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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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겪고 어떤 느낌을 가질 때 불현듯 드는 생각이 있다. 혹시 나만 이런 느낌을 갖는 건 아닐까? 나는 비정상일까? 아웃사이더인가? 그러다 어느 순간 지극히 정상적이고 세상에 속해 있다는 잠시의 환각이 지나가는 시기가 있긴 하다. 사람들을 만나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공감하고 그들이 내게 기대하는 역할을 무난히 수행하고 때로는 도움을 주고받고 그러면서 시간이 간다. 그러나 다시 이러한 고독과 고립의 순간은 반드시 돌아온다. 침잠과 우울의 시간이 온다. 해결되지 못했던 질문들 또한 다시 회귀한다. 그런 상태를 오고가며 삶이 간다. 


캐럴라인 냅의 에세이는 탁월하다. 모호하고 혼란스러웠던 감정들이 명확한 그녀의 언어로 제대로 기술된다. 내가 미처 표현 못했던 어두운 심연을 해체하고 너무 찰나로 지나가 차마 포착하기 힘들었던 단상들을 단정하게 채집하여 다시 돌려준다. 누구나 그녀의 글을 읽고 이 한때 엄청난 알콜 중독자였던 거식증이 있었던 명민한 작가의 얘기에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일 수밖에 없는 챕터를 만나게 된다. 


내 경우,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고독과 고립의 경계선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사회적 기술은 근육과도 같아서 위축될 수 있고 내가 경험한 바로도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사람과의 접촉을 유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 

p.48


수줍음을 잘 타고 상류증 가정에서 자라 높은 기대치를 받고 자란 우등생 소녀는 삼십 대의 반려견을 키우며 고독과 고립의 경계선을 곱씹는 작가로 자라난다. 부모를 연달아 잃게 된 상실의 체험 또한 절절하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된다. 그 중독에서 헤어나온 자의 성찰은 용기 있고 심오하다. 어떤 종류의 중독이든 그것은 결국 고통을 정면으로 맞는 그 감각을 마비시켜 그것을 유예시킴으로써 결국 적절한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통찰은 놀랍다. 술이든 담배든 약물이든 결국 그것은 당면한 고통을 회피하는 몸짓과 닿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특히 부모의 죽음을 생각해보는 챕터는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들을 들킨 듯 호소력이 있었다. 요 근래 나는 약해진 부모님을 느끼며 적잖은 걱정과 안타까움과 어떤 부담을 느끼며 남몰래 죄책감을 느낄 때가 있다. 캐럴라인 냅은 바로 이 시기가 "부모님 은혜의 시기"가 이제 끝난 지점이라고 명쾌하게 진단한다.


나와 같은 입장이 된 것을 환영한다. 당신이 그동안 누리던 '부모님 은혜의 시기'가 이제 끝난 것이다. 부모님 은혜의 시기란 당신이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부모를 걱정할 만큼은 나이가 들지 않은 시기, 그 짧은 기간을 뜻한다.

p.119

그 은혜의 시기가 끝나면 "당신은 겁난다"고 그녀는 겁을 준다. 맞다. "당신은 기분이 나빠진다"고 덧붙인다. 우리가 나이 들수록 "삶이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니라 쉬워진다는 신화를 믿으며 자라는데"라는 얘기는 왜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삶이 더 어렵게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들이민다. 우리는 반대의 신화를 믿으며 성장해서 그것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푸념한다. 왜 갈수록 더 힘들지? 그렇다면 갈수록 더 쉬워져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깔고 하는 얘기다. 왜 삶은 갈수록 더 쉬워져야 하는가? 어려워지는 것, 간단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지도교수와의 일화를 통해 이야기하는 여성주의에 대한 이야기의 설득력은 농밀하다. 암암리에 권력을 통해 그녀에게 성추행을 저지르는 교수를 그 현장에서 거부할 수 없었던 그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단죄했던 수많은 비슷한 상황에서의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웅변한다. 바로 거부하고 왜 뛰어나오지 않았는가? 그것은 어떤 힘의 역학 구도 안에서 쉽게 단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거부하지 못하고 그 교수의 역겨운 행동들을 지나갔던 과거를 통해 이 미묘한 성폭력의 복잡다단한 대응의 어려움을 얘기하며 문제의 그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실체에 다가선다.


우리 문화는 육체적인 측면이 아닌 측면에서도 자신에게 만족하는 여자아이, 자신을 한 온전한 인간으로서 본질적으로 귀한 존재라고 느끼는 여자아이를 길러내는 데 능하지 못하다.

p.250


<명랑한 은둔자>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글들이 많지만 이것을 읽는다고 절대 우울해지지는 않을 책이다. 캐럴라인 냅에게는 어떤 결기, 용기, 진실성이 가지는 역동성이 절로 전염되는 마력이 글 전체에 포진하고 있으니까. 지금 아픈 사람도 특히나 중독에 빠져 자신 앞에 높인 고통을 차마 직시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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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9-17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블랑까님의 별 다섯이라니_ 갈등하고 있었는데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다음주에 지르려구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지르고 싶지만_ 인용구도 가슴 깊이 닿아요.

blanca 2020-09-17 13:41   좋아요 0 | URL
수연님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이 작가는 <드링킹>이 최고라고 하던데 저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어요. 단명이슬퍼요.

잘잘라 2020-09-17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 님 서재만 오면 주문할 일이 생겨요. (주문하고 싶어서 재빨리 달려왔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주문 중독자로서 이 책은 반드시 꼭 강력하게! 빨리 주문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lanca 2020-09-17 13:41   좋아요 0 | URL
잘잘라님 ㅋㅋ 저는 여기서 선포합니다. 시월달 책 주문은 없다고. 이렇게라도 적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2020-09-17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7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7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7 1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0-09-17 17: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전에 드링킹 앞에 조금 읽고 포기했거든요. 저는 읽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 글을 보니 캐럴라인 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책으로 시작해야겠어요. 저 역시 부모님과 저 사이의 은혜로운 시기는 끝났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부분이 제일 와닿네요, 블랑카님.

blanca 2020-09-17 18:0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저도 솔직히 알코올 중독 내용이 주인 <드링킹> 읽을 자신은 없어요. 분량도 그렇고요. 두 권 사이에서 갈등하다 신간을 택한 거예요. 아, ‘부모님 은혜의 시기‘는 진짜 너무너무너무 좋아서 읽다 일어났다니까요. 요즘 드는 많은 생각들을 이미 냅이 다 먼저 겪고 훨씬 정확하고 정교하게 표현해놓았더라고요.

단발머리 2020-09-22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모님 은혜의 시기‘ 너무 공감되네요. 저의 생각과 불안을 글로 만나기가 두려울 정도에요. 아까 오후에도 친구랑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그래도, 용기내서 함 읽어볼까요? @@

blanca 2020-09-23 08:54   좋아요 0 | URL
에세이라는 게 흔히 작가가 좀 비대화되는 경향이 있잖아요. 자기의 특수성을 표현하려다 보면 갇히는 한계인 것 같은데 이 작가는 아주 독특하게 자기를 표현하면서도 어마어마한 공감을 얻어내는 힘이 있어요. 이건 내 생각인데! 이런 순간이 너무 많았어요.
 

산문과 소설을 둘 다 잘 쓰는 경우는 잘 없다고 생각했는데 츠바이크는 이러한 개인적인 믿음을 완전히 박살 낸 작가다. 그가 역사적 인물을 테마로 구축한 이야기들의 생생함은 물론 탄복할 정도였다. 심지어 마리 앙투네와트가 단두대에서 사라져 갈 때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 정도니까. 대책없는 발자크의 이야기는 또 어떻고. 이런 무모한 인물들도 그의 문장으로는 설득력을 친밀감을 매력을 얻는다. 그런데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은 훨씬 후에야 읽게 되었다. 별 기대 없이. 솔직히 조금 지루할 거라는 예상과 함께.

















심리 소설이라는 평가와 함께 다소 나름의 장광설을 늘어놓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이 한 청년의 선의에서 출발한 나약한 연민의 파국의 이야기는 흡인력이 대단하다.  작품성은 차치하고 재미만으로 도저히 책을 내려놓을 수 없을 지경이다. 문장이 휘몰아치는데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소설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접경지역의 군사 주둔지다. 가난한 청년 호프밀러 소위가 지역의 유지의 딸 에디트를 만나서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며 이야기는 펼쳐진다. 장애를 가진 에디트에 대한 연민과 청년의 공명심과 무모함이 섞여 빚어내는 갈등 상황과 그 상황에서의 내면의 심리 묘사의 날카로움이 대단하다. 우리가 흔히 가치 판단의 영역에서 열외시키는 타인에 대한 사소한 연민, 나약함, 허영심에 대한 분석의 설득력에 저마다 자신의 어리석고 못난 허식을 들킨 기분이 들 정도다.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이 가진 것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허점과 나약함을 드라마틱하고 우연적인 사건으로 드러내는 솜씨가 경이롭다. 나중에는 호프밀러 소위를 끊임없이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에디트가 너무 미워 견디기 힘들 지경이다. 자신의 약점을 상대의 연민과 죄책감의 멍에로 이용하는 일종의 역학이 독자에게는 그대로 노출되며 거미줄의 사슬에 얽혀 옴쭉달싹 못하는 호프밀러의 모습에 스스로를 투사하게 되는 것이다. 


호프밀러가 결국 도망친 곳에 타협한 지점에 우리 모두는 낯익은 풍경을 발견하다. 하지만 끝내 속일 수 없는 그 눈은 우리 내면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도. 


나는 이 세상에서 나쁜 일이 발생하는 까닭은 사악함이나 잔인함이 아닌 나약함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p.246


츠바이크의 미덕은 인간의 복합적인 심리의 다층구조를 탐사한다는 점이다. 전적으로 사악하거나 전적으로 선한 사람은 없다는 통찰은 결국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모든 사악하거나 나약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 또한 츠바이크 특유의 도덕적 염결성의 표현이다. 


결국 그가 전쟁 앞에서 택한 죽음은 그러한 인간에 대한 그의 이해의 절망의 마침표 같아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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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16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서 나쁜 일이 발생하는 까닭이 어떤 깨우침과 반성을 유발하기 위해서인가, 하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blanca 2020-09-17 08:24   좋아요 1 | URL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지나가고나서야 아, 이건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여기에서 난 이걸 배워야 해, 뭐 이런 비슷한 느낌이요.
 

존슨 할아버지의 통나무집에 소녀는 잡지책 낱장을 벽에 이어 붙였다. 단 순서대로가 아니어서 할아버지가 스토리를 이어 이해하려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거나 다음 날에 발견한 그 다음 장을 이어붙여 수정해서 받아들여야 했다. 루시아 벌린의 의도였다. 그녀의 첫 문학 수업은 이토록 창의적이고 사랑스러웠다. 이 대목이 너무 좋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아버지와 함께 방문하고곤 했던 숲 속 외딴 오두막의 고독한 노인을 위한 소녀의 재기 어린 시도가 너무 귀엽고 참신했다. 





분홍색 슬립을 입고 침대에 드러누워 추리소설을 읽는 엄마를 뒀던 루시아 벌린은 그 후로 다사다난한 삶을 살게 된다. 여러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그 사이에 아들 넷을 둔 싱글맘이 되어 먹고 살기 위하여 온갖 일을 전전해야 했다. <웰컴 홈>은 이러한 삶을 스스로 기록한 부분과 그녀를 찍은 사진들, 그리고 그녀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녀 자신이 주로 끊임없이 이동했던 장소를 전면으로 내세우며 회고하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는 문장들, 사건들의 얼개가 마치 미완성된 아름다운 소설처럼 흥미롭다. 하지만 그녀의 때이른 죽음으로 그녀의 복기된 삶은 마침표를 잃는다. 갑자기 뚝 끊기는 마지막이 그래서 참 아쉽다. 남편의 친구와 아이들을 데리고 사랑의 도피 행각을 하고 멕시코에서 원주민들과 자연과 어우러지는 삶을 사는 등 삶의 서사의 폭이 크다. 


사진 속 그녀의 모습은 참 아름답다. 그녀의 미모는 그녀의 작품을 출판하는 데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다. 성추행과 성희롱으로 얼룩진 소위 출판계 인사들의 행태에 그녀는 역겨움을 느낀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어머니조차 딸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다. 가족과 주변인들, 생활고가 끼어들어 글쓰기는 간헐적으로만 지속된다. 그럼에도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네 아들들은 엄마의 곁에 남아 엄마의 글의 독자가 된다. 이 책도 그런 아들의 손에서 나온다. 어머니의 글을 읽고 어머니의 글을 정리하고 그녀의 임종을 지켰던 아들. 이것이 그녀의 비극적 삶의 위안이다. 


그녀가 편지에 인용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서 나온 문구.


"집은 내가 달리 갈 곳이 없을때 나를 받아줘야 하는 곳이다."


이 책의 테마가 되었다. 떠돌아다녔던 그녀가 결국 가장 돌아가고 싶어했던 그곳은 바로 '집'이다. 때로 자신을 자학하고 자신의 글을 폄하했던 시간은 그녀의 사후 남긴 작품들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쓸려나간다. 그녀가 알지 못했던 자신의 영광이 아이러니하다. 그녀가 그 틈새에서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읽을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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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14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쾅 쾅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와 비슷한 문장을 어느 책에서 읽은 게 생각나네요.

blanca 2020-09-15 08:19   좋아요 1 | URL
아, 그렇네요. ˝쾅 쾅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집˝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scott 2020-09-17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회롱과 성추행이 자행되었던 출판계라니,,,
루시아벌린 작품들은 막연히 카슨 매컬러스와 분위기가 비슷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죽기전 마지막 까지 글쓰기를 포기 하지 않았다는건 독자들에게 결국 살아간다는것이 어떤의미 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것 같네요.

blanca 2020-09-18 08:14   좋아요 1 | URL
자신의 어린 시절을 연대기적으로 묘사한 글이 마치 성장소설 같아요. 갑자기 죽음을 앞두고 회상이 딱 끊겨 아쉬웠지만요.
 

커피를 처음 마신 게 언제지? 아마 재수 시절 교실 앞 자판기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아, 이후로 난 부단히 믹스커피를 마셔왔다. 출장 다닐 때는 하루에 네 잔도 마셨다. 잠을 깨려고 기분이 나빠서 혹은 기분이 좋아서 친구를 만나서, 심지어를 아이를 낳은 날  임신 기간 참았던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 바로 커피를 들이켰다. 그리고 대체로 빈 속에 잠을 깨고자 바로 마시곤 했다. 


결과는 당연히 만성 위염이다. 그리고 지난 이 주에 걸쳐 나는 카페인의 노예에서 탈출하기 위해 커피를 완전히 끊었다. 첫날은 충격적인 금단 증상이 덮쳤다. 두통이 두통이. 심지어 근육통에 입에 신 물까지 올라오고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삼사일은 보통 의지로는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다. 커피 끊기 프로젝트에 돌입한 이들을 찾아 온라인을 순례하니 많은 이들이 그 과정을 겪으며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보통 일주가 고비인 듯. 증상도 거의 비슷했다. 커피를 끊기 위해 두통약을 먹어야 할 지경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물으면 무언가의 노예가 되기 싫다,는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단지 속이 쓰려서다. 


커피를 끊으면 속은 편안해진다. 반대급부는 우울감이다. 낙이 없다. 모닝커피를 위해 기상하던 나로서는 일어나면 맛없는 차가 기다리고 있다. 종일 다운되어 있다. 에너지도 없다. 두통은 덤이다. 숙면은 기대 이상이다. 단 한번도 안 깬다. 불면증에 커피 끊기는 반드시 권장되어야 한다는 앎이다. 그런데 이런 게 사는 건가? 싶다. 누군가 아무리 힘들어도 라떼를 마실 수 있으면 견딜 수 있다,고 말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나는 그럴 수 없으니...


심지어 지난 주말엔 나를 약올리듯 "아메리카노, 좋아, 좋아"라는 노래까지 나오더라. 좀 웃긴 얘기지만 누군가 커피 얘기를 쓰거나,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 부러워하게 된다. 몸이 아주 건강해서 커피를 아무리 마셔도 속이 쓰리지 않은 사람은 정말 행복한 줄 알아야 한다. 

















박경리는 천상 이야기꾼이다. 문장을 쓰기 위해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를 위하여 언어를 끌고 오는 사람이다. 서사력이 대단하다. 김약국의 네 딸의 처절한 삶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독자적으로 자신의 삶을 끌고 갈 수 없는 그 시대 여성들의 비참한 이야기가 통영의 풍경과 함께 모자이크처럼 직조되어 있다. 사랑을 선택할 수 없고 자신의 진로를 개척할 수 없는 시대, 주관적인 선택이 심판거리가 되는 삶의 무게가 지금 여기에서의 여성들의 삶과 완전 대척점에 선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빌 헤이스는 올리버 색스의 만년의 반려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자신이 작가이자 사진 작가로 이미 입지를 굳힌 사람이다. 킨들로 읽은 그의 글도 올리버 색스 만큼 좋다. 코로나 이후의 뉴욕의 달라진 풍경을 자신이 찍은 사진과 함께 이야기한다. 벌써 환갑이 가까워온다니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전세계적으로 함께 겪고 있는 거리두기의 풍경에 공감이 많이 갔다. 중간 중간 올리버 색스가 했던 이야기를 실어 놓았는데 반갑다. 그의 애도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오늘 생일 기념으로 바닐라 라떼를 나에게 줬다. ㅋㅋ 아, 카페인의 위력은 놀랍다. 세상이 갑자기 아름다워 보이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이 잘 견뎌왔다,는 자뻑에 취한다. 가을 공기가 바삭거리고. 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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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0-09-04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마시다가 마시면 진짜 훅 가는 건 술만 그런 것이 아닌가 봅니다 ㅎ 저는 매일 커피를 두어 잔씩 마시지만 블랙으로 마셔서 그런지 안 마셔도 심한 금단증상은 없더라고요. 건강하게 잘 지내시고 가끔 라떼의 기쁨을 느낄 수 있기를 ㅎㅎ

blanca 2020-09-04 16:10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번에 커피가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메리카노는 속이 안 쓰린데 오히려 라떼가 그래요. 주구장창 마시다가 탈이 났답니다. 우울하네요.

수이 2020-09-04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까님 생일이군요! 축하드려요! 처녀자리 블랑까님! 아 이러니까 별자리 신봉자 같다;;;; 박경리 선생님 이야기 어제 친구랑 했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우연히 또 마주하니 좋아서 주절거리네요. 바삭바삭 가을 공기 만끽하시기를 바랍니다!

blanca 2020-09-04 16:11   좋아요 0 | URL
아, 박경리 소설 너무 좋죠! 그런데 의외로 <토지> 말고 단행본은 거의 안 내셨더라고요. <토지>를 또 시작하기는 엄두가 안 나고 <김약국의 딸들> 정도 분량의 책을 읽고 싶은데 못 찾겠어요. 아, 오늘 날씨도 정말 너무 좋아요.

다락방 2020-09-04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합니다, 블랑카님!!
블랑카님 처녀자리시군요. 후훗.


[김약국의 딸들]은 정말 재미있죠? 토지도 그랬지만 김약국의 딸들에서도 박경리는 캐릭터를 정말 잘 잡고 잘 살려내는 것 같아요. 이야기도 잘 만들고 끌어가지만 인물들도 생생히 살아있어요. 아, 저도 박경리 또 읽고 싶네요.



blanca 2020-09-04 16:1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감사해요. 이젠 중반으로--;; 매일매일 무언가 청춘에서 멀어진다는 게 팍팍 실감이 나요. 그죠!!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끝나는 게 너무 아쉬웠어요. 세상에 재미있는 책은 왜 이리 많나요. 노안 오기 전에 최선을 다해 많이 읽어두려고요.

stella.K 2020-09-04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피에 건강에 좋은 성분이 있어서 꼭 끊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이미 끊은 게 확실하다면 굳이 다시 마실 필요는 없지만 .
전 작년부터 하루에 두 잔 마시고 있습니다.
것도 나이 드니까 세 잔 마시기가 부담스럽더라구요.
물론 아주 가끔 세 잔 마실 때도 있지만.

전 제목이 그래서 브랑카님의 ‘나 때는 말야.‘ 토크인 줄 알았더니 아니네요 하하하.
생일 축하합니다.^^

blanca 2020-09-04 16:16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때문에 빵 터졌어요. ㅋㅋㅋ ‘나 때는 말야‘ 완전 기발한데요? 아, 저는 요새 한 잔도 잘 안 받아서 정말 우울해요. 커피 마시는 낙이 너무 컸는데. 두 잔이 사실 제일 기분 좋은데 말이에요. 오전에 한 잔, 점심 먹고 한 잔, 이렇게요. 축하 감사해요^^

단발머리 2020-09-05 0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커피에 대한 이런 멋진 헌사라니!!
전 삼일에 두 잔 정도 마시는데요. 요즘에 커피 마실 시간이 지나면 두통이, 정말 말할 수 없는 편두통이 찾아와서 이유를 몰랐다가 최근에서야 그 이유를 찾아냈습니다 ㅠㅠ 커피 때문이더라구요. 커피 마실 시간이 지나서요. 커피가 없으면 낙이 없죠. 전 기다리는게 커피 뿐이라, 너무 써서 아메리카노도 마시지 못하면서 말이지요. 커피를 끊고 계신(?) 블랑카님께 위로를 전합니다.

생일 축하드려요!!! 어제 왔어야 했는데, 이른 아침이니 어제 축하로 처리해주세요^^
오늘도 좋은 날 되시구요. 얼른 괜찮아지셔서 하루 딱! 한 잔 라떼가 가능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blanca 2020-09-06 10:49   좋아요 0 | URL
삼일에 두 잔이라 함은 하루는 안 마실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요? ^^;; 아, 저 벌써 근 2주 되어 가는데요. 그래도 여전히 카페인이 몸에 남아 있나봐요. 카페인이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게 6주나 걸린다니...

일주일에 한 번 라떼를 마시기로 했는데 잘 될지는 (긁적긁적) 모르겠습니다. 축하 감사드려요.^^
 

대학교 친구를 잃고 느낀 상실감을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었다. 슬프다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 친구 없이 나의 대학 생활을 얘기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마음 아팠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내 옆에 살며시 다가와 앉던 모습, 학교 앞 주점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 다들 얼굴이 빨간 고구마처럼 익어 신이 나서 목소리가 커지니 주인이 이제 그만들 마시라고 말렸던 일들. 좋아했던 남자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다 나의 무모함에 제동을 걸었던 시간들. 그리고 회사 앞에 와서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던 시간. 정말 크고 예뻤던 눈. 그 아이만 떠오르는 게 아니라 그 아이와 함께 했던 나의 청춘의 시간들이 자꾸 돌아와 마음을 찌르면 수시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나는 친구만 잃은 게 아니라 그 친구와 함께 보냈던 나의 시간을 송두리째 상실한 느낌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 아픈 마음을 자꾸 얘기해도 전적으로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게 더 슬펐다. 친구를 잃은 사람은 아직 없는 나이였다. 나는 때로 그런 사람들이 부럽다고 표현했다. 


고인만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청년기와 유년 시절이 고인과 더불어 사라져버린 것이다.

-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중

 














나는 비로소 나의 모호한 고통을 표현할 언어를 찾았다. 그건 나의 한 조각을 상실한 것과 같다는 것을 보부아르는 이야기한다. 이제 나의 친구가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이 세상에 없다. 친구가 생각했던 기억했던 나는 친구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다. 


보부아르가 육십대가 되어 고찰한 노년의 모습은 참으로 황량하다. 상실과 무너짐의 풍경은 수많은 예시로 충만하다. 아무도 공론화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 연령의 지대를 보부아르는 지독하게 탐사한다.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내면적으로 그 유한한 미래의 한계 속에서 상실과 허무의 풍경을 목도하는 노년에 대한 묘사는 적나라하다. 그래서 그런 종착점을 안다고 하면 우리의 지금은 대체 무슨 의미와 합목적성을 가질까. 결국 퇴락하고 허물어질텐데 우리의 현존은 어떤 가치를 지닐 것인가, 라고 반문한다면 보부아르에게도 명쾌한 답은 없다. 


자기의 행위를 '괄호 안에 넣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진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진정성이란 거짓보다 더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진정성에 도달하게 되면 그때는 단지 그 사실을 기뻐할 일밖에 없다. 나이가 가져다주는 가장 가치 있은 바로 이것이다. 나이는 맹목적인 숭배와 환상들을 제거해준다. <중략> 나는 오래전부터 실존하는 인간에게 있어 존재의 탐구란 쓸데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존재의 탐구'란 쓸데없는 일" , 참 허무한 얘기지만 왠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녀는 심지어 노년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기 보다 현실에 충실하라는 얘기까지 덧붙인다. 그녀 자신이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만들어 낸 노년의 연구가 삶 그 자체를 향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인 것인지 독자를 위한 배려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천하의 프로이트도 처칠도 말년에는 실망스럽게 무너졌다. 겁을 냈고 울었고 폭발했고 이기적이었다. 훌륭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남들보다 열등해서도 너무 우수해서도 아닌 노년이라는 죽음 앞의 삶이 가지는 본질적인 존재론적인 그 모순과 결함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들을 추앙했던 대다수의 사람들도 이미 그들이 노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물화시켰다. 이 시선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보부아르는 그 노년의 존재적인 차원을 예리하게 간파한다. 


그녀의 <노년>에는 군데군데 사르트르가 잠입한다. 홀로 쓴 책이지만 사르트르가 여러번 왠지 다정하게 인용된다. 그리고 나는 내용을 떠나 그녀의 그런 행위가 마치 사르트르와의 사랑의 표현인 것 같아 싫지 않았다. 그 둘의 계약 결혼 관계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적어도 학문적 동지로서 그 둘의 소통은 남달랐던 것 같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대단한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찾지 못했던 그 희미하고 모호했던 것들이 좀 더 명료해지는 느낌을 갖는 것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아, 그랬던 거구나, 싶은 마음은 중독성이 있다. 너무 깊이 많은 것들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고 알 수도 없기에. 어쩌면 더 우울해지는 것도 같다.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가고 기억이 희미해지면 다른 형태의 위로와 안도를 받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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