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있는 책들 중에 제일 자주 펼치는 책들이 이렇게 두 권이다. 스트라우트의 다른 책, 이미 읽었지만 이 책 말고 다른 책을 읽어볼까 해서 『오, 윌리엄!』을 펼쳤는데, 사건, 사고가 다종다양하고 화해했던 윌리엄에 대한 원망이 생길 듯해서 안 되겠다, 얼른 후퇴했다.

맨날 소설 속 사람들 생각만 한다. 올리브와 애덤, 루시와 윌리엄. 하다하다 어제는 애덤과 윌리엄, 올리브와 루시 스펙 비교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두 사람이 서로 얼마나 비슷한지. 얼마나 멀고 가까운지.

  1. 여주와의 나이 차이 : 애덤(34세)과 올리브(26세) 8살 차이. 루시와 윌리엄 7살 차이.

  2.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박사과정 지원자인 올리브와 교수인 애덤. 학부생 2학년 루시와 티칭 조교 윌리엄.

  3. 여주의 가정 배경: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혼자 남겨진 올리브. 집을 떠나 먼 도시로 유학 와서 부모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루시.

흘러 흘러 나의 고민은 어디까지 가게 되었냐면. 그래서,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애덤은 윌리엄이 될 것인가. 윌리엄처럼 될 것인가... 까지 이르렀다. 그렇지 않겠지. 애덤은 윌리엄이 아니니깐, 윌리엄은...

윌리엄이 누나 로이스 부바와 재회한 이후에 루시와의 재결합에 속도가 붙었다는 점은 인상 깊다. 물론, 그 밤에 루시에게 공황장애가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내 추측에는 그렇다. 윌리엄과 루시의 관계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윌리엄의 어머니 캐서린이 살아있을 때, 윌리엄에게 루시는 아내였다. 윌리엄은 꼭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알아봤는데, 지독한 가난과 불행한 가정 환경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간 자신의 어머니와 꼭 닮은 루시와 결혼했다.











그리고 윌리엄이 여자들을 만나기 시작한 건, 그리고 조앤과 만나기 시작한 건 그의 어머니가 죽은 뒤부터였다 -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오, 윌리엄!』, 123쪽)


캐서린의 죽음 이후, 윌리엄은 바람을 피우며 여러 여자들을 동시에 만난다. 이제 윌리엄에게 루시는 아내라기보다는 어머니의 위치에 자리매김된다. 윌리엄은 어머니(루시)를 그 자리에 고정시키고 다른 여자, 아내가 될만한 다른 사람을 찾아다닌다. 루시(어머니)와 다른 사람, 모든 면에서 루시와 대조적인 사람, 조앤이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된다. 그리고 그 결혼은 파행으로 끝나고 만다.

세 번째 아내와의 결혼 생활 중, 한밤중에 찾아오는 캐서린의 환상 때문에 윌리엄은 괴로워한다. 평생을 자신에게만 올인하며 지극한 사랑으로 돌봐줬던 어머니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찾아올 때 그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잠들어 있는 (세 번째) 아내 옆에서 절망에 사로잡힌 그가 생각하는 대상은 바로 루시다. 환영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서의 존재. 그는 루시가 살아있다는 사실, 한밤중에라도 전화를 걸면 받을 거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다.

그래서, 세 번째 아내가 윌리엄을 떠난 이후, 팬데믹 상황에서 윌리엄이 루시를 코비드의 위협에서 비교적 안전한 바닷가의 외딴 마을로 데려간 것은 루시를 위한 것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루시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그곳에서 얼마나 머물러야 하는지도 모른 채 윌리엄을 따라나섰다. 예상치 못한 강제적 격리 상황, 뉴욕에서 온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을 표시하는 어떤 여자의 행동에 루시는 크게 상처받는다. 윌리엄은 그 일에 놀라지도, 루시를 위로하지도 않는다. 며칠이 지나, 루시는 다시 한번 그 상황에 대해 윌리엄에게 묻는다. 그 여자가 내게 소리를 지른 뒤에도 왜 자신에게 다정하지 않았느냐고. 윌리엄이 답한다.


"Lucy," he said. He said it with difficulty. "Lucy, yours is the life I wanted to save." He walked over toward me but he did not sit down. "My own life I care very little about these days, except I know the girls still depend on me, especially Bridget; she's still just a kid. But, Lucy, if you should die from this, it would" He shook his head with weariness. "I only wanted to save your life, and so what if some woman yelled at you." (『Lucy by the sea』, 56p)

나는 내 생명에 개의치 않는다고, 상관없다고. 내게 중요한 건 오로지 당신의 생존뿐이라고 윌리엄이 말한다. 사실 그걸 원하는 윌리엄은 루시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해 그걸 원한다. 자신의 평안한 마음을 위해 윌리엄은 루시가 안전하기를 바란다.

그의 바람은 이기적인 것일까. 자기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원한다는 것, 나를 위해 그녀를 원하다는 것, 그건 이기적인 일일까. 이기적인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마음에는 다른 면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평안은 그녀의 평안에 기인한다. 나의 안전은 그녀의 안전에 달려있다. 내 생존의 선결조건은 그녀의 생존이다. 나의 행복은 그녀가 행복한지에 달려있다.

어디까지가 나의 것인가. 어디까지가 나인가. 너의 평안이, 너의 안전이. 너의 생존과 너의 행복이 온전히 나의 것일 때,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너인가. 너와 나의 경계가 완벽하게 허물어지는 이 지점을, 이 순간을, 이 환상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서의 사랑. 사랑은 그렇게 움직한다. 그렇게 작동한다. 너의 것이 모두 나의 것이 되는 일. 나의 것을 너에게 짐 지우지 않으면서, 너의 것을, 너의 모든 것을 내가 끌어안는 일. 아니, 내가 너를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 안에, 네 속에 포함되는 일. 혹 내가 사라져 버리더라도. 나 자신을 찾을 수 없어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네게 속하는 일. 너를 '내 속에'가 아니라, 내가 '네 속에' 들어가는 일. 먼저, 스스로, 기꺼이. 내가 네게, 네게로 들어가는 일.

메인에서 윌리엄은 평생 그 존재조차 모르고 지냈던 이복누이 로이스와 마침내 재회한다. 윌리엄의 삶에 새롭게 등장한 누나는 그의 새로운 엄마가 된다. 누나 로이스가 엄마의 자리, 캐서린의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 루시는 다시 아내의 자리, 파트너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이제야 루시는, 다시 윌리엄의 그녀, 윌리엄의 그 사람이 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에 대한 이야기는 차마 쓰지 못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나의 일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좀 부끄럽다. 내 밑줄, 내 분홍 밑줄을 발견한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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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5-05-11 2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윌리엄이 루시를 어머니의 자리로 본능적으로 위치시켰다는 단발머리님의 해석. 제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라 너무 좋습니다.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구나.
저는 루시가 윌리엄을 사랑한건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자상하고 잘 돌봐주는 이상적인 오빠나 아빠의 역할을 윌리엄이 대신해 주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어요^^
그러니까 저 둘은 결국 서로에게 잘 맞는 사람이었던가...그래도 바람피는 윌리엄은 절래절래

단발머리 2025-05-12 12:21   좋아요 1 | URL
망고님 말씀에 저도 100% 동의합니다. 이상적인 오빠나 아빠의 역할을 윌리엄이 해 주죠. 20년 가까이 떨어져 살았는데도 사이즈를 기억하는 사람, 지나가면서 한 말을 기억하고 필요한 일을 해주는 사람....그런 사람 맞고요.
그래도 젊은 시절 윌리엄의 행동은 진짜 절래절래 하게 만드는, 징~한 면이 있지요.
저는 이 책 읽으면서 딱 한 쪽으로만 윌리엄을 놓아두고 싶었거든요. 좋아하던가, 싫어하던가 ㅋㅋㅋㅋㅋ 근데 좋았다 싫었다, 미웠다 괜찮았다 막 이래서 그 때, <오, 윌리엄!> 읽을 때 힘들었더랍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망고님과 윌리엄 이야기 나누니 너무 좋네요.

바람돌이 2025-05-11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남녀들이 배우자에게서 자신의 부모의 모습과 동일시하거나 아니면 정반대의 모습을 찾죠. 양쪽 다 저는 바람직한건 아닌 것 같더라구요. ㅎㅎ 거기서 벗어나는데서 우리가 정말로 어른이 되는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요. 그나저나 우리 스트라우트 여사의 다음 책에서는 루시와 윌리엄이 다시 합치는걸까요? 언제 번역이 되려나 손꼽아 기다립니다. ^^

단발머리 2025-05-13 14:01   좋아요 1 | URL
네, 바람돌이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배우자와 부모님을 동일시하는 것도 그 반대의 모습을 찾는 것도요. 그렇다면, 어떤 모습이 배우자와 건강하고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하는 걸까 했을 때, 그건 친구 사이에 가깝다고 생각하기는 하거든요. 낭만적 사랑이라는 요소가 생각보다는 작을 수 있구요.
지금 루시와 윌리엄은 그런 사이입니다. 어떻게 될지 제가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ㅋㅋㅋㅋ 그 과정이 엄청 흥미롭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네요^^

다락방 2025-05-12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몇년간 지속적으로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읽어왔고 그 후로 그렇게 읽는 책이 없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단발머리 님이 윌리엄과 애덤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읽으시는지 이렇게 페이퍼에 적어주셔서, 이런 면을 제가 보게되는게 참 좋아요. 음, 누군가 한 책을 애정하고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읽는다는거요. 거듭 읽고 거듭 생각해보면 한 번 읽었던 사람이 미처 보지 못했던것을 보게 되기도 하는것 같아요. 단발머리 님이 윌리엄에 대해 써주시는 글을 보노라면, 아 이런 해석되 가능하구나 싶거든요. 위에 망고님이 적어주신 것처럼 ‘어머니의 위치에 놓기‘ 같은 거요. 그런 한편 어느 한 책에-혹은 등장인물에-애정을 갖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좋은가요! 독서를 정말 즐기시는 것 같아서 제가 행복하네요.

그리고 저기 저 예감이요, 볶은양파맛 드셔보셨어요? 전 그거 박스로 사놓고 먹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05-13 14:07   좋아요 0 | URL
윌리엄과 애덤을 반복해서 읽은 일이 즐겁고 행복하기는 한데, 뭐랄까.... 제가 이 책들을 읽으면서 예상하고 기대하는 목표와는 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요. 저는 이 책의 언어, 구조, 표현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읽고 싶은데, 자꾸 윌리엄을 이해하고, 애덤이랑 따로 시간을 보내는 쪽으로 제가 읽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아...

고민스럽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계속 읽어가고 있습니다. 독서를 즐기고 마음껏 누리는 이 기쁨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저도 행복합니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수긍하는 그 느낌 있잖아요. 역시 책이 짱이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볶은양파맛 바로 검색 들어갑니다. 저희집에서는 치즈그라탕이 무조건 1순위인데 도전자 나섰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5-05-14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14 0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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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4 1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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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4 14: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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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4 14: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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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4 15: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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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4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버이날 1차 행사는 지난 토요일. 도련님네랑 다같이 모여서 식사하는데 큰조카 잠깐 자리 비운 사이, 얼른 일어나 작은 조카쪽으로 향했다.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도 벌써 내미는 손. 큰엄마가 봉투 많이 안 줬는데, 몸소 체득한 지혜로운 손길이여. **야, 올해가 마지막 어린이날이네. 어린이날 축하해, 이걸로 스벅 초코케익 사 먹어~ 네~~

어버이날 2차 행사는 이번 주 화요일. 엄마, 아빠랑 식사하는 시간. 먹느라 이야기하느라 너무 바쁘다. 많이 먹었는데도 금방 소화되는 신기한 순간.

어버이날 3차 행사는 오늘 오후.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바로 친정에 들러서 주차해 놓고, 엄마가 좋아하는 초코케익 사서 전달해 드리고. 엄마가 바로 저녁 준비하신다 하기에 시켜드린다 하니, 아빠가 다 싫다고 하신다. 교회 앞, 아빠가 좋아하는 중국집에서 시켜드린다 하니 그제야 오케이. 아빠, 엄마, 이모까지 식사 주문해 드리고 집으로 고고싱.

어버이날 4차 행사는 센베이 과자 사러 가기. 차 많이 막히는 날이라 오늘은 안 갔으면 했는데, M1이 기어코 오늘 가야 한다고 해서 따라나섰다. 아빠 2봉, 시어머니 2봉, 내 꺼 2봉. 시댁 찍고, 아빠한테도 전달 완료.

늦게 일어나는 대학생 아침 메뉴는 팟타이였다. 유튜브 동영상도 아니고 쇼츠 보면서 차리는 밥상. 숙주 씻으면서 2번, 아빠, 엄마한테 2번 불러드렸으니까, 오늘치 노래는 다 불렀다.


나 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오늘은 어버이날 우리들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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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5-05-09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제목이 귀엽습니다. 오늘은 어버이날 우리들 세상!! 우리도 당당히 불러봅시다!!

단발머리 2025-05-09 13:43   좋아요 1 | URL
전 진짜 목놓아 불렀는데 제가 부르는 거 맞나요ㅋㅋㅋㅋㅋ 독서괭님 어버이날 축하드려요~~ 어버이은혜 기립박수 드립니다. 🌸🌷🌹🌼💐
 















그저께 아침 메뉴는 연어 스테이크였는데, 아롱이가 싫다고 했다. 요리 못하는데 나름 곤조 같은데 있어서 소금을 많이 뿌리지 않는다. 소금을 뿌리긴 했지만, 조금 뿌려서 그런지 맛이 없다고 했다. 내가 먹어보니 괜찮은데... 나를 통째로 샅샅이 닮은 내 아들은 입이 짧고, 양이 적고, 까다롭고. 까다롭고,는 나 닮은 것 아니다. 나는 안 그런다.

『Lucy by the sea』와 『Oh, William!』에 비슷한 부분이 나온다.

두 딸 모두 에스텔이 요리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듣기만 해도 지겨웠다. 나는 요리를 좋아해 본 적이 결코 없었다. (『오, 윌리엄』, 85쪽)

"No offense taken," I assured him. I have never been interested in food. (『Lucy by the sea』, 39p)

나는 먹는 건 좋은데,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내 요리 실력은 신혼 때의 그 실력 그대로다. 아이들에게 조금 미안하기는 한데,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고. 그래도 둘 다 나보다 더 크게 자랐으니, 여기서 뭘 바라나, 그런 마음도 있다. 소울 푸드, 영혼의 양식, 집밥이 유행하는 때가 되면 그래도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는 한다. 나는 그런 엄마다. 맛있는 것을 해주지 않는 엄마, 먹고 싶은 맛있는 것을 만들어 주지 않는 엄마.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는 그런 엄마.


친구들의 책 선물이 도착할 때면 한 권씩, 때로는 두세 권씩 줄을 세워 사진을 찍어둔다. 곧 읽어버리리, 하는 결심은 국민의힘 단일화 과정처럼 이리저리 세파에 흔들려 새 책이 새 책에 밀리는 무색한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나는, 새로 생긴 집 앞 스벅에서 모닝 세트 먹을 때 행복한 사람이고, 그럴 때 <바닷가의 루시> 읽는 사람이다. 나는 나에 대해서 그만큼, 딱 그만큼 기대한다. 나 자신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나. 나는, 이런 나에 만족한다. 나는 한가로이 루시를, 윌리엄을, 루시와 윌리엄을 읽는 사람이다. 하지만, 책들 사이사이로 떠오르는 얼굴들을 생각하자면, 뭐랄까. 나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내 수준을 넘어설 때가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니깐, 한 친구는 이름도 처음 듣는 작가의 책을, 그것도 원서로 들이민다. 항상 안 어렵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한 친구는 여유로운 시간에 읽고픈 나의 최애 소설책을 들이민다. 급하게 읽을 필요는 없지만 급박하게 읽고 리뷰를 꼭 쓰라는 말을 더해서 말이다. 한 친구는 그 소설가의 책을 3권이나 읽고도 이름 외우기에 실패한 나를 다독이며 그의 단편집을 살포시 쥐여준다. 김애란의 새하얀 신작과 함께 말이다.


나는 한가하게, 여유롭게, 무상무념의 내가 되어, 루시를 따라다닌다. 챗지피티에게 윌리엄이 그렇게나 많이 바람피운 이유를 물어본다. 루시의 다른 이야기 중 뭐를 먼저 읽을까 고민한다. 하지만, 친구들이 보내준 예쁜 책들, 근사한 책들 앞에서 하염없이 흔들린다. 읽어야 하느니. 읽어야 하느니....


엄마로서의 기대를 짐짓 모른체하는 내가, 친구들의 기대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가능할 것인가, 이 일이. 나란한 책들 위를 깨끗한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는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잘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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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5-05-08 0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I have never been interested in food
이 표현 기억해 둬야겠어요. 저도 딱 그렇습니다!
요리는 그렇지만 책에 대해서는 저도 단발님께 기대합니다 으흐흐😘

단발머리 2025-05-09 08:37   좋아요 1 | URL
요리 기대 안 해주시고 ㅋㅋㅋㅋㅋㅋㅋ 책에 대해 기대해주시는 분, 독서괭님~~
좋으신 분, 고마우신 분~~~

다락방 2025-05-08 0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무드등은 언제나 어디에나 함께하네요?!

단발머리 2025-05-09 08:39   좋아요 0 | URL
알라딘 사은품 중에 저의 최애 탑3에 들어가는 무드등입니다. 고래가 똭~~~

책읽는나무 2025-05-08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버이날 선물을 가득 받으신 것 같아요.ㅋㅋㅋ
무드있는 독서 시간 되시겠군요?
근데 갑자기 무드등 켜놓고 윌리엄이 바람 핀 이유를 집요하게 묻고 계신 단발 님을 상상하니…ㅋㅋ
왜냐면 어제 전 호러물 조예은의 소설을 종일 들었었거든요. 그래서인지 그런 쪽으로 상상이 되네요.ㅋㅋㅋ
그나저나 우리집에도 입 짧고 먹는 양도 적고 더군다나 자꾸 끼니를 거르려는 막내딸 때문에 먹이는 것 때문에 좀 고민이긴 합니다. 애들 성인이 되면 다 잘 먹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더군요.
그래도 단발 님네 애들은 다들 키가 크다니 부럽네요. 저희 집 애들은 다들 작고 말라서 적게 먹여서 그런가? 늘 찜찜한 생각이 들게 만드는…

단발머리 2025-05-09 08:41   좋아요 1 | URL
무드등 켜놓고 채지피티에게 얼마나 집요하게 물었던지 ㅋㅋㅋㅋㅋㅋ 제가 로그인 안하고 이용해서 그런지 질문 3개 정도 받고 나면 이전 거를 다 잊어버리더라구요.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질문해야 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입 짧고 먹는 양도 적고 더군다나 자꾸 끼니를 거르려는 아가들은 정말......... 다 커서도 먹는 게 제일 걱정이죠. 저는 제가 워낙 솜씨가 없어서 저를 탓합니다만 책나무님댁은 맛있는 거 많던데.... 막내딸에게 제가 그러더라고 전하지는 말아 주시구요 ㅋㅋㅋㅋㅋ

수이 2025-05-09 07: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기쟁이 :)

단발머리 2025-05-09 08:39   좋아요 2 | URL
라니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설마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5-05-09 08:47   좋아요 2 | URL
인기쟁이라니요……… 겸손까지………… 💋

단발머리 2025-05-09 08:48   좋아요 2 | URL
헤헤헤! 인기쟁이에 겸손까지 ㅋㅋㅋㅋㅋ다 이루었다! 😘😍🥰

수이 2025-05-09 09:01   좋아요 2 | URL
선물받은 책을 다 읽어야 ㅋㅋㅋㅋㅋㅋ 🥵

단발머리 2025-05-09 09:20   좋아요 1 | URL
바쁘다 바뻨ㅋㅋㅋㅋㅋ🏃🏃‍♀️🏃‍♂️
 














'무엇이 나다' 시리즈가 한참 유행했을 때가 있었다.

내가 먹는 것이 나다.

내가 사는 것이 나다.

내가 읽는 것이 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곧, 나다.

문제의 핵심은 '어디까지가 나인가'에 있다. 어디까지 나인가. 나의 몸이 나인가. 나의 생각이 나인가. 나의 생각과 감정과 판단을 육체로서의 '나', 나의 몸과 구별할 수 있는가. 나의 생각과 감정, 판단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의 이 몸은 무엇인가. 시간과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 껍데기, 이 허울은 무엇인가. 그때,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남는 '나'는 무엇인가 혹은 누구인가.


'몸'을 가시적인 형태로 극도로 제한했던 1940년대 영국인들의 '몸'에 대한 생각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네 살까지 지극히 평범한 영국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던 토니 벨은 전쟁 통에 부모가 죽고, 고모에게 맡겨졌지만 고모의 무관심으로 방기되어 은데벨레 부족과 6년 동안 살게 된다. 빨리 달리는 법을 배우고 강에서 노는 법을 배웠던 토니는 동물처럼 그물에 잡혀 친척들에게 돌아온다. 영국인 아기에서 은데벨레 부족의 소년이 되었던 토니는 다시 영국의 사춘기 소년이 되어야 했다. 목욕, 침대, 식사까지 모든 것이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으나, 가장 곤욕스러운 일 중에 하나는 옷을 입는 일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토니는 바로 옷을 벗고 맨몸으로 생활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자연스러웠다.

그가 느끼는 부조화와 육체적 불편은 우리가 몸에 대해 정상적이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신체적 특징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작용했던 개인적 환경의 결과임을 보여준다.(72쪽)

토니에게 '몸'은 그 위에 적당한 옷을 걸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타내기 위한 매개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연 속에서 재빠르게 적응하여 생존을 유리하게 하기 위한 원재료 그 자체였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옷은 사회적 계급과 역할의 표시였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도 복식이 그런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고, 어찌 보면 훨씬 더 정교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복식의 역할이 훨씬 더 직접적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옷을 보고 상대방의 계급을 예상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계급에 맞춰 옷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때, 특정한 옷을 걸치는 '몸'은 신분과 계급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식이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보여지는 몸 자체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강화되었다. 비싼 장신구와 모자, 겹겹의 속옷으로 옷 속 깊숙이 감추어졌던 몸은 이제 가벼운 운동화, 운동복, 일상복과 일체를 이루었다.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의 의상도 무언가를 가리기보다는 드러내기 위한 옷들이 다수를 이루게 되었다.

문제는 획일화에 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반복되고 재생산되는 이미지는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남성과 여성의 몸을 상정하고 그러한 몸의 아름다움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글로벌화의 영향으로 완벽한 신체는 단 하나의 표준만을 지향하는데, 이는 곧 백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신체를 의미한다. 특히 여성의 신체에 대한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왜곡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 강한 힘으로 초등학생들을, 20대 여성들을, 중년 여성들을, 노년의 여성들을 압박하고 있다. 그래서 탈코르셋은 실천 자체가 혁명이다.











일상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꾸밈의 중지가 사회운동이 되는 까닭이다. 내가 꾸밈을 중지한 이후에 비로소 사회가 여성 개인에게 부여한 기본값을 인식하고 그것의 재조정을 개인적으로 경험했듯,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의 얼굴에 부여된 기본값의 사회적 재조정을 꾀한다. (<탈코르셋>, 43쪽)

다만, 여기에 한 가지를 보태고 싶다. 꾸밈 중지는 중요한 선택이고, 사회운동의 하나로 이해되고 마땅히 실천되어야 하지만,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선택을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나는 19년을 전업주부로 살았다. 3년 전, 전에 내가 일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3년 전, 내 고용 여부를 결정한 사람은 나보다 5살이 어렸다. 2년 전 내 고용 여부를 결정한 사람은 나보다 3살이 어렸고, 올해 내 고용 여부를 결정한 사람은 나보다 10살 정도 어려 보였다. 그러니깐, 19년을 사회 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말 그대로' 편한 밥 먹고살았던 나는, 새로운 조직에 '뽑힐 만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경력 사항에 적을 것이 없어 2004년에 퇴사한 회사의 상호명과 내가 일했던 부서명을 적었다.

나는, 나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직무 연결성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퇴사했던 게 19년 전이니 그 서류는 나를 보여주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다. 내가 지원한 업종에서는 사교성과 친화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면접 상황에서 자신이 그러하다고 어필하지 않는 지원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고용될 만큼, 선택을 받을 만큼의 특정 요소가 내게는 필요했다. 서류로 보여질 수 없는 것, 경력조차 일천한 상황에서 나는, 내 몸을 넘어선 나 자신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며칠 새에 예뻐질 수는 없는 노릇이고(아시는 분 계시면, 좀 알려주시고요~) 며칠 만에 호감형의 인물이 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고용되기 위해서, 뽑히기 위해서,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책읽기 시간에 내가 고른 책은 마침 이 주제와 딱 맞는다. 자신의 몸에 대한 소중함을 깨우치려는 교훈적 목적이 눈에 띄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이 페이지가 좋았다. 이 페이지를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정하고,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찬찬히 소리 내어 읽었다.


슬플 때 나는 예전에 읽었던 재미있는 책을 다시 꺼내듭니다.



세상에, 얘들아. 선생님도 이렇게 하거든. 슬플 때, 우울할 때, 책을 읽거든. 좋아하는 책을 혼자 읽거든. 이걸, 이 사람도 알고 있네. 신기하다, 진짜. 이게 나를 바로 알고 있다는 뜻이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 내가 슬플 때 그 슬픔을 이길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 말이야.

그게 바로 나를 제대로 알고 있다는 뜻이야.

리쫄라띠와 갈레제의 발견에 따르면, 뇌의 관점에서는 관찰과 행동이 거의 같은 일이다. 뇌는 타고난 이입과 모방 능력을 갖고 있다. 뇌는 눈으로 본 것을 동일한 행동으로해석한다. 그럼으로써 아직 완전히 익히지 못한 활동을 서서히 흡수하고,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준비해나간다. - P79

사람은 남들에게 비치는 제 몸과 마음을 보면서 자신이 정신적·육체적으로 누구인지를 배워간다. - P82

그들의 연구가 다양한 방식으로 암시한 내용을 이어받아, 과학자들은 지난 20여년간 신체접촉을 점점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 신체접촉은 이제 인간의 심리적 안녕에 핵심적인 요소로 인정된다. 신체접촉은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경험이다. - P87

사람이 신체적 감각을 발달시키는 데는 어릴 때 경험한 신체접촉과 그 어머니가(혹은 다른 보호자가) 스스로 품었던 육체적 자의식이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몸은 DNA의 청사진이 충실히 이행된 결과 이상의 무엇이다. - P89

환자들과 상담하다보면, 들고양이 감각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느낌이 내 몸에 깃들 때가 있다. 나는 그 느낌에 꽤 익숙하다. 그것은 상담중인 환자가 스스로는 쉽게 느끼지 못하는 모종의 육체적 상태를 무의식중에 내게 전달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모든 심리치료사들은 환자의 느낌을 읽어내는 능력을 활용한다. 그것은 환자의 경험 중에서 반드시 다뤄야 할 부분을 지목해주는 단서나 마찬가지인데, 치료사가 아닌 사람이 보기에는 기이할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뿐이다. - P107

이와 같이 우리 몸이 다뤄지는 방식에 대한 수많은 변수들이 양육의 물리적 환경으로서 우리 몸을 형성한다. 사전에 주어진 몸이란 없다.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모든 몸에는 그 가족의 몸 이야기가 남긴 은밀한 각인이 찍혀 있다. - P119

성형수술을 갈망하는사람들은 그저 허영기가 있는 것뿐일까? 그것은 너무 안일한 답이다. 나는 이처럼 다양한 몸의 표현방식들을 차라리 결여된 몸들의 위기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몸에 대한 욕망과 갈망을 보여주는 증거다. 감각들이 제멋대로 흐트러져서 반드시 관리해야만 하는 몸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 몸, 만질 수 있고 만져지는 몸, 안정된 몸을 원한다는 증거다. - P145

이처럼 섹슈얼리티에 대한 시각적 대상화, 그리고 섹스를 개인적 자산이나 소모품처럼 여기는 현상은 몸을 어마어마한 무게로 짓누르고 있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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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5-05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드디어 완독하신 겁니까. 축하합니다! 이 책 참 좋았지요? 생각과 다른 내용이 나오는데(인용하신 토니의 이야기처럼요) 그 점도 참 좋았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탈코르셋 이야기를 할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보다 더 몸에 대한 확장된 생각들이라 좋았어요. 고생하셨습니다!!

단발머리 2025-05-06 09:01   좋아요 0 | URL
매달 이렇게 다음달로 넘어가네요. 이번달에는 야무지게 기한 맞춰보려 합니다ㅋㅋㅋㅋㅋ

저도 탈코르셋 예상했는데, 더 넓고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져서 참 좋았어요. 상담자와 치료자 사이의 역전이도 그랬고, 성장기 부모와 자녀 사이의 일이 자녀의 뇌에 미치는 영향도 흥미로웠구요.
이렇게 또 한 권을 마쳤네요. 축하 감사합니다, 다락방님! 😘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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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6일은 미국 국민들뿐만 아니라, 혼돈의 상황을 화면으로 접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날로 기억될 것이다. 제46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인증하기 위한 117차 미국 의회를 저지하기 위해 트럼프 지지자들이 국회 의사당에 난입, 국회 의사당을 짓밟았다. 많은 의원들의 사무실이 폭도들의 침략으로 약탈, 파괴되었고, 트럼프에 반대하던 민주당과 공화당의 유명 정치인들이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하지만, 폭력 사태 이후에도 공화당은 이들과 거리를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옹호했고, 공화당은 트럼프를 중심으로 더 결속하는 양상을 보였다.

2021년 1월 6일, 전대미문의 폭력 사태는 1934년 2월 6일,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폭도들의 국회 의사당 습격 사건과 유사하다.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으로 뭉쳐 있던 재향군인회, 우파 민병대, 청년 애국단 등의 폭도들은 국회 의사당을 부수고, 의원들을 협박했다. 많은 프랑스 정치인들이 2월 6일의 폭동에 분노를 표하며, 거세게 반발했지만, 주류 보수주의자들 일부가 폭력 사건을 옹호하고, 폭도들을 공화국을 구하려 했던 영웅적인 애국자라고 칭송했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이런 폭도들을 옹호하는 정치인들이다. 1934년 2월 6일 폭동 직후, 그리고 2021년 1월 6일 폭동 이후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의 구별이 가능해졌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묵인, 방조하고, 그들의 폭력 행위에 동조했다. 주류 중도 우파 정당을 표방했던 공화당 의원들 다수가 트럼프의 등장 이후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로 탈바꿈하는 과정은 공화당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암시가 되고 말았다.

4년의 공백기를 보내고 워싱턴으로 돌아온 트럼프의 공화당은 현재의 정치 제도를 백분 활용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확장하고 있다. '정치적 소수가 계속해서 거대 다수를 이기거나 정책을 강요하는(247쪽)' 상황은 미국의 독특한 정치 제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 가장 많은 국민의 지지를 얻은 정당이 승리해야 한다. 하지만, 건국 당시 지역 엘리트 사이의 이해관계에 근거해 인구가 적은 주들은 여러 가지 이익을 보장받았고, 인구수가 적은 주와 많은 주 사이의 불균형, 그동안 진행되어온 도시화로 인해 현재는 인구수가 적은 주들이 지나치게 커진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소수의 지배를 떠받치는 중요한 요소로는 선거인단 제도를 꼽을 수 있다. 선거인단 제도의 '승자 독식 시스템'과 '작은 주 편향'으로 인해, 2016년 선거에서 미국의 민주당은 보통선거에서 더 많은 수를 득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인단 투표에서 패배함으로써 공화당에게 승리를 빼앗겼다. 패자가 이긴 것이다(254쪽). 소수 지배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요소로는 '상원 제도'를 들 수 있다. 민주당은 1996~2002년 전국 보통선거에서 과반의 표를 얻었지만, 인구수가 적은 주, 시골의 작은 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공화당의 상원 장악을 제지하지 못했다. 이는 미국의 상원이 미국 인구 다수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소수의 지지를 받은 정당이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는 비합리적인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통선거에서 더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던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들이 다수 여론과는 반대되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사람들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을 지배하는 상태가 강화되었다.

이처럼 소수에 의한 다수 지배가 가능했던 것은 건국과 이후의 재건 시대 동안 '다수결주의와 반다수결주의'의 대립 상황에서 소수의 권리가 지나치게 확대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숫자의 게임(248쪽)이다. 다수의 지지를 얻은 쪽이 더 많은 정치권력을 획득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이 가능하다. 건국 당시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더 민주적인 헌법 체계를 갖췄던 미국의 헌법에서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와는 커다란 차이점을 보인다. 그 핵심은 '3/5 타협안'과 '상원 시스템'이다. 즉, 노예제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남부 주들의 의회 의석이 확대되고, 모든 주가 정치 시스템 안에서 평등한 대표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 국민들의 지지와 투표권 행사가 정치 현장에 투명하게 반영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많은 수의 미국 건국자들은 주들 간 평등한 대표라는 개념의 모순을 인지하고 있었다. 주를 구성하는 제일 중요한 요소가 '영토가 아니라 인간'이라 주장했던 해밀턴은 모든 주에게 평등한 대표권을 부여하는 방식이 '다수에 의한 지배'를 무력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1세기 현재에도, 세계 최강국 미국에서 그의 염려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어떤 현실이 우리의 현재인가. 국민의 손으로 선출되어 임기가 보장된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내란 또는 외환의 경우 합법적인 절차인 국회의 탄핵소추,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통해 탄핵이 가능하다. 2024년 12월 3일. 불법적인 계엄령 선포, 군대와 경찰을 동원한 국회 봉쇄와 야권 주요 인사 및 언론인들에 대한 암살 및 살해를 지시했던 대통령과 일부 국무의원의 행태에 대해 여당은 '줄탄핵에 대한 경고성 계엄'일뿐이라며 애써 그들을 비호했다.

꺼질 듯한 민주주의의 불꽃을 다시 살려낸 건 시민들이었다. 잠옷에 패딩, 슬리퍼를 신고 집을 뛰쳐나가 계엄군과 몸싸움을 벌였던 사람들. 패딩에 방석, 얇은 은박지를 덮어쓰고 '내란 종식'을 외쳤던 사람들. 멀리 살고 있어 집회 현장에 가지 못해 미안하다며 김밥을, 커피를, 국밥을 선결제한 사람들. 아이돌 콘서트장에서 흔들던 형형색의 응원봉을 흔들며, '다시 만날 세계'를 부르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 나라의 국민이고, 이 나라의 주인이다. 민주주의에 의한 지배, 다수에 의한 민주적 통치가 시민들의 연대를 통해 가능하리라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어둠을 비추는 촛불 하나 하나가 정권 교체와 정치 세력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투표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국민 주권과 헌법 수호 정신이 광장의 구호를 넘어 우리의 현실이라 꿈꿀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 다수의 대의가, 더 많은 국민의 뜻이 선거와 투표라는 정치 참여를 통해 반영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어떻게 오는가. 거들먹거리는 정치인들의 알맹이 없는 합의와 법조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한가한 말장난, 자신의 이익에만 함몰되어 있는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서 오직 않는다. 민주주의는 사람에게서 온다. 연대하는 시민들의 응집된 힘을 통해서 온다. 국민, 오직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통해서만 온다. 추운 겨울의 매선 바람을 밀어내는 새봄의 따뜻한 햇살처럼 온다. 환하게 온다. 어김없이 온다. 그렇게 온다, 우리에게로. K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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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6 16: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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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6 17: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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