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 책읽기 모임의 책이다. 매일 정해진 분량의 한글책을 먼저 읽고 원문을 같이 읽는데 (정확히는, 책 두 권을 나란히 두고 단어를 맞춰보는데), 이 책은 저절로 책장이 넘겨져 이 문단까지 오게 됐다.

 


그녀는 글을 쓴다. 온갖 색깔의 노트에다, 온갖 피로 만들어진 잉크로, 글은 밤에 쓰는데,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 장을 보고, 아이를 씻기고, 아이의 학과 공부를 돌봐준 뒤이다. 그녀는 저녁상을 치운 뒤 같은 식탁에서 글을 쓴다. 밤늦도록 언어 속에 머무른다. 아이가 깜박 잠이 들거나 놀이에 빠진 사이, 그녀가 먹이는 이들이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 순간에 글을 쓴다. 이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그녀 자신이 되어 있는 순간 그녀는 홀로 종이 앞에 앉는다. 영원 앞에 나와 앉은 가난한 여자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얼어붙은 그들의 집에서 그렇게 글을 쓴다. 그들의 은밀한 삶 속에 웅크리고 앉아. 그렇게 쓴 글들은 대부분 출간되지 않는다. (83)

 


읽는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혹은 대단하지 않은지에 대해 자주 생각하지 않는다. 읽는 일이 즐겁고, 내게 필요한 건 그것뿐이다. 읽고, 다른 세상을 만나고, 똑똑하고 혹은 멍청한 저자를 만나고, 그들이 만들어낸 세상, 그 세상 속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즐거울 뿐이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쓰는 일은 다르다. 근사한 작업실에서 멋진 노트북을 펼쳐놓고 쓰는 삶이 아니라, 그냥 쓴다는 것. 쓰는 일 자체가 던져주는 두려움이 떠오르고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든다. 자판 위에 글씨가 새겨지고 그리고 지워질 때, 내가 모르는 내가 튀어나올 때 얼만큼 후련하고 딱 그만큼 두렵다.


 

이 문단을 읽으면서는 그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쓰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떠올리게 됐다. 큰아이 낮잠 시간에 나란히 누워 끄적였던 나의 쓰기를, 고양이를 벗으로 삼아 외로움을 이겨냈던 친구의 하염없는 쓰기를, 아이를 재워야 비로소 쓸 수 있다는 젊은 엄마의 쓰기를. 출간되지 않겠지만 멈춰지지 않는 외로운 쓰기를 떠올려본다. 쓰지 않았으면 견디지 못했을 시간을, 혼자가 된 뒤에야 쓸 수 있는 쓰기에 대해 생각한다.

 


보뱅을, 보뱅을 더 많이 읽어봐야겠다.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2-04-07 09: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노랗고 두꺼운 건 사전인가요? 책이 놓인 책상은 넘나 아름답네요 😍

단발머리 2022-04-07 10:39   좋아요 0 | URL
저 노랗고 두꺼운 건 프랑스어/영어 사전인데요. 많이 사용하지는 않지만 제가 겁나 사랑하는 사전인 것입니다^^
저 책상 아래 의자에는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책들이 쌓여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4-07 11:03   좋아요 1 | URL
사전 사야지. (꿈지럭꿈지럭)

단발머리 2022-04-07 14:13   좋아요 0 | URL
움하하하하하! 절대 찬성입니다^^

- 2022-04-07 09: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러니 우리는 읽고 쓰는 근사한 사람들 💕 왜 난 눈물이 글썽거려지는 가….

단발머리 2022-04-07 10:40   좋아요 1 | URL
읽고 쓰는 근사한 사람들이 여기 이 동네에 항상 우글우글 했으면 좋겠어요.
눈물이 글썽거릴 때도 즐거울 때도 달리고 난 뒤에도 배부를 때도 배고플 때도... 우리 같이 해요, 쟝쟝님!!!

유부만두 2022-04-18 11:35   좋아요 1 | URL
나도 낑가 줘요

단발머리 2022-04-18 11:56   좋아요 1 | URL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이요!!
여기 한 자리 남아 있어요!! 😘😘😘

- 2022-04-18 15:13   좋아요 1 | URL
그르게요 딱 유부님 자리는 미리 비워뒀습죠~ ㅋㅋㅋㅋ 함께해요 >0<

수이 2022-04-07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코파이 즐겨 드시나요? 단발머리님 저는 초코쿠키! 보뱅 좋아요 저도 오늘 더 읽을래요!

단발머리 2022-04-07 10:41   좋아요 0 | URL
저는 초코파이, 나초, 후렌치파이, 오감자, 새우깡(매운맛), 꼬깔콘(군옥수수맛)을 좋아하고, 초코쿠키도 당근 좋아합니다.
보뱅 좋아요. 책이 이쁜데 내용도 좋아서 개이득!!

프레이야 2022-04-07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어 책 읽기 보뱅 책이면 더 좋은 거 같고 막 멋집니다. 블라인드 틈새로 스미는 빛살이 책상 위를 더 아름답게 비추네요. 초코파이랑 커피 잘 어울려요 ^^

단발머리 2022-04-07 11:28   좋아요 0 | URL
블라인드 틈새로 스미는 빛살 때문에 책등이 모두 누렇게 변색되어서 저는 한낮에도 집을 어둡게 하고 있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멋지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난티나무 2022-04-07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벽한 책상 사진!!!
후렌치파이!!! ㅎㅎㅎ 추억 돋고요.
책등 변색 아 저도 싫어합니다….^^

단발머리 2022-04-07 18:24   좋아요 0 | URL
재작년에 이사하고 꿈의 책상 구입했는데요. 물건 쌓아두고 사진 배경으로 주로 쓰다가 요즘에 좀 치우고 있습니다.
후렌치파이는 사과맛과 딸기맛이 있고요.
담에 사진 한 장 올려볼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2-04-07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의 요 책상, 요 색상 블라인드가 있는 요기 요 장소 사진 늘 그리웠다는~ㅋㅋㅋ
이젠 북플친님들이 늘 본인의 책을 읽고, 공부하는, 정해진 장소에서의 사진들은 눈에 익어 정겹습니다.
저렇게 정리된 듯한 편안한, 여백 많은 책상에 앉아서 공부 절로 하고 싶어지는군요.
하지만 프랑스어라서 더 다가갈 수가 없겠군요ㅋㅋㅋ
초코파이랑 커피랑 필기구에 혹해서 자리에 앉았을 뻔 했겠어요. 나 이틀 전에 딸아이가 남겨둔 초코파이 냉장고에 숨겨뒀다가 먹었어요ㅋㅋㅋ 근데 필기구도 이쁘군요?^^

쓴다는 행위에 대해 좀 더 진중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군요^^

단발머리 2022-04-08 17:17   좋아요 1 | URL
요 책상, 요 색상 블라인드가 저의 픽쳐존입니다. 옆쪽, 뒤쪽 엄청 지저분한데 다 자르고 요기만 찍어봅니다.
자기만의 책상,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공간은 참 중요한 거 같아요. 저는 아직도 식탁이 편하지만 제가 식탁에 있으니 가족들이 다 식탁으로 모이는 기이한 현상. 제가 책 들고 쇼파로 가면 또 거기가 우글우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초코파이는 넘나 맛있는 것으로서 항상 대기하고 있어요. 필기구 중에 저기 저 연필이, 요즘 저의 최애 아이템입니다^^
 






 














책 많이 사는 사람 아닌데 3월이라 책 샀다.

 

『엔드 오브 타임』은 대선 끝나고 한반도를 떠나 우주로 가야만 해서 구입했던 책이다. 지적인 면에 있어서 도전을 불러일으키는(모르는 거 엄청 많이 나옴) , 극찬받는 이유를 충분히 수긍하고도 남는다.


 

『레이디 크레딧』은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 4월의 도서라 미리 구입했다. 『비폭력의 힘』은 이 페이퍼의 주인공 같은 책이다. 친구님 서재에서 책과 머그잔을 보고 찜해 놓았는데  다음날 아침 결제하려고 하니 머그컵이 품절되어서 큰 실망을 했더란다. 혹시나 하고 지난 금요일에 다시 들어가 보니 머그컵이 돌아왔다!!! 머뭇대는 사이 없어질까 급하게 주문하느라 이 책만 단독배송 (택배기사님, 죄송합니다) 크고 가볍고 예쁜 머그컵을 손에 넣고 나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Crying in H mart』는 내용도 모르면서 친구에게 선물했던 책인데, 나도 궁금해서 구입했다. 『Where the crawdads sing』은 초대박 베스트셀러로만 알고 있었는데, 테일러 스위프트가 영화 OST 작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테일러 왕팬이 읽어야 한대서 구입했다. 『작은 파티 드레스』와 『Une petite robe defête』는 프랑스어 책읽기 이웃님들과 같이 읽는 책. 진도 밀려서 얼른 가서 숙제해야 한다

 



3월이 이렇게 다 간다. 새 학기는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벅찬 시간인데, 올해는 대선이 있어 더 힘들었다. 한 주를 호되게 앓고 나니 벌써 31. 다시 계획을 세워본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수하 2022-03-31 09: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머그 내일 4월에 사겠어요!
(이미 책이 아니라 머그를 산다고 말한다)

단발머리 2022-03-31 09:41   좋아요 3 | URL
머그 사는 거 너무 좋죠. 그럼 책이 따라 오더라구요^^ 일석이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2-03-31 11:33   좋아요 2 | URL
이미 갖고 있는 저도 또 사고싶은!!!

단발머리 2022-03-31 13:52   좋아요 1 | URL
수하님은 되고 비타님은 안 돼요!! 🤭🤭🤭🤭🤭

라로 2022-04-01 16: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Where the crawdads sing은 뒤로 갈수록 별로였어요, 저는. 이런 말 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래도 제가 오늘 베베 꼬였나 봐요. 이해해주시는 거죠? 단발머리님?

단발머리 2022-04-01 16:58   좋아요 0 | URL
네, 그럼요 ㅋㅋㅋㅋㅋㅋ 어차피 저는 안 읽을 거 같아서요. 전혀 괜찮습니다^^

psyche 2022-04-06 03:01   좋아요 0 | URL
사실은 저도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되었어요. 자연 묘사는 아름다웠다는 거 말고는 저도 별로....
 
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였다. 머리 속 생각을 떨쳐내려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했다. 할 수 있는 방법을 차례로 시도하며 활활 타오르던 마음이 좀 수그러들었을 때. 그 때, 우주로 나갔다. 우주, 그 자체를 생각했다. 이 광대한 우주 속, 숱하게 많은 은하계. 구석 은하계의 구석, 그 한쪽 귀퉁이 태양계 속의 지구를 머리 속에 그렸다. 그 지구 속의 내 모습이 얼마나 작을지 생각했다. 달에서 볼 때 지구가 얼마나 작을지 상상했다. 한반도는, 서울은, 그리고 나는. 내 안의 그 고민과 갈등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작은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우주로 보내 버림으로써, 지구를 떠남으로써 나는 문제를 다르게 바라보려 했다.

 


주변에 무언가 물질이라 부를 만한 것을 발견한다면 그 자체로 기뻐해야 한다. 생명체는 지구에서만 발견되는 아주 특별한 물질이다. 내 주위에 생명체가 있다면 이것은 놀라워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그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 나와 같은 종을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다른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우주론적 이유이다. (『김상욱의 과학 공부』, 13

 


며칠 전 한겨레 연재 기사에 김상욱 교수의 인터뷰가 소개되었던데 김상욱 교수의 여러 저서 속 수많은 문장 가운데 기자가 이 부분을 발췌한 것을 보았다. 그 때. 내가 우주로 가고자 했을 때, 인간에게 실망했을 때, 그리고 미움이 내 안에 차오를 때 내가 의지했던 문장들이다. 이 넓은 우주 가운데, 생명체로서 만난 존재를 사랑하자. 나와 같은 종으로 만난 것을 환영하자. 반가워하자. 다시, 사랑하자. 4-5년전 일이다. 그 때와 지금 나의 생각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지만, 그 때는 나름대로 힘들고 고생스러웠다. 이제서야, 이만큼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그래,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우주에 다녀온 뒤에야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됐다.

 

대선 결과가 확정되고 암울하고 속상했던 그 날 밤. 나는 또 우주로 가기로 했다. 서울을 떠나, 대한민국을 떠나, 한반도를 떠나, 지구를 떠나 우주로 가 보기로 했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다른 일을 접어두고 이 책만 읽었다. 제일 좋아하는 두꺼운 색연필을 꺼내 놓고 줄을 치며 읽었다. 누워있을 때도 언제든 볼 수 있게 바로 옆에 책을 놓아 두었고, 외출할 일이 있을 때는 많이 읽지 못할게 뻔한데도 굳이 책을 들고 나갔다. 그렇게 우주 속을 거닐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주 속에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게 했다.

 

 

시작은 언제나 죽음이다.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고 규정했을 때, 부패되어 재배열되는 육체와 달리 영혼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더 정확히는 영혼의 존재조차 불명확하다.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육체 내에 영혼의 자리가 없음을 그 증거로 삼는다. 해부학적 연구 결과가 축적된 상태에서 영혼이라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또한 진화의 과정 중에 영혼이 등장했던 순간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도 근거 중의 하나가 된다. 질문은 이어진다. 영혼은 정신과 어떻게 다른가. 영혼과 마인드의 경계는 어디인가. 의식은 어떻게 다른가. 뇌의 인지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의식은 무엇인가. 나 자신을 통합된 자아로 인식하는 것을 뇌의 속임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질문은 이렇게 수렴된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우주의 시작은 어떠한가. 죽음 이후에 우리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컬럼비아대학교의 물리학과 및 수학과 교수이자 초끈이론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이론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도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첫 문장이다.

 


모든 생명은 때가 되면 죽는다. (19)

 


물리학자로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섬세하고 조심스럽다. 기원과 엔트로피에 대한 탐구가 그렇고 생명과 마음, 언어와 두뇌에 대한 언급이 그러하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 속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생명 현상을 설명하려 했던 슈뢰딩거가 자주 언급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론 물리학자이자 수학자, 과학자인 저자가 우주의 저-엔트로피 상태에 대해, 빅뱅 직후 원소량의 변화와 태양계의 기원에 대해, 생명 정보에 존재하는 통일성에 대해, 의식과 스토리텔링에 대해 설명할 때, 세세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평범한 독자조차도 놓칠 수 없는 구체적이고 논거가 확실한 정보가 빼곡하다. 시험 봐야 해서, 외워야 해서 읽는 게 아니고, ‘읽는 행위그 자체로서 즐겁게 읽히는 책이다. 발견의 기쁨이 가득하다. 새로운 지식의 발견 뿐 아니라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를 발견할 수 있어서 그렇다. 의식과 양자물리학에 대한 고찰이 특히 그렇다.

 


양자계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자극을 가한 주체가 의식이건, 의식이 없는 도구이건 간에) 양자적 확률 구름이 걷히면서 명확한 하나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지난 세월 동안 실행된 수많은 실험이 이 관점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명확한 하나의 현실이 나타나는 것은 의식이 아닌 상호 작용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려면 의식이 개입되어야 한다. 나의 의식이 개입되지 않으면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자적 과정에서 의식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명백하게 다른 두 미스터리의 피상적 구별을 뛰어넘은 정교한 접근법에서도 양자 세계와 의식의 연결 관계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211)


 

현실과 양자역학의 수학 체계에서 해결의 열쇠가 의식인 경우 여러 개의 가능성 중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의 가능성은 현실에서 지워진다.(211) 하지만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육체와 두뇌를 포함한 모든 미시물리학적 과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의식이 양자역학의 범주 안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관찰자의 시선 혹은 광자의 개입 이외의 변수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인지, 동시에 존재하는 두 개의 사실 혹은 진실이 가능하다는 건지, 점점 더 궁금해진다. 입자의 집합으로서의 와 자유의지간의 연결 관계에 관한 서술 역시 흥미롭다. 나를 구성하는 입자의 행동이 곧 나의 행동이다. 나를 구성하는 각각의 입자들이 지금의 나, 현재의 나를 구성한다.

 


임의의 순간에 ''는 입자의 집합이며, 입자의 특별한 배열을 나타내는 약칭이다(이 배열은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할 정도로 충분히 안정적이다. 그러므로 나를 구성하는 입자의 행동이 곧 나의 행동이다. 그 저변에서 물리 법칙이 나의 입자를 제어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행동(입자의 거동)은 자유의지와 무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특별한 입자 배열(유전자, 단백질, 세포, 뉴런, 연접부의 네트워크 등의 고유한 배열 상태)은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라는 거시적 서술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당신의 행동과 반응, 생각이 나와 다른 이유는 입자의 배열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224)

 


신화와 종교의 발생 원인에 대한 부분에서는, 내면에서 겪은 일의 원인을 바깥 세상에서 찾는 인간의 경향을 지적한 부분이 흥미롭다. 지난하고 오랜 기간 축적된 사고 과정 가운데서, 인과론의 사슬을 완벽하게 끊어낸 자유로운 인간이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적인 불멸이란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예술적 성취를 통해 영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인데,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마음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그의 어떠한 의도와 상관 없이, 즉 그것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기쁨, 통찰과 상관 없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은 그 자체로 종결되었다. 우리가 향유하는 감동과 환희, 그리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닿지는 않는다.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필멸의 삶, 그리고 계속되지 않고 결국 그 끝을 보게 될 우리 우주의 운명. 과학자의 결론은 이러하다.

 


그렇다. 우리는 무상하기 그지없는 일시적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는 짧은 시간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자기 성찰을 통해 만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형이상학적 가치를 창출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유산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미 우주의 타임라인을 조망한 우리는 그것이 이룰 수 없는 목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소규모의 입자들이 모여서 현실을 인지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얼마나 단명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연결 관계를 확립하고, 우주의 미스터리를 풀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55)

 


오랫동안 무신론자였다가 나이 든 후에 불가지론자로 바뀐 줄리언 반스의 잘 모르겠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 역시 내가 가진 신념의 범위를 쉽게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다. 입자의 합으로서의 나와 느끼고 생각하는 나, 통합된 자아로서 기능하고 있는 나. 그런 나에게 가장 험난하고 거친 난제는 무의미성 그리고 무목적성이 아닐까 싶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목적 없이 그냥 이렇게 아름답고 완벽하게 존재하고 있는 이 광대한 우주를,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가 없다. 나의 죽음으로 이 우주는 얼마만큼 종말을 맞게 되겠지만, 그것이 전부라는 이야기는 아직도 내게 낯설다.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 사이에서, 지금 바로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은 과학자가 아닌 인문학자의 말처럼 들린다. 백만장자라면 최첨단 냉동기술로 죽음의 순간을 한동안 유예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평범한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광활한 우주 속, 먼지보다 작은 우리 인간은 우주의 시작과 죽음의 신비를 밝혀내기 위해 또 다시 한 발을 내딛는다. 지금 당장, 우리가 원하는 혹은 진실에 가까운 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멈출 수는 없다.

 


우주에서 돌아왔더니 곧 용산시대가 열린다고 한다. 교통지옥이라 쓰고 용산시대라 읽는다. 다시 우주로 나가야 하나. 브라이언 그린의 다른 책이 있나 찾아봐야겠다.





댓글(13) 먼댓글(2)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인간, 달리기와 음악의 힘으로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2-10-25 21:25 
    오후 3시 51분. 막 『An American Bride in Kabul』 읽기를 마치고 그냥 덮으면 잊어버릴까, A4 한 장 안 되는 분량으로 감상을 썼다. 이제 좀 놀아볼까. 한 시간 전에 너무 졸려서 잠 물리친다고 서가를 거닐다가 가져온 책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에 관한 책』을 펼쳤다. 책을 뽑기 전, 책 등만 보았을 때는, 이 책이 지구 이외의 행성에 사는 외계 존재에 대한 책일거라 추측했다. 그게 이 책을 뽑아 든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목
  2.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무엇인가’의 사이에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3-04-17 21:18 
    결국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무엇인가’이고, 해답은 그사이 어디쯤 존재할 것이다. 나는 그 해답 사이의 간극에 관심이 있다. <인생 수업>을 읽고 있다. 현대 물리학(현대 물리학 잘 모르는 사람)에서 원자의 발견은 가장 혁신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지구 문명이 모조리 파괴되었을 때, 후세를 위해서 딱 한 마디만 남길 수 있다면 무슨 말을 남기겠냐는 질문에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답했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인
 
 
거리의화가 2022-03-29 09: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안 그래도 이 책을 읽어볼까 하던 참이였어요. 물리학자가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의식과 불멸에 대한 생각도 궁금해집니다. 읽는 행위 자체로 즐거움을 주는 책이라니. 저도 책을 통해 우주로 떠나보고 싶습니다!

단발머리 2022-03-31 09:45   좋아요 2 | URL
모든 걸 이해하려는 게 아니니까 ㅎㅎㅎ 읽는 것 자체가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저의 우주여행은 만족스러웠습니다.
거리의화가님도 그런 좋은 시간 되시길요^^

얄라알라 2022-03-29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첫문단에서의 ˝우주로 가다˝ 단발머리님을 걱정하며 읽었는데, 중간 이후에서 대선 이후에도 우주 다녀오셨다는 마음에 그래도 안도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 발견할 수 있어˝ 기쁘시다고 말씀하시는 단발머리님, 진정한 공부의 재미를 아시는 분! 저는 어제오늘 메타버스 책 보는데 제가 초등생보다 모른다는 걸 알았어요^^:;;;;; 기쁘지 않고 뒤쳐지는 우울한 느낌인데...ㅋ기뻐야겠습니다

단발머리 2022-03-31 09:46   좋아요 1 | URL
아직도 새롭게 발견할 게 많이 남아 있어서 (사실 어마어마하게 많이 남아있지요) 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발견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요, 얄라알라님!!!
참, 저도 메타버스는 완전 초대박 무식이라서요, 얄라님 글 읽고 공부하려고요. 헤헤!

책읽는나무 2022-03-29 12: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시게 되더라도 너무 오래 머물진 말고, 빨리 돌아오셔요^^

단발머리 2022-03-31 09:47   좋아요 2 | URL
저 방금 지구로 돌아왔다는 소식입니다^^ 책나무님 반가워요!!

책읽는나무 2022-03-31 10:00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다녀오시더니 뭔가 새로운 분위기를 가득 안고 돌아오신 듯 합니다. 더 똑똑해져서 돌아오신 듯도 하고???
거기 위치가 어딥니까?
저도 좀 그 기운 받으러, 한 번 다녀오고 싶네요ㅋㅋㅋ

책읽는나무 2022-03-31 10:01   좋아요 1 | URL
모쪼록 몸도 마음도 건강한 단발머리님 계속 유지하시길요♡

단발머리 2022-03-31 10:06   좋아요 2 | URL
반겨주셔서 감사해요, 책나무님!!
제가 다녀온 곳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브라이언 그린네였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과 양자역학, 그리고 DNA와 인간의 의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곳이어서, 전 잠시 지구 관련 문제를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답니다. 내일부터 4월이라 하니 화이팅 하나 더 필요했는데 책나무님 댓글이 제 화이팅이네요!!! 감사합니다^^ from 과학책을 읽으며 마음껏 자유로워진 어느 문과졸업생

라로 2022-03-29 23: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저는 시작했다가 멈췄어요. 어려워서.^^;;
님의 리뷰 읽고 다시 저도 정신을 모아모아 읽어 봐야겠어요.
브라이언 그린의 초끈이론으로 유명한 책 엘레건트 유니버스 읽으셨나요?
그거 저는 사놓기만;;;
근데 많이들 좋다고 해요,, 저는 다른 책에서 추천해서 사놓긴 했는데... 이 책도 어려울 것 같고요.

단발머리 2022-03-31 09:50   좋아요 1 | URL
저는 이해한다는 생각을 아예 내려놓고 시작해서 그런지 맘 편히 잘 읽었습니다.
브라이언 그린 책 추천 감사해요. 여러권 있던데 어떤게 좋을까 생각중이었거든요^^

psyche 2022-04-06 0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매일 뉴스보기가 두렵네요. 뉴스를 안 보려 하는데 그래도 또 보게 되고 보면 속이 답답하고 열불이 나고. 에고고

단발머리 2022-04-07 14:17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도 뉴스 끊은 상태에요. 음악 듣고 영화 보고 드라마 보고.... 그러고 있어요. 에휴 ㅠㅠㅠ
 





 












특히 여성은, 크리스테바의 관점에서, 배설물과 월경이라는 두 가지 점 때문에 오염시키는 대상과 관계가 깊다. 이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비체와 특별한 관계를 맺도록 한다. (37)

 


월경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다. 출산 역시 여성만 가능하다. 하지만 생명체로서 이 세계에 존재할 때, 남성이든 여성이든 인간은 동물로서 존재한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숨 쉬고 땀 흘리고, 그리고 배설하는 존재이다.

 



 












폴 로진은 원초적 혐오의 모든 대상은 동물이거나 동물적 물질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일부 사람들이 혐오스럽다고 느끼는 오크라 같은 끈적끈적한 식물은 예외적이다.) 혐오의 대상은 동물성을 상기시키는 것’, 즉 우리 자신의 동물성과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타인에 대한 연민』, 141)

 


폴 로진의 주장에 따르면, 동물성에 대한 인식, 죽음에 대한 예지가 원초적 혐오를 불러온다. 동물에 불과한 인간이 자신의 동물성을 용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을 예상케 하는 존재에 대해 인간은 혐오감을 느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혐오를 수용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 남성은 그런 혐오의 감정을 투사할 집단을 찾게 되었고, 다수이며 대척점에 선 인간으로서 여성을 타자화했다.

 




 












이처럼 형이상학이라는 인식 체제는 여성 혐오를 필연적으로 내포합니다. 여성 혐오는 몸이나 육체성에 대한 혐오,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상기시키는 것에 대한 공포와도 밀접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의 이분법적 인식틀은 여성이라는 항에 몸, 감정, 정념, 쾌락, 가변과 사멸의 요소들을 응축해 넣어 여성을 허위이자 믿을 수 없는 것, 동물성, 표피성, 천박함과 미천함, 오염 등으로 열등 가치화합니다. (『지워지지 않는 페미니즘』, 134)

 

 


, 육체성에 대한 혐오가 여성에게 속한 것으로 단정될 때, 여성이 감정적일 뿐만 아니라 동물에 가까운 존재로 폄하될 때, 인간이라는 카테고리에 부족한 종이라는 점이 계속해서 강조될 때, 혐오는 자연스럽게 믿어지고, 거부감 없이 반복된다. 혐오스러운 존재를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다. 혐오하는 대상을 조롱함으로써 자신이 그와 같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대 산업으로까지 확장 중인 화장실 몰래카메라가 그에 대한 가장 명확한 실례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2-03-21 08: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특히 화장실 몰래카메라에 대해서 도대체 그 마음이 뭔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왜 굳이 배설하는 여성을 보려고 하는걸까. 그러다가 누군가 그걸 보는 남자가 쓴 글을 가져온 걸 읽어보게 됐는데요, 여자들도 배설을 한다는 걸 보면서 쟤들도 대단한 거 없다, 이렇게 위안이 된다고요. 굳이 상대가 배설하는 걸 봐야만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 안의 열등감은 대체 뭘까요? 어떤 크기로 있는걸까요? 그런데 오늘 단발머리 님의 글을 읽으니 그들 안의 열등감을 또 생각해보게 되네요. 여성이란 신체를 비하하고 혐오하는 것은 본인에게 있지 않은, 본인과 다른 지점에 대한 받아들이지 못함이겠죠.
저는 지금 자궁 부분 읽는데, 상대를 깔아뭉개야만 비로소 자신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생각이 정말 징그러워요.

단발머리 2022-03-31 09:58   좋아요 1 | URL
두려움과 호감이 혐오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 여성 혐오가 견고해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구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이 싫을 수 있지만, 여자가 자신을 무시할 때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건 여성 혐오 때문이잖아요. 너가 감히 나를? 그런 심정이요. 여성 신체에 대한 비하, 모욕주기, 혐오가 결국 화장실 몰카로까지 간다고 생각해요. 너(여성)도 별거 아니잖아... 그런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이 화장실 몰카를 찾아보겠죠. 험한 세상입니다.

수이 2022-03-21 09: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왜 그렇게 여성 몸에 대해서 안달복달하는지 모르겠어요. 몸이 다 똑같은 몸인데 왜 굳이;;;;;; 이런 식으로 혐오하고 혐오하고 혐오가 쌓여서 그들이 얻을 게 대체 뭐가 있는지 더 이해할 수 없구요.

단발머리 2022-03-31 09:59   좋아요 0 | URL
동물성을 여성에게만 옭아맴으로써 자신은 그 혐오스러운 육체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 아닐까요. 결국 자신도 인간이면서 동물인데 말이지요. 이해못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바람돌이 2022-03-21 10: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지배체제가 만들어지고 공고화되는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방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걸 확인하는 책읽기입니다. 더 끔찍한건 저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대부분이 실제 자신이 여성의 몸을 어떤 방식으로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고 차별의 근거로 만드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만든다는 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의식에 침투한 차별과 배제, 혐오의 힘은 더 무서운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단발머리 2022-03-31 10:03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인간, 정확히는 남자들 내면의 두려움과 혐오를 영화 속에서 그런 식으로 표현한건데, 영상을 통해 그것이 재현될 때 오히려 그런 이미지가 ‘강화‘되는 측면도 있으니까요. 한편으로 영상이라는 매체가 리얼한 면을 강조하다 보니 그것의 해악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인지하지 못한 채 무의식에 새겨지는 배제와 혐오를 어쩌면 좋을까 싶습니다.

청아 2022-03-21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에서 남성성의 과도한 ‘초월‘추구가 타자화된 여성성의 ‘혐오‘에 한 몫한것도 같아요. 이리가레 말대로 ‘여성의 몸에 대한 착취‘가 없다면 남성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단발머리 2022-03-31 10:11   좋아요 1 | URL
네, 동의합니다. 남성성의 과도한 초월 추구로 남성은 초인이 되고, 동물성을 부여받은 여성을 ‘인간 이하‘로 결론짓는게 남성들이 말하는 철학이죠. 임신, 출산, 육아, 각종 돌봄 노동, 가사 노동. 여성의 몸에 대한 착취가 없으면 남성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읽는나무 2022-03-21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바람돌이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본인들이 그런 사상에 물들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 것들이 자극적인 요소로만 작용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영화를 만든 게 아닐까?싶더군요.

본인들이 깨닫지 못하는 혐오 사상들이 만연해 있다는 것, 그저 생각없이 쾌락으로만 느끼고 즐긴다는 것, 그래서 결국 몰카 같은 범죄로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단발머리 2022-03-31 10:08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책나무님!! 저는 사실 읽는 게 좀 힘들었거든요. 내용 자체가 너무 자극적이고 폭력적이고 그렇잖아요. 근데 그걸 영상으로 본다면 더 오래갈 거 같아요. 또,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쁜 동기에 의해 그 행동을 모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문제의 본질은 우리가 이미 알아챘는데 진짜 큰 문제는 이제는 화장실 몰카가 산업이라는 거라서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1.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아름다움에 대한 강요, 아름다움에 대한 신화를 에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건 에 관한 문제임을 이 책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PBQ의 교묘한 작동은 일상에서는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데 그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하는 젊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화장이 가장 흔한 경우다. 하지만, 젊음 자체가 자원인 외모 중심의 사회에서, 젊은 여성들의 탈코르셋이 중년 여성, 노인 여성의 그것과 같지 않음에 대한 지적 또한 오래 생각해볼 문제다.

 
















2.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4, 5, 6, 7

 

여성을 물건처럼 주고받던 시대에 여성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자신의 미모와 육체를 도구화하는 것이었다. 극소수의 여성이 이 방법을 통해 최고의 권력에 접근했고, 성공했다. 그녀들의 미모가 나라를 망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여성들만이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음을, <사기>를 통하지 않고서도 배울 수는 있겠지만, <사기>를 통해 확인해본다.   

 





















3. One day in December

 

완벽한 인생이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으니 완벽한 사랑 또한 가능하지 않겠지. 그 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최선이기를 바랄 수밖에. 나는 그때 당신에게 최선이었나요? 말해봐요, 오스카! 오스카, 당신이 대답해 봐요!

 

















4. 엔드 오브 타임

 


내가 궁금한 것은 사고라는 현상이 인간의 두뇌나 슈퍼 컴퓨터, 또는 얽힌 관계에 있는 입자 등 물리적 과정의 도움을 받아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지의 여부다. (31)

 


개표가 진행되고 새벽 3시 반쯤 되어서야 윤석열이 대통령인 나라를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믿기지 않는다고 말할 때 믿기지 않는다가 무슨 뜻인지 비로소 알게 됐다.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믿을 수 없다는 것.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 받아들이기 싫다는 게 아니라, 그런 세상을 한 번도,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나라를 잃은 것 같은 심정이라 숟가락 뜨기를 거부했던 친구가 생각났다. 나 역시 나라를 잃은 심정이었다. 나는 나라를 잃고 건강도 잃었다. 울 힘조차 없어서 얼굴을 바닥에 대고 눈을 감았다. 몸이 아픈 것으로, 내 몸이 이렇게 아픈 것으로 마음의 아픔을 이겨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주일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났다. 내 새끼의 입에 따뜻한 걸 넣어야 아이가 나을 테니. 하얀 쌀밥을 짓고 된장국을 끓였다. 달력을 보니 나흘째였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의 눈물이면 됐다고 속으로 말했다. 졌는데도, 그런데도 다정하고 우아한 언어로 축하와 위로의 말을 전하는 유시민을 보고 울고, 친구가 보내준 사진 속 이재명의 부족했습니다. 고맙습니다플랜카드를 보고 울고, 박지현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울었으면, 이미 충분히 울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만 울고, 이제 그만 일어나자, 고 반복해서 말했다. 슬픔과 불안, 두려움과 걱정이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도록 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한 적이 많았지만. 아니, 내 모든 기도는 아직 이뤄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끝없는 매달림이지만. 그래도 다시 또 힘을 내고, 일어서고, 그리고 다시 또 기도하기로 했다. 새로운 삶을, 새로운 기도를 시작하기로 했다.

 


친구에게 책을 보내고, 아이가 좋아하지 않지만 먹어야만 하는 걸 만들어 주고, 빨래를 돌리고 주변을 정리했다. 줄을 치며 읽을 수 있는 책, 검고 두꺼운 책을 주문하고, 도서관에 가서 다 읽지 못한 책을 반납했다. 다 읽은 책을 따로 빼놓고, 새로 시작할 책을 큰 책상 앞쪽으로 꺼내놓았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는 친구들의 말이 음성지원되어 귓가에 울렸다. 나도 그래 볼까 한다. 나도 열심히 살아보려 한다.

 


어제부터 듣는 노래는 상록수. 2020,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국민이, 특별히 의료진들이 많이 힘들어할 때 국가 정책 차원에서 제작된 뮤직비디오인데, 나 역시 감염병예방법 제41조 및 제43조의 관리하에 있던 사람이어서 그런지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저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 /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불고 /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 거칠은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2-03-17 09: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어휴 웅장한데 울컥하네요.

잘살아봅시다, 단발머리님. 우리 힘내도록 해요. 다 꼴도 보기 싫고 계속 눈물만 났는데, 지금 상황 보니 이렇게 기운 잃고 있으면 안되겠더라고요. 앞으로 싸울 일이 많아질 것 같으니 우리 잘 먹고 잘 지내고 힘도 키우고 그래야 해요. 힘냅시다. 일단 그러기 위해 일상을 회복하기로 해요!

단발머리 2022-03-17 12:54   좋아요 3 | URL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까 다시 먹고 힘을 내고 힘을 키워야겠어요.
제 옆에 다락방님이 계셔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제게는, 참 다행이에요. 고맙습니다, 다락방님!!

수이 2022-03-17 10: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벌써 많은 것들이 바뀌려하고 있어요. 그들이 생각하는 세상이 있겠죠. 그래서 수많은 것들이 바뀌리라 봅니다. 한동안 테레비를 멀리 하겠죠. 눈을 감으려고 해도 벌써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지키기 위해서 예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켜주지 못하고 내내 울었던 그 밤들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 당원으로 가입하는 수많은 이들 속에 저도 갈등 없이 들어갔어요.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주기 위해서.

힘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도록 합시다.

단발머리 2022-03-17 21:00   좋아요 3 | URL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 많이 생각합니다. 왼팔을 끊어내는 심정으로 민주당을 지지했던 2,30대 여성들의 마음을 우리가.... 우리가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을까요. 전 오히려 이번 선거를 겪어내면서 다당제로 가야하는, 가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더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을 지키지 못했던 비극을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지요. 비타님의 용기에, 소심한 저는 많이 놀랐습니다. 비타님을 본받아 저도 작게라도 실천하려고요. (그거요, 가입 신청서요^^)

수이 2022-03-17 14:20   좋아요 2 | URL
전 아직 걔네들이라고 말이 나오던데 🙄 그래도 적으로 규정하지 않기 위해서 애써볼게요 단발님

단발머리 2022-03-17 14:39   좋아요 3 | URL
저 역시 걔네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걔네들의 범위 안에, 자신들이 걔네들과는 다른데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섞여 있다고, 혼재(혼란스럽게 동거)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들에게 그들은 ‘걔네들‘이 아님을, 알고는 있냐고 물어보고 싶고요.
모두 자기가 접한 정보에 따라 자기 나름의 판단을 내리겠지만, 끝까지.... 말하고 질문하고 다시 물어보고 또 다시 확인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정치라고 생각하고요.

선거 결과가 확정적이었던 그날 새벽, 유시민쌤 말씀 옮겨 놓습니다. 제 맘에 오래오래 새기고 싶어서....
비타님 댓글에 달아놓습니다^^


.... 그렇게 전제를 두고.... 저는 우선, 이재명 후보한테 위로의 말씀 드리고요. 잘 하셨다는 칭찬의 말씀도 드리고 싶고요. 사랑한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재명 후보와 함께, 참 멋지게 선거전을 치렀던 민주당의 국회의원들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당원들, 또 자원봉사자들에게도 큰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잘 하셨습니다. 잘 해도 선거에 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저는 당원이 아닙니다만, 여러분들의 비전과 철학과 생각과 소망이 진짜 올바른 것이라면, 그렇다면 시민들이, 유권자들이 이것을 다시 알아줄 날이 머지 않아 올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선거라는 건 그런 거거든요.

그리고, 지금 유력이라고 떠 있는 윤석열 후보에게 다시 한 번 축하 말씀 드리고요. 또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셨던 모든 분들에게도 축하 말씀 드리고요. 자칫 잘못 생각하게 되면, 권력을 가지는데 따르는 위험, 그 고통, 이런 것들이 얼마만한 것인지를 느끼시게 될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너른 마음으로 국민을 섬기는 마음으로, 자신의 손에 들어온 권력을 잘 활용하시기를 부탁합니다.

<정치합시다 패널, ˝민주당은 건설적 비판, 국민의 힘은 국민통합 애써야˝// 유시민>

수이 2022-03-17 15:07   좋아요 1 | URL
전 그날 유시민쌤 표정 잊을 수가 없어서 ㅠㅠ 그 황망해하는 표정만 또렷이 새겨졌어요. 하지만 그대와 같은 친구가 있어서 제가 또 제 속좁은 마음 바운더리을 넓히기 위해서 애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정말 정치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가 이번에 무지에 된통 당하고 앞으로 5년 동안 친구님 말씀 들으면서 바운더리 넓혀보도록 하겠습니다!

2022-03-17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17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22-03-17 11: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나님 감사합니다.‘로 시작하는 매일의 기도를 할 수 없었어요.
도무지 감사할 수 없다고 너무 하신다고 울며 화 내고 원망하며 떠올릴 수 있는 저주들을 퍼부었어요.
그리고 2번을 지지한 사람들과 함께 앉아 아멘하며 기도할 수는 더더욱 없었어요.

그분의 계획과 뜻을 알지 못하는 이런 순간들은 어찌 견뎌야 할까요?

뉴스와 트윗을 보지 않고 며칠을 보내다 이제서야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의 글에서 큰 위로를 얻고 있습니다.
이 모든 순간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 붙들고 저도 새로운 기도를 시작했어요.

견딥시다!

단발머리 2022-03-17 13:05   좋아요 3 | URL
레와님도 그러시겠지만, 저도 하나님께 적잖이 실망해서 며칠간은 정말... 감사합니다,로 기도를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삐진다고 하나요. 시편 속, 다윗의 호소와 간구가 우리의 기도와 간구일 수 밖에 없는 시간들을, 우리가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뉴스를 읽지 않고 있어요. 시사 방송도 한참 동안은 듣지 않으려 하고요. 그 중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와 응원이 되고 있다는 레와님 말씀에, 오히려 제가 힘을 얻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한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범위를 넘어서서, 우리의 절망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손, 강한 팔이 우리 나라를 꼭 지켜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 땅에 가득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다스리는 나라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 기도 들어주세요.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mini74 2022-03-18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들식대로 살을 날려봐? 제웅을 만들어봐? 하다가 결국 다름을 보여줘야지 견뎌야지 하는 생각에. 제웅 만들기는 포기하고 ㅎㅎㅎ 상록수. 전 이 노래 들으면 그렇게 주책스럽게 울어서 ㅠㅠ 위로가 되는 글 고맙습니다 ~~

단발머리 2022-03-18 13:11   좋아요 1 | URL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우아하고 강고하게 살고 싶은게 제 맘이기도 한데, 그 전에 좀 많이 울었네요.
상록수의 웅장함을 우리 맘에도 간직하면서, 우리 서로 위로하면서 힘을 내봐요. 고마워요, 미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