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10

˝안달하고 질투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야. 지금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면 안 돼? 기회가 있을 때 인생을 즐겨야지. 어차피 100년 후엔 우리 모두 죽을 텐데 뭐가 그리 심각해? 할 수 있을 때 우리 좋은 시간 보내자.˝


˝서머싯 몸˝의 <케이크와 맥주>를 읽기 시작하면서 생각했던건 ‘케이크와 맥주‘의 상관관계 였다. 왜 제목을 이렇게 지은걸까? 궁금해하면서 책을 읽었지만, 어느순간 제목을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대신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인 드리필드의 첫 번째 부인 ˝로지˝를 중점으로 해서 읽었다.


이 책의 줄거리를 아주 간단하게 써보자면, 영국에서 거장으로 대우받던 작가 ˝드리필드˝가 타계하고, ˝드리필드˝의 두번째 부인은 생전에 ˝드리필드˝와 친했고 현재도 유명한 작가인 ˝로이˝에게  ˝드리필드˝의 전기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드리필드 부인˝은 남편과 첫번째 부인인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는 몰랐기 때문에, ˝로이˝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자 이 책의 화자인 ˝어셴든˝을 만나달라고 요청한다.


성공한 작가이자 야망이 큰 ˝로이˝ 역시 완성도 높은 ˝드리필드˝의 ‘전기‘를 쓰기 위해서는 그의 첫번째 부인 이야기를 알야야한다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어셴든˝과 만난다. ˝어셴든˝은 처음에는 그에게 다소 냉소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드리필드˝에 대해서는 어린시절에 잠깐 만난것 말고는 그렇게 많이 알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로이˝ 일행과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어셴든˝은 자연으럽게 그가 마음속으로만 오랜 시간 간직해왔던 ˝드리필드˝와 ˝드리필드 부인(로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흘리게 된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추억을 혼자서 떠올린다. 과연 ˝어셴든˝과 ˝드리필드˝ 부부 세 사람 사이에는 어떤 추억이 있었던 걸까?


한적한 시골 ‘블랙스터블‘에서 ˝어셴든˝과 ˝드리필드 부부˝는 처음 만난다. 당시에는 무명의 작가였던 ˝드리필드˝는 술집의 여종업원 이었던 ˝로지˝와 결혼을 한 상태였고, 화자인 ˝어셴든˝은 아직 고등학생인데다 삼촌인 목사의 강압적인 통제 아래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끌린 그들은 자전거를 함께 타면서 더욱 친해진다.


하지만 ˝어셴든˝은 ˝로지˝가 문란하다는 소문을 듣게 되고,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드리필드˝ 부부에 대해 안좋은 소리를 한다. 그리고 그들 부부랑 어울리는걸 못마땅해 하거나 숨기려고 한다. ˝어셴든˝ 역시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목격하기도 해서 왠지 찜찜함을 느낀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앞에서는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밝게 행동하는 ˝루지˝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드리필드˝ 부부는 많은 빚을 남긴 채 런던으로 야반도주한다.

[그들이 느낄 부끄러움을 생각하니 나도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런데 드리필드 부인이 그 남부끄러운 사건을 아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이 나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만약 내가 먼저 그녀를 보았다면 나와 마주치는 치욕을 피하고 싶을 그 마음을 배려해 그대로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반가운 기색으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P.174



이후 ˝어셴든˝은 대학생이 되어 런던으로 떠나고, 런던에서 그는 ˝드리필드˝ 부부와 재회한다. ˝드리필드˝는 예전과는 다르게 작가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고, 그는 밤낮으로 창작에 매달린다. 그리고 이제 삼심대 중반이 된 ˝로지˝는 예전보다 더 매력적인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런던에서도 이미 많은 남성들의 인기를 받고 있던 그녀는 ˝어셴든˝에게도 접근하며, 그는 그녀의 애정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불륜관계가 된다. (요즘 읽는 책이 다 불륜내용이다...)

[그녀는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대었다가 얼른 떼는 입맞추고 아니었고 열렬한 키스도 아니었다. 그녀의 아주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내 입술에 오래 머물렀고, 나는 그 입술의 형태와 온기와 보드라움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입술을 폐고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밀어 열고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 나는 너무 놀라 내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바보처럼 그녀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돌아서서 하숙집으로 걸어 돌아갔다. 로지의 웃음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업신여기거나 거슬리는 웃음이 아니라 솔직하고 다정한 웃음, 내가 좋아서 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P.206



하지만 그녀가 밀회를 갖는 사람이 자신 뿐만 아니라, 그녀 주위의 다수의 남자가 그녀의 연인이라는걸 알게 된 ˝어셴든˝은 괴로워하고, 그녀에게 진실을 고백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이참, 왜 다른 사람들 일로 속을 썩고 그래? 그게 너한테 해될 게 뭐가 있다고? 내가 재밌게 놀아 주잖아! 나랑 있으면 행복하지 않아?˝]  P.224



그녀의 사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녀는 타인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리고 자신이 기쁠 수 있다면 누구와도 연애를 할 수 있었던 여인이었다. 속된 말로 말하면 나쁜x 이지만, 그녀의 연인들은 그녀를 욕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기에? 게다가 그의 남편인 ˝드리필드˝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결국 그녀는 한참 작가로 명성을 날리던 남편 ˝드리필드˝를 버리고, 결혼하기 전에 자신을 좋아했던 유부남 ˝조지˝와 함께 미국으로 야반도주한다. 이후 그녀는 영국에 나타나지 않는다. 도대체 ˝로지˝라는 여자는 어떤 여자였던걸까?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난걸까?

[˝그럼 그냥 사랑의 행위라고 해 두죠. 천성이 정이 많은 여자였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두 번 생각하는 법이 없었죠. 그건 악덕도 아니고 음탕한 것도 아닙니다. 천성일 뿐이죠. 태양이 햇빛을 발산하고 꽃들이 향기를 내뿜듯 자연스럽게 자신을 내어 준 거예요. 그녀 자신에게 기쁜 일이었어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됨됨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녀는 늘 진실하고 예의 바르고 순박한 여자였어요.˝]  P.274






사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당시 영국 문단에 대한 풍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분야 보다는 ˝로지˝의 마력에 빠져서 책을 읽었다. 지금까지 ˝서머싯 몸˝의 작품은 이 책을 포함해서 딱 네편을 읽어봤는데, 그의 작품은 일단 재미있고 잘 읽히는데,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등장 인물들이 모두 생동감있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특히 여자 주인공들의 대부분은 욕나오지만 마냥 미워할 수 없이 너무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인간의 굴레에서>의 ˝밀드레드˝는 정말 악녀이고 ˝필립˝의 등골을 빼먹지만 그녀의 인생이 너무 처절하게 표현되어 있어 오히려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생의 베일>의 ˝키티˝는 불륜을 저저르고 욕망에 무너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의 삶에 대한 성찰이 매력적으로 그려져서 그녀의 미래를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케이크와 맥주>의 ˝로지˝는 아주 미인은 아니지만 특이한 사랑관에 너무 생동감있고 사랑스럽게 그려져서 누구나 반할만 한 매력적인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현실에서 ˝로지˝같은 여자를 가까이 한다면 아마 화병이 날 것 같긴 하지만.




리뷰를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서 쓴 느낌이 있지만, 중요한건 이 책은 대단히 잘 읽히고 재미있다는 것이다. 일단 첫장을 넘기기만 하면 마지막장을 넘기기 전까지 쉬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아직 ˝서머싯 몸˝을 접해보지 않으셨다면 이 책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s 1. 지금까지 읽은 ˝서머싯 몸˝의 작품들은 다 좋았는데, 만약 한 작품만 추천하라고 하면 <인생의 베일>을 선택하겠다.

Ps 2. 왜 책 제목이 <케이크와 맥주>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해설에 이유가 쓰여있기는 한데,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닌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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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1-16 18: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인생의 베일 읽어보아야겠네요
좋으셨다고 하니...^^

새파랑 2022-01-16 18:55   좋아요 3 | URL
그나마 최근에 읽어서 그런지 전 <인생의 베일>이 좋더라구요. 솔직히 다른 책은 좀 가물가물 합니다 😅

그레이스 2022-01-16 22:05   좋아요 2 | URL
생각없이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얼른 비웠습니다^^;;;

새파랑 2022-01-16 22:49   좋아요 0 | URL
헉 ㅋ 역시 가지고는 있으셨군요. 이제 읽으실 일만~!!

mini74 2022-01-16 18:4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서머싯 몸 작품의 여주인공들 정리까지 ㅎㅎ 저도 인생의 베일 좋았어요. 키티는 이름같은 여자라고 느꼈어요. 저도 이 책 사 놓고 어디에 끼여 있는데 ㅠㅠ잘 읽었어요 새파랑님 ~

새파랑 2022-01-16 19:00   좋아요 5 | URL
저는 이 책 빌려 읽고 어제 반납을 했는데 기억이 잘 안나서 리뷰를 막 썻어요 😅 서머싯 몸 작품들은 다 재미있더라구요 ^^

페넬로페 2022-01-16 18:55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벌써 몸의 작품을 네 편이나 읽으셨네요. 소설 끝부분의 로지의 말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래도 저는 로지에게 100% 다 맘을 줄 수는 없었어요~~
새파랑님 글 읽으며 다시 케이크와 맥주에 대한 기억을 합니다^^

새파랑 2022-01-16 19:09   좋아요 6 | URL
치킨과 맥주가 땡기네요 ㅋ 페넬로페님의 리뷰가 워낙 멋있어서 전 완전 제 마음대로 썼어요 ㅋ 혹시 이 책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페넬로페님 리뷰를 보시면 됩니다 ^^

전 ˝로지˝의 그 순수함(?)이 왠지 공강이 됐어요 ㅋ

페넬로페 2022-01-16 19:14   좋아요 6 | URL
에고, 무슨 그런 말씀을요~~
그렇죠!
맥주엔 아무래도 케이크보다는 치킨이죠^^

Falstaff 2022-01-16 19:16   좋아요 6 | URL
페넬로페 님 말씀이 맞습니다. ^^
글 좋은 인간이 쓴 거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현혹되는 거, 그거 정말 경계해야 합니다.

새파랑 2022-01-16 19:21   좋아요 5 | URL
서머싯 몸은 글을 재미있게 잘 쓰는거 같아요. 그냥 쭉 읽히더라구요 ㅎㅎ 전 현혹되었습니다 ㅋ

그레이스 2022-01-16 19:43   좋아요 4 | URL
케이크와 맥주보다는 치킨과 맥주가 어울리나요?^^

페넬로페 2022-01-16 20:36   좋아요 3 | URL
그렇죠, 그레이스님!
역쉬 치맥입네다 ㅋㅇㅋ

새파랑 2022-01-16 20:50   좋아요 3 | URL
저는 케이크를 별로 안좋아해서 맥주랑 먹어본적이 별로 없지만 치맥은 확실합니다 ^^

그레이스 2022-01-16 22:07   좋아요 3 | URL
케이크는 커피, 맥주는 치킨 ^^

bookholic 2022-01-16 19:1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케맥?^^ 너무 낯선 조합입니다~~

새파랑 2022-01-16 19:23   좋아요 4 | URL
차라리 케잌과 소주가 더 맞지 않나 싶습니다 ^^
조합해서 먹어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ㅋ

프레이야 2022-01-16 19:2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넷 중 인생의베일 제일 좋아합니다.
특히 후반에 키티 아버지의 대화.
영화 페인티드 베일 보셨나요. 나오미 왓츠가 키티 역할을 하는데 아버지의 원작에서의 무게는 삭제되었지만 좋아합니다. 안 보셨으면 추천드려용. 케이크와 맥주,도 찜만 해두고 아직인데 언젠가는^^
새파랑 님 일요일 저녁이 또 저무네요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2-01-16 19:23   좋아요 6 | URL
인생의 베일을 꼭 읽어야겠어요
영화도 보구요^^

새파랑 2022-01-16 19:24   좋아요 6 | URL
제가 영화는 잘 안봐서 😅 프레이야님도 재미있게 보셨군요~!! 반갑습니다~!! 프레이야님도 일요일 마무리 잘하세요~! 전 다른 책의 세계로 😁

청아 2022-01-16 19: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어떤 소설에서는 몸의 이 작품을 언급하면서 <과자와 맥주>라고 하던데요. 번역자의 선택일수도 있는데 케잌에는 맥주가 영 안어울린다는 생각이 반영되었을듯 해요.ㅎㅎ 저는 아직 239읽는 중이라 훑었습니다^^

새파랑 2022-01-16 19:40   좋아요 5 | URL
미미님의 리뷰가 기대가 됩니다 ^^ 저는 일단 리뷰를 썼다는데 의의를 뒀습니다 😅 리뷰 쓰다가 생각이 잘 안나서 책을 미리 반납할걸 후회했어요 ㅋ

바람돌이 2022-01-17 01:0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달과 6펜스 외에는 읽은 책이 없는데, 그것도 고등학교 때 읽은거라 사실 기억도 잘 안난다는..... 하지만 달과 6펜스는 딱히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은 안들고, 그렇다면 새파랑님 추천을 받아 인생이 베일로 다시 서머싯 몸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까 인간의 굴레에서도 읽었어요. ㅎㅎ 이놈의 기억력...ㅠ.ㅠ

새파랑 2022-01-17 06:40   좋아요 3 | URL
달과 6펜스 별로이셨군요~! 인생의 베일은 초반부터 흥미로와서 더 재미있게 읽히더라구요 ㅋ 너무 많은 책을 읽으셔서 기억이 잘안나실거 같아요 ^^

희선 2022-01-17 01:1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서머싯 몸 소설에서 여성을 인상깊게 보셨군요 여기 나온 로지는 좀 아니네요 천성이 정이 많은 여자라니... 한사람을 죽 좋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로지를 좋아하는가 봅니다 그것도 신기합니다 실제 그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새파랑 2022-01-17 06:41   좋아요 3 | URL
실제 그런사람이 있다면 주번사람들은 병날듯 합니다 ㅋㅋㅋ 그냥 평범하지 않은 유형이어서 신기했어요 ^^

bullyeou 2022-02-23 0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케이크와 맥주를 읽고 있는데 문장이 무건운지 나와 맞지 않는 문장인지 정말 읽히지 않아서 리뷰를 먼저 읽어보면서 저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 사건을 중심으로 읽어도 되겠네요. 서머싯 모음 작가가 어릴 때부터 가까이 있었네요. 낯익은 제목들...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2022-02-23 0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로지˝인것 같다. 나쁜여자 이지만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이런, 그건 아름다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말이야. 내가 로지를 은빛 태양으로 바라보기 전에는 아무도 그녀를 중히 여기지 않았어. 내가 초상화를 그리기 전까지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다는 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거야." - P203

그녀에게는 아주 희귀하다고 여겨지는 특성이 하나가 있었다. 눈 밑이 살짝 푸르스름한 데다 대단히 촉촉했다. 가끔씩 그것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같아서 한번은 혹시 눈 밑에 바셀린을 바르는지 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는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닦고 나서 한번 봐" 그녀가 말했다. - P205

그녀는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대었다가 얼른 떼는 입맞추고 아니었고 열렬한 키스도 아니었다. 그녀의 아주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내 입술에 오래 머물렀고, 나는 그 입술의 형태와 온기와 보드라움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입술을 폐고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밀어 열고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 나는 너무 놀라 내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바보처럼 그녀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돌아서서 하숙집으로 걸어 돌아갔다. 로지의 웃음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업신여기거나 거슬리는 웃음이 아니라 솔직하고 다정한 웃음, 내가 좋아서 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렇게 사랑에 빠진다. 나쁜여자인걸 알면서도.) - P206

그간 차마 믿고 싶지 않아 내내 부정했던 의혹이 결국 진실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렌틴 포드, 해리 레트퍼드, 라이어널 힐리어와 외출해 식사했을 때도 나하고 그랬던 것처럼 잠자리를 했던 것이다.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칫 그녀를 모욕하는 말이 나올지도 몰랐다. 질투가 났다기보다 치욕스러웠던 것 같다. 그녀의 손에 철저히 놀아난 기분이랄까. 나는 입 속에 맴도는 지독한 조롱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의지력을 총동원해야 했다. - P222

"아이참, 왜 다른 사람들 일로 속을 썩고 그래? 그게 너한테 해될 게 뭐가 있다고? 내가 재밌게 놀아 주잖아! 나랑 있으면 행복하지 않아?" - P224

"그럼 된 거야. 안달하고 질투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야. 지금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면 안 돼? 기회가 있을 때 인생을 즐겨야지. 어차피 100년 후엔 우리 모두 죽을 텐데 뭐가 그리 심각해? 할 수 있을 때 우리 좋은 시간 보내자." - P224

"그럼 그냥 사랑의 행위라고 해 두죠. 천성이 정이 많은 여자였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두 번 생각하는 법이 없었죠. 그건 악덕도 아니고 음탕한 것도 아닙니다. 천성일 뿐이죠. 태양이 햇빛을 발산하고 꽃들이 향기를 내뿜듯 자연스럽게 자신을 내어 준 거예요. 그녀 자신에게 기쁜 일이었어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됨됨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녀는 늘 진실하고 예의 바르고 순박한 여자였어요." - P274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그녀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여자는 아니었어요. 애정만 끌어냈죠. 그런 여자를 두고 질투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숲속의 빈터에 있는 맑고 깊은 샘물 같은 여자였어요. 뛰어들면 참으로 황홀한, 떠돌이, 집시, 사냥터 관리인이 나보다 먼저 뛰어들었다고 해서 그 물이 덜 시원하거나 덜 깨끗할 리가 없잖습니까." - P275

"난 당신이 마음에 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그 사람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건 말이지." 로지가 말했다. "그이는 언제나 완벽한 신사였거든."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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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왜 책의 제목이 케이크와 맥주인지는 모르겠다.


이후 여름 방학이 끝나기 전까지 나는 드리필드 부부를 한번 더 만났다. 시내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들이 걸음을 멈추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갑자기 다시 부끄러움을 심하게 탔다. 드리필드 부인을 쳐다보면 당혹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얼굴에 죄스러운 비밀을 간직한 기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 P110

그동안 평론가들이 그의 놀라운 가치를 극찬해도 내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어린 시절 내 주변 사람들에게 하찮은 작가로 취급받던 그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 P136

"나는 후기 작품도 좋아해. 누구도 나보다 더 그 순수한 아름다움을 인식하지는 못할 거야. 그것들에 깃든 절제와 일종의 고전주의적 냉철함은 감탄할 만하지만 전반부 작품들의 자극적 풍미, 생동감, 사람 사는 냄새와 활기가 빠졌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네. 아무래도 첫 번째 아내가 그의 작품에 미친 영향을 아예 무시한다는 건 무리일 듯싶어." - P158

그들이 느낄 부끄러움을 생각하니 나도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런데 드리필드 부인이 그 남부끄러운 사건을 아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이 나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만약 내가 먼저 그녀를 보았다면 나와 마주치는 치욕을 피하고 싶을 그 마음을 배려해 그대로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반가운 기색으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 P174

바턴 트래퍼드 부인은 본인처럼 스코틀랜드 명문가 출신의 여인이 저명한 문인이 실수로 결혼한 술집 여급 출신의 아내에게 취할 법한 태도로 드리필드 부인을 대했다. 다정하고 장난스럽고 부드럽게 드리필드 부인을 열심히 다독였다. - P192

나는 그의 말뜻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태양이라기보다 달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태양이라고 해도 하얀 새벽안개에 싸인 태양 같았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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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 책은 잘 읽혀서 좋다.

로이를 거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그들의 착각이다. 로이는 젊은 시절에 가장 큰 매력으로 작용한 겸손함을 한시도 잃은 적이 없다. - P21

오래된 우정을 유지하려 애쓰는 건 쓸데없는 일일세, 양쪽 모두 고통스럽기만 하니까. 누군가는 남들보다 더 성장하는 것이 사실이니 받아들일 수밖에없어. - P26

앨로이 키어의 가장 탁월한 특징은 진실함이었다. 무려 이십오 년간 사기를 칠 수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위선만큼 성취하기 어렵고 진이 빠지는 악덕도 없다. 위선은 한시도 늦추지 않는 경계심과 영혼을 초월하는 극기가 필요하다. 불륜이나 폭음과 달리 짬짬이 훈련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를 온전히 투자해야 하는 작업이다. 또한 이기적인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 P27

좋은 사람이었므로 오직 까다로운 트집쟁이만 그의 성공을 시기할 수 있었다. - P31

현자는 모름지기 상용구를 많이 쓰고(요즘 나는 ‘남이사를 가장 애용하고 있다.) 유행하는 형용사를 쓰며(‘끝내주는‘이나 뻘쭘한 같은 말) 그 상황에 딱 들어맞는 표현을 써서(‘팔꿈치로 쿡 찌르다‘ 같은 말) 환담에 소탈한 광채를 더하고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게끔 한다. - P37

"그럼 그때나 지금이나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건 무엇인가?"

"글쎄, 『트리스트럼 샌디』, 『아멜리아』, 『허영의 시장』, 『마담보바리』, 『파르마의 수도원』,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워즈워스와 키츠, 베를렌."

( 마담 보바리, 안나 카레니나  ㅋㅋㅋ)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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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1-16 0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세문집으로 세계 일주 하실때!

전 제자리 걸음마ฅ🐾 중 ㅋㅋㅋ

새파랑 2022-01-16 08:43   좋아요 1 | URL
스콧님은 이미 많이 걸으셔서 천천히 가셔도 됩니다 ^^
 

N22009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인생에서 실패하는지 아세요? 오로지 정 때문이랍니다.˝


사회적 통념이라는건 이를 어겼을 경우 그에 따른 처벌과 비난이 쏟아지기 때문에 상당히 무섭고 구속력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하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끝이 불행할 것을 예감하면서도 통념을 어기기도 한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더 끌렸기 때문에 멈출 수 없었던 사랑, 그리고 파멸.


시골 귀족 가문의 외동딸로 태어난 ˝에피˝, 그녀는 아무 부족함 없이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누구보다 명랑하게 자란 17세의 소녀였다. 결혼 적령기의 그녀는, 과거 그녀의 어머니인 ˝브리스트 부인˝을 좋아했던 남자이자 독일의 한적한 바닷가 도시 ‘케신‘의 군수인 38세의 ˝인슈테텐˝ 남작과 결혼 한다.
(뭔가 막장의 느낌이 나지만, 막장은 아니다.)

[그녀는 가장 우아한 것만 마음에 들어했으며, 가장 좋은 것을 가질 수 없으면 둘째로 좋은 것은 아예 사려고도 하지 않았다. 둘째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에피는 단념할 수 있었으며, 그 점에서 브리스트 부인은 딸을 제대로 본 것이었다.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은 욕심이 없다는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다 꼭 갖고 싶은 것은 언제나 아주 특별한 것이어야 했다. 그 점에서 그녀는 욕심이 아주 많았다.]



세상물정 모른체 명랑하고 귀하게 자란 ˝에피˝와 출세욕이 강하고 과묵한 ˝인슈테텐˝은 언뜻 봐서도 행복하게 지내기 힘든 조합이었다. 게다가 나이 차이는 20살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인슈테텐˝은 너무나 어리고 예쁜 부인을 몹시 사랑했고, 그녀 역시 처음에는 그에게 헌신을 했으며, 둘 사이에는 ˝아나˝라는 예쁜 딸도 태어난다. 하지만 ˝에피˝는 답답한 시골생활과 자꾸만 어린애 취급하는 남편에게서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 간다.

[˝그애가 행복할까? 아니면 뭔가 가로막고 있는 걸까? 난 처음부터 그애가 인슈테텐을 사랑한다기보다 높이 평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오. 내가 보기엔 좋지 않아. 사랑도 항상 오래가는 건 아니지만 높은 평가는 절대 그렇지 않거든. 여자들은 누구를 높이 평가해야 하면 화를 내는 법이라오. 처음에 화를 냈다가 싫증을 내고 결국 비웃지.˝]  P.297



˝케산˝이라는 시골에서 가장 젊고 유쾌하며 유일하게 그녀를 즐겁게 해주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크람파스˝, 그는 과묵한 ˝인슈테텐˝과는 다르게  그녀를 웃게 하는데, 서로를 알아갈 수록 더욱 끌리게 된다. ˝에피˝는 이성적으로 ˝크람파스˝를 만나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를 멀리하지만, ˝크람파스˝는 계속 그녀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어느 늦은 밤 썰매안에서 입을 맞춘다. 그리고 둘의 관계는 급격히 뜨거워진다.

[크람파스는 크리스마스 축하 인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래서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좋지 않았다. 크람파스의 숭배를 받으면 왠지 마음이 불안하면서도 그가 무관심하면 기분이 나빴다. 모든 것이 어긋나 있는 느낌이었다.]  P.206


이후 ˝에피˝는 몸이 안좋다는 핑계로 혼자서 계속 산책을 나가고, 이 시간에 몰래 ˝크람파스˝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밀애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는 점점 불안에 빠진다. ˝에피˝는 간통이 적발되는 것 보다는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상황이 더욱 괴로웠다. 감정적으로는 끌리지만 이성적으로는 이 관계를 조금이라도 빨리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녀.

[나 자신이 부끄러워, 하지만 진심으로 후회하지도 않고, 진심으로 부끄럽지도 않아. 다만 계속 속이고 거짓말하는게 부끄러울 뿐이야. 내가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고, 또 거짓말할 필요도 없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거짓말은 너무 비열한 것인데 이제 영원히 크고 작은 거짓말을 늘어놓아야 하는 거야.]  P.302



하지만 남편인 ˝인슈테텐˝이 진급하여 ‘베를린‘으로 발령나게 되면서 ˝에피˝ 역시 ‘케산‘을 떠나야만 했고, 그녀가 그토록 바랬던 ˝크람파스˝의 헤어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부인의 간통을 알지 못했던 ˝인슈테텐˝은 가족과 ‘케산‘을 떠난다. 여전히 그녀에 대한 사랑이 충만한 채 말이다.

[에피가 예전보다 구김 없고 명랑해졌기 때문이다. 에피는 더 자유롭다고 느꼈기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 지난 일이 아직도 가끔 그녀의 생활을 기웃거렸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또 불안하더라도 옛날처럼 자주 그러지 않아서 잠시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바르르 떨고 있는 기억으로 인해 에피의 태도는 독특한 매력을 띠게 되었다.]  P.287


그리고 ‘베를린‘에서 7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두 부부는 행복하게 살고, ˝에피˝ 역시 ˝크람파스˝를 잊고 남편에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불안은 결코 끝난게 아니었다. ˝에피˝가 요양 차 집을 비운 사이에, ˝인슈테텐˝은 우연한 계기로 곱게 포장되어 숨겨진 ‘편지뭉치‘를 발견하게 되고, 왠지 읽숙한 글씨채를 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편지들이 ˝크람파스˝가 ˝에피˝에게 보낸 연애편지임을 알게 된다.

[떠나자고, 도망가자고 썼지요. 불가능합니다. 나는 아내를 버리고 떠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가난 속에. 그럴 수는 없어요. 우리는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가련해지고 그만 끝나는 거예요. 경박함이 우리가 가진 최고의 가치입니다. 모든 것은 운명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상황이 달랐고 우리가 아예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겠어요?]  P.302
(->크람파스가 보낸 연애편지 내용 중 일부)



분노와 배신감에 쌓인 ˝인슈테텐˝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모든 사실이 대중에게 드러나게 되고 사랑했던 ˝에피˝를 잃어버리게 됨에도 불구하고 ˝크람파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하룻밤만에 ‘케산‘으로 달려간 그는 ˝결투˝를 하게 되고 그 결과 ˝크람파스˝는 죽는다.

[인슈테텐과 뷜러스도르프가 모래 골짜기를 올라가자 부덴브로크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그들은 인사를 나누었고 입회인들은 옆으로 가서 사무적인 이야기를 짧게 나누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앞으로 걸어나와 열 걸음째에 총을 쏘기로 했다. 부덴브로크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두 발의 총알이 발사되었다. 크람파스가 쓰러졌다.]  P.335



˝인슈테텐˝은 꼭 결투를 신청해서 상대를 죽여야만 했던 걸까? 부인의 간통으로 인해 자존심이 상하고 분노했겠지만, 이미 7년전의 일이었고 현재는 누구보다 가족에게 헌신하는 ˝에피˝를 꼭 사회적으로 매장시켜야만 했던 걸까?


아마 그만큼 사랑했기에 그만큼 배신감도 컸겠지만 그럼에도 왠지 어렵게 쌓아올린 탑을 단 한순간에 무너뜨린 건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그 한번의 실수를 용서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걸까?


하지만 7년이 지났는데도 ˝예피˝가 아직까지 ˝크람파스˝의 편지를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그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떻해 보면 그의 분노가 이해가 간다. 왜 ˝에피˝는 ‘베를린‘에서 남편과의 새로운 시작을 원했으면서도 바보처럼 편지를 보관하고 있었던 걸까? 무엇을 버리지 못했기에 그랬던 걸까?

[그런데 크람파스라는 남자는 누굴까? 정말 믿을 수가 없다니까. 쪽지며 편지를 쓴데다 그걸 보관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상대방 것까지! 난로와 벽난로는 도대체 왜 있대? 적어도 결투라는 터무니없는 짓이 존재하는 한 그러면 안 되지. 어쩌면 다음 세대는 편지 쓰는 열정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때는 그 열정이 위험하지 않을 테니까.]  P.359



이후 그녀는 집에서 쫓겨나게 되고, 사회의 시선 때문에 부모님 역시 그녀를 받아주지 않으며, 결국 그녀는 ‘베를린‘의 어느 작은 방에서 그녀의 하인이자 친구인 ˝로스비타˝와 함께 쓸쓸한 여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두 인정하고 죄책감도 느끼면서도 귀족이라는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채 새로운 출발도 하지 않는다. 남편과 이혼한 ˝에피˝의 삶 앞에 과연 새로운 터닝 포인가 있을까? 그리고 딸 ˝아나˝와의 재회는 이루어 질 수 있을까?






<에피 브리스트>의 주인공 ˝에피˝의 간통은 19세기 기준으로 봤을때는 분명 죄가 맞고,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죄 하나만으로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되어야 하는게 맞는 걸까? 사랑하는 딸도 못만나고, 부모님에게까지 버려져야 할 정도로?


단 한번의 실수로 모든게 끝나버린 ˝에피˝, 그런데 그게 그렇게 큰 실수 였는지,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을 가지고 그렇게 고통을 받았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당시 시대 정서상 어쩔 수 없다는걸 알지만 너무나 수동적일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이혼 후 삶은 더욱 안타까웠다. <에피 브리스트>의 작가인 ˝폰타네˝는 어쩌면 이 책을 통해 19세기 귀족 여성의 취약한 사회적 지위와 삶을 보여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소개를 보면 <안나 카레니나>, <보바리 부인>과 함께 결혼 3부작 이야기로 꼽힌다고 하는데, 솔직한 느낌으로는 그정도 까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작품에 대한 물입도가 앞의 두 작품하고는 다소 차이가 있다. 특히 왜 ˝에피˝가 ˝크람파스˝와 불륜관계가 되었는지 공감이 안되었고, 두사람의 밀회 부분이 표현되어 있지 않아서 왜 그녀가 그토록 괴로워 했는지도 공감이 안되었다.
(그냥 연애편지만 주고 받은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보바리 부인>의 ˝보바리 부인˝이야 원래 그런 욕망이 다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해가 가고, <안나 카레니나>의 ˝브론스키˝는 나쁜 남자지만 매력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안나˝가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빠질만 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에피 브리스트>의 ˝크람파스˝는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에피˝가 사랑에 빠질만한 매력적인 인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감정을 숨겨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죄책감으로 인해 흔들리는, 이혼 후에도 괴롭지만 아픔을 담담히 견뎌내는 그녀의 행동과 감정을 표현한 문장들은 정말 좋았다. 이 책을 읽으신다면 ˝에피˝의 감정선을 따라 읽는 걸 추천한다.


Ps.  이 책을 읽고 나서 <안나 카레니나>가 다시 읽고 싶어졌다. 예전에 민음사 버전으로 읽었었는데, 이번에는 문학동네 버전으로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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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14 17: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역시 편지는 그때그때 태워야 합니다 ㅎㅎ 새파랑님 리뷰 너무 재미있습니다 뭔가 주홍글씨 같기도 하네요.~ 안나카레니나 명작이지요.

새파랑 2022-01-14 17:09   좋아요 7 | URL
제가 오늘 충동구매로 문학동네 버전 안나카레나나 세트를 구매했습니다 ㅋ

도대체 편지는 왜 숨겨놨는지, 아님 어디 땅에다 묻어놓든지 하지 ㅡㅡ

청아 2022-01-14 17:13   좋아요 4 | URL
땅에ㅋㅋㅋㅋ저 지금 길에서 크게 웃었어요ㅋ

mini74 2022-01-14 17:14   좋아요 4 | URL
땅에 묻음 막 편지들이 자라는거 아닌가 하는 상상하며 저도 웃었어요 ㅋㅋ

청아 2022-01-14 17:17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미니님 가까이 살았음 만나자고 했을꺼예요. 아무리봐도 제스타일입니다ㅋ

그레이스 2022-01-14 17:19   좋아요 4 | URL
발견되기 위해서...^^
불안하면 모든 장소 모든 방법이 안전해보이지 않죠!^^

새파랑 2022-01-14 17:20   좋아요 4 | URL
아마 꺼내서 보려고 자기 서랍에 넣어두었겠조? ㅎㅎ

새파랑 2022-01-14 17:25   좋아요 4 | URL
누가 그랬더라~ 책에 총이 나오면 발사되어야 한다고? ㅋ 편지도 나왔으면 이미 발견될 운명이었겠죠? ㅎㅎ

청아 2022-01-14 17:30   좋아요 4 | URL
영화에도 그 얘기 있어요! 총이 나옴 발사되어야한다ㅋ

새파랑 2022-01-14 17:31   좋아요 4 | URL
아 영화였나요? 😅 제가 머리가 나빠서 가물가물합니다

scott 2022-01-16 00:22   좋아요 4 | URL
안톤 체홉!이 말했습니다!ㅎㅎ
‘1장에서 총이 등장했다면 2장이나 3장에서는 반드시 그 총이 발사되어야 한다. 만약 쏘지 않을 것이라면 과감하게 없애버려야 한다고 ㅋㅋㅋ

러쉬아 마니아 새파랑님에게 안카 세트는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ㅎㅎ

새파랑 2022-01-16 08:45   좋아요 3 | URL
저도 왠지 체호프 글에서 본 기억이 있는거 같은데 제 자신을 신뢰할 수 없어서 😅 ㅋ1월 3차 구매 리스트를 쓸 만큼 책이 또 모였습니다~!!

그레이스 2022-01-14 17:2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에피‘!
에피쿠로스가 생각나는 이름.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안나 카레니나와 보봐리 부인과 이 작품을 묶어서 같은 류로 놓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제 소견에 안나 카레니나의 소설의 주인공은 안나 카레니나가 아니라는)

암튼 부지런하십니다. ㅎㅎ

새파랑 2022-01-14 17:23   좋아요 4 | URL
그럼 안나 카레리나의 주인공은 브론스키? ㅎㅎ 출판사의 주장일 수도 있지만 느낌이 비슷하긴 합니다 ^^ 저 부지런하고 단순합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2-01-14 17:40   좋아요 5 | URL
레빈으로 보게 되요^^
제가 알기론 제목도 안나 카레니나로 하려고 했던게 아니었다고...
독자 맘이죠. 뭐!

새파랑 2022-01-14 17:54   좋아요 4 | URL
레빈ㅋㅋ이 맞는거 같아요~! 지금 제 머리속이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가 섞여가지고 햇갈려요 😅

청아 2022-01-14 17:2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일본인친구가 써준 연애?편지 안버렸는데 어디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일어라서 아무래도 안심하고 안버린거같은데 리뷰읽으니 생각나네요. 그사람과 연애는하지 않았지만..아 또TMIㅋㅋㅋ새파랑님 왜 안나카레니나 구입하셨는지 알것같아요. 댓글에서 울분이 느껴집니다 ㅡ집에못가고 웃고있는 미미ㅋ

새파랑 2022-01-14 17:28   좋아요 5 | URL
편지는 함부로 버리면 안되지만 어디 있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안나 카레니나 새로 구입한건 정말 생각없이 구매한거에요. 재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기왕이면 다른 버젼을 읽어보자는 시도? 😅 집에는 가셔야 합니다~!!

청아 2022-01-14 17:55   좋아요 5 | URL
찾아서 땅에 잘 묻을래요ㅋㅋㅋㅋ😁

새파랑 2022-01-14 17:57   좋아요 5 | URL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편지 묻는 인증샷도 올려주세요 ^^

청아 2022-01-14 18:02   좋아요 3 | URL
아ㅋㅋㅋㅋㅋ북플에서 미니님이랑 새파랑님 제일 재밌어요!ㅋ

새파랑 2022-01-14 18:05   좋아요 3 | URL
저도 미니님이랑 미미님 ^^

물감 2022-01-14 17: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음 그러면 3부작중에 이책을 먼저 읽어야겠군요.
참고하겠습니다 ㅎㅎ

새파랑 2022-01-14 17:30   좋아요 6 | URL
3부작을 다 읽으실거면 괜찮은데, 혹시 그런게 아니시라면 아주재미있는 <보바리 부인>을 먼저 읽으시는 것도 좋을거 같아요~!! <안나 카레니나>는 분량 입박이 좀 있어서 이건 휴가때 ^^

페넬로페 2022-01-14 17:39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전혀 모르는 작가의 작품이네요~~
이 책 품절인데 저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유명한 작가인가봐요~~
정말 정 때문에 망치는 인생이 많아요.
간통의 기본이죠 ㅎㅎ
보봐리 부인을 먼저 읽어봐야겠어요^^

새파랑 2022-01-14 17:56   좋아요 6 | URL
저도 우주점 오프라인에서 구매했어요 ㅋ 그런데 이건 양장 이고 무선은 아마 품절이 아닐거에요 ㅎㅎ

저도 이번에 이 작가의 작품 처음 읽어봤습니다 ^^

보바리부인 강!추! 입니다~!!

서니데이 2022-01-14 19:1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실제 사례로 생각하기에는 불편하지만,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속에서 불륜은 극적 소재가 되어서 재미있는 작품도 많은 것 같습니다. ]
잘읽었습니다. 새파랑님,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새파랑 2022-01-14 19:22   좋아요 7 | URL
전 평범한 일상보다는 이런 소재가 더 인간의 심리를 잘 보여줘서 좋더라구요~!!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불금 보내세요 ^^

- 2022-01-15 13:2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안나카레니나 읽는데 몇일 걸려요? 이번에 꼭 읽고 ㅋㅋㅋ 알려주세요!! 몇시간 걸려요? 저는 읽을까요? 말까요? 그거 읽으면서 다른 책 안읽을 수 있을까요?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2-01-15 13:38   좋아요 6 | URL
공쟝쟝님 이라시면 1권당 이틀, 총 3권이니까 6일에 리뷰쓰기 하루해서 총 7일 예상합니다~!!

공쟝쟝님과 비슷하게 매력적인 ˝안나˝가 나오기 때문에 꼭 읽으셔야 합니다 ^^

<안나 카레니나> 읽기 시작하시면 재미있어서 다른 책은 읽기힘드실겁니다 ㅎㅎ

- 2022-01-15 13:56   좋아요 5 | URL
저와 비슷하다고요? 그 여자 바람피우다 죽지 않나요? ㅋㅋㅋㅋㅋㅋ 아놔 이사람이….

새파랑 2022-01-15 14:09   좋아요 5 | URL
헉 ㅋ 매력적(?)이라는게 비슷하다는거지 그 외에는 아닙니다 😅

청아 2022-01-16 09:01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희선 2022-01-16 01: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19세기 여성... 정말 편지를 왜 갖고 있었을까요 시간이 지나도 다른 사람한테 마음을 준 건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건 지금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새파랑 2022-01-16 08:47   좋아요 5 | URL
너무 좋아하면 충분히 그럴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가지고 있었는지도 한편으로는 이해됩니다 ㅎㅎ 차라리 모르는게 더 나은 것도 많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