˝로 바뀌게 되고, 4번의 장기기증까지 하게 되면 거의 죽게되는 운명이다. (아마 4번째의 기증이 심장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대부분은 4번의 장기기증까지 가기도 전에 죽는다. 한마디로 그들 ˝클론˝은 인간의 생명연장을 위한 소모품이었다. 희생을 위해 태어난 생명체, 그럼에도 인간과 똑같은 몸과 마음을 가진 생명체.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거나, 운명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같은 ˝클론˝끼리 서로 도와주고 걱정하고, ˝간병인˝으로 근무하면서 ˝기증자˝를 마지막까지 보살펴주며 이별에 진심으로 아파한다. 4번쨎기증을 앞둔 남자주인공 ‘토미‘는 자신의 ˝간병인˝이자 사랑하는 사람인 ‘캐시‘에게 자신의 죽어가는 마지막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멀쩡한 지금의 모습만을 ‘캐시‘가 기억해주길 원해서 먼저 이별을 고한다.
[˝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 속에서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서로 부둥켜 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서로 헤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안타까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 P.482
˝클론˝인 그들 역시 사랑하고 미워하고 걱정하고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실제 사람 보다도 더 감정의 깊이가 깊은, 그래서 어떤면에서 보면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인간이었다. 이러한 ˝클론˝이 사람과 다를게 뭐가 있는가, 아니 오히려 더 사람답다고 느껴지는건 왜일까? 감정이 매말라버린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런걸까? 사람다움,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좋은 작품이었다. 사람이 동물인 이유는 본능이고, 사람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감정이다.
두 작품은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 하기에는 너무 다른 주제를 다룬다. 전자는 집사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역사소설이라면, 후자는 인간복제를 다룬 SF 소설이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다 그리움이고 추억이라는 것처럼 지나간 기쁨과 슬픔들을 차분히 뒤돌아본다. 너무나 담담해서 더 울림이 있는 이야기들. 이런게 바로 문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