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이름 붙이기 -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할 때
캐럴 계숙 윤 지음, 정지인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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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p.) 그것은 아주 즐거운 괴상함이었다. (....) 한 연구자에 따르면 남서부 사막지대에 사는 파파고 인디언은 생물을 "생각하는 것",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 "나는 것", "가시가 있는 것" 등 놀랍도록 특이한 범주들로 분류한다고 한다.


* * *


아.... 이거구나. 내가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

이걸 하지 않아서 무기력했던 것이야.

이걸 하지 않아서 우울했던 것이야.

이걸 하지 않아서.


사랑받지 못해서가 아니고!

이해받지 못해서가 아니고!

관심받지 못해서가 아니라고!!!!!


* * *


(174p.)그보다 더 이상한 예는 뉴기니 고지대에 사는 로파이포족Rofaifo이었는데, 아주 열성적인 사냥꾼인 카람족 못지않게 자신들이 사냥하는 동물들에 관해 잘 알았다. 그들은 작은 포유류로 구성된 한 분류군을 알아보고 이 동물들을 '후넴베Hunembe'라고 부른다. 후넴베로 보기에 너무 큰 포유류는 모두 그들 말로 더 큰 포유류를 뜻하는 '헤파Hefa'로 간주된다. 그런데 로파이포 사람들은 이 털이 있고 젖꼭지와 자궁이 있는 포유류들 사이에 화식조cassowary라고 알려진, 깃털을 비롯해 새의 특징은 다 가진 거대한 새를 집어넣었다. 자기들 주변의 동물들을 그렇게 잘 아는 이 사람들은 화식조가 새라는 걸 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보다 더 이상한 건, 왜 다른 부족들도 똑같이 그러는 걸까? 모든 새와 박쥐를 한 범주에 몰아넣은 카람족 역시 화식조만은 그 범주에서 빼놓았다. 그들이 자기네가 사냥하고, 먹고, 잡고, 그보다 훨씬 많이 관찰하여 상세하게 분류한 그 모든 생물을 아주 잘 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특히 더 이상한 일이었다. 

뉴기니에서 수년간 연구한 인류학자 랠프 벌머Ralph Bulmer가 쓴 유명한 논문의 제목도 이렇게 묻고 있다. "왜 화식조가 새가 아니라는 것일까?"

* * *

그렇다고 내가 위와 같은 질문에 답을 찾아 연구하는 '민속 분류학' 일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모를까. 이 책을 들고 타임머신을 타고 학창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모를까.

......


* * *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3년 동안 포레족Fore이라는 뉴기니 사람들과 새의 이름에 관해 인터뷰하며 보냈다.(『총ㆍ균ㆍ쇠』의 저자로 가장 잘 알려진 다이아몬드는 오랫동안 뉴기니의 새들을 연구한 대단히 존경받는 생물학자이기도 하다). 그 시기에 그는 자기가 잘 모르는 생물 집단인 버섯들을 비롯해 새 외에 다른 유기체들에 관해서도 질문했다. 그 지역의 자연사에 관한 그들의 풍부한 지식에 비추어볼 때 놀랍게도 포레족은 자신들에게 서로 다른 버섯 종들을 가리키는 이름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다 나중에 숲에서 야영하며 지낼 때 식량이 떨어져가자 다이아몬드와 동행한 포레족 사람들은 숲으로 가서 버섯을 두 자루 가득 채취해왔다. 다이아몬드는 걱정스러워졌다.


  "포레족은 저 버섯들이 먹을 수 있는 종류인지 어떠헥 확신하는 걸까?" 나중에 다이아몬드와 한 동료는 이렇게 썼다. "그러자 그 포레 사람은 자신들이 구별하고 먹을 수 있는 건지 아닌지에 관해 장장 한 시간에 걸쳐 설교했다." 다이아몬드가 왜 전에는 버섯 이름이 없다고 했느냐고 묻자 그들은 버섯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버섯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낭비를 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181p.)

* * *

아... 버섯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올해는 엄마가 버섯을 따러 다니지 않았다. 엄마가 가야 내가 갈 수 있는데 엄마는 버섯을 따러 산에 가기에는 이제 다리에 힘이 너무 약해졌다. 엄마가 못 가면 나도 갈 수 없다. 백날 엄마에게 말로 설명을 들어봐야 소용없다. 나 혼자 산에 가서 아무리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본다 해도, 가장 흔한 갓버섯을 본다 해도, 엄마 따라 갔을 때 몇 번 보았던 꾀꼬리 버섯이나 보라 버섯, 심지어 영지 버섯을 본다 해도 그게 그거라고 확신할 수 없을 테니까.


추석 전에 엄마를 모시고 영양에서 고추농사 짓고 있는 형님 댁에 다녀왔을 때, 단 하룻밤 여행이었을 뿐인데 엄마가 왜 그렇게 많이 웃고, 왜 그렇게 밥을 많이 먹고, 좋아라했는지 알았다. 엄마는 잃어버렸던 자신의 움벨트를 다시 만났던 것이다. "시골에 땅을 좀 사라. 얼른 얼른 돈 벌어서 시골에 집을 지으라고. 영양은 너무 머니까 엄마 사는 곳 가까운 데다가 땅을 사. 땅을 사서 니 집 지으면 마당 한 쪽에 내 집 한 칸 짓게. 같이는 못 살아. 집은 따로 짓고 곁에 살자." 음... 일단 돈을 벌어야겠지.


* * *


(181p.) 이렇게 민속 분류학 연구는 확실히 슬렁슬렁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쾌적한 사무실, 시원한 아이스티 한 잔, 안락한 거실, 멋지게 장정된 책들로 가득한 도서관으로부터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이 연구자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거기서 그들은 매캐한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시간을 보내고, 어쩌면 그들의 배 속은 낯선 장내 박테리아 때문에 요동치고 있을지도 모르며, 주변에는 묘한 언어로 말하는 묘한 사람들, 지루해하고 짜증 내고 심지어 적대적인 사람들, 그리고 대개 이 연구자들이 이제 그만 공책들과 끝없는 질문들을 다 챙겨서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충분히 많은 수의 이 용감한 영혼들은 처음에 분류와 이름의 완전한 혼돈으로 보였던 것이 상당히 다른 무언가로 바뀔 때까지 계속 질문하고 답변을 해독하며 버텨냈다. 무수한 낯선 분류들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하며, 구조나 패턴도 없고, 우리의 분류와는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보았던 나의 첫인상은 사실 불완전했을 뿐 아니라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인류학자들은 마침내 민속 분류학들 사이에서 명확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관성을 발견했다.


* * *


밑줄은 여기다 "처음에 분류와 이름의 완전한 혼돈으로 보였던 것이 상당히 다른 무언가로 바뀔 때까지 계속 질문하고 답변을 해독하며 버텨냈다."


길을 잃었지만

완전한 혼돈으로 보이는 세상이지만

지금 이것들(내 마음을 포함해 가족들의 마음, 타인들의 마음,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상당히 다른 무언가로 바뀔 때까지

계속 질문하고

답변을 해독하며

버텨내는 수 밖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아주 즐거운 괴상한 이야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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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10-07 23: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너무 너무 좋아해요.

잘잘라 2024-10-08 01:20   좋아요 1 | URL
저도 밤마다 이북으로 읽다가 종이책 샀어요. 엄청 든든한 빽이 생긴 기분이예요.
 
사토 후쿠로의 단순한 제스처 드로잉 - 10%의 힘만으로 그리는 도형화·인체 드로잉 사토 후쿠로의 제스처 드로잉
사토 후쿠로 지음, 김재훈 옮김 / 잉크잼(잼스푼)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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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p.)저자소개

도쿄 가쓰시카 출신으로, 1982년 1월 18일생입니다.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했고, 그해 일러스트레이터 겸 만화가로 독립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이바라키 공업고등전문학교를 3학년 때 중퇴한 후에 총무 사무직, 공장 근무직, IT 관련 영업직, 앤티크 가구 창고 관리직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죠.


2021년 4월부터 교토 예술대학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며 온라인, 오프라인 강좌를 통해 학생부터 프로까지 제스처 드로잉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 코스도 담당하고 있죠. 또한 제스처 드로잉과 함께 '그림으로 표현하기'를 중심으로 각종 테마의 세미나를 종종 개최하면서, 다양한 형태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법과 관련한 정보도 전하고 있답니다.


좋아하는 건 곤충으로, 특히 하늘소를 좋아합니다. 식충식물, 광석, 열대식물 등 식물 전반에 흥미가 있죠. 손에 굳은살이 있는 사람을 동경합니다. 저는 굳은살이 전혀 생기지 않거든요. 


♥나와 공통점 세 가지 발견

1. 개띠

2. 사무직, 영업직, 관리직.. 다양한 직업을 거침

3. 손에 굳은살이 있는 사람을 동경함


기념으로 책 구입.

흐흐흐.

책을 사다가,

굿즈를 사다가,

굿즈를 갖고 싶어 책을 사다가,

다시 책을 산다.

굿즈용 책을 산다.

오늘의 통찰 모먼트

책=굿즈

굿즈 중의 굿즈

책 책 책





내 안의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소중히 여겨보세요. - P8

-사람을 그려봤어!
-이야, 죽이네!
-이번엔 이 사람의 움직임과 감정이 궁금한데?
-움직인다고? 감정이라고?
-그래, 정했다! 나는 너를 웃게 해줄거야!

‘흐믓해한다‘
‘기뻐한다‘
‘지쳐 보인다‘
‘집중하고 있다‘
이런 사람을 발견한다면 잘 그릴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을 보고 느낀 인상을 ‘어떻게 해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끄적여 보세요. - P9

ㆍ뉘앙스
ㆍ분위기
ㆍ현장감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반대로 말하자면 그림이 아니고선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 P10

비주얼: 시각적 요소로
스토리: 이야기를
텔링: 말한다 - P11

8가지 공부법
제스처 드로잉
카페 스케치
필름 스터디
풍경 스케치
자료를 참고해 만든 단편
히어로 포즈
25가지 표정 챌린지
스토리보드
... 모든 드로잉 방법의 기본에는 제스처 드로잉의 원리가 깔려 있습니다. - P14

제스처 드로잉이란?
제스처 드로잉에는 다양한 정의와 방법론이 있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죠.
ㆍ사람의 전신을 러프로 그린다.
ㆍ짧은 시간에 잡아낸다.
ㆍ선화로 표현한다.

제 나름대로 이해한 내용을 적어 보자면,
제스처 드로잉이란 ‘동작과 감정을 그래 내는 아이디어 스케치‘입니다.
또한 제스처 드로잉은 여행과 비슷합니다.
그려나가는 동안 탐색과 발견을 즐기는 여행이죠.
솔직히 말하자면, 단번에 이해하거나 내 것으로 만들려는 마음보다는 느긋하게 즐겼으면 좋겠어요. - P16

제스처 드로잉을 계속하면 뭐가 좋을까?
① 전신 그리기가 당연해진다!
② 러프를 빠르게 그릴 수 있다! 5분 안에도 가능해!
③ 다시 그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④ 그림의 허들이 낮아진다! 어디서든 그릴 수 있어!
⑤ 인상을 포착하는 습관이 생긴다! 위화감 없이 전달할 수 있으면 돼!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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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1. 병원
학살자가 죽은 날 학살자 시체가 간 곳
나 정신과 치료 예약한 날 치료실 의사 앞

장소2. 집
‘일기 쓰기‘ 검색 ‘연희글방스튜디오‘ 발견

장소3. 연희글방스튜디오
연희동 2층 양옥


장소4. 일기라고 쓰고 기억이라고 읽는다. 
기억 속으로
어린 시절로
70년대로
80년대로
결국 과거는 시간 개념이 아니라 장소 개념이다.
시간 개념으로는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지만
장소 개념으로는 언제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기어코 기억해내려는 노력, 애쓰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타임머신




요일마다 소설창작교실, 시창작교실, 비평쓰기교실, 에세이쓰기교실 등이 열렸는데 그중 놀랍게도 일기쓰기교실이 있었다. 누가 일기 쓰는 방법을 돈을 내면서까지 배울까, - P16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 P16

자서전은 뒤늦게 쓴 일기의 총합이다 - P21

헤어지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기록하세요. 어떤 수치심도 글로 옮기면 견딜 만해집니다. - P23

우산을 사 들고 온 날부터 시옷은 어서 비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 P24

엄마는 급한 대로 옆집에서 우산을 빌려 오기도 했고 대나무 살에 얇은 파란색 비닐을 씌운 우산을 사다주기도 했다.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파란 비닐은 순식간에 찢어졌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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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진정한 관점이 없는 게 문제임을 이해했다. - P7

《빌리지 보이스》에서 일할 때 나의 관점은 타고난 논쟁가의 후예였는데, 그저 관점을 하나 ‘가지기만‘ 해도 정말로 할 말이 있을 때와 단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종이 위에 검은 점을 옮기고 있을 때를 진지하게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빌리지 보이스》를 떠나 공개적이고 비판적인 글쓰기에서 물러나면서부터 다른 곳에서 내 관점을 찾아야 했다. 나는 에세이와 회고록, 서평을 쓰기 시작했고 눈앞의 소재에서 구출되기를 기다리는 귀중한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할 준비가 된 비대리자 페르소나의 관점에 점점 더 주목하게 되었다 - P9

소재 속으로 들어가면서 읽으면 생생한 활력을 주지만 소재로부터 거리를 두고 읽으면 단연 더 큰 보람을 안겨준다는 힘겹게 얻은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비평 역량을 다듬어온 어느 작가의......

2020년 뉴욕
비비언 고닉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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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 조지 손더스의 쓰기를 위한 읽기 수업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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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 바이 스텝이다. 


건물 짓기가 그렇고

이야기 짓기가 그렇다.

공정을 건너뛰었다가는 대번에 부실이다.


스텝 바이 스텝

우우 베이베~


비평은 불가해하고 신비한 과정이 아니다. 그냥 a.우리 자신이 순간순간 어떤 예술 작품에 반응하는 데 주목하고, b.그 반응을 표현하는 방식이 나아지면 되는 일이다. - P102

나는 학생들에게 이 과정이 우리에게 힘을 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 P102

우리 정신의 깊고 정직한 부분은 읽고 쓰기에 의해 날카롭게 다듬어진다. - P102

아내 소냐의 일기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집에서는 도덕과 윤리의 거인이라고 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그는 나에게 모든 걸 떠넘긴다. 예외 없이 모든 걸. 자식, 재산 관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사무, 주택, 출판사. 그러고는 내가 그 모든 일로 손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나를 경멸하고 자신의 이기심 속으로 물러나 쉴 새 없이 나에 대해 불평하고ㆍㆍㆍ산책을 가고 말을 타러 가고 글을 조금 쓰고 어디든 마음대로 가고 가족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ㆍㆍㆍ. 그의 전기 작가들은 그가 짐꾼을 위해 물을 기러 갔다고 말하겠지만, 그가 자기 아내에게 한순간의 휴식도 주지 않고 병든 자식에게 물 한 방울 가져다주지 않은것, 35년 동안 그가 단 5분도 내 머리맡에 앉은 적이 없고 내가 쉬거나 밤새 자거나 산책하거나 그냥 기운을 차리려고 잠시 가만히 있는 것도 허락한 적이 없다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 P345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소설가는 누구의 대변인도 아닐뿐더러 자기 관념의 대변인도 아니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의 초고를 썼을 때 안나는 매우 인정 없는 여자였고 그녀의 비극적 종말은 전적으로 합당하고 정당회될 만한 것이었다. 이 소설의 최종본은 초고와 사뭇 다르다. 하지만 나는 톨스토이가 그사이에 도덕관념을 수정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의 도덕적 신념의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내가 소설의 지혜라고 부르고 싶은 것에 귀를 기울였다. 모든 진정한 소설가는 그 개인을 넘어서는 지혜를 찾아 귀를 기울이고, 그래서 위대한 소설은 늘 그것을 쓴 사람보다 조금 더 똑똑하다. 자기 책보다 똑똑한 소설가는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 P346

쿤데라가 말하듯이 작가는 기술적 수단에 의해 "그 개인을 넘어서는 지혜‘에 자신을 열어놓는다. 그것이 바로 ‘기예‘이며, 우리 내부에 있는 개인을 넘어서는 지혜에 자신을 열어놓는 방법이다. - P346

우리가 여기에서 톨스토이를 도덕과 윤리의 거인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기법(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동하기)과 결합한 자신감이다. 톨스토이는 무엇에 자신감을 가졌을까? 사람들이 자신과 다르기보다는 비슷하다는 것. 자신에게는 내면의 바실리, 내면의 나이 든 주인, 내면의 페트루시카, 내면의 니키타가 있다는 것. - P349

〈주인과 하인〉은 우리가 보통 대중오락물에서 찾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를 영화적 장점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이 작품은 참혹하고, 위험성이 높고, 우리는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고 싶다. 마지막에는 누가 죽는지 보려고 읽고 있다. 인정하자, 어떤 이야기는 의무감에서 읽는다. 평범한 지역 박물관을 구경하듯,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지만 사실 관심 없는 것들을 주목해서 본다. 그런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그냥 그걸 읽는다. 그것은 계속 우리가 의무적으로 해독하는 일련의 단어가 된다. 그것은 작가가 추는 영리한 춤이고, 우리는 예의 바르게 견딘다. 그러나 〈주인과 하인〉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살기 시작한다. 언어는 사라지고, 우리는 어느새 단어 선택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인물이 내리는 결정과 우리가 실제 삶에서 그간 내려온 결정, 또는 언젠가 내려야 할지도 모르는 결정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 P351

체호프는 건강이 나빴고(그는 마흔넷에 결핵으로 죽었다) 가족은 화목했지만 궁핍했다. 그는 젊어서 유명해진 탓에 사람들이 이런저런 요청으로 계속 그를 귀찮게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드러운 사람이었고 살아 있음을 기뻐하는 듯했으며 친절하려고 노력했다. ㆍㆍㆍ그는 늘 즉석에서 관대함을 보여주며 짧고 부산한 삶을 살았다. 자신에게 오는 원고는 무엇이든 읽고 논평했으며, 궁핍한 사람을 모두 무료로 치료해 주었고, 러시아 전역의 병원과 학교에 기부를 했는데 그중 다수가 오늘날에도 운영되고 있다.
세상에 대한 이런 애정은 그의 이야기에서 끊임없는 재검토 상태라는 형식을 띤다(확실한가? 정말 그럴까? 내가 기존의 의견 때문에 뭔가 빼먹는 걸까?). 그에게는 재고의 재능이 있다. 재고는 어렵다. 용기가 필요하다. 늘 똑같은 사람, 얼마 전에 해답에 이르렀고 그것을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 되는 안락을 거부해야 한다. 다시 말해 늘 열려 있어야 한다(자신만만한 - P530

뉴에이지 방식으로 열려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현실에서 무시무시한 삶과 마주하면서 실행에 옮기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는 체호프가 계속 의례처럼 모든 결론을 의심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위로를 받는다. 재고해도 괜찮다. 그것은 고상하며 심지어 거룩한 일이다. 그럴 수 있다. 우리는 재고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그가 자신의 작품에 남긴 사례 때문인데, 그러므로 체호프의 이야기는 훌륭하고 간략한 재고 기계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 P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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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1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1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