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페이스가 떨어진 것 같다. 연초에 비해서 책을 읽는 시간이 줄었다. 일이 좀 많고, 술자리(?)도 많아서 그런면이 없진 않지만, 예전에는 어떻게든 하루에 1~2시간은 읽었는데, 요새는 안읽는 날도 많이 있었다. 나의 나약한 의지란...



책도 즐겁게 읽고, 리뷰도 잘써보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되서 좀 아쉽긴 하지만, 뭐 인간은 반성하는 동물이니, 또 반성하고 12월을 새롭게 기약해 본다.





11월에는 11권을 읽었다. 쓰고 보니 뭐 그렇게 적게 읽은건 아니지만... 이중 재독한 작품이 <해변의 카프카>, <그 후>이다. 아 쓰고 보니 재독한 작품들이 다 너무너무 좋았다. <해변의 카프카>랑 <그 후> 안읽어보신분들은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그냥 인생책이다.


<읽시찾> 완편 기념으로 10권을 읽었고, 이제 11~13권을 읽어야 하는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것 같다. 12월에는 <잃시찾> 11권으라도 읽어볼까?  사은품 책갈피를 2개 받겠다는 일념으로 12권 따로, 13권 따로 주문해서 책갈피 2개를 받았다. 





11월에 가장 좋았던 책을 꼽자면 하루키옹의 <해변의 카프카>다.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 작품을 네번정도 읽었던거 같은데, 처음 발매되고 나서 읽었을때도 재미있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반복해서 재독할수록 더 좋았다. 왜 좋냐고 물어본다면, 일단 재미있고, 환상적이며, 상실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이를 치유하기 위한 여정이 너무 인상깊었기 때문이다. <해변의 카프카>는 하루키식 유머와 세계관과 여운이 가장 극대화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기억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하고 나는 다른 질문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눈을 살짝 감는다. ˝기억이란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될 수 도 있지.]

<해변의 카프카 하권, 372p>





11월의 추천하고 싶은 책을 꼽자면 이석원 작가의 에서이 <나를 위한 노래>다. 2009년 그의 작가 데뷔작인 <보통의 존재> 처럼 서늘한 감성은 이제 찾아보긴 힘들다. 약간 착한(?) 감성의 작품이어서 예전의 그 감성이 그립기는 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시절로 살수도 없고 그렇게만 힘들게 살 필요는 없으니까.

팬심을 담아 이석원 작가님의 작품이 잘되었으면, 그리고 계속 글을 쓰기를 바랄 뿐이다. 음반도 내주면 좋긴 하겠지만 그건 좀 힘들거 같고...한번 좋아하기 시작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진다면 진정으로 좋아한게 아니었던 걸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의심하고 외면하고 불러주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럴 때 어느 한 명, 나보다 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그 감동은 평생을 갑니다. 그때 그분이 저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 저에게 필요한 온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로 너무 춥게 살아왔을지도 모릅니다.]

<나를 위한 노래, 112p>





ps. 개인적으로 ˝키˝로 끝나는 이름의 작가를 좋아한다. 나스메 소세˝키˝, 무라카미 하루˝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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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2-03 11: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독보적 결과 기다리고 있었어요^^ 재독하는 마음이 드는 작품이 있다는게 참 좋네요.
잃시찾 3권만 읽으시면 완독하신다는 게 부럽습니다. 저는 다음달부터 읽어요!ㅎㅎ 이번달 연말이라 약속이 더 많지 않을까 싶은데 연말이 그런거죠^^ 이번달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아지시길 응원합니다!

새파랑 2022-12-03 14:30   좋아요 2 | URL
책탑사진도 올려야 하는데 이거 사진 찍을 시간이 없네요 ㅡㅡ 이번달도 좀 힘들지만 그래도 노력해보겠습니다~!!

scott 2022-12-03 11: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은 진정한 북플계 모범 열독인!
~키 완독 매니아~👍👍👍

새파랑 2022-12-03 14:32   좋아요 2 | URL
진정한 모범은 scott님이시죠. 전 무늬만 모범, 실제는 허접 ㅋ

모나리자 2022-12-03 11: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한결같이 으뜸이세요!! 12월도 멋진 시간 보내세요. 새파랑님. ^^

새파랑 2022-12-03 14:32   좋아요 2 | URL
12월에는 좀 잘해보고 싶습니다 ㅋ 월드컵 안보고 책봐야되는데 ㅡㅡ

페넬로페 2022-12-03 12: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1월이라 11권!
라임까지 맞아떨어져 더 멋져요.
새파랑님께서 반성하시면 저는 석고대죄를 해야할듯요. 가을에 놀러 다니고 일이 바빠 거의 못 읽었어요.
ㅋ으로 끝나는 작가를 좋아하시는 새파랑님께 12월에도 좋은 독서시간 있기를 기원합니다^^

새파랑 2022-12-03 14:33   좋아요 2 | URL
저도 페넬로페님의 12월 독서를 응원합니다~!! 마무리를 잘 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햇살과함께 2022-12-03 15: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많이 못읽어도 11권은 놀랍지 않은데 저기 32000보 넘은 날은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요??!!
해변의 카프카 20대에 읽었는데 저도 재독해봐야겠어요~!

새파랑 2022-12-03 15:48   좋아요 4 | URL
저날은 등산을 해가지고 ㅎㅎ 힘들어서 죽을뻔했습니다 ㅋ

햇살과함께 2022-12-03 23:52   좋아요 2 | URL
평지도 아닌 등산에 32000보!!!
정말 힘드셨을듯요~~

독서괭 2022-12-03 19: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인생책!! 둘다 못 읽어봤는데 읽어봐야겠어요.
재독 이상 하시는 분들 놀라워요. 새롭게 보이는 점들이 많을 것 같아요.
키키키 ㅋㅋㅋㅋ 키 좋아하시네요 정말 ㅋㅋ

새파랑 2022-12-03 21:39   좋아요 2 | URL
아직 저 재미있는 작품을 안읽어보셨군요. 전 강추합니다 ㅋ 해변의 카프카는 좀 호불호가 갈릴수도 있습니다 ^^

제가 키 좀 많이 좋아합니다~!!

청아 2022-12-03 19: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어쩌면 음악가인 스트라빈스키도 잘 맞으실듯 합니다ㅎㅎ며칠전 제가 땡투 보냈고요 12월은 함께 파이팅해요(>.<)

새파랑 2022-12-03 21:40   좋아요 2 | URL
아 스트라빈스키라는 음악가가 있군요~!! 전 차이코프스키밖에 모릅니다만 찾아보겠습니다~!

반가운 땡투가 미미님이셨군요. 베리베리 감사합니다~! 12월 미미님도 화이팅입니다 ^^

북프리쿠키 2022-12-04 16: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해변의카프카, 그후
둘다 넘 좋았습니다.
특히 <그후>는 제도와 사랑,
본능과 도덕, 같은
인간이 원래 가진 본능과 감정이 도덕과 제도에 위배되면 어떤 고통을 받는지에 대해, 왜 그래야만 옳.은. 삶인지에 대해 원점부터 다시 생각해본 계기가 되었네요.^^ 나를 흔드는 책은 언제나 좋습니다!
최근에 읽은 <그후>의 그후,
<문>도 좋았습니다^^

새파랑 2022-12-04 21:59   좋아요 2 | URL
<그 후> 정말 좋습니다. 저 당시에 저런 배경의 이야기를 쓴다는것도 놀라웠어요. 본능과 규범, 사랑과 우정사이의 갈등을 이렇게 멋지게 그리디리 ㅋ

저도 <문> 좋았습니다~!!

그레이스 2022-12-04 17: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도 책이지만 다 모으면 국토대장정이시네요^^

새파랑 2022-12-04 22:00   좋아요 2 | URL
국토대장정 ㅋ 아직 읽어야 할 책들이 쌓여있어서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

바람돌이 2022-12-04 2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기 32,000보 걸으신 날은 뭘 하신거예요? ㅎㅎ
하루키옹 딱히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작가인데 해변의 카프카는 좋다고요? 왜냐하면 제가 이 책이 집에 있어요. 그런데 안 읽었다는.... 이참에 읽어볼까 싶어지기도 하네요. ^^

새파랑 2022-12-04 22:01   좋아요 2 | URL
저날 등산을 했는데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ㅜㅜ 엄청 높더라구요 ㅋ 전 하루키 책중 하나만 고르라면 <해변의 카프카>를 고르겠습니다 ㅋ 어느 페이지를 펼쳐서 봐도 좋더라구요 ~! 근데 호불호 갈릴수 있으니 잘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꼬마요정 2022-12-05 0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멋지십니다!!! 이제 잃시찾 완독까지 얼마 안 남으셨네요. 대단하세요^^

새파랑 2022-12-05 11:25   좋아요 2 | URL
저보다 대단한 분이 많아서 전 아직 초보 입니다 ㅋ

빨리 완독자의 대열에 들고 싶네요~!!

스파피필름 2022-12-05 15: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석원 작가의 책들 처음에는 나올 때마다 다 읽었는데 <2인조> 읽고는 필력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작가로서의 고뇌가 큰 것 같더라구요... 어쨌든 글쓰기를 계속 해나가시길 응원합니다. <나를 위한 노래> 읽어봐야겠어요!

새파랑 2022-12-05 18:39   좋아요 2 | URL
저도 2인조 가 약간 날카로움이 덜해서 좀 아쉬웠습니다 ㅜㅜ
그래도 이석원은 이석원이라 생각합니다. 이석원은 무한 애정입니다 ^^

요 책 괘안아요~!!

yamoo 2022-12-05 20: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1권이면 많이 읽으셨네요!!
이석원 작가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던데, 저는 좀 읽다가 던졌습니다. 저와는 맞지 않더군요.
목화밭의 고독속에서...이 책은 제가 정말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뉴코아 백화점 벤치에서 40여쪽을 내리 읽는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새파랑 2022-12-05 23:48   좋아요 2 | URL
이번달은 아직 1권도 못읽었습니다 ㅜㅜ 이놈의 야근... ㅋ 이석원 작가님이 안맞으셨다니 좀 안타깝습니다 ㅜㅜ
<목회밭의 고독 속에서> 완전 좋더라구요. 이게 문학이구나라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mini74 2022-12-08 14: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키 로 끝나는 에서 빵 터졌어요 ㅎㅎ 새파랑님의 최애 키는 하루키 ㅎㅎ 등산 가방에도 책 넣어 가실 거 같아요 맞나요 ㅎㅎ

새파랑 2022-12-08 16:44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책도 당근 넣어가지고 갔죠. 혹시 조난당하면 기다리는동안 보고 있어야 하니깐요 ㅋ

막심 고리키도 읽어봐야 할거 같아요 ㅋ
 

아 이책 정말 좋네 ㅋ 요건 명작이다.
















나르치스 군, 고백하건대 나는 자네를 두고 한 가지 가혹한 판단을 해왔다네. 나는 곧잘 자네가 오만하다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어쩌면 자네한테 잘못한 게 있을지도 몰라. 여보게, 자네는 너무나 고립되어 있고 외로운 존재야. 자네한테는 숭배자는 있을지언정 친구는 없거든. 제발이지 자네를 꾸짖을 기회라도 왔으면 하고 바랐다네. 하지만 그럴 계기가 있어야 말이지. 자네 또래의 젊은이들이 곧잘 그러듯이 때로는 자네도 철없이 굴기라도 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자네는 절대로 그러지 않거든. 그래서 이따금 자네 때문에 마음을 졸이곤 한다네, 나르치스. - P15

우리 수도원에서 질서와 순종의 미덕이 흐트러진다면 아무리 교육 제도를 개선해도 소용이 없단 말일세. 자기 뜻을 굽힐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나르치스의 잘못이야. 그리고 자네들 젊은 학자들한테 바라고 싶은게 있다면 자네들보다 우둔한 상급자들이 앞으로도 결코 없어지지 말았으면 하는 것일세. 오만함을 다스리려면 그보다 좋은 약은 없는 법이지. - P21

아름답게 빛나는 이 소년이‘그런 각오를 다지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에겐 이미 태어날 적부터 그 어떤 운명의 짐이 지워져 있었다. 그는 속죄와 희생의 길을 가야만 하는 남모를 운명을 타고났던 것이다. - P30

군계일학처럼 외로운 존재였던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모든 면에서 자기와 상반된 존재인 듯하면서도 닮은 데가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나르치스가 어두운 성격에 깡마른 체격이었다면 골드문트는 눈부시게 화사한 존재였다. 또 나르치스가 사변가요 분석가였다면 골드문트는 몽상가로서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영혼의 소유자로 보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의 그러한 대립적 측면보다는 공통점이 더 컸다. 둘은 훌륭한 인격자였고 두 사람이 보여주는 재능과 개성은 다른 생도들에 비해 두드러졌으며, 또 둘은 숙명적으로 그 어떤 특별한 경고를 받으며 태어난 존재였던 것이다. - P31

골드문트는 작은 정원을 가로질러 재빨리 친구들을 뒤따라갔다. 비틀거리며 화단에 넘어진 골드문트는 촉촉한 내음과 두엄 냄새를 맡았으며, 또 장미 덩굴에 찔려 손에 생채기가 나기도 했다. 그는 울타리를 타고 넘어 잰걸음으로 다른 친구들을 뒤쫓아 마을을 벗어나서 숲을 향해 걸어갔다.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하고 그는 의지를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탄식하며 「내일다시올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P42

「그래, 사랑하는 친구, 마음껏 울면 금방 나아질 거야. 자, 자리에 앉아. 얘기하지 않아도 좋아. 내가 보기엔 그만하면 충분해. 너는 오전 내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것 같아. 매우 씩씩하게 해냈어. 지금은 우는 것만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아니라구? 벌써 다 울었어? 그새 괜찮아졌단 말이지? 자 그럼 이제 양호실로 가자꾸나. 거기서 좀 누워 있어, 저녁때쯤이면 훨씬 나아질 거야. 가자구 !」 - P43

그는 이제 서로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졌으며 둘이 서로 친구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골드문트가 자기를 필요로 했고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언젠가는 그 자신이 나약해져서 골드문트의 도움과 사랑이 필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자신도 이 소년의 도움과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 P46

그는 골드문트의 본성을 환히 꿰뚫고 있었으며, 서로 대립되는 기질에도 불구하고 그 본성을 아주 내밀하게 이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골드문트의 본성은 바로 그 자신이 잃어버린 또 다른 반쪽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골드문트의 본성이 온갖 공상이나 잘못된 교육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과 같이 철판처럼 단단한 껍질에 에워싸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이 어린 생명의 비밀을 모두 예감하고 있었다. 그 비밀은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나르치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 비밀을 짊어지고 있는 당사자에게서 비밀의 베일을 벗겨내고 껍질을 벗게 해주는 것, 친구에게 본연의 천성을 되돌려주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그것은 물론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어쩌면 이 일로 인해 친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 P51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둘 사이는 그렇게 멀기만 했고, 둘을 이어주는 마음의 끈은 너무나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마치 눈먼 사람과 멀쩡한 사람이 함께 걸어가듯 둘의 우정은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눈먼쪽이 자기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수록 멀쩡한 쪽은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식이었다. - P51

그래,골드문트. 난 너와 같은 부류가 아냐. 네가 생각하는 그런 부류가 아냐. 물론 나도 말로는 하지 않은 서약을 간직하고 있지. 그건 맞아. 그렇지만 단연코 너와 같은 부류는 아냐. 오늘 너한테 해줄 말이 있는데, 언젠가는 이 말이 생각날 거야. 모름지기 우리의 우정에는 네가 얼마나 완벽하게 나와는 다른 존재인가를 너한테 보여주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목표도 의미도 없어.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이거야. - P56

그는 사랑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이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을 타고난 그는 꽃 향기라든가 떠오르는 태양, 말이나 새의 비상, 음악 같은 것을 너무나 깊이 체험하고 사랑할 줄 알았다. 그런 존재인 골드문트가 어째서 정신의 세계를 추구하고 금욕의 길을 가야 하는 수도사가 되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 P61

나르치스가 말했다. 「바로 그거야. 핵심을 찌르는 말이야. 사실 너한테는 차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나에게는 오직 차이만이 중요한 것 같아. 나는 본성상 학자이고 내 소명은 학문이야. 그런데 학문이라는 것은 네 말을 빌리자면 <차이를 찾아내겠다는 집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지. 학문의 본질을 이보다 더 훌륭하게 정의하기도 힘들 거야. 나처럼 학문을 하는 사람한테는 다양성을 확인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어. 학문이란 분류술이라고도할 수 있지.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여타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면 곧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하거든. - P68

나르치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우리는 가까워질 수 없어. 마치 해와 달, 바다와 육지가 가까워질 수 없듯이 말이야. 이봐, 우리 두 사람은 해와 달, 바다와 육지처럼 떨어져 있는 거야. 우리의 목표는 상대방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는 거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존중해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해서 서로가 대립하면서도 보완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지」 - P70

「물론이지」나르치스가 말을 이었다. 「너 같은 기질의 사람들, 그러니까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성을 지녀서 영혼으로 느낄 줄 아는 몽상가나 시인들,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보다는 거의 예외없이 더 우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사람들은 말하자면 모성(母性)의 풍요로움을 타고난 존재들이야. 그들의 삶은 충만해 있고, 사랑의 힘과 체의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지. 그 반면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들은 너 같은 사람들을 곧잘 이끌어가고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충만된삶을 전혀 모르고 메마른 삶을 살게 마련이야. 과일의 단물처럼 넘쳐흐르는 삶의 풍요로움, 사랑의 정원과 예술의 땅은 바로 너희들의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이 대지라면 우리네의 고향은 이념이야. 너희들이 감각의 세계에 익사할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진공 상태의 대기에서 질식할 위험에 처해 있지. 너는 예술가고 나는 사상가야. 네가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는 셈이지. 나에겐 태양이 비치지만 너에겐 달과 별이 비치고, 네가 소녀를 그리워한다면 나는 소년을 그리워해. - P74

이제 생각이 났다. 또렷이 알 수 있었다. 아, 어머니, 어머니였다! 산더미처럼 쌓였던 망각의 더께가 걷혔다. 망망대해 같은 망각의 바다가 갈라졌다. 잃어버렸던 어머니가 파랗게 빛나는 위엄어린 시선으로 다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이 사랑했던 그 어머니가. - P87

나르치스는 얼마 전에 수련 과정을 마치고 정식으로 사제복을 입게 되었다. 그러면서 골드문트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나르치스의 신호나 경고를 시건방지게 잘난 척하는 성가신 행동이라고 곧잘 거부감을 느껴오던 골드문트도 지난번의 커다란 체험 이후로는 이 친구의 지혜로움에 경탄해 마지않는 존경의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친구의 말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마치 예언처럼 들어맞았던가! 또 자기 인생의 비밀을, 숨겨져 있던 상처를 얼마나 정확하게 알아맞혔던가! 그리고 얼마나 지혜롭게 자신의 마음을 치유해 주었던가! - P93

네 마음을 잘 알겠어, 이젠 더 이상 언쟁을 벌일 필요는 없어. 말하자면 너는 이제 깨어난 거야. 이제는 너와 나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 것이지. 모성의 피를 타고난 사람과 부성의 피를 타고난 사람의 차이, 영혼과 정신의 차이말이야. 넌 아마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수도사의 일생을 추구하려는 네 노력이 잘못이었다는 것도 곧 깨닫게 될 거야. 그건 네 아버지가 꾸며낸 믿음일 뿐이야. 그런 믿음을 불어넣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속죄하듯이 씻어내려고 하셨던 거야. - P103

그리고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너나 내가 어떤 직책을 맡게 되든 간에, 또 우리의 형편이 어떻게 되든 간에, 네가 나를 진지하게 불러주고 필요로 하는 그런 순간에 내가 너에게 침묵하지는 않을 거야. 결단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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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1-29 22: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북플에도 골드문트님 계시지요 ~

새파랑 2022-11-29 23:14   좋아요 1 | URL
골드문트님이 괜히 골드문트 하신게 아니더라구요. 책 읽으면서 페이지 줄어드는게 아까운 중입니다 ㅋ

scott 2022-12-02 00:22   좋아요 1 | URL
만화에서도 (일본)
골드문트가 쫌 멋진 외모 였습니다 ㅎㅎㅎ

새파랑 2022-12-03 14:35   좋아요 0 | URL
전 마음은 골드문트지만 외모는...
😅 중요한건 마음 아니겠습니까 ㅋ

꼬마요정 2022-11-30 0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 이 책 고등학생 때 읽고 인생책이었어요. 지금 다시 읽고 싶은데 그 느낌이 안 날까봐 못 읽고 있어요ㅜㅜ

새파랑 2022-11-30 08:08   좋아요 2 | URL
아 제가 고등학생때 이 책 읽었으면 인생이 바꼈을까요? ㅋ

물감 2022-11-30 1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안그래도 이책 눈독들이고 있었는데 새파랑님 글보니 이거 읽어야 겠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과연 언제............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2-11-30 12:41   좋아요 2 | URL
아직 3분의 1밖에 못읽긴 했는데 초반은 완전 좋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있는게 좋더라구요 ^^

레삭매냐 2022-11-30 13: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읽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헷갈리네요.

약간 신화적 느낌이
랄까요.

새파랑 2022-11-30 17:40   좋아요 1 | URL
아마 레삭매냐님은 오래전에 읽으셨을겁니다 ㅋ 어제 이후로 아직 진도를 못빼서 잘 모르겠네요 ㅋ

프레이야 2022-11-30 13: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골드문트 님 소환 ㅎㅎ
중2때 읽고 뭘 제대로 알았을까요. 다시 읽어야… 고전은 생에 주기적으로 읽어야할 것 같아요.

새파랑 2022-11-30 19:56   좋아요 2 | URL
전 중2때 뭘하고 있었던걸까요 😅 그래서 고전은 고전인가 봅니다 ㅋ

서니데이 2022-11-30 1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이 제목을 많이 들어서 익숙하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아마 ˝지와 사랑˝이라고 들어서, 가끔 생각나는 것 같아요. 책의 내용보다도요.
새파랑님, 오늘 날씨가 많이 춥네요.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새파랑 2022-11-30 20:52   좋아요 2 | URL
전 <지와 사랑> 이 더 어울리는거 같아요. 나르치스라고 하니 나치 생각도 나고 😅 오늘 정말 춥네요 ㅜㅜ

scott 2022-12-01 11: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이 작품 읽고
아뒤
골드문트로 바꾸실 것 같습니다!^^

새파랑 2022-12-01 12:08   좋아요 3 | URL
중복아이디 가능 할까요? ㅋ 감기 걸려서 어제 빨리자서 못읽었네요 ㅜㅜ

물감 2022-12-01 13:24   좋아요 3 | URL
골드문트는 뺏겼으니까 아쉬운대로 나르치스 가시죠ㅋ

새파랑 2022-12-01 14:00   좋아요 3 | URL
그런데 제가 나르치스 보다는 골드문트에 더 가까운 성향인거 같아요 ㅋ 그래서 나르치스는 좀 힘들거 같다는 😅

페크pek0501 2022-12-02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6 - 사랑하지 않았다면 상대편에게 불만스럽거나 애석함을 느끼지 않겠죠. 이 문장을 뒤집은 것 같이 느껴졌어요.
젊은 시절의 짐~노년에는~이 문장이 참 좋네요.

새파랑 2022-12-02 16:31   좋아요 0 | URL
다시 보니까 제가 쓴 글이 너무 개판이네요 ㅋ 아 글씨쓰는 연습좀 해야할거 같습니다 ㅜㅜ

Jeremy 2022-12-03 0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덕분에 제 Kindle 과 대조해가며
한국어로 이 책의 1/3 이상을 오늘 아침 다시 따라 읽은 느낌이에요.
저도 꽤 많은 문장 발췌해 놓았는데 새파랑님께 영감 받아서
겹치는 문장 몇 개만 따로 제 페이퍼로 적고 있는 중입니다.

책 후반부의 더 좋은 문장들도 밑줄긋기 기대해 봅니다.
특히 예술과 죽음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고찰이 드러나는.

새파랑 2022-12-03 08:53   좋아요 1 | URL
이거 읽다가 갑자기 급한 일ㅇㄱ 생기고 축구본다고 책을 거의 못읽었어요 ㅜㅜ 이번 주말에는 꼭 읽어야 겠습니다~!! 이 책의 후반부도 기대가 되네요 ^^
 
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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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139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라는 멋진 문장에 끌려 읽기 시작했지만...나에게는 많이 어려웠다. 파묵의 <하얀성>에 이어 두번째로 읽은 책인데, 이 책이 더 어려웠다. 포스트모더니즘? 으로 분류되는 작가의 작품은 당분간 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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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2-11-29 1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 주변에도 요즘 이 책 읽고 계신 분들이 있는데 다들 힘들다고 하시더군요. <내 이름은 빨강>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

새파랑 2022-11-29 11:29   좋아요 1 | URL
전 정말 어렵더라구요 ㅋ 저만 그런게 아니어서 나름 위안이 됩니다~!! <내이름은 빨강> 도 있근데 읽을 엄두가 안나네요 ㅋ

독서괭 2022-11-29 11:36   좋아요 2 | URL
전 옛날에 빨강 읽었을 때 뭔소린지 모르고 힘들게 읽었어요 ㅜㅜ

새파랑 2022-11-29 11:44   좋아요 1 | URL
저도 이책 읽을때 그랬습니다 ㅋ 터키 어려워요😅

햇살과함께 2022-11-29 1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어려워서 뭔소리야 했던 기억이 ㅋㅋㅋ
새파랑님처럼 <하얀 성>이랑 이 책 2권 읽었는데, 둘 다 제 취향이 아니었음을...ㅎㅎㅎ
다시 읽어 보면 재밌을까요...

새파랑 2022-11-29 11:52   좋아요 2 | URL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어떻게 읽긴 읽었는데 비몽사몽해어 더 이해를 못했습니다 ㅋ 전 피하려고 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2-11-29 11: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 이 책 갖고만 있어요. 어려울 줄 예상은 했습니다^^;

새파랑 2022-11-29 11:52   좋아요 2 | URL
저는 좀 그렇지만 화가님은 잘 읽으실거 같아요~!! 좋은평도 많더라구요 ㅋ

페넬로페 2022-11-29 1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어려워요 ㅎㅎ~~

새파랑 2022-11-29 13:10   좋아요 2 | URL
아 저는 모던한 사람이 아닌가봅니다 😅

그레이스 2022-11-29 13: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얀성도 얇지만 만만치 않은데...
이 책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되나요?
파묵의 소설 좋아하는데...;;

새파랑 2022-11-29 13:11   좋아요 2 | URL
해설에서 그렇게 나온거 같아요. 일단 어려우면 포스트모더니즘한걸로 ^^

전 파묵 작품 읽고는 싶은데 어렵네요 ㅋ

그레이스 2022-11-29 13: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이름은 빨강
내마음의 낯섦은 가독성이 나쁘지 않았어요

새파랑 2022-11-29 13:15   좋아요 2 | URL
가독성보다는 제가 이해를 잘 못하겠더라구요 ㅋ 내이름은 빨강은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2-11-29 18: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작품마다 난이도 편중이 심한 작가입니다.
내 이름은 빨강이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유일한 정치소설이라고 본인이 주장하는 <눈>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하얀 성>도 파묵 중엔 그래도 덜 어렵고 재미난 축에 들지 않나 싶고요, <순수 박물관>, <내 마음의 낯섦>, <빨강머리 여인>, <검은 책>, <고요한 집> 다 새파랑 님이 꺼릴 수준은 아닐 것 같네요. 민음사 세계문학에서 나온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역시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근데 새파랑 님하고 파묵의 합이 맞지 않는 거 아닐까요? 만일 제게 추천을 부탁하신다면 <눈>을 읽으시고 파묵을 더 파볼까 말까를 결정하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믿지는 마시기를.....

새파랑 2022-11-29 19:23   좋아요 3 | URL
<하얀성>은 읽기는 했는데 좀 낯설더라구요 ㅋ <눈>을 한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추천 감사드립니다~!!!

mini74 2022-11-29 22: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가지고만 있어요 ㅎㅎㅎ

새파랑 2022-11-29 23:14   좋아요 3 | URL
시작이 반~!! 가지고만 있어도 좋은 책인거 같아요 ㅋ

희선 2022-12-01 0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 한권을 보고 삶이 바뀌었다는 말은 멋져도, 이 책은 어렵군요 다른 책은 어떨지...


희선

새파랑 2022-12-03 14:36   좋아요 0 | URL
저에게만 어렵지 이책 좋다고 하는분들도 많으시더라구요 ^^ 저에게도 새로운 인생을 준 책이 있습니다~!!
 
그 후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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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138

˝내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필요해요. 저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당신을 부른겁니다.˝


내가 책(특히 문학)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내면을 알수있기 때문이다. 반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내면에 대한 묘사가 아무래도 제한되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을 그렇게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뇌를 다루는 내용을 좋아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러한 나의 취향에 딱 맞는 작가다. 그리고 <그 후>는 서구문물이 막 유입되는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한, 사랑과 우정에 관한 소세키의 내면 탐구가 극대화된 작품이다.

[그러자 미치요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이런 논리에 의해 그저 일시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머리는 당연히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틀림없이 그렇다고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 P.517




이야기는 간단하다. 부유한 집안의 ‘다이스케‘는 친구의 여동생인 ‘미치요‘를 마음에 두고 있었고, 그녀 역시 ‘다이스케‘에게 어느정도 마음이 있었는데, 또다른 친구이자 가난한 ‘히라오카‘ 역시 ‘미치요‘에게 마음이 있었고,


‘히라오카‘는 ‘다이스케‘에게 ‘미치요‘에게 마음이 있다고 고백하며 그에게 ‘미치요‘와 연결시켜달라고 부탁한다. ‘다이스케‘는 두 사람의 결혼을 주선하게 되고, 두 사람은 부부가 된다. 이후 ‘다이스케‘는 별다른 직업없이 유유자적하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아간다. 서구의 선진 교육을 받았지만 오히려 혼자서만 지식인척 살아간다.

[히라오카는 마침내 자신과 멀어지고 말았다. 만날때마다 멀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은 히라오카뿐만이 아니다. 누구를 만나더라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 현대사회란 고립된 인간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대지는 자연과 이어져 있지만 그 위에 집을 지으면 금세 조각조각 나버린다. 집 안에 있는 인간 역시 조각조각 나버린다. 다이스케는 문명은 우리들을 고립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P.360



그리고 몇년 후 세사람은 재회하는데, ‘다이스케‘는 ‘히라오카‘와 ‘미치요‘ 부부가 행복하지 않고, 궁핍하게 산다는 걸 알게 된다. ‘다이스케‘가 보기에 두 부부는 서로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다이스케‘는 자신의 마음이 여전히 ‘미치요‘에게 향해 있음을 느낀다. 왜 그때 나의 마음을 뒤로하고 사랑대신 우정을 택했던 걸까?

[다이스케는 백합을 바라보면서 방을 가득 채운강한 향기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는 그런 후각적인 자극 속에서 지난날 미치요의 모습을 분명하게 떠올렸다. 그 과거 속에는 떨쳐버릴 수 없는 자신의 옛 그림자가 연기처럼 휘감고 있었다. 그는 한참 후에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처음으로 자연스러웠던 옛날로 돌아가는군.‘] P.697






뻔하고 뻔한 이야기지만 소세키의 문장은 뻔하지 않았다. 책을 읽다보면 사랑, 우정, 사회적 지위 그리고 경제적 지원이라는 문제 앞에서 고뇌하는 ‘다이스케‘의 모습에 동화될 수 밖에 없었다. 지식인이자 이성적인 ‘다이스케‘ 라면 당연히 ‘미치요‘를 선택하면 안된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가 불행하면 할수록 더 끌리게 된다.

[˝난 미치요 씨를 사랑하고 있네.˝
˝남의 아내를 사랑할 권리가 자네에게 있나?˝
˝어쩔 수 없어. 미치요 씨는 물론 자네 소유야. 하지만 물건이 아닌 인간이니까 마음까지 소유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하지. 본인 외에 그 어떤 사람도 애정의 정도나 대상을 명령할 수는 없지.˝] P.837




왜 그깟 마음 하나가 뭐길래 ‘다이스케‘는 안락함을 버리려는 걸까? 불행한 미래가 뻔히 예상되는데도 저런 선택을 하려는 걸까? 그런데 난 ‘다이스케‘가 이해가 된다. 마음이란 원래 그런거니까. 명확하게 구분할수도, 쉽게 버릴수도 없고, 돌아서려고 하면 할 수록 끌리는게 마음이니까.

[그는 자신이 옳은 길을 선택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그걸로 충분히 만족했다. 그 만족감을 이해해줄 사람은 미치요뿐이었다. 미치요 외에는 아버지도, 형도, 사회도, 세상사람들도 모두 적이었다. 그들은 시뻘건 불꽃속으로 두 사람을 밀어 넣어 태워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말없이 미치요를 부둥켜안고 그 불길이 자신을 빨리 태워 없애기를 간절히 바랐다.] P.869



Ps 1. <그 후>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지금 시기에 읽으면 딱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Ps 2. 역시 나의 소세키 최고의 작품은 <그 후>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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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1-25 21: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설이 원작일 때 다른 방식으로 재해석 하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원작에 충실한 것도 좋고요.
문장으로 된 한 장면을 영상으로 만드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라서요. 영화를 보고 나면 다시 원작인 책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잘읽었습니다. 새파랑님,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새파랑 2022-11-26 08:54   좋아요 1 | URL
저도 소설 읽다보면 이걸 영상으로 하면 멋지겠다 하는 작품을 만나기도 하고, 실제 영화로도 제작된 것도 있던데 저는 막 찾아서 보지는 않더라구요 😅

scott 2022-11-25 2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에게 앞으로 소세키 옹 작품은
<그후 >의 이전과 후로 나눠 질 것 같습니다 ^^

새파랑 2022-11-26 08:54   좋아요 1 | URL
전 <그 후> 이후 작품들이 더 좋은거 같아요 ^^

파이버 2022-11-25 2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역시 소세키 매니아시네요ㅎㅎ 말씀대로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물보다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 법은 책이 더 섬세한 것 같아요. 각자 나름의 매력이 있네요ㅎㅎ

새파랑 2022-11-26 09:46   좋아요 2 | URL
전 영화보다는 책~!! <그 후> 재독인데, 처음 읽을때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바람돌이 2022-11-25 2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별거 아닌 스토리를 이렇게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소세키옹 훌륭!
그 스토리로 이런 리뷰를 만들어내는 새파랑님도 훌륭! 👏👏

새파랑 2022-11-26 09:47   좋아요 2 | URL
소세키는 훌륭이지만 저는 그닥...😅 이 작품 바람돌이님은 싫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

페넬로페 2022-11-26 0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후도 넘 좋죠!
다만 다이스케가 조금 맘에 안들었는데 그래도 사랑을 선택하더라고요.
처음부터 용기내어 미치요와 결혼했으면 더 좋았을텐데요
새파랑님의 최애작품이군요^^

새파랑 2022-11-26 09:49   좋아요 2 | URL
제가 어렸을때 다이스케랑 비슷한(?) 경험을 한적이 있어서 그런지 더 공감되었습니다 ㅋ 저의 최애 작품이 맞습니다 ^^

페크pek0501 2022-11-27 14: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읽으려고 했었는데 아직 구매하지 못했어요.
별점 만점을 참고하겠습니당~~~

새파랑 2022-11-27 16:11   좋아요 2 | URL
개인적으로는 완벽한 100점 짜리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

레삭매냐 2022-11-27 17: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후>가 소세키 선생
최고작이라 해서 소장하고
있나 검색해 보았는데...

없더군요. 일단 사야 하나
싶었습니다. 당장 뛰쳐 나
가서 사고 싶어집니다.

새파랑 2022-11-27 22:14   좋아요 2 | URL
ㅋ 레삭매냐님 서재에 없는 책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전 민음사판보다 현암사판이 더 좋더라구요 ^^

그레이스 2022-11-29 14: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붉은 동백꽃으로 시작해서 빨간 우체통 그리고 붉게 물든 세상으로 끝나는 소설의 색채가 압권이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새파랑 2022-11-29 23:17   좋아요 1 | URL
시각적인 묘사도 좋고 심리묘사도 좋고 이야기도 좋고 너무 좋은 작품인거 같아요 ^^

mini74 2022-11-29 22: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민음사로 읽었어요 새파랑님 글 읽으니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민음사랑 어떤 점이 다를까 궁금해집니다 ~

새파랑 2022-11-29 23:16   좋아요 2 | URL
저도 처음에는 민음사로 읽고 현암사로 다시 읽었는데 오래되서 기억이 잘 안나네요 ㅋ 한번 비교해보고 싶네요 ^^

프레이야 2022-11-30 13: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민음사 걸로 읽었는데 현암사 시리즈도 사놓았으니 언젠가 아님 조만간 읽어야겠어요.
아니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읽으면 좋다고 콕 찝어주셨네요. 환기해 주셔서 쌩큐에요 새파랑님.

새파랑 2022-11-30 19:42   좋아요 1 | URL
책의 배경은 여름? 이었던거 같은데 약간 우울해서 그런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에 딱 좋은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듭니다 ^^

희선 2022-12-01 0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은 《그 후》를 나쓰메 소세키 최고 작품으로 생각하시는군요 이번에 다시 보셔서 더 좋아하게 됐을 것 같습니다


희선
 

오늘 택배 받자마자 바로 읽었다 ㅋ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라는 건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라는 겁니다 - P20

저는 그래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변화 가능성을 그렇게 쉽게 일축할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인들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 P26

거리 두기. 이 네 글자.
바이러스 때문에 하는 거리 두기 말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건강하게 불필요한 오해나 갈등 없이 가능한한 오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물리적, 시간적, 그리고 심정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 이게 이 세상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P29

그래서 사랑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힘이 들 때가 많죠. 사람은 누굴 좋아하면 바라는 게 생기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 감정 없는 동료와 회사에서 종일 같이 있는 것보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한집에서 종일 붙어 있으면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생기게 되는 거죠. - P30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남한테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이 죽기보다 어려울 수가 있는 거거든요. 그런 대화를 하는 순간의 그 불편한 공기를 참느니 차라리 인연을 끊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을 한다는 거죠. 또 애초에 그런 게 가능했으면 내키지 않는 일은 거절을 할 수 있는 용기도 있었을 테고요. - P43

누굴 미워하지 않게 된다는건 결국 나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인데, 그래서 이 사람과 사람 간의 일이라는 것은 정말 간단한게 아닌 것 같아요. 누가 누굴 알고 이해한다는 건 어쩌면 평생이 걸릴 수도 있는 긴 여정이기 때문에. - P47

요약이라는 건요, 당장 받아들이기에 간편할지는 몰라도 필연적으로 오해와 단정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글에는 행간이 있고 맥락이라는 게 있는 건데 그걸 다 생략하고 핵심만 남긴다? 지금 문제집을 푸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300페이지짜리 책 한권을 한두 개의 문장으로 압축하듯, 수십 년 사람의 인생 역시 한두 마디 말로 요약한다고 생각해보세요. - P50

인간의 삶에는 노력을 아무리 해도 닿을 수 없는 소위 말하는 운이 좌우하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걸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심지어 운조차 내 노력의 소관으로 이해를 해버리면 결국 세상만사가 다 내 탓이 되어버립니다. - P82

인생이라는 게 두 개를 다 가질 수는 없는 거니까요. - P96

이 세상은 사람의 지옥이다, 뭐 이런 말도 했었지만 인간은요, 사람한테 한 열 번 스무 번 데이다가 막상 한번 감동을 받잖아요? 그럼 그 힘으로 또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 P1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의심하고 외면하고 불러주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럴 때 어느 한 명, 나보다 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그 감동은 평생을 갑니다. 그때 그분이 저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 저에게 필요한 온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로 너무 춥게 살아왔을지도 모릅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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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25 11: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새파랑님을 위해 출간 된 것 같습니다 ^^

새파랑 2022-11-25 12:12   좋아요 2 | URL
제가 북플에서 1번으로 읽은듯 합니다~!!

페크pek0501 2022-11-27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석원 님의 블로그에 가끔 들어가곤 했는데... 여기서 보네요.
˝운명은 늘 거기에 있었다.˝ -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멋있는 말 같습니다.^^

새파랑 2022-11-27 16:14   좋아요 0 | URL
제가 이석원, 언니네 이발관 완전 좋아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