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출용과 소장용을 구분했던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다. 일기는 중요한 초등 숙제 중의 하나였는데 선생님이 검사하는 일기에 내게 중요한 그 일들을 써낼 수 없으니, 일기를 제출용소장용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었다. 제출용은 오늘 엄마가…’ 아니면 오늘 동생이…’로 시작했고, 소장용은 오늘 2교시가 끝나자마자 그 애가 내 옆자리로 와서는…’으로 시작하곤 했다. 사건과 사건에 대한 설명, 해설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애도 나를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에 대한 물음이 3년 정도 계속되었는데, 그렇게 시작된 일기쓰기는 제출이 필요하지 않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거쳐 회사에 다닐 때까지 이어졌다. 결혼 후 여러 번 이사하는 와중에도 초등학교 일기, 즉 소장용 일기는 무사히 살아남아 안방 앞 베란다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70대 후반, 아니 80대 중반쯤 되어 인생에 낙이 없고, 재미가 없고, 할 일이 없고, 시간이 남아도는 때가 오게 되면, 그때 꺼내서 재미있게 읽어보려고 한다. 지금 꺼내 보기에는, 심히 부끄럽다.

 

회사를 퇴사하고 나서 일기쓰기를 멈췄다.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해왔던 일기쓰기를 왜 갑자기 그만두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육아가 힘들었거나 시간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한참 아이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다 좀 시간이 지나서야, 그때쯤 일기쓰기를 그만두었다는 걸 알았다.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은 난다. 이제 더 이상 내게 중요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 어쩌면 바로 그때가 순간순간이 신나고 재미있고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그때는 내게 해야만 하는 일들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주인공이지, 나 자신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고 하루를 살았다. 일주일이, 한 달이, 일 년이 그리고 십 년이 하루처럼 지나쳐갔다.

 

재작년에 서점에 들렀을 때, 친구가 다이어리계의 명품 *스킨을 사주었다. 친구는 다이어리를 사주면서 다시 일기를 써보라고 했다. 그래서 2020년부터 일기쓰기를 시작하게 됐는데 생각보다는 쉽지 않았다. 사건이 아니라 해석이 꽤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흡사 100자 평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비싸고 예쁜 일기장이 아니었다면, 친구 선물로 받은 일기장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알라딘 이웃 몰리님의 종이일기 찬양론도 일기 다시쓰기에 큰 격려가 되었다. 그렇게 2020년부터 종이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작년 말 *타벅스에서 준다는 다이어리를 받을 때는 일기쓰기에 적당한 다이어리를 골랐다. 마음이 복잡하고 시끄러울 때 썼던 일기를 읽어보았더니 속상한 일이 일어났다는 건 알겠는데 그 일이 정확히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과 몇 개월 전의 일인데도 그랬다. 기억은 선택과 편집이란 걸 알지만, 일기장에서조차 그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건 좀 색다른 일이었다. 일기장에서조차 말하지 못할 일이라니. 소장용에서조차 말할 수 없는 일이라니.

 



생애 후기의 한 인터뷰에서 보부아르는 회고록에 쓰지 않았지만 지금 돌아볼 때 집어넣고 싶은 부분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녀는 솔직하고 균형 잡힌 자신의 성생활 이야기,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정말로 진실한 이야기라고 대답했다. 보부아르는 일기에조차 솔직한 성경험 이야기를 쓰지 못했다. 어머니가 일기를 볼까 봐 두려웠을까? 보부아르는 자신의 개인사가 명성으로 인해 왜곡되고 자신의 철학과 정치학에 쏠려야 할 관심을 가로채리라고는 아직 알지 못했다. (136)

 


시몬 드 보부아르는 말년에 회고록을 써서 자신의 삶을 돌아봤지만, 후에 발견된 그녀의 일기 그리고 연인들과 주고받는 편지는 회고록의 내용과 상충하는 경우가 많다고 이 책의 저자는 판단한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연애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이었고, 두 사람의 평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사르트르이며 보부아르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음을 그녀의 일기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람둥이 사르트르와 달리 보부아르의 애정 관계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어쩌면 이는 보부아르가 원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일기장에서조차 솔직하지 못했다.

 

 

보부아르 평전을 저술하는 저자의 입장이라고 한다면 보부아르에 대해 긍정적일 수밖에 없을 테지만, 궁금증은 계속 일어난다. 이런 사르트르에게 보부아르는 왜 매여 있었을까. 궁금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닌 듯하다.

 


영국 작가 앤절라 카터(Angela Carter, 『피로 물든 방』의 저자)서구 세계에서 생각이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나한 번쯤 이런 의문을 품었을 거라고 했다. ‘어째서 시몬처럼 괜찮은 여자가 장폴처럼 지루하고 멍청한 남자 비위를 맞추느라 인생을 허비했을까?’ 카터는 오직 사랑만이 그러한 낙오자 신세마저 자랑으로 삼게 한다.”고 했다. (244)  

 

 

계약 연애였지만 사르트르의 배우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여겨졌던 보부아르. 그녀의 사후, 여러 명의 애인과 다양한 방식으로 오랜 기간 사랑의 행각을 벌인 증거들인 편지와 일기가 다수 발견되었다. 사르트르와의 계약 연애라는 카테고리 안으로 자신을 고정시킨 건 그녀 자신일 수도 있겠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의 사랑만이 기억될 만한 사건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것이 사르트르가 보부아르를 이용한 것처럼, 보부아르가 사르트르를 이용한 방식일 수도 있겠다. 또한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사상을 다듬고, 보완하고, 정교화하는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걸 아까워하지 않은 듯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자연스레 『뒤의 올 여성들에게』의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샘과 내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수년 뒤, 주디스 스팀Judith Stiehm은 똑똑한 여자들이 자신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를 선택하고, 내내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며 산다는 글을 썼다. 주디스 스팀은 이 현상을 ‘질투 어린 친밀감’이라고 불렀다. 나는 주디스 스팀의 묘사에 완벽히 들어맞는 사람이다. (131)

 



알람시계를 하나 샀다. 빨간색이 줄어드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 시각적인 효과 때문에 쉽게 집중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좋다는 상품 설명을 보고 구입하게 됐다. 도서관에서 사준 책이라 애지중지하고 있었는데, 반납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분초를 아껴가며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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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21-03-14 0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 집에 두 개나 있는 빨간 알람 시계가 반가워서 글 남깁니다...^^
즐거운 독서와 함께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단발머리 2021-03-15 18:07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북홀릭님! 저도 빨간색으로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람돌이 2021-03-14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기를 그토록 오랫동안 쓰셨다는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도하고 2-3일을 넘긴적이 없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포기하게 되더라구요. 그나마 알라딘 덕분에 읽은 책이라도 정리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ㅠ.ㅠ
보부아르의 이 책은 여러 알라디너님들이 글들을 올리고 있어 진짜 조만간 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잔뜩 드네요.

단발머리 2021-03-15 18:09   좋아요 0 | URL
저처럼 좋은 종이 일기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최근에는 알라딘을 일기장으로 이용하고 있네요 ㅠㅠ 일기도 쓰고 바람돌이님처럼 책읽은 것도 정리하구요.
보부아르 책은 정말 강추입니다. 실망하는 마음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 그래도 보부아르가 더 좋아졌어요.

파이버 2021-03-14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람시계 너무 좋네요 저도 구입하러 갑니다♡
하루 남았지만 편안한 주말 되세요!

단발머리 2021-03-15 18:09   좋아요 1 | URL
쿠*에서 구입했어요, 저는요. 원래 애플꺼가 진품인데 비싸다고 하더라구요 ㅎㅎㅎㅎ
전 파이버님 덕분에 편안한 주말을 보냈습니다. 파이버님 오늘 편안한 저녁 되시길요^^

얄라알라 2021-03-14 0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리버 색스도 일기쓰기를 그리 중시하였다던데, 한 번 더 일기! 일기쓰기를 멈춘 후 부터 공상하며 커지기도 멈췄던 것 같네요. 별다방, *스킨, 일기장 다양하게 써보셨나봐요^^

단발머리 2021-03-15 18:10   좋아요 1 | URL
보통은 일기장으로 나온 노트에 썼었는데, 친구가 좋은 것을 사주어서 한 해는 호강을 했네요.
요즘은 다이어리가 예쁘게 잘 나오니 장비빨 힘을 받으셔서 일기 쓰기 도전을 추천드립니다^^

얄라알라 2021-03-15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색스 박사가 1000권, 선반이 휘어질 정도로 일기를 평생 쓴 힘으로 위대한 작가가 되셨으니 발 끝의 때(?) 만큼 흉내라도 내야겠어요. 코로나 팬데믹으로 별다방 다이어리도 못받았네요. 갑자기 다이어리 검색하러 가고 싶어짐. ^^ 단발머리님의 추천 받으니 뭔가 으쌰해야할듯요

단발머리 2021-03-15 18:36   좋아요 0 | URL
전 오랜만에 다시 종이 일기 쓰니까 옛날 생각이 많이 나더라구요. 하도 오랫동안 안 써서 그 때만큼 흥은 나지 않지만 ㅎㅎㅎㅎㅎㅎ 나름 조용하고 정갈한 시간이 될 듯 해요. 으샤으샤 성공하시면 저한테도 알려주시어요^^

- 2021-03-26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기에 솔직하지 않은..보부아르...라니 너무 의외다!!! ㅎㅎ 뭔가ㅜ애석하고 아쉽기도 하고.. 단발님 글 속 그녀들은 멋있고 사색적이고 천재로워서 저도 동경하게 됩니다. 오늘 아침엔 문득 그녀들을 읽고쓰는 단발님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어져요..

단발머리 2021-03-31 13:51   좋아요 0 | URL
난 그런 사람은 아닌데, 쟝쟝님이 그렇게 생각한다니 난 그런 사람이 될까 싶어요.
꼭 그런 사람이 되고 말꺼얌!!! 읽고 쓰는 사람, 위대한 여성들의 발자취를 읽고 쓰는 사람...

Falstaff 2021-03-26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억, 이 글을 왜 이제야 봤지....하다보니 일요일에 쓰신 거군요. 다른 건 모르겠고 앤절라 카터, 보부아르처럼 괜찮은 여자 장폴 같은 지루하고 멍청한 남자˝에는 백퍼 동의합니다!!!!

단발머리 2021-03-31 13:53   좋아요 0 | URL
여러번, 아주 여러번 저는 보부아르를 이해하고 보부아르를 아쉬워하면서, 그렇게 이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앤절라 카터의 인풀평에 대해서는 뭐... 저도 폴스타프님 의견에 동의하고요!!
 


 

백내장 수술 뒤로 부쩍 시간이 많아진 엄마. 지난번에 내드렸던 피아노 숙제 검사하고 감사일기 써 보시라 했던 거 확인(나는 안 쓰면서 엄마에게는 너무 좋은 거라고 써 보시라 강제함)하는데, 한쪽 면에 영어 알파벳이 쓰여 있다. A a의 키가 같다. g q도 좀 난해한 모습이다. A a를 같은 크기로 그려놓은 사람은 누굴까. 알파벳 처음 배우는 사람이 쓴 것 같은데 아무래도 큰아이가 초등학생 때 쓴 게 아닐까 싶다. 뒷면에 검정 플러스 펜으로 알파벳을 다시 쓴다. 근데 이거 쓴 사람 누구죠? 하고 물었더니, 엄마가 너라고. 네가 그랬다고 하신다. 엄마, 만약에 이렇게 쓴 사람이 나라면... 나는 정말 큰일 났네요. 엄마도 이모도 활짝 웃는다.

 

대문자와 소문자에 대해 간단하게 (문장 맨 앞에 쓸 때 대문자로 씁니다) 설명을 하는데, 옆에 앉아 계시던 이모가 조용히 일어나 가까이 오신다. 이모와 눈이 마주치고 내가 먼저 웃었는데 이모는 내가 무언가를 물은 듯 자연스레 대답하신다. 우리는 못 배워서. 제때 못 배운 게 한이 되어서. 내가 하는 말을, 이 변변찮은 설명을 듣고 싶은 마음을 어쩌면 좋을까.

 


내가 이 나이 되도록 영어를 못하는 건 오로지 내 탓이다. 영어만 공부하라고 주어졌던 시간은 충분했다. 영어 교재는 말할 것도 없고 미드, 동영상 강의, 전화 영어 등 영어를 공부할 방법은 차고 넘친다. 돈 들이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오성식처럼 창경궁 지나가는 외국인 괴롭히지 않아도 오성식보다 영어를 잘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의 영어 못함은 오로지 게으름, 이놈의 게으름 때문이다.

 


알파벳 쓰는 내 옆에 착 붙어 앉아 지켜보는 엄마와 간단한 설명에 귀 쫑긋하는 이모에게는 내게 없는 무엇이 있는 걸까. 그분들이 갖고 있는 그 무엇을, 나는 왜 갖고 있지 못한 걸까.

 


하릴없이 집에 있는 원서 목록을 만들어본다. 근래에 산 책들만 추려도 한참동안 읽기만 해도 되겠다. 
































지금 읽는 책은 이것. 참 재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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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3-08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말 배울때 벽에 붙어있던 알파벳표 보고 이건 엄마에이 이건 아가에이 하던 생각이 나네요^^

단발머리 2021-03-08 14:16   좋아요 2 | URL
전 아이들 키울 때 집에 알파벳 표를 붙여놓지도 않았는데요, 최근에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어공책이랑 같이 선물로 드릴려고요^^

다락방 2021-03-08 18:43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님 혹시 추천해주실 만한 알파벳표 있으실까요? 저는 저희 엄마 보여드리고 싶어요 🥺

그레이스 2021-03-08 19:14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저도 너무 오래돼서;;
아마 학습용으로 나와있을듯요

그레이스 2021-03-08 19:18   좋아요 0 | URL
https://m.blog.naver.com/truely00/20120150908
이런 블로그에서 다운받아서 프린트해 쓰시면 어떠실지

단발머리 2021-03-08 19:18   좋아요 0 | URL
전 붙이는 것보다는 아이들 책처럼 되어 있는 것 중에 <기적의 영어 알파벳> 사볼까 싶어요. 벽에 붙이는 거는 백화점 내 서점에 가장 다양하게 준비해 놓는 거 같았어요. 아님 교보문고요^^

다락방 2021-03-08 19:19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모두모두 살펴볼게요!!

단발머리 2021-03-08 19:19   좋아요 0 | URL
우앗!!! 감사해요! 그레이스님!

다락방 2021-03-08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 알파벳표 사시면 공유해주세요. 저도 집에 붙여놓아야 겠어요. 엄마 보시라고요.

단발머리 2021-03-15 18:12   좋아요 0 | URL
저는 <가장 쉬운 알파벳 쓰기 하루 한 장의 기적>을 장바구니에 넣어 두었습니다^^

mini74 2021-03-08 1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행복한 모습 그려지는데 콧끝은 시큰한지 ㅠㅠ. 어제도 엄마랑 화투 치다가 싸웠는데. 반성해 봅니다 ㅎㅎ

단발머리 2021-03-15 18:13   좋아요 1 | URL
엄마랑 싸운 부분은 아쉽지만 ㅎㅎㅎㅎㅎㅎ 엄마랑 화투 같이 치는 딸이라니.... 미니님 때문에 저도 코끝이 시큰하네요.
어머님과 오래오래오래 화투 치시길 바래봅니다!!!

수이 2021-03-08 17: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으니 우리 엄마 히라가나 가타카나 다시 하고싶다는 말 흘려들었는데 히라가나표 먼저 사다드려야겠습니다. 영어 기초회화 같이 해보아 엄마 이것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영어 선생님이었던 우리 이모는 엄마랑 공부 안 하고 맨날 같이 만나 점 보거나 절 가서 수다 떨고 떡만두국 드시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 떡볶이도 소녀들처럼 사드시고 열일곱 소녀들처럼 깔깔깔 웃다가 싸우시기는 어찌도 그리 잘 싸우시던지..... (어머 나 이모 깐 건가;;;; 나쁜 조카네 -_-;;;;;) 저기 개랑 소녀랑 같이 있는 책 그 옆에 있는 책 그 옆에 있는 책 저도 몰래 사놓았습니다. 모르는 책이 있어서 앗 저건 무엇인가 하고 냉큼 검색했지요. 노랑이도 언제 사신 겁니까. 어제는 일곱살 조카 뒤늦은 생일 축하 해줄겸 놀러갔다가 에이비씨디를 쓰는데 대문자 소문자 똑같은 크기로 쓰고 킁킁 자기 좀 보라고 자기 이렇게 잘 쓴다고 에이는 에이 비는 비 씨는 씨 집이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외치길래 어머어머 영어 엄청 잘 하신다는 그 조카님이 복습하시는 건가요? 물어보았더니 예쓰! 마이 앤트! 대답하더군요. 영어 몇 마디 해주었더니 눈이 똥그래지면서 우리 이모가 저보다 더 영어를 잘 하시네요?! 해서 한참 웃다 왔습니다. 곳곳에 영어 풍년이군요.

단발머리 2021-03-15 18:20   좋아요 0 | URL
어머님의 일어 공부 응원합니다. 이모님이 조금만 마음을 열고 두 분이 영어 클럽 하셔도 좋을듯 한데요. 만나기도 쉽고 수강료도 필요없고 효과 만점일것 같아요 ㅎㅎㅎㅎㅎ
조카님도 영어를 이렇게 잘하니 수연님 가족은 외국 여행 나가셔도 걱정 없으시겠어요. 그 때 조카가 먼저 나서서 영어 잘하는 이모 입 뗄 틈도 없이 쏼랄라를 발사할 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수연님이 모르는 책이 무슨 책인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세화서점에서 구매한 책이라지요. 노랑이는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그 애는 번호표를 받지도 못 하고 한참 뒤로 밀려났습니다. 쏘우 쏘리. 씨유쑨. 풍년이 오면 에헤라디여 할 수 있게 열심히 땀을 흘려야 할 텐데 말입니다. 흐미 ㅠㅠㅠㅠ
 





 
















이런 사진을 올리고 이제 이 책을 읽어야겠다 글을 쓴 시점이 2015 6 30일이다. 정희진 선생님은정희진처럼 읽기』에서 이 책은 내가 접한 페미니즘 입문서 중에서 가장 우수하며 가장 충분하다. 또한 가슴 죄는 명언들이 즐비하다(97)”라고 쓰셨다. 시간은 흘러 오늘은 2021 3 4. 사람은 자신이 가고 싶은 그 방향으로 간다. 게으름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가는 방향은 결국 이쪽이었고, 그래서 다시 이 책을 시작한다.


 

새 이름, 새 표지의 빨간책을 기다린다. 옆 동네 인터넷서점 그래24에서 예쁜 가방 선물로 준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거기에서 주문했는데, 같이 주문한 『상호교차성』이 준비가 안 됐다고 5일이나 더 기다리라고 한다. 알라딘은 당일배송인데. 신기한 일이다. 

 


예전에 썼던 페이퍼를 열어보니 도서관 책으로 220쪽까지 읽었다. 빨간책이 드디어 도착하면 거기서부터 읽어도 될까 혼자 생각한다. 여성주의책 같이읽기 모임 친구들이 이 글을 안 봐야 할 텐데. 바로 1등이다. 움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그냥 마치면 서운하니까 67.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글을 써서는 안 된다. 남을 위해서도 써야 한다. 머나먼 곳에 사는 알지 못하는 미래의 여자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들에게 우리가 결코 영웅이 아니었음을 말해주자. 다만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열정적으로 믿고 추구했을 뿐이다. 우리는 때로 강했지만 때로는 매우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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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3-04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고 말았네요... 킁... 아직 첫페이지만 읽은 난 우짜라고. 일단 자고 나서 생각 ㅠ

단발머리 2021-03-15 18:20   좋아요 1 | URL
저 아직 저기에 정체되어 있다는 거, 비밀로 좀 해 주세요 ㅠㅠ

난티나무 2021-03-04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 인용구 오늘 읽었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

단발머리 2021-03-15 18:20   좋아요 1 | URL
난티나무님이 제일 앞서서 달리시고 있는 듯 합니다. 저도 곧 빨강이로 돌아오겠습니다. 필승!!

청아 2021-03-0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바뀐거군여! 정희진쌤이 그런말을 하셨다니 안그래도 좋아진 책이 더더 좋아지려합니다^^♡

단발머리 2021-03-15 18:21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정희진쌤 추천이니,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극찬이니 더 좋아질 수 밖에요^^

수이 2021-03-05 06: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건 명백히 선행입니다!!!!!!!! 더구나 6년 하고도 3개월 아니 4개월인가?! 그냥 도서관에서 읽을까 했다가 다 대출중이라 아니 우리 동네에 알라디너들이 이렇게 많은겨?! 저 홀로 놀라워하며 구입했습니다. 아 근데 왜 단발머리님 동네는 당일배송인데 우리동네는 하루 뒤 배송인가요?! 옆동네인데 힝 이상하다 알라딘!!!

단발머리 2021-03-15 18:22   좋아요 0 | URL
명백한 선행인데도 아직 진도가 지지부진하다는 슬픈 소식 전해드립니다. 전 시동 걸고 있어서요. 곧 달릴 예정이오니 수연님도 운동화 준비해주시고, 스트레칭 미리 해 두심이^^

2021-03-05 0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15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1-03-05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라고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220쪽 이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하는 친구들이 모두 이 글을 보았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1-03-15 18:24   좋아요 0 | URL
서문 읽다가 넘 좋아서요. 다시 맨앞부터 읽겠다는 착한 생각을 10초간 해 보았으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직도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1-03-05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15 1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21-03-05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대명제를 아시죠?
˝선행은 악행이다.˝

진짜 프로이트의 사후결정이론이 놀랍지 않아요? 2015년의 그 220페이지는 우리가 저 대명제를 정하기 전까지는 매우 훌륭하고 선구적인 독서활동이었는데 갑자기 악행이 되고 말았어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1-03-15 18:25   좋아요 0 | URL
프로이트의 사후결정이론이 프로이트 전집 어디에 나와 있는지 좀 갈쳐주시기 바랍니다.
작금의 사태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지점이 생겨서 말이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21-03-06 1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앗, 설레어라. 저두요. 저도 몇년전에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사회주의 왼쪽날개> 읽고 싶어져서 무리해서 사놨는 데, 미루고 미루다 이제와서 읽게 될 줄은! 그런데 그걸 단발님과 함께 하게 될 줄은!! (같은 루트로!!) 정말 몰랐어요.
너무 운명적이야! 라고 생각해버리기!!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가는 방향은 결국 이쪽이었떤 것일까요? 돌아돌아 가고 있긴 한 걸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우연치 않게 같은 글을 읽고 같은 책을 사고 같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게, 운명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단발머리 2021-03-15 18:27   좋아요 0 | URL
나는 이 책을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로 읽는 사람이 제일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알아보는 이 감식안 어쩔 거라 말입니꽈!!!!
두세번을 대출하고 반납하고 다시 대출해도 못 읽던 책을 이제야 읽네요. 과거도 미래도 우리에겐 알 수 없는 일 뿐이지만, 이 책을 같이 읽는 건, 우리의 운명이 맞는 것 같아요. 운명적인 그대와, 운명적인 이 책을!!

감은빛 2021-03-06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판과 신판을 낸 출판사가 모두 저와 인연이 깊은 출판사네요. 읽지는 못 했지만, 구판을 분명 갖고는 있었는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단발머리 2021-03-15 18:28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과 인연이 깊은 출판사라 하시니 책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지네요. 구판을 다시 찾게 되시면 ‘같이‘ 읽으셔도 좋으실 것 같아요. 물론 너무 바쁘지 않으시다면 말이지요 ㅠㅠ
 


 



























자서전이나 전기 같은 경우 기본적으로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고, 두께의 압박을 이겨내려면 위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필수다. 김대중 대통령님의 자서전 같은 경우 이런 표현이 자주 나온다. 그날 밤, 내가 미국의 누구누구를 만나 간곡하게 설득했다. 이런 설득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의 이러저러한 위기를 내가 막아냈다. 그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좀 뜨악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걸 안다. 자서전이라 그럴 수도 있고, 그분의 성격이 그런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 애정하는 마음이 훨씬 더 크니까, 굵직굵직한 한국사의 장면마다 이분이 활약하셨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의 경우에는 잡스가 인정한 유일한 전기인데 천재는 기인이다라는 생각을 확인하게 하는 면이 있다. 애플의 설립과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한 다양한 도전 이야기 중에서도 병원 입원 중에 짜증을 내다 못해 의사와 싸웠던 에피소드만 기억에 남는다.

 


『수전 손택』은 어떤 전기보다 읽는 맛이 있었다. 손택이라는 매혹적인 인물이 주인공이기도 했지만, 글 자체의 매력 또한 못지않았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도 기억에 남는다. 삶과 죽음을, 특별히 자살을 개인적인 이유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분명한데도, 나는 그녀의 죽음이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적인 질병의 악화와 악화에 대한 두려움이 제일 주요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 두려움이 가장 컸을지 몰라도, 폭격으로 인해 영국에 살았던 울프가 느꼈던 공포와 유대인 남편의 안위에 대한 걱정 또한 큰 부분을 차지했음을 알게 됐다. 극단적으로 가정했을 경우, 그녀의 정신적 징후와 발병이 지속되었더라도 전쟁의 기운이 그처럼 강력하게 그녀를 사로잡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녀의 선택은 달라지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보부아르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빨리 읽고 싶기도 하고 아껴 읽고 싶기도 한, 그야말로 좋은 책의 조건을 갖춘 책이다. 딸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충분히 교육받았던 영특한 아이가, 화제의 중심에서 사람들의 선망과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며, 학문적 성취가 예상되었던 똑똑한 여성 보부아르가. 여성에 대해 고민했는가.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왜 고민하게 되었던가.



 

보부아르는 동세대에서 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수준 높은 철학 교육을 받았지만 삼십 대 후반에 여성이라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가?’라는 문제에 천착하면서부터 자기가 발견한 것들에 충격을 받았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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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3-04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대중 자서전...저희집 서가에 몇년 째 모셔만 두고 있는 저로서는 단발머리님께서 세세한 에피소드를 기억하실 정도 정독하시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네요. 그래서 두꺼웠나봅니다..소개해주신 책들 다 읽고 싶은데, 그 중에서도 버지니아 울프에 우선 찜!

단발머리 2021-03-04 20:26   좋아요 1 | URL
세세히는 아니구요 ㅎㅎㅎ 제가 김대중 대통령님 좋아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만나면 좀 다르지 않을까 싶어요. 너무 박학다식하셔서 옆사람에게 마이크 안 주는 스타일이신걸로, 전 알고 있어요.
참고로 위의 버지니아 울프 책은 무척 얇은 책이랍니다. 그게 강점이라면 강점이네요^^

얄라알라 2021-03-04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얇다하시니, 핑계댈 거리도 더 이상 없겠군요! ^^ 찜만하고 미루기 핑계 NO!^^좋은 저녁 보내시기를 단발머리님~^^

단발머리 2021-03-15 18:29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었어요 ㅠㅠㅠ 북사랑님 덕분에 전 좋은 저녁을 보냈답니다.
북사랑님도 오늘 밤 좋은 저녁 되시어요!!!

바람돌이 2021-03-05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부아르, 수전손택, 버지니아 울프
아 정말 보관함에 넣어놓고 주문할 때마다 아 나는 지금 쌓아놓은 저 두꺼운 책들을 먼저 읽어야 돼. 저 책들도 너무 두꺼워 이러면서 손가락을 부여잡고 말리고 있어요. ㅎㅎ 그래도 올해가 가기전에는 읽을 예정이랍니다. ^^

단발머리 2021-03-15 18:31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하는 언니들 3종 세트네요.
저도 올해는 울프 작품을 한 달에 한 권씩 읽으려 했는데, 2월에 못 읽었고 3월에도 이렇게 미루고만 있네요. 바람돌이님처럼 저도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봐야겠어요.
 




 












1. 니클의 소년들/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반납 인생은 반납일을 기준으로 돈다. 까치까치 설날 보내고 우리우리 설날 맞이하고 보니, 반납 기한이 이틀밖에 남지 않아 서둘러 읽었다. 이 책을 이렇게 떠나보내고 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주인공 엘우드가 용기를 내어 인종차별에 반대 시위에 나섰을 때, 증오의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혹은 모른 척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가까이 지낼 때, 그들은 다정한 사람이고 친절한 사람이고 말이 통하는 사람이고 상식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인데, 흑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단체 행동에 나설 때, 그들은 분노에 휩싸인다. 원래부터 자신의 소유였던 무엇인가를 빼앗긴다고 생각하며 억울해한다. 백인들의 분노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분노는 익숙했다. 동등하지 않다고 여겨왔던 상대가 감히 동등해지겠다고 했을 때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 대상으로만 취급되던 상대가 감히 주체가 되겠다고 말할 때 그들 속에서 일어나는 동요. 나무처럼 고정되어 있다고 여겨졌던 상대가 떠나겠다고 말할 때 그들이 경험하는 당황스러움.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장면이 분명하다.

 

반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다.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 잘 모르지만, 이러한 방식의 추적과 달리기, 그리고 반전에 난 적잖이 놀라고 감탄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굳이 선택하라고 한다면,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더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아닌 산문임에도, 기묘한 생략과 서술의 최소와 최대치를 넘나드는 멀리뛰기로 긴박함과 재미를 그대로 살려냈다는 점에서, 100점 만점에 96점 혹은 97점을 주고 싶다. 니클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마쳤다. 흐뭇하다.

 

 

















2. What I know for sure/ 타이탄의 도구들/ 페미니즘의 도전  

 

알라딘 이웃이 읽었다 하시기에 따라 읽었다. 오프라 윈프리다. 기쁨, 교감, 가능성 등의 주제에 대해 오프라 윈프리가 확신하는 것들을 동생에게 하듯, 자녀에게 하듯, 손녀에게 하듯 차분히 말하는 에세이집이다. 나는 감사가 좋았다. 절망에 빠진 윈프리가 마야 안젤루(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마야 안젤루)에게 전화했을 때, 마야의 대답. 제 상황을 잘 모르셔서 그래요, 오프라의 울먹임에 대한 마야의 대답.


 

"You‘re saying thank-you," Maya said, "because your faith is so strong that you don‘t doubt that whatever the problem, you‘ll get through it. You‘re saying thank-you because you know that even in the eye of the storm, God has put a rainbow in the clouds. You‘re saying thank-you because you know there‘s no problem created that can compare to the Creator of all things. Say thank-you!"
So I did—and still do. (79)

 


기독교에서 감사는 무척 중요한 모토다. 명시적으로는 데살로니가전서 5 18절의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구절이 있고, 구체적으로는 기독교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서구 사회에서는 감사성공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테면 『타이탄의 도구들』에서도 감사 일기혹은 감사한 일 3가지 이상을 적어보는 아침 일기를 타이탄의 도구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감사를 떠올릴 때면, 늘 정희진 선생님의 글이 생각난다. 여성주의자의 감사라니. 『페미니즘의 도전』, 2013년 개정증보판 머리말 중 일부다.

 


여성의 피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열악한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사회에 고마운 마음을 지니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이 모든 어려움을 돌파하는 데 여성주의 인식만큼 중요한 것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내 처지가 어떻든 간에, ‘지금, 여기의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양보의 결과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다. 그래도 나를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방해하지는 않는 사람들에게, 단 한사람일지도 나를 격려하는 사람에게, 그래도 변화한 성 평등의 현실 앞에, 이 체제에서도 세상과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살아가는 수많은 성실한 사람들에게, 육체적, 심리적 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지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26)

 


내 삶에 대한 책임을 나 혼자 오롯이 질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성의 없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를 외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만, 절망의 순간에 관조적인 태도와 우아한 목소리로 지금 너의 상황은 어쩔 수 없을 테니, 결국 네 인생은 어쩔 수 없어. 답이 없어라는 대답 또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나라면, 감사하는 쪽으로 간다. 감사하는 쪽으로. 힐러리 쪽으로. 정희진 쪽으로.

 



 














3. 하이 윈도 / 안녕 내 사랑

 

레이먼드 챈들러 두 번째 소설. 잘 따라가다가 잠시 길을 잃었고 그렇다고 종이 꺼내 등장인물 이름과 사건 정리할 수도 없어서, 미행하고 미행을 따돌리고 뛰고 달리는 필립 말로를 먼 발치에서 따라 다녔다. 신경증 환자를 세심하게 돌봐주는 말로에게 감동했다. 직업 윤리를 지키면서도 위험에서 벗어나고, 피해자를 도와주면서도 자신의 일을 계속해간다는 점에서 그는 유능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다음 책은안녕 내 사랑』. 말로의 말은, 사소한 말솜씨가 아니다. 그에게는 철학이 있다. 그만의 철학. 말로의 철학.

 


“ ……. 린다는 달리 쓸 데가 없더라도 단지 분풀이로 그런 일을 저지를 애예요. 당신도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지 알겠지요.”

별별 사람들이 다 있죠. 우리나 다를 바 없이.” (24)

 




 












4. 한나 아렌트와 유대인 문제

 

저자 리처드 J. 번스타인은 한나 아렌트의 사상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유대인 문제가 주요한 축을 담당한다고 전제한다. 자신이 유대인임을 의식하지 못했던 아렌트가 반유대주의에 의해 유대인으로 바뀌었다’(84)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아렌트는 유럽에 팽배한 반유대주의에 대해 유대인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이유를 이렇게 분석한다.

 


아렌트의 일관된 주장은 유대인이라는 불명예로부터 탈출하는 길은 하나뿐이고, 그것은 유대 민족 전체가 명예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아렌트에게 이 투쟁은 유대 민족이 유대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위한 정치적 투쟁을 의미했다. (87)

 


아렌트는 유대인 정치체로는 시온주의자들이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후에는 그들과 결별했지만 아주 오랜 기간 그들과 함께 일했다. 아렌트는 유대 민족이 정치적인 결사체로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대인 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95). 유대인 정치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수민족인 유대인이 스스럼없이 다른 민족들에게 동화되려 했을 때, 반유대주의에 스스로 굴종했을 때, 유대인의 정치적 권리를 위해 싸우려 하지 않았을 때, 희생양이 되었을 때, 피해자가 되었을 때, 그들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아렌트가 반유대주의의 속죄양 이론영원한 반유대주의에 반대한 이유는, 두 이론 모두 유대 민족이 그들이 속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 대응했던 특정한 역사적 방식에 대해 유대인 책임의 몫에 정직하게 대면하지 못했기(99) 때문이다. 유대인의 정치적 책임. 동족인 유대인들이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혹은 행동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고찰은, 유대인들로서는 불편한 측면이다.

 


유대인에 대한 인종주의자들의 적대감은, 신이 선택한 자, 신의 섭리에 의해 성공이 허락된 자가 정말 자기들이 아니라 유대인일지 모른다는 미신적인 견해로부터 출현했다. 초라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세계 역사의 최종 승리자로 결국 등장하게 된다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보장을 받았다는 한 민족에 대한 두려움 섞인 정신 박약적 원한이라는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전체주의의 기원』 3, 242) <118>  

 


유대인들이 인종적 이데올로기에 중심에 설 수 밖에 없던 이유는 선택받음에 대한 유대인의 확신과 그로 인한 질투와 원한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신기한 점이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질투했다는 건, 선택받았다고 빡빡 우기는 유대인들의 , 우리는 특별한 민족이라는 유대인들의 , 아닌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 말을 믿으면서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는 건데. 유럽 사람들 정말 그랬나. 조금만 더 읽어보자.

 

 


체육복, 교복 모두 찾아 놓았고, 와이셔츠 7개 다림질했고, 부침가루 없어서 감자전분 넣어서 김치 부침개 만들었다. 개학 준비 완료. 제대로 된 개학을 하루 앞둔 역사적인 이 날. 나의 리딩 리스트는 완벽하나니.

 


버지니아 울프 / 한나 아렌트 / 시몬 드 보부아르 /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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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3-01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도 김치 부침개 먹었어요. 부침가루 (모자라서) 튀김기루 섞어서 파사삭하게 (많이) 먹었어요.

수이 2021-03-01 20:36   좋아요 0 | URL
오늘의 료리는 이집저집 모두 김치전이었네요 ^^ 김치전에 남은 와인 먹고 귤 하나 까먹고나니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이 밤!

단발머리 2021-03-01 21:00   좋아요 0 | URL
전 부침가루가 적어서 튀김가루를 많이 넣을 수 밖에 없었어요. 저도 많이 먹었는데요. 오늘 김치전 데이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로 2021-03-01 22:49   좋아요 0 | URL
김치 부침개 먹고 싶어요!!! 내가 만드는 거 말고 남이 해주는 거로,,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수이 2021-03-01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 번쩍! 등대로 저도 꺼내놓았습니다!!

단발머리 2021-03-01 21:11   좋아요 0 | URL
요이~~~~~~~~~~~~~~~~~~~~~땅!!!

다락방 2021-03-01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딩 리스트가 정말이지 더할나위없이 완벽하네요!!

단발머리 2021-03-01 21:13   좋아요 0 | URL
저도 이 리스트가 맘에 들어요. 좀 지적인 분위기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