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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우즈 지음, 김안나 옮김 / 매직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현실같은 소설.
헷갈린다.
어디까지가 실제고 어디까지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실감나는 소설.
지금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건지섬으로 날아가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줄리엣과 도시가 결혼하여 키트와 함께 (어쩌면 키트의 동생들이 태어났을지도 모르지) 행복하게 살고, 이솔라는 섬에서 나는 갖가지 약초들을 캐다가 정체불명 약초를 끓여서 나름대로 확신에 찬 이름을 붙여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을것 같다. 어쩌면 파리로 갔던 레미가 건강을 회복하고 약속대로 건지섬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아.. 아멜리아 집 라즈베리를 따서 만든 파이와 차 한잔을 할 수 있다면!
하지만 오늘은 2008년 12월 19일이다.
1946년 9월 17일자 편지가 책에 실린 마지막 편지니까,
가만있자... 무려 62년 전 이야기가 되겠군.
설사 이 책의 인물들이 실제고 또 다 살아있다하더라도
키트조차 할머니가 되어있겠네...
그렇더라도, 나는 안다.
작가 메리 앤 셰퍼가 건지 섬에 살도록 만들어 놓은 이 모든 사람들을
건지 섬뿐 아니라, 우리나라 제주도, 울릉도, 강화도에서도 만나 볼 수 있다는 것을.
편지 쓰고 싶다
편지 읽고 싶다
편지 부치고 싶다
답장 받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싸움 걸고 싶다
도전 받고 싶다
맞서고 싶다
돕고 싶다
아... 우아하게 살고 싶다.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당연하다.
소설 곳곳에서 내 모습이 보일 뿐만 아니라, 내가 꿈꾸고 있던 모습까지 비추니 어떻게 빠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거울 앞에 선 기분이다. 마법의 거울. 처음엔 거울 앞에 서 있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서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책 후반부에 가서는 정신을 차리고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사실 결말은 좀 싱겁다. 책을 읽으면서 초반부에 너무 심한 감정이입을 겪다보니 기대치가 너무 가파르게 올라갔던게지.)
몇 년째 단골로 다니는 서점인데,
언제나 원하는 책은 물론이고,
생각지도 못했지만 사실은 원하고 있었던 책도 서너 권
덤으로 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24쪽)
몇 년 전, 서울 한복판에 있는 회사에 다닐 때, 도시의 복잡함을 못견뎌하는 나에게 유일한 위안은 '서점'이었다.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렸다. '언제나 원하는 책은 물론이고, 생각지도 못했지만 사실은 원하고 있었던 책도 서너 권 덤으로 찾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나에겐 종로 1가에 있는 영풍문고, 교보문고, 반디앤루니스였다. 이 문장을 만나자마자 단번에 나는 작가 메리 앤 세퍼에게 반하고 말았던 것인데... 아... 안타깝다. 이 책이 그녀의 데뷔작이자 유작이라니.
하지만 이상하게도
음식이 사람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섯 달 동안 늘 순무에다 가끔씩 연골 덩어리만 먹다 보니
제대로 된 고기를 먹고 싶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57쪽)
몇 년 전에, 턱을 다쳐서 음식을 씹을 수 없이 한달을 지낸 적이 있다. 며칠은 물, 한약, 음료수로 버티고, 며칠은 죽으로 버티고, 겨우 겨우 두부나 삶은 호박을 오물거리며 먹으며 버티던 그 때. 정말 입맛 잃고 살맛도 잃었던 기억이 난다. ‘이상하게도 음식이 사람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제대로 된 고기를 먹고 싶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라는 말도 뼈저리게 겪어서 안다. 고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저 아삭아삭한 느낌. 씹는 그 느낌을 느끼고 싶어서 얼마나 애태웠던가. 하하. 지난 일이니까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런 경험은 다시는 하고싶지 않다. 나는 지금도 턱관절을 의식하고 조심해서 사용하는 편이다.
저녁에 집에 왔을 때
당신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당신이 책으로 쓰고 싶은 주제를 찾아내는 데 행운이 함께 하길 빕니다.
(74쪽)
나도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다. 학교 수업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데 우체통에서 나를 기다리는 편지를 발견하는 기쁨, 그 편지를 들고 현관문을 들어서는 느낌, 편지 봉투를 뜯고 편지를 펼쳐 읽을 때의 설레임..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정말 좋은 일이지^^
어머나, 세상에, 세상에.
당신이 샬럿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의 자매인 앤 브론테에 대해 책을 썼군요.(99쪽)
이런 편지도. 어머나, 세상에, 세상에! 이런 호들갑을 떨어본 기억도 가물가물하네. 하지만 분명해. 분명 나도 이렇게 호들갑을 떨며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좋아라 웃어대던 때가 있었어. 그래 분명해. 지금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걸까? 음... 속상하다. 못할 이유가 뭔가. 지금 당장 편지 한 통을 써야겠다.
비록 줄리엣이
취향과 판단력, 잘못된 우선순위, 그리고
적절하지 못한 유머센스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훌륭한 자질이
한 가지는 있습니다.
정직하다는 겁니다.
만약 그녀가
당신들 문학회의 명예를 존중하겠다고 말했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더 이상은 드릴 말씀이 없군요.
벨라 톤튼 드림(87쪽)
만일 줄리엣이 뭘 하겠다고 말했다면,
그녀는 그것을 할 겁니다.
어떤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이먼 심플리스 드림(91쪽)
음..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해달라는 글을 부탁한다면, 그건 누굴까? 그가 누가 되었든, 이렇게 확신에 찬 소개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쎄.. 자신이 없군.
이 책은 이렇게 곳곳에서 나를 웃겼다가, 용기있게 했다가, 또 의기소침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주절거릴 수 있는 구절을 곳곳에서 만난다. 정말 한두군데가 아니다. 작가가 살아있다면 내 서툰 영어실력을 총동원해서 아마 그녀에게 팬레터를 썼을 것이다. 내 실력으로 안되면 동생한테 부탁하면 되고^^~
그럼 이 책을 읽고 어떤 교훈을 얻었냐고? 글쎄.. 뭐 그렇게 거창하게 얘기해야한다면.. 딱히 말하기는 어렵다. 이 책 주제가 뭔가도 말하기 어려운걸. 주제? 책.. 사랑.. 사람.. 전쟁.. 문학.. 독서.. 출판.. ㅋㅋㅋ 모두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저 사는 이야기다. 계속 되는 삶, 이어지는 삶. 계속해서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삶 말이다.
책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거짓말같이 눈 앞에 펼쳐지는 삶.
나 또는 우리 중 누군가의 삶.
섬이라는 공간적 배경과
전쟁이라는 시간적 배경 위에
사람들이 책을 읽고, 모임을 열고, 편지를 쓰고, 만나고,
일하고, 먹고, 사랑하고, 돌보고, 키우고, 자라고, 만들고, 떠나고, 돌아오고...
그런 모습이 그려지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처럼 맞장구치며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누구에게 이 책을 권하고 그와 같이 수다를 떨 수 있을까? 음... 학창시절에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던 그 친구라면? 결국 짝사랑으로 끝나버렸지만 끊임없이 쓰고 버리고 쓰고 버리고 했던 그 연애편지의 대상이 된 오빠라면? 한참 책읽는 재미를 알아가는 이팔청춘 나의 조카라면? 글쎄...
사적이고 비밀스런 모임의 회원을 물색하듯이, 그렇게 이 책을 권할 만한 사람을 물색하며 며칠을 보내는 것도 이 책을 읽고 난 뒤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 리뷰를 읽고 어느 한마디라도 당신에게 탁! 걸려든 단어나 문장이 있다면,
예를 들어 ‘서점’이라든지, 짝사랑, 연애편지, 친구, 모임... 같은 평범한 단어가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눈에 들어오는 분이 있다면,
이 책을 읽고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게 되리라~
즐거운 상상하면서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