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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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23

역시 김연수 작가님이라는 감탄이 나오는 단편집이었다. 이전에 발표한 단편집인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나 <내가 아직 아이였을때>와는 다르게 모든 단편들이 좋지는 않았지만...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작품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한 단편 안에서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다양한 사연들이 결국은 연결되는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구성을 보여준 작품들 중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세계의 끝 여자친구>,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 편이 좋았다.


사랑하는 애인의 죽음(작가)과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통역사)은 ‘상실 후 그리움‘으로 연결되고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내가 아는 나의 얼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웃음을 머금은 케이케이의 눈동자에 비친 얼굴이었다. 양쪽 눈동자에 하나씩, 모두 두 개의 얼굴.] P.10



메타세쿼이아 한그루를 통해 과거 시인의 편지와 현재 나의 망설임은 ‘전하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으로 연결되며 (˝세계의 끝 여자친구˝),

[누군지는 끝내 알 수 없게 됐지만,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도 당신만을 생각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영영 말해줄 수 없게 됐지만, 언젠가는 그 사람도 알게 되겠죠. 시인이 한때 이런 시를 썼다는 거. 그 메타세쿼이아가 두 사람이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곳이었다는 거.] P.80



어머니가 죽던 날 내가 본 노을과 사진작가가 찍은 흑두리미의 노을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연결된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 순간만은 그 누구라도 내가 바라본 노을을 그러니까 엄마가 죽던 날의 노을을 바라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엄마의 고통을 오직 진통제만이 이해했듯이 내 슬픔은 그 노을만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고통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슬픔을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P.178




이러한 구성을 통해 김연수 작가님은 ˝개인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라고 말하려던게 아니었을까?


개인의 이야기는 어떻게든 연결된다. 그래서 당신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외롭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Ps. 다음번에는 김연수 작가님 책탑을 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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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5-03-15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간이 나올 때도 된 거 같은데 말이죠. 음 그러고 보니 저는 이 소설은 읽지 않았네요!

새파랑 2025-03-15 13:31   좋아요 0 | URL
이 단편집 좋습니다~!! 다른 단편집들에 비해 세련된(?) 느낌이 있어서 수이님은 좋아하실거 같아요~!!

페크pek0501 2025-03-15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탑을 기대합니다!!!

새파랑 2025-03-15 17:25   좋아요 0 | URL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이들을 모아봐야 할거 같습니다~!!

은하수 2025-03-16 0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님~~~
요즘의 책보다 오래전의 작품들이 더 좋았다고 생각하는....
저도 김연수 작가님 책탑 구경하고 싶어요^^

새파랑 2025-03-16 08:24   좋아요 0 | URL
작가님 스타일이 예전이랑 지금이랑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ㅋ 전 둘다 좋아요~!

자목련 2025-03-16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작가!
신나는 책탑 올려주세요^^

새파랑 2025-03-17 10:59   좋아요 0 | URL
넵 ㅋ 지금까지 읽은 연수작가님 책도 정리해봐야 겠습니다~!!
 

최근에 책을 좀 읽긴 한거 같은데 인터넷을 할 시간이 없어서 리뷰나 100자평을 거의 못썼다. 그래서 읽었으되 못남긴 책들의 리뷰를 간단히 남겨보자면...


N25019 채털리 부인의 연인 - 상
N25020 채털리 부인의 연인 - 하

언제인지 모르지만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영화로 본적이 있었다..... 이미 영화로 봤다는 사실 때문에 책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안들었지만.... 사실 영화 내용도 가물가물하기도 하고, 파격적인(?) 고전의 대명사 이기도 해서 읽었다. 그리고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밑줄도 긋지 못하고 읽었다. 현재 시각에서 보면 표현이 그렇게 야하지도 않지 당시에는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을만 하다. 지금읽어도 정말 관능적이다. 그리고 확실히 영화와 글은 다르다는걸 깨달았다... 나는 영화보다는 글이 더 취향인 것 같다.




N25021 노름꾼

최근에 머리 아픈 일이 많아서 분위기 전환을 위해 선택한 작품. 다시 읽어도 여전히 유쾌하고 좋았다. 어차피 인생은 한방이라며 빠지기 쉬운 도박, 하지만 일획천금을 노리다가 한방에 훅 가는게 대부분이다. 노름꾼들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끊지를 못한다. 자신은 특별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잃더라도 자신은 딸 거라는 근거없는 자신감 때문인지도. 탐욕. 그러고 보니 노름과 인생은 어딘지 닮아 보인다.

[가령 빨간색이 열 번이나 나오고 나면 또다시 빨간색에 걸려고 결심하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다. 하지만 노련한 노름꾼들 이라면 빨간색의 반대인 검은색에는 걸지 않을 것이다. 노련한 노름꾼은 그것이 <우연의 변덕> 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N25022 8월은 악마의 달

알라딘에서 평도 좋고  (내가 좋아하는) 아일랜드 출신 작가여서 구매를 했는데,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솔직히 별로였다. 내 취향은 아니었다. 주인공인 ‘엘런‘의 행동을 ‘금기시되어 온 여성의 욕망‘을 표출했다고 보기에는 공감하기 힘들었고, ‘엘런‘이 자려고 하는 주변 남자들 역시 이해가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등장인물 모두 이성과 자는 것만이 목적인 발정난 짐승들이었다. 프랑스의 휴양지를 혼자가면 저렇게 노는건가? 라는 의문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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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5-03-15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월은 악마의 달_을 읽어보고 싶게끔 만드는 한줄평, 강렬한!

새파랑 2025-03-15 13:26   좋아요 0 | URL
앗 ㅋ 잠자냥님 별 다섯보고 구매했는데...
저는 잠자냥님처럼 깨어(?)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좀 놀랬습니다~!!
 

그동안 읽고 싶었으나 아껴둔 한강작가님의 <소년이 온다>를 이제야 읽었다. 예전에 읽을걸 너무너무 후회된다. 이건 뭐 설명이 필요없다. 최고.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고통스럽기는 처음이었다. 노벨상 수상은 당연한 거였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 P13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 P17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자신까지도. - P45

어디선가 누나의 혼도 어른거리고 있을 텐데, 그곳이 어딜까, 이제 우리한텐 몸이 없으니 만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일 필요는 없을텐데. 하지만 몸 없이 누나를 어떻게 만날까. 몸 없는 누나를 어떻게 알아볼까. - P51

어머니가 부쳐준 올배쌀을 공기에 담아와 다시 책상 앞에 않았다.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지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 P85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에 둔감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더 두려웠다. 입을 벌리고 몸에 구멍이 뚫린 채, 반투명한 창자를 쏟아내며 숨이 끊어지고 싶지 않았다. - P89

마침내 도청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귀를 틀어막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고개를 건지도, 신음하지도 않았다. 다만 너를 기억했다. 너를 데리고 가려 하자 너는 계단으로 날쎄게 달아났다. 겁에 질린 얼굴로, 마치 달아나는 것만이 살길인 것처럼. 같이 가자, 동호야. 지금 같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서서 너는 떨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네 눈꺼풀은 떨렸다. - P92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P95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P99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른지 못 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꽃은 양초 불꽃들이. - P102

지금은 어리석게 들리겠지만, 그 말을 절반은 믿있습니다. 죽을수 있지만, 어쩌면 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겠지만, 어쩌면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뿐 아니라 조원들 대부분이, 특히 어린 친구들은 더 강한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지도부를 이끌었던 대변인이 전날 외신기자들을 만나 했다는 말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패배할 거라고 그는 말했다지요. 반드시 죽을 것이며,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지요. 고백하건대 나에게 그런 초연한 확신은 없었습니다. - P113

김진수의 생각에 대해선 알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으리라고 예상하면서도 도청 밖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왔던 걸까요. 아니면 나처럼, 죽을 수도 있지만 살 수도 있다는 생각, 어쩌면 도청을 지킬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평생 동안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거란 막연한 낙관에 몸을 실었던 걸까요. - P113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P114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럽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 P114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아품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 P117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아니, 그런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던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던 걸 증명한 거야. - P130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나 역시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 P134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움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움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 P135

네가 나한테 한번 와준 것인디,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한번 보여 줄라고 온 것인디, 늙은 내가 너를 놓쳐버렸어야. 시장통 좌판 사이로, 골목골목으로 한시간을 뒤지고 댕겨도 없어야. 무릎 속이 쑤시고 어질어찔 골이 흔들려 바닥에 주저앉았다이. 허지만 동네 사람이라도 만나먼 큰일인게, 아직 어지러워도 땅을 짚고 일어섰다이 . - P179

여덟살 묵었을 때 네가 그랬는디. 난 여름은 싫지만 여름밤이 좋아. 암것도 아닌 그 말이 들기 좋아서 나는 네가 시인이 될라는가, 속으로 생각했는디. 여름밤 마당 평상에서 느이 아부지하고 삼형제하고 같이 수박을 먹을 적에. 입가에 묻은 끈끈하고 다디단 수박물을 네가 혀로 더듬어 핥을 적에. - P191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끝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 P192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서아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씨주세요.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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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이야기가 이어지른 김연수 작가님의 단편집. 작가님의 애정어린 시선이 언제나 좋다.


내가 아는 나의 얼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웃음을 머금은 케이케이의 눈동자에 비친 얼굴이었다. 양쪽 눈동자에 하나씩, 모두 두 개의 얼굴. - P10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그 나라마저도 내게는 미칠 듯이 사랑스러있으니까. 우린 연인이었다. 그 나라에서 케이케이가 왔다. - P12

고통을 피하려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고통을 피하려고 스스로 죽기도 한다. 해피에게는 아이없이 살아가는 삶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건, 희망을 찾은 게 아니라 희망을 버렸다는 뜻이었다. - P27

요즘 들어서, 살아오는 동안 안 하고 넘어간 일들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청년은 아직 이게 무슨 기분일지 모를 거야. 한 일들은, 그게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마음에 남는 게 하나도 없는데, 안한 일들은 해봤자였다고 생각하는데도 잊히질 않아요. 왜, 하지도 않은 일이 잊히지 않는다니까 우스워요. - P79

누군지는 끝내 알 수 없게 됐지만,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도 당신만을 생각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영영 말해줄 수 없게 됐지만, 언젠가는 그 사람도 알게 되겠죠. 시인이 한때 이런 시를 썼다는 거. 그 메타세쿼이아가 두 사람이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곳이었다는 거. - P80

미래를 바라봐온 십대, 현실과 싸웠던 이십대라면, 삼십대는 멈취서 자기를 바라봐야 할 나이다. 이젠 좀 솔직해져도 괜찮은 나이다. 축하를 위해 세 잔의 맥주를 마시자. 뭐, 그런 내용. - P96

그 순간만은 그 누구라도 내가 바라본 노을을 그러니까 엄마가 죽던 날의 노을을 바라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엄마의 고통을 오직 진통제만이 이해했듯이 내 슬픔은 그 노을만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고통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슬픔을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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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가즈오 이시구로. 처음 읽었을때보다 훨씬 좋다. 깊이가 다르다. 직업의식과 정의, 인간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한때 열일곱 명의 직원을 거느렸턴 사람이다. 그리고 이곳 달링턴 홀에서 스물여 명의 직원이 일했던 것이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다. 그런 집을 네 명의 직원으로, 다시 말해 가장 최소한의 인원으로 굴릴 방안을 짜보라니 생각만 해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 딴에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나의 회의적인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났던 모양이다. - P16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만 물론 나도 옛날 방식을 지나치게 많이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각에서 목격되듯 단지 전통 그 자체를 위해 전통에 매달리는 식의 집착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 P16

결국 내가 최근들어 겪었던 모든 난제들의 중심에 바로 이 인력 부족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볼수록 점점 더 명백해지는 사실이 있었으니 이 집에 무한한 애정을 가졌을 뿐 아니라 타의 모범이 될만한, 요즘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프로 정신을 갖춘 켄턴 양이야말로 달링턴 홀의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인력 관리안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요소라는 점이었다. - P20

차분한 아름다움, 절제의 미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다. 마치 땅 자체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대함을 자각하고 있어 굳이 소리 높여 외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여기에 비해 아프리카나 미국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은 전율에 가까운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꼴사나운 과시욕으로 인해 객관적인 관찰자에게는 저급하다는 인상을 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P47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힘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배분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취 입듯 자신의 프로 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 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 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다. - P71

영국의 풍경이 오늘 아침 내가 보았던 것과 같은 최고의 경지를 드러내는 것이나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최고 경지를 드러내는 것이나 같은 이치다. 그런 이들과 마주치면 내가 지금 위대함을 면전에 두고 있다는 것을 그냥 ‘알게‘ 되니까 말이다. - P73

그러나 정말 뿌듯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하는 말이지만 달링턴 나리께서 내 눈과 귀를 우려하여 무언가를 숨기려 하신 적은 결코 없었다. 모 인사가 말을 하다 말고 나를 향해 경계의 눈길을 던질라치면 나리께서 "아, 괜찮습니다. 스티븐스 앞에서는 무슨 얘기든 해도 돼요, 내가 보증합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경우가 무수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 P118

"켄턴 양, 부친께서 방금 작고하셨는데도 올라가 지 않는다고 막돼먹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말아 주시오.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아버님도 이 순간 내가 이렇게 처신하기를 바라셨을 거요." - P174

어쨌거나 때늦은 깨달음에 의지해 과거를 뒤져 보노라면 그러한 ‘전환점‘들이 도처에서 눈에 띄게 마련이다. 우리의 저녁 모임을 중단하기로 한 나의 결정뿐 아니라 그전에 내 집무실에서 있었던 일도 그런 시각으로 보자면 얼마든지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그녀가 꽃병을 들고 들어왔던 그날 저녁에 만약 내가 약간 달리 반응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 P268

달링턴 경의 노력이 잘못되있을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했음을 세월이 입증해 주었다고 해서 어떤 면으로든 어떻게 내가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그분을 모신 세월을 통틀어 증거를 저울질하고 나아갈 길을 판단한 것은 바로 그분 자신이었으며, 나는 다만 나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지극히 온당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가히 ‘일등급‘이라고 인정받을 만한 수준에서 내 능력 닿는 데까지 직무를 수행한 것밖에 없다. - P312

"하지만 어르신이 걱정되지도 않소? 당신이 진심으로 아끼는 분이라고 방금 전에 그랬잖소. 그분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 아니오? 최소한 일말의 호기심이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영국 총리와 독일 대사가 당신 상전의 주선으로 저렇듯 심야에 밀회를 나누고 있는데 궁금증도 생기지 않는단 말이오?"

"전혀 궁금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일에 호기심을 보이는 것은 제 직분에 어긋나는 겁니다, 도런님." - P340

하지만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없다는 애기는 물론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적한 실수를 저질렀던가‘ 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 이를테면 저는 스티븐스 씨 당신과 함께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하곤 한답니다. - P364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겁니다. 지금 가진 것도 그 못지않게 좋다, 아니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 - P364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디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나오겠는가?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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