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와 역사의 정치 딕테 시리즈 3
조앤 스콧 지음, 정지영 외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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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대로 읽었기 때문에 옮긴이 후기를 맨 마지막에 읽었는데, 먼저 읽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별의 문제를 역사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성별 체계와 이를 둘러싼 지식의 구조 자체의 변화 과정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380쪽)

남성과 여성의 노동 정체성 확립 과정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대부분 봉제사였던 여성 노동자들의 요구는 명확히 '임금 소득'이었던데 반해, 남성 노동자들, 남성복 재봉사들의 요구는 숙련 기술에 기반한 집단적 정체성(195쪽)의 확정이 중요했다. 이는 단순 임금노동자, 즉 여성 봉제사들을 배제하는 것을 기반으로 했다.

가정에서 일하는 경우에라도 남성들은 노동자로 호명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여성들의 가정 내 노동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에 더해 남성 임금과 여성 임금에는 차이가 존재했는데, 남성들에게 노동력의 대가로 지불되는 '가격'에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남성의 임금에는 자신을 부양할 수 없는 '태생적 의존자'인 아이와 아내의 생계비가 포함(254쪽)되어 있었지만, 여성의 임금은 생활에 턱없이 부족한 정도여서 다른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미혼 여성은 도덕적 비난과 성적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일하는' 여성에 대한 고의적인 저임금 정책 때문이었다.

여성의 가정 내 부불 노동, 재생산 노동은 임금이 지급되지 않은 상태로 '무한 공급'될 것을 요청받으며, 사회에서 일하는 경우에는 저임금의 현실에 내몰리기 쉬웠다. 이제 여성도 남성처럼 고소득의 일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남성들이 '사적 영역'으로 과감하게 진출하지 않는 한, 여성의 사회 진출은 이중, 삼중 노동을 의미할 뿐이다.

'여성'이 당당한 '노동자'가 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와중에, 나는 여러 번, 아주 여러 번 '일'에 대해, '노동'에 대해 생각했다.

여성은 '사실상 노동자'다. 인류 역사 내내 여성들은 일해 왔다. 남성들은 일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여성도 남성만큼 일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성의 가정 내 노동은 '임금'이 지급되지 않았기에 '일'로 인정받지 못했고, 여성이 '사회'에서 일하는 것에는 역사적으로 많은 제약이 따랐다. 이제 여성도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사적인 영역은 여성의 몫으로 남아있어 여성에게는 오히려 부담이 더 늘어난 형국이다.

'일'에 대한 낭만화를 거부해야 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마리아 달라 코스타의 말을 빌려보자.

우리가 원하는 건 공동 급식소도, 그와 같은 종류의 놀이 시설이나 어린이집도 아니라는 점을 그들이 알기 바란다. 우리는 공동 급식소, 어린이집, 세탁기, 식기세척기를 원하지만, 몇몇 사람들과 원할 때 방해받지 않고 식사할 수 있는 선택권, 아이·노인·환자와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선택권도 갖고 싶다.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건, 노동을 줄이는 것을 뜻한다. 아이·노인·환자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이들을 잠시 맡겨둔 차고로 뛰어가 잠깐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가장 먼저 배제 당한 우리 여성들이 투쟁을 주도하여 다른 모든 배제 당한 이들, 즉 아이, 노인, 환자가 사회적 부를 재점유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페미니즘의 투쟁』, 45쪽)

우리가 '일'이라고 말하는 것에 다른 정의를 포함시킨다면, 돈을 버는 것만이 '일'이 아니고, '일', '노동'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존재 이유가 '생산성'에 있다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 로봇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물리적' 일들을 훨씬 더 빠르게,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다. 로봇은 이미 인간이 하던 노동의 상당 부분을 대신하고 있으며, 대체 가능한 노동을 제공하는 인간은 앞으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이 아닌, 다른 인간상을 그려봐야 한다. 이를테면.


노래하는 인간.

춤추는 인간.

이야기하는 인간.

말하는 인간.

듣는 인간.

돌보는 인간.

책 읽는 인간.

소리 내어 책 읽는 인간.

그리고

노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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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5-03-3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 맞은듯 마지막 문장 🙃 억

단발머리 2025-03-31 17:5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그래여? 다른 인간상을 그려보자고요! ☺️😆🤗

수이 2025-03-31 18:20   좋아요 1 | URL
노래보단 춤으로 가볼까 했으나 고관절이…… 🥺

단발머리 2025-03-31 19:41   좋아요 0 | URL
춤 괜찮죠~~ 각종 댄스 환영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을 읽으면서 같이 읽으면 좋은 책/참고할 만한 책은『가부장제와 정치경제학』시리즈와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이다.

이 책에서는 젠더가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설명하는데, '누가 노동자인가'라는 부분에서 차티스트들의 인식을 지적한 부분이 눈에 띈다.

차티스트들은 개인의 노동 혹은 노동력의 산물이 그 자체로 자산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산을 개인의 정치적 권리 향유와 관련지은 로크 이론의 한 측면을 발전시켰다. 그러면서 차티스트들은 이미 선거권을 획득한 이들과 자신들 사이의 또 다른 유사성 - 그들 모두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122쪽)

남성 자산 소유자가 중심이 된 차티스트 운동이 제시한 계급에 대한 젠더화로 인해 대안적 계급 개념들이 주변부로 밀려나고, 성차 그 자체가 비가시화되었다. 노동력을 가진, 혹은 노동할 수 있는 자신들이 '남성'임을 인식하게 되면서 노동계급의 구성에서 더 많은 수를 차지했던 '여성'과 '어린이'는 '노동 계급'에서 제외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 젠더 분석에 대한 접근법 중, 가부장제의 기원과 관련된 부분은 역사적 사실과 그에 근거한 추론을 통해, 집단으로서의 여성이 남성 집단에게 종속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는 자본주의와의 결합으로 더욱 공고해진다. 그럼 사회주의는 어떠했을까. 사회주의는 여성의 가사 노동의 상당 부분을 '외주화'함으로써 노동자로서의 여성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정에서 요구되는 노동은 여성 '본연의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성들은 집 밖에서 임금 노동을 하든 하지 않든, 계속해서 집에서 "무보수로" 가사 노동을 도맡아 했다. 왜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사회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여성의 일로 간주되는지 오직 경제적인 견지로만 설명할 수 없었던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단순히 모든 여성은 똑같이 여성이라는 계급, 즉 제1의 (남자라는 성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제2의 (여자라는) 성에 속하기 때문에 모든 사회에서 가사 노동이 여성에게 할당된다고 결론지었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151쪽)

기독교 신자인 내가 페미니즘을 읽을 때, 읽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 괴리 때문에 괴롭지 않으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전혀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기독교인이어서 유독 더 괴로운 건 아니라고 답한다. 인류 문명은 시작부터 내내 한결같았다. 여성 혐오가 인류 문명의 출발이었다는 정희진쌤의 말은 구체적인 실례에 모두 들어맞는다. 영국의 왕실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이름 모를 종족에서도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불교에서 여성을 하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에서도 여성을 죄의 근원이라 여겼다. 자본주의가 여성의 무임금 노동을 '사랑'과 '헌신'으로 만들어 착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가사 노동은 여성의 일로 간주되었다.

역시, 여성과 남성의 '성 구분'과 '강제적 이성애'가 젠더 형성과 고착화에 대한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된다. 만약, 이 구별의 기준이 '성별'이 아닌 그 무엇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외향적인 사람은 요리를, 내향적인 사람은 설거지를 맡기로 한다면. 문과인 사람들은 설거지를, 이과인 사람은 장보기를 하기로 정해져 있다면. 키가 큰 사람은 청소를, 키가 작은 사람에게는 정리정돈을 맡긴다면 어땠을까.

모두 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할 것이다. 성향이나, 성격, 혹은 신체적 특성으로 그 사람의 어떠함을 예단하고, 그에 따른 임무를 강제하는 일이 부당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젠더는 아직도 그렇게 작동한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여성다움과 남성에게 강요되는 남성다움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직업 선택과 활동 범위에 관해서, 여성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넓은 선택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정은, 사적 영역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주효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리 성공한 여성이라도, 아니 성공한 여성이라면 더욱더, 아이들의 양육과 돌봄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할 것을 '요구' 받으며, 아이들을 전적으로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부여' 받는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여성의 이중, 삼중 노동을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돌봄 노동을 포함한 모든 재생산 노동에서 여성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욕구를 우선시할 것을 요청받는다. 사회학자 디무트 엘리자베트 부벡이 말했듯, 모든 여성은 직접 착취당하지 않아도 젠더에 기초한 착취에 취약(『친밀한 착취』, 141쪽)하기 때문이다.


사회 내의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젠더 역시 각 개인의 삶을 구속하는 주요한 요소 중의 하나임은 확실하다. 다른 어떤 요소들보다 젠더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 젠더가 가진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까지 읽고 썼다. 안 아파서 운동하기 싫다고 깝치다가 감기인지 뭔지에 호되게 걸려 콜록콜록 며칠을 누워 보내고 이제 힘내서 읽어보려 했더니, 오늘이 3월 28일이라고 한단다. 벌써요? 벌써???




우리는 "남성"과 "여성"이 텅 빈 동시에 의미가 넘쳐 흐르는 범주라는 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그 과정의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 텅 빈 것은 그 범주가 어떤 궁극적이거나 초월적인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가 넘쳐 흐르는 것은 그 범주들이 고정돼 있는 것처럼 보일때조차 그 안에는 여전히 대안적이거나 거부당했거나 억압된 정의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 P99

의미가 다차원적이고, 관계적으로 확립되며, 한 명 이상의 청자를 향해 있고, 기존의 담론)장 속에서 표현되는 동시에 새로운 장을 형성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구든 푸코(암시적이긴 하지만 스테드먼 존스의 연구 속 또 다른 존재)를 읽을 수 없다. - P117

그 공통분모는 그 유형은 다를지라도, 자산을 소유한다는 것이었다. 차티스트들은 개인의 노동 혹은 노동력의 산물이 그자체로 자산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산을 개인의 정치적 권리 향유와 관련지은 로크 이론의 한 측면을 발전시켰다. 그러면서 차티스트들은 이미선거권을 획득한 이들과 자신들 사이의 또 다른 유사성 - 그들 모두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 P122

강한/약한, 공적인/사적인, 이성적인/감정적인, 물질적인/영적인ㅡ같은 대립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서구 문화가 젠더를 코드화한 예들이다. 이런 젠더화된 용법을 사용할 때 성별에 관계없이 개인들이 그런 정의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또한 그들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그 정의들을 재해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여성들이 "남성적인" 운동을 지지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이는 차티스트운동이 가진 특정한 해석을 긍정하는 것이다. - P123

이것은 여성의 복지가 남성의 복지 안에 포함돼 있으며, 여성의 주된 과업은 소비 행위와 출산이고, 이런 활동들이 아무리 공적이고 정치적일지라도 남성들의 임금노동과 그 위상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했다. 계급의 남성적인 구성은 (젠더화된) 가족 내 노동 분업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어떤ㅍ이들이 자연적인 배치라고 생각했던 것을 재생산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P126

이런 질문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은, 젠더와 계급 사이의 연관성을 "이중 체계" 분석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 접근에서 가부장제는자본주의와 나란히 존재하며 상호 교차하는 사회 체계다. 각각의 체계에는 특유의 조직과 관계, 동학, 역사, 이데올로기가 있다. 흔히 가부장제의"기원"은 가구 내 생산·재생산관계를 비롯한 가족과 친족 체계에 위치한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생산수단의 발전과 더불어 생겨나며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몰성적"sex-blind이거나 젠더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경제적 실천을 수반한다. 45 이런 분석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가부장적 "젠더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실천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 P162

계급 개념의 구축에 여성적인 것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검토하지 않은 채 노동계급 여성에 대해 쓴다는 게 가능할까? 여성들의 문화가 여성들을 어떻게 재현하고, 여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묻지않은 채, 여성에 대한 글쓰기가 가능한가? 이런 문화적 재현과 자기 정의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가정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연관성을 읽어 낼 수 있을까? 모든 여성 또는 동일 계급의 모든 여성에게공통의 자기 이해self-understanding가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는것일까? 19세기 영국에 과연 객관적으로 기술할 만한 노동계급 여성들의 "이해관계"가 존재하기는 했을까? 특정 정치 운동의 정치학과 주장은 이런 이해관계를 정의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까? - P168

공방은 독립된 건물이거나 마스터 가족의 숙소에 붙어 있는 방이었다. 공방이 집에 붙어 있는 경우, 마스터의 아내는 성수기에 일손을 돕거나 일 년 내내 단추와 옷단을 바느질했지만, 생산의 기본단위는 어디까지나 임금으로 생계를 부양했던 남성 직인들이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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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3-31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쯤이면 다 읽으셨을까요, 단발머리 님?
저는 이 책 읽으면서 우리가 함께 읽었던 그 사회계약에 대한 책이 떠올랐어요. 지금 생각이 안나요. 진분홍 표지에 여자들 발이 보였던 책이었는데.. 아 답답해.. 그 책에서 사회계약은 남자와 남자들 사이에 이루어진거다, 라고 한 부분 있잖아요. 그 부분 때문에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책도 생각났고요.

단발머리 님, 화이팅!!

단발머리 2025-03-31 16:39   좋아요 0 | URL
이제 막 마쳤습니다. 글쓰기도 마쳤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이 말씀하신 책, 저도 가물가물한데 무슨 책인지 기억이 안 나요. 아..... 답답하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문장이 기억나서 인용했는데 다락방님도 댓글에서 생각났다고 하셔서 완전 찌찌뽕입니다. 3월 만세!!
 













서문에서 제일 중요한 문장을 꼽으라면 10쪽의 이 문장.

논쟁이 계속된다는 것은 젠더 자체가 가진 규정하기 힘든 특성을 보여준다. 신체적 차이에 고정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고, 그 차이와 사회적 처신 및 성적 욕구의 관계 역시 고정적이지 않다. 역사적 기록은 젠더 범주의 가변성과 다양성을 입증하며, 인류학자들도 젠더 범주가 문화적으로 각양각색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10쪽)

고정적이지 않다,는 게 제일 중요한 지점이다. 저자는 '젠더의 불확실성'에 대한 사유가 미셀 푸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건 『감시와 처벌』에서 반복되는 그 주장, '권력은 관계적이며, 억압적인 힘으로 작동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효과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 생각을 24쪽에서 저자는 이렇게 풀어쓴다.

이 글에서 젠더란, 성차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나는 미셸 푸코를 따라 인간관계, 여기서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문화 및 사회가 생산해 낸 이해라는 의미로 지식을 사용한다. 이런 지식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며, 늘 상대적이다. 지식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적어도 그에 준하는) 역사를 가진 거대한 인식론적 틀에 의해 복잡한 방식으로 생산된다. 지식의 쓰임새와 의미는 정치적으로 경합하며, 이를 통해 권력관계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구축된다.(24쪽)

젠더는 성차의 사회적 구성이다, 라는 문장에 형광펜을, 주황색 모나미 형광펜으로 줄을 긋는다 해도 여전히 아리송한 이내 마음. 읽고 있는 정희진쌤의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다시 펼쳐보자.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에서 이건 그냥 외우라고 하셨던 바로 그 부분이다.












1949년 출간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서부터 주디스 버틀러의 '정체성이 아닌 수행성(performance)으로서 젠더'에 이르기까지 사상가들의 입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젠더는 다음 세 차원에서 작동한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서로 의존하며 연결된다. 첫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남성다움/여성다움, 남성성/여성성, 성별, 성별 분업, 성차별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만들어낸 차이로서 젠더다. 둘째는 계급, 인종과 함께 사회적 분석범주(category)로서 젠더, 즉 사회 구성 요소(factor)이다. 커피 자판기의 종이컵이 사회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뜨거운 물일 것이다. 이 뜨거운 물이 젠더이다. 물을 얼마나 붓는가, 몇 도의 물을 붓느냐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질 것이다. 프로이트는 젠더를 인간의 무의식으로부터 드러냈다. 젠더를 고려하지 않으면 인간과 사회, 자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젠더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가부장제는 내외부가 없다. 다시 말해 젠더 인식이 없는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 셋째는 메타 젠더(meta gender)로서 '다른 목소리', 새로운 인식론이다. 젠더에 기반하되 젠더를 넘어서는 '대안'으로서 사유를 말한다. 젠더는 '여성 문제'가 아니라 에피스테메(episteme), 새로운 인식론이다.(<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103-4쪽)

훨씬 이해하기 쉬우나 여전히 어려운, 그 무엇. 그것은 바로 젠더.

역사 분석 범주로서의 젠더를 이야기하며 저자는 '젠더'가 '여성'의 동의어로 쓰이는 현상을 지적한다. 학문적 진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여성을 포함하지만 여성이라고 꼭 짚어 말하지 않음으로써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인데, 그 주장의 바탕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 관한 생물학적 설명을 거부하고, 그 대신 성 역할 관념이 '문화적 구성물'임을 강조하는 데 있다. 즉, 성별화된 신체sexed body에 부과된 사회적 범주로서의 젠더를 말하는 것이다.(71쪽)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 젠더 분석에 대한 접근법이 특히나 흥미롭다. 첫 번째, 가부장제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시도와 두 번째,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비평 사이의 조화를 모색한 것. 그리고 세 번째, 주체의 젠더화된 정체성이 생산, 재생산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인데, 나는 이 중에서 첫 번째 '가부장제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관심이 많았다. 『가부장제의 창조』의 거다 러너의 질문, 그러니까 어떻게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었는가, 이것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중심에 놓고 읽었다.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그 전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여성의 소외가 공고화되었음을 생각할 때,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매 순간 새롭게 만들어지며, 더욱 저열하고 치졸한 방식으로 구체화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성 운동, 여성의 각성에 대한 '백래시'는 일단의 사건이나 경향이 아니라, 전 역사를 통틀어 한결같이 '현재 진행 중'이라는 뜻이다.

다른 책들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읽어야만 그나마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바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려운 책인 건 분명하지만, 그만큼 흥미롭다는 점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근데, 왜 헌재는.

우리 모른 척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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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5-03-20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 읽어야 하나요? 언니

단발머리 2025-03-20 20:56   좋아요 1 | URL
네, 언니! 😉🤪😎

수이 2025-03-20 21:11   좋아요 1 | URL
언니가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

단발머리 2025-03-20 21:12   좋아요 0 | URL
하하하 🤣😍🤗

은하수 2025-03-20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리 요약을 해주시니.... 또 나름 이해가 되네요.
어려워도 읽었음을 실감하게 하는 문장들을 저도 기억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꾸역꾸역 읽어나가고 있네요.ㅠㅠ
파이팅~~~

단발머리 2025-03-21 16:38   좋아요 1 | URL
암요. 암요~~~~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밑줄에서 이해와 공감을 ㅋㅋㅋㅋㅋㅋㅋㅋ얻어갑니다.
저도 열심히 읽고는 있는데 진도 안 나가는 것 무엇? 엥?? 하면서 읽고 있어요.
우리 모두 화이팅!!!

다락방 2025-03-21 0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너무 어려워서 진도가 안나가요.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요. 엉엉 ㅠㅠ 정희진의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아직 안읽어서 그런걸까요. 흑흑 ㅠㅠ

단발머리 2025-03-21 16:3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습니다.
정희진쌤의 그 책 읽은 저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책이기는 해요. 집중해서 읽어야할 듯 한데, 행간이 좁은 것도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ㅋㅋㅋㅋㅋㅋㅋ 하고 있습니다, 저는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5-03-21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어려워서 도통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단발 님 글을 읽으면 또 대충 이해가 갈 것 같네요? 그렇다고 아주 간 것은 아닙니다만.ㅋㅋㅋ 이번 달 책은 정말 진도가 안 나가서 곧 말일이 다가올 것 같아 글자를 읽어야만 하는 건가? 골똘히 생각 중입니다. 우쨌든 노력해보겠습니다. 파이팅.^^

단발머리 2025-03-22 14:19   좋아요 1 | URL
저도 항상 그렇습니다. 될듯될듯 안 되고, 안 되는듯 안 되는듯 ㅋㅋㅋㅋㅋㅋ 알쏭달쏭!
그런 경우 모르는 쪽에 더 가깝기는 합니다만 일단 끝까지 읽어보는 것으로 해야겠지요.
책나무님 파이팅 잘 접수했고요~~ 제 파이팅도 전해드립니다. 파이팅!!
 
















루시와 이야기를 나누던 셜린이 말한다. I'm glad we don't talk politics.

And Charlene Bibber said she kept feeling the same way. We still walked together - or mostly sat on the granite slab - every other week, and one time she said to me, "I'm glad we don't talk politics." I turned to look at her. "We never have to talk politics," I said, and she said she knew that. "I just appreciate it," she said. And I said, "Of course." (216p)

나도 그런 적 있는데, 지난 대선 직전에 대학 친구랑 통화하다가 놀란 경험.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진짜 그럴 줄이야.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후회를 나 혼자 했다. 그 이후로 정치 이야기를 안 하니까, 우리는 여전히 사이좋게 지낸다.

이런 저런 일들에 가정사까지 겹쳐 주중에 못 나가서 지난 토요일에는 광장에 나갔고. 태극기 집회 지나치며 중국 공산당 이야기에 목소리를 높이는 20대 여성의 연설을 강제 청취했다.

경북궁 오른쪽에 내내 서 있다가 안국역 쪽으로 이동했을 때 마침 행진이 시작되어 1호차 따라 종각 찍고 유턴. 출발점으로 다시 이동. 행진과 연호. 나라 구하느라 애쓴다,는 말로 크게 위로해 주었는데도 동행인은 콜록콜록. 안 나왔으면 내가 시름시름 할 판이어서 나오긴 나왔어야 했다. 내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나도 놀란다. 선창할 용기는 없지만서도 목소리 높여 박자를 맞춰 구호를 외쳤다. 그 당연한, 그 무엇을.

윤석열을 / 파면하라

윤석열을 / 파면하라

윤석열을 / 파면하라

헌재가 오늘도 선고일자 공고 안 해서 심히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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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3-20 0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s://youtu.be/3AtDnEC4zak?si=5vmeIn_YMfBdcTFw

맥락은 다르지만 이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단발머리 2025-03-20 11:57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링크해주신 노래의 라이브 버전 들으면서 이 페이퍼 썼습니다. 다시 들어도 명곡인 것이며 ㅋㅋㅋㅋㅋㅋㅋㅋ

광장에서 부른 노래 중에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참 좋았어요.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책읽는나무 2025-03-21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어요. 빨리 결과가 나야할텐데 말입니다.

단발머리 2025-03-22 14: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책나무님~~ 세상에... 아직도 결과가 안 나왔어요. 이런 순 ㅠㅠㅠㅠㅠㅠㅠ
 













며칠 전, 전데에 대한 글을 찾다가 이런 문단이 눈에 들어와 두 번을 읽었다. 계속 생각나서 다시 그 글을 찾았고(내가 쓴 글에서 인용했는데도 찾는데 오래 걸리는 편), 한 번 더 읽었다.






나의 젠더란 사랑했던 사랑의 대상이 구성한다는 것. 내가 사랑했던 무언가와 이별했다면 그 대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남아 있다는 것. 그러니깐 나의 일부로. 나의 일부로 남아 내 안에 남아 있다는 것.



잊을 수가 없는 내 안의 일부. 잊을 수 없는. 나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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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5-03-14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름이 곧_옵니다. 새로운 사랑을 합시다. 응?! 🤪

단발머리 2025-03-15 10:59   좋아요 1 | URL
앞으로 점점 봄이 짧아진다고 해요. 새로운 사랑 좋지요~~ 사랑이라니!

수이 2025-03-15 13:23   좋아요 0 | URL
사랑이라니 선영아 😛

단발머리 2025-03-15 13:27   좋아요 0 | URL
사랑이라니 수이야 😘😍🥰

수이 2025-03-15 13:40   좋아요 1 | URL
사랑뿐이야 단발아 🥸😎🧐🤨🤯

건수하 2025-03-14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젠더 트러블 읽기 전에 읽을까 하고 사둔 책인데, 쉽지가 않네요 @.@

단발머리 2025-03-15 11:00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젠더 트러블 읽던 중에 추천받아 읽은 책이에요. 이쪽이든 저쪽이든 저도 쉽지 않더라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