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이 좀 아쉽긴 하지만 재미있었다.




독서는 그녀에게 여태까지 몰랐던 낭만적인 지평선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피와 신경으로만 사랑을 느껴왔었다. 그런데 이제 머리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학생은 사라졌다. 하숙집을 옮긴 모양이었다. 테레즈는 금세 그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독서의 효능?) - P155

지금 자기를 괴롭히는 여자를 저 혼자 소유하려고 저질렀던 무서운 범죄와 노력을 회상해보니, 만일 그녀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한 살인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말 거라고 느껴졌던 것이다. 남의 아내를 뺏으려고 한 남자를 물에 던져 죽이고 열다섯 달을 기다리다가, 온갖 아틀리에에 제 몸을 굴리고 다니는 젊은 여인과 살 작정을 한다는 것이 우습게 여겨져,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더욱이 그와 테레즈는 피와 공포로 맺어진 관계가 아닌가? - P160

그는 다시 잠들려 했다. 그러나 욕정에 싸인 옅은 잠과 갑작스럽고 가슴을 찢는 듯한 깨어남이 계속되었다. 그는 미칠 듯이 끈기 있게 테레즈 쪽으로 갔으나 부딪히는 것은 역시 카미유의 시체였다. 열 번 이상을 그는 아주 정확하게 그 길을 되갔다. 육체를 불태우면서 똑같은 행동을 했다. 그리고 번번이 정부를 껴안으려고 팔을 벌리면 물에 빠져 죽은 카미유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그를 숨가쁘게 하고 공포에 질려 깨어나게 하는 이 불길한 결말도 그의 정욕을 식히지 못했다. - P171

로랑은 두 주일 넘게 어떻게 하면 카미유를 다시 죽일 수 있을지 생각했다. 물에 던졌는데도 아주 죽어버리지 않고 매일 밤 그들의 침대로 와서 눕곤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살인을 끝내고 그들의 사랑에 마음 편히 취하려는 순간, 희생자는 다시 살아나서 그들의 잠자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테레즈는 과부가 아니었다. 테레즈가 죽은 자를 남편으로 갖고 있는 한, 로랑은 그녀의 두번째 남편일 뿐이었다. - P234

만약 그녀가 일어서서 목에 치미는 공포의 고함을 지르고 아들의 살인자들을 저주할 수 있었더라면 고통은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을 듣고 모든 것을 이해한 후에도 그녀는 터질 것 같은 괴로움을 간직한 채 말없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야만 했다. - P274

"카미유의 피를 뒤집어쓴 지금의 당신을 내가 어찌 사랑할 수 있겠어요? 카미유는 나한테 아주 친절했어요. 만약 카미유를 소생시켜 다시 사랑할 수만 있다면, 난 당신을 죽이겠어요. 알아듣겠어요?" - P311

테레즈가 죄를 뉘우치고 카미유를 생각하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면서부터 로랑의 생활은 더없이 끔찍해져갔다. 그 순간부터 그 가련한 인간은 영원히 자기 희생자와 같이 살게 되었다. 매순간 전남편을 칭찬하고 그리워하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조그만 일도 칭찬의 구실이 되었다. 카미유는 이것을 하고 저것을 했으며, 이런 장점이 있고 저런 방법으로 사랑했었다는 것이다. 테레즈는 언제나 카미유의 이야기를 하고, 카미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말들을 꺼내곤 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가볍게 하고, 로랑에게 더욱 가혹한 고통을 주려는 복수심에서 갖은 방법을 다 썼다. - P312

서로의 마음을 찢어놓지 않고 서로 고통을 주고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들은 증오와 잔인함에 대한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반발과 끌림이 그들을 떼어놓는 동시에 붙들어놓고 있었다. 싸운 후 서로 피하고 싶어하면서도, 다시 돌아와 서로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다. 더구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보면 도망갈 수도 없었다. - P317

그래서 테레즈와 로랑은 제각기 새로운 범죄를 통해 첫번째 범죄의 속박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그마한 평정이나마 맛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방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그들은 동시에 하게 되었던 것이다. 헤어져야 한다는 긴박한 필요성은 그 둘 모두 느꼈다. 서로가 영원히 헤어지고 싶었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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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12-25 2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날씨는 오늘 더 추운 것 같아요.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메리크리스마스.^^

새파랑 2021-12-25 21:39   좋아요 2 | URL
나갔다왔는데 완전 춥네요 ㄷㄷㄷ 아직 남은 일요일 잘 보내세요~!!

scott 2021-12-25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번역이 아주 많이 아쉬운 ㅜ.ㅜ
알랭 로브그리예 작품을 완독하지 못할 정도로 번역이 ㅜ.ㅜ

새파랑 2021-12-25 21:41   좋아요 1 | URL
아 번역이 좀 그랬었군요 ㅋ 저는 잘 못느꼈는데 비몽사몽 읽어서 그런거 같아요 😅
 

엄청 흥미롭고 재미있다. 약간 죄와벌을 읽는 느낌도 있다.






몇 해 전에는 이 여자의 맞은편에 상점이 하나 있었다. 그 상점의 초록빛 판자들은 사방 틈바구니에서 습기를 풍겼고, 좁고 기다란 나무 간판에는 잡화상‘ 이라는 검은색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리고 출입문 창 유리에는 붉은색으로 ‘테레즈 라캥 이라는 여자 이름이 적혀 있고, 상점 좌우로는 푸른 종이를 씌운 깊숙한 진열장이 박혀 있었다. - P22

병으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을 받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카미유는 키가 작고 허약했으며, 가느다란 사지는 힘이 없어 움직임이 둔했다. 라캥 부인은 아들을 속박하는 그 나약함 때문에 더욱 아들에게 사랑을 쏟았다. 창백하고 허약한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병을 이겨낸 애정과 자기 때문에 아들이 열배 이상은 오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담겨 있었다. - P27

테레즈는 고모의 미적지근한 애정을 받으며 카미유와 같은 침대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강철 같은 건강 체질이었는데도, 마치 허약한 애처럼 사촌오빠와 약을 나누어 먹고 어린 병자가 차지하고 있는 방의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 갇혀 자랐다. - P30

병약한 카미유는 젊은이의 가혹한 욕망을 알지 못했다. 테레즈에 비하면, 그는 여전히 어린 소년으로 머물러 있었다. - P33

그날 저녁, 테레즈는 계단 왼쪽에 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른쪽에 있는 사촌오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에게 변화란 이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다음날 젊은 부부가 아래층에 내려왔을 때, 카미유는 병적인 무기력과 에고이스트의 변함없는 침착성 그대로였으며, 테레즈도 부드러운 무심함과 무섭도록 냉정한 얼굴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 P35

삼년 동안 비슷한 날이 계속되었다. 카미유는 단 하루도 결근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는 상점에서 거의 나가지 않았다. 습기찬 그늘 속에서 맥없고 답답한 침묵에 싸여 살고 있는 테레즈는, 매일같이 저녁이면 차가운 잠자리와 아침이면 공허한 하루를 가져다주는 아주 무미건조한 생활이 자기 앞에 전개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 P43

그날 저녁 테레즈는 상점으로 내려가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녀는 손님들과 함께 열한시까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로랑과 시선이 부딪히는 걸 피하면서 같이 도미노 놀이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기야 로랑도 그녀에게 마음을 쓰진 않았다. 그러나 이 남자의 다혈질적인 천성과 큰 음성, 기름진 웃음, 그리고 몸에서 풍겨나오는 거칠고도 달콤한 냄새에 마음이 쏠려서 그녀는 초조하고 괴로운 기분에 빠져 있었다.

(비극의 시작~~!) - P58

"우린 여기선 아무것도 겁낼 게 없어요…… 저자들은 모두 장님이에요. 그들은 사랑을 몰라요." - P77

그녀가 한 남자를 맞아들인 것은 바로 지척에 있는 옆방이었다. 간통을 저지르며 뜨겁게 뒤엉켜 뒹굴던 곳도 바로 그 방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시간이 오면 그의 정부는 그녀에게 낯선 사람이 되고, 남편의 친구가 되고,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방문객이 되는 것이다. 이 가혹한 희극, 인생의 기만, 대낮의 뜨거운 포옹과 저녁의 고의적인 무관심을 비교하면서 젊은 여인의 피는 새로운 정열을 느끼고 있었다.

(늦게 배운 욕망이 더 무서운거다) - P84

"난 그를 원망친 않아." 그는 마침내 이름을 대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정말 우리에겐 너무 귀찮거든. 그를 떼어놓을 수 없을까? 어디 멀리 여행을 보낼 수는 없을까?" "아, 그이가 여행을 하다니!" 하고 젊은 여인은 머리를 흔들면서 말을 받았다. "그런 남자가 여행을 할 것 같아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여행만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도리어 우리가 매장될 거예요.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죽지 않아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여행이란...) - P91

다음날 시체공시장에 들어갔을 때 그는 가슴에 심한 충격을 느꼈다. 바로 눈앞의 포석 위에 카미유가 벌렁 누워서 머리를 들고 눈을 살짝 뜬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 P140

그러나 사랑은 그들을 잡아두지 않았다. 욕정이 사라진것이다. 그들은 조용히 얘기하며,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떨지도 않고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살을 아프게 하고 뼈를 삐걱거리게 했던 미친 듯한 포옹을 잊은 것 같았다. 그들은 단 둘이 만나기를 피하기까지 했다.

(정점에서 내려오는 감정)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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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12-24 23: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저도 전에 샀던 것 같아요. 이게 박찬욱 감독 영화 <박쥐>원작이었어요.
프랑스 소설이라서 생각을 못했는데, 원작이라도 들었던 것 같아요.
새파랑님,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추운 날씨지만, 행복하고 따뜻한 밤 되세요.
메리크리스마스.^^

새파랑 2021-12-24 23:40   좋아요 2 | URL
박쥐를 본지가 오래되서 가물가물한데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거 같은 느낌도 들더라구요~!! 즐거운 크리스마스 🎄 보내세요 ^^
 

˝많은 것을 생각해내고, 사소한 것에까지 몰두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 주저하게 되고 소심하게 되어서 어떤 일을 할 때 겁이 많아지게 된다.˝


<처음 소개되는 체호프 단편소설>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가 초기에 쓴 23편의 단편들이 수록된 책이다. 내가 생각하는 체호프 단편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뭔가 갑작스러우면서도 여운이 남는 결말‘인데, 그의 초기작은 이러한 특징에 추가하여 유머와 연민이 문장 속에 녹아있다.


이 책에 실린 23편의 작품 대부분이 좋지만, 그 중에서도 인상깊고 밑줄도 많이 그은 작품은 <베로츠카>와 <적들> 이었다.


1. <베로츠카>

민음사에서 출판된 <체호프 단편선>에도 수록되어 있는 단편으로, <체호프 단편선>을 읽을 때에도 이 작품이 좋았었는데, 다른 책에서 다시 만나도 역시 좋았다. 그때와 똑같이 비슷한 포인트에서 밑줄을 그었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간단히 써보면, ˝오그뇨프˝ 라는 남성이 통계연감을 만들기 위해  N군으로 장기간의 출장을 가게 되고, N군 지방의회 의장인 ˝쿠즈네초프˝ 집을 매일 방문한다. ˝오그노프˝는 의장과 가족의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되고, 그곳에서의 추억과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 큰 인상을 받는다.


특히 그는 의장의 딸인 ˝베로츠카(베라)˝에게 호감을 갖는데, N군을 떠나는 날 그는 의장의 집에 방문하여 인사를 하고 오는 길에 ˝베라˝의 배웅을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둘이 함께 길을 걸으면서 그는 그곳에서의 추억을 그녀와 이야기한다.

[˝십 년 후에 만나서 옛날 일을 한번 회상해보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라는 시간을 느끼면서 살고 있고, 이 현재는 우리 삶을 가득 채우면서 우리를 흥분시키고 있죠. 그러나 십 년 후에 만날 때에는 우리는 이미 이 다리에서 마지막으로 만나고 있는 지금의 날짜도, 달도, 심지어 연도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당신도 아마 많이 변하실 거고요. 당신도 변하실테죠?˝]  P.45



이제 배웅의 끝자락에 도달하게 되는데, 갑자기 ˝베라˝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그에게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고백을 한다. 그 역시 그녀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그는 고백을 듣는 순간 자신의 마음이 변한것을 느끼게 된다.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난 후 여자를 매력 있게 만드는 도도함을 던져버린 그녀는 왠지 키도 더 작아 보였고 더 평범해 보였고 더 침울한 얼굴처럼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 그렇지 않은 걸까?‘]  P.49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당황한 그는 그녀의 사랑을 정중히 거부한다. 이후 그는 그녀가 집으로 가는 걸 배웅해주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혼자서 집으로 간다. 돌아가는 길에 느꼈을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후 그는 한밤중에 다시 아쉬움을 느끼고 그녀의 집을 찾아가지만, 그녀 방의 창문만을 바라보고 다시 돌아간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인간은 자유의지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면서 확신하게 되었고, 선량하고 친절한 사람도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가까운 사람에게 혹독하고 부당한 고통을 주게 되는 상황을 스스로 연출했던 것이다.]  P.54



그렇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먼저 사랑을 고백했다고 해서 마음이 변한 것은 왜그랬던 걸까? 사랑까지는 아닌 단지 호감이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환상이 깨져서인 걸까?

[그의 마음은 고통스러웠고, 베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앞으로는 찾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하고 친숙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베라와 함께 젊은 날의 한 부분이 사라져 버렸고, 그가 그처럼 헛되이 날려버린 그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P.54       



2. <적들>

방금 의사인 ˝키릴로프˝의 여섯살 난 아들이 죽었다. 아들이 누워 있는 방에서 느껴지는 것은 비통함 보다는 인간의 슬픔에서 나오는 아름다움 뿐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키릴로프˝는 미세한 떨림으로만 아내가 살아있음을 인지할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보긴˝이란 남자가 집으로 찾아오고, 남자의 아내가 죽을것처럼 아프니 자기 집으로 진료를 와달라고 요청한다. 방금 자식을 잃은 슬픔과 아내를 혼자 둘 수 없기 때문에 ˝키릴로프˝는 방문진료를 거부한다. 하지만 ˝아보긴˝은 죽어가는 아내를 살려야 하기 때문에 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한다.

[˝저에게 당신의 의지를 강제할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가시면 되고 원하지 않으신다면, 할 수 없죠. 그렇지만 저는 당신의 의지가 아니라 당신의 감정에 호소하는 겁니다. 젊은 여자가 죽어가고 있단 말입니다! 방금 당신 아들이 죽었다고 말씀하셨죠?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나의 공포감을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P.86



결국 슬픔과 걱정을 뒤로 하고 의사 ˝키릴로프˝는 ˝아보긴˝의 아내를 진료하기 위해 그와 같이 가게 된다. 이동하면서 느꼈을 그의 슬픔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말이란 아무리 화려하고 깊이가 있어도 별다른 감정이 없는사람에게만 효력을 발할 뿐, 행복이나 불행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만족을 주지 못하는 법이다. 따라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행복이나 불행을 표현하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을 때 오히려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도 하고, 장례식 때 낭독되는 열정적이며 애정어린 조사는 단지 제3자에게만 감동을 줄 뿐, 죽은 사람의 부인과 아이들에게는 아무 반응도 얻지 못하는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P.87



하지만 ˝아보긴˝의 집에 도착해보니 그의 아내는 없었다. 아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남편을 속이고 ˝아보긴˝이 없는 틈을 타 달아난 것이었다. 이런 황당한 상황에 남편 ˝아보긴˝은 분노를 느끼지만, ˝키릴로프˝는 이보다 더한 분노를 느낀다. 타인의 사랑싸움에 희생된 그의 슬픔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었다. 훗날 그는 아들의 죽음을 떠올릴때 이때의 불쾌한 경험도 같이 떠올리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의사는 자신의 아내도 아니고 자신의 아들 안드레이도 아닌 아보긴과 방금 전에 머물렀던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불공평했고 비인간적일 정도로 잔인했다. 그는 돌아오는 내내 아보긴과 그의 아내, 파프친스키, 그리고 장밋빛 어둠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과 향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비난했고, 증오했고, 가슴에 통증이 생길 정도로 경멸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생겼다.]  P.102

[시간이 지나면 키릴로프의 슬픔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불공평하고 부적합한 이러한 신념은 의사가 무덤에 갈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P.102





역시 ˝체호프˝는 ˝체호프˝였다. 순간의 찰나를 독자가 실제 보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능력과 그 순간에 인물들이 느꼈을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체호프˝가 당연 최고인 것 같다. 위에서 소개한 두편의 단편 외에도 인상적인 작품이 많으니 체호프의 초기작을 읽어보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을 계기로 다시한번 러시아에 대한 애정이 살아남을 느꼈다. 역시 땅은 넓고 봐야 한다.



끝으로 책의 뒷표지에 쓰여있는 ˝체호프˝에 대한 ˝막심 고리키˝의 말이 인상적이어서 소개해본다.

《체호프는 속물성이라는 어두운 바다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비극적이고암울한 농담과도 같은지 열어 보였다. 유머러스한 단어와 문장들 너머로 얼마나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지 알기 위해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 책을 읽어야만 한다.》



Ps 1. 지금까지 읽은 ˝체호프˝의 책이 총 5권인데 역시나 안좋은 작품이 없었다. 전부다 100점 인데 굳이 순위를 매겨보자면 아래와 같다.

1. 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2. 지루한 이야기 (창비)
3. 벚꽃동산 (열린책들 / 희곡)
4. 사랑에 관하여 (팽귄)
5. 처음 소개되누 체호프 단편소설 (인디북)


혹시나 내가 놓치고 안읽은 ˝체호프˝의 작품이 있을수도 있으니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도 다 찾아 읽어봐야 겠다.


Ps 2. 이 글을 보신 분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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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1-07 19:30   좋아요 3 | URL
ㅠㅇㅠ;;;ㅋㅋㅋㅋ

mini74 2022-01-07 19:36   좋아요 3 | URL
저희 유투브 삼총사해요 *^^* ㅎㅎ

새파랑 2022-01-07 19:41   좋아요 3 | URL
헉 ~ 갑자기 혹 합니다 ^^

청아 2022-01-07 19:43   좋아요 3 | URL
🙄무서운 분들ㅋㅋㅋㅋ

서니데이 2022-01-07 21: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새파랑 2022-01-08 00:11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1-07 21: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새파랑 2022-01-08 00:12   좋아요 1 | URL
thkang님 감사합니다 ^^ 불금 잘 보내셨길 바랍니다~!!

초란공 2022-01-07 21: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2관왕 축하드립니다^^

새파랑 2022-01-08 00:12   좋아요 1 | URL
2관왕이라고 하시니까 부끄럽네요 ㅜㅜ 감사합니다~!!

러블리땡 2022-01-08 0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왕 새파랑님 2관왕 축하드려요~ 짝짝짝!!!

새파랑 2022-01-08 00:13   좋아요 1 | URL
러블리땡님도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희선 2022-01-08 00: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 또 축하합니다 안톤 체호프 소설 안 좋은 게 없다니, 체호프도 새파랑 님이 좋아하는 작가군요


희선

새파랑 2022-01-08 07:49   좋아요 2 | URL
어제 기절(?)해서 이제봤어요 ^^ 또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2-01-08 00: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우, 새파랑님, 2관왕 축하드려요.
알라딘 서재에서 당연히 새파랑님은 2관왕이십니다. 제가 대표라면 10관왕 드릴텐데요....
성실하게, 묵묵히 독서하시고 글 쓰시는 모습에 언제나 감동받고 많이 배웁니다**

새파랑 2022-01-08 07:50   좋아요 4 | URL
언제나 미숙해서 부끄럽지만 감사합니다 ^^ 주말에도 재미있는 책 읽으면서 즐겁게 보내세요~!! 저도 대표라면 페넬로페닝께 100관왕을 드리고 싶어요 ^^

thkang1001 2022-01-08 02: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01-08 07:51   좋아요 2 | URL
thkang님 또한번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thkang1001 2022-01-08 0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bookholic 2022-01-08 1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 이달의 당선작 2관왕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늘 좋은 글 부탁드려요~~

새파랑 2022-01-08 18:4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아직 22년에는 책을 많이 못읽고 있는데 오늘부터 달려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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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체호프의 단편은 너무 좋다.

아, 사랑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럼 내가 언제 자발적인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 P53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인간은 자유의지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면서 확신하게 되었고, 선량하고 친절한 사람도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가까운 사람에게 혹독하고 부당한 고통을 주게 되는 상황을 스스로 연출했던 것이다. - P54

인간은 발달할수록 많은 것을 생각해내고, 사소한 것에까지 몰두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 주저하게 되고 소심하게 되어서 어떤 일을 할 때 겁이 많아지게 된 것 같아. - P71

"저에게 당신의 의지를 강제할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가시면 되고 원하지 않으신다면, 할 수 없죠. 그렇지만 저는 당신의 의지가 아니라 당신의 감정에 호소하는 겁니다. 젊은 여자가 죽어가고 있단 말입니다! 방금 당신 아들이 죽었다고 말씀하셨죠?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나의 공포감을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 P86

일반적으로 말이란 아무리 화려하고 깊이가 있어도 별다른 감정이 없는사람에게만 효력을 발할 뿐, 행복이나 불행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만족을 주지 못하는 법이다. 따라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행복이나 불행을 표현하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을 때 오히려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도 하고, 장례식 때 낭독되는 열정적이며 애정어린 조사는 단지 제3자에게만 감동을 줄 뿐, 죽은 사람의 부인과 아이들에게는 아무 반응도 얻지 못하는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 P87

문지방에 아보긴이 나타났지만 들어갈 때 보았던 그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느껴졌던 풍만함과 섬세한 세련미는 사라져버렸고, 그의 얼굴·손·몸짓은 공포로 인한 혐오스런 표정도 아니고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고통스런 표정도 아닌 그 무엇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코 · 입술 · 콧수염 등 얼굴의 모든 것이 떨고 있었고 마치 얼굴에서 떨어져나가려는 듯이 보였고, 눈은 고통으로 오히려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93

그런데 대체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제가 사랑을 요구한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런 추악한 속임수를 썼을까요? 사랑하지 않으면 그렇다고 직접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될 것을, 더군다나 내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 P97

시간이 지나면 키릴로프의 슬픔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불공평하고 부적합한 이러한 신념은 의사가 무덤에 갈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 P102

"그런데 당신은 참 답답한 사람이군요. 왜 내게 대항하지 않았습니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겁니까? 그렇게 제대로 할 말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우유부단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살 수 있습니다 하는 표정을 읽었다. - P145

세상에 내려온 천사는 아내가 될 수 없고, 집에서 남편과 같이 살면 사탄이 된다. 정말 진리야. 당신은 전생에 사탄이었고 지금도 사탄이야.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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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24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해피 크리스마스 이브!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
゚。  。゚
 ゚・。・゚
⠀()_/)
⠀(。ˆ꒳ˆ)⠀
ଫ/⌒づ🎁
손 얼릉 나으시길 바랍니다!

새파랑 2021-12-24 11:28   좋아요 1 | URL
다음주면 완전히 회복해서 날아다닐 겁니다 ^^ 그동안 못한 운동을 해야겠어요 ㅋ

스콧님도 메리크리스마스 입니다~!!
 

역시 체호프는 체호프다.






그는 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만날 수 있을까, 이러한 만남 뒤에는 그들에 대한 추억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를 생각하면서 걸어갔다. - P35

하찮은 기억의 흔적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람들의 얼굴과 말들은 희미해지고 과거 속으로 깊이 잠기곤 한다. - P35

그러나 그가 지금 쪽문을 통해 그 집에서 나가게 되면 이 모든 것은 실제적인 의미를 영원히 상실하면서 추억으로 변할 것이고 한두 해가 지나면 마치 환상이나 상상의 산물처럼 그의 의식 속에서 사랑스런 형상으로 희미하게 기억될 것이다.

‘인생에서 사람보다 더 고귀하고 소중한 것은 없어!" - P36

"한 십 년쯤 지나서 우리가 갑자기 만나게 된다면..."
그가 말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 P45

"십 년 후에 만나서 옛날 일을 한번 회상해보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라는 시간을 느끼면서 살고 있고, 이 현재는 우리 삶을 가득 채우면서 우리를 흥분시키고 있죠. 그러나 십 년 후에 만날 때에는 우리는 이미 이 다리에서 마지막으로 만나고 있는 지금의 날짜도, 달도, 심지어 연도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당신도 아마 많이 변하실 거고요. 당신도 변하실테죠?" - P45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난 후 여자를 매력 있게 만드는 도도함을 던져버린 그녀는 왠지 키도 더 작아 보였고 더 평범해 보였고 더 침울한 얼굴처럼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 그렇지 않은 걸까?‘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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