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올리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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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Olive, Again』을 같이 읽고 있다. 일주일에 한 챕터씩 읽기가 계획인데 미루는 성격이라 금요일 오후쯤 되어야 아! 올리브! 하고 책을 찾아 이리저리 헤맨다. 숙제가 급한 초등학생처럼 바쁜 마음으로 읽기를 시작하지만, 소설 자체가 갖는 이야기의 힘 때문에 나도 모르게 휘리릭 빨려 들어간다. 올리브를 읽는 시간이 참 좋다.

 


올리브는 오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58)

 


이 구절이 좋았다. 올리브가 자신의 집으로 오라는 잭의 전화를 받고 그의 집에 막 도착했을 때, 영화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올리브의 생각이 그대로 표현되는 장면. 올리브는 오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올리브의 생각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상황. 그런 순간이 좋다. 전능자가 되어 버리는 것 같은. 상황과 생각, 계획과 예상 그 밖에서 마치 인형 같은 주인공을 내려다보는 순간. 올리브는 오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 이 책을 사야지! 하고 결심했다.

 

 

소설은 흔히 가볍고 쉬운 이야기라 여겨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역사의 격랑’, ‘이념 간의 갈등’, ‘세대 간의 불화와 타협같은 거대 담론을 주제로 삼지 않으면 더더욱 그런 취급을 받아왔다.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의 사랑으로 성장하고, 사랑을 주지 않는 엄마 때문에 괴로워하고, 자신을 기억하는 예전 학교선생님 덕분에 용기를 얻고, 먼 도시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남편과 사별 후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이제 더는 혼자 살 수 없어 요양원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이 모든 과정은 인간으로서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한 경험들이다. 하지만, 이런 순간, 이런 경험들은 모두 하찮게 여겨진다.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인간으로서의 불행과 행복은 이런 작은 순간에 맺혀 있는데도 말이다.

 

가까운 친구 중에 엄마를 집에 모시고 있거나 아침저녁으로 돌보거나 저녁을 챙겨드리는 친구들이 모두 넷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맙고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는 일이 너무 버거울 때, 그때 느끼는 무력감과 죄책감은 다른 어떤 말로도 설명이 안 된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울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 모든 일을 사랑과 도리, 효와 애정의 문제로만 설명한다. 개인에게만 책임을 전가한다. 그 모든 무거운 짐을 껴안는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딸, 며느리, 손녀는, 말 그대로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 하지만, 말할 수가 없다. 불평할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랑이 부족해서이고,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않은 일이고, 효심이 부족해 생기는 마음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어나 이생을 살고 늙어가고, 그리고 죽음을 준비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 이 소설이 좋았다. 무리 부인하려 해도 우리는 결국 인간이고, 그래서 또는 그러므로,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숨기지 않고 말해줘서 좋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건 다른 인간의 관심과 애정, 따뜻한 음식과 다정한 손길이라는 걸 말해줘서 좋았다. 

 


좋았던 또 하나의 구절은 바로 여기다.

 


잠시 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내에게 수잰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할 것이다. 대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한 가지도 밝히지 않을 것이다. 수잰이 그를 어떻게 도와주었는지는 그만의 비밀로 남겨둘 것이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혼자 간직하는 숱한 비밀을 생각해보면, 그런 정도의 비밀은 전혀 나쁠 게 없다고, 그는 일어서면서 생각했다. (189)

 


만나자마자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해결책을 찾는다기보다는 고민의 토로가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그냥 들으면 된다. 고민을 넘어 쉽게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들도 있다. ! 하는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져도 차분히 그 이야기를 듣는다. (단발머리의 고민 상담소 : 비밀 보장) 내게 말할 수 있는 정도의 비밀이라 내게 말하는 것일 테니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경우의 수는 없다. 마주 앉아 가만히 비밀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웬만큼 비밀을 털어놓은 후 어떤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이제 네 차례야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저요? , 뭐요? 제 고민이요? 아니, 제 비밀이요? 그니까? ? 작은 거밖에 없어요. 제 고민은 다 자잘하고. … 제 비밀이요?

 


비밀이라. 이 세상에 완전한 비밀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비밀이라고 말했는데 온 세상이 이미 다 알고 있는 경우도 무척 많은데. 하지만 내게도 한두 개의 비밀은 있다. 그 사실 자체가 비밀은 아니지만, 지난한 과정과 구구절절한 사연이 비밀인 비밀. 난 누구에게도 그 비밀을, 비밀들을 말하지 않았다. 글로도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만약 내가 아주 오래 살게 된다면, 그 일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면, 내 심경에 변화가 생긴다면, 94세쯤에 비밀과 비밀들에 대해 쓰고 싶다. 내가 내렸던 바보 같은 결정과 그로 인한 파장,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과 그래야만 했던 결정과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후회에 대해 쓰고 싶다.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소리쳤던 수많은 밤과 밤처럼 어두웠던 낮과 눈물의 기도들과 내 기도의 응답에 대해 쓰고 싶다. 94세쯤에 그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면. 하지만 그전에는 말하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고 쓰고 싶지 않다. 내 비밀은, 내게는 이렇게나 크다.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버니가 수잰을 위로해줄 때, 앞으로 그녀가 간직하게 될 비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비밀의 책임은 네가 지고 가는 게 좋겠다고 말할 때, 좋았다. 수잰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자신만의 것으로 간직한 버니의 말을 들으며 내가 안심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비밀도 그냥 가지고 있어도 된다고 버니가 허락해 주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올리브를 읽는 시간이 좋다. 올리브를 읽는 시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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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3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07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1-05-04 07: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저도 너무 좋아요. 번역본 읽기 위해 원서도 다시 이북으로 읽거나 보고 있는데 처음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감동들이 찾아와서 막 눈물도 나고 그래요.
저는 이번편에서 수잰이 그런 환경 속에서도 잘 자라왔다고 말하는 장면이 너무 좋았어요. 그런 환경에서 살면서도 결코 망가지지 않았다고 하잖아요. 남편은 아내를 학대하고 엄마는 아들을 학대하고 아들은 여성혐오살인을 했는데, 거기에서 바람핀 거 가지고 내가 잘못했어, 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수잰을 보면서 인간이란 대체 무엇일까.. 싶더라고요. 왜 어떤 이는 여자를 찔러 죽이는데 어떤 이는 바람핀걸로 고통받나. 왜 특히 그 부분 있잖아요. 아버지가 바람피웠던 사실을 알고는 아버지처럼 될까봐 너무 걱정된다는, 그 부분이요. 저는 거기서 너무 아팠어요. 저도 다시 올리브 다시 읽으면서 너무 좋아서 그 부분에 대해 페이퍼 쓰고 싶었는데 바빠서 못썼네요.

다시 올리브는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단발머리님.

단발머리 2021-05-07 12:03   좋아요 1 | URL
전 무엇보다 이렇게 인간으로서 중요한 경험들이 사소하게 여겨지는게 그런게 너무 아쉬워요. 수잰에게 버니는 사실 동네 아저씨잖아요. 아빠의 대리인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수잰을 아는 사람… 이런 관계가 무척 중요한거 같아요. 근데 요즘은 점점 더 이런 관계를 갖기가 어려운 거 같아요. 이사도 잦고 또 아무래도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강해지고 그러니까요. 전 그 챕터 읽으면서는 그런 생각이 많이 들더라구요. 느슨하지만 긍정적인 관계, 인사를 나눌수 있는, 경쟁하지 않는 관계…

다시 올리브는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저한테도 그래요.

mini74 2021-05-04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들과 같이 읽으신다니
부러워요. *^^* 같이 밥 먹으면 식구라는데 같은 책 읽으며 감정을 공유한다는 건 마음의 식구가 되는 건가요 ㅎㅎ

단발머리 2021-05-07 12:08   좋아요 1 | URL
‘마음의 식구’라는 미니님 표현은 제가 오래오래 기억하고 사용하고 싶어요. 같은 책을 읽는 건 그 어떤 일보다 마음을 나누는 일이 맞는 거 같아요. 그런 면에서 알라딘 이웃님들도 제게 그런 마음의 식구입니다*^^

- 2021-05-10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 땐 (꼭 이럴 때만) 제가 나이어린게 다행입니다. 94세에 단발님 비밀 이야기의 굳 리스너가 될겁니다. 제가 번호표 1번 뽑아써요? 예약이예요.

단발머리 2021-05-13 07:54   좋아요 0 | URL
우아아아아아아앙!!!! 번호표 1번이 쟝쟝님이라면 94세가 아니라 74세 정도로 확 당길까 해요. 예약증은 문자로 발송됩니다.
시간 엄수하시고요. 번호 지나가면 기다리셔야 돼요!!!

초딩 2021-06-04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좋은 밤 되세요~

단발머리 2021-06-07 12:59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초딩님!! 제가 답이 늦었네요!
오늘 월요일이지만 좋은 날 되시길 바래요!

서니데이 2021-06-04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1-06-07 12:59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좋은 날 되시길 바랍니다!
 


















 

요즘 자꾸 눈이 침침하다. 이불 속에서 유튜브 많이 봐서 그렇다. 아롱이한테 여러 번 걸려서 잔소리 대마왕의 속사포 공격과 압수 공격을 당했는데도 그런다. 안 그러려고, 다시는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그런다. 이불 속에서 유튜브 보다가 잠들면 아침에도 개운하지가 않다. 고쳐야 할 텐데, 그만 봐야 할 텐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

 

성경은 1권이지만, 원래는 상하처럼 구약과 신약이 있고, 각각은 39권과 27권으로 총 66권이다. 성경 66권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 로마서이다. 로마서의 저자는 사도 바울로 알려져 있는데, 여성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가졌다는 단점이 있지만, 로마서 그 자체로는 상당히 독특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흔히 이런 비유를 쓴다. 성경 전체를 다이아몬드 반지라 했을 때(다이아몬드 싫으면 다른 보석도 된다. 다만, 알반지이어야 한다. 보석이 박힌 반지), 로마서는 그 보석, 다이아몬드에 해당한다. 그만큼 기독교의 정수를 밝혀주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로마서 7 1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두개의 존재가 내 안에 공존한다. 하나는 선을 행하려 하고 다른 하나는 악을 행하려고 한다. 두 개의 세력 가운데 이기는 쪽이 나를 다스린다. 유튜브를 보고 싶은 마음과 책을 더 읽고 싶은 마음 중 하나의 마음이 나를 지배할 터인데, 유튜브를 보고 싶은 마음이 이긴다면 나는 유튜브를 보게 될 것이고,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이긴다면 나는 책을 읽게 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 즉 책을 보는 일을 하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 것, 유튜브를 보는 악을 행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왜 선을 원한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는가.

 


그제는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다. 시몬 보부아르 책을 이번에도 다 읽지 못하고 반납했고,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은 130쪽까지밖에 읽지 못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도 끝부분을 읽지 못했고, 『A little princess』은 두 쪽 읽고 반납했다. 반납하러 갔던 도서관은 조명과 바닥에 신경 쓴 예전의 그 도서관이 아니고, 집에서 더 가까운 평범한(?) 도서관이다. 아파트 숲 사이에 파묻혀 있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곳인지라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 편이다.

 

책을 반납하고 책장 사이를 거니는데, 구석구석 빈 자리가 보였다. 작은 공간이라 이제 어디쯤에 어느 작가가 있는지 정도는 파악했는데, 인기 많은 몇몇 작가의 책들은 이미 꽤 해진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실망했다. 나는 책을 많이 읽고 싶지는 않다. 빨리 읽지 못하는 편이고 금방 잊어버리는 편이라서 항상 가벼운마음으로 독서를 한다. ‘놀이로서의 독서가 내게는 가장 친숙하다. 그런데 책장을 돌아보다가 실망한 내 마음속에, 여기 작은 도서관, 사람들이 찾지 않은 이 작은 도서관의 2, 여기 몇 개의 책장의 책들은 다 읽어볼까 하는 계획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내겐 그럴 생각이 있었나 보다. 그런데 간만에 둘러본 책장의 책들이 조금씩 해져 있었다. 책들이 나처럼 늙고 있었다. 나는 실망했다. 눈은 침침한데 책들은 늙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에 친애하는 알라딘 이웃의 서재에서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에 대한 글을 읽었다. 나는 천문학자는 아니지만 이런 의문을 자주 갖는다. 나는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존재라는 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이 넓은 우주에 하나님께서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환경 파괴를 일삼는 인간만을 만드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조우할지도 모를 지구 외부의 존재에 대해 항상 궁금하다.

 

또 내가 궁금한 것은 흑인들이 억압자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어쩌면 그렇게 철저하게 내면화시켰는가, 이고(관련 도서 추천받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명백한 악행보다 위선을 더 미워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 막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상처 주는 말도 서슴치 않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아니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감 없이 그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솔직하게나쁜 말을 하며, 그리고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사람이다. 또 다른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심한 말을 하거나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자리에서 나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한다. 내가 듣기 싫은 말을 내 앞에서 시원시원하게 하는 사람과 내 앞에서는 별말 없다가 안 보는 곳에서 나를 욕하는 사람. 어떤 사람이 더 싫은가. 나는 첫 번째 부류가 더 싫다. 아무리 나를 욕하더라도 내 앞에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쁜 사람과 위선적인 사람 중에 나는, 나쁜 사람이 더 싫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위선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기호나 취향이 아니라 판단이 필요한 문제에서 내 생각에 명확히 아닌경우에도 아니다라고 확실히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렇게 행동하는 나 자신이 싫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음그건 좀 무리가 있는 것 같은데….. 에서 더 강하게 말하지 못한다. 저건 아니다, 저건 경우가 아니다,라고 생각한 경우에도 그렇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겪으면서 나는, 자주 그렇게 생각했다. 절 별로 안 좋아해도 되니 제 앞에서만은 모진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냥 겉으로라도 평범하게 지내봐요, 우리.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은 위선적인 사람을 더 싫어하는 것 같다.

 

특히 최근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그랬다. 위선적이야, 라고 말할 때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감에 대해서, 그 무게와 엄중함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동의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내면과 행동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인간을 찾고 있다는 건지, 완벽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와 미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건지, 그딴 소리 할 거면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있으라는 건지, 난 그걸 잘 모르겠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란 결국 가면이고, 가면이란 곧 위선인데. 그 모든 가면을 벗고 생얼을 까라는 건지, 생얼 깔 자신이 없으면 입 다물라는 건지. 나는 그걸 아직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궁금하다.

 

 


어젯밤에는 트루먼 커포티의인 콜드 블러드』를 읽었다. 70쪽까지 읽었는데 완벽한 아버지와 완벽한 딸이 등장하면서, 곧 무슨 일이 일어날 듯한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짜증이 났다. 이어서 읽어봐도 별일 안 일어나면 확. 그냥 확, 빨리 읽어 버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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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1-05-01 0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별일 일어날까(일어나는 게 당연하지만) 조마조마하며 읽었는데요. 단발머리님 별일이 일어나도 아마 확, 확 빨리 읽게 되실 걸요. ㅎㅎ

단발머리 2021-05-01 10:17   좋아요 3 | URL
저는요, 뭐랄까요. 이미 그 별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사건이 일어났다), 그 별일에 대해 듣기 위해 이 책을 읽기 시작했잖아요. 근데, 70쪽까지 평안하니 화가 나더라구요. 아시겠지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사실 그런 별일 가득한 책을 잘 읽지도 못하면서 말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 여기는 고요한 토요일 오전이에요. 저희집의 고요함을 프시케님께 쪼금 나눠드리고 싶어요. 고요함 아주아주 많아요!!!!!

별족 2021-05-01 06: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시로 든 것처럼 제 앞에서 지적하는 사람과 제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 중에 고르라면 저는 제 앞에서 지적하는 사람이 더 좋습니다. 그 사람의 지적이 맞는 말이면 받아들이면 되고, 나와 다른 생각이라면 같이 이야기해볼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제게 한 마디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뒤에서 험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음 친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몸이 부딪치는 현실계에서의 위선과 인터넷상의 위선에는 좀 더 다른 태도입니다. 현실계에서의 위선은 바람직?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만, 인터넷에서의 위선은 끔찍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선이든 위악이든 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가상의 공간에서 결국 확인할 도리가 없는 말들 가운데서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게다가 말은 얼마나 쉽습니까?
나쁘다,와 위선적이다,라는 말이 무언가 좋고 싫음으로 옳고 그름으로 판단되려면, 결국 그 다음이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위선적인 걸 더 싫어하는 데에는 그 다음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친절하게 말했는데, 알고 보니 사기를 쳤어. 같은 거요.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하면 피할 수나 있지, 같은 거요.
사람의 겉과 속, 행동과 말, 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고 그저 노력하는 것일 뿐이지만, 위선에 더 나쁜 평가를 하는 데에는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위선‘이 더 낫다,라고 말할 때의 위선은 ‘선‘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나 노력같은 거지만, 사람들이 위선이 싫다,고 할 때의 위선은 다른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 같은 건 아닐까요.

단발머리 2021-05-01 07:56   좋아요 3 | URL
저같은 경우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나쁜 사람과 위선적인 사람의 구체적인 실례가 있는 경우이고 별족님은 별족님 경우가 있을테니 그건 무언가가 더 낫다고 생각하기 어렵겠지요.

다만 인터넷상의 위선이 끔찍하다고 하시니 그건 좀 의아합니다. 어떤 사람이 별 영양가 없고 내용도 없는 제 글을 읽고 ‘말도 안 되는 말, 하지도 마라.‘ 혹은 ‘김치년들 노답(실제로 제 글에 달렸던 댓글입니다)‘이라고 댓글을 달았다고 하면 그게 별족님의 댓글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생각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고 그래서 다르게 판단합니다. 말은 쉽죠. 특히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는 말은요. 하지만 별족님마저도 자신의 본의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이렇게 긴 댓글을 달고 계시지 않습니까. 별족님이 제게 대해 어떤 판단이나 생각을 하고 계신것과는 상관 없이요.

bookholic 2021-05-01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튜브 영상은 보지말고 소리만...~~
우리집에 계신 분의 방법^^

단발머리 2021-05-01 16:49   좋아요 0 | URL
그 분께 제가 이 방법을 잘 접수했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꼭 좀 전해 주십시오!!

붕붕툐툐 2021-05-01 09: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한동안 그랬어서 너무 공감가요~ 근데 어느 순간 ‘유튜브에 나오는 얘기 하나도 몰라도 사는데 1도 지장 없잖아?‘란 생각과 함께, 알라디너님들이 소개해 주시는 책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니 책 읽을 시간도 벅차서 유튜브는 자연스레 끊게 되었지 뭡니까? 하하!
단발머리님이 말씀하신 위선은 예의와 비슷한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내 앞에서 예의는 지켜줘!! 우리 그렇게 가까운 사이 아니잖아!!˝ 내 선을 넘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호소?(저도 그런 인간이라.. 단발머리님도 내면의 평화가 가장 중요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악에 대해서도 위선에 대해서도 그냥 이해하려고 하는 편이어서-별 관심 없거나 세상은 원래 그렇다는 생각일 수도- 둘 다 그냥 그런거 같아요. 어쩌면 세상에는 제가 위선적이어 보이거나 악해 보이는 순간이 있을테고 그걸 욕하는 사람들이 있을테지만, 욕하는 사람도 다 그런 면이 있는 거 아닐까요? 욕하는 사람도 그냥 둡니다.ㅎㅎ(이랬지만 저도 유튜브 댓글 달았다가 ‘틀탁‘이란 말을 들은 후 댓글을 안 쓰게 되더라구요. 글은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너무나 달라지는 거 같아서요!!)
토요일이 아침 단발머리님의 진솔한 글을 읽고 저도 이렇게 댓글을 쓸 수 있어서 참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단발머리 2021-05-01 16:53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툐툐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저는 제 앞에서도 예의를 지켜줬으면 하는 마음이고요. 사람들이 생각보다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제일 많이 생각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 제게는 마음의 평화가 샤라랑~~~~ 고민하는 사람과 걱정하는 사람이 저 하나지요. 물론 저도 실수가 잦은 사람이라 실수를 줄여가고 싶기는 합니다.

전해주신 특급 비책으로 저도 유튜브 줄이기에 성공하고 알라딘 책의 흐름에 솨라락 몸을 맡겨 볼까 합니다. 툐툐님의 혜안을 고요히 듣는 이 시간이 너무 좋네요. 즐거운 토요일 오후 되세요!! 저는 지금 마트에서 사온 참깨스틱 먹고 있거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참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han22598 2021-05-01 11: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똑같은 막말이라도 그냥 뒤에 가서 하는 것이 적어도 그 사람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본인만 감정 다 털어놓고 남은 어쩌라는 건지....참. 별로입니다.

미국에 사는 기독교 흑인들...단발머리님과 비슷한 맥락에서 관심있고, 개인적으로 그들의 커뮤니티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어요. 어느분이 추천해주신 책인데 저도 사놓기만 하고 아직 몇장밖에 안 읽었는데, James Cone의 [The Cross and the Lynching Tree]...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알려드려요 ^^

- 2021-05-01 13:02   좋아요 1 | URL
저도 동감ㅋㅋ 본인만 감정 다 털어 놓으면 내 감정은?? 감정이 분석된 언어로 앞에서 표현할 에너지가 없다면, 감정적인 언어는 그냥 뒤에서 말해줘... 나도 그렇게 하니까... ㅋㅋ 이 쪽인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1-05-01 17:03   좋아요 2 | URL
han님/ 아하~~ han님! 저 왜이렇게 길게 썼나요!! 한님 말씀이 딱! 제가 하고 싶은 말 그대로입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요. 짝짝짝!!! 요즘 다시 읽고 있는 노아 트레버의 <다시 태어난 게 범죄>에서 이 문제에 대해 살짝 언급하더라고요. 노아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으로 ‘규정‘되는 아프리카 원시 신앙에 비해 기독교는 ‘상식적‘으로 이해됐다, 이런 식으로 말하더라구요. 추천해주신 책은 찾아보니 번역본이 없는데, 작가 이름으로는 책 두권이 있네요. 두 권 다 품절인데 한 권은 도서관에 있다고 합니다!!
찾아서 읽어볼께요.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공쟝쟝님/ 저와 동감해주시는 분이 많아서 제가 쫌 마음이 위로가 되려고 합니다. 심심한 감사를 드리고. 감정을 분석할 언어를 갈고 닦으시면 저 좀 빌려주시기를 또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 2021-05-01 13: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유튜브를 왜하는 지는 뇌과학이 알려주더라고요.. 도파민. 도파민 때문입니다. 빠른 도파민을 위해 ㅋㅋㅋ 그것은 절대 선악 의 문제 가 아닙니다. 뇌의 문제이지요. ㅋㅋㅋㅋ 자 저는 마저 뇌를 훈련하는 방법을 읽어야 할 참인데...
최근의 한국 정치상황에 한정해서만, 댓글 달자면 전 위악위선의 문제는 아니구... (ㅋㅋㅋ 이승만이야 말로 위선자...ㅋㅋ)... 혐오와 환멸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민주당에 느끼는 건 환멸이거든요. 꾸준히 가지고 있던 혐오감보다는 불현듯 나타난 환멸감의 강도가 더 센것 처럼 느껴지므로 일단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분노하죠. 저의 환멸감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는 것이 전 문제예요. ... 민주당에 기대 많았나봐.. 어쨌든 이 부정적인 두가지 감정이 정치상황이라 관심을 많이 갖지는 않지만, 둘다 똑같이 싫을 때 처럼 느껴질 땐 근현대사 책 보는 편이예요. 어디까지는. 그래. 그리고 어디까지는. 그래. 하고. 최근 미얀마 상황을 보면서는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아아, 그래. 그랬었지, 하면서. 하지만 역사는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 제가 살고 싶은 미래를 생각하면서 페미니즘을 읽습니다. 전 그래서 페미니즘을 많이 읽습니다. (기승전 페미니즘 우화화)

단발머리 2021-05-01 17:18   좋아요 2 | URL
도파민은 참으로 활발히 활동하는군요. 뇌훈련에는 자신이 없지만 좀 줄이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해요. 여러 분들이 비책을 알려 주셨어요. 저의 눈건강이 이제 안녕할 일만 남았습니다.

한국 정치상황에 대한 쟝쟝님 의견에 대해서는 이해한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실 제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가 민주당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저는 당원도 아닌데요. 하지만 세월호 사건이 그 시대를 살았던 40대 이상의 모든 사람의 책임이었던 것처럼, 민주당이 쟝쟝님에게 이 정도의 환멸과 분노를 불러왔다면, 저는 사과하고 싶어요. 처음 대통령 선거 투표를 했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민주당을 지지했고 그 정당에게 아직도 희망을 갖고 있고,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열어갈 가능성이 다른 어떤 정당보다 1% 정도는 많다고 믿으니까. 난 쟝쟝님에게 미안하다고, 실망시켜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답을 찾았던 그래서 특정 정치세력의 역사를 또렷이 기억하는 4,50대와 2,30대는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창이 다르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둘 다 아닐 때 페미니즘이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대통령 바뀐다고 다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 다 보았으니까요. 다만 정치 그리고 정치행정의 의미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페미니즘 사고에 근거한 판단이 어떻게 ‘작동‘되었는지에 대해 여성주의 역사가 가르치는 여러 지점이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어제 엘렌 식수를 빌렸어요. 책이 좀 낡았고, 2004년 출판되었던데. 곧 재출간 될건지 아니면 절판되기 전에 얼른 사는게 나을지 잘 모르겠어요. 좀 알려줘요. 기승전페미니즘.

- 2021-05-01 18:28   좋아요 0 | URL
스에상에.. 제가 단발님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줄이야....... ㅠㅠㅠㅠㅠ 근데 이거 참 어허 참 위로 된다...... 그런 걸까요? 이 환멸이 해소되지 않는 건 그들의 미안해하지 않는 태도 때문이었나? 얼떨결에 아무튼 감사합니다. 저도 미안해할줄 아는 어른으로서 책임감도 좀 배워야겠어요..!

책은 절판되기 전에 사세요!! 영미쪽 에 비해 엘렌식수나 이리가레 쪽은 번역이 빨리 될거 같지는 않아요. 이쪽 장르(프랑스 페미니즘? 정신분석페미니즘?)는 아직 인기 없는 것 같아요.. 당장 선명하거나 전투적(?) 지침을 주지는 않는 이유일까요..? 하지만 말장난(?) 같은 그 혼란한 글들이 저는 좋더라말입니다. 새로 나오면 그것도 사면되고 영영 안나오면 중고가격 오를테니 사두시고 저도 그 책 뭔지 알려주세여!! (그러게요 페미니즘!)

단발머리 2021-05-01 18:38   좋아요 1 | URL
미안해할 줄 아는 어른, 성찰하는 어른 역시 위험합니다 ㅎㅎㅎㅎ 나는 반성하는 인간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또 다른 위선의 회오리가 휘몰아치고... 하지만 쟝쟝님에 대한 제 사과는 진심이에요. 나는 진심으로 상심하고 실망한 모든 사람들에게... 나 혼자 미안합니다.

그 책은 쟝쟝님 방금 전에 읽은,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한없이 미뤄두었던, 쟝쟝님 글 읽고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한 <메두사의 웃음/출구>입니다. (아무튼 페미니즘)

- 2021-05-01 18:48   좋아요 0 | URL
사세요 사세요~ 전 이 책의 번역에 대해 불만이 없습니다! (아직 읽은 데 까지는!!!)

단발머리 2021-05-01 18: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러다 재출간 전에 덜컥 품절이라도 되면 어찌합니까! 바로 주문들어갑시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청아 2021-05-01 15: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누군가의 글에서(작가였던 걸로 기억함) ‘모든 사람은 위선 적이다‘라는 말을 보고 많은 위안을 얻었어요. 인간은 생각보다 거짓말도 많이 한다고도 하고..저도 제 앞에서 그러는 경우가 스크레치가 오래 남긴 하던데요.특히 거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잘 잊히지가 않더라구요. 그래서 <아 그때 이렇게 말할껄>이란 책도 읽었음요ㅋㅋㅋㅋ 😔

단발머리 2021-05-01 17:22   좋아요 4 | URL
네, 맞아요. 미미님이 인용해주신 어느 작가님의 말처럼 인간은 모두 위선적이죠. 저 역시 거짓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는 ‘난 뒤끝이 없어!‘라고 말하는 분들이 좀 무서워요. 그 분 앞에서 솔직히 이야기 하면 그런 분들은 앞끝작렬의 대서사시를 시연하실 테니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나만 솔직할 수 있는 이 대범함, 독단성! <아 그때 이렇게 말할껄> 그 책은 왜 읽으셨대요 😔

mini74 2021-05-01 1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끔 도저히 못 참고 뒤에서부터 읽기도 합니다. 미리 결말을 알고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읽기도 한답니다 ㅎㅎㅎ

단발머리 2021-05-03 08:01   좋아요 1 | URL
그 방법은 제가 가끔 사용하는 방법인데요 ㅋㅋㅋㅋㅋㅋㅋ 한 번은 히가시노 게이고 책을 미니님 말씀하신 방법대로 읽다가 직선적 독서법을 가진 가족들에게 걸려서 아주 스테레오 방식으로 잔소리를 들은 적도 있답니다. 토요일 늦은 밤에 드디어 사건이 일어났답니다 ㅠㅠ 이젠 빨리 읽을 수 밖에 없어요.
 










전통과 통념으로 퉁쳐졌던(?) 주장들이 ‘과학’의 옷을 입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났는가에 대한 고발.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과학에 대한 맹신이 어떻게 기득권을 보호하고 여성을 억압하는지 세세히 보여주는 책.








양심의 가책 없이 모성 거부 증후군에 대해 읽을 수 있는 어머니는 거의 없었다. 여성이면 누구나 때때로 "왜 그런지, 알고 싶어 하는 성가신 두 살배기의 열 번째 요구를 외면하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혼자 15분 동안 계속해서 울부짖게 내버려 두게 되고, 네 살짜리와 이야기하는 동안 딴 데 정신을 팔거나 혹은 아이를 "거부했다." 집을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하게 유지하려고 애쓰는 전업 엄마는 분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영아나 취학 전 자녀를 마치 다 자란 적수처럼 순간적으로 미워하게 된다. 모성이 "충족"을 뜻한다면 이러한 순간적인 적대감은 정상적이고 선하고 고결한 것에 대한 배신이자 은밀한 파괴임에 틀림없다. 과학은 이러한 감정들을 어머니-아이 관계라는 에덴 동산에 있는 뱀 같은 타락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 결과는 괴로운 자기의심이었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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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7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등! 을 축하드립니다!! (혹시 제가 일등할까봐... 걱정했거든요..? 안심ㅋㅋㅋ) 저도 이제부터 부지런히 읽어야겠어요! 바쁘다 바빠... 매월 말일마다...ㅠㅠ

단발머리 2021-04-27 16:13   좋아요 0 | URL
(ㄷㄷㄷ 들어온 이후로) 월말마다 마음 편안한 날이 하루도 없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들 수고많으세요!!! 저는 바버라 다른 책 읽고 있다는 거를, 그것을 나는 강조하고 싶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04-2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월 중순까지만 해도 저는 제가 1등을 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잠깐 한 눈을 팔다가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니...... 4월도 며칠 안 남았으니 얼른 커피 사발 앞에 놓고 읽어야겠습니다. 저 색연필은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단발머리님, 저걸로 줄 그으면 다 제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올 거 같아서요.

단발머리 2021-04-27 16:24   좋아요 0 | URL
물론 저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수연님 바쁜 틈을 타서 제가 과감한 깜빡이 신공과 엑셀 밟기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좋은 결과를 이루고야 말았습니다(소감은 윤여정급) 저 색연필은 스테들러 노리스 슈퍼 점보 색연필이며 (일명 코끼리 색연필) 색상은... 이것이 중요합니다. 레드가 아니라 보르도입니다. bordeaux 보르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스팀 청소기가 선사하는 세계


 

세탁기는 매주가 아니라 매일 빨래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진공청소기와 양탄자용 세제는 먼지와 살거나 카펫 위의 얼룩을 참고 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식기세척기, 빵 보온기, 냉동고, 믹서 같은 기계들은 모두 임무의 물질적 구현체이자 노동하라는 소리 없는 명령이다. (257)

 


한경희 스팀 청소기가 한참을 유행한 , 나도 한 번! 이라는 생각으로 스팀 청소기를 샀다. 진공 청소기만으로는 먼지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 없고 바닥은 물걸레질이 좋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엎드려 물걸레질 하는 게 즐겁지 않아, 과학 기술의 발전이 가사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몸소 체험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큰애를 유치원에 보내고 작은 애랑 둘만 있는 오전 시간. 진공 청소기로 청소한 스팀 청소기로 바닥을 닦았다. 아침 일찍 청소를 시작해도 스팀 청소기에서 뿜어지는 뜨거운 열기에 금방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곤 했다. 나시 티셔츠에 핫팬츠. 해변으로 달려 나갈 만한 복장으로 열심히, 성실하게 바닥을 닦았다
















『부엌 청소로 오르가즘을 느끼는 여자는 없다』. 제목 그대로다. 물론 나도 거실 바닥을 스팀 청소기로 박박 밀면서 오르가즘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순간순간 내가 해야만 하는 어떤 일이 있다고, 그리고 그 일이 바로 이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어렸고, 어린아이가 있는 집은 청결한 환경이 중요하니까. 나는 바닥 청소에 진심이었다. 나중에 집을 내놨을 , 보러 왔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바닥이 참 깨끗하다고 말했다. 똑같은 아파트 똑같은 바닥인데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나중에서야 진짜 우리 집 바닥이, 정확히 바닥이 그렇게나 깨끗하다는 걸 알게 됐다. 10여 년 전, 나의 젊음과 에너지를, 나는 바닥에 쏟아부은 셈이다.


 

지금은 열심히 바닥을 닦았던 그 집에서 나와 두 번 이사했고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 이제는 바닥 청소를 하지 않는다. 이사 오고 나서 전체적으로 두어 번 바닥 청소를 하긴 했는데, 스팀 청소기는 베란다에 내놓았다. 닦아도 닦아도 더러워지는 바닥에 더 이상은 진심을 쏟지 않기로 했다.

 

 


2)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핑계

 


이미 보았듯이 어머니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훨씬 더 보수적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페미니스트들도 가정중심성을 전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 게다가 페미니스트들은 사회 복지와 개혁운동, 심지어 참정권 투쟁까지 여성의 적극적 행동과 관련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핑계로 삼을 수 있었다. (275)

 


나는 이 문단을 월요일읽었다. 월요일‘Do not miss the sea’쓰고 나서, 누군가 문단도 읽어보라고 앞에 가져다 게 아닌가 싶었다. 페미니즘이 말하는 것 혹은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삶 전체를 포괄한 정도로 그 범위가 넓다. 숨겨져 왔던 여성의 역사에 대한 부분도 고 여성의 몸에 대한 논의도 있을 수 있다. 여성의 정치적 권리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가사부불노동, 돌봄노동, 꾸밈노동, 가정폭력, 성매매 역시 페미니즘이 다루는 중요한 의제들이.

 














그중에서도모성은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 『숭배와 혐오』에서 재클린 로즈가 말했던 것처럼모성은 우리의 개인적, 정치적 결함, 다시 말해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잘못된 일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떠맡은 희생양이다(6)’. 어머니는 이 세상 모든 실패의 이유다. 이제 여성의 사회 진출과 경제적 성공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용인하는 분위기지만,모성은 여전히 성역이다. 기혼이든 미혼이든 여성이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최후의 정서적 보루가 모성이다.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예능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야당 정치인은 야무진 외모와는 달리 살림에는허당임을 방송에서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줬다. 그래도 되었기 때문이다. 성공한 여성 정치인은 살림을 못 해도 괜찮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한 여성 정치인도 포기할 수 없는 일면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모성이다. 자녀에 대한 애달픈 마음, 아픈 자식을 향한 절절한 모정. 나는 모성이야말로 페미니즘의 가장 치열하고 섬뜩한 경합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월요일에, 나는 애나였다. <엄마 걱정> 썼던 기형도의 마음 같지는 않더라도 엄마가 그리운 마음에 대해, 조금은 안다고 생각한다. 어스름한 저녁, 퇴근길의 엄마를 마중하러 동생 손을 잡고 집을 나서고, 사거리 ㅇㄴ약국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노라면 신호등이 열 번이나 바뀌어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니 서로 연락할 수도 , 기다리다 기다리다 엄마랑 길이 어긋났을까. 이제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순간이면 거짓말처럼 엄마가 나타났다. 아빠가 작은 사업을 시작하시면서 엄마는 일하러 가지 않 대신 집에서 아빠 일을 도우셨는데(?) 그게 그렇게나 좋았다. 학교에 갔다 오면 집에 엄마가 있었다. 그런 , 엄마를 기다리는 . 애나였던 나를 뒤로하고.

 

 

오늘은 사라가 된다. 바다를 그리워하는 사라. 고향을, 고향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사라. 내가 이루었을지도 모를 사회적인 성취를 헤아려보는 사라. 세월 속에 감추어 두었던 꿈을 조심스레 꺼내 보는 사라. 돌아갈 없음에 안심하고 동시에 슬퍼하는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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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22 2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진심으로 바닥을 작은 걸레로 조금씩 훔치며 앞으로 전진하는 일을 참 좋아해요~ 휴일 저의 가장 큰 유희랍니다~ 헤헷(일주일에 한 번이라 그럴 수도..ㅎㅎ)

단발머리 2021-04-24 18:01   좋아요 1 | URL
휴일의 유희가 너무 긍정적이신거 아닌가요? ㅎㅎㅎ 저에게는 너무 높아보이는 유희인데 말입니다^^

유부만두 2021-04-22 20: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오늘 사라 이야기 번역본을 도서관에서 대출했고요, 바닥을 닦지 않았고요, 볕이 좋은 날이라 빨래를 이모작 했습니다. 그런데 건조대에서 마른 빨래들이 ‘저절로’ 옷장으로 이동이 안되네요, 21세기에... 아이들이 벗은 옷을 세탁기에 분류해 넣지도 않고... 뭣보다도 밥, 밥, 밥....
제겐 바다가 있던가, 없던가, 가물가물합니다.

단발머리 2021-05-03 08:02   좋아요 1 | URL
저도 이제 바닥을 닦지 않고요. 빨래는 이모작이 흔하지요. 흰옷, 검은옷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 마른 빨래들 ‘저절로‘ 모드는 상당기간 실현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1세기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에게도 사실 바다가 멀리 있기는 합니다. 기억 속 어렴픗한.... 아, 나의 바다여!

2021-04-22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4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3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3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3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3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3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0여 년 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는다. 동생을 낳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아빠, 동생과 함께 외딴곳에 살고 있는 애나는 아빠가 낸 신문의 아내 구함광고를 보고 멀리 바닷가에서 한 달 동안 그들을 방문한 사라가 새엄마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동생 칼렙에게는 노래를 불러 줄 엄마가, 애나에게는 머리를 묶어줄 엄마가, 아빠에게는 아내가 필요하다.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걸 아는 건 속상한 일이다. 인간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가진 삶의 조건은 사회의 법과 제도, 문화 속에서 가공되기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그 투명한 상자밖을 상상하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최근에, 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유사 이래 가장 강력하게 만들어졌기에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을 뿐이다.

 


사라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오빠가 결혼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집은 오빠의 집이며, 그와 결혼한 여성, 올케의 집이 되었기에 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머무를 수 없다. 그녀는 바다를 사랑하고, 물개를 사랑하고, 조개에서 들려오는 바다의 소리를 사랑하지만, 그 곳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집을 소유할 만한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면, 아마 그녀는 아내 구함광고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바다를 그리워하며, 고향을 그리워하며, 오빠와 이모(고모)들을 그리워하면서 그녀는 생각한다. 나는 여기 살 수 있을까. 고향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에서,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남매의 아버지와 결혼해서, 처음 보는 사람의 친구가 되어 살 수 있을까

 

 

그녀에게 다른 선택은 없다. 자신의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 결국 그녀는 이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이 아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으니, 아무 말 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사라의 시선을 느낄 때 아이들은 불안하다. 그녀가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면 어쩔까 두려운 마음이 가득하다.

 



1900년대 미국에 살고 있는 사라는 자유롭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혹은 그렇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녀의 처지는 오히려 고대의 노예,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와 더 비슷하다. 그들은 원래 살던 곳에서 강제로 이주되었고, 가족들과 이별했으며, 어느 곳에서든 자신의 소유라 할 만한 것을 갖지 못했다. 그녀의 선택을 선택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녀의 결정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 새로운 터전에서 그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는 애나는 외친다. ‘아내 구함광고를 보고 이웃집 매튜 아저씨와 결혼한 매기 아줌마와 사라가 자신들의 고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외친다. 크게 말할 수 없으니 속으로만 외친다. 그리워하지 말아요. 바다를 그리워하지 말아요. 언덕을 그리워하지 말아요. 우리랑 살아요. 우리랑 여기 같이 살아요.

 


어떻게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바다를, 고향을, 고향에 두고 온 사람들을. 하지만,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엄마가 필요한 마음을, 엄마가 그리운 마음을. 그 쓸쓸함을. 그 사무친 외로움을. 책장을 넘기면 사라가 된다. 바다를, 고향을, 고향에 두고 온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사라가 되어 이 상황의 억울함과 답답함을 마음 한쪽에 간신히 쓸어 담는다.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음 책장을 넘기고 나면 이내 애나가 된다. 엄마가 죽고 태어난 동생. 매일 엄마 이야기를 묻는 동생과 이제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아빠. 내게도 엄마가 있었으면, 머리를 땋아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사라가 우리를, 우리 집을 선택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저자 스테퍼니 스탈은 어쩔 수 없는(?)의 맥락에서 파트 타임으로 할 수 있는 일만 구한다. 현관 열쇠를 목에 걸고 다니던 아이, 발표회에 엄마가 오지 못해서 이웃 아줌마가 전해준 꽃 한 송이를 받아들었던 스테퍼니는 자신의 아이에게 더 많은 시간을 내주려 한다.

 


어머니는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분자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그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 내가 생후 1개월 무렵일 때 어머니는 일터로 다시 돌아갔다. 그때부터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지내는 내 삶이 시작된 셈이다. (237)

 


나는 나를 낯선 이의 손에 맡겨야 했던 부모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남의 손에 자란 내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는 말할 수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 중 한 분이 출장을 떠날 때마다 나는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렸다. 학교가 파한 후 빈집에 들어갈 때 귓가에 울리는 내 발자국 소리가 왠지 서글펐던 기억, 초등학교 학예회 때 꽉 찬 관중석 어디에도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주여 오소서>를 부를 때 느낀 외로움 등이 내가 치러야 했던 대가였다. 나는 연극이 끝난 후 무대 뒤에서 한 이웃 아주머니가 자기 자식에게 주려고 가져온 꽃다발에서 뽑아 낸 꽃 한 송이를 건네받은 적도 있었다. (238)  

 


어쩌면 그녀는 어린 시절의 그 아이를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한히 펼쳐진 미지의 세계에 대해 언제든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 엄마! 하고 불렀을 때 옆에 있어 주는 사람. 그 사람이 필요했기에, 그 사람을 그리워했기에 스테퍼니는 자신의 아이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준다. 같이 있는 엄마가 되어준다.

 


스테퍼니의 책을 읽을 때 나의 고민은 그녀의 것과 똑 닮아 있어서 지금도 그녀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시간은 흐르고 아이들은 자라고, 이 코로나 시대가 얼추 지나고 나면 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지게 될 테지만. 이 모든 것은 내게 하나의 변명이 될 수밖에 없을 테지만. 결국 변명을 내 앞의 큰 방패로 삼아 하는 이야기일 테지만. 나는 애나가 되려고 한다. 이기적일지 몰라도 애나가 되려고 한다. 애나가 되어 말하려고 한다.


 

바다를 그리워하지 말아요. 바다를, 바다를 그리워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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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4-19 09: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글이고 어쩐지 어제 읽은 정희진쌤 책도 생각이 나고요. 맨 위에 언급하신 원서를 나도 사서 읽겠노라 장바구니에 넣었더니 2016년에 이미 구매한 책이라고 나옵니다. 그러고보니 그 때 단발님께 추천 받아 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있는 줄도 모르는채로 지내고 있......

저는 이번 정희진 쌤 책 읽으면서 빨래하는 페미니즘과 아내 가뭄을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책을 다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팔아버린 것 같은데 ㅠㅠ
지금 읽으면 그 책들 모두 또 다르게 읽힐 것 같아요. 요즘엔 정희진도 다 다시 읽고 싶고 그래요. 읽어야 할 것들도 다 못읽고 있으면서 왜이렇게 읽기 욕심은 ...

아무튼 집에 저 책 있으니 저도 읽어볼래요!

단발머리 2021-04-24 18:21   좋아요 0 | URL
저 이번에 두 번째 읽는데 너무 좋더라구요. 다락방님 감상도 많이 궁금해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 그런지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는것 같더라구요.

저도 정희진쌤 책 읽으면서 여러권 책 뽑아두었는데 <세상과 나 사이>의 진도가 지지부진하다고 합니다. 읽기의 욕심은 우리 모두의 오랜 고민이며 걱정이며 염려이며.....

수이 2021-04-19 09: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울...울어도 될까요 ㅠㅠ 모두 단발머리님 페이퍼에서 한 번씩 보았던 스쳐지나갔던 책들인데 이 페이퍼를 읽고 저 책들을 읽지 아니한다면 아니될 거 같습니다. 근데 태그 왜 이렇게 아련하면서도 슬프지요........

단발머리 2021-04-24 18:23   좋아요 0 | URL
울지 마세요, 수연님!!! 울지 말고 이 책 같이 읽어주세요. 수연님께는 수연님만의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요. 강추합니다^^

바람돌이 2021-04-19 10: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4살 때 어린이집 처음 보내고 아이가 자꾸 운다고 해서 일하다가 어린이집에 가봤을 때 우리 딸 얼굴이 떠올라서 울컥!! 아이를 키운다는 건 너무 큰 행복이고 축복이지만, 아이에게는 부모가 곁에 있어주는게 너무 중요하지만, 그렇게 아이 옆에 있어주기 힘든게 지금의 삶이네요. 좋은 책 소개도 좋고, 마지막 문장도 그 속에 담긴 복잡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네요.

단발머리 2021-04-24 18:28   좋아요 0 | URL
전 아롱이가 그랬어서 ㅠㅠ 유치원 생각하면 항상 그 시간들이 떠올라요. 바람돌이님 댓글 읽는데 신발장 앞에서 울던 아이들 막 기억나고 그래요. 저의 복잡한 마음이 전해진다니 그것도 감사한 일이구요.
책을 읽고 댓글로나마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시간을 기억하는 일이 너무 소중하네요. 감사해요, 바람돌이님!

- 2021-04-19 16: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끔 평행우주를 생각해요. 어느 우주의 사라는 어떤 선택을 저느 우주의 사라는 저떤 선택을. 어디서든 저기서든 다르게 살아가고 있을 다른 우주 속의 다른 나들. 그럼 쫌 덜 슬퍼요. 다른 우주 속의 다른 나는 여기 지금의 나를 한번쯤 꿈꿔 봤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으로.
바다를 그리워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러지 않아도 좋겠지만요 ^^

단발머리 2021-04-24 18:34   좋아요 2 | URL
책 마지막에 사라가 아이들을 위해 색연필을 사 와요. 파랑색, 회색, 초록색. 칼렙이 사라가 바다를 가져왔다고 그러거든요.
저 우주 저편의 다른 선택을 한 제가 있다면, 사라가 있다면, 아마도 잠깐 만났던 이 아이들, 너무 예쁘고 귀여운 이 아이들을 그리워할 것 같기도 해요. 어느 선택이든 무언가를 그리워할 수 밖에 없는게 결국 우리 인간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요.

바다를 그리워해도 괜찮다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후회하지 않고 아쉬워하지 않으면서... 그래도 바다를 그리워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