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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 기존의 호혜, 증여, 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불확실성의 인류학
오가와 사야카 지음, 지비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25년 6월
평점 :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이 제목만 놓고 보면, 쫄깃한 미스터리 소설을 연상시킨다. 굳이 이 인류학 책을 소설에 빗대자면, 주인공 카라마는 오히려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이 인류학 보고서의 중심 캐릭터인 카라마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인물이다. 특정 집단을 타겟으로 한 이런 인류학 필드워크 책은 자칫 피상적이고 딱딱한 외부자적 시선이라는 한계를 갖기 쉬운데, 저자이자 조사자인 일본인 여성 오가와 사야카는 실제 그 집단 안으로 들어가 그들의 내밀한 문화와 정서적 교감을 직접 경험한다.
이 책은 홍콩중문대학의 객원교수로 가게 된 오가와 사야카가 홍콩 중심가인 네이선로드에 위치한 '청킹맨션'에 집단 거주하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인들의 비공식적인 공유경제를 조사관찰한 보고서다. 아프리카 상인들의 교역을 연구하기 위해 동아프리카 탄자니아를 오고간 경험으로 스와힐리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저자는 중고차 매매상인 중년의 남자 카라마와 친구가 되며 그들만의 독특한 "겸사겸사" 문화를 통해 구축된 생업의 현장을 파고들게 된다.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아프리카 천연석 매매, 중국,홍콩 아시아 등지의 자동차, 건축자재, 중고 물품 매매, 등은 놀랍게도 SNS를 통해 이루어진다. 평소에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넓은 네트워크는 실제 서로의 생계를 가능하게 하는 필요의 접점을 이루고 어떤 세련된 체계나 법규가 없어도 그럭저럭 원활하게 굴러가며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특유의 문화로 자리잡는다. 때로는 온갖 수상쩍은 거래가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타고 이루어져 조사자를 어리둥절케 하지만, 일단 이 머나먼 타국에서 누군가가 힘든 일을 겪게 되면 일심단결하여 돕는 모습은 뭔가 숙연한 구석이 있다. 특히나 동족의 죽음 앞에서 그 시신을 고국 탄자니아로 수송하는 일에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발적으로 모금하고 번거로운 일을 떠맡는 모습은 일견 부럽기도 하다. 타인의 일에 얽히는 걸 극도로 기피하고 개인의 능력을 그 사람의 미덕이나 가치로 평가하는 현대 우리 사회의 풍조를 생각할 때 정작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안심', '안전'을 부르짖으며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준다는 확약 없이는 줄 수 없는' 사회적 관습을 강화하고 '빌려준 것'과 '빌린 것'을 즉시 청산하려는 태도를 낳는다. 문자메시지도 친절도 곧바로 답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 빚을 남겨두는 것이 걱정이다. 그러한 관계에서는 내가 준 것과 상대방이 준 것이 등가인지, 매 순간 빌려준 것과 빌린 것을 셈해서 딱 맞아 떨어지는지 신경 쓰인다.
-pp.259
뜨끔한다. 이건 지금 여기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같다. 심지어 친한 친구 간에도 저번에 네가 밥을 샀으니 이번에는 내가 사야 한다, 같은 부책감을 가진다. 기브 앤 테이크. 이런 호혜성은 사실 무서운 논리를 밑에 깔고 있다. 더 이상 내가 그런 역학 관계에서 역할을 할 수 없을 때 그 관계는 무너진다는 호혜 등가성이다. 이 틈새에서 이 홍콩의 동아프리카의 중구난방 연대는 다른 시사점을 준다. 돈을 벌어 고국에서의 경제적으로 힘든 삶을 개선하기 위해 머나먼 아시아로 왔기에 이들에게도 상대가 자신의 경제 활동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들에게는 사람을 고정된 정체성으로 바라보거나 평가하는 대신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유연하게 본다. 자연스럽게 타인과유동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때로 이해타산이 맞으면 서로 동시에 이익을 본다. 이 느슨하고 체계 없는 관계는 상대가 갑자기 가진 것을 잃거나 사회적 약자가 되어서도 유지된다. 아프거나 죽거나 다치면 홍콩의 탄자니아인들은 낯선 상대의 도움을 믿고 기댄다. 비록 자기가 당장 그 도움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어도 이 신뢰는 단단하다. 언젠가 자기나 자기와 연결된 이가 또 다양한 형태로 그 도움을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돌려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약자가 되어도 여전히 그런 연대의 안전망에 기댈 수 있다는 인식은 든든한 안정감이 된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 그것도 언어도 피부 색깔도 문화도 다른 곳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이방인의 삶에서 그런 안정감을 가지고 생활한다는 것의 의미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런 연대의 네트워크는 ICT, 인공지능 기반으로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는 미래지향적 공유경제에도 하나의 대안적 모델이 되어줄 수 있다. 저자는 이 점을 강조한다. 즉 언제나 공통의 이해 관계를 기반으로 온라인으로 연결된다. 이 연결은 고리타분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아 언제든 끊어질 수 있다. 이 부담없음이 연결을 더 활성화한다.
엄청난 명분이나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이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은 얼마나 개인을 고독하고 불행하게 만드는가.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강박은 구조적 불행을 때로 개인의 것으로 치환하여 한 사람의 생을 짓밟는다. 우리는 실패하면 때로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를 죽인다. 내가 사회에 계량적인 숫자로 환원 가능한 기여를 할 수 없는 삶은 때로 가차없이 단죄당한다.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이 때로 민폐로 여겨지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존재 자체만으로 도움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나날이 희박해져 가는 차가운 사회에서 우리는 일상을 전투처럼 산다.
카라마는 자신을 주인공을 하여 홍콩의 탄자니아인들의 초상화를 그려 낸 이 책의 출판을 알고 있다고 한다. 저자가 이에 대한 양해를 구하자 그는 웃는다.
"괜찮아. 사야카가 나를 정말 좋아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이런 인류학 보고서가 어떻게 감동을 주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