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함께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당신은 그 살아 있는 대답이니까. 신 그 자신과 함께 신의 존재에 대해 토론할 수 없는 것처럼.˝


갑자기 사강의 책이 읽고 싶어서 <마음의 파수꾼>을 선택했다. 이번달에 이미 사강의 책을 한권 읽어서 안읽으려고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런 형태의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는 사강밖에 없다고.


사랑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그래도 <마음의 파수꾼>에서 다루는 사랑은 다소 특이한 형태다. 플라토닉 사랑이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도로시)을 괴롭히는 사람은 모두 없애버리는 한 남자(루이스)의 사랑. 그런데 한 남자(루이스)는 그녀(도로시)와 사랑을 나누는 다른 남자(폴)는 지켜준다. 왜냐면 다른 남자(폴)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녀(도로시)가 슬퍼할 걸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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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중반의 시나리오 작가인 ˝도로시˝는 그녀를 좋아하는 40대 금발의 미남 ˝폴˝과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를 괜찮다고 생각은 하지만 확 끌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드리이브 도중 한 남지가 갑자기 차에 뛰어들고, ˝폴˝은 사람을 치지는 않았지만 차는 전복된다. 다행이 ˝도로시˝와 ˝폴˝은 다치지 않았지만, 차에 뛰어든 남자는 파편을 맞고 다리에 부상을 입는다. 이 남자의 정체는 무얼까?

[그는 저 멀리에 보이는, 검은색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집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아마도 죽어가고 있을 그 청년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길 위에 홀로 남겨졌다. 갑자기 그 청년이 눈을 뜨더니, 나를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P.18



차에 뛰어든 남자의 이름은 20대로 보이는 ˝루이스˝였고, 그는 사고 당시 LSD를 먹고 환각상태에서 뛰어든 것이었다.  ˝도로시˝는 잘생기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루이스˝에게 왠지 모를 연민과 애정을 느끼게  되고, 그녀는 ˝루이스˝를 병원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치료하게 한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를 ˝폴˝은 못마땅해 한다. 아들뻘이긴 하지만 외간 남자와 한집에서 산다는건 누가봐도 이상하지만, 사강이 쓰니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낮의 아름다움, 밤의 혼란, 알코올과 쾌락이 선사하는 현기증, 부드러운 바이올린 소리, 일이 가져다주는 흥분, 그리고 건강. 또한 잠이 베개 위에, 죽음의 자세 속에 우리를 다시 묶어두기 전에 각자의 앞에 놓인, 자신에게 주어진 그 모든 거대한 낮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생생하게 일깨우는 믿을 수 없는 그 행복을.]  P.74



˝루이스˝ 역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준,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는 ˝도로시˝에게 사랑을 느끼며 그녀에게 푹 빠진다.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원하는 사랑은 육체적 사랑이 아닌 정신적 사랑. 그는 그녀가 ˝폴˝과 외박을 해도 결코 질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를 힘들게 했던, 그녀를 함부로 대했던 사람들에게 깊은 증오심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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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신을 떠났어요. 그래서 벌 받은 거죠. 인생은 그런 거예요.˝

˝너 유치하구나. 하지만 고맙게도 인생은 너처럼 그렇게 유치하지 않아.˝

˝인생은 유치할 수 있어요.˝
----‐---------------------  P.50



잘생기 외모 덕분에 신인 배우로 데뷔하게 된 ˝루이스˝, 많은 여배우들이 그에게 접근하지만 그는 오직 ˝도로시˝에게만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와 한집에 살면서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과거 그녀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을 알게 되고, 갑자기 그녀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하나 하나씩 사고로 죽게 된다. 쳐음에 그녀는 별 생각이 없었으나, 불현듯 이 사고를 일으킨게 ˝루이스˝가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되고, 그에게 진실을 물어본다. 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죽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증거가 전혀 없거든요. 그들은 당신을 괴롭히지 못할 거예요.˝]  P.113



어떻게 보면 살인자이지만, ˝도로시˝가 적의를 가지고 말한 사실 때문에 살인을 하게 된 ˝루이스˝, 과연 그녀와 그의 기이한 동거의 끝은 어떻게 될까? 그녀와 결혼을 약속한 ˝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루이스가 내 손에 자기 머리를 얹었다. 손가락 사이로 뜨뜻미지근한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여섯 달 전 인적 없는 길에서 이글거리는 불빛을 받으며 이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았을 때, 이것과 똑같은 피가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을 때 왜 아무런 예감을 느끼지 못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해졌다. 나는 루이스를 그곳에 버려두고 도망치거나 그가 죽도록 내버려두어야 했다.]  P.162




책을 읽으면서 마치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화 하기에 적당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보니 놀랍게도 외국이 아닌 이 작품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한국 영화가 있었다~!


이 책에는 온갖 사악한 것들이 등장한다. 술, 마약, 살인, 불륜, 배신, 비이성적인 사랑 등. 하지만 내용이 어둡지 않고, 오히려 사강 특유의 문체와 시적인 문장 때문에 아름답게 읽혀진다. 그리고 ˝도로시˝를 둘러싼 ˝루이스˝와 ˝폴˝의 기이한 삼각관계는 작가인 ˝사강˝이 꿈꾸는 연애 판타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에게 무조건 헌신하는 남자와 이성적으로 매력적인 남자와의 공존.


<마음의 파수꾼>은 사강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작품이었고, 사강이었기 때문에 감성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사강의 첫 작품으로 접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작품이지만, 그녀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추천하고 싶다. 이번에 읽은 <마음의 파수꾼>이 내가 읽은 사강의 여섯번째 작품인데 다른 사강책도 빨리 읽어야 겠다.

PS.  혹시 사강 작품을 안읽어 보셨다면 <슬픔이여 안녕>을 먼저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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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17 12:3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사강도 꾸준히 읽고 계시네요
새파랑님 리스펙 !

새파랑 2021-12-17 13:03   좋아요 4 | URL
이상하게 전작의 욕구가 생깁니다 😆

그레이스 2021-12-17 13:22   좋아요 4 | URL
이제는 습관성 전작읽기의 경지에 !

scott 2021-12-17 12:3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사강! 21세기 읽어도 문장이 세련 되었죠!! 새파랑님은 책 독파수꾼 ㅎㅎㅎ 담번 책은 하루키옹!🖐^^

햇살과함께 2021-12-17 12:53   좋아요 6 | URL
하루키옹은 너무 다작하셔서 새파랑님 독파하시려면 힘드실 듯^^ 저는 브람스.. 만 읽었는데 슬픔이여 읽고 싶네요!!

새파랑 2021-12-17 13:05   좋아요 5 | URL
책 파수꾼은 스콧님 아닌가요? ㅋ 사강 문장은 정말 세련된거 같아요 ^^ 하루키도 다시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 하는데....

새파랑 2021-12-17 13:06   좋아요 6 | URL
제가 하루키옹의 장편들은 다 두번씩 읽어봤어요 ^^ 이번에 다시 전작하면 세번째? 😅 저의 원래 원탑 작가는 하루키였습니다 ^^
슬픔이여 안녕 괜찮아요~!!

햇살과함께 2021-12-17 18:53   좋아요 2 | URL
오호 대단하십니다~!!

청아 2021-12-17 13: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그렇고 사강은 실제로 연하남과 플라토닉한 사랑을 해봤나봐요ㅎ ‘시몽‘에 대한 느낌이 참 좋았는데,
이 책 꼭 읽어봐야겠어요!😉

새파랑 2021-12-17 14:17   좋아요 4 | URL
사강은 연하든 연상이든 모두한테 인기도 많았을거 같아요. 역시 ... 세개 찍는 미미님은 책잘알~!!

행복한책읽기 2021-12-17 14:2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서재의 달인 축축축. 님 당근 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지요. <읽으면 무조건 쓴다> 를 실천하는 진정한 독서꾼. 그 실천력 진정 본받고 싶어요.^^ 사강의 이 글은 나중에 읽을게욤~~~

새파랑 2021-12-17 14:42   좋아요 4 | URL
<읽으면 무조건 쓴다> 이게 괜찮더라구요ㅋ 리뷰를 쓰니까 책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더 높아지는거 같아요 ^^
책읽기님도 다시한번 축하드려요~!!

페넬로페 2021-12-17 14:5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로맹 가리, 사강, 소세키, 필립 로스, 졸라~~전작 읽기 도전!(또 있는겨?)
거기에다 도스토옙스키, 하루키는 이미 전작 읽기 마쳤고~~
페넬로페, 이럴 시간없어!
빨리 책 읽어^^
새파랑님, 언제나 존경합니다♡♡

새파랑 2021-12-17 15:32   좋아요 6 | URL
이 다선 작가의 작품만 읽겠습니다. 이제 책이 너무 많이 쌓여서 다 읽고 구매해야할거 같아요 😅
페넬로페님은 쉬엄쉬엄 읽으셔도 됩니다. 페넬로페님이 존경하는 만큼 ×2로 제가 더 존경합니다 ^^

바람돌이 2021-12-17 14:5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슬픔이여 안녕이 안맞으면 사강이 저랑 안맞는거 맞을까요? ㅠ.ㅠ

새파랑 2021-12-17 15:33   좋아요 5 | URL
그 책이 안맞으시면 다른 책들도 안맞을거 같아요 🤔 원래 맞는 작가가 있고 안맞는 작가가 있는거 같아요. 다 좋을수는 없으니~!!

구단씨 2021-12-17 14:5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사강의 책을 다 읽은 건 아닌데요. 저는 쉽지 않더라고요.
인생이 담긴 이야기에 빠져들기는 해도, 한 사람의 삶을 다 이해하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 ^^

새파랑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새파랑 2021-12-17 15:50   좋아요 5 | URL
사강 책도 호불호가 갈리는거 같아요. 전 작품의 주인공들이 그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몰입이 잘 되더라구요. 만나본적은 없지마 ^^ 감사합니다~!! 구단씨님도 다시 한번 달인 축하드려요~!!

coolcat329 2021-12-17 15:4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강은 브람스만 읽으면 된다하고 접은 작가인데 ㅋㅋ 책이 참 많네요. 슬픔이여 안녕 추천하시나요? 갈등갈등~~읽어보겠습니다!

새파랑 2021-12-17 16:03   좋아요 5 | URL
쿨캣님은 저랑 좋아하시는 책 스타일이 비슷하셔서 괜찮을거 같은데요? ^^ 읽고 좋으셨으면 합니다~!!

stella.K 2021-12-17 16: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엇, 동명 영화가 있었군요.
저도 찾아 봐야겠어요.
정말 이 작품은 영화화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사강 작품 하나 읽은 게 있는데 사춘기 소녀가 읽기엔
좀 버겁다는 생각이 들어 이내 못 읽고 있었네요.
저도 기회되면 함 읽어봐야겠어요.

저도 서재의 달인 축하합니다.
알라딘 출근의 달인 같은 거 있으면 저도 순위 안에 들었을 텐데
선물도 약간 후져서 안되도 별로 섭섭한 건 없네요.
미안함다. 이거 남 좋은 일에 예의는 아닌 것 같은데
솔직한 게 병이라면 병이죠.ㅋㅋ

새파랑 2021-12-17 16:06   좋아요 5 | URL
영화 주인공이 배우겸 가수 김민종님 이더라구요 ㅋ 제가 영화는 워낙 약해서 😅 축하 감사합니다 ^^ 근데 서재의 달인이 중요한가요. 즐겁게 책읽는게 더 중요하죠~!!

mini74 2021-12-17 16:52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전 인생 유치하다고 생각합니다 ㅎㅎㅎ 제가 유치해서 ㅠㅠ 사강은 왠지 글을 참 쉽게 쓸거 같아요. 그냥 막 쓰는데 문장에 빛이 파박. ! ㅎㅎㅎ 새파랑님 알라딘에서 전작 하면 작가이름 적힌 뱃지 달아주면 재미있을 거 같아요 ㅎㅎ

새파랑 2021-12-17 17:08   좋아요 7 | URL
저도 유치합니다 ^^ 저도 사강처럼 빛이나는 리뷰를 쓰고 싶은데 이번 생에는 포기입니다~!!

stella.K 2021-12-17 17:37   좋아요 5 | URL
여기 유치 하나 더 추가요!
저 유치 작렬입니다.ㅋㅋㅋ

새파랑 2021-12-17 17:43   좋아요 5 | URL
유치한 사람 적어도 세분은 있군요 ^^

모나리자 2021-12-17 16:5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새파랑님~
그 누구보다도 더 진정한 달인이세요~^^ㅎㅎ

새파랑 2021-12-17 17:09   좋아요 6 | URL
모나리자님 감사합니다 ^^ 제가 북플에서라도 달인 소리를 들으니 기쁘네요~!!

초란공 2021-12-17 22: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재의 달인 축하와 리스펙 드립니다^^

새파랑 2021-12-17 23:55   좋아요 3 | URL
리스펙까지는 제가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 초란공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독서괭 2021-12-17 23: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잉 저는 <슬픔이여 안녕>이 그냥그랬어서, 이거 그냥그랬으면 사강이 안 맞는 걸까요, 다른 분께 물었더니 그럴 것 같다고 하셔서, 별로 읽어볼 생각이 없었는데 <마음의 심연>과 <마음의 파수꾼>은 재미있어 보여서 갈등되네요.

새파랑 2021-12-17 23:58   좋아요 3 | URL
마음의 심연이 개인적으로는 더 좋았어요 ^^ 독서괭님은 매운맛 소설이 더 잘맞는거 같아요~!!

han22598 2021-12-18 01: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강을 좋아합니다. ㅎㅎㅎ [슬픔이여 안녕] 읽어야겠어요 ㅋㅋ

새파랑님 서재 달인 축하드려요. 너무 예상되는 결과지만 말이죠 ㅎㅎ

새파랑 2021-12-18 08:55   좋아요 2 | URL
제가 북플의 독보적 미션을 열심히 해서 그런거 같아요 ^^ 감사합니다~! 우울할때 슬픔이여 안녕을 읽어보세요~!!

ilovebooks 2021-12-18 16: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새파랑님.
저도 어서 읽어야 할텐데....
너무 기대중입니다.

새파랑 2021-12-18 16:38   좋아요 1 | URL
아이러브북스님 감사합니다 ^^ 저는 사강의 책들은 다 좋았어요~!!

희선 2021-12-19 0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이야기를 보다보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다르면서 비슷한 느낌... 도로시를 괴롭히는 사람을 죽이다니, 도로시는 그걸 알면 조금 무서울지도 모르겠네요 마음의 파수꾼은 루이스일까요 도로시 마음을 지키고 싶은...


희선

새파랑 2021-12-19 10:35   좋아요 1 | URL
마음의 파수꾼은 ˝루이스˝가 맞는거 같아요. 좀 비뚤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은 사랑 이겠죠? 브람스랑 비슷한 분위기가 있긴 있어요^^

페크pek0501 2021-12-19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강의 작품 제목이 다 좋네요. 사람의 맘을 끄는 제목들이에요.^^

새파랑 2021-12-19 16:50   좋아요 1 | URL
프랑스 작가들이 제목을 잘 짓는것 같아요 ^^ 뭔가 마음에 확 들어요~!!
 

내용이 많이 특이하긴 하지만 읽는 재미가 있었다.


내 이름은 도로시 시모어다. 마흔다섯 살이고, 이목구비에는 피로의 흔적이 약간 엿보인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그렇게 되는 것을 전혀 막아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 P9

그는 저 멀리에 보이는, 검은색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집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아마도 죽어가고 있을 그 청년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길 위에 홀로 남겨졌다. 갑자기 그 청년이 눈을 뜨더니, 나를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 P18

"당신도 알겠지만, 난 돌이킬 수 없어요. 나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요."

"사람은 뭐든 돌이킬 수 있는 법이지."

"아뇨, 당신과 나 사이에는 인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뭔가가 있어요. 당신도 그걸 느낄 거예요. 당신은 그걸 알아야 해요. 그걸 알지 않으면 안 돼요." - P35

"그는 당신을 떠났어요. 그래서 벌 받은 거죠. 인생은 그런 거예요."

"너 유치하구나. 하지만 고맙게도 인생은 너처럼 그렇게 유치하지 않아."

"인생은 유치할 수 있어요." - P50

낮의 아름다움, 밤의 혼란, 알코올과 쾌락이 선사하는 현기증, 부드러운 바이올린 소리, 일이 가져다주는 흥분, 그리고 건강. 또한 잠이 베개 위에, 죽음의 자세 속에 우리를 다시 묶어두기 전에 각자의 앞에 놓인, 자신에게 주어진 그 모든 거대한 낮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생생하게 일깨우는 믿을 수 없는 그 행복을. - P74

그녀는 지난 오 년 동안 프랭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심지어 그를 만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오후 시간이 갑자기 비었거나 새 애인이 그녀의 감정적 용량을 감당하지 못한 거라고 추측했다. - P90

"당신과 함께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당신은 그 살아 있는 대답이니까. 신 그 자신과 함께 신의 존재에 대해 토론할 수 없는 것처럼." - P99

"루이스…… 네가 그들을 죽인 거 아니지, 그렇지?"

"누구요?"

"모두 말이야. 프랭크, 볼튼, 그리고 루엘라."

"맞아요."

"하지만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증거가 전혀 없거든요. 그들은 당신을 괴롭히지 못할 거예요." - P113

1. 내 허락 없이는 절대로 아무도 죽이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약속한다.

2. LSD 복용을 끊는다.

3. 이 집에서 나가 혼자서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다. - P124

"당신이 알지 모르지만, 폴이 죽든 살든 내겐 아무 상관 없어."

"그렇다면 왜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폴을 구한 거야?"

"당신은 그를 좋아하고, 그가 죽으면 힘들어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만약 폴이 내 애인이 아니었다면 넌 가만히 앉아 서 그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을 거라는 뜻이야?"

"네." - P144

"이보세요, 난 사람들이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난처한 일이죠.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와 함께 사는지, 무엇을 해서 사는지, 누구와 함께 자는지, 그들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죠. 아무튼, 다들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모르는 부분이 조금은 있어야 편안하죠, 안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 P154

루이스가 내 손에 자기 머리를 얹었다. 손가락 사이로 뜨뜻미지근한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여섯 달 전 인적 없는 길에서 이글거리는 불빛을 받으며 이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았을 때, 이것과 똑같은 피가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을 때 왜 아무런 예감을 느끼지 못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해졌다. 나는 루이스를 그곳에 버려두고 도망치거나 그가 죽도록 내버려두어야 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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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12-19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건 재밌나 보군요. 제가 읽었던 사강의 소설은 좀 싱거웠어요. 그 뒤로 안 읽게 되더군요.^^

새파랑 2021-12-19 16:53   좋아요 0 | URL
페크님은 쎈(?)걸 좋아하시는군요 ㅋ 그럼 이 책도 별로이실거 같아요 ㅎㅎ
 
빛 속으로 - 한국 문학사에서 지워진 이름. 평생을 방랑자로 산 작가 김사량의 작품집
김사량 지음, 김석희 옮김 / 녹색광선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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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보니 모든것이 자신을 슬프게 할 씨앗이 아니었던가˝


일제강점기 시대를 다룬 영화를 볼때면 항상 생각하는게 있다. ‘과연 내가 저 시대에 살았더라면 나는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을까? 아니면 그냥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살았을까?


시간이 흐른 후에야 누구나 쉽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확실한 건 그때 그 시절에는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녹색광선에서 여섯번째로 출판된 책 <빛 속으로>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작가인 ˝김사량˝이, 일본어로 쓴 단편을 모은 작품이다. 솔직히 ˝김사량˝ 작가의 이름은 이번에 처음 들어봤다.


1914년 태어난 그는 평양에서 항일시위를 하다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밀항하여 도쿄제대에 입학했으며, <빛 속으로>를 일본어로 써서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다. 이후 일본의 정책을 비판하는 작품을 쓰지만, 한때는 일본을 위한 글을 쓰기도 하였으며, 이후 중국에 있는 항일근거지로 탈출하게 된다. 하지만 해방 후 그는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게 되고 6.25. 전쟁때 북한의 종군기자로 참가하여 1950년에 사망한다.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하고 친일 이력에다가 해방 후에는 북한으로 가게되어, 우리나라와 북한 어디에도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잊혀졌던 작가였던 ˝김사량˝.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저항작가로 다시 알려지게 되면서 그의 작품은 주목받게 된다.


이 작품에 실려있는 단편 <빛 속으로>, <천마>, <풀이 깊다>를 읽어보면 일제강점기 시대에 저항하는 모습에 더하여,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겪은 정체성의 혼란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1.

표제작인 <빛 속으로>에세는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주요 테마는 이름. 됴쿄국제대학 학생인 ˝남˝이라는 이름의 주인공 ˝나˝는 빈민촌의 S 협회에서 이이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를 ˝남 선생님˝이 아닌 일본식 이름 ˝미나미 선생님˝ 이라고 부른다. ˝나˝ 역시 이걸 고치려고 하지 않고 ˝미나미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내버려 둔다. 오히려 조선인의 이름을 감추면서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그곳에서 살아가기에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러한 것에 대한 가책과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예를 들어 내가 조선인이라고 하면, 저런 아이들이 나를 대하는 기분 속에는 애정 이외에 나쁜 의미의 호기심이랄까, 아무튼 다른 감정이 앞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감추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모두가 그런 식으로 나를 불렀을 뿐이에요.]  P.22



이후 그는 자신과 비슷하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아이 ˝야마다 하루오˝를 만난다. 그 아이는 ˝나˝를 볼때마다 ˝조센징˝이라고 놀려대고, 조선인을 증오하며,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아이였다. 처음에 ˝나는˝ 그를 일본인 아이라고 알았지만, 이후 그 아이의 아버지는 일본인이고, 어머니는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는 가정폭력을 일삼고 조선인을 싫어하며, 어머니는 자신이 조선인임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큰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야마다 하루오˝에게 ˝나˝는 연민을 느끼고, 그의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아이와 가까워 질수록 나는 왠지 모를 마음의 안식을 얻게 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한 줄기 빛을 보게 된다.

----------------
˝선생님, 나는 선생님 이름을 알아.˝

˝그래? 말해봐.˝

˝남 선생님이지?˝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는 내 손에 자기 옆구리에 끼고 있던 웃옷을 내던지고 달려 내려갔다.
나도 문득 구원받은 듯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쓰러질 듯 타다닥 하고 그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  P.68



2.

두번째 작품인 <천마>는 경성을 배경으로, 일본인 관료를 등에 엎고 온갖 기행을 일삼는 작가 ˝현룡˝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준 낮은 외국어와 얕은 지식을 앞세워서 깨어있는 작가 행세를 하는 ˝현룡˝, 하지만 그의 만행을 더이상 봐줄수 없었던 일본인 관료˝오무라˝는 그에게 절로 유배를 가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절에 너무나 들어가기 싫었던 그는 일본에서 우연히 알게된 ˝다나카˝라는 작가가 경성에 방문하여 관료 ˝오무라˝를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작가 ˝다나카˝를 찾아가 그가 절에 안들어가도록 힘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일본인 앞에서 조선인을 욕하며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천룡˝을 보면서 작가인 ˝다나카˝는 그의 모습을 조선의 대표적인 ‘인텔리‘로 보게된다. 결국 설득은 실패하고, 그는 자신은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라고 외치고 다니면서 약간은 미쳐버리게 된다.

[일본인을 만났을 때는 일종의 비굴함으로 조선인의 험담을 줄줄이 늘어놓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리하여 비로소 자신도 일본인과 동급이라고 믿는 그였다. 드디어 현룡은 불같은 열정으로 타올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나는 이런 구제할 길 없는 민족성을 생각하면 슬퍼서 견딜 수가 없다네. 다나카, 이보게 자네, 내 기분을 알겠나?˝]  P.120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일본인 앞에서 굽신거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천룡˝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인텔리‘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고 있다.



3.

세번째 작품인 <풀이 깊다>는 강원도 산골을 배경으로, 식민지의 이중언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 정책 중 하나인 ‘색의 장려(백색 옷의 착용 금지)‘를  위해 산민들에게 일본어로 연설하는 군수(주인공의 작은아버지), 그리고 이를 조선어로 통역하 는 코풀이 선생님(주인공의 중학교 은사)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프기만 하다.


이러한 어이없는 상황을 지켜보던 주인공 의대생 ˝박인식˝은 이후 흰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먹물을 뿌리는 폭력성을 목격하게 되고,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조국의 비통함을 체감한다. 이후 그는 화전민들의 치료와 야학을 위해 산으로 들어간다. 일본의 폭력성을 피해 깊은 산으로 들어가서 살아야 했던 화전민의 모습은 마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의 안타까움과 겹쳐보였다.

[방화는 쫓겨 들어가는 그들이 이 세상에 퍼붓는 일종의 저주일까? 군청에서는 자기 관할 내에서 만큼은 화전민들을 살게 할 수 없다며 사방에서 화전민을 쫓아내기만 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산속 깊이, 산속 깊이.]  P.175




일제강점기를 살아가야 했던, 그리고 ‘적의 언어‘인 일본어로 글을 썼던 작가 ˝김사량˝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 책의 해설에도 나와있지만 책을 읽고나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적 소설인 <문맹>이 떠올랐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이유다. 이 언어가 나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때 일본에 저항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 저항문학 이겠지만,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정체성의 혼란을 보여주는 것 역시도 저항문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시대를 힘겹게 살아간 사람들에게 위로와 경의를 보내고 싶다.



Ps 1. 표제작인 <빛 속으로>는 정말 잘 쓰여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Ps 2. 이로써 녹색광선에서 출판한 여섯권의 책을 다 읽었다. 곧 일곱번째 책이 나온다고 하던데 그 책도 빨리 읽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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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1-07 19: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새파랑 2022-01-07 19:16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감사드려요 2022년도 잘 부탁드려요 ^^

thkang1001 2022-01-07 21: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서재의 달인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좋은 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새파랑 2022-01-07 19:16   좋아요 3 | URL
thkang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물감 2022-01-07 20: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리뷰당선 축하해요 ^^

새파랑 2022-01-08 00:18   좋아요 1 | URL
물감님 감사합니다 ^^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1-07 20: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새파랑 2022-01-08 00:18   좋아요 2 | URL
축하를 또 받네요~!!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

초란공 2022-01-07 2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적의 언어로 글을 쓴 크리스토프도.... 그렇군요.
정체성이라는 주제가 선명하네요.

새파랑 2022-01-08 00:20   좋아요 1 | URL
초란공님 이 책 좋아하실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독서 응원합니다~!!

러블리땡 2022-01-08 00: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좋은 밤 되세요 ^^

새파랑 2022-01-08 00:20   좋아요 2 | URL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 러블리땡님 주말독서도 화이팅 입니다~!!

페넬로페 2022-01-08 00: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의 녹색광선 출판사 찐사랑의 보답같아요. 당연한 리뷰 당선입니다.
저도 하나씩 관심 가져 볼께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새파랑 2022-01-08 07:52   좋아요 4 | URL
또 감사합니다~!! 제가 한번 좋아하면 끝까지 좋아합니다 ^^

희선 2022-01-08 00: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 축하합니다 김사량 작가를 사랑할지도 모르겠네요 좋아하는 작가에서 한사람이겠네요


희선

새파랑 2022-01-08 07:53   좋아요 2 | URL
ㅋ 사랑까지는 아니고 좋아하는 작가는 맞습니다~!! 희선님 주말 잘 보내세요 ^^

bookholic 2022-01-08 18: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의 정성스러운 글은 이달의 당선작 첫손에 꼽을 만합니다.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새파랑 2022-01-10 06:03   좋아요 1 | URL
북홀릭님 감사합니다 ^^ 이번달에도 함께 열독 하시죠~!!

하나의책장 2022-01-10 0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에는 새파랑님이 빠질 순 없죠!
새파랑님, 축하드려요^^ 굿밤되세요♡

새파랑 2022-01-10 06:04   좋아요 1 | URL
하나님 감사합니다 ^^ 새벽에 봤네요 ㅋ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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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광선의 책은 역시 흥미로웠다.






<빛속으로>

"언제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었네요."
"그렇죠."
"사실 선생님한테 어느 나라 말로 이야기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니까요."
"물론 나는 조선인입니다."
기분 탓인지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 P20

<빛속으로>

"예를 들어 내가 조선인이라고 하면, 저런 아이들이 나를 대하는 기분 속에는 애정 이외에 나쁜 의미의 호기심이랄까, 아무튼 다른 감정이 앞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감추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모두가 그런 식으로 나를 불렀을 뿐이에요. - P22

<빛속으로>

자기 어머니 병문안을 오면서 남의 눈을 피하거나, 알리지 않으려고 한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는 오히려 소년의 그런 모습이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애처로워 보였다. - P58

<빛속으로>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는 내 손에 자기 옆구리에 끼고 있던 웃옷을 내던지고 달려 내려갔다. 나도 문득 구원받은 듯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쓰러질 듯 타다닥 하고 그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 P68

<천마>

"나는 이제 조선어 창작은 질렸습니다. 조선어 따위 똥이나 처먹으라고 하세요. 그건 멸망의 부적이니까요." 그는 지난밤 모임을 떠올리며 되는대로 허세를 부렸다. "나는 도쿄 문단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도쿄의 친구들도 모두 그러기를 열심히 권하고 있죠." - P82

<천마>

사실 그는 허울 좋은 애국주의의 미명 아래 숨어 조선어로 쓰는 것은 어리석고, 언어 그 자체의 존재조차 정치적인 무언의 반역이라고 헐뜯는 자 중 한 사람인 것이다. - P90

<천마>

이제 와서 보니 모든것이 자신을 슬프게 할 씨앗이 아니었던가 - P110

<천마>

일본인을 만났을 때는 일종의 비굴함으로 조선인의 험담을 줄줄이 늘어놓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리하여 비로소 자신도 일본인과 동급이라고 믿는 그였다. 드디어 현룡은 불같은 열정으로 타올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나는 이런 구제할 길 없는 민족성을 생각하면 슬퍼서 견딜 수가 없다네. 다나카, 이보게 자네, 내 기분을 알겠나?" - P120

<풀이 깊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옛 스승은 슬픈 듯 멈추어 서서 중얼거렸다. - P166

<풀이 깊다>

방화는 쫓겨 들어가는 그들이 이 세상에 퍼붓는 일종의 저주일까? 군청에서는 자기 관할 내에서 만큼은 화전민들을 살게 할 수 없다며 사방에서 화전민을 쫓아내기만 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산속 깊이, 산속 깊이.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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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16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2021년 서재 달인 되셨삼 333
추카 해유 ^ㅎ^

새파랑 2021-12-16 14:56   좋아요 0 | URL
이야 ㅋ 저에게 이런일이~!! 감사합니다 ^^
스콧님도 축하드려요 😆
 


˝나는 항상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그 속에는 아마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논리적인 생각이다.˝


<그로칼랭>은 ˝로맹가리˝와 ˝에밀아자르˝가 동일 인물인지 몰랐다면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고 속을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그로칼랭은 ‘열렬한 포옹‘ 이라는 뜻이다.)


도시속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쿠쟁˝, 그에게 사람은 어렵고 사랑은 더 어렵다.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은 입안에서 맴돌고, 공상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용기내어 말을 건네고, 마음을 고백해 보지만 그에게 돌아오는건 냉소와 거절 뿐이었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2미터가 넘는 거대한 비단뱀 ˝그로칼랭˝. 아무 조건없이 ˝쿠쟁˝을 좋아해주는 ˝그로칼랭˝과 함께 있을때에만 그는 행복을 느낀다.

[사람은 온전히 자기 입장이 될 수는 없다. 이미 자기 입장에 있을 뿐더러, 곧 불안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감이라는 방법을 통해 다른 이의 입장이 될 수는 있다.]  P.98



그러나 자신의 전부인 ˝그로칼랭˝을 동물원에 보내고 난 후 그는 큰 상실감을 느낀다. 결국 ˝그로칼랭˝에 점점 동화되면서 그의 정신분열은 극대화된다. 외로운 대도시 한복판에서 그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이야기는 절대 우울하지 않다. 오히려 기묘하고 유쾌하며, 예측불가능한 ˝쿠쟁˝과 ˝그로칼랭˝의 행동은 책을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이 오히려 ˝쿠쟁˝과 같은 사람이 가지는 외로움의 선명함을 더해준다. 왜 우리는 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고독을 느끼는 걸까?


문장들은 생동감이 넘치고, 내용은 더없이 독창적인 <그로칼랭>, 나는 이 작품을 읽고나서 ˝로맹 가리˝는 문학의 천재라는 생각을 했다.



Ps.  지금까지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의 작품은 총 다섯편을 읽었는데(생각보다 얼마 안읽었다) 다 좋았고 작품마다 색깔이 뚜렷함을 느꼈다.

가장 독창적인 작품 : 그로칼랭
가장 감동적인 작품 : 자기만의 생
가장 좋아하는 작품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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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12-15 11: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말에 인천에 갔다가 로맹 가리
의 <그로 칼랭>을 데리고 왔답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보려구요.
나름 제가 전작하는 작가라 애정 뿜뿜!~

새파랑 2021-12-15 11:53   좋아요 3 | URL
재독이시군요~! 레삭매냐의 전작 작가라니 왠지 제가 뿌듯하네요. <그로칼랭> 왠지 B급 감성도 느껴지면서도 재미있더라구요 ^^

청아 2021-12-15 12:0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벌써 5권이나 읽으셨군요! 그로칼랭이 ‘열렬한 포옹‘의 의미라니 로멘틱했는데 비단뱀!!ㅋㅋㅋ로맹가리의 재치는 정말 놀랍네요. 발췌문도 👍

새파랑 2021-12-15 12:13   좋아요 3 | URL
이 책의 주인공인 ˝쿠쟁˝이 비단뱀을 안고 자요 ^^ 책을 정신없이 읽는다고 밑줄도 별로 못그었어요 ㅋ 갠적으로는 유쾌한 책이었습니다~!

미미님 집에 로맹가리 모든 작품이 있을거 같아요 ㅋ

청아 2021-12-15 12:20   좋아요 3 | URL
거의 다 있어요ㅋㅋㅋ✌

페넬로페 2021-12-15 13:0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첫 구절!
제가 죽어도 생각지도 못한 의미입니다.
전율!
그래서 저는 죽을때까지 책을 읽고 배워야하나봐요~~
독창적이고 유쾌한 이 작품,
꼭 읽어야겠어요^^

새파랑 2021-12-15 14:19   좋아요 4 | URL
리뷰를 잘 써보려고 했는데 점심시간에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어서 좀 짧게 썼어요 ^^ 문장들이 다 감탄이 나오고 정말 독특합니다~!!

프레이야 2021-12-15 14: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 이제 로맹 가리인가요.
완전 응원합니다. 그로칼랭은 읽지 않은 작품인데 가장 독창적이고 유쾌하다고 하시니 어여 영접해야겠어요ㅎㅎ 바로 주문했어요 중고로.

새파랑 2021-12-15 14:20   좋아요 5 | URL
요새 로맹 가리, 필립 로스, 에밀 졸라, 소세키, 사강 책을 한권씩 돌아가면서 읽고 있어요 ^^ 완전 유쾌합니다 ㅋ <자기앞의 생> 유머버젼 이에요~!!

독서괭 2021-12-15 14: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자기앞의 생에도 꽤 유머러스한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훨씬 유쾌하다니 읽어보고 싶네요! 새들은 페루~는 예전에 있었는데 어디갔나..😨

새파랑 2021-12-15 16:28   좋아요 4 | URL
이 책은 읽다가 중간에 이게 뭐야? 이러실수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 웃긴데 좀 엽기적인? ㅎㅎ 약간 안맞는 부분도 있을거에요~!!

coolcat329 2021-12-15 14: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꾸준히 돌아가며 전작읽기 도전하시는 모습 정말 멋집니다. 로맹 가리 페루 하나도 기억안나는데 이것도 다시 읽어야겠어요. ㅠ

새파랑 2021-12-15 16:29   좋아요 2 | URL
차라리 한 작가 책만 몰아서 읽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페루는 그 분위가가 너무 좋았어요~!!

mini74 2021-12-15 15: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외로움의 선명함. 이 문장이 마음에 콕 와닿습니다 ㅎㅎ 가장 독창적이라니 !! 전 자기만의 생과 페루만 읽었어요. 그로칼랭 기억해두지요. 1월에 보자 그로칼랭 ㅎㅎㅎ

새파랑 2021-12-15 16:30   좋아요 4 | URL
외로움의 선명함은 제가 창작(?)한 말입니다 ㅋ 그런데 어딘가에 이런 말을 쓴 책이 있겠죠? 이책 미니님 스타일일듯 ^^

희선 2021-12-16 03: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이야기 본 적 있어요 그로칼랭 뜻은 이번에 알았네요 사람과 사람은 어렵기는 하죠 동물은 사람과 다르기도 하고, 그게 비단뱀이라니... 그렇게라도 덜 쓸쓸했다면 괜찮은 거 아닌가 싶은데 동물원에 보내고 쿠쟁이 이상해지는군요


희선

새파랑 2021-12-16 06:39   좋아요 3 | URL
2미터가 넘는 비단뱀하고 같이 살고, 그걸 가지고 밖에 돌아다니고 하는 설정이 너무 유쾌했어요. 사람보다 더 마음을 주는 비단뱀이라니 ^^

고양이라디오 2021-12-17 10: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기 앞의 생> 정말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로맹 가리씨 작품을 더 만나봐야겠어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12-17 10:55   좋아요 1 | URL
<자기앞의 생>은 정말 명작인거 같아요. 로맹가리는 글 잘쓰시는분~!! 다른 작품도 꼭 읽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