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 한국사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조선 1 민음 한국사 1
문중양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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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근대’의 마지막 시대, 조선

가장 가깝고, 가장 잘 알고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모르는 이야기, 가까운 과거, 어제 우리들의 이야기, 조선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2. 정화의 항해

 

1415년(태종 15년) 정화의 보선이 인도양을 돌아 아프리카까지 다녀오는 대항해를 마치고 황도 남경으로 개선했다. 이 배에는 아프리카에서 바치는 목이 긴 짐승이 타고 있었다. 명의 관리들은 이 신기한 짐승을 보고 지혜와 덕망을 갖춘 성인이 나오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전설의 일각수 기린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야심 찬 군주 영락제에게 바치는 아부였다. 그러나 영락제는 “짐은 성인이 아니고 이 짐승도 기린이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쳤다. (12쪽)

62척의 대형 함선과 100척 가량의 소형선으로 이루어져, 총 2만 7800명이 탑승해, 서양취보선(서양 각지의 지배자에게 내리는 황제의 하사품과 그들이 황제에게 바치는 보물을 운반하는 배)으로 불리며 싱가포르에서 모가디슈에 이르는 광대한 무역로를 구축했던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최대 선단, 정화의 대함대는 중국 지주 계급인 사대부들의 이데올로기와 몽골의 위협등으로 계속되지 못하고, 무역 대신 농업 생산을 장려하는 국가 정책에 의해 흐지부지되고 만다. 보선을 비롯한 배들은 뜯어서 연료로 쓰고, 선원들은 집을 짓거나 베트남과 전쟁을 하는데 보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만큼 어이없는 일도 없을 테지만, 만약 그 때, 중국이 바다 저 편 세계에 대한 탐험을 계속했다면,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지 않은 신세계에 대한 개척을 역동적으로 해냈다면, 그래서 아메리카를, 아프리카를, 오스트레일리아를, 자신들의 지배 아래 두었다면, 지금의 세계 공용어는 영어가 아니라, 중국어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본다.

3. 15세기 조선이 만든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한 폭의 비단 위에 바다와 육지가 어우러진 세계를 조선의 눈, 조선의 자부심으로 표현한 지도이다. 여기에는 조선과 직접 교류한 동아시아뿐 아니라 서남아시아, 유럽, 아프리카까지 그려져 있다.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 이른바 ‘신대륙’으로 불리는 지역을 제외하고 당시 유라시아 사람들이 알고 있던 세계는 모두 망라된 셈이다. (52쪽) 이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두 장의 지도를 교정하고 합쳐 만들어진 것으로(53쪽), 각 대륙의 윤곽이나 나라별 면적 등은 객관적 실재보다 매우 과장하고 있지만 포괄하는 지역의 광범함은 당시 어느 지도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55쪽) 

당시 우리나라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소중화, 더 나아가 문화적으로는 중국과 동등하다는 자존의식이 이 지도에서는 우리나라 국토 면적으로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실제로 이 정도의 영토였으면 좋겠다는, 이런 허튼 생각을, 또 해본다.

이슬람과 조선의 우주관을 보여주는 사진 역시 눈길을 끈다. 지구와 천체가 모두 둥글다고 생각한 이슬람 세계의 우주관과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양의 전통적 우주관을 통해, 이슬람의 천체 과학의 눈부신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4. 빛나는 유산, 한글

세종대왕은 한 치의 의심 없는 천재형 왕이다. 아니, 세종은 천재다. 천재인데 부지런하다. 부지런한 천재왕. (밑에 사람은 힘들어 죽을 지경이다) 쓰시마 정벌, 영토 확정, 농업 장려, 공법 실시, 천문학 장려, 천문 의기 창제, 예악 정비등 가히 전방위적이라 할 만한 업적들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최고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한글 창제다.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다른 왕들, 예컨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백제의 근초고왕, 신라의 태종무열왕, 고려의 문종, 조선의 정조 등은 일세를 풍미한 군주로서 자신들의 왕조와 백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들이 세운 업적이 현대 한국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세종은 다르다. 세종은 왕정 시대의 다른 군주들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근현대 한국의 지도자들보다도 더 현대 한국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종이 만들었지만 그의 시대보다는 현대 한국에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한글 때문이다. 한글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고, 한국인이 독창적이고 우수한 문화를 소유한 민족임을 만방에 과시하는 최고의 지표이다. (100쪽)

오늘의 리뷰를 가능하게 하는 이 아름다운 한글의 창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말과 글이 따로 노는 상황에서 한자, 한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보통 백성과 여성은 많은 불편을 겪었지만(165쪽), 과거 시험을 통해 양반 관료로 편입되어 정체적 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챙기는 지배층은 보통 백성까지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의 출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69쪽)

세종은 매우 은밀하게 한글 창제를 진행했다. 한글이 완성된 후, 세종은 한글을 이용해 처음으로 공개적인 사업을 추진한다. 집현전의 실제 책임자인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여러 명의 신하들이 상소를 올린다. 언문 창제와 같은 중대한 일을 신하들의 공론을 모으지 않고 진행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임금이 건강이 안 좋아 요양을 떠나면서까지 그리 급한 일도 아닌 언문 관련 사업에 신경을 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171쪽). 이에 대한 세종의 답이 걸작이다.

상소문을 받아 본 세종은 진노해서, 상소에 참여한 최만리 등 7명의 집현전 관리들을 불러다 호통을 치는데, “그대들이 운서를 아느냐? 사성과 칠음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는단 말이냐?” 하고 언성을 높인다. 음운학에 대한 세종의 학문적 자부심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글은 당시 한국어의 음운 체계를 정확하고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음운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가 아니면 그런 일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종은 그러한 언어학적 식견을 가지고서 한글을 만들었으며, 기득권에 젖어 있던 유신들의 반대를 예상하고 있었기에, 한글 창제 사업을 신하들 몰래 은밀히 추진했다(171쪽).

근면성실한 천재왕의 강한 결단으로 오늘의 ‘한글’이 탄생했다. 독자적인 문자, 과학적 원리에 의해 창제된 한글은 우리의 자랑이자, 보물이다. 특히, 한글 사랑은 문자를 보낼 때, 더욱 극명해진다. 다른 언어는 잘 모르겠지만, 영어만 놓고 비교했을 때, 한글처럼 문자보내기가 용이한 문자가 있나 싶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과거 ‘천지인’ 조합으로 인한 문자 보내기는 한글, 오직 한글로서만 가능한 놀라운 ‘문자 보내기’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5. 아름다운 책, 아름다운 사진들

책의 판형이 크고, 무거워 들고 다니면서 읽기는 조금 어렵다. (굳이 들고 다닌다면 말릴 수는 없겠다.) 책 속의 여러 삽화와 사진들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노력과 정성을 보여준다. 특별히 좋았던 점은 ‘조선의 때 이른 절정’을 보여주면서 주변 국가를 비롯한 세계 정세도 소상히 안내해 줬던 것이다. 넓고 넓은 우주,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땅에서, 우리만 달랑 살았던 것은 아님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해 준다. 

그나저나, 예쁜 사진은 어떻게 올려야 되는건지 도통 모르겠다. 나는 아이패드로 찍어 N드라이브에 올리고, 네이버에 접속해 사진을 내 컴퓨터에 다운 받은 후, 그림판에서 정갈하게 잘라내기를 한 후에, 알라딘서재에 올리는데, 들이는 정성에 비해 사진이 넘 별로다.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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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4-04-09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단발머리님의 이 글 보니, 이 책 저도 사서 보고 싶어요. 그렇게 할래요^^.

단발머리 2014-04-10 11:16   좋아요 0 | URL
앗!! 테레사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어요^^
이 책 아주 재미있구요. 두고두고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요 위에는 쓰지 못했는데요. 저는 알라딘서재 민음사 방에서 [서평단모집] 이벤트를 통해서 이 책을 받았어요.
제 생각으로는 다음에 나오는 책들도 이벤트를 계속 할것 같아요.
책이 필요하시면, 이벤트 응모해보시면 좋을 듯 해요~~~
 

 

 

 

 

 

1. 벙커에서 강신주를 처음 본 날

엄마야! 깜짝 놀랐다. 동영상에서도 실제 나이보다는 어려보이는 외모라 생각했는데, 실제는 더했다. 자신있는 말투에 넘치는 활력까지. 뻥을 조금 더하면, 30대 후반으로까지 보일 정도였다. 참고로 나는 그 날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다.

2. 3M이 잠든 어제 밤

[망각과 자유]를 들고, 하염없이 책을 쓰다듬다가 드디어, 마침내, 결국에 머리말을 읽기 시작하는데,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이 책을 처음 접한 일반 독자에게는 작은 책으로 보일 테지만, 동시에 읽다보면 만만치 않은 책으로 다가올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 밀도가 아주 센 책이니까요. 글을 다시 다듬으면서 애잔하지만 동시에 정겨운 마음이 자주 들었습니다. 장자로 박사 학위를 방금 마쳤던 패기만만한 젊은 학자의 모습, 과거 제 모습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11쪽)

앞부분을 읽어나가면서 그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장자의 ‘타자’라는 개념, ‘망각’이라는 개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출판사에서는 팔릴 책을 쓰고 싶어한다. 사람들이 돈 주고 사 볼 책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름 있는 저자를 찾아가 이러 저러한 책을 쓰자~ 할테다. 그런 일들이 모두 무의미하다거나, 불필요한 것은 아닐 테지만, 가끔은 저자 자신이 정작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가볍게, 너무나 쉽게 이해될 수도 있을테다.

나는 강신주의 책 대부분을 좋아하지만, 이 책은 이전과는 조금 더 다른 느낌이다. 그의 말처럼, ‘방금 박사학위를 마친 젊은 학자 강신주’의 모습이 설핏 보이는 것 같다.

여러 자리의 사진에서 보면 강신주는 ‘등산바지’ 차림인 경우가 많다. 워낙 산을 좋아하기도 하고, 또 등산복이 편안하다는 얘기를 자주하고는 했다.

이 책의 느낌은 이렇다.

맨날, 허구헌 날, 항상 ‘등산바지를 입는 강신주’만 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장을 차려입은 강신주’를 만나게 된 거다. 더 각이 잡히고, 더 정숙한(?) 느낌이다. 더 진중하고, 더 클래식한 느낌이다.

3. 일부러 찾은 건 아닌데

아침에 트위터를 확인하다 이런 영상을 보게 됐다.

강신주는, 강신주와 김어준은 멋지게 양복을 차려 입었다.

김어준 강신주 지인들만 초대해 1년 가약

 

 

 

 

 

 

 

 

직장에 매인 몸은 아니지만, 가정에 매인 몸이기에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일단 마음으로는 토크 콘서트에 가고 싶다.

나는 김어준이 보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다.

나는 강신주가 보고 싶어서 거기에 가는 게 아니다.

나는 강신주를 놀리는, 강신주를 놀려먹는 김어준이 보고 싶어서, 거기에 가고 싶다.

제발, 가능해라. 가정 형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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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4-03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능한 형편이길 같이 기도해드립니다. ㅠㅠ

단발머리 2014-04-03 10:45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다락방님.
다락방님의 기도가 꼭 효과가 있어, 즐거운 시간이 가능하기를...
특별히, 우리 가정이가 도와줘야할텐데요*^^*

순오기 2014-04-04 0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아~ 단발머리님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꼭 가정형편이 허락되어 1년가약에 동참하시기를~~~ ^^

단발머리 2014-04-04 11:07   좋아요 0 | URL
아하.... 순오기님, 안녕하세요~~
그러게요. 저도 정장으로 쫘악 빼입고 갈수 있는데요^^
 
손에 잡히는 교과서 독서.토론.논술 5학년 - 창의적 사고력을 키우는 손에 잡히는 교과서 독서 토론 논술
글샘교육 편집부 지음 / 글샘교육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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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딸롱이 수업 시간에 필요하다고 해서 구입합니다. 독서와 토론과 논술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책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서도, 일단 필요하다고 하니, 읽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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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과 자유 - 장자 읽기의 즐거움
강신주 지음 / 갈라파고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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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나라는 절판이 쉽게 되는 것 같다. 김훈 작가님 책도 여러권이 절판이다. [철학vs철학]은 시작도 안 했고, [김수영을위하여]도 다시 읽어야 하지만, 일단 구입하고 본다. 다시 나와준 것만도 고마워 절하게 생겼다. 당일배송이 이렇게 좋은건지 새삼 깨닫게 되는 아침이다.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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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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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딜리팅‘ 의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 우리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확장해나가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를 줄여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모르는 세계는 늘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게 마련이다. 구동치는 굳이 물건을 없애는 것보다는 물건의 위치를 바꾸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구동치는 두 개의 세계 모두에서 물건을 없애는 것을 풀 딜리팅 full deleting이라 불렀고,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내가 모르는 세계로 물건을 옮기는 것을 하프 딜리팅 half deleting이라 불렀다. 물건을 그저 옮기는 것만으로 딜리팅이 가능한 것이다. 의뢰인의 입장에서는 풀 딜리팅이든 하프 딜리팅이든 문제 될 게 없었다. (85쪽)

 

구동치는 딜리팅 전문 탐정이다. 죽은 사람들의 휴대전화기를 찾아 없애주고, 죽은 사람의 컴퓨터를 망가뜨리고, 죽은 사람의 일기장을 찾아서 갈기갈기 찢고 불태우는 일(84쪽)을 한다. 소설은 구동치의 의뢰자 중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면서 일어난 일들을 보여준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만약, 내가 생각해본다면, 난 어떤 물건의 딜리팅을 의뢰하게 될까?’였다. 일단, 이 노트북을 딜리팅 의뢰하겠다. 쓰단 만 글, 어디에다 대고 하는지 모르겠는 하소연 글, 내가 싦어하는 사람 명단 및 소소한 욕 등이 저장되어 있는 이 노트북. 노트북 딜리팅 의뢰. 그 다음으로는 곱슬머리 여드름투성이 중학교 시절 사진들 딜리팅 의뢰, 옷방 유아용의자 밑 쇼핑백 속에 00오빠가 보낸 편지꾸러미 딜리팅 의뢰, 휴대전화기는 2G라 딜리팅 하고 말것도 없고. 아, 참.

그리고보니, 진짜 딜리팅할 것들이 막 생각난다.

유통기한 확인조차 불가능한 냉동실 속 냉동식품들, 냉장고 속 시들시들 야채들, 각종 서랍 속 각종 물건들, 언제 쓸지 모르겠지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각종 물건들. 써놓고 보니, 이건 아니다 싶다. 이 책은 봄맞이 대청소와 정리 정돈에 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딜리팅에 대한 책이다. 딜리팅 의뢰, 딜리팅 의뢰를 원하십니까.

2. 구동치는 김중혁? 

소설은 의뢰인이 죽은 후에야 일이 진행되는 딜리팅에 대한 것이고, 소설 초반 의뢰인 중 한 명이 죽게 된다. 어둡고 자칫 음산해지기 쉬운 분위기를 화~하게 해주는 건, 악어빌딩에 사는 사람들이다. 주변에서 흔히 만날 것 같지만, 실제로도 만나고 싶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 제일은 역시 구동치다. 구동치에 대한 묘사 중 키에 대한 부분이 2번 정도 나오는데, 두 번 다 구동치가 보통 사람들보다 키가 무척이나 크다는 내용이다.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든 (그 의도일수도 있겠지만^^), 나는 구동치를 김중혁 작가님이라고 생각한다. 구동치는 김중혁이다.

남자는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열자 비닐막 아래 있는 사진이 보였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문질렀다.

“그런데, 그냥 줄 수는 없지 않겠소?”

남자가 지갑 속에서 사진을 꺼내며 말했다.

“그냥 줄 수 없으면, 반으로 접어서 주십시오.”

구동치가 웃으며 말했다. (415쪽)

 

이 외에도 깨알 재미 에피소드가 수두룩 빽빽, 촘촘하지만, 일단 이 정도만 하기로 하고.

3. 빛나는 어록

킥킥거리며 읽어갔던 부분이다. 이 멋진 소설을 작가가 쓴 원문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내가 한국어에 이렇게도 능통하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쁘다.

“아 역시, 구 선생님이시네요. 멋진 말씀입니다. 예방이 의심보다 낫다. 제가 아이들에게 인성 교육을 할 때 그 말도 꼭 하겠습니다. 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꼭 밝히겠고요.”

“아뇨, 뭐 그러실 것까진 없고요.”

“부담스러우시면, 제가 한 말로 하고 이렇게 고쳐도 되겠습니까?”

“어떻게요?”

“인자무적이요, 예방 우선이다. 어진 자에게는 적이 없고, 적의 공격을 예방하는 자에게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뭐든지 인자무적이냐. 아주 지랄하고 자빠졌다.” (28쪽)

 

“사진 안 찍으시면 안 되냐고요.”

“뭐요?”

“사진 왜 잘 안 나오는지 모르죠?”

“무슨 소리예요?”

“사진이 왜 자꾸 이상하게 나오는지 모르죠? 얼굴이 별로니까 사진이 잘 안 나오는 거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니까 일찌감치 포기하시라고요.” (168쪽)

 

4. 작품은 작가보다 위대하다.

소설가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부쩍 드는 요즘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구동치=김중혁이라 생각할 때가 참 많았지만, 사실, 철물점 백기현도, 합기도관장 차철호도, 영민한 이영민도, 선배 형사 김인천도, 피시방 이빈일도, 셰프 박찬일도 모두 다 김중혁이다. 그들 모두는 김중혁의 자식이고, 김중혁의 인형이고, 김중혁의 작품이고, 그리고 모두 다 김중혁이다. (내 진심으로, 김작가님을 좋아하니까, 천일수는 일부러 빼주는 거지만, 만일 작가님이 ‘천일수도 나야.’, 그렇다고 하면, 뭐, 그것도 OK.)

그들은 모두 김중혁이고, 각자 백기현이고, 차철호고, 이영민이고, 김인천이고, 이빈일이고 그리고 박찬일이다.

어설픈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 하나. 김작가가 위대하지 않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어쨌든, 작품은 작가보다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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