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명작이라고 하는데는 이유가 있는것 같다. 어렵지만 너무너무 좋았다.
청원서를 완성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은 누구든지 쉽게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변호사가 청원서를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로 보이는 게으름이나 간교한 속셈 때문이 아니다. 현재 무슨 이유로 기소되었는지도 모르고 앞으로 그것이 어떻게 확대될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지금까지의 삶 전부를 아주 사소한 행동과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기억속에 떠올려 서술하고 모든 방면에서 검토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은 참으로 우울한 작업이다. - P157
"죄가 없다고 해도 그것으로 문제가 간단해지지 않습니다." K가 말했다. 그는 무심결에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요한 건 수없이 많은 미묘하고 세세한 일들인데, 법원이 그것들을 캐고 따지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는 거지요. 그러다가 결국 법원은 본래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심각한 죄를 끌어내지요." - P183
이렇게 몰락하게 된 데는 물론 자금이 고갈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저의 능력을 업무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소송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다른 일에는 거의 힘을 쏟을 수가 없으니까요. - P214
이 법률 세계의 오래된 격언 하나를 말해주겠소. 피의자 한테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이 더 낫다는 격언이오. 왜냐하면 가만히 있는 자는 언제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울 접시에 올라가 자신의 모든 죄와 함께 저울질당할 수 있기 때문이오. - P239
"뭔가 잘못된 겁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인간입니다." - P259
‘동일한 사안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과 잘못 이해하는 것은 완전히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다.‘ - P271
이제 일 년에 걸친 소송조차도 내게 아무런 가르침을 주지 못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나? 정말 우둔한 인간이라는 이미지만 남기고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하는 것인가? 소송이 시작될 때 그것을 끝내려고 했으며, 소송이 끝나가는 지금 그걸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라도 좋단 말인가? 나는 세상 사람 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원치 않는다. - P283
그러나 K의 목에 한 남자의 양손이 놓이더니 동시에 다른 남자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두 번 돌렸다. K는 흐려져가는 눈으로 두 남자가 바로 자기 눈앞에서 서로 뺨을 맞대고서 최종 판결을 지켜보는것을 보았다. "개 같군!" 그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 - P287
이제 읽어보자
"그렇군!" K가 이렇게 소리치면서,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공간이 필요한 듯 양팔을 허공에 쳐들었다. "이제 보니 당신들은 모두 관리들이군요. 내가 조금 전에 공격했던 부패집단 말이죠. 당신들은 방청객과 첩자 노릇을 하려고 이곳에 모여들어서, 겉으로는 패를 나눠 한 그룹은 나를 시험하기 위해 박수를 쳤던 것이군, 당신들은 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잘못된 길로 몰아가는지 배우려 했던 거겠지. 그렇다면 헛걸음을 한 건 아니길 바라겠어. 당신들은 누군가가 당신들에게 무죄한 자를 변호해주길 바라는 상황을 재미있게 구경했거나, 아니면, 그런데 이건 놓으시지. 안 그러면 패주겠어." - P67
‘이 여자는 나에게 몸을 던져주고 있는 거야. 이 여자도 이 주변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했어. 법원 직원들에게도 싫증이 났군, 그거야 이해할 만하지. 그래서 낯선 남자한테 눈을 칭찬해주면서 추파를 던지는 거군’ - P73
평소 건강 상태가 아주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급격한 변화는 아직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동안의 시험을 너무 쉽게 견뎌냈기 때문에 혹시 그의 육체가 반발하여 그에게 새로운 시험을 마련해주려는 것일까? - P100
제발 이름은 묻지 마세요. 하지만 당신의 잘못이 있으면 고치시고, 더 이상 그렇게 고집을 세우지 마세요. 아무도 이 법원에 맞서 싸울 수는 없고, 결국 자백할 수밖에 없어요. - P133
어제는 독서 휴식이었다.
역시 카프카. 분위기가 다르다
"여기서 나갈 수 없소. 당신은 체포되었소." "그런 것 같군요. 그런데 도대체 이유가 뭐죠?" K가 물었다. "우리는 그런 걸 말해줄 입장이 아니오. 방으로 돌아가 기다리시오. 이제 소송 절차가 시작되었으니, 때가 되면 모든 걸 알게 될 겁니다. - P11
"이봐, 빌렘, 저자는 법을 모른다면서도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군." "자네 말이 맞아. 이 친구는 전혀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아." 다른 감시인이 말했다. - P16
"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K씨." 그녀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고, 악수하는 것은 당연히 잊고 말았다.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갑자기 피곤함을 느낀 K는 이 여자의 동의 같은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가를 깨달았다. - P34
N22044 ˝누구나 일생에서 단 한 번 무지개 빛깔을 내는 사람을 만난단다. 그런 사람을 발견하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게 되지.˝소년과 소녀의 운명적인 만남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그들의 감정의 변화를 아름답게 그린 작품인 ˝원들린 밴 드라닌˝의 <플립>을 읽으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런 풋풋하고 설레는 마음을 가졌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던가? 그 시절 그 소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함도 함께였다.<플립>은 소년 브라이스의 시점과 소녀 줄리의 시점을 장별로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나의 행동이 너에게 어떻게 비췄을지, 그런 행동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어땠을지가 장별로 이어서 나오다보니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에 대한 너의 생각은 어땠을까? [˝그 나무의 영혼이 늘 너와 함께하길 바란다. 네가 그 나무에 올라갔을 때 느꼈던 감정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P.59<플립>은 줄리의 집 근처로 브라이스가 이사를 오면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잘생긴 브라이스를 처음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린 줄리는 브라이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아직 어리고 수줍기만 한 브라이스는 줄리를 불편해하고 피한다. 하지만 줄리는 이런 브라이스의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로 보내는 눈길을 결코 접지 않는다. [브라이스 : 내 간절한 소원은 줄리 베이커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다. 나한테서 떨어졌으면, 숨 돌릴 틈이라도 좀 줬으면 바랄 게 없겠다!] P.7 [줄리 : 심장이 쿵 멈추고 말았다. 그대로 멈춰 버렸다. 그리고 난생 처음 느낌이 왔다. 그러니까 세상이 내 주변에서, 내 밑에서, 내 마음속에서 빙빙 돌고 몸이 공중으로 둥둥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P.23브라이스는 처음에는 줄리를 피하지만, 가끔 그녀가 보이지 않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궁금증을 가진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을 몰래 훔쳐보기도 한다. 특히 그녀가 많이 아꼈지만 베어질수 밖에 없었던 ‘플라타너스‘ 나무를 지키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그녀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건 어떤 감정인걸까? [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나니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행복했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 바구니에 넣었다. 맨발로 집을 향해 뛰어가자 어깨 뒤로 넥타이 자락이 나부꼈다. 개럿이 한 말 중에서 한가지는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완벽하게.] P.245오랜 세월을 이웃으로 지내다보니 그 둘 사이에도 많은 일들이 생겼다. 줄리는 가끔 그의 행동을 오해하고 더이상 그를 좋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그 다짐은 오래가지 않았다. 신경쓰지 않고 싶어도 계속 신경이 쓰인다. 브라이스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멀이지지 못한다. 한번 마음에 들어온 사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걸까? [엄마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브라이스 로스키에게 내가 모르는 더 많은 모습이 있는지도 몰랐다. 적절한 조명 속에서 브라이스를 만날 때가 된 것 같다.] P.282책이 재미있어서 금방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브라이스와 줄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지금까지 함께일수도 있고 헤어졌을수도 있겠지만, 첫눈에 반했던 줄리보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호감을 키워간 브라이스가 더 많이 좋아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만약 헤어졌다면 브라이스가 차이지 않았을까? 쓰고 보니 별 쓸데없는 상상이었던 것 같다 ㅎㅎ이 책을 읽기 전에 읽었던 작품이 ˝에밀 졸라˝의 아주 잔혹한 <대지> 여서 그런지, 완전히 대비되는 작품인 <플립>을 읽으면서 마음이 정화됨을 느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다면 그곳은 아름다울수 밖에 없다. 줄리가 올라가 있던 플라타너스 나무의 모습은 브라이스의 기억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브라이스가 줄리를 위해 심어준 플라타너스 나무는 그들의 마음처럼 커다랗게 자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