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묘한 책이다. 에세이집인데 우연의 빈도나 의미로의 집약도가 너무 높다. 마치 단편소설처럼. 이를테면 어머니의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의 우연한 조우, 아버지의 죽은 전처의 오빠집에 가서 며칠 묵는 유년기의 이야기, 어린 시절 바쁜 부모 대신 자신을 돌봐준 고모의 목조 연립주택에서 독거 노인의 사체를 발견한 일과 우연찮게 어느 한 남자의 자살 과정에 개입하게 되는 이야기 등. 하나하나가 다 극적이고 밀도가 높다. 

















물론 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때로 극적이다. 심지어 막장 드라마 같은 일이 펼쳐지기도 한다. 누구나 정리되고 잔잔하고 건전한 삶을 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쉽게 수습하기 어려운 일들이 즐비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경우 또한 잘 없다. 생에서 펼쳐지는 일들의 가장 잔인한 점은 무작위적이고 때로 불합리하고 심지어 무의미할 때도 많다는 것이다. 미야모토 테루의 과거의 기억들은 그러나 편린처럼 흩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예술적인 경지, 생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이것이 소설가의 시선을 통과한 이야기라 그런 것인지 글쓰기를 위한 어떤 첨가나 삭제, 인위적인 의미 부여가 부연되어 일어난 일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조금 혼란스러웠다. 좋았는데 너무 좋아서 의심이 갔다고나 할까. 모든 걸 다 실제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는 얘기다.


이 의문은 후기에서 풀렸다. 미야모토 테루 자신이 시원하게 고백하고 있다. 


'소설로 쓰면 지나치게 소설 같아지는' 추억이나 경험 등의 소재를 쓰자고 마음 먹었다. <중략> 이 이상 쓰면 창작의 영역이다 싶은 아슬아슬한 분수령 언저리를 서성이며 에세이라는 장르를 뛰어넘겠다는 계획을 관찰할 수 있었다.

-미야모토 테루 <생의 실루엣>


그의 이야기들 모두를 과장된 자기 추억으로 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독자적인 아름다움과 공명하는 울림이 있다. 산만하게 흩어지거나 공허하지 않다. 공황장애로 고생하다 소설가가 된 이야기, 어머니가 실패한 결혼으로 남기고 간  아버지가 다른 형을 나이가 훌쩍 들어 몰래 찾아가 이름을 크게 부른 후 도망간 이야기, 미야모토 테루의 아버지가 일하는 중국집 종업원에게 속아 가짜 비취 반지를 사게 된 고모가 한번 더 크게 속게 되는 에피소드, 어린 시절 동네 대학생 형이 데려가 준 강에서 형이 구해준 여학생이 우연히 함꼐 찍힌 사진에 얽힌 이야기 등은 모두 생의 실루엣을 어른어른 비추며 설명하기 힘든 감동을 준다. 


우연의 교차와 직조, 그것을 현재 시점에서 뒤돌아보며 추출해 내는 의미들은 결국 생과 생명의 신비함과 그것의 줄기를 끊어내는 시간과 죽음의 무자비함에 느끼는 어떤 놀라움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것은 헤아리기 힘든 억겁의 시간 "삼천대천세계" 속 찰나에서 명멸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처연한 엘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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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한 연구 문지클래식 7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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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저기까지 아등바등 걸어가면 이 무거운 짐을 마침내 내려놓고 평지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때가 있다. 친정 엄마는 나의 그런 믿음을 야멸차게 정정했다. 아니야, 사는 건 산 넘어 산이야. 나는 엄마의 비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엄마의 개별적 삶이고 그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비롯된 거라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죽는 일은 그래,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내가 행하는 느끼는 모든 일들이 그 주어를 잃어버리는 풍경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적은 없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박완서 작가의 얘기처럼 내심 나는 나의 불멸을 믿었던 모양이다. 죽음은 바깥의 풍경이고 모든 무의미는 덜 노력하는 자의 불평처럼 때로 느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기억에서 제외하고는 도저히 연상할 수 없는 시간 틀 안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거기에서 사라져 버리는 경험은 대단히 실제적인 것이다. 분명 나는 그 사람의 팔을 잡고 때로 안고 걸었는데 이제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우리의 두 발이 단단한 대지에 붙박힌 것처럼 때로 느꼈다. 그런데 이제 그 애는 없다. 죽음은 이렇게 서서히 하나씩 나의 삶에 실감을 끼워 놓으며 나를 옥죈다. 죽음 없는 삶은 없다. 예외란 없다. 그리고 죽음이 항존하는 삶은 그 모순과 불합리와 부조리를 극복해 낼 재간이 없다. 어차피 모든 건 사라진다. 그런데 애쓴다. 애닳아 한다. 


박상륭 소설가의 <죽음의 한 연구>는 소설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것은 표면적 형태일 뿐이다. 이 안에는 작가가 표방한 제목처럼 엄청난 사변이 녹아 있는 '죽음의 한 연구'가 한 도보 고행자의 행로를 통해 형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기독교, 불교, 무교, 민간신앙의 경계를 해체하여 거듭나고 있다. 그것은 "붙매이지 않고 자꾸 변절하고, 자꾸 받아들이고, 자꾸 떠나는 일밖엔 없다구"다. 광대하고 심원하다. 작가의 이야기는 작가의 세계관을 벗어날 수 없다. 그가 깨달은 삶과 죽음의 비의는 이야기의 틈새마다 비어져 나온다.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 인물들의 움직임 속에 형식과 틀의 비극에 유형당한 우리의 비극적인 생의 서사가 담겨 있다. 이 이야기를 읽는 일은 그래서 나와 나의 삶과 나의 종말을 듣고 보는 일이다.





은유의 향연

아버지를 알지 못한 채 고을의 창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주인공 승려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스승의 죽음 이후로 수도를 위해 유리라는 곳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수도부 여인과 살림을 차렸으나 이마저 그를 그곳에 매이진 못하게 하고 연이어 읍으로 향한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샘터의 존자와 염주 스님을 살해하고 스승을 압살한다. 그러나 그것을 자백하고 그것에 합당한 형을 받기 위해 떠나왔던 유리로 귀환하여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대략의 줄거리다. 그러나 그가 행한 살인은 실제의 그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은유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탐욕과 편견과 아집을 끊어내는 것은 결국 자기 안의 편협한 자아를 과감히 파괴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자신의 행위가 가상의 것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일이라 항변하는 장면은 묘하게 아이러니한 느낌을 풍긴다. 작가는 우리의 해석의 틀마저 해체하려는 기지를 발휘한 것 같다. 이야기는 몽환적이고 비약적이어서 결국 전체가 주인공의 내면에서 일어난 하나의 은유에 불과했을지 모른다는 암시를 준다. 개아의 틀을 해체하고 인습과 습속, 종교의 경계도 허물고 마침내 '나'라는 자아의 허상까지 부수고 나면 도달할 그곳에 죽음이 당도해 와 있다는 결말은 거대한 풍자처럼 느껴진다. 


죽음에 대한 철학

박상륭은 죽음 앞에서의 삶과 생의 무의미를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 앞에서 삶을 폄하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쉬운 길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상의 덧없음을 결국 살아내며 체험해야 한다는 고행길을 택한다. 한없이 흔들리고 절망하며 걸어가는 노정의 끝의 깨달음을 삶의 책무로 자인한다. 불교에서의 업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몇 번이고 다시 살아서라도 우리는 그 업을 숙명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풀어내야 한다. "필멸의 윤회"는 우리의 "영생의 희원"과 충돌하지만 생이 삶다로우려면 그것은 숙명의 과제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주인공의 죽음은 그래서 허무한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성취적 결말로 자리매김한다. 박상륭 특유의 아름답고 서늘한 문장들은 어떤 예감처럼 그가 받아들이는 죽음을 결정체처럼 형상화한다. 그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위안이자 안식이다. 그 안은 공허하거나 사변적이지 않다.


<죽음의 한 연구>가 그 입구는 음험하고 지난해 보여도 그 출구로 나아가는 길이 매끄럽게 확장되는 것은 작가의 죽음 그 자체에 대한 탐구와 형상화보다 그것을 품고 있는 삶 그 자체에 대한 무한한 긍정의 탄탄한 기반을 딛고 선 이야기라는 데에 있다. 이야기가 자칫 현학적이고 사변적으로 흘렀을지 모를 한계는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그 교감과 세상의 현상에 기꺼이 동참하는 그 기꺼운 역동성으로  극복된다. 죽음의 무게가 신분에 따라 달리 매겨지는 것, 종교적 허위를 입은 탐욕 등의 간파는 예리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문장들은 단 하나도 어긋나거나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 자연과 생과 죽음을 채집하는 어휘들은 살아서 꿈틀대는 것처럼 신비롭게 느껴진다. 전라도의 방언들이 가지는 리듬감은 사람들의 말을 하나의 집단적인 제의 속 구슬픈 노래처럼 들리게 한다. 모두 다 정확히 하나하나 알아듣지 못해도 괜찮게 느껴질 정도로 어떤 경계나 틀을 넘어 마음으로 건너가는 흐름의 강 속에 이야기가 펼쳐진다. 놀라운 체험이다. 실패해도 넘어져도 우리가 걸어간 그 길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한다. 심지어 그것이 쇠락으로 향한 것일지라도 그것의 의미는 나름으로 충만하다. 


마지막 노래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 나도 기꺼이 그의 목소리에 동참한다.

그래, 다시 그 세상에 태어났으면 싶다. 왕후며 장상 마님들의 태 속도 말고, 나를 낳았던 그저 그런 어미, 그런 어떤 옌네 태 속에서 다시 태어났으면 싶고, 그래서 저 바닷가 모래가 번쩍이는 곳에서 모래집이나 쌓으며, 조수가 밀리고 밀려가는 것을 그저 망연히 지켜보고 앉았으면이나 싶다. 저 무염무애의 그러나 비천한 머슴아이, 학대와 멸시 속으로도 스스럼없이 걸을 수 있었던 사내아이. 바다의 음기로만 굳어진 조개 알을 씹어 비린내를 풍기며, 갈매기의 울음에 얼을 빼앗기던 별로 오래도 흐르지 않은 옛적에 있었던 아이, 그 아이가 다시 되었으면 싶다.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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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7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27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06-05 15: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좋은 주말 되세요~

blanca 2021-06-05 18:43   좋아요 1 | URL
초딩님 덕분에 알았네요. 감사합니다.^^

초딩 2021-06-05 19:3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가 알려드렸듯이 뿌듯합니다
:-) 3만원도 확인하세요 ㅋㅋㅋ
 

김경욱 소설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사실 별 기대가 없었는데 인터뷰가 너무 좋아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그가 신세대 소설가로 언론의 관심을 받았던 시기를 기억하고 있던 터라 벌써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었다는 데 놀라고 그러한 흐름에 뭔가 아주 예민하지만 더불어 담담하게 젖어들어가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가 그러한 나이들을 앞에 두고 있는 나로서도 참 와닿았다. 나이 드는 일을 예습하는 것이야 어불성설이겠지만 작가의 정제된 언어로 하는 이야기가 어떤 고갱이를 잘 포착해서 표현한 것 같아 두고두고 기억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야기.


우리가 자연을 비정하다고 생각하는데 자연이 하는 일에는 선악이 없잖아요. 인간적인 관점이지요. 압도적인 힘으로 문명을 위협할 때, 우리 자신이 조그마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일깨울 때 우리는 자연을 악으로 묘사하게 돼요. 그런데 자연에게는 그런 의도 자체가 없죠. 영원불멸한 순환, 그 거대하고 무정한 사이클 위의 한 점으로 자기 자신을 느끼는 건 굉장히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회적 존재로서 효능이 다하고 밀려나는 신세가 되더라도 자신의 존엄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고. 그렇기에 더더욱 존엄을 지켜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일 거에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문학이 아닌가 생각해요.

-Axt 036 김경욱 인터뷰 중















시간의 무정함은 내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해체시킨다. 나는 설사 주변부에 있었을지라도 거기에서 더 주변부로 밀려난다.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으로써 문학을 이야기하는 그의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 스스로가 이미 주류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면서도 자신의 일이 가지는 의미, 자신이 추구하는 것의 가치를 믿는 사람의 모습이 거인 같았다. 대단한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그 어떤 숙명적 흐름 속에 자신을 내맡기면서도 내가 지향하는 그 무엇을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 살면 살수록 그것이야말로 진짜임을 실감한다. 














이 책의 저자 함성호는 건축가이자 시인이다. 그의 내면을 통과한 풍경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사랑하는 시들, 그의 추억들과 교차하여 잔잔하고 은은한 풍경화를 이룬다. 마포, 왕십리, 종각, 압구정, 대학로, 삼청동, 신촌, 홍대, 필동 등 무심코 지나쳤던 지명들의 연원과 역사가 다채롭다. 특히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땅에 가해진 횡포의 뒤안길로 사라진 숱한 서사들에 대한 복원이 인상적이었다. 청계천이 옥계라 불리던 시절을 뒤로 하고 뚜껑을 덮어 인공으로 수돗물을 흐르게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이야기다. 종로에서 저자의 매형을 기다리다 꼬박 열두 시간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던 이야기도 일제시대의 적산가옥을 허물고 새집을 지어달라고 의뢰했던 노인에 대한 기억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단편 같다. 영추문 옆 사무실에서의 꿈들을 포기하고 나와야 했던 아픈 사연의 마감은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그래, 여기서 살았던 적이 있었지."라는 그의 이야기는 김경욱의 "자기 인생의 벨 에포크에 머물고 싶은 욕망"과도 만난다. 누구나에게 그런 곳이 있다. 내 인생의 벨 에포크는 언제였을까. 


언제나 열네 살일 것 같다. 읽었던 모든 활자가 실시간 영상처럼 떠오르던 시간들. 듣는 모든 음악이 콘서트장 현장에서처럼 생생하게 울리던 날들. 너와 나누는 모든 대화가 웃기고 슬프고 재미있고 무서웠던 시간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어졌던 시간대를 통과해 온 것은 축복이다. 그 시간은 통과하며 사라졌다. 그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 그랬던 적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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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5-20 2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경욱은 장강명이나 김영하에 가려 잘 안 알려진 작가는 아닌가 싶어요.
우리나라 유수한 문학상도 받았는데.
저도 몇년 전 우연한 기회 읽고 글 정말 잘 쓰는구나 해서 저의 졸저에도 실었는데.ㅋㅋ
그래서 저도 조만간 악스트 사 볼까 생각중입니다.
덕분에 빛을 좀 받지 않을까 기대하게도 됩니다.

blanca 2021-05-21 13:05   좋아요 1 | URL
아, 그랬군요. 저는 아마 단편은 읽은 적도 있는 것 같은데 기억에 없더라고요. 시대의 각광을 받으며 등장했다 서서히 퇴장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잠시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학생을 통해 배운다는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syo 2021-05-20 2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영하 김연수 선생님들보다 김경욱 선생님 작품을 먼저 접했었는데요, 당시 단편집 표지 사진 속에 어마어마한 꽃미남으로 한껏 당당했던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blanca 2021-05-21 13:06   좋아요 0 | URL
아, 소요님은 아시는군요. 저는 이미지로만 기억하고 있었고 작품은 사실 기억이 잘 안 나서... 주목을 받았던 것만 기억이 나요. 인터뷰 얘기 하나하나가 명문장 같더라고요. 글을 쓰는 사람은 모든 언어들이 내면에서 정제되어 나오는 건지...놀라웠어요.

transient-guest 2021-05-27 0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20대까지 읽은 책들은 지금도 머릿속에 장면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30대부터는 읽고 돌아서면 다 잊는 경우가 많네요.ㅎ
제가 아는 제 고향의 한국모습은 이제 거의 없어졌습니다. 도시에 가보면 산이 안 보일 정도로 빽빽하게 높은 빌딩으로 가득하고 그나마 워낙 개발이 빗겨간 몇 군데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추억속에 젖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blanca 2021-05-27 13:57   좋아요 1 | URL
그런데 사실 반 정도 산 건데 벌써 저도 자꾸 과거 얘기를 하게 돼서... 노인들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요. 현실과 미래에도 시선을 좀 던져야 하는데...자꾸 학창 시절도 떠오르고요. 잘 나이들고 늙어간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감합니다. 변화의 속도가 최근들어 더 빨라지고 있죠. 아직은 그래도 발 맞추려는 노력은 포기하지 않는 걸로 하려고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비에 큰 죄책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흥청망청 과소비를 했다는 건 아니고 책을 사고 무심코 테이크아웃 커피를 일회용컵에 담아 사먹는 일, 여러 물품들을 사고 추가로 쇼핑봉투를 받는 일, 음식물쓰레기를 새 비닐에 담아 버리는 행위 등을 종종 했다. 그러다 어떤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점차 이런 행위들에 수반되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죄책감이 불현듯 시작됐다. 무언가 내 일상이 지구에 쓰레기를 보태는 일에 기여하고 있다는 강력한 실감이 들며 어떻게든 그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줄이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따라왔다. 내가 욕망하고 소비하는 것들로만 일상이 채워진다면 나의 존재 자체가 이 지구에 결론적으로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엇보다 나의 아이들, 후손들이 우리가 당연히 누렸던 자연의 공기, 물, 풀, 나무, 자유를 우리가 단지 존재했던 것만으로 오염되고 훼손되고 심지어 박탈된 채 경험해야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할 정도로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의 저자 로빈 월 키머러는 아메리카 원주민 포타와토미족 출신의 식물생태학자이다. 향모는 그들의 언어로 윙가슈크라고 부르며 어머니 대지님의 머리카락이라는 뜻을 지닌 식물이다. "향모를 땋으며"라는 제목은 과학과 영성과 이야기가 서로 얽히는 과정의 은유인 셈이다. 그들 사이에 구비전승되는 창조 이야기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는 그녀의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대지와 자연에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시작했던 아침 제의의 이야기, 이웃 할머니의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가 키머러의 어머니와 함께 성탄절 파티를 열어줬던 추억, 의대생들을 데리고 떠났던 학술여행에서 나눈 교감, 점박이도룡농 길가 구출 작전 등 자연과 호혜적으로 주고받는 감사의 여정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그녀의 "유정성의 문법"은 부족의 언어와 세계관의 렌즈를 통과한 자연이 어떻게 기존의 경직되고 진부한 명명의 틀을 깨고 빛나는 실재에 가닿아 우리의 딱딱한 가슴을 녹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범이다. 이는 무엇보다 우리 내면의 어두운 심연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방치되고 조장되는 욕망의 폭주 자체에 대한 진지하고 깊이 있는 천착에서 비롯된 혜안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녀의 언어는 공허하지 않고 사변적이지 않다. 


옛 가르침들은 모든 사람에게 윈디고적 본성이 있으며-우리가 스스로의 탐욕스러운 성격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간파했다. 스튜어트 킹 같은 아니시나베 연장자들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이해하려면 늘 두 얼굴-삶의 밝은 측면과 어두운 측면-을 염두에 두라'라고 상기키신 것은 이 때문이다. 어둠을 직시하고 그 힘을 인정하되 양분을 주지 말 것.

-pp.447 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 



우리의 생존이 욕망을 떠나 가능할 수 있을까? 그 욕망이 항상 적절하게 이성적으로 제어될 수 있을까? 키머러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부족조차 우리 인간에게 어두운 본성이 있음을 그리고 그것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한 예리한 자각이 있다. 그러나 그것에 전적으로 함몰되고 집착할 때의 그 추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고 우리가 훼손하고 남용해도 여전히 우리를 맞아주는 대지와 그 대지에 흐르는 물과 공기와 하늘과 생명들을 존중하고 어떤 미안함과 고마움을 잊지 않을 때 거기에서부터 우리는 달라질 수 있다고 그녀는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독자와 공명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마다 우리 각자의 생존이 배출해내는 그 쓰레기들이 모여 산을 이루는 모습에 가슴이 무거워진다. 키머러의 어머니는 늘 "올 때보다 갈 때 더 좋은 곳이 되게 하렴."이라고 그녀에게 말하곤 했다. 과연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영원한 숙제이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숨쉬고 먹고 노래할 수 있게 해 준 대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유의미하다고 믿고 싶다. 하나를 더 가지고 싶을 때 무심코 하나를 버리게 될 때 잠시 멈추어서 내 앞과 뒤를 돌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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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5-19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쓰레기 문제를 보면 안타깝더라구요. 특히 코로나 때문에 그런지 배달음식에 플라스틱이 너무 많더라구요. 가능하면 재활용품 잘 처리하고 플라스틱은 씻어서 버리려고 하고 장바구니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도 정책적으로 어떻게 조치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ㅜㅜ

blanca 2021-05-20 12:33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래요. 특히 배달음식.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들면서도 또 다 해먹을 수도 식당을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으니까요. 요새 자꾸 지구의 수명이 유한하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코로나도 그렇고 인간이 무한정 쓰고 한계 없이 누릴 수 있다는 환각이 무참이 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 무언가 확 다른 시각, 자세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아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읽다 만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 완독한 경우. 몇 년도 전에 나는 이북으로 이 책을 샀지만 초반부를 좀 읽다 덮어버렸다. 재회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김금희 작가를 좋아하지만 어쩐지 좀 지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초반부에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이야기는 이제는 참고 읽지 않겠다는 좀 묘한 결심을 한 터라 그렇게 되어버렸다. 즐겨 듣던 <서담서담>에서 <경애의 마음>을 다루었고 언젠가 다시 제대로 읽어볼까 고민만 하다 드디어 다시 읽기 시작하여 완독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애의 마음>은 참으로 남다른 이야기구나, 다시 읽어 마땅했던 사연이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떤 이야기는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도달하여 작가의 언어로 다시 우리에게 온 것 같은 신비로운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건 이야기의 당위성과 보편성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이 이야기는 그러한 이야기다.


반도미싱 팀장대리인 서른일곱살의 남자 공상수에게는 표면적으로 뒷배가 되어 줄 수 있는 든든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전혀 친하지 않은 정치인 아버지가 있다. 공상수에게 아버지는 대립하는 가치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삶의 한 요소다. 이 "융통성 없고 눈치 없는 인간"이 조직에서 그 덕에 쫓겨나지도 않고 호칭도 애매한 팀장대리로 8년 차 총무부 직원 박경애를 유일한 팀원으로 받아들이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경애는 공공연히 담배를 폈고 회사에서 농성대에 끼어 삭발을 한 전력이 있다. 그 둘은 한 마디로 조직에서 매우 튀는 세상과 불화하는 존재라는 공통점과 인천호프집화재사건 때 죽은 은총이라는 친구를 매개로 한 접점이 있다. 작가는 자본주의의 효율성에 반하는 두 존재가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과 자본주의의 효율성의 광기어린 집착이 빚은 참화의 중심에서의 친구의 상실이라는 이야기를 불러와 시종일관 우리가 간직하지만 어쩐지 드러내어 놓지 못했던 가장 우리다운 마음들에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상수가 속해 있는 세계란 터무니없이 복잡하고 감정적이고 불안정한, 측량되지 않고 가시적이지 않은 것들에 열을 올리고 헛수고가 분명할 일에 봉사하는 백일몽에 빠진 인간들이 있는 세계에 불과하겠지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김금희 <경애의 마음>


누구나 이런 세계에 살았던 경험이 있다. 전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누군가는 이런 세계에 푹 잠겨 있고 어떤 이는 자신이 이 세계에서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여기지만 그곳으로의 귀환을 꿈꾼다. 비효율적인 곳, 쓸모없음이 판치는 곳, 그럼에도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영토. 공상수가 끝내 포기하지 않는 그곳에서 마침내 경애와 포옹할 때 나는 작가의 마음을 짐작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은 채 순하게 살 수 있는 순간은 삶에서 언제 찾아올까."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순간을 포기하지 않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 둘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거대한 세상을 대상으로 싸우기 위해 손을 잡고 그리고 넘어지고 그럼에도 다시 손을 잡는 이야기. 그리고 그러한 상수와 경애를 알아봐주는 주변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을 잠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는 위안을 준다. 현실을 반영하며 현실에 매몰되지 않는 것, 삶의 모순을 드러내며 그 긍정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 모든 이야기가 이야기로서 끝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쓰고 읽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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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5-11 1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드물지만 그런 경우가 있죠.
그럼 어찌나 안도하게 되는지.
하마터면 안 읽을 뻔했잖아요.
그 책도 되게 기뻤을 거예요.ㅋ

blanca 2021-05-12 10:06   좋아요 1 | URL
이런 경우 왠지 특히 더 뿌듯해지는 것 같아요. 책값도 아끼고요.^^

레삭매냐 2021-05-12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빌려서 읽다가
말았는지 어쨌는지 잘 기억이...

어쨌든 다 읽지 못한 것으로.

blanca 2021-05-12 10:16   좋아요 0 | URL
그죠. 빌려 읽으면 완독이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저도 읽다 말다 그러다 이번에 완독했어요. 지금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태반이 읽다 말다 반납하게 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