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The Viscount who Loved Me

 


브리저튼 시리즈 두 번째다. 어제 다 읽었는데, 요즘 계속 100자 평을 썼더니, 어제 메모장에 나도 모르게 100자평 작성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됐다. 놀라운 습관의 힘.

 

난봉꾼 안소니가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쾌락에 대한 집착은 필멸의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의미 없는 노고. 쓸데없이 쾌락을 옹호하게 되는 결론.”  

 


넷플릭스 드라마 시즌 1에서의 안소니는 책임감은 강하지만 난봉꾼이 분명하기에(예고편만 본 사람), 천하의 난봉꾼이 사랑꾼이 되어가는 과정 자체는 매우 로맨틱하다(로맨틱 소설). 젊은 나이에 사고로 갑자기 죽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와 영영 이별하게 만든 죽음의 강렬함을 마음에 간직한 안소니가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오히려 동물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다. 죽을 수밖에 없기에, 죽어야 하기에. 현재를, 지금을, 즐거움을, 쾌락을 좇는 게 아닌가.

 

















『한나 아렌트의 3번의 탈출』의 희대의 섹스 신. 하이데거와 아렌트 두 사람이 실제로 그런 상황에서(섹스 상황) 그런 대화(마르틴, 죽음이 진실인가요? 그냥 진실이 아니라 유일한 진실이지. 인간을 만드는 건 죽음이야. 그리고 죽음이 의미를 만들지)를 나누었을 리 만무하지만, 결국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의 엄중함과 그 사실에 대한 처절한 인식이, 사랑 혹 사랑이 아닐지도 모를 두 사람의 정사를 가능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2.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책의 주인공 노라는 다른 선택으로 이루어진 다른 우주를 경험하다가 마음에 드는 우주에 도착한다. 철학 교수인 그녀가 깔끔하게 잘 정돈된 방에서 책장을 둘러본다. 버트런드 러셀, 헨리 데이비드 소로, 플라톤, 한나 아렌트, 줄리아 크리스테바 그리고 주디스 버틀러. , 여기에서 만나는 우리의 버틀러.

 


지금젠더 트러블』 282쪽을 읽고 있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근데 그냥 읽는다. 푸코가 나오고, 『성의 역사』가 나오고, 크리스테바가 나온다(버틀러랑 둘이 세트인가). 그냥 읽는다. 그게 무슨 의미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읽는다고 해서 전부 이해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혹 제대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해한 것을 모두 다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읽고, 어느 정도 이해하고, 대부분 잊어버린다. (제발, 저만 그런 거라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얼만큼 이해하느냐에 상관없이, 버틀러를 읽는다. 그리고, 여기 이 책. 멋진 삶의 한 표준으로 제시된 그 장면에서 노라가 훑고 있는 책 중에, 버틀러가 있다. 근사하다. 우리가 아는 혹은 모르는 수많은 작가 중 한 명인 버틀러.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제일 아끼는 색연필(코끼리 색연필, 색상 넘버 03, 블루)을 들고 줄을 치며 읽는 이 책의 저자, 버틀러. 둘이 만났다. 이 책의 버틀러와 내 책의 버틀러.

 

 
















3. 세상을 바꾸는 하나의 목소리

 


변화를 만들어가는 평범하고 용감한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생각보다는 글밥이 많다(동화책 말할 때 쓰는 전문용어; 글씨가 많다). 노동절 메이데이의 역사를 서술한 장에서는 나도 모르게 도리도리 윤의 ‘120시간이 떠오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힘들게 투쟁해서 얻은 52시간인가. 다른 세계, 다른 우주에 사는 사람이라면 알 수 없을 일이다

 

서프러제트의 여성 참정권 운동은 기발하고 발랄한데, 특히 당시로써는 최첨단의 통신 수단이었던 우편 제도에 대한 투쟁이 신선하다. 우체통에 잼이나 잉크, 식초를 던지거나, 때로는 불을 질렀다는 건데, 요즘으로 치면 펜치 들고 다니면서 전선을 끊거나 와이파이 공유기를 부셨다는 거로 이해하면 될까. 얼마나 많은 여성이,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힘들게 투쟁에서 얻은 선거권인가. 포기하면 안 되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권리.







글쓰기는 그 자체로 강력한 저항이 될 수 있어요. 읽기도 마찬가지고요!’읽기만으로 연대할 수 있다고 믿어요!’의 정희진 쌤 문장을 기억나게 해서 사진 한 장!

 







 















4. 나는 고백한다

 

원래 여름 휴가를 꼭 가는 편이 아니기는 한데, 작년에는 코로나로, 올해는 이런저런 상황으로 휴가는 꿈도 못 꾸고 있다. 지난주에 <프랑스어 책읽기> 모임이 한 주 쉬는 기간이라서, 그럼 나는 이번주 휴가야! 말만 그렇게 했다. 금요일에 퇴근한 사람이 자기도 휴가 써야겠다며 월, 화에 출근을 안 하겠다는 거다. 그래서, 이번 주도 휴가가 될 모양이다. 휴가 기간에는 시원한 곳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며 잭 리처 읽어줘야 하는데, 잭 리처 신간 『10호실』을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대신 이 책을 읽어보려 한다

 


기대가 뭐,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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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8-02 00: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휴가를 책과 함께.... ㅎㅎ 저는 요즘 좋아요. 하루종일 밥하는 시간이랑 잠깐 잠깐 올림픽 보는거 빼면 다 책읽기... 이게 휴가야 ! 너무 더워서 어디 나갈 엄두가 안나요. ㅎㅎ 나는 고백한다는 아마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거예요. ^^

단발머리 2021-08-02 09:19   좋아요 2 | URL
최고의 휴가라 할 수 있겠네요. ㅎㅎㅎ 마침 오늘 아침에는 여자 배구 경기가 있다는 기쁜 소식 알려드립니다.
나는 고백한다,는 기대가 매우 큽니다.

유부만두 2021-08-02 14: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정치사도 푸코 깔고(?) 시작하던데요. ^^ 유비쿼터스 푸코.

그나저나 전 100자평은 고사하고 서재들어오기가 힘든 나날입니다. 컴이 있는 방이 너무 덥고 애들이 차고 앉아서 게임 삼매경이라서요. 노안으로 침침해서 핸드폰으론 ‘좋아요‘ 밖에 못눌러요.

그래도 항시, 늘, 당신 곁에 있습니다. 저도. 푸코 같이요.

단발머리 2021-08-02 09:22   좋아요 2 | URL
앗!!! 벌써 시작하셨군요. 유부만두님이 제일 먼저 시작하신듯해요. 전, 아직 트러블 중입니다. 근데 거기에도 푸코 나온다 하니... 참 반갑고도 어렵네요.

더위가 만만치 않네요. 그래도 비와서 그런지 오늘은 좀 시원한 거 같아요 ㅠㅠㅠ 물 활짝 열어놨더니 매미들이... 우아... 매미들이 아주 신났습니다.

제 곁에 항상 같이 곁에 주세요~~~ 푸코 사절 / 유부만두님 환영

- 2021-08-03 18:28   좋아요 0 | URL
유비쿼터스 푸코..... (빵터지기)
어디에나 함께 있는 푸코 ...

다락방 2021-08-04 08:04   좋아요 0 | URL
유비쿼터스 푸코.. 라고요?

잠자냥 2021-08-02 09: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드디어 <나는 고백한다> 시작하시나요?! ㅎㅎㅎ 단발머리 님의 감상을 기대하겠습니다!

단발머리 2021-08-02 10:02   좋아요 2 | URL
제가 좀 늦으감이 있어요. 진작부터 읽고 싶었단 말이지요. ㅎㅎㅎ 제가 얼른 읽고 고백 한 번 해보겠습니다.

수이 2021-08-02 1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탁월한 백자평. 아무래도 백자평의 달인이 되신듯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하나의 목소리 읽고 싶어요. :)

단발머리 2021-08-02 13:08   좋아요 2 | URL
백자평의 달인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상을 바꾸는 하나의 목소리> 글자 많고 내용 알차요.
역사 만화로 생각하고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1-08-02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나 아렌트 읽었는데요
하이데거라면 그럴만 하다고 생각해요
본인이 정치적 선택을 한거에도 철학적이유가 있었으니...! ㅎㅎ
존재가 되기 위한...!

단발머리 2021-08-02 13:10   좋아요 2 | URL
맞아요, 그레이스님.
하이데거 사상에 대해 잘 모르기는 하지만, 개인 하이데거는 참 별로였던 것 같아요. 정치적 선택에도 그런 이유를 붙일만한 그럴 만한 사람이죠.

mini74 2021-08-02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끼리 색연필 !! 저도 최애색연필입니다 ㅎㅎ 저는 노란색 *^^*책과 함께 하는 휴가 즐겁게 보내세요 ~~

단발머리 2021-08-02 16:52   좋아요 2 | URL
코끼리 노란색이요!! 저도 그거 하나 찜해야겠어요 ㅋㅋㅋㅋㅋ 즐거운 휴가 보낼께요,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1-08-02 16: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 휴가기간 <나는 고백한다> 읽으신 뒤 리뷰 쓰실 것이 기대됩니다. 전 사두기만 했네요... 잭리처!! 문득 단발머리님의 리차일드 마니아 순위가 궁금해지는데요, 혹시 단발머리님이 1위? 아니면 3위? 저는 최근 4위로 올라섰다는 소식 전해드립니다 ㅋㅋ

단발머리 2021-08-02 16:51   좋아요 3 | URL
네네~ <나는 고백한다>의 고백 많이들 기다리고 계셔서 저도 기대됩니다 ㅋㅋㅋㅋㅋ 저 리차일드 마니아 순위 3입니다. 독서괭님 4위 입성 축하드리며 저도 곧 잭 리처 만날 예정임을 알려드립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8-04 08:05   좋아요 1 | URL
아아 저는 여러분들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얼른 잭 리처 만나야겠네요. 기다려라, 잭 리처!!

책읽는나무 2021-08-03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단발머리님^^
더운데 정말정말 더운데....그래도 열심히 성실하신 단발머리님이셔요~
요즘 100자평 달인이 되셨군요?ㅋㅋ
100자평 정말 쉽지 않던데...단발머리님은 또 그동안의 내공 도움닫기로 훌떡 가볍게 안착하셨군요.
앞으로 더욱 기대됩니다^^
이곳에서 바람돌이님 유부만두님등등 닉넴만 보여도 뭉클하고 반갑네요^^
친정같은 곳이어요ㅋㅋ
더운데 건강 조심하시구요^^

단발머리 2021-08-03 22:33   좋아요 1 | URL
책읽는나무님!! 안녕하세요! 너무너무너무 반가워요!!!
전 100자평의 달인은 아니구요. 100자평 대회가 있어 덕분에 평소에는 안 읽던 책을 골고루 읽게 되었습니다. 내공이랄 것도 없어서 그냥 글자수만 맞추는 정도지만, 하다보니 좋은 책을 만나게 되어서요.
바람돌이님, 유부만두님, 반가운 닉넴이 이렇게 많은데 왜 이리 안 오셨나요? 친정에 이렇게 가끔 오시면 아니 됩니다!! ㅎㅎㅎ
어디 가지 마시고 자주 오시어요. 책나무님도 더운데 건강 조심하시고요. 또 뵈어요!!! (굳은 다짐을 위한 반복기법)
 
세상을 바꾸는 하나의 목소리 세상의 모든 지식
에밀리 하워스부스 지음, 앨리스 하워스부스 글, 김은정 옮김 / 사파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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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변화는 위대한 한두 명의 영웅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 양보하고 헌신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진실을 보여 준다.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알차고 의미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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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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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성장하면서 자신의 몸에 대해 부끄러움, 증오, 혐오를 배워가는 과정이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감히, 남자처럼 지적 탐구를 갈망하는 여자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절망감에 숨이 막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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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8-01 2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서재에서 아니 에르노 평가가 좋아서 세월 주문했어요.^^ 시작하는 책 같아서...!

단발머리 2021-08-02 09:24   좋아요 1 | URL
네, 전 한 권밖에 안 읽고 에르노 좋아져버렸네요. 저도 <세월> 찾아봐야겠어요. 시작하는 책이군요!!!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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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름 부인이 하지만 널 무너뜨리는 건 대부분 룩이야라고 말했을 때, 놀랐다. 체스판에서 내가 제일 즐겨 쓰는 말이 룩이기 때문인데, 룩과 비숍 두 개 기물의 움직임이 가능한 퀸보다 나는 룩이 훨씬 더 좋다. 전진, 후진, 왼쪽, 오른쪽. 직진으로 이동할 수 있는 룩은 세상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식과도 비슷하다. 전진과 후진, 왼쪽과 오른쪽. 하나의 우주, 일직선의 세계.

 


이 책은 이런 일직선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다른 선택으로 만들어진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노라 시드의 모습을 보여준다. 죽기로 결심한 노라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 삶과 죽음 사이의 특별한 공간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 어린 시절 사서 선생님 엘름 부인을 만나게 된다. 더 이상 삶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기대도 없는 노라에게 이번 생은 후회로 뒤덮여 있다. 이렇게 했더라면. 저렇게 했더라면.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현재의 고통이 자신에게 닿지 않았을 거라 체념하고 후회하는 노라에게 엘름 부인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책들을 건네고, 노라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선택들로 이루어진 다른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지금의 나를 만들었던 선택들 중에 근원적인 요건들은 선택 밖의 것들이다. 부모, 국적, 인종, 그리고 성별. 나는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이것들은 지금 나의 세계를 이루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내가 했던 선택이 있다. 대학과 직장, 배우자와 거주지. 이런 선택으로 지금의 내 세계가 만들어졌고, 그런 선택의 합이 지금의 나다

 

그 대학 어떤 거 같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학에 가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새로운 생활이 두렵기도 하고, 기숙사 생활도 걱정되었지만, 스무 살 새롭게 시작하기에 괜찮은 곳이라 생각했다. 물어볼 사람이 없어 교회 선배에게 물어보았다. 그 대학 어때? 괜찮지, 거기 괜찮지 뭐. 그래도 나는 니가 안 갔음 좋겠다. 만약 내가 그 대학에 갔다면 내 삶은 지금과 어떻게 다를까. 한 달 다니고 그만두었던 첫번째 직장을 계속 다녔다면, 그랬다면 지금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 큰아이를 낳은 후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회사에 다녔다면, 워킹맘으로 살고 있다면, 그 우주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어떻게 다를까. 결혼해서 친정과 시댁에서 모두 가까운 이 곳이 아니라,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면. 만약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때 그랬으면 어땠을까의 가정이 노라에게 이루어졌다. 노라는 다른 삶을 산다. 아니, 전혀 새로운 삶 속으로 던져진다’. 영국 시골 펍의 주인이 되고, 친구를 잃고 절망한 채 호주의 해변에서 마약에 찌든 삶을 살고, 수영선수가 되어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리스트가 되고, 북극권 한계선의 빙하학자가 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밴드의 리드싱어가 되고, 다정한 남자친구와 함께 유기견을 돌본다. 남편과 함께 캘리포니아에서 작은 포도밭을 가꾸고, 소설을 쓰고, 피아니스트가 된다. 여행 블로거가 되고, 자려고 하지 않는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가 된다. 그리고 노라는 이 곳으로 오기 전, 자신에게 마지막 친절을 베풀어주었던 이웃 애쉬와 함께 하는 삶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행복하다고 느끼던 그곳에서조차 노라는 그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닫고, 결국은 현재의 삶으로 다시 살아난다’.

 

우리의 우주와 나란히 존재하는 또 다른 우주에 대한 생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 다른 선택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 다른 내가 존재하는 다른 우주. 그런 상상,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이 이 책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다. 다만, 의사 남편과 예쁜 딸아이, 멋진 집과 철학 교수라는 직업적 성공의 총합이 행복한 삶의 전형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세상을 바꾸고자 할 때 가장 쉽게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관점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 역시 세상에 대한 너무 순진한 이해 방식이 아닌가 묻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라의 선택으로 새로운 삶이 열릴 때마다 흥미로웠다. 메달리스트가 되기 위한 고된 새벽 훈련이나 피눈물 나는 인고의 시간 없이 얻게 된 세계 최고 가수로의 손쉬운 안착이 좀 아쉽기는 했지만, 그런 상상마저도 마음껏 꿈꿀 수 있어서 좋았다. 굶주린 북극곰에 맞서 연신 프라이팬을 두드릴 때,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위해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설 때, 나도 함께했다. 안식년을 맞은 철학교수가 되어 깔끔한 서가에 꽂힌 플라톤의국가』, 한나 아렌트의전체주의의 기원』, 줄리아 크리스테바와 주디스 버틀러,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의 책을 쓰다듬을 때, 나도 그 옆에 있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의 진학을 소심하게 말리던 사람은 내 아이와 스스럼없이 전화하는 사이가 됐다. 아빠, 언제 와요? 나의 선택은 어떤 식으로든 내 삶을 만들어갔다. 이런 방식 혹은 저런 방식으로. 내가 선택한 지금의 우주와 선택하지 않은 또 다른 우주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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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7-31 19: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단발머리님은 괜찮게 읽으신 모양입니다. 설정 자체는 참 흥미롭네요. 저도 혼출육 안 하고 살아가는 제 모습을 가끔 상상해보곤 합니다… 게으르게 살았을 것 같지만요…

단발머리 2021-07-31 23:30   좋아요 2 | URL
가끔 그런 생각하잖아요. 그 때 그렇게 했더라면. 다른 삶을 살아가는 노라를 보며 맘껏 대리만족했습니다.
혼출육 안 하고 사는 제 모습 저도 상상하곤 합니다. 웃음이 나네요. 흐흐흐.

- 2021-08-03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의 룩 유저! 직진밖에 모르는 단발님. 언제나 다른 우주를 상상하는 단발님. 멀리있는 다른 우주에서는 우리가 친구로 만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곳 우주에서의 삶이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요.

단발머리 2021-08-10 08:29   좋아요 0 | URL
전 룩 좋아하고, 장기에서는 차 좋아해요 ㅎㅎㅎ 그렇다고요. 언제나 다른 우주를 상상합니다. 멀리 있는 우주, 다른 우주에서도 난 내가 쟝쟝님의 친구였을거 같아요. 어떤, 그런, 확신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되는 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3
최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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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고 어린 아이가 모진 말을 배워가는 과정이 안쓰러웠다. 아이였을 때 어른 같던 아이는 막상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같은 여린 마음에 여전히 혼자다. 최진영을, 아니 열네 살의 태희를 꼭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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