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프루스트는 최고다.




<무관심한 이>

"그럼 제가 혼자 있게 되잖아요." 마들렌이 황급히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무관심이 최고라는 격언,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나를 사랑한다"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기라도 한 듯 서둘러 덧붙였다. "당신 말이 맞아요. 약속이 있다면 어서 가셔야지요. 그럼 안녕히." - P15

<무관심한 이>

그녀가 느낀 터무니없는 실망감과 그것의 강도 높은 잔인함과 진정성 사이는 얼마나 거리가 먼지 가늠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단순히 객관적인 사건과 사물로 이루어진 삶을 살기를 멈췄음을 깨달았다. - P20

<무관심한 이>

그때부터 그 시기의 초상화와 관계된 모든 예술 작품에 대한 기억이 그에 대한 생각과 연결되어 새로운 존재감을 갖게 되었다. 이제 그녀의 사랑은 미적 취향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그녀는 그를 닮은 한 젊은 청년의 초상화를 담은 사진을 암스테르담에서 보내도록 주문했다. - P23

<무관심한 이>

그녀가 도저히 낄 수 없도록 그의 일정을 꽉 채우는 그 무엇에 대한 질투일까? 아니면 그가 떠난다는 사실로 인한 괴로움, 그때까지 그녀를 하루에 열 번 보러 오게 만드는 욕망을 그가 느끼지 않고 그저 한 번만 올 것 이란 사실로 인한 괴로움일까? - P24

<밤이 오기 전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어려운 말을 해야 할 때 최대한 부드럽게 말함으로써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더 견디기 쉽게 하려는 이의 말씨로 그녀가 말했다. - P37

<밤이 오기 전에>

"내게 준 것이 없다고요? 내가 당신에게 요구하지 않을수록 당신은 내게 더 많이 주었어요. 우리의 우정에 감성이 작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는 만큼 당신이 내게 준 것은 실제로 더 많습니다. - P39

<밤이 오기 전에>

우리는 함께 울었다. 슬프면서 무한한 조화의 일치. 우리의 합체된 연민은 이제 우리 자신보다 거대한 대상을 향했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마음껏 자유롭게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나는 가여운 눈물로 흥건히 젖은 그녀의 두 손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금방 다시 새로운 눈물로 젖어들었고 그녀는 한기를 느꼈다. 그녀의 손은 분수대에 떨어지는 창백한 나뭇잎처럼 차가워졌다. 우리는 그 순간만큼 그렇게 아파했던 적이, 또 좋았던 적이 없다. - P44

<추억 1>

저 끝없이 푸른 바다를 보는 건 정말 매력적이에요. 모래사장에 와서 부서지는 파도는 저를 슬픔에 빠지게 하는 생각들이고, 동시에 이제는 작별을 고해야 하는 희망들이에요. 저는 책을 많이 읽고 있어요. 시의 음악성은 가장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게도 하고 저를 황홀하게 만들지요. - P51

<추억 1>

제가 그때 조금만 덜 이기적이거나 조금만 덜 못되게 굴었더라면 하고 후회하는건 사실이지만, 당시의 추억은 지금까지도 저를 행복하게 해줘요,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요. 가끔 저도 어쩔수 없을 만큼 제 운명에 반항하고 싶어지죠. - P52

<추억 2>

사랑은 거대한 입김을 내뿜는 생각에도 스며들어 그것을 약화시키기는커녕 한층 풍요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사랑에 대해서 알게 된 사실은 무엇인가? 그것의 신비를 풀었던가? 그것의 슬픈 향기와 내음 외에 나는 무엇을 더 알게 되었던가? 어느새 사랑은 떠나버렸고 그 자리에 남겨진 깨진 병에서 향기는 한층 순수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때의 희미한 방울 하나가 지금까지도 내 삶을 감싸고 있다. - P61

<ㅇㅇㅇ 부인의 초상>

그녀의 매력은 신성함의 향기가 덧입혀져 한층 더 은은함을 풍겼다. 좋아하는 대상을 존경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니콜의 풍요롭고 그윽한 아름다움에서, 그녀의 너그러운 자비심과 온 존재에서 발산하는 거대한 심성의 매력과 충만함을 느끼는 것은 귀한 경험이다. - P72

<어느 대위의 추억>

이후 나는 그를 다시는 보지 못했으며, 결코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그의 형상을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그는 석양을 머금은 무언가 따스하고 황금빛이 어린, 그럼에도 완전히 알지 못하고 미완성이기에 약간 슬픈, 그저 감미로운 추억으로 기억될 뿐이다. - P97

<대화 1>

어떤 장소들 중에는 마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행복을 환영할 준비를 하고 있는것 같지요. 아름다움은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침묵은 조용히 관찰하며, 고독은 안전하게 숨을 장소를 제공하고, 우정은 세심하게 보살펴줍니다. 그런 장소에 가면 행복을 갈구하는 마음이 그 어떤 장소에 있을 때보다 더 커지지요. 또한 그곳에서보다 더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곳도 없습니다. - P103

<대화 1>

조금 전 당신과 함께 정말 즐거웠어요. 정말로, 아! 하지만 이와 같은 강렬한 감정을 그녀가 다른 이들과 함께 느꼈을 것이라 생각하면! 그러면 제가 느낀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더 커집니다 - P108

<추억 1>

우리는 우리의 즐거움을 선택하면서 동시에 고통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고통은 즐거움의 이면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만약 즐거움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했다면 질투도 몰랐을 겁니다. 질투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이와 나누는 즐거움을 상상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타인의 삶을 상상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네 삶을 투영합니다. - P109

<대화 1>

당신은 언제쯤 그녀를 사랑하기를 멈출 수 있을 것 같나요?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될 때, 새 군주가 등장하기 전에는 여전히 옛 군주의 이름에 복종하게 되는 입니다. 스스로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데도 말입니다. - P111

<폴린 드 S>

이미 계속 보고 있던 것을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고 놀랄 일이 무엇이겠는가! 의사가 직접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결국 누구나 모두 죽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에 고귀하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 죽음을 사색하는 자들을 볼 수 있다. - P142

<사랑한다는 인식>

절대로, 절대로, 나는 그녀가 내게 반복한 이 말을 되뇌었다. 그녀의 말을 기다릴 때 흐른 끔찍한 침묵과 그 이후에 뒤따른 절망은 그녀의 말과 동일한 고집스러움으로 내 심장이 다음 말을 되풀이하게끔 만들었다. 영원히, 영원히. 이제 서로에게 치명적이 된 이 두 후렴구는 깊은 상처를 끝없이 휘저으며 매우 가깝고도 깊게 들렸다. - P145

<사랑한다는 인식>

그녀가 나를 사랑하거나 아니면 내가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기를, 하지만 이 중 한 가지는 불가능하고, 저는 다른 나머지는 원하지 않습니다. 창조하신 최초의 빛처럼 저의 눈물을 비추소서. - P146

<요정들의 선물>

되돌려받길 기대하지 않으면서 줄 수 있다는 것은 씁쓸하지만 분명 감미롭단다. 사람들이 네게 상냥하지 않아도 너는 그들을 상냥하게 대할 기회를 누릴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자비를 품은 자의 자부심을 느끼며 고통받는 자들의 지친 발에 신비하고도 놀라운 향기를 아낌없이 뿌리게 될 거야. - P165

<그는 그렇게 사랑했다>

그는 그렇게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랑했고 또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신은 그의 마음을 너무나 자주 바꾸게 만들어 그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 이가 누군지, 어디서 사랑에 빠졌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너무나 절실하게 기다렸던 순간들, 다시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순간들, 죽음 너머로조차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이었건만, 아이들이 그토록 소중히 만든 모래성이 밀물에 쓸려 흔적조차 남지 않듯, 다음해 그에게는 그에 대한 어떤 기억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은 바다처럼 모든 것을 가져가고 파괴한다. 그러나 거친 파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이들 놀이와 같이 잔잔하고 무사태평하며 확실한 흐름에 의해서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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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4-19 14: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찜해두고 아직인데 냉큼 영접해야겠어요

새파랑 2022-04-21 13:43   좋아요 0 | URL
요책 좋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축소판입니다~!!
 
밑줄 긋는 남자 블루 컬렉션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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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057 로맹가리와 책을 좋아하는 한 여성이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 밑줄이 그어진 것을 본다. 그리고 그 밑줄이 나에게 보내는 메세지라고 착각하고, 그 남자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읽는 재미는 있었지만 설정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공감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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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2-04-16 10: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밑줄 긋는 남자>는 도서관 사서가 싫어하는 책일 거예요. 소설 속 인물이 실제로 있으면 도서관 사서들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죠... ㅎㅎㅎ

새파랑 2022-04-16 10:17   좋아요 2 | URL
제가 밑줄긋는걸 좋아해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보다는 구매해서 읽습니다 ㅋ 전 구매한 중고책에 밑줄그어져 있으면 좋더라구요 ^^

독서괭 2022-04-16 14: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며 읽었어요 ㅋㅋ 도서관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낭만? 그러나 책 깨끗하게 유지하고 싶어하시는 분들은 눈살을 찌푸릴 이야기 ㅋㅋㅋ

새파랑 2022-04-16 16:54   좋아요 3 | URL
제가 이 책을 읽고 공감하기에는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ㅜㅜ 전 책 밑줄긋는거 아주 좋아합니다 ^^

물감 2022-04-16 16: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역시 제 눈은 정확해요. 새파랑님은 제 취향과 안맞아요ㅋㅋㅋㅋ

새파랑 2022-04-16 16:53   좋아요 2 | URL
앗 ㅋ 그렇게 되는군요 ㅎㅎ 제가 좀 무거운 <침묵>을 읽고나서 이책을 읽어서인지 좀 그랳어요 😅

mini74 2022-04-16 2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리뷰에 밑줄 긋고 싶은 일인입니다 ㅎㅎㅎ

새파랑 2022-04-16 21:18   좋아요 2 | URL
제 리뷰에 밑줄 그으시다가 이게 뭐야? 하시면서 삭선 하실수도 있습니다 ^^
 
Art and Fear :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데이비드 베일즈.테드 올랜드 지음, 임경아 옮김 / 루비박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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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056 예술이 왜 힘든지, 그럼에도 왜 계속 창조의 노력을 계속하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책. "두려움은 뒤를 돌아볼 때나 앞을 내다볼 때 생긴다.", "머릿속의 시는 언제나 완벽하다. 문제는 그것을 글로 옮기고자 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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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16 09: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려울 것 같아 고민중인데 새파랑님 글 보니 읽고싶고 갈등 중입니다 ㅎㅎ

새파랑 2022-04-16 09:36   좋아요 1 | URL
제가 이런 예술 에세이(?) 쪽을 잘 안읽어봤지만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ㅋ 읽는데 두시간 걸렸어요 ㅋ

다만 제 취향이 아니다보니 리뷰 쓰긴 힘들어서 그냥 백자평으로 ^^

미니님은 좋아하실거 같아요~!!
 
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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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055

"당신은 언제까지나 침묵을 지키셨지만, 당신은 언제까지나 침묵하실 수는 없으실 것이다.


너무나 믿었었기에 실망과 절망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왜 신은 자신을 믿는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고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걸까?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포루투갈의 사제 "로드리고"가 포교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겪게되는 내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무교이고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카톨릭에 대한 내용이지만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빠져들어 읽을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로드리고"의 고통을 함께했다. 마치 내가 낯선 땅에 홀로 서있는 "로드리고"가 된 느낌이었다.



어느날 로마 교황청에 포루투갈 예수회의에서 일본에 파견한 신앙이 깊었던 "페레이라" 신부가 고문에 굴하여 배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평소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의 성품을 알고 있었던 세명의 젋은 사제는 이 소식을 믿을 수 없었고, 일본의 꺼져가는 신앙의 빛을 다시 밝히기 위해 일본으로 도항을 결심하고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우리의 밀항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공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서는 지금 사제를 잃고 길을 잃은 신도들이 한 무리의 어린 양들처럼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그 신앙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해서라도 누군가가 가야만 합니다."]  P.22



우연히 그들은 카톨릭을 믿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도모기 마을'로 처음 잠입하게 되고, "로드리고"와 "가르페" 사제는 마을사람들의 믿음을 계속 이어나가게 해준다. 하지만 카톨릭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숨겨야만 했고, 사제들에 대한 색출 역시 극에 달했기에 두명의 사제는  산 속에서 숨어 지내야만 했다. 그럼에도 두명의 사제는 자신들의 존재가 마을 사람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는 점을 뿌듯해 했고, 자신들은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마저 갖는다.

[인간이란 묘한 것이어서, 타인은 어쨌든 간에 자기만은 어떤 위험에서도 모면될 수 있다고 마음 어딘가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 오는 날 먼 곳을 바라보며 그곳에만은 희미한 태양이 비치고 있을 언덕을 상상할 때처럼.]  P.56



하지만 '도모기 마을'에 사제가 잔입을 했고, 마을 사람들이 카톨릭을 믿는다는 사실이 세어나가게 되어 마을 사람들은 조사를 받게 된다. 그렇게 색출된 사람은  고문을 받고, 고통스럽게 죽는다. 이른바 순교한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P.85

[순교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순교일까요? 저는 오랫동안 성인전에 쓰인 그런 순교를, 이를테면 그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나라에 돌아갈 때 공중에는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천사가 나팔을 부는 그런 빛나고 화려한 순교를 지나치게 꿈꿔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보고하고 있는 일본 신도의 순교는 그와 같은 혁혁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비참하고 이렇게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아아, 바다에는 비가 쉴 새 없이 계속 내립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들을 죽인 다음 더욱 무서우리만치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P.93



결국 두 명의 사제는 자신들의 존재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도모기 마을'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포교라는 목표를 버릴 수 없었고, 함께 있기보단느 서로 헤어져서 각자 포교의 임무를 하기로 한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것들을 참아야 했던가. 이 낯설고 황폐한 동양의 땅까지 우리는 어떻게 도착했던가."]   P.31



카톨릭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리고 사제라는 자신의 존재 때문에 많은 신도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면서 "로드리고" 사제는 이러한 비극에 침묵하는 하나님에 대한 존재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이것은 무서운 상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무기둥에 묶여 파도에 씻긴 모키치나 이치소우의 인생은 얼마나 익살스러운 연극인가. 많은 바다를 건너 2년의 세월을 보내며 이 나라에 다다른 선교사들은 또 얼마나 우스운 환영을 계속 뒤쫓은 것인가.]  P.106



하지만 "로드리고" 사제는 얼마 안되어 잡히게 된다. 하지만 "로드리고" 사제는 바로 처형받지 않았다. 이미 많은 일본 서민들이 암암리에 카톨릭을 믿고 있었고, 이러한 믿음을  근절시키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사제의 죽음이 아닌 사제의 배교였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사제의 배교를 위해 일본의 관리들은 "로드리고" 가 보는 앞에서 카톨릭을 믿는 일본인 신자들을 하나 둘씩 죽인다. 일본의 관리들은 신자들에게 배교를 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지만 그들은 배교를 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죽는다. 순교한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수없이 바다를 횡단하여 이 작은 불모의 땅에 한 알의 씨를 가져온 자신의 반생은 얼마나 우스꽝스럽단 말인가. 그건 정녕 희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매미가 울고 있는 한 낮, 목이 잘린 애꾸눈 사나이의 인생은 우스꽝스럽다. 헤엄치며 신도들의 작은 배를 쫓은 가르페의 일생도 우스꽝스럽다. 신부는 벽을 향하고 앉아 소리를 내어 웃었다.]  P.215



하지만 많은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로드리고" 사제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일본인 신도들이 배교 대신 순교를 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절대 배교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거짓 믿음으로 자신을 희생할 수 없다. 자신이 두 눈으로 본 농민들, 비참한 순교자들, 저 사람들이 만약 구원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 어째서 안개비 내리는 바다속으로 돌덩이마냥 가라앉아 갈 수 있었을까?]  P.239



하지만 자신의 스승이었지만 현재는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를 만나고, 그러한 스승 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인 선교사들을 배교하게 만들었던 일본인 "이노우에"를 만나고 나서부터 신에 대한 믿음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신부, 당신 때문에 말이오, 당신이 이 나라에 당신 멋대로 자기 꿈을 억지로 실현시키려 해서, 그 꿈 때문에 얼마나 많은 농민들이 괴로움에 빠졌는지 생각해 봤소? 보시오, 피가 또 흘렀소. 아무것도 모르는 저 사람들의 피가 또 흘렀단 말이오."]  P.210

["너는 그들을 위해 죽으려고 이 나라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너 때문에 저 사람들이 죽어 간단 말이야."] P.212



결국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던 상황과 동일한 조건에 처한 "로드리고" 사제 역시 자신 앞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신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배교할 수 밖에 없었고, 배교의 증거로 성화를 밟는다. 신도가 죽어감에도, 나의 고통과 기도에도 언제나 응답하지 않는, 침묵하는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배교한 것은 말야, 듣고 있나? 들어 주게나. 그 뒤, 여기 구덩이에 넣어진 뒤 들렸던 저 소리에, 하나님이 무엇 하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P.261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쓸쓸한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한 사람의 믿음이 서서히 무너지면서 느껴야 했던 외로움, 갈등, 절망, 체념의 내적 갈등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고통과 침묵 속에서도 결코 믿음을 저버릴 수 없는 로드리고의 마지막 모습에서, 한번 믿기 시작하면 이를 버지리 못하는 인간의 숭고함과 나약함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너무 안타까웠다.

Ps. 이 책이 주는 메세지와 무게감은 엄청나다. 또 하나의 인생책을 발견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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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16 09: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누구를 위한 순교이며 믿음인지 사제들의 고뇌 등 많은 물음들을 던져준 책같아요. 새파랑님 글 읽으니 다시 감동이 밀려옵니다 *^^*

새파랑 2022-04-16 09:30   좋아요 3 | URL
저 이 책 너무 좋더라구요 ㅜㅜ 읽고 충격받았습니다. 마지막 부분의 코고는(?) 소리 부분은 소름끼치더라구요~!

미니님의 리뷰도 다시 보니 좋더라구요 ^^

<깊은 강>도 읽어봐야 겠습니다~!!

페넬로페 2022-04-16 10: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엔도 슈사쿠의 작품은 종교적인 내용이지만 그것을 떠나 모든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공감이 있는것 같아요. 새파랑님의 인생책으로 등극할 정도로 좋으니 저도 꼭 읽어 보겠습니다.
올려주신 인용문을 보니 이 번역자는 가톨릭의 기본을 잘 모르는 분 같아요.
저는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읽어야겠어요^^

새파랑 2022-04-16 10:10   좋아요 4 | URL
제가 종교를 잘 몰라서 이렇게 리뷰를 써도 되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

저는 종교적인 측면보다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에 집중해서 읽었어요~ 페넬로페님은 이 책 완전 좋아하실거 같아요. 꼭 읽어보세요 ^^

페넬로페 2022-04-16 10:27   좋아요 4 | URL
새파랑님
절대 리뷰에 대해서 제가 말씀 드린게 아니예요.
그냥 번역자가 좀더 신경 썼더라면 하는 바램이었어요
네, 저도 꼭 침묵 읽겠습니다^^

새파랑 2022-04-16 10:35   좋아요 4 | URL
저도 알고 있습니다 ^^ 책의 주제가 좀 무거워서 리뷰 쓰는데 부담이 있더라구요 ㅎㅎ

coolcat329 2022-04-16 10: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으셨군요. 다시 읽어도 또 다른 깨달음과 감동을 줄 작품같아요.
이 책은 특히 크리스천분들이 읽으시면 더 좋을거 같습니다.

새파랑 2022-04-16 10:37   좋아요 3 | URL
완전 감동이었습니다 ㅋ 뭔가 해피앤딩은 아니지만 많은걸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었어요 ^^

독서괭 2022-04-16 14: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쓸쓸하군요? 얼마전 타타르인의 사막도 쓸쓸하다고 하신 것 같은데 새파랑님은 확실히 어두운 내면을 직시하는 소설에 끌리시나 봅니다!

새파랑 2022-04-16 15:22   좋아요 4 | URL
제가 외향적인(?) 편인데 책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겉과 속이 좀 다른거 같아요 😅

그레이스 2022-04-16 19: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신앙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이 소설은 충격이죠! 과연 이 신부의 선택이 순교인가? 배교인가?에서부터 신도들의 희생이 과연 가치있는 것이었나 하는데까지 생각이 이릅니다. 나 혼자만의 신앙고백으로 그치지 않고 관계된 사람들까지의 문제이니....
그런데 우리 인생을 돌아봐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때를 어떻게 지날까?를 묻게 됩니다.
저는 쓸쓸하다기보다 두렵고 치열했습니다.

그레이스 2022-04-16 19:39   좋아요 3 | URL
김은국의 순교자도 함께 읽고 비교해 보시면 알게 되실겁니다.

새파랑 2022-04-16 21:22   좋아요 3 | URL
엔도 슈사쿠가 카톨릭 신자이고, 종교적인 책을 많이 썼더라구요. 엔도 슈사쿠가 아닌 다른 사람이 썼다면 논란이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 신앙이 없는 저도 이 책이 충격이었어요 ㅎㅎ 김은국의 순교자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청아 2022-04-16 23: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다가 흥미진진해서 도중에 멈췄습니다.ㅎㅎ 저도 꼭 읽어볼래요!! ‘마치 내가 낯선 땅에 홀로 서 있는 로드리고가 된 느낌이었다‘ 이 부분 최곱니다 🤗

새파랑 2022-04-16 23:40   좋아요 3 | URL
미미님은 이책 좋아하실거라 확신합니다 ㅋ 더 찾아보니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었더라구요~!

하버드 스퀘어만큼 이책도 좋았어요. 보니까 두권다 노랑색 표지더라구요 ㅋ 제 아이디를 샛노랑으로 바꿔야 겠어요 ^^

청아 2022-04-16 23:45   좋아요 3 | URL
리암니슨 나온 그 영화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영화도 봐야겠네요. 인생영화,책이 될것같은 느낌ㅎㅎ

샛노랑보다 새파랑이 나을듯합니다^^;

새파랑 2022-04-16 23:55   좋아요 3 | URL
영화 리뷰 찾아봤는데 책 내용이랑 거의 똑같은거 같아요 ㅋ 소설이 어떻게 구현되었을지 궁금하긴 합니다 ~! 미미님 덕분에 아이디는 안바꾸는걸로 ^^
 

읽은 책들에 대한 언급이 많아서 좋았다. 그런데 최근에 침묵을 읽어서 인지 다소 가볍게 느껴졌다 ㅎㅎ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 좋은 책입니다. 그걸 당신에게 권합니다. - P24

누군가가 나에게 그 책을 권했을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 P27

내가 룰렛에 걸고 있는 이 희망이 우스광스럽다지만,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 즉 도박에서 뭔가를 기대하는게 어리석다고 여기는 견해가 내가 보기에는 더 우스꽝스럽다. - P39

「정말, 문학을 공부하시니까 작가들에 대해서는 훤하 시겠어요. 사실은요,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있어요. 아 자르예요. 가리 말이에요. 『새벽의 약속을 읽어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그 책에 홀딱 반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분 책을 다 읽어 치우고 싶지 않아요. 달리 먹을 게 없다는 핑계로 아끼는 고기를 다 구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아자르, 아니 가리를 아세요?」 - P113

츠바이크 책 읽어 보셨어요? 좋은 작갑니다. - P114

그는 질책하는 뜻을 나타내려는 듯, 자기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었다 놓고, 말없이 자리를 뜨더니 다른 책을 한 권 가져왔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야였다.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뒤에 붙어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정말로 읽겠다고 약속했다. 도스토옙스키라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노름꾼을 읽었고, 그 책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던 터이다. 특히 밑줄이 쳐져 있던 구절들을 말이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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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4-14 1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어떤 책을 읽고 나서
다른 책을 만나게 되는 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

격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새파랑 2022-04-14 19:19   좋아요 2 | URL
ㅋ 침묵이 너무 무겁고 고통스러워서 이 책은 딴세상 이야가 같았어요 ^^

청아 2022-04-14 1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침묵>을 꼭 읽어야겠네요. 이 책을 먼저 읽던지요^^* 고기가 된 로맹가리ㅋㅋㅋㅋㅋ

새파랑 2022-04-14 19:19   좋아요 2 | URL
이 책의 주인공이 로맹가리 찐팬이더라구요 ^^ 애정이 듬뿍 느껴졌습니다~!!

scott 2022-04-15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밑 줄 남! 이거슨 새파랑님의 자전적인 스토뤼!^ㅅ^

새파랑 2022-04-16 05:09   좋아요 1 | URL
하지만 전 도서관 책에는 밑줄을 긋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