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 펭귄클래식 105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명복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흥미로운 꿈을 꿀 능력이 없으면, 아편이 흥미로운 꿈을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책이 독자에게 주는 가장 큰 이점은 '간접경혐' 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짧고, 선택은 언제나 제한되며, 경험은 한정되기 때문에 우리는 책을 통해 타인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넓은 시야와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다.


특히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우리가 감히 해볼 수 없는 '불법'일 경우 '간접경험'의 이점은 극대화 된다. 혹시 '아편(Opium)' 먹어본 적 있나요? 거의 대부분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경험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은 우리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아편에 대한 '간접경험'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19세기 초에 쓰여진 이 책은 작가인 "토머스 드 퀸시"의 아편 중독에 대한 자전적 작품이다.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더 가까운 작품.


참고로 중독이라고 하면 크게 독으로 지칭되는 유해 물질에 의한 신체 증상인 중독(intoxication)과 알코올, 마약과 같은 약물 남용에 의한 정신적인 중독이 주로 문제되는 중독(addiction)을 동시에 일컫는다고 하는데, 아편은 addiction에 해당한다.(너무 당연한건가...)


이 책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독자들에게>, <고백 이전에 읽어야 할 이야기>라는 소제목들의 글이 쓰여져 있는데, 주로 작가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아픔과 회상을 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아편 중독'의 조합은 쌩뚱맞게 보일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아편에 중독된 작가가 환각상태에서 꾸는 꿈은 어린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아편에 중독된 작가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1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슬프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뒤흔드는가! 잠시라도 이들 기억을 떠올리면,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도, 처음 나를 아편 복용자의 낙원으로 인도했던 그 장소와 그 사람과 그 시간과 관련된 무엇이든, 신비한 중요성을 지닌 채 나타난다.]  P.83



2부는 <아편 복용의 즐거움>, <아편의 고통이 시작되다>, <아편의 고통> 이라는 소제목들의 글이 쓰여져 있다.

<아편 복용의 즐거움>에는 작가가 어떻게 아편을 접하게 되었는지, 아편이 신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떠한 정신적 쾌락을 주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술에 취했거나 취해 가는 사람은 본성 중에 단지 인간적인 부분, 또는 동물적인 속성만을 불러낸다.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아편 복용자는 본성 중 신적인 속성을 최대한 불러내고, 그렇게 느낀다. 도덕적 감정은 구름 한 점 없는 평정한 상태에 놓여 있고, 거대한 지성의 위대한 빛이 사방을 비춘다.]  P.87



<아편의 고통이 시작되다>에서는 초반에 느꼈던 즐거움 대신에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는 작가의 감정변화를 그리고 있다. 아편의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가는 아편 복용량을 줄이게 되고, 이후 우울증이 사라지고 행복이 돌아왔음을 느낀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이미 중독된 그의 몸은 아편을 간절히 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 끝났다. 행복한 시절은 끝났다. 여름도 가고, 겨울도 갔다! 미소도, 웃음도 안녕! 마음의 평화도 안녕! 희망과 편안한 꿈들도 안녕! 위로가 되었던 축복의 꿈도 안녕! 이후 나는 3년 반 이상을 이런 축복에서 떨어져 지냈다. 이제 나는 고통 가득한 '일리아드' 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고통을 기록해야겠다.]  P.113



<아편의 고통>에서는 아편으로 인해 고통받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그 무엇도 즐겁게 읽을 수 없고, 한 순간도 인내를 가질 수 없으며, 지적 마비상태에 빠져버린다. 계속 몽롱한 수면 상태로 살아가던 작가는 1부에서 이야기한 어린시절의 꿈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두운 우울. 아편을 끊지 못하면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 앞에서 작가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전 상태에 대한 여진이 아직도 남아 있다. 꿈들은 아직도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고, 폭풍이 몰아치는 끔찍한 큰 파도와 동요는 여전히 가라앉지 앉았으며, 꿈에 진을 치고 있었던 무리가 퇴각하기는 했지만 모두 떠나지는 않았고, 나의 잠은 아직도 불안하며, 아담과 이브가 멀리서 뒤돌아 바라보는 천국의 문과 같이 꿈은 아직도 끔찍한 얼굴과 불꽃 튀는 무기들로 가득하다.]  P.138




200여년 전 아편 중독의 위험이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에 처음으로 그 폐해를 알린 작가 "퀸시", 그는 이 책을 통해 30여 년간의 아편 복용으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투쟁과, 꿈과 악몽의 경계선 속에서 한 사람의 자아가 무너지는 과정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아편 중독자의 이야기가 아닌 꿈의 해석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뭐든지 지나치면 안하는 것보다 못하다. 중독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빠지게 되면 자신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과거가 아쉽더라도, 꿈에 빠져 사는게 행복하더라도 꿈은 꿈일뿐, 현실이 아니다.



Ps. 마약(?)에 관한 이야기다 보니 리뷰를 쓰는게 정말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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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12-12 21: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에세이에 가깝군요! 읽다보니 기억났는데 중학교때 읽은 소설 주인공이 마약 중독으로 괴로워하는 내용이었어요. 제목이 기억안나요ㅠ 이런 경험은 정말 책으로밖에 할 수 없죠. 소설의 특별함!!😊

반유행열반인 2021-12-12 21:39   좋아요 4 | URL
트레인스포팅! 앨리스의 일기!(이상한 나라에 빠진 앨리스로 재출간) 그거 말고 또 있을까요 ㅋㅋ 저도 이 책 읽을 폼만 잡다 곧 읽어야겠네요...(읽을 게 많네요...)

청아 2021-12-12 21:47   좋아요 4 | URL
헉!!열반인님 댓글보고 찾아보니 앨리스의 일기 맞는것 같아요. 당시 읽고 너무 충격적이었는데...열반인님 리뷰도 읽었는데 역자 때리고싶네요. 트레인스포팅 너무 좋아합니다~♡♡

새파랑 2021-12-12 21:48   좋아요 5 | URL
거의 자서전 입니다 ㅋ 해설하고 부록을 보니 자신의 실제이야기 90퍼센트에요 ㅎㅎ 이렇게 써도 되는거야?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영상보다는 글에 확실히 더 임팩트를 느끼는거 같아요 😅

열반인님이 ‘트레인스포팅‘ 이야기 하니 딱 생각나네요~! 중학교땐가 재미있게 본거 같은데 ^^ 역시 영화도 우울한걸 좋이하시는군요~! 간만에 Underworld 음악을 들어야 겠어요 ^^

scott 2021-12-12 22:28   좋아요 4 | URL
역쉬 ! 열반인님
맞습니다
약물중독 앨리스^^

새파랑 2021-12-12 22:59   좋아요 3 | URL
약물중독 앨리스 읽어봐야 겠군요 ^^

반유행열반인 2021-12-12 23:16   좋아요 3 | URL
두 번역본 다 절판인데 이상한 나라에 빠진 앨리스 가 청소년 문고 시리즈라서 번역이나 표현이 좀 더 낫지 않을까 싶어요. 정작 후진 번역판만 읽었지만 ㅋㅋ중고 알리미 해두시면 어딘가 있을 듯요 ㅋㅋ

페넬로페 2021-12-12 22: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소설로 분류되는데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이루어진 거군요^^
마약 중독은 사실 경험해보지 않아도 그 금단현상이 너무 고통스러워 거기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것 같아요.
어제 겨울호랑이님의 글에서도 이러한 중독도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이 참 마음 아팠어요 ㅠㅠ
근데 일욜은 쉬는 날 아님?
북플 친구들, 다 글 올리는 날? ㅎㅎ

새파랑 2021-12-12 23:00   좋아요 4 | URL
작가가 아편 먹고 경험한 실제 이야기더라구요 ㅋ 일요일은 원래 쉬는 날이지만 밀려서요 😅 아직 읽고 리뷰 못쓴게 두권 더 있습니다 ㅋ

mini74 2021-12-12 23: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예전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는다고 lsd복용이 유행했던 게 기억나네요. 실제로 묘한 그림들이 많았다고. 대지 속에 나오던 아편굴도 생각나네요 ~ 작가가 아편을 하면 작품이 되는군요.

새파랑 2021-12-12 23:26   좋아요 4 | URL
lsd가 있었죠~! 예전에 비틀즈 노래중에 lsd를 약어로 한 노래 제목이 생각나네요~!! 이런 마약류가 예술적 영감을 주기는 한가봐요. 그래도 저는 이런 약류는 절대 반대 합니다~ 건전한 정신 건강한 작품 ^^

희선 2021-12-13 00: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설보다 자기 이야기에 가까운 거군요 서른해나... 그 뒤 작가는 어떻게 됐을지... 사람은 맞서기보다 피할 때가 더 많아서 약물에 빠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은 현실이 아닌데...


희선

새파랑 2021-12-13 08:47   좋아요 1 | URL
글을 보면 아편을 끊었다고 쓰고 있더라구요 ㅋ 그 과정이 참 힘들었을거 같아요~! 어차피 약이 주는 행복은 짧은 순간일 뿐인데 ㅋ 현실에서 답을 찾는게 더 현명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손을 댔을까란 생각도 들고 😅
 

아 이 책 뭐지 ㅋ










전에 복용하지 않던 사람들이 이제 먹고,
늘 먹던 사람들은 이제 더 많이 먹는다. - P37

존슨 박사는 (우리가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하던 일들 가운데) 무엇이든 마지막으로 하려고 하면 슬플 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 (자주 하지는 않지만 이 말은 매우 감동적이다.) - P43

내가 옳았다. 나는 그를 다시는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보지 못할것이다. - P43

슬프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뒤흔드는가! 잠시라도 이들 기억을 떠올리면,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도, 처음 나를 아편 복용자의 낙원으로 인도했던 그 장소와 그 사람과 그 시간과 관련된 무엇이든, 신비한 중요성을 지닌 채 나타난다 - P83

아편은 모든 고통을 사라지게 만드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철학자들이 수 세기 동안 토론을 벌여왔던 행복의 비밀이 아편에 있었다. 이제 그 행복을 1페니로 사 호주머니에 넣어 다닐수 있게 되었다. 휴대용 환희가 작은 약병 속에 들어 있었다. - P84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제정신이 아니다." 라고 한다. 반대로, 대다수 사람들은 술에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다." (그리스의 어느 현인이 말했듯이)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 술을 마셨을 때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술은 인간을 어리석음과 과도함의 경계까지 몰고 간다. 어느 지점 이상으로 나갈 경우, 지적인 능력이 흩어져 없어진다. - P87

술에 취했거나 취해 가는 사람은 본성 중에 단지 인간적인 부분, 또는 동물적인 속성만을 불러낸다.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아편 복용자(질병이나 아편의 부차적인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지 않는 사람)는 본성 중 신적인 속성을 최대한 불러내고, 그렇게 느낀다. 도덕적 감정은 구름 한 점 없는 평정한 상태에 놓여 있고, 거대한 지성의 위대한 빛이 사방을 비춘다. - P87

아편은 이러한 선물을 인간에게 준다. 아편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오, 합당하고, 오묘하며, 강력한 아편이여! - P97

마음에서 ‘잊힐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현재 의식과 마음에 비밀스럽게 기록된 것들 사이의 장막으로 수천의 사건이 끼어 있거나 끼일 것이다. 같은 종류의 사건이 이 장막을 찢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장막이 있든지 없든지 쓰인 기록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별들이 대낮의 밝은 빛 앞에서 빛을 내지 못하듯이, 기록들 위에 장막을 드리운 것은 빛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 기록은 드러나기 위해 석양이 물러날 때를 기다리고 있다. - P124

이전 상태에 대한 여진이 아직도 남아 있다. 꿈들은 아직도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고, 폭풍이 몰아치는 끔찍한 큰 파도와 동요는 여전히 가라앉지 앉았으며, 꿈에 진을 치고 있었던 무리가 퇴각하기는 했지만 모두 떠나지는 않았고, 나의 잠은 아직도 불안하며, 아담과 이브가 멀리서 뒤돌아 바라보는 천국의 문과 같이 꿈은 아직도 끔찍한 얼굴과 불꽃 튀는 무기들로 가득하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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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12-11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약수사기관에서 좋아하지 않을듯한 소설이군요ㅎㅎ
87페이지 끄덕여집니다.🤔

새파랑 2021-12-11 23:03   좋아요 1 | URL
19세기 영국에서는 아편이 불법이 아니고 진통제로 처방받아 사용했다고 하더라구요. 이 책은 그런 아편의 폐해에 대한 투쟁의 기록이라고 하네요^^

청아 2021-12-11 23:21   좋아요 1 | URL
문장이 아름답다는 평도 있네요! 이 책이랑 같은작가의 <예술분과로서의 살인>(제목이 독특해서)도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2021-12-11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11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11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리뷰는 내일 좀 고민해서 써야 겠다. 완전 대만족 ^^

"이 모든 게 오류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게 이거 아닌가요? 삶자체가 오류다. 여기에 세계의 본질이 있다. 아무도 자신의 인생을 찾지 못한다. 그게 인생이다." 내가 말했다. - P533

머리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그날 밤처럼 눈부시게 맑은 날 밤, 나의 산 위에 마련된 이 조용한 연단 위로 실수라는 것이 주제넘게 끼어들 수 없는 저 우주가 펼쳐져 있다. 거기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본다. 반목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장관, 광대한 시간의 뇌,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고 피어오른 무수한 불덩이를 두 눈으로 직접 본다. 별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 P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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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미국 삼부작 중 중간에 위치한 작품.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만족스럽다. 페이지도 많고, 바빠서 읽는데 오래 걸리긴 했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한 것 가운데 복수의 칼날처럼 큰 것도, 작은 것도 없다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그들이 품는 복수의 칼날만큼 대담하고 창조적인 건 없어. 또한 아무리 세련된 사람일지라도 그들이 품는 배신의 칼날만큼 무자비하고 창조적인 건 없다네. - P311

배신을 당하면 그 습관이 생기는 거야. 정답은 배신이었어. 비극 작품을 생각해보게나. 우울, 광기, 유혈을 불러오는 게 무엇인가? 오셀로, 배신당했지. 햄릿, 배신당했어. 리어왕, 배신당했다네. 맥베스도 배신당했다고 볼 수 있지, 다르긴 하지만, 그 자신에게 배신당했잖나. 온 힘을 다해 걸작을 가르치는 전문가들. 인간사를 면밀히 들여다보는 문학에 여전히 빠져 있는 우리 같은 소수의 사람들이 역사의 핵심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배신을 찾는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을 테지. - P312

그는 삶이 똑같이 반복되길 원했고, 나는 그 사슬을 깨뜨리고 싶었다. 나는 내가 브라우니와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변종처럼 느껴졌다. 그런 느낌은 생전 처음이었지만, 마지막은 아니었다. 탈출하고 싶은 열망이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면 어떤 느낌일까? 브라우니처럼 산다는 건 어떤 걸까? 혹시 그런 삶이 ‘민중‘의 매력을 만들어내는 원천은 아닐까? 그들처럼 산다는 건 어떤 걸까? - P348

그는 어떤 것도 선택할 여지가 없다. 자신이 믿는 이념을 위해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차단하는 것,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입김에 흔들리지 않는다. 부러울 정도로 좁다란 강철 필라멘트 같은것은 체격만이 아니었다. 그 이데올로기 또한 그런 삶의 날카로운 연장 같았고, 왜가리의 몸통 실루엣처럼 윤곽이 날렵했다. - P382

이 사건에서는 한 여자가 자신의 남편과 결혼생활의 문제들을 열광적인 반공 이데올로기에 갖다 바친 거지. 본질적으로 이브가 헌납한 건, 실피드와 아이라가 만난 첫날부터 그녀 자신이 해결할 수 없었던 반목과 불화였어. 비록 이브 프레임의 집에선 다소 강렬하게 나타나긴 했지만, 그건 의붓자식과 계부 간의 흔한 문제였네. 그 밖에 아이라가 이브에게 보여준 모습, 그러니까 착한 남편, 나쁜 남편, 친절한 남자, 거친 남자, 이해심 있는 남자, 멍청한 남자, 성실한 남자, 불성실한 남자, 그리고 부부간의 모든 노력과 실수, 단 하나의 꿈도 공유하지 못한 결혼생활의 모든 결과, 이런 것은 죄다 빠져나가고 이데올로기가 이용할 수 있는 것만 남았던 거야. - P435

하지만 아이라는 그 어느 때보다 유명해졌어. 단 한 방에 이브는 자신의 삶을 몰개성적 삶으로 만든 동시에 공산주의라는 유령에게 인간의 얼굴을, 그것도 자기 남편의 얼굴을 씌워준 거야. 난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공산주의자와 잠을 잤다, 공산주의자가 내 아이를 괴롭혔다. - P456

자신을 아이언 린이란 거창한 인물로 부풀리지 말아야 했다고, 아이라는 지난 일들을 곱씹으면서 자신이 중서부를 떠난 이후 했던 그 어떤 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어. 인간으로서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 앞날을 읽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 실수 쪽으로 이끌리는 인간의 성향에 걸려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남자답고 야심만만한 사내가 갖는 세속의 목표를 단 하나라도 좋지 말아야 했다고, 공산주의 노동자로서 이스트시카고 단칸방의 60와트 전구 아래서 혼자 살아야 했다고, 그것이 지금 지옥에 떨어진 그가 도달했어야 한 금욕의 높이라고. - P469

살인은 한 사람의 목숨으로 끝나지 않아. 반드시 두 사람의 목숨으로 끝나, 살인은 살인자의 삶까지도 끝장내버린다고! 넌 절대 이 비밀에서 자유롭지 못할 거다.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 갈 거야. 그걸 영원히 안고 갈 거라고. - P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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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12-11 03: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오늘 다 보시겠네요 새파랑 님 주말 책과 즐겁게 보내세요 걷기도 하시겠군요


희선

새파랑 2021-12-11 09:31   좋아요 2 | URL
어제 눈에 불을 켜고 다 읽었어요 ^^ 리뷰를 써야 하는데 오늘도 일이 있어서 과연 언제 쓸지 모르겠어요 😅

페크pek0501 2021-12-11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을 축하드려요. 리뷰를 구상 중이실 것 같네요.

우리 삶엔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리뷰를 빨리 쓸 수 없음을 이해합니다.^^

새파랑 2021-12-11 19:2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책을 다읽고 집밖으로 나와서 아직 못썼어요 😅 주말에는 해야할 일이 더 많은거 같아요 ㅎㅎ
 

미국에 대한 필립 로스의 분노가 느껴진다.


물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에 본인이 전혀 모르던 중요한 사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뒤늦게 아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이 정작 본인은 거의 알지 못하는 이야기니까. - P32

내가 말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영혼을 매춘부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내 영혼의 매춘부‘는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걸 판다는 거예요. 자신의 영혼을 판다는 거요." 내가 대답했다.
"맞다. 내 영혼을 판다면 보다 ‘내 영혼의 매춘부가 된다면, 난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게 훨씬 더 강렬하다는 걸 알겠니?"

(필립 로스식 글쓰기) - P53

사랑에 눈멀고, 스타에게 반했던 거지. 아이라는 매료됐어. 이브는 매혹적이었고, 원래 매혹이란 건 자기만의 논리로 움직이니까 - P98

이 거한이 어떻게 그녀에게 그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 되었을까? 아이라가 살아온 혹독한 삶이 그녀에겐 색다르게 다가왔어. 이브는 아이라의 삶이 진짜 삶이라 느꼈고, 이브의 이야기를 들은 아이라는 그녀의 삶이 진짜 삶이라고 느꼈네. - P99

아이라는 그녀가 겪은 위험들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던 거야. 아이라는 매료당하고 마법에 걸렸고, 필요한 존재가 됐지. 덩치가 크고 강인했던 아이라는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었어. 연민을 자아내는 여자, 연민을 자아내고 사연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 목과 어깨를 드러낸 영혼이 숭고한 여자. 어느 누가 아이라의 보호본능을 그보다 잘 일깨우겠는가? - P100

중요한 건 분노 자체가 아니라 옳은 것을 위한 분노라고. 난 딸애한테 말했지.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거라, 분노는 널 유리하게 해주는 거란다, 그게 분노의 생존 기능이다, 그 때문에 너에게도 분노가 주어진 거란다, 그런데 분노가 널 불리하게 만든다면, 그 분노는 헌신짝처럼 버려야 한다.

(분노의 정의) - P136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자기 삶과의 고리를 자르고 떠나는 거예요. 사람들은 오만 가지것을, 심지어 아주 병적인 행동까지도 서로 맞춰가면서 살아요. 왜 아이라 같은 남자와 이브 같은 여자가 감정적으로 서로 연결이 될까요? 모두 똑같은 이유예요. 서로의 결점이 들어맞기 때문이라고요. 아이라가 그 결혼을 깨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공산당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와 같아요. - P154

공산주의자가 자본주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도 다 옳은 얘기고, 자본가가 공산주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도 다 옳은 얘기야, 하지만 이런 차이가 있어, 우리 체제는 인간은 다 이기적이라는 진실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잘 돌아가고, 저쪽 체제는 인간은 다 형제라는 동화 같은 믿음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저렇게 개판인 거야. 그 미친 동화를 믿게 만들려고 사람들을 잡아다 시베리아로 보내고, 그 형제애란 걸 믿게 만들려고 국민의 생각을 통제하거나 총으로 쏴죽여.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미국과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은 이 동화를 계속 믿어. - P166

그래, 하프 연주와는 거리가 먼 짐승 같은 말들이 실피드의 입에서 쏟아져나왔지. 실피드는 소리질렀어. 또다시 애를 낳기만해봐. 그 멍청한 애새끼가 잠자고 있을 때 목 졸라 죽여버릴 테니까. - P203

트루먼 씨가 국민에게 이 나라는 공산주의가 큰 문제라고 말하면, 국민들은 그 말을 믿는 이 잘나빠진 나라 때문에 정말 화가 나. 인종차별도 불평등도 문제가 안 돼. 공산주의가 문제라고, 사만 명, 육만 명, 십만 명밖에 안 되는 공산주의자가 문제라고, 그들이 인구가 일억 오천만인 이 나라를 전복시킬 거라고. 내가 바본 줄 아오? 이 빌어먹을 나라가 무엇 때문에 망해가고 있는지 얘기해볼까?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노동자에 대한 차별 때문이오. 우리나라를 망치는 건 공산주의자가 아니오. 우리나라는 인간을 짐승처럼 취급하는 차별 때문에 저절로 망해가는 거야!

(아이라의 미국에 대한 분노)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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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8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09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10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10 0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remy 2021-12-10 0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50 년대 관련된 책과 역사에 대해 읽을 때마다
미국에서도 이런 일이,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던 McCarthy witch hunt 에 분노하고
거기에서 바로 Dystopia 적인 미래를 그린 작가들의 소설과
작품들만 모아서 정리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 대한 필립 로스의 분노가 느껴진다.˝
한 문장 표현, 아주 적절합니다.




새파랑 2021-12-10 07:51   좋아요 1 | URL
미국 역사에 대해 깊게 알지는 못해서 완벽히 이해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책 읽으면서 조금의 공감과 분노를 공유하고 있어요 ^^
어제는 책 읽을 시간이 없어서 못읽었는데 오늘은 좀 더 읽어야 겠어요~!!

페크pek0501 2021-12-10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익한 분노도 있긴 하죠.
이 책은 품절이라고 나오네요.

새파랑 2021-12-10 14:13   좋아요 1 | URL
필립 로스는 언제나 화가 나있는거 같아요 ㅎㅎ 제가 품절되기 전에 이 책을 잘샀군요 ^^

서니데이 2021-12-10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작가도 유명하지만, 지금 생각하니까 제목도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새파랑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새파랑 2021-12-10 22:37   좋아요 1 | URL
목요일 부터 너무 정신이 없네요 ㅜㅜ 서니데이님은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