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패의 기억 

 

 

 

 

 

 

 

 

 

 

 

 

 

 

 

무지의 소치, 무식의 발로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전 국민의 애독서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1-남도답사 일번지]을 펴들었을 때, 나는 5장을 넘어가지 못 했다. 내가 얼마나 우리 고유의 문화를 모르고 있었느냐를 확인하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아무래도 재미가 없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도대체,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 흘러 바야흐로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7-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제주도편]이 발간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도전에 나섰다. 국내의 유명 관광지나 명승지는 안 가봐서 모른거고, 제주도는 여기 저기서 들은 풍월이 있으니, 그걸 밑천 삼아 도전해 보자 했다. 결과는 역시 참패였다. 이 시리즈는 안 되겠다, 실패!를 외치려던 찰나였다. 

2. 주황색 표지 

내가 유치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속물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책 안 읽는 사람들은 다 그렇더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책표지는 중요하다. 책 디자인은 중요하다. 책과의 첫 대면이 만족스러울수록, 인상적일수록 실제 독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내 경우엔 그렇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일본편 1 - 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는 예쁜 주황색 (안 예쁜 주황색, 탁한 주황색도 있다) 바탕은 일본 전통 의상인 기모노 문양이고, 도자기는 이도 다와, 이마리야키, 가키에몬, 에가라쓰, 사쓰마야키 등 본문에 나오는 도자기 작품들이다. 제목 글씨는 조선 후기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언간독]에서 집자한 것이라 한다.   

이 책을 보는 순간, 다시 한 번 도전의 열망이 솟아 올랐다. 그래, 다시 시작해보자. 국내편 7권을 다른 사람이 집필한 것도 아니고, 동일 저자의 동일 저작일텐데, 세상에, 이 책은 너무나 재미있어 술술 넘어간다. 예쁜 주황색 때문인가. 아무튼 놀라운 일이다. 

3. 쌍둥이 형제 이야기 

아랍인과 유대인의 경우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피를 나누었으면서도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 (...) 한국인과 일본인은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그들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 

(6쪽,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 재러드 다이아몬드, 김진준 옮김, 문학사상사 1998, 654쪽) 

몇 년 전 [총, 균, 쇠] 읽었을 때도, 뒷부분의 추가 논문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는 한국과 일본에 대한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관심과 애정이 오롯이 느껴졌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일본은 더더욱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겠지만, 외부에서는, 서구에서는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 성장기를 함께 보낸 2) 쌍둥이 형제. 1) 후천적 경험의 많은 경우를 서로 공유하고 있고 2) 유전적, 생물학적 일치를 보여주는 친인척.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이 그러하다. 이제는 서로에 대한 콤플렉스를 이겨내고 상대국을 긍정적으로 인정해야 할 때. 일방적 시각에서 쌍방적 시각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유홍준님의 주장은 '일본 답사기'를 시작하는 학자의 지점으로 아주 적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 문장들은 옳다. 옳고, 웃기다.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말하자면 아직 분단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너도 나도 얘기하듯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 남한만으로도 더 이상 일본에 꿀릴 것이 없다. 바둑도 피겨스케이팅도 골프도 우리가 더 잘 한다. (5쪽)  

하핫. ^^

임진왜란이 후대에 주는 교훈이 한둘이겠습니까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떠오르는 것 두 가지만 얘기하겠습니다.... 첫째는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임진왜란의 전승국은 조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의 침략을 물리쳤죠. ... (중략) ... 조선은 전승국이었기 때문에 전후 국가 재건 사업에 박차를 가하여 더욱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결과 100년 뒤 숙종, 영조, 정조 연간의 문예부흥을 맞게 됩니다. 이에 반해 일본은 패전국에서 당연히 일어나는 정변이 일어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로 정권이 교체되죠.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가 요동을 쳐 명나라는 청나라에 망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조선이 건재한 것은 전승국이었기 때문입니다. (79-80쪽)

임진왜란 직후 조선의 상황은 끔찍했을 것이다. 국토 전체가 전쟁터였으니, 여기저기 시체가 즐비했을테고, 젊은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에 동원되었을테니, 전후 작업도 암담했을 것이다. 무능한 조정은 임금을 가운데에 두고 여기저기 도망다니기 바빴을테니 위신이 안 섰을테고, 명군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전쟁터에서는 관군보다 의병이 주력 부대였으니, 버려진 논밭은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졌을 것이다. 이 모든 전란의 책임은 조선에 있다. 이것은 조선의 당쟁 싸움 때문이다,라고 배웠다. 그래서, 전쟁의 원인과 전쟁의 진행, 전쟁의 결과를 조선이 모두 감당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유홍준은 말한다. 

"조선은 전승국입니다. 일본의 침략을 물리쳤죠."

맞다. 조선이 전승국이다. 일본도 중국도 패전의 상황 때문에 정권이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큰 흔들림 없이 나름대로 전후 복구 사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패배주의에 찌든 비관적 판단은 그만. 민족주의를 앞서운 어설픈 해석도 사양. 사실을 사실대로만 말한다. 
조선은 전승국이다.

오징어를 먹으면서 나는 근래에 와서 읽은 정약전(1758~1816)의 [현산어보]가 떠올랐다. 그의 흑산도 유배 시절 저술한 [현산어보]는 [자산어보]라고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는 한자를 잘못 읽은 것이다. (96쪽) 

유흥준님이 얼마나 타고난 이야기꾼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이런 식이다. 오징어를 먹으면서 오징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현산어보]를 떠올리고, [현산어보]를 이야기하자니 정약전과 그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징어-현산어보-정약전을 넘나드는 이 찰진 이야기를 그 누가 지루하다 하리요. 

가라쓰야키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 분청사기 기법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 이를 일본식으로 변화, 발전시킨 것이다. (120쪽) 

그들은 우리의 분청사기를 미시마, 하케메, 고히키, 가타데 등으로 더욱 변화, 발전시켰다. 이렇게 섬세하게 분류해서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그 미감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는 얘기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도자기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조선 분청사기가 뛰어나다는 주장만 했지 생활 속에서 그것을 즐기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 도자의 가치를 일본인들은 일찍이 알아챘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마냥 즐기고 있다. 우리는 고유기술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활용할 줄 몰랐고, 일본은 그 고유기술을 통째로 가져가 자신들의 위대한 도자기 문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반성할 대상은 우리 자신에 있다. (123쪽) 

도자기에게까지 갈 것도 없고, 그릇에도 접시에도 관심이 없는 나는 시집올 때 엄마가 사 주신 '한국도자기'를 아직까지 사용한다. 백화점에서 5만원이상 구매시 주었던 사은픔 면기세트도 잘 사용하고 있다. 이쪽으로는 도통 관심이 없다. 물론, 우리 나라에도 그릇에 관심이 많은사람들이 있을테다. 다른 집에 놀러갔을 때, 근사한 찻잔이나 그릇을 볼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나는 그 유명한 찻잔과 그릇의 이름도 모른다. 그 엄마들께 죄송^^) 

일본 사람들은 우리의 분청사기를 더욱 변화, 발전시키고, 유럽의 주문에 따라 다채롭게 제작했다니 정말 대단하다. 책에서도 확인되다시피, 임진왜란, 정유재란때에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은 대부분 공주, 남원, 김해, 울산 등 삼남 지방의 도공들이었다. 조선시대의 관요가 있던 경기도 광주등의 뛰어난 도공들은 조선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그들이 만들던 가마터에 대한 조사나 연구는 이루어진게 없다고 한다.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도자기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다. 조선 도자의 가치를 알아채고, 그것을 생활속에서 만끽하는 일본인들의 미적 감각이 조금, 부럽다.  

당시 번주는 이런 장관의 무지개 솔밭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400년 뒤 후손들은 이런 행복을 누릴 것을 알았기에 어린 묘목을 100만 그루나 심은 것이었다. 똑똑한 지도자 한 분 만난다는 것이 국가와 국민에게 얼마나 큰 복인가를 이 솔밭이 말해준다. (107쪽) 

위의 문장은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슬픈 문장이다. 똑똑한 지도자 한 분 만난다는 것이 국가와 국민에게 얼마나 큰 복인가. 아, 그런 적도 있었는데. '잃어버린 10년'에는 어디에 내놔도, 심지어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뚫고 태양계를 지나 은하계에까지 가버릴 듯한 신출내기 검사들 앞에서도 논점을 잃지 않으시고, 그러면서도 신사적 품위를 유지하셨던 '똑똑한 지도자' 한 분 계셨었는데, 아, 근래 몇 년은... 참, 복도 지지리도 없다.  

4. 골든벨 문제 

신랑이 필요하다 해서 엄청 쉽고, 간단한 것들로만 골든벨 문제 10항을 급조했으나, 마감을 맞추지 못 해 폐기처분되었다. 속상한 마음에 여기에 올려본다. 

나중에 '조선 분청사기 기법에 기초를 두고 일본식으로 변화, 발전된 토기의 형태는?'하고 누가 묻는다면, '가라쓰야키'하고 대답하지는 못하겠지만, '일본의 도조라 일컬어지는 조선의 도공은?'하고 묻는다면, '이삼평' 정도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 일본편 1 규슈]

1. 저자는 [총, 균, 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말을 인용해 한국과 일본이 상대국을 부정하는 일방적 시각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쌍방적 시각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재러드는 "아랍인과 유대인의 경우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피를 나누었으면서도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 (...) 한국인과 일본인은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그들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000 형제와도 같다. (6쪽)"라고 말했는데요, 위의 글에서 빈 칸에 들어갈 말은 무엇입니까?
정답 : 쌍둥이 

2. 일본 훗카이도와 사할린에 일부 남아 있는 아이누족은 털이 많고, 키가 작으며 얼굴이 네모지며 눈에 쌍꺼풀이 있는 폴리네시아인 계통으로 짐작됩니다. 수렵, 채취 생활을 영위했던 이들이 만들었던 토기로, 그릇 바깥 면을 마치 새끼줄로 덧붙인 것같이 장식해서 그 이름을 얻은 토기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정답 : 조몬토기 

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을 위해 축조했던 거대한 성으로 총 면적이 50만평에 이르는 임진왜란 침략 기지는 무엇입니까? 
정답 : 히젠 나고야성 

4. 저자는 말하기를 임진왜란이 주는 중요한 교훈 중 첫번째로 이것을 들었습니다. 조선이 전쟁 후에 전후 국가 재건 사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도, 100년 후에는 숙종, 영조, 정조 연간의 문예부흥을 맞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것 때문이라고 보았는데요. 

일본은 패전국에서 당연히 일어나는 정변이 일어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로 정권이 교체되죠.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가 요동을 쳐 명나라는 청나라에 망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조선이 건재한 것은 (조선이) 000이었기 때문입니다. (79-80쪽) 라고 평가했는데요, 빈 칸에 들어갈 말은 무엇입니까? 
정답 : 전승국 

5. 현재 200명 정도가 살고 있는 일본의 작은 섬으로 약 2만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생하는 동백섬으로 유명합니다. 백제 무령왕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일본의 섬은 무엇입니까? 
정답 : 가카라시마 

6. 일본에서 오징어를 먹으며 저자는 오징어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흑산도 근해의 수산물의 이름, 분포, 형태, 습속을 조사한 정약전의 저서를 떠올렸습니다. [자산어보]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현재까지도 학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있는 정약전의 저서는 무엇입니까? 
정답 : 현산어보 

7. 가가미 신사는 일본에서 전쟁의 화신처럼 여기는 진구 왕후를 모신 신사입니다. 이 신사에는 유명한 고려 불화가 보관되어 있는데요, 김우문 또는 김우가 그리 작품으로 고려 불화 중에서 유일하게 높이 4미터가 넘는 대작입니다. 이 불화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정답 : 수월관음도 

8. 일본의 3대 대표 토기중의 하나로, 일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 도공들에 의해 세워진 가마터에서 만들어진 토기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 분청사기 기법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 이를 일본식으로 변화, 발전시킨 토기의 형태입니다. 이 토기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정답 : 가라쓰야키 

9. 임진왜란 당시 다케오의 번주인 고토 이에노부에게 끌려온 김해의 도공 김태도의 아내로, 아리타의 히에코바에서 천신산 가마를 열고 백자를 생산해낸 사람입니다. 문근영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MBC사극 [불의 여신 정이]가 이 사람의 이야기를 허구로 꾸민것인데요,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정답 : 백파선 

10. 정유재란 때 번주인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끌려와, 도자기 가마의 책임자로 임명받고 가나가에 산페이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으며, '덴구다니 가마'를 열어 일본 최초의 백자를 생산해낸 사람입니다. 일본 자기의 시조의 추앙받는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정답 : 이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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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10-26 0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문화기 일본편으로 매니아 대열에 합류하신다고.... 내맘대로 접수합니다!ㅋㅋ
그런데 나는 책만 사두고 아직 못 읽었어요,
예전엔 나를 위해 사고 읽었는데, 이제는 도서관을 위한 책으로 바뀌었다는...ㅠ

단발머리 2013-10-26 16:34   좋아요 0 | URL
아항~~ 순오기님 많이 바쁘시군요.
전에 순오기님 유홍준 작가님과 제주도 다녀오셨드랬죠? 그 때 완전완전 부러웠어요.

나도 순오기님처럼 부지런히 살면 언젠가 그런 영광이 있을까나, 하지만서도
자신이 없어, 그냥 문화기 매니아 대열에 줄 선 것으로 만족합니다.
바로 일본편 2권 구매들어갑니다. ㅋㅎㅎ
 

 


 

 

 

 

 

 

 

 

 

 

 

 

 

 

 

1. 이건 불법이다. 

원래는 불법인데, 그 때는 그렇게들 했다. 

3학년 2학기 제일 만만해 보이는 국문과 수업을 신청했다. 교재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찾아가라 했다. <현대 소설 강독>. 

 

 

 

원래는 불법인데, 그 때는 그렇게들 했다. 교수님께서 아름다운 작품으로만, 주옥같은 명작으로만 고르셔서, 각 단편의 수록본을 복사해서, 그 복사본을 제본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현대 소설 강독>. 

 

 

 


다른 뜻이 있어, 국문과 수업에 들어간 건 아니었고, 과소개나 과순서 열거상 국문과가 우리과 바로 옆에 있는지라, 나름 적응에는 큰 어려움 없으려니 하고 수업에 들어갔다. 결과는 무참했다. 

우리과 친구 한 명,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친구 한 명이 어떤 글을 써 가든 교수님께 극칭찬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과는 '한국말도 모른다'며 초전박살, 멸공수준의 폭격을 받았다. 나중에는 수업중에도 머리가 띵해지곤 했다. 내가 여기를 왜 들어왔을까, 왜 들어왔을까 하면서도 끝까지 수업을 들었던건(F학점이 무서워서가 아니고^^), 그 교수님의 수업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심오한 내용도, 그렇게 특별한 내용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교수님의 수업은 뭔가 좀 달랐다. 아주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하시지만, 그 안에 필요한 말들이 모두 들어있었다. 잘못된 것을 가차없이 지적하셨지만, 잘된 글에 대해서는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명확히 하셨다. 폭격은 무서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2. 김승옥의 [무진기행]

불법제조된 그 책에 실린 단편 중 김승옥님의 [무진기행]이 참 좋았다. 이전에도 읽어본 듯 줄거리는 알고 있었지만, 문장 하나 하나가 가슴에 와 닿았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했다. 우리는 약속했다. 

한 번만 배반을 눈감아 달라는, 무책임을 긍정해 달라는,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해 달라는 주인공의 애원이 22살, 그 때는 그렇게도 멋있었다. 

난 일반적으로 말하는 '평범한' 학생의 범주, 조금 더 좋게 봐준다면 '모범생'의 범주에 드는 사람이었다. 선 밖을 넘어가는게 쉽지 않았다. 사실, 선 밖으로 넘어간 적이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더, 22살, 무책임을 긍정하자는 그의 말이 내게 솔깃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선을 넘을 수 없는 나는, 한 번만, 꼭 한 번만 선을 넘어가겠다는 그에게 기회를 준 건지도 모르겠다. 한 번만, 단 한 번 만이에요, 하면서 말이다.  

나는 소리내 책을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눈으로 읽다가 이내 소리내 읽었다. 소리내 읽다가 다시 눈으로 읽었다. 22살, [무진기행]을 읽었다. 



3. 이동진의 <빨간 책방> 

이 책을 다시 찾아보자 생각한 건, <빨간 책방> 오프닝 멘트 때문이었다. 나는 오프닝 멘트는 모두 작가가 써 주는 줄로 알았는데 (더 예전에는 오프닝 멘트는 진행하는 사람이 쓰는 줄 알았다.) 

 

핑키님 페이퍼에서, 46회 오프닝은 진행자인 이동진씨의 책, [밤은 책이다]의 일부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심한 사춘기를 앓던 10대의 어느 시기, [무진기행]을 필사했다는 이동진씨의 이야기가 이 책을 기억나게 했다. 나에게 특별한 이 책은, 이동진씨에게도 특별한 책이다. 흐뭇하다. 

 

 



 

 

 

 

 

 

 

 

 

 

 

계속 이 불법제조된 책으로 읽을 수 없어, [무진기행]을 찾아보았더니, <김승옥 소설 전집>이 눈에 띈다. 

 

 

 

 

 

 

 

 

 

 

 

 

요즘엔 전집이 대세인가. 여기 알라딘서재 분들은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모두 모두 사셨나 알라딘서재는 요즘 '소세키'로 대배 중이다. 나도 사고 싶다. 

 

 

 

 

 

 

 

 

 

 

 

 

 

 

 

 

 

 

 

 

 

 

 

 

 

 

 

최근 읽기 시작한 '밀란 쿤데라'도 전집으로 모셔 두면 너무 너무 폼날텐데, 불법이 용인되지 않는 이 시대에, 다만 현금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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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0-1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현금 좀..

단발머리 2013-10-17 17:22   좋아요 0 | URL
카드 결제도 가능하기는 하지요^^
사실, 다락방님께는 좀 드리고 싶네요.
조카가 둘이니, 아무래도 현금이 많이 필요하실 거예요.
어쩌죠~~ 저도 T.T
 


 

 

 

 

 

 

 

 

 

 

 

 

 

 

 

 

 

최근에 아롱이에게 책을 많이 읽어주지 못 해, 다시 '책을 읽어 주자'고 결심했다. 당연히 1번부터 시작이다. 비룡소 <난 책읽기가 좋아>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어린이 책 시리즈다. 그 이유는, 

첫째, 여러 작가의 책을 모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다양하고, 그림이 다양하다. 
둘째, 교훈을 주려고 노력하거나, 노력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셋째, 어린이 책 치고는 크기가 작고 가벼워 이동할 때 가지고 다니기 편하다. 


 

딸롱이가 여섯 살때 구매했으니까, 나름 오래된 책인데도 나는 이 시리즈가 좋다. 가끔은 아이들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너 정말 이러기야?>와 <꼬마 곰> 그리고 <원숭이는 원숭이>등이다. 1권, <꼬마 곰> 중 네번째 에피소드, '꼬마 곰의 소원'. 

꼬마 곰이 말했어요. 
"와아, 그 얘기 참 재미있네.
그런데 엄마가 케이크를 갖고 왔잖아요.
엄마는 늘 나를 행복하게 해요."

엄마 곰이 말했어요. 
"지금 너도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단다." 

꼬마 곰이 물었어요. "어떻게요?" 
엄마 곰이 말했어요. "네가 자면 되지."
"알았어요. 그럼, 저 잘래요." (60쪽) 

 

 

 

워낙 이 책을 좋아하다보니, 여기 저기 많이 추천해 주었다. 이 부분을 처음 읽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들, 정확히는 놀라지 않는 엄마, 아빠를 본 적이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놀라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필경 아이를 재우다 먼저 잠들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일 테다. 아이와 놀아주기, 아이와 이야기하기, 아이 밥 차려주기, 아이 씻기기 중에서 나를 가장 강력하게 불가항력의 세계로 내모는 건, 언제나 '아이 재우기'였으니까. 아이가 많이 자랐는데도, 그렇다. 아이 재우기는 힘들다. 

엄마 곰은 말한다. "너도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단다. 네가 자면 되지." 엄마 곰의 직구발언에 꼬마 곰이 응대한다. "알았어요. 그럼, 저 잘래요." 

세상에서 제일 이쁜 아기는 웃고 있는 아기거나, 놀고 있는 아기거나, 먹고 있는 아기가 아니라, '자고 있는 아기'니까. 자고 있을 때, 모든 아기들은 '하늘에서 잠시 이 땅에 내려온 조그만 아기 천사'가 되는 거니까. 

이젠 아기 천사라 부르기엔 많이 커버린, 아이 두 명이 자고 있다. 아이들과 씨름하다 지친 어른 한 명도 자고 있다. 이 때, 엄마 곰처럼 "나 지금 행복해~~"라고 말해 버리면, 너무 무심한 엄마, 매정한 아내일까. 그래도, 설마 그런다해도 나도 어쩔 수 없다. 

아, 행복하다.   

* 도서관에 갔다가 [꼬마곰] 시리즈가 다른 책으로  변경된걸 알게 됐다. 너무 오래된 책이라 그런가보다. 그래도 난 [꼬마곰] 시리즈가 좋은데,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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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0-17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 검색해 볼래요. 둘째 조카도 태어났으니 또다른 책들을 사줘야죠. 헤헷 :)

단발머리 2013-10-17 10:40   좋아요 0 | URL
이렇게 좋은 이모라니... 내가 둘째 조카하고 싶어요.
이모~~~

다락방님~ 근데 이 시리즈 검색하니까 영어동화책으로만 나와서요.
제가 가지고 있는 한글판은 없네요.
다른 서점에는 확인 못 해 봤는데요.....

<꼬마곰 시리즈>는 이렇습니다.
1. 꼬마 곰
2. 꼬마 곰에게 뽀뽀를
3. 꼬마 곰의 방문
4. 꼬마 곰의 친구
5. 아빠 곰이 집으로 와요.

다락방 2013-10-17 10:42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중고샵까지 검색해봤는데 없더라고요. ㅠㅠ
아쉬운대로 [너 정말 이러기야?] 와 [원숭이는 원숭이]만 사야겠어요.

단발머리 2013-10-17 14:59   좋아요 0 | URL
저희집 책을 스캔해서 보내드리고 싶군요. 1권, 2권은 진짜 압권인데....
[너 정말 이러기야?]와 [원숭이는 원숭이]가 위로가 되기를....
참고로, 원숭이도 시리즈예요.

13. 원숭이의 하루
14. 원숭이는 원숭이
15. 원숭이 동생

구매의 신, 다락방님 화이팅~~
 

 


 

 

 

 

 

 

 

 

 

 

 

 

 

시작이 어려운 책이 있다. 이건 어떻게 읽히느냐와는 다른 이야기이다. 읽기엔 어려워도 리뷰 쓰기 쉬운 책이 있는가 하면, 읽을 때는 술술 읽혔는데, 막상 리뷰를 써 볼까 하니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르고, 그냥 멍~한 경우도 있다. 근자에 나를 가장 멍~하게 만들었던 책은 한병철의 <피로사회>. 읽을 때는 마음에 쏙쏙 들어오는 구절 구절에, 어머! 나 성경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더니만, 막상 리뷰를 쓸려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함, 그 자체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소설 형식의 전방위적 파괴라는 점에서, 철학적 사유가 자유롭게 펼쳐진다는 점에서, 주인공들의 사랑이야기가 너무 아름답다는 점에서, 육체적 사랑에 대한 사유가 구체적으로 보여진다는 점에서, 정치적 압박과 망명 생활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프라하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사실, 이 독특하고, 위대하며,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에 대해 무슨 말인가를 덧붙인다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일 수도 있겠다. 

나는 읽고, 감동하고, 감격하고, 그리고 놀랄 뿐이다.   

칠년 전 테레자가 살던 도시의 병원에 우연히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토마시가 일하던 병원의 과장이 급히 호출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과장은 좌골 신경통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대신 토마시를 시골 마을에 보냈던 것이다. 그 마을에는 호텔이 다섯 개 있었는데, 토마시는 우연히 테레자가 일하던 호텔에 들었다. 우연히 열차가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그는 술집에 들어가 앉았던 것이다. 테레자가 우연히 당번이었고 우연히 토마시의 테이블을 담당했다. 따라서 토마시를 테레자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테레자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58쪽) 

다음 날 아침 수화물 보관소에 짐을 맡긴 뒤 <안나 카레니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프라하의 거리를 쏘다녔다. 저녁에 그녀가 초인종을 눌렀고, 그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책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토마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인 양. (88쪽)  

똥은 악의 문제보다 더욱 골치 아픈 신학 문제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따라서 인류 범죄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을 창조한 신, 오직 신에게만 돌아간다. (378쪽) 

그러나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프란츠는 강하다. 그러나 그의 힘은 오직 외부로만 향한다.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는 약하다. 프란츠의 허약함은 선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프란츠는 사비나에게 결코 명령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예전 토마시처럼 바닥에 거울을 놓고 나체로 걸어 다니라고 명령하진 않을 것이다. 그에게 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명령할 힘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폭력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있다. 육체적 사랑이란, 폭력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176쪽) 

토마시를 테레자에게 데려가기 위해서는 여섯 번의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했다. 1984년에 출판됐지만, 2013년 10월 오늘, 내게 쿤데라의 소설이 와 닿기까지 여섯 번의 우연이 있었겠지. 그것이 없었다면 나는 쿤데라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팟캐스트 벙커 1 특강에서 강신주님이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을 추천해 주셨다. 사랑이 시작될 때 사람들의 감정과 반응에 대해 잘 알 수 있을거라 하셨다. 반 정도 읽었는데, 그 놈의 반납기일 때문에. <정체성>의 쿤데라에게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여섯 번의 우연이 아니라, 여섯 번의 클릭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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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0-14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태그에 똥이라니!

저 176쪽 부분, 저도 몇 년전에 읽으면서 인상깊게 봤었어요. 그 때 사비나가 프란츠에게 물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당신의 힘을 내게 쓰지 않는 이유가 뭐죠?" 라고.

사랑이 시작될 때 사람들의 감정과 반응에 대해 잘 알 수 있을거라니, 저도 [정체성]을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단발머리 2013-10-14 09:01   좋아요 0 | URL
괜찮았어요? *^^*

나 지금 다락방님 방에 가서 이쁜 새 사람 발 보고 왔는뎅ㅋㅎㅎㅎㅎㅎㅎ

176쪽처럼 물어보고 나서, 사비나는 프란츠를 떠날 결심을 하죠.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지,라고 프란츠가 말해서요. 사비나의 에로틱한 삶에서 퇴출당하죠. ㅋ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암튼. <정체성>은 일단 다시 빌리려고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연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설정이 특이하죠.

그렇게혜윰 2013-10-14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읽은 책 중에 단 한 권을 뽑으라면 [피로 사회]를 뽑을 정도로 저도 이 책이 좋았어요. 그 이후에 [시간의 향기]도 샀는데 아직 읽기 전이네요,,,그렇게 좋았으면 당장 읽을 것 같은데 도통 손에 잡고 있는 책은 다른 책이니 ㅋㅋ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볍움]도 [향수] 읽고 얼른 읽어야지 했는데 여적이구요 ㅠㅠ [정체성]은 제목 때문에 산 것 같은데 가물가물~~하네요 ㅎㅎ 저도 강신주 님 추천이니 읽어야겠네요^^

단발머리 2013-10-14 10:40   좋아요 0 | URL
와~~ 책만먹어요살쪄요님.
진짜 책 많이 읽으시는군요. 진짜 이러다가 살 찌시는 거 아니예요?

저는 <시간의 향기>는 꿈도 못 꾸구요. <향수>도요. <정체성>을 어떻게 한 번 해볼까 생각중이예요.
강신주님 추천이니까~~ ㅋㅎㅎ

테레사 2013-10-1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가벼움 읽고, 놀랍도록 지적이면서 에로틱하고, 사색적이면서 반항적이라는데 열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이후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쿤데라처럼 되면 얼마나 좋을까..그의 글을 모방하고 싶어 안달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요.. ...불멸 역시 철학적이면서 유머스럽고, 재치가 넘치지만 사색적이어서 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저는 쿤데라에게서 무엇을 취하고 싶냐고 선택하라면 이 두권만 고스란히 가져오고 싶었더랬죠...사실은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것 같아요..숨이차서.

단발머리 2013-10-14 10:42   좋아요 0 | URL
아, 테레사님.
<불멸>도 좋군요. 그럼, 그것도 읽어야겠어요.

집에는 <농담>이 있거든요. 집에 있는 <농담>은 안 읽고, 테레사님 댓글 추천에 집에 없는 <불멸>이 읽고 싶은 이 알 수 없는 느낌은 뭐죠? 너무 너무 기대돼요.

<참을 수 없는...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아, 다시 읽어야겠다, 이 책은....

다락방 2013-10-14 10:57   좋아요 0 | URL
아 단발머리님, [불멸] 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농담]도 정말 좋아요. 전 [농담] 읽고 완전 흥분해서 친구들에게 열변을 토하며 얘기하기도 했었어요. [농담] 어떻게 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좋아요, 진짜 좋아요!!

단발머리 2013-10-14 13:06   좋아요 0 | URL
아핫!!! 그래요?
<농담>도 엄청 좋군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요?
그럼 저는, 집에 없는 <정체성>을 다 읽은 후에, 집에 있는 <농담>을 읽는걸로 해야겠어요.
이러다 남편한테, 밀란 쿤데라 전집 사자고 보챌거 같은데요.

근데, <농담> 이렇게 말고요. 다락방님처럼 네모난 괄호 어떻게 하는 거예요? 다른데서 써와서
붙이는 거 아니지요? 키보드 어디에 네모난 괄호가 있나요? @@

다락방 2013-10-14 15:04   좋아요 0 | URL
p 옆에요.

단발머리 2013-10-14 18:43   좋아요 0 | URL
어흥... 찾았어요. 아까는 안 보였는데 @.@

테레사 2013-10-15 10:03   좋아요 0 | URL
농담도 재밌었죠.....아직 가야할 길이 먼 젊음의 느낌이 난다면(아주 단순화해서^^;) 불멸은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긴 아녜스, 그 여자의 삶의 태도를 한없이 따라하고 싶은, 뭐랄까..아무튼...ㅎㅎ

단발머리 2013-10-15 11:01   좋아요 0 | URL
오호~~ 젊음의 느낌 [농담] 좋아요~~

그럼 순서는 이렇게 ~~
집에 없는 [정체성] - 집에 있는 [농담] - 집에 없는 [불멸]
아하, 신나는데요*^^*

다락방 2013-10-17 09:59   좋아요 0 | URL
저는 [정체성] 샀지 뭡니까, 이 페이퍼 읽고요. ㅎㅎ

단발머리 2013-10-17 10:24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나도... 에잇!!!
 


 

1. 딸롱이와 뮤지컬 공연을 보러갔다. 

진작에 예매해놓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 날이 바로, 그 날이었다. 올해에는 '화려한 외출'이 잦아서 남편에게 조금 눈치보였는데, 철없는 딸롱이는 지하철에서 물었다. 

"엄마, 아빠가 1년에 뮤지컬 몇 번 보래?" 
나는 "홍광호꺼는 다 봐야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마음속으로만 '자막'으로 처리하고, "응, 두 번. 두 번이면 되지."하고 말했다. 홍광호가 일년에 두 작품을 하지는 않겠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2. 부드러운 목소리 '콰지모도'의 절규 

'콰지모도'는 애꾸눈, 꼽추에 절름발이이다. '미치광이들의 교황'으로 뽑힌 것이 당연하다.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홍광호'가 콰지모도로 분해 분장을 하고 무대에 섰을 때, 마음속으로 충분히 각오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실망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아, 그러게, 왜 콰지모도를 맡아가지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난 뒤, 난 그를 용서했다.(*^^*) 
난 홍광호를 용서했다.  

안타깝고 절망스러운 콰지모도의 삶을 연기하기 위해, 국내 아니, 세계 최고의 꿀성대, 미친 가창력의 홍광호는 나름 '거칠게' 노래하려 했지만, 고음의 발성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아름다운 소리가 무대 전체를, 관객석 이 쪽에서 저 끝까지 가득 채워버렸다.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의 '콰지모도'라니. 이렇게 귀여운 홍광호의 '콰지모도'라니. 

 

 

 

 

 

 

 

3. 코스트코에서 피자를 주문할 때 

난 작품이나 무대, 오리지널 팀이나 아니냐를 보고 뮤지컬을 결정하지 않는다. 오직, 배우.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그의 연기를 보기 위해 뮤지컬을 감상한다. 

<노트르담 드 파리>도 원작이 위고의 작품이라던가, 그 동안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성공적인 공연을 이어왔다던가, 아름다운 넘버들이 많다던가 하는 이유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내 결정의 원인과 목적은 오로지 하나, 오직 홍/광/호/다. 

그런데, 공연장에 가보니, 사실 홍광호의 노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조연들의 노래가 무척이나 (특히, 내게는 더욱) 많았다. 오죽하면, 이 뮤지컬에서 제일 유명한 곡 '대성당들의 시대'가 작품 속에서 시인으로 나오는 '그랭구와르'의 곡이겠는가. 아무튼, 여러 조연들의 노래와 댄서들의 화려한 춤을 감상할 시간이 많았다.

그 중에,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라'와 귀족처녀 '플뢰르 드 리스'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페뷔스'의 심정을 표현한 <괴로워>라는 곡이 있다. '이 고통~~~'을 외치며 노래하는 페뷔스 뒤로 커다란 막이 쳐지고, 켜지고 꺼지는 다섯 개의 조명 아래 다섯 명의 무용수들이 거칠고 긴박한 움직임을 통해 페뷔스의 고통을 표현했다. 다섯 명의 남자 무용수들은 짧은 하의 타이즈만을 입고 있었는데, 그들이 보여주는 아크로바틱은 정말, 너무나 아름다웠다. 

인간 내면의 슬픔과 고통을, 낙심과 절망을 인간의 육체 그 자체로 여과 없이, 가감 없이 보여주는 역동적인 무대였다. 내 사랑하는 '홍광호'의 <춤을 춰요, 에스메랄라> 다음으로 감동적인 곡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명 속에서 자신의 몸을 통해, '페뷔스'의 고뇌를 표현해내는 다섯 명의 무용수들을 멍하니 바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코스트코의 직원들이 생각났다. 

 

코스트코에 두번째 갔을 때, 대형 피자와 베이크를 먹기로 했다. 맛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커다란 쟁반보다도 더 큰 대형 피자와 베이크, 그리고 머스타드를 곁들여 양파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맛과 사이즈, 아니면 두 가지 모두에 만족한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피자와 베이크를 주문하러 '주문대' 앞에 섰을 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주문을 받는 직원 뒤로 보이는 은색의 커다란 조리기구들, 내 키보다도 더 큰 오븐들, 어마어마하게 큰 대형 피자, 뜨거운 불고기 베이크, 밖까지 훅~~ 몰아치는 열기. 하얀 가운을 입고, 역시 하얀색 빵모자를 쓰고, 쉴새 없이 손을 움직이는 직원들을 쳐다봤을 때,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 이 사람들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구나. 이 사람들은 자기가 맡은 일에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구나." 

그런데, 나는 뭘 했나. 

나는 오늘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나. 나는 오늘 내 몫을 잘 담당했나. 남을 돕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내 할 바를 감당 못 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나. 나는 내 맡은 일을 잘 해나가고 있는가. 이 사람들처럼 이렇게 열심히,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가. 

피자 구역에서 일하는 직원들 대부분은 앳된 얼굴의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낮에는 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혹은 저녁에는 코스트코에서 일할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으면 등록금을 낼 수 없는 상황. 간신히 학교를 졸업한다해도 취업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답답한 앞날, 계속되는 경제적 압박, 미래를, 핑크빛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암울한 환경. 이미 학교를 졸업하고, 이 곳에 취직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곳이 직장, 이 곳이 일터인 사람들. 주문하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 줄어들지 않는 줄, 끝업는 줄. 하얀 까운에 하얀 빵모자를 쓰고, 계속해서 바쁘게 손을 움직인다. 쉬고 있는 손이 하나도 없다.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에서 '이만교'가 말했듯이, 나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전업주부다. 웬만해선 잘릴 일이 없다. 내가 하는 일은 이 세상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 엄마, ##이 엄마다.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나, 해야할 일이 있는 나, 그런 나는 내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나는 내 맡은 바를 잘 해 나가고 있는가. 이런 저런 생각에, 코스트코 대형 피자는 맛이 없었다. (원래, 맛이 없는 것일수도 있겠다.) 

공연장에서 <괴로워>라는 곡을 들으며, 코스트코 대형 피자가 생각났다. 조명의 움직임을 따라 자신의 육체를 통해 '페뷔스'를 표현해내는 다섯명의 아크로바틱 무용수들. 자신의 일에 열정을 다하는 사람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그리고 코스트코 직원들.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사람들, 또는 그 곳이 자신의 일터인 사람들. 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자신의 몫을 다해 내는 사람들. 

만약, 내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니면 내가 아직 직장에 다니고 있었더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일하고, 잠깐 여유를 내는게 뭐가 어때서?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번 돈이 아닌, 나의 노동과 직접적인 관계를 찾고 찾아야 비로소 그 연관성을 조금 추측해 볼 수 있는 '돈'을 사용해 표를 끊고, 비싼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공연장 의자에 앉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불편함을 느끼고 말았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가. 나는 내 몫을 잘해 내고 있는가. 

혹, 내가 맡은 일에 전문가인 '프로 전업 주부'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항상 낙제점에 간단간당 걸려있는, 말 그대로 '날라리 주부', 내지는 '모양만 주부'이다. 언제나처럼 할 수 아는 것보다 못하는 게 훨씬 많은, 그런 주부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를 관람하며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를테면, 정념에 사로잡혀 신에 대한 사랑을 저버린 '프롤로'의 고뇌라던지, 마음 속 타오르는 '에스메랄라'에 대한 사랑과 정숙한 귀족여인 '플뢰르 드 리스' 사이 '페뷔스'의 갈등이라던지, 흉칙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가장 순수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 '콰지모도'라던지. 이런 것은 생각이 안 나고, 코스트코의 피자가 생각나, 울적한 기분이 들려 했다. 

한 가지 위로는, 
오직 한 가지 위로는 그의 노래였다. 


그의 노래 소리, 
그의 노래, 
그의 목소리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4. 책은 진작에 사 두었지만

 

 

 

 

 

 

 

 

 

 

 

 

 

 

 

 

 

그 때 막 <레 미제라블> 5권의 대장정을 마친 터라, '빅토르 위고'의 책을 연거푸 읽기가 조금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결국 책을 읽지 못하고 공연을 보게됐다. 항상 그렇지만, '얼른 읽어야겠다.' 혼자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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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0-08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파리의 노트르담 읽고 싶어했었는데 그래서 사두었는지 안사두었는지가 기억나질 않네요. 사두고 안읽은건지 아직 안사고 안읽은건지..원.. ㅠㅠ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보면(제목이 정확하게 이게 맞던가요?) 사람들이 '프로'병에 걸렸다고 하는 부분이 나와요. 왜 너도나도 다들 프로가 되어야만 하는건지, 아마추어이면 안되는건지, 언론의 홍보가 사람들을 뭔가 있어보이게 만드는 프로로 이끌었다 뭐 그런식의 말이요. 그렇지만 단발머리님, 프로가 뭘까요? 왜 프로가 아니면 불편한 마음이 들어야 할까요? 누구나 하루하루 간당간당하게 살고 또 어떤것들에 대해서는 불편해 하면서 사는거, 그게 삶이 아닐까요? 만약 단발머리님이 프로였다면 피자를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죠? 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생각했으니 우리는 그 생각을 하기전과 조금, 아주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을거에요. 설사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생각은 머릿속에 남아있을테고, 그것은 언제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겁니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단발머리님.

단발머리 2013-10-08 12:16   좋아요 0 | URL
내가 다락방님 보다 먼저 읽을 수도 있으리라는 ㅋㅎㅎㅎㅎㅎ

나두 저 책 읽었는데, 저 부분은 기억이 안 나요. 가물가물도 아니고, 아예~~요. 책이 없으니 확인도 불가하고.
맞아요, 그럴 수도 있네요. 프로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제 공연관람을 엄청 방해했죠.^^

나를 불편하게 했던 생각이 나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미치기는 할 텐데요. 사실....................................
이런 불편한 생각은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서부터 시작된거 같아요. 해보지 않던 집안일이 생각보다 어려웠구요, 아이들이랑 투탁거리는 것도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전 시집오기 전까지 재미로 청경채 샐러드는 고사하고, 떡볶이 한 번 만들어보지 않던 사람이거든요. 가정사랑 완전 담쌓고 살다가, 이제 주로 하는 일이 이게 되니, 솔직히, 아직도 적응 안 됐는데.

앞으로도 안 될 거 같아요. 그냥 ..... 이렇게...... 살아도............ 되겠지요. 호홍

순오기 2013-10-10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뮤지컬과 친할 수 없는 고장에 살다보니 홍광호 이름도 처음 들어요,
하지만 앞으로 단발머리님이 사랑하는 그 이름을 꼭 기억할게요!^^
다음주에 바리톤 김동규의 노래를 들으러 가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생각만으로도 즐거워요!^^

단발머리 2013-10-11 09:07   좋아요 0 | URL
아하... 꼭 기억해 주세요. 아름다운 이름, 홍광호... ㅋㅎㅎㅎ

김동규씨가 오시는군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는 김동규씨 버전이 최고더라구요.
10월에 이 노래를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 야외무대였으면 더 좋을텐데요.

mira 2013-10-13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뮤지컬 팬이시군요. 저도 뮤지컬 좋아하는데 시간내기가 참 힘들더라구요. 내용은 아는데 안읽은 고전중 하나이네요. ㅎㅎ

단발머리 2013-10-14 09:27   좋아요 0 | URL
네, 안녕하세요, mira-da님.
전 시간은 괜찮은데, 지갑이 안 도와줘서요. 많이는 못 가구요.

이렇게 찜만 해놓고 아직 못 읽은 책이 많아서 이 책은 순서 많이 기다려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