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정수윤 옮김 / 북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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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은 없는 단 한 번의 그때, 단 번의 유일한 사랑이 가능했던 소년 시절의 복원은 역시나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답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호한 경계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시절의 진혼곡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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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는 내가 너무나 많아~"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의 가사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수많은 이명에 가장 직관적인 설명이 될 것 같다. 그는 "다양한 이름으로, 다양한 종류의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고 그 이명들을 마치 나름 실재하는 사람들처럼 캐릭터로 만들고 가상의 삶을 발명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이 그의 내면에만 존재하는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 삶을 살아가는 인격체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에 가장 잘 알려진 <불안의 서>도 페소아의 이름이 아닌 그의 이명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로 발표했다. 그는 그들을 페소아의 필명이 아니라 일종의 "고안된 인간들"이라고 얘기한다. 페소아를 읽는 일은 이런 이명의 캐릭터를 기꺼이 실존하는 인물로 받아들이는 과정과 다름 아니며, 우리 내면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경이로운 체험이기도 하다. 그의 기행은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의 한 표현이다. 

















이 책은 페소아가 문학과 예술에 관련하여 쓴  에세이들 선집이다. 어떤 에세이는 채 반 장이 되지 않는 분량이다. 인간의 고정관념, 편견, 우리가 진짜라고 믿었던 것들의 허점과 빈약함을 가차없이 해체하고 전복하는 그의 글은 문장 하나하나가 시를 닮았다.  그 자신이 "이 지구의 시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고 장담한다. 그의 시는 가볍거나 호화롭지 않다. 간소하고 직설적이고 때로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일종의 반어법인가 싶어 보면 페소아는 분명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제대로 이야기했다. 


<삶의 법칙>

자신감은 최소한으로 가져라. 아예 갖지 않는 편이 낫지만, 가진다면 가짜 자신감이나 흐릿한 자신감을 가져라.


오늘날 자기계발서나 라이프코치들한테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야기다. 자신감을 아예 갖지 않는 편이 낫다니, 이 얼마나 전복적인 이야기인가?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가 삶에 대해서 무엇보다 내가 굳게 믿고 있는 내 자신이라는 허구적 개념이 얼마나 빈약하고 가짜인지를 깨닫는 순간, 해방이 오며 더 감각과 순간에 충실한 지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밤과 혼돈, 꿈과 오류가 더 진짜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의 대립항에 페소하의 철학과 시와 글이 있다. 

















산문도 모조리 시로 만들어버리는 화력을 가진 페소아의 진짜 시가 읽고 싶었다. 그의 시는 쉽고 길고 잘 읽히고 신비롭고 아름답다. 이 모든 수사를 다 갖다 붙여도 페소아의 시를 제대로 설명한 것 같지 않은 미진함이 드는 건 이 시들에 이 시집의 제목처럼 페소아의 존재 방식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소한 단어 하나에도 우주적 성찰의 무게가 담겨 있다. 삶이나 예술에 대한 큰 기대가 없지만, 그렇다고 그걸 함부로 포기하지도 않는 그 태도는 자칫 냉소와 오만으로 얼룩지기 쉬운 개인의 철학을 보편적인 신비로 승화시킨다. 아마도 이런 문장들.


그리고 죽을 때가 되면, 하루도 죽는다는 걸, 기억하는 것,

노을이 아름답고, 남는 밤도 아름답다는 걸......

그런 거라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는 걸.

-양 떼를 지키는 사람/알베르 카에이루


물론 이런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를 쓴 시인 알베르 카에이루는 페소아의 필명이 아닌, 페소아가 만든 또 다른 하나의 엄연한 인간이다. 시골에 살며 정식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아름다운 금발의 청년이라는 페소아의 설명. 이 인격도 페소아의 자아에 있는 혹은 그 자아에 의해 페소아가 함께 한다고 느끼는 또 다른 페소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페소아는 이런 목가적인 풍경과 정서의 시는 그 시를 쓴 사람 자체의 삶도 그래야 한다고 믿은 듯, 시인 자체를 고안해 낸다. 그는 목소리를 빌려오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 목소리를 만든다. 그 목소리는 무에서 그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품고 있던 수많은 자아들 중 하나의 발명이기도 하다. 


수많은 이명을 거느리고 나타나 이런 시를 쓴 페소아가 백 년도 훌쩍 지나 오늘 내가 누리는 하루를 가능케 한 것. 페소아는 자신의 시를 읽는 이들에게 모자를 들어 인사한다. "위대한 무심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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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25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많은 이명의 인간들을 자신 안에 품고 산 페소아는 대단한 정신력이듯요. 저는 나 하나의 영혼도 감당하기 힘든데 말이죠. 그러다가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창조하고 그 삶을 표현한다는게 본연의 페소아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기도 하더라구요.

blanca 2025-02-26 09:55   좋아요 1 | URL
그 이명마다 캐릭터와 서사를 부여한 것도 대단한 것 같아요.

다락방 2025-02-26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이 글이 한 편의 시 같네요!

blanca 2025-02-26 15:39   좋아요 0 | URL
ㅋㅋ 페소아 책 자체가 시거든요. 어떻게 에세이 문장 하나하나가 시어 같은지.. 페소아 열풍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포르투칼 너무 가보고 싶어요.
 

체호프는 생전에 600여편의 단편을 썼다. 그의 희곡이 현대 연극 무대에서도 여전히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는 만큼 그의 단편집 또한 잊을만 하면 나오는데 출판사가 다르다 보니 겹치는 작품이 많다. 체계적 선집 형태로 정리가 좀 됐으면 하는 개인적 소망이 있다. 


















가장 단편을 잘 쓰는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체호프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의 이야기들은 서정적인데 가볍지 않고 무겁지 않으면서도 울림이 크다. 여성의 시점에서 쓴 이야기들도 어느 하나 남성 작가의 시선에서 노출되는 괴리가 없다. 상류층 귀족의 이야기도 노동자의 이야기도 소년의 이야기도 노인의 이야기도 어느 하나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감정의 파도를 일으킨다. 단편에 회의가 든다면, 체호프에서 시작하고 체호프로 돌아가기를 추천한다. 아니, 소설 자체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면 체호프를 수혈하기를 권한다. 톨스토이가 체호프의 작품에 감동한 나머지 자기 손님들에게 체호프를 읽어봤냐고 일일이 확인하고 손수 낭독해 주기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자크 랑시에르의 <체호프에 관하여>는 왜 하필 체호프냐는 질문에 가장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답변이 될 것 같다. 여기에는 아직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체호프의 작품들을 일례로 들어 체호프의 미덕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작품들을 알지 못해도 자크 랑시에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독자에게 바로 전달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저자가 체호프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메시지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통념에 예속된 현대인들이 지향하는 자유와의 거리가 그것이다. 체호프는 바로 그 간극을 겨냥한다. 우리가 체호프를 읽고 감동 받는 지점에는 바로 그러한 것이 있다. 나도 모르게 놓치고 있던 내가 지향했던 별과 지금 내가 여기 발을 딛고 선 땅과의 그 거리. 그 거리를 확인한 순간 우리는 아득해진다. 잊고 살았던 그것이 진짜였음을 확인하는 순간 대안적 삶에 대한 가능성이 떠오른다. 꼭 그 삶으로 점프하지 않아도 단지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달라질 수 있다. 왜냐면 그런 삶을 꿈꿨던 나를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작가의 임무는 자유와 인간 사이를 가르는 거리에 대해 거짓 없이, 그리고 자유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자유의 지평 아래 인간을 안내하는 것이다. 작가의 임무는 먼 곳에 있는 자유의 파열을 예속의 시대 속에 새겨넣는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 <체호프에 관하여>


"시작도 끝도 없이" 출발하여 마침내 끝내는 체호프의 이야기가 비겁하지 않은 이유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나오는 길목에서 뭔가 저릿하면서도 아득한 멀미를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잊어버렸던 그 자유에 대한 사랑을 그가 기억해 내도록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 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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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2-06 0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호프는 단막극의 반전이 끝내주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ㅎ 유럽지성사를 배우던 옛날에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blanca 2025-02-10 16:29   좋아요 1 | URL
기회가 되면 연극도 꼭 한번 보고 싶어요.

페크pek0501 2025-02-11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호프 단편집이 저도 두 권 있는데 겹치는 게 몇 편 있더라고요. 좋은 단편을 많이 쓴 작가죠.

blanca 2025-02-11 16:39   좋아요 1 | URL
체호프 단편집 꼭 겹치는 단편 몇 편이 있어요. 그 정도로 좋다는 이야기도 되겠지만, 책을 사는 입장에서는 아쉽더라고요.

그레이스 2025-02-11 16: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랑시에르 책 저도 사놨는데, 얼른 읽어야겠어요 ^^

blanca 2025-02-12 09:37   좋아요 1 | URL
얇은 게 유일한 단점인 책이더라고요. 문장 하나하나도 참 아름다워요. 저는 랑시에르를 처음 읽는데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요.
 
새벽의 사원 풍요의 바다 3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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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 연작 시리즈 중 3권에 해당하는 <새벽의 사원>에서 주인공 혼다는 마흔일곱에서 쉰여덟이 된다. 1권이었던 <봄눈>에서 친구 기요아키의 죽음과 2권 <달리는 말>에서 소년 이사오로의 환생과 죽음을 목도한 그는 이제 그의 두 번째 환생을 둘러싼 대승불교의 윤회환생설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게 된다. <봄눈>에서 일본에 왔던 시암의 왕자 차오 피가 약혼녀에게 선물하려 했던 잃어버린 반지를 매개로 혼다의 여정은 소송 건으로 방문한 태국으로 이어진다. 그곳에서 만난 공주 잉 찬이 성장하여 일본을 방문함으로써 둘의 재회는 혼다의 묘한 관음증적 욕망으로까지 치닫는다. 


전반부에 중년의 혼다가 인도의 바라나시 화장터에서 목도한 죽음의 풍경과 후반부의 노년의 혼다가 품게 된 어린 공주에 대한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대비는 이 둘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는 그 생래적 모순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피처럼 떨어지는 시간"이 결국 인도하는 죽음이라는 귀결점을 품은 생을 사는 인간이 역사에 궁극의 미에 예술에 행사하려는 의지는 모두 무용하다. 그 너머로 가닿으려는 그 처절할 정도로 미약한 시도는 결국 죽음으로써만 가능함을 암시하는 이야기는 불가능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이생이 가지는 궁극의 의미는 갱신되는 순간의 전념에 있으며 이 반복이 결국 환생 그 자체임을 일깨우는 것이 아닐까. 미시마 유키오가 이 작품에서 천착한 대승불교의 유식과 환생에 대한 이야기도 결국 끊임없이 갱신되는 현생의 이 순간의 현전에 대한 궁극의 인식으로 귀결된다.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은 깊고 예술적 승화의 체로 걸러져 더없이 농밀하다. 노화, 죽음에 대한 치열한 탐구도 깊이가 남다르다. 분명 미시마 유키오만 할 수 있고 쓸 수 있는 독특한 미학적 세계가 있고 이건 그 어떤 다른 이도 모방할 수 없다. 다만, 당연히 한국 독자로 역사적 특수성을 감안한다 해도 전후 폐허가 된 일본에 대한 감정적 묘사라든가, 혼다의 관음증의 대상이 된 여성을 그리는 대목은 불편하고 거슬린다. 미시마 유키오를 읽는 일은 그런 모순과 긴장까지 안고 가야 하는 과정이다. 


이제 분명한 점은 혼다의 욕망이 바라는 궁극적인 것, 그가 정말로,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은 그가 없는 세계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을 보려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pp.403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이 궁극의 실재를 지향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그의 생과의 낙차에 대한 정교한 탐방기다. 그것을 포기하고 죽음이라고 명명해 버릴 때 읽는 이들이 느낄 허탈함은 미시마 유키오의 한계이기도 하고 강점이기도 하다. 윤회를 얘기함으로써 다음 생에 대한 희망을 얘기하는 대신 이 순간의 허무를 아름답게 세공해 버리는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은 결국 끝나버릴 생과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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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5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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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이쉬킨 공작의 이야기에는 실제 이십 대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 직전 감형 받은 체험이 녹아 있다. 고작 이십대 후반의 청년 앞에 당도한 확실한 죽음의 인식. 그것은 그의 전생애를 바꾼다. 내 눈 앞에 백퍼센트가 되어 도착한 나의 종결 앞에서 비대해지는 삶의 무게와 가치에 대한 각성이 이 천진하고 진실한 백치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그에게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이었습니다. ‘만일 죽지 않는다면 어떨까! 만일 삶을 되찾을 수 있다면 어떨까 -그야말로 무한이리라! 그리고 그건 고스란히 내 것이 될 테지! 그렇게만 되면 나는 일분일초를 한 세기로 만들어 그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일분일초까지 정확히 계산해서 그 무엇도 헛되이 써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 생각은 마침내 증오감으로까지 변해서, 차라리 한순간이라도빨리 총살시켜줬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는 겁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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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1-09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걸 옛날에 읽은 것 같은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네요. 지금부터 열심히 고전을 읽어도 2-3번은 읽어야하니 갈 길이 멉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