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십여 년이 흘러가버린 과거에 살던 집 근처에는 사면이 유리로 된 예쁜 도서관이 있었다. 주택가에 숨어 있는 그 도서관은 작은 숲과 연결되어 있었다. 가장 잘 보이는 서가에는 압도적으로 많은 신간이 좌르륵 꽂혀 있었고 놀랍게도 그 신간들은  언제든 원하면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백수린, 김금희, 손보미 작가를 만났다. 황홀한 시간들이었다. 내가 한동안 멀리 했던 소설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그때 한창 작품 활동을 했던 이 작가들 덕택이다. 이야기에 흠뻑 빠져 사는 일의 고단함을 잠시 잊을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 백수린 작가는 나에게 특별하다. 그녀는 나의 어떤 한 시절을 상징한다. 아직 젊었고 아직 셀카 찍기를 좋아했던 그때를 연상 시킨다. 그녀의 책들을 빌리러 가던, 어느 봄날 나는 사진 속에서 행복하다. 그 사진을 보면 그때가 떠오른다. 곧 숲속 유리 도서관에서 빛나는 유니버스로 들어가는 기대로 충만하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





작가도 세월과 함께 나이 들어 간다. 생애의 주기마다 쓸 수 있는 글이 다르다. 삼십대였던 작가와 사십대 작가가 바라보고 만드는 이야기는 미세하게 결이 달라진다. 그런데 그 변화가 작가가 삶을 사는 태도, 자세, 이야기를 만드는 힘에 의해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백수린 작가만이 할 수 있는 그 여전한 방식으로 이제는 상실을 품은 사람과 사람 간의 그 애틋한 스침에 대하여 이렇게 결이 고운, 그러나 과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여전히 읽는 사람의 눈물을 핑 돌게 한다. 



홀로 살던 할머니에게 어느 날 원하지 않던 '그것'이 오고 마침내 '그것'이 떠나간 자리에 남는 건 무엇일까? 수필 쓰기 수업을 듣지만, 과제를 제출할 수 없었던 할머니가 마침내 자기만의 글을 쓰게 된 그 계기는 그 사랑스러운 작은 솜털 뭉치가 남기고 간 따뜻한 온기 덕택일 것이다. 이렇게 나이 들어도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그 돌연한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인 <아주 환한 날들>은 발표되었을 때 이미 읽어 두 번째인데도 여전히 마지막 문장에서 먹먹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주 환한 날들> 백수린



<봄밤의 우리>에는 주인공이 유학 시절 만난 무해한 남자 사람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인 유학생은 집안의 가업을 잇기를 포기한 채 뒤늦게 무작정 프랑스로 날아 와 팍팍한 유학 생활을 하며 주인공의 한 시절을 함께 한다. 이 기묘한 우정은 언제나 그렇듯 미묘하게 어긋나고 주인공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눴던 노견의 마지막을 함께 하며 그와 다시 연락이 닿는다. 마침 늙은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었던 그와 주인공은 이렇게 상실의 한 시절을 공유하게 된다. 이것은 섣부른 상실의 교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날 사랑했던 그 무엇을 잃고 난 다음 내가 경험하게 되는 그 개별적 상실의 무게를 상대의 그것과 등가 교환하려는 마음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가. 바로 그 차이를 예민하게 인식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남는 이야기들은 어떤 것일지, 그 둘의 재회는 결국 또 어떻게 어긋나게 되는지. 


<눈이 내리네>의 다혜가 대학 시절 잠깐 함께 살았던 이모 할머니와의 이야기는 내가 잊었던 그 이십 대의 불안하면서도 흔들리는 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봤던 세상이 얼마나 몽환적이고 드라마틱하고 진실과 멀어져 있었는지는 세월과 함께 잊어버렸지만, 작가를 통과한 다혜의 그 시절은 그것들을 복원하고 복기하며 거기에서 얼마나 지금 우리가 멀어져 왔는지 그 거리가 가지는 것이 비단 상실만이 아니라 어떤 삶에 대한 이해를 가져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때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때만의 슬픔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때가 지금에 남긴 지금만의 의미가 있다. 빛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는 백수린 작가가 환기하는 여전한 것들이 일깨우는 그 시간을 통과하는 것은 황홀한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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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3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3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흔히들 나이가 들면 현실적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 치일수록 더 내 앞의 이 물리적 현실이 허깨비 같은 허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 순간 '나'라는 자아를 가진 의식이 출현하여 '너'를 만나 때로 '우리'가 됐다 어긋나 헤어지거나 죽음으로 이별한다. 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과정인가. 한때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시간과 함께 스러져버리는 일이. 화성 탐사가 가능하고 손바닥 만한 전자기기에 세상 전부를 담을 수 있는 순간에도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이 존재의 부조리 앞에서 사람들은 더 큰 절망을 느낀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폴란드의 전설적인 SF 작가다. 폴란드 최초의 위성은 그의 이름을 본따 만들어졌고 심지어 그의 이름과 작품명으로 명명한 소행성들도 있을 정도다. 몇 차례 영화화된 <솔라리스>의 원작자의 상상력은 이미 그가 2006년에 고인이 됐음에도 여전히 오늘날의 기술 발달과 그것과 충돌하는 인간들의 내적 갈등에 놀라울 정도로 현재적이다. 그가 작품으로 형상화한 미래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현재적이다. 우주 탐사, 컴퓨터, 인공지능의 발달은 마치 스타니스와프 렘의 명령어를 따르기라도 한듯 그의 이야기와 닮았다. SF가 허무맹랑한 우주 탐사나 이물감이 드는 로봇, AI에 대한 피상적 스토리에 불과하다 생각된다면, 이 작가의 작품은 그 편견을 일거에 깨부수는 개미지옥이 될 거라 장담한다. 그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도 잠시 내려놓고 스타니스와프 렘이 만든 세계의 낮은 허들만 뛰어넘는다면, 작가가 창조한 생생한 유니버스 안에서 내 내면 안 해소되지 않았던 각종 기억, 감정, 고민들이 언어화되어 눈앞에 나타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솔라리스>는 '솔라리스' 행성 정거장에 탐사를 간 심리학자가 십 년 전에 자살한 연인과 조우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한 문장으로 이 SF의 고전을 요약하기는 역부족이다. 솔라리스 행성에는 끊임없이 정형과 비정형의 온갖 형태를 만들어내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유동하는 거대한 바다가 있다. 이 바다와 접촉하기 위한 시도는 결국 주인공이 내면의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던 온갖 무의식, 기억의 심연과 대면하는 일로 이어진다. 연인과의 재회는 내 기억 속 환상의 순환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되는 과정의 일환이다. 이 우주 정거장에서 돌아다니는 인간의 외피를 입은 형상들은 실재하지 않는 내 환영일지도 모른다. 우주 탐사를 떠난 인간은 결국 내면 탐사의 지점으로 돌아온다. 우리 자신도 제대로 모르면서 지구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인간의 자신감은 얼마나 오만한가. 결국 주인공이 마지막에 이르러 불완전한 실패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실패하고 또 실패하는 신과 인간이 가지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의 마침표.


<우주 순양함 무적호>는 분량이나 재미로 볼 때 스타니스와프 렘의 입문서로 괜찮을 것 같다. 역시 미지의 행성 레기스 3에 착륙한 무적호 승무원들이 실종된 우주선 콘도르호를 찾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험 이야기다. <솔라리스>의 바다의 역할을 떠맡은 미지의 형성물은 무생물의 진화로 확장된다. 이것은 인간의 문명에 대한 일종의 아이러니다. 우리는 흔히 생물, 그 중에서도 인간만이 문명을 만들고 진보한다,는 인간 중심설을 기본 대전제로 간주하지만, 죽음의 한계 바깥에서 건재하는 것은 물질이고 인간이 만들어 낸 로봇과 물질들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 빚어질 비극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주인공이 마지막 구조자의 임무를 떠안고 마침내 대면하고 마는 그 엄청난 비극의 형상은 거대한 아포칼립스에 실제 고립된 막막함을 추체험하게 한다. 


결국 나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는 내 내면의 투영이다. 나는 사방에서 내가 비친 거울을 본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이 거울을 우주 반사경으로 보여주는 스토리 텔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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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3-12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라리스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SF 라서 저는 딱히 관심을 두진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이 페이퍼 읽으면서 알게된 솔라리스의 줄거리는, 간단하게 요약하셨다하지만, 너무나 흥미롭습니다. 저도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명성이 자자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요.

다락방 2025-03-12 10:58   좋아요 1 | URL
지금 땡투 누르고 사려다가 혹시 몰라 검색해봤더니 제가 2022년에 이 책을 샀다고 되어있네요 ㅠㅠ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잠자냥 2025-03-12 13:1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lanca 2025-03-12 16: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다락방님, 충분히 그러실 수 있어요. 워낙 유명한 책이잖아요.
 

"내 안에는 내가 너무나 많아~"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의 가사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수많은 이명에 가장 직관적인 설명이 될 것 같다. 그는 "다양한 이름으로, 다양한 종류의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고 그 이명들을 마치 나름 실재하는 사람들처럼 캐릭터로 만들고 가상의 삶을 발명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이 그의 내면에만 존재하는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 삶을 살아가는 인격체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에 가장 잘 알려진 <불안의 서>도 페소아의 이름이 아닌 그의 이명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로 발표했다. 그는 그들을 페소아의 필명이 아니라 일종의 "고안된 인간들"이라고 얘기한다. 페소아를 읽는 일은 이런 이명의 캐릭터를 기꺼이 실존하는 인물로 받아들이는 과정과 다름 아니며, 우리 내면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경이로운 체험이기도 하다. 그의 기행은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의 한 표현이다. 

















이 책은 페소아가 문학과 예술에 관련하여 쓴  에세이들 선집이다. 어떤 에세이는 채 반 장이 되지 않는 분량이다. 인간의 고정관념, 편견, 우리가 진짜라고 믿었던 것들의 허점과 빈약함을 가차없이 해체하고 전복하는 그의 글은 문장 하나하나가 시를 닮았다.  그 자신이 "이 지구의 시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고 장담한다. 그의 시는 가볍거나 호화롭지 않다. 간소하고 직설적이고 때로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일종의 반어법인가 싶어 보면 페소아는 분명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제대로 이야기했다. 


<삶의 법칙>

자신감은 최소한으로 가져라. 아예 갖지 않는 편이 낫지만, 가진다면 가짜 자신감이나 흐릿한 자신감을 가져라.


오늘날 자기계발서나 라이프코치들한테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야기다. 자신감을 아예 갖지 않는 편이 낫다니, 이 얼마나 전복적인 이야기인가?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가 삶에 대해서 무엇보다 내가 굳게 믿고 있는 내 자신이라는 허구적 개념이 얼마나 빈약하고 가짜인지를 깨닫는 순간, 해방이 오며 더 감각과 순간에 충실한 지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밤과 혼돈, 꿈과 오류가 더 진짜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의 대립항에 페소하의 철학과 시와 글이 있다. 

















산문도 모조리 시로 만들어버리는 화력을 가진 페소아의 진짜 시가 읽고 싶었다. 그의 시는 쉽고 길고 잘 읽히고 신비롭고 아름답다. 이 모든 수사를 다 갖다 붙여도 페소아의 시를 제대로 설명한 것 같지 않은 미진함이 드는 건 이 시들에 이 시집의 제목처럼 페소아의 존재 방식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소한 단어 하나에도 우주적 성찰의 무게가 담겨 있다. 삶이나 예술에 대한 큰 기대가 없지만, 그렇다고 그걸 함부로 포기하지도 않는 그 태도는 자칫 냉소와 오만으로 얼룩지기 쉬운 개인의 철학을 보편적인 신비로 승화시킨다. 아마도 이런 문장들.


그리고 죽을 때가 되면, 하루도 죽는다는 걸, 기억하는 것,

노을이 아름답고, 남는 밤도 아름답다는 걸......

그런 거라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는 걸.

-양 떼를 지키는 사람/알베르 카에이루


물론 이런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를 쓴 시인 알베르 카에이루는 페소아의 필명이 아닌, 페소아가 만든 또 다른 하나의 엄연한 인간이다. 시골에 살며 정식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아름다운 금발의 청년이라는 페소아의 설명. 이 인격도 페소아의 자아에 있는 혹은 그 자아에 의해 페소아가 함께 한다고 느끼는 또 다른 페소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페소아는 이런 목가적인 풍경과 정서의 시는 그 시를 쓴 사람 자체의 삶도 그래야 한다고 믿은 듯, 시인 자체를 고안해 낸다. 그는 목소리를 빌려오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 목소리를 만든다. 그 목소리는 무에서 그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품고 있던 수많은 자아들 중 하나의 발명이기도 하다. 


수많은 이명을 거느리고 나타나 이런 시를 쓴 페소아가 백 년도 훌쩍 지나 오늘 내가 누리는 하루를 가능케 한 것. 페소아는 자신의 시를 읽는 이들에게 모자를 들어 인사한다. "위대한 무심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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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25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많은 이명의 인간들을 자신 안에 품고 산 페소아는 대단한 정신력이듯요. 저는 나 하나의 영혼도 감당하기 힘든데 말이죠. 그러다가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창조하고 그 삶을 표현한다는게 본연의 페소아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기도 하더라구요.

blanca 2025-02-26 09:55   좋아요 1 | URL
그 이명마다 캐릭터와 서사를 부여한 것도 대단한 것 같아요.

다락방 2025-02-26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이 글이 한 편의 시 같네요!

blanca 2025-02-26 15:39   좋아요 0 | URL
ㅋㅋ 페소아 책 자체가 시거든요. 어떻게 에세이 문장 하나하나가 시어 같은지.. 페소아 열풍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포르투칼 너무 가보고 싶어요.
 

체호프는 생전에 600여편의 단편을 썼다. 그의 희곡이 현대 연극 무대에서도 여전히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는 만큼 그의 단편집 또한 잊을만 하면 나오는데 출판사가 다르다 보니 겹치는 작품이 많다. 체계적 선집 형태로 정리가 좀 됐으면 하는 개인적 소망이 있다. 


















가장 단편을 잘 쓰는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체호프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의 이야기들은 서정적인데 가볍지 않고 무겁지 않으면서도 울림이 크다. 여성의 시점에서 쓴 이야기들도 어느 하나 남성 작가의 시선에서 노출되는 괴리가 없다. 상류층 귀족의 이야기도 노동자의 이야기도 소년의 이야기도 노인의 이야기도 어느 하나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감정의 파도를 일으킨다. 단편에 회의가 든다면, 체호프에서 시작하고 체호프로 돌아가기를 추천한다. 아니, 소설 자체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면 체호프를 수혈하기를 권한다. 톨스토이가 체호프의 작품에 감동한 나머지 자기 손님들에게 체호프를 읽어봤냐고 일일이 확인하고 손수 낭독해 주기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자크 랑시에르의 <체호프에 관하여>는 왜 하필 체호프냐는 질문에 가장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답변이 될 것 같다. 여기에는 아직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체호프의 작품들을 일례로 들어 체호프의 미덕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작품들을 알지 못해도 자크 랑시에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독자에게 바로 전달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저자가 체호프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메시지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통념에 예속된 현대인들이 지향하는 자유와의 거리가 그것이다. 체호프는 바로 그 간극을 겨냥한다. 우리가 체호프를 읽고 감동 받는 지점에는 바로 그러한 것이 있다. 나도 모르게 놓치고 있던 내가 지향했던 별과 지금 내가 여기 발을 딛고 선 땅과의 그 거리. 그 거리를 확인한 순간 우리는 아득해진다. 잊고 살았던 그것이 진짜였음을 확인하는 순간 대안적 삶에 대한 가능성이 떠오른다. 꼭 그 삶으로 점프하지 않아도 단지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달라질 수 있다. 왜냐면 그런 삶을 꿈꿨던 나를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작가의 임무는 자유와 인간 사이를 가르는 거리에 대해 거짓 없이, 그리고 자유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자유의 지평 아래 인간을 안내하는 것이다. 작가의 임무는 먼 곳에 있는 자유의 파열을 예속의 시대 속에 새겨넣는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 <체호프에 관하여>


"시작도 끝도 없이" 출발하여 마침내 끝내는 체호프의 이야기가 비겁하지 않은 이유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나오는 길목에서 뭔가 저릿하면서도 아득한 멀미를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잊어버렸던 그 자유에 대한 사랑을 그가 기억해 내도록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 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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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2-06 0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호프는 단막극의 반전이 끝내주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ㅎ 유럽지성사를 배우던 옛날에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blanca 2025-02-10 16:29   좋아요 1 | URL
기회가 되면 연극도 꼭 한번 보고 싶어요.

페크pek0501 2025-02-11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호프 단편집이 저도 두 권 있는데 겹치는 게 몇 편 있더라고요. 좋은 단편을 많이 쓴 작가죠.

blanca 2025-02-11 16:39   좋아요 1 | URL
체호프 단편집 꼭 겹치는 단편 몇 편이 있어요. 그 정도로 좋다는 이야기도 되겠지만, 책을 사는 입장에서는 아쉽더라고요.

그레이스 2025-02-11 16: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랑시에르 책 저도 사놨는데, 얼른 읽어야겠어요 ^^

blanca 2025-02-12 09:37   좋아요 1 | URL
얇은 게 유일한 단점인 책이더라고요. 문장 하나하나도 참 아름다워요. 저는 랑시에르를 처음 읽는데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요.
 

작품은 좋지만 작가 개인으로는 도저히 호감을 가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작품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작가를 만나보고 싶은 경우도 있고. 작품도 좋고 작가 개인으로도 매력적인 경우가 내겐 체호프다.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인 걸 알지만 중간중간 틈입하여 교조주의적 연설을 시작할 때는 좀 숨 막힌다. 반면 체호프는 유연하고 너그러운 위트가 있으면서도 심오하다. 내 말이 맞다고 애써 강변하지 않는다. 내 이야기가 최고라 도취되지도 않는다. 어떤 머뭇거림의 왈츠 속에 그 특유의 예리한 직관이 빛난다. 재미있게도 톨스토이와 체호프는 서로 합이 맞았다. 이 사랑이 세간의 일부에서 떠드는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관계였다고나 할까?(확신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교감의 흔적이 작품 곳곳에 숨어 있다. 톨스토이는 체호프의 <귀염둥이>를 정말 좋아해서 방문객들에게 그 이야기를 읽었는지 재차 확인하고 몸소 여러 번 낭독해주기도 했다. (박현섭 해설 참고) 체호프의 이야기를 마치 자기 아들의 작품처럼 자랑스러워했다.


















한편 체호프의 <약혼녀>에는 흥미롭게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모르겠구나, 얘야.. 나는 밤에 잠이 안 오면 눈을 이렇게 꼭 감고서, 안나 카레니나가 걸어다니며 말하는 모습이라든지, 아니면 역사적인 장면 같은 걸 떠올린단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자신의 작품 속에서 굳이 언급해 주는 센스는 톨스토이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걸까.


<상자 속의 사나이>에 실린 체호프의 모든 작품이 골고루 좋았지만, 특히나 <로트실트의 바이올린>은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의 감동이 있었다. "죽는 사람이 좀처럼 없어서 짜증이 날 정도"의 시골마을서 관 짜는 일을 하는 괴팍한 야코프의 개과천선은 죽음 직전에 온다. 그는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고 잇속을 차리는 탐욕스럽고 괴팍한 노인이다. 그런 남편에게 평생을 헌신한 아내가 결국 죽어가며 한참 전의 과거의 아픈 상실을 떠올리는 장면은 그를 회심하게 한다. 부업으로 했던 바이올린 연주 악단에서 야코프가 구박하고 무시하던 유대인 청년에게 그가 아끼던 바이올린을 물려주는 장면은 우리가 삶을 사느라 놓쳐버린 정작 소중한 것들의 회한에 대해 경고하는 듯하다. 가뭇없이 빠져나간 세월들 사이로 산다고 주장하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시선을 줘야 할 것들을 놓치다 보면 어느새 죽음은 눈앞에 와 있을 것이다.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급작스런 죽음을 맞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장면이 비극적이라기보다는 뭔가 환기하는 바가 큰 종결어미처럼 보인다. 괴로워하거나 후회하거나 허무해하거나 하는 감정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아직은, 깨달을 시간이 있다는 일종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구스베리>에서 늙은 이반이 연못에서 비를 맞으며 수영을 하는 장면의 묘사 같은 것. 심지어 젊은 동행인이 말릴 정도로 만끽하는 생의 막간의 휴식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도 지극히 체호프적인 것이다. 체호프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 어느 한쪽의 극단이 없다. 그리고 그게 참 좋다.


구스베리는 딱딱하고 시었지만, 푸시킨이 이런 말을 했죠. '우리를 북돋워주는 기만은 진실의 어둠보다 소중하다'라고요. 

-체호프 <구스베리>


모든 화려한 것, 세속적인 세상사에서 물러나 마침내 자신이 바라던 전원의 드넓은 영지를 소유하게 된 이반의 동생은 그 이후로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 이반에게 그 행복의 뒤안길에서 놓친 타인들의 희생과 비참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기만의 행복에 순간 취할 수 있지만 삶은 그러도록 우리를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파한 그는 그러나 그 자신이 알몸으로 연못에서 생이 주는 그 환희를 즐길 줄도 아는 사람이다. 톨스토이라면 이 지점에서 이반의 연설로 마침표를 맺었을 것이지만. 체호프는 그러는 대신 그 자신이 모순의 결정체인 인간적인 약점을 노출한다. 


톨스토이는 이런 체호프의 글을 좋아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톨스토이의 죽음을 두려워했던 체호프는 톨스토이보다 먼저 떠난다. 마치 그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반전처럼. 그 죽음조차도 그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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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2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네요, 블랑카 님. 저도 이 책 읽어볼래요. 소중한 소개입니다.

blanca 2024-11-20 13:49   좋아요 1 | URL
체호프가 좋아요. 평전도 읽어보고 싶은데 번역이 안되어 있더라고요. 개인적 삶도 너무 드라마틱하더라고요.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 여배우를 사십대에 만나 결혼까지 하고 얼마 안돼 죽어버리는...제일 웃긴 대목은 톨스토이 아내가 그렇게 체호프와 톨스토이 사이를 질투했다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